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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생각해 봤는데. 불나방 말이야. 그거.”
이정인이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남자를 발끝으로 가리켰다.
“얘는 어때? 적극 추천하마.”
자신의 주먹에 제대로 맞고도 몇 번이나 일어서는 집념을 높이 사 한 말이었다. 이정인이 고개만 돌려 진지한 눈빛으로 의중을 떠보자 그가 입술 끝을 끌어당겼다.
“싫습니다.”
깔끔한 거절에 화낼 기운도 없었다. 왜, 하필 나일까. 이렇게까지 나를 압박하면서 불나방이 되라는 이유가 뭘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점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정인 씨도 알다시피 노루기업이라면 지레 겁부터 먹습니다. 보복을 두려워하는 거죠.”
“그걸 알면서도 의뢰를 하려는 하 전무도 참, 못됐네.”
“누군간 해야 하니까요. 모두에게 똑같은 제안을 했죠. 그때, 그들 표정이 어땠을까요.”
하우인의 눈동자가 허공에 방치됐다.
그때 일을 떠올리는 듯 그의 동공이 짜증을 내비쳤다. 그 눈빛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무섭다고 소리 지르는 사람 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 반.”
좁아진 동공이 다시 크게 확장되며 시선이 이정인의 얼굴에 꽂혔다.
“유일하게 겁먹지 않은 사람은 이정인 씨, 당신뿐입니다.”
“어, 그래?”
무심히 대꾸한 이정인은 자신의 팔을 내려다봤다. 지끈거리며 열을 내뿜던 살이 부어오르자 근처 담벼락에 어깨를 기대며 숨을 골랐다.
“그런데 어쩌지? 나 지금 하 전무 말에 겁먹은 것 같은데.”
저벅저벅, 구두 굽이 땅을 밟는 소리가 몇 번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멈춰 선 그가 손을 뻗었다. 그는 고개를 담벼락에 기대고 있던 이정인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올렸다.
“정말, 겁먹었어요?”
“그래. 심장이 벌렁벌렁하네.”
“거짓말.”
턱을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가자 이정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겁먹었으면 진작 도망갔을 겁니다. 이렇게.”
그가 눈짓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들을 가리켰다.
“덤벼들 게 아니라.”
“……끈질기구나.”
한참 만에야 대꾸한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를 뒤졌다. 바지 안쪽 주머니를 헤집던 이정인이 원하는 걸 찾았는지 방치된 그의 다른 손에 살포시 던졌다.
“이거, 이젠 필요 없겠어.”
하우인의 눈동자가 밑으로 미끄러졌다. 손바닥에는 구겨진 종이 덩어리가 있었다. 자신의 이름과 회사명이 적힌 종이가.

* * *

탁탁탁.
손끝으로 일정하게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자 문 앞에 서 있던 고 비서가 하우인의 옆에 섰다. 구겨진 명함을 응시하는 새까만 시선. 그는 고 비서의 존재에 그렇다 할 말을 꺼내지 않았다.
호텔 물품 계약 건 때문에 결재 사인을 받으러 방에 들어온 고 비서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방치된 종이에 떨어졌다.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면 남자는 함부로 자신의 명함을 주는 일이 없었다.
그의 명함을 받는 사람은 소수.
그렇기 때문에 빳빳했을 명함이 구겨진 채로 남자의 손에 다시 돌아오는 일은 처음이었다.
누가, 그에게 이런 짓을 한 걸까?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고 비서의 기억에 예쁘장하게 생긴 사내가 떠올랐다. 창백한 얼굴로 느슨한 미소를 띠던 남자.
“주세요.”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가 손을 까닥였다. 고 비서는 품에 파묻힌 검은색 파일을 펼쳐 그가 사인하기 좋은 자세로 허리를 굽혔다.
그가 빠르게 내용을 훑은 뒤 안주머니에서 꺼낸 펜으로 서명란에 쓱, 휘갈겼다.
“나가 보세요.”
안쪽 주머니에 도로 펜을 집어넣은 하우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결재 파일을 들고 나가려던 고 비서가 다시 그의 옆에 섰다.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는 고 비서의 행동이 하우인의 시선 끝에 걸렸다. 느긋하게 위로 올라간 검은 눈동자가 고 비서의 얼굴에 닿았다.
“전무님. 버릴까요?”
엉망으로 구겨진 명함이 거슬려서 내뱉은 말에 하우인이 건조하게 웃었다.
“이런 명함 본 적 있어요?”
구겨진 종이를 손가락 사이에 넣고 흔들었다. 고 비서의 시선도 따라 흔들렸다.
“내가 준 명함이 구겨진 걸 본 적이 없어서. 신기하네요.”
이정인이라는 사내가 그의 제안을 끝내 거절한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명함이 구겨진 채로 돌아왔을 리는 없을 텐데. 빠르게 다음 접촉자를 물색하던 고 비서는 이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구겨진 명함을 휴지통에 버린 그가 의자에 걸쳐 놓은 겉옷을 들고 일어섰다.
“오늘 스케줄은 없습니다.”
1시간 전에 마지막 일정을 끝마쳤을 텐데? 파일을 옆구리에 낀 채 재빨리 패드를 켰다. 언제든 스케줄은 변동 가능했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락된 일이 있는지 살펴봤지만, 특별히 문제 되는 점을 찾지 못했다.
“갈 곳이 있습니다.”
재킷 버튼을 잠근 그의 말에 고 비서가 앞서가 문을 열어 주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를……?”
개인적인 용무라도 있는 건가? 벽시계가 7시를 가리켰다. 저녁을 거른 그가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러 간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왜냐면 서랍에서 꺼낸 서류를 든 채였으니까. 그 종이 뭉텅이는 이정인이 탁자에 던졌던 계약서와 동일했다.
벌써 다른 접촉자를 물색한 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주차된 검은색 자동차 뒷문을 열었다. 가볍게 뒷좌석에 탄 그를 확인하고 문을 닫은 뒤 재빨리 운전석에 올라탄 고 비서는 시동을 걸며 백미러에 시선을 주었다.
“어디로 갈까요?”
“손가락 술집으로 가세요.”
하우인은 뒷좌석에 등을 기댄 채 창밖 풍경을 무심히 보았다. 남자의 얼굴을 백미러로 확인하던 고 비서는 손가락 술집이란 말에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손가락 술집은 그의 제안을 거절한 이정인이 운영하는 술집이었다. 유명세를 치른 건 특이한 가게 이름 때문이 아니다.
거긴…… 여자들에게 환장한 남자들이 가는 술집 아닌가?
고급 술집인 만큼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공공연하게 뻐근한 아랫도리를 달래 주러 간다고 말할 정도니까.
하 전무가 성욕이 강했던가?
지난 5년간 옆에서 지켜봤을 땐, 담백한 편이었다. 한 번도 여자와의 관계에 관련된 일로 뒤처리를 해 준 일이 없었으니까. 아니, 담백한 편이라고 정의하기도 힘들었다. 하 전무 집에 들락날락하는 여자는커녕, 주위에 여자 자체가 없었다. 워낙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하 전무에게 오죽하면 거기에 이상 있는 게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을까.
그런 남자가 술집에 가자고 하다니. 계약서를 챙기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그자를 만나러 가나요?”
핸들을 부드럽게 돌리며 고 비서가 물었다.
“이정인 씨를 말하는 거라면 맞습니다.”
절대 하지 않을 것 같더니, 결국은 설득을 하신 건가?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자 속도를 줄였다.
“그때 보았던 기세로는 이쪽과 손을 잡지 않을 것 같았는데요.”
“뒤로 손 좀 썼습니다.”
그가 백미러를 향해 건조하게 대꾸했다. 고 비서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 뒤, 라는 게 결코 좋은 뜻이 담긴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자 자동차가 시원하게 도로를 쭉 뻗어 갔다. 도착 지점까지 5분 남았다는 내비게이션 화면을 보며 속도에 박차를 가하는데 뒤에서 낮은 물음이 던져졌다.
“아직입니까.”
“아, 네. 손이 닿는 곳에 의뢰하긴 했습니다만 워낙 오래된 일이라 쉽지는 않을 거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핸들을 잡고 있는 고 비서의 손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벌써 5년째다. 그는 어떤 여자를 찾고 있었다. 누군가 그려 준 앳된 여자. 주먹만 한 얼굴에 강아지 눈매. 새초롬한 입술과 짧은 단발머리.
잘 보아야 열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의 눈은 날카로웠다. 순한 눈매에 어울리지 않는 눈동자. 그래서일까? 예쁘장하게 생긴 아이의 이미지가 차가워 보이는 건.
5년 전 아이의 얼굴이 그려진 종이를 건네던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그저 수많은 일 중 하나라는 듯 찾아보라며 건조하게 말했지만, 그 건조함 속에 숨겨진 열기를 보았다.
그건 우연이었다.
평소와 같이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날, 내일 일정이 들어 있는 패드를 회사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은 건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난 뒤였다. 어차피 내일 일정은 머릿속에 다 외우고 있으니 아침 일찍 출근해도 됐지만, 만약에라도 일정이 변경된다면 즉시 패드를 켜서 다음 날 일정과 조율해야 했다.
그럴 일은 극히 드물었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운동복 차림 그대로 회사에 들어갔다가 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불빛에 저도 모르게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 방이 하 전무의 방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그냥 지나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건 문 사이로 보이는 그의 모습 때문에.
스탠드 불빛에 겨우 의존하던 방 안에서 그는 가죽 지갑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오랫동안 바라보던 그가 돌연 고개를 숙였다. 반으로 갈라진 차가운 지갑에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묻은 그의 모습에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그의 지갑 한편을 차지한 여자. 누군지 모를 리 없었다. 아마, 5년 전보다 훨씬 전부터 그 여자를 찾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내비게이션 화면에 도착이란 빨간 글자가 깜빡였다. 고 비서가 왼쪽으로 핸들을 돌리자 자동차가 매끄럽게 길가 쪽으로 붙었다. 고 비서는 자동차 시동을 끄며 백미러를 힐끗 보았다.
“도착했습니다.”
고동색 목재로 된 간판. 줄지어 늘어선 고급 자동차들. 문 앞을 지키고 선 장정 여러 명이 일일이 들어오는 사람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나가 봐도 괜찮아.”
붕대를 감고 있는 이정인의 손가락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던 철호가 맞은편에 앉은 하 전무를 노려봤다. 적의가 느껴지는 시선에 하 전무 옆에 앉아 있던 고 비서의 눈매도 사나워졌다.
“여기 있겠습니다.”
제 옆을 지키고 앉아 있는 철호의 입이 부루퉁하게 나왔다. 그녀는 붕대가 감긴 손가락을 바라보다 슬쩍 웃었다. 밤마다 상처가 하나씩 늘어나 있는 얼굴을 본 철호를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
당장 하 전무의 회사로 달려가겠다는 이것을 어찌해야 하나, 싶다가도 대일밴드를 사 와 다친 곳에 붙여 주는 행동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철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지켜야 할 상사가 얼굴이 쥐어 터진 채로 왔으니 얼마나 속상했을까. 손을 들어 철호의 어깨를 토닥토닥, 달래 주자 사나운 철호의 기운이 조금 누그러졌다.
“우선, 나가 봐. 필요하면 부르도록 하지.”
부드럽지만 단호한 그녀의 음성에 머뭇거리던 철호가 하 전무를 노려보며 룸에서 나갔다. 철호를 내보낸 이유는 하나였다. 아직,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철호가 하 전무에게 달려들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지난밤 그에게 턱을 잡혔을 때 손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턱을 쥐어 잡는 악력이 상당했다. 그 힘이 우연이 아니라면 철호는 하 전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여기에 사인을 하면 되는 건가?”
이정인은 테이블에 던져진 서류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물었다.
“네.”
고 비서가 그녀의 손에 펜을 쥐여 주었다. 순순히 사인하자 하 전무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조금 더 버틸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조금 더 버티는 게 뭔가.
정말 싫었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았을 거다. 그날 밤 그 말만 꺼내지 않았어도.

‘이수환 씨가 꽤 탐내던 겁니다.’

그가 노 대표 소유의 외식 업체를 들먹였다. 처음엔 왜 그러나 싶었지만 곧이어 들리는 이수환이란 세 글자에 고개를 들어야 했다.

‘이수환 씨가 외식 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게 하루 이틀 이야기는 아니지만 매번 말아먹었죠. 인지도 없는 브랜드보단 차라리 노 대표가 운영하는 외식 업체를 인수하는 게 빠를 겁니다.’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노 대표의 파멸을 입에 담았다. 자신만만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노 대표의 가게를 올려다봤다.

‘언제까지 술집만 운영할 순 없잖습니까?’

남자는 여유롭게 웃었다.
결국, 그 말에 넘어가 버렸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하 전무 손을 잡아야 하는 거라면 빨리 끝내는 게 낫지. 여기, 너무 아프거든?”
이정인은 붕대 감은 새끼손가락을 까딱였다.
“겁쟁이로는 안 보이는데.”
“내가 말 안 했나? 하 전무한테 얻어터진 뒤로 겁쟁이 된 거. 아, 앞으로도 계속 겁먹을 생각이니까 무리한 의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겁먹었다고 하기엔 가벼운 말투에 하우인이 건조하게 웃으며 그게 겁먹은 말투입니까? 묻자 이정인이 느슨한 미소를 지었다. 그 묘한 미소에 고 비서는 은테 안경을 추켜올렸다. 소파에 몸을 묻고 다리를 꼰 채 한 손으로 술잔을 이리저리 흔들며 나른한 미소를 띠는 그는 꼭, 한량 같았다.
느슨한 입술이 열렸다.
“카지노 사업권 못 따내게 노루만 막아 달라, 이건데. 결국, 노루파에게 얻어터지게 생겼네. 꽤, 아프겠는걸?”
엄살을 떠는 이정인의 말투에도 하우인은 무표정으로 대꾸했다.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해 드리죠. 아니면, 따로 원하는 거라도 있습니까?”
“사례는 됐어.”
이정인은 손을 내저었다.
“네? 됐다니요?”
더 큰 걸 바라는 건가? 고 비서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 의뢰 끝나면 다시는 찾아오지 마. 귀찮은 일에 연루되는 거 안 좋아하거든.”
“진심입니까?”
“그래.”
“후회할 텐데요. 나는 사례를 꽤, 후하게 하는 편입니다.”
차가운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발끝부터 느리게 올라오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고요하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 날카로운 눈빛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짧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