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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몽–나는
너를 꿈꾼다
-달밤달곰
허몽 1화
0. 비로소 시
평감 성주의 집무처 뒤편 그늘진 곳, 한 소녀가 수풀 속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초록 수풀 사이로 자줏빛 고운 치마가 꽃처럼 피어 있어 동그마니 도드라졌다. 제 한 몸 감추기 영 틀렸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 소녀는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동그란 이마는 한껏 울상으로 찌푸려지고 볼엔 점점 바람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 멍청아.”
소녀는 자신을 향해 마구 꼬리 치는 강아지를 향해 타박했다. 오지 말라 그렇게 손을 저었지만, 태어나서 처음 봄을 맞이한 새끼 강아지는 그 손짓이 놀자는 의미인 줄 알고 동동 뛰어올 뿐이었다. 어느새 발치까지 온 강아지는 소녀의 손 아래로 제 자그만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체념한 소녀는 보드라운 손을 내밀어 저만큼이나 보들보들한 강아지를 들어 올렸다. 아니, 들어 올리려고 했다. 발밑 그림자 모양이 저를 따라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어깨를 한껏 옹그린 소녀는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연둣빛 고운 천으로 머리를 꼬아 올린 친구가 책망 어린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망했다…….
닥쳐 올 잔소리를 기다리며 가연은 제 손을 물며 장난치는 강아지의 배만 살살 긁어 주었다.
“여기 숨어 계신 건 예상 밖이라, 고생 좀 했습니다.”
“이렇게 빨리 들키면 의미가 없잖아. 도대체 날 왜 찾으러 다니는 건데?”
나붓하게 떨어진 음성에 가연은 불퉁한 목소리로 응대했다. 아혼은 심통 난 어린 아가씨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포동하게 부풀어 오른 볼을 보니 한숨이 절로 터졌다. 그녀는 주저앉아 있는 가연을 단호하게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제 주인의 흐트러진 매무새를 애정 담긴 손길로 매만지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가연을 책망했다.
“이번엔 아기씨가 과하셨습니다. 예절 스승님께서는 단단히 화가 나셨고, 아기씨가 만들어 놓은 인형 때문에 유모는 경기를 일으켰습니다.”
차게 떨어지는 음색에 가연은 신발 앞 코로 땅을 툭툭 파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 와중에도 제 젖형제가 단단히 화가 났음을 느낀 가연은 애꿎은 손가락만 계속 비틀었다. 하지만 잘못했다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제 시선 끝에 보인 아혼의 회색빛 치맛자락에 더 확고해졌다. 다시금 그날의 분노가 화인처럼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나만 잘못한 거 아니다, 뭐.”
가연은 혀 위에서 불퉁한 음색을 굴리며 어깃장을 놨다. 아혼은 제가 모시는 아가씨가 미안해하는 것을 느꼈으면서도 여전히 단호한 음성으로 이름을 불렀다.
“연가연 님.”
그 목소리에 가연은 입을 옹송그렸다.
일의 발단은 이러했다. 가연은 예법이라든가 규율이라든가 규수의 몸가짐에 약했다. 애당초 소녀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예쁘게 춤을 출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부모님이 어여쁘다 해 주실까, 무얼 하면 아혼과 즐겁게 놀 수 있는가 이러한 것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갓 열한 살. 무가의 금지옥엽 막내딸에게 딱딱하고 숨 막히는 글자 속 세상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그러니 예법 교육을 5년째 받고 있어도 제자리걸음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선생들은 점차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가르칠 때는 누구보다 빠르게 이해하면서, 정작 행동으로는 이어지지 않으니 어린아이에게 무시를 당한다 생각했다. 결국 예절 스승은 가연이 친형제처럼 여기는 아혼을 체벌하기로 했다.
그날, 채 여물지 않은 아이의 종아리에는 회초리 스무 대라는 체벌이 내려졌다. 가연은 다섯 대까지 어쩔 줄 몰라 엉엉 울다가, 그 후엔 스승의 팔에 매달렸고 회초리가 열 번째 내리쳤을 땐 제 머리를 있는 힘껏 벽에 박아 버렸다. 그 기행에 놀란 스승은 체벌을 멈추었지만 이미 아혼의 종아리에는 가느다란 혈선이 올올이 박혀 있었다.
“편들지 마. 이건 그 사람이 잘못한 거잖아. 체벌하고 싶다면 나에게 직접 했어야지.”
가연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있는 힘껏 아혼을 노려보았다. 속에서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 한 마리가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제 마음도 몰라주는 아혼이 야속하기만 하다. 오늘 그 인간 얼굴을 보면 이빨로 물어뜯을지도 몰랐다.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께 달려가 저 사람만 바꿔 주시면 예법 교육을 매일같이 받겠노라 맹세할 수도 있었다.
입술 앙다물고 눈 부릅뜬 얼굴에 그 결심이 글로 적은 듯 선명하여, 아혼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한 발짝 물러서자 그 기색에 놀란 가연이 다급하게 옷자락을 잡았다.
“어디 가?”
가연이 애달프게 올려다보았다. 발치에서 낑낑거리는 강아지와 똑 닮았다. 그러나 아혼은 동요 하나 없이 가연의 손을 조용히 감아쥐었다. 가연과 달리 거친 아혼의 손가락이 마디가 느껴질 정도로 단단히 가연의 손을 가두었다.
“회피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아시잖아요?”
“방법이 없는걸……. 난 사과하기 싫어. 널 상처 입힌 건 절대 용서 못 해.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을 쫓아낼 수도 없고, 아버님 귀에 들어가는 건 더 싫어.”
평감성에서 일어나는 일을 대장군께서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굳이 지금 말하여 동티를 낼 필요도 없으니, 아혼은 조용히 도닥였다.
“도망은 비겁한 겁니다. 전 아가씨가 비겁해지시는 건 싫어요.”
“……내가 싫어?”
가연이 제 손을 쥔 손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고집스런 태도와 달리 목소리는 그네인 양 흔들거렸다.
“그럴 리가요. 전 아가씨의 젖형제인걸요.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혼자 두지 않을게요.”
“아혼은 언제나 내 편이지? 아혼은…… 내 거야. 그렇지?”
“네. 전 아가씨 편이에요.”
단단한 확언에 가연이 하얗게 피어나는 꽃처럼 아혼을 쳐다보았다. 생기로 반짝반짝 빛나는 눈에 시선을 맞추며 아혼이 조용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지금 같은 아가씨는 별로예요. 사고를 치시고 수습도 안 하시다뇨. 비겁하세요.”
아혼의 말에 가연은 아랫입술을 감아 물고는 한참 동안 발밑을 노려보았다. 개미 한 마리가 쫄쫄쫄 움직여 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그제야 가연이 입을 열었다.
“내가 예법을 다 익히면 그 사람은 안 오나?”
“예법은 이제 끝이에요.”
“좋아.”
가연은 단호한 얼굴로 훈육관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열한 살답지 않은 열기가 눈동자 안에서 맴돌았다.
“단번에 끝내서 쫓아 버리겠어.”
가연이 반대로 아혼의 손을 힘껏 쥔 채 보무당당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혼은 그 손에 얌전히 갇혀 주며 돌변한 가연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열한 살 봄의 일이었다.
1. 옮길 이 (1)
‘황’국 수도의 남쪽 국경 지역, 평감 중앙성이 활짝 열렸다. 그 앞에 수많은 인파들이 연무록 대장군의 집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쪽 국경과 평감을 지켜 온 연무록은 올해 초 대도위로 승양되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전방 평감을 지키는 대장군 위에 오르는 가문은 언제나 연 가문이었다. 연 가문은 수백 년간 큰 문제 없이 평감을 지키던 든든한 수호자였다. 그런 수장을 수도로 불러올리니 평감은 불안감에 휩싸였었다. 결국 이를 안정시키기 위해 무록의 처 이사홀이 평감에 남았고, 지난 일 년을 든든하게 버텨 주었다.
그리고 이제야 연무록의 가솔들은 조상 대대로 지켜 오던 평감을 떠나 수도 ‘융고’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얼마나 떠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남은 자택과 떠나는 이 모두 평안하길 바라는 축원이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울려 퍼졌다. 사홀 일행은 배웅하러 나온 이들에게는 안전과 평안을 의미하는 귤, 밤, 호두를 담은 꾸러미들을 나누어 주었다. 꾸러미를 받은 사람들은 사홀에게 아쉬운 마음을 담은 덕담을 전하였다.
“아가씨, 그만 내려오세요.”
사람 냄새가 지워지고 있는 저택 안에서 아혼은 한숨을 내쉬며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나무 위에는 단단히 심통 난 가연이 못 들은 척, 저 멀리 산자락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덧 앙상한 몸만 남은 나무 위에 앉은 가연은 단풍잎 대신 붉은 옷자락을 날리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이리 고집 피우실 일이 아니에요.”
“싫어. 난 가기 싫어. 싫다고.”
거듭되는 애원에 가연이 결국 팽 돌아진 심사를 드러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럼 여기 혼자 남으시렵니까?”
아혼은 며칠째 계속된 가연의 투쟁에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융고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가연은 단식투쟁부터 가출까지, 하지 않은 반항이 없었다. 기어이 마님마저 가연을 혼을 내는 상황까지 이르렀지만 가연의 투쟁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마님께서 또 경을 치실 게 분명했다. 저를 걱정하느라 까맣게 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연은 모두의 이목을 한 몸에 받으며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연은 평감 일대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인이었다. 대대로 평감을 지켜 온 연씨 일가의 무장 연무록은 젊은 무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신에게 육체적 강함을 받은 가란을 상대로 보이는 그의 무위는 가히 무적이라 할 만했다. 그런 연무록이 오래간만에 얻은 막내딸 가연은 날 때부터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앞으로 황국 무인들의 정점에 오를 거라 예상되는 연무록의 어린 딸, 그 나잇대의 사내아이를 둔 모든 가문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가연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용모를 뽐냈다. 복숭아 솜털처럼 보송한 얼굴 위 발그레한 홍조, 석류물 옮은 듯 붉은 입술. 영민하게 반짝이는 눈빛, 날렵한 눈매. 나이가 들어 가면서 숱한 사내들의 연모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주변의 기대를 의식한 탓인지 무록은 가연을 공식 석상에 내보인 적이 없었고, 가연의 외부 출입도 흔하지가 않았다. 그런 가연이 당당히 나무 위에 앉아 제 고운 자태를 드러내니 호사가들은 물론 젊은 병사들까지 너나없이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난 융고가 무서워…….”
“제가 있지 않습니까. 일단 내려오세요. 내려와서 얘기하시라고요. 지금 모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아혼의 질타에 가연은 공연한 소리를 한다고 비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가연은 담장 너머 모여 있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수백 쌍의 눈과 마주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자신을 향해 반짝이는 수많은 눈을 스쳐 마지막으로 마주친 어머니의 못마땅한 눈초리에 가연은 이내 몸이 굳고 말았다.
“꽤 높은데 어지럽지 않으십니까?”
낯부끄러워 허둥지둥하던 차에 갑자기 들려온 낯선 사내의 목소리에 놀라 손이 미끄러졌다. 균형 잃은 몸이 밑으로 훅 내려앉았다.
“아가씨!”
“으햑!”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눈을 질끈 감았던 가연은 자신의 허리를 받친 누군가의 손길을 느끼고 조심스레 눈을 떴다.
“장군님의 따님다우시군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웅웅 울렸다. 가연의 시선 아래, 낯선 사내가 웃으며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혼이 여전히 정신이 없는 가연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낯선 사내에게 경계를 드러냈다.
“장병께선 누구십니까?”
장병?
가연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상대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노란 수실 달린 장도와 청록색에 은빛 문양이 새겨진 답호는 그의 위치를 짐작하게 했다.
“우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헌데 누구신지 알 수 있을까요?”
가연은 급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는 서글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연 장군님으로부터 가솔들의 안전을 부탁받은 각령, 헌이라 합니다.”
가연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은 분명 자신이 벌인 일을 들은 아버지가 친히 붙인 간수다. 각령이라면 군인 천 명을 담당하는 무관으로 평민은 올라가지도 못하는 높은 관직이다. 그런 각령이, 어머니도 아닌 자신 곁에 와 있는 이유는 분명했다.
이건 분명 감시다.
가연이 어떻게 생각을 하든, 자연스럽게 사홀에게 가연을 인도한 헌은 병사들 사이에서 헌헌하게 서 있었다. 사람이 정신없는 틈을 타 어영부영 끌려오니 속에서 천불이 났다. 보는 눈이 많아, 차마 성질도 못 내고 이를 바득 갈았다.
“아버님께서 날 못 미더워하시는 건 알아. 그렇지만 이건 너무하다 생각하지 않아?”
속삭이는 목소리에 아혼이 짧게 혀를 찼다.
“심사가 배배 꼬이셨습니다.”
“아냐, 그렇지 않아. 분명해. 날 미워하시는 거라고. 한 번도 내 의견을 들어주신 적이 없잖아.”
“아가씨, 그렇다고 저를 방패로 삼으시는 겁니까?”
“미안. 그렇지만 좀 참아 줘. 난 저 사람이 영 껄끄러워.”
아혼의 어이없다는 어조에 가연은 혀를 살짝 물고는 웃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눈은 헌을 맹렬하게 노려보는 것과 달리 몸은 아혼을 벽 삼아 반쯤 숨긴 상태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아혼은 그저 한숨만 삼켰다. 이 아가씨는 나이를 어디로 먹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가연의 처참한 심정과는 별개로 이사 준비는 어느덧 마무리 단계였다. 축원이 끝나고 북과 피리 소리가 어우러진 음악 소리가 저택을 휘돌고 나니 떠나는 이를 위한 배웅이 끝이 났다. 일꾼들은 제각각 짐을 짊어지고 주인마님을 바라보았다.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문 총관이 준비가 끝났다고 고하자 사홀과 가연도 말 위에 올라탔다.
“출발한다.”
사홀의 신호에 연씨 일가는 한 번도 떠난 적 없었던 평감을 뒤로한 채 융고를 향해 나아갔다.
***
“진휼이는 어떻게 해요?”
인가를 벗어나 산길로 들어서자, 어머니 사홀 옆에서 조용히 말을 몰던 가연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출발 전 일으킨 소동으로 한바탕 꾸중을 듣고 나니 말 붙이기도 조심스러웠다. 가연의 물음에 사홀이 다사하게 웃었다.
“내가 못 가는 동안에는 아연이가 봐 줄 예정이다.”
“언니가요?”
“나도 종종 내려올 테고.”
“저도 작별 인사하고 싶었어요.”
섭섭함에 축축해진 음성이 사홀의 귓가에 닿았다. 갈쌍한 눈을 내리뜬 모습에 사홀은 가연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아주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러는구나. 다음에 갈 때는 너도 같이 가자꾸나. 선사님들과만 있으려니 적적해하는 것 같더구나.”
“여전히 차도는 없나요?”
가연의 물음에 사홀은 애달픈 눈을 한 채 그저 웃어 보였다. 가연은 울컥 치미는 감정에 고개를 떨궜다.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본 어린 동생은 가족들 품에 제대로 안겨 보지도 못한 채 저 홀로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동생이 태어난 지 열여섯 해가 지났다. 그동안 가족들은 돌아가며 진휼을 찾아가 외로움을 덜어 주었지만, 몸이 약한 동생은 사람 얼굴을 인식하는 것조차도 힘겨워했다. 열을 크게 앓고 나서는 발작은 수시로 이어졌다. 제 건강을 반이라도 덜어서 준다면 좋으련만, 연 가문에 처음으로 태어난 적자가 그런 상태이니 어머니도 마음고생이 심했다.
가연의 반항에는 진휼의 일도 한몫을 했다. 평감에서 지낼 때는 진휼이 있는 곳까지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수도로 거처를 옮기면 최소 두 달이 걸리게 된다. 만약 융고에 있을 때 진휼의 상태가 안 좋아지면, 이미 동생을 보기에는 늦을 가능성이 컸다.
평감이 자꾸만 자신의 머리를 잡아채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에 못내 불안했다. 가연은 답답한 한숨을 입 안에 가득 물고 말에서 내려 아혼 곁에 바짝 서서 걷기 시작했다.
“왜 그러세요?”
“아혼…….”
“네.”
가연은 단정히 떨어지는 음성에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끼며 아혼에게 살짝 기댔다.
“나 정말 가기 싫어.”
“저도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동조해 주는 말에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가릴 수가 없었다.
“말이 불편하십니까?”
갑자기 끼어든 말소리만 없었다면, 기분이 계속 좋았을 터였다.
가연은 어느새 말에서 내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헌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헌이 거의 지척에 왔을 때쯤 재빨리 말 등에 다시 올라타 사홀 곁으로 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아혼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다가 헌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비슷한 마음인 것을 눈치채고는 조용히 웃어 보였다.
“연 낭자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모양이군.”
“괘념치 마십시오. 또 금세 풀어지실 것입니다.”
조용하게 내려앉는 음성에 헌은 비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쯤 되면 누가 규수인지 알 수가 없는 모양새다. 가연은 장군이 제 품에 끼고 돈다는 소문이 사실인 듯, 티 없이 애정만 담뿍 받은 모양새였다. 저잣거리에서 이제 겨우 지학쯤 됐을 아이들과 어울리게 해도 잘 어울릴 듯했다. 반면에 그 상관을 모시느라 고생을 했는지, 시비라는 아이의 품행이 더 단정하고 조심스러운 것이 영락없는 양갓집 규수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나?”
“아혼이라 합니다.”
“성은?”
“아비 없이 태어나 성은 받지 못하였습니다.”
여상한 아혼의 대답에 헌은 조용히 혀를 찼다. 제 아랫도리 간수 하나 못 하는 난봉꾼에게서 태어난 듯한데, 그 여식은 저리도 성정이 곧으니 아비 없는 것이 차라리 복인 듯했다.
“날 때부터 함께였나? 아가씨에 대해 많이 알겠군.”
“모시는 분과는 어릴 적부터 함께였으나, 제가 아는 바가 적으니 귀인의 물음에 답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을 듯합니다.”
어느새 자신과 눈을 마주쳐 오며 단호히 대답하는 아혼을 보며 헌은 기꺼운 웃음을 흘렸다. 얼마나 가연을 노리고 자신에게 접근하는 이가 많았으면 저럴까 싶기도 하지만, 저보다 높은 신분의 이에게 바로 부딪혀 오는 기세가 자못 대단하지 않은가. 참으로 마음에 드는 이였다. 성정만 보자면 시비로 있는 이 아이가 저에겐 바듯하게 맞았다.
헌은 저보다 앞서가면서도 계속 자신들 쪽을 바라보고 있는 가연을 보고는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저와 있기 싫어 말 위에 올라 도망갔으면서, 제 사람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자니 걱정도 되고 마뜩잖은 모양이었다. 헌의 웃음을 본 가연은 하얀 윗니로 아랫입술을 꾹 누르더니 기어이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그것참, 성격 한번 불같군.
헌은 저의 반 보 뒤에서 조용히 걷고 있는 아혼을 보며 융고까지 가는 길이 심심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량한 날씨까지 퍽 맘에 드는 날이다.
묘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사홀은 가연을, 가연은 헌을, 헌은 아혼을 보며 걷는 모습이 산길을 걷는 내내 이어졌다. 결국, 가장 마음이 불편한 건 아혼이었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헌을 쫓아낼 수도 없고, 게다가 딱히 무언가 행동을 취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흡사 헌의 시비인 것 같은 모습으로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나란히 걷기만 하면 다행인데…….
“평감은 무척 덥다지?”
“가란 때문에 고생이 많은가.”
걷는 내내 처음과 달리 가연이 아닌 평감은 어떤지, 그곳의 생활은 어떠한지 물어 오니 대답을 안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는 소리만 들리면 노골적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가연의 모습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마주치는 눈빛이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경고가 너무 생생했다. 이 일이 반복되니, 제발 각령이라는 양반이 다른 곳으로 가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아가씨도 그렇지, 저리 노려보실 거면 그냥 저를 부르면 되는 일 아닌가. 꼬박 두 달 이상이 걸릴 여정에 아혼은 귓불만 만지작거렸다.
이사 행렬은 고개를 넘고 넘어 고개 중턱에 마련된 객잔에 도착했다. 일꾼들은 삼삼오오 흩어져 짊어지고 있던 봇짐들을 내려놓고, 그들을 따라온 보부상들은 각자 흩어져 숙소로 지친 몸을 누이러 갔다. 짐들이 한쪽에 쌓이는 것을 지켜보던 사홀이 헌에게 다가갔다.
“장령께서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부인. 저야말로 덕망 높은 부인을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당치도 않습니다. 제 직업 하나 없는 규방 여인일 뿐입니다.”
“하하하. 융고에 있는 여인들이 들으면 들고 일어날 소리이십니다. 부인께서 쓰신 글을 구하기 위해 애달파하는 이가 한둘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글귀입니다.”
사홀은 담담히 미소하며 겸양을 표했다.
“장령께서도 곤하셨을 텐데 이 밤은 편히 쉬시지요. 그보다 병사들의 방이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 부분은 걱정치 않으셔도 됩니다.”
“허면 그 부분은 장령께 맡겨 두도록 하겠습니다.”
사홀은 조용히 한발 물러서며 헌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 모습에 헌은 묵직한 웃음을 흘렸다. 사홀는 헌에게 묵례를 하고는 제 몫으로 정해진 방을 향해 올라갔다. 층계 근처에서 가연과 아혼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본 사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직하지만 칼 같은 어조가 층계참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향해 흘러 나갔다.
“가연, 아혼. 두 사람 다 따라 들어오너라.”
생전 들어 본 적 없는 음성에 두 사람은 몸을 움츠리며 사홀의 뒤를 따랐다.
***
허름하지만 네 사람은 족히 누울 수 있는 공간에 사홀이 반듯하게 좌정했다. 허름했던 공간이 순식간에 솔잎처럼 빳빳해졌다. 그런 그녀의 눈치를 보던 가연이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 바닥에 엉덩이가 닿기가 무섭게 서릿발 같은 물음이 떨어졌다.
“네가 누구더냐?”
“평감 성주 연무록…….”
“네가 누구더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홀은 같은 질문을 다시 했다. 예리하게 내리꽂는 음성에 가연은 입술을 앙 물었다.
“대도위 연무록 장군의 막내 여식 연가연입니다.”
“그래, 넌 대도위의 막내 여식이다. 그럼 밖에 계신 장령은 누구더냐?”
이제야 어머니가 왜 저리 서릿발 같은 태도를 보이는지 깨달았다. 이유를 아니 반발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어머니!”
“어딜 어른이 묻는데 대답지 않고 제 감정을 앞세우느냐. 대답부터 하여라.”
이제는 아예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가연은 잇새로 말을 이었다.
“각령입니다.”
“각령이 어느 정도의 지위더냐?”
“…….”
가연이 붉어진 눈가를 파르르 떨며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조용히 한숨을 삼키며 뒤쪽에 부복해 있던 아혼이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