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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몽 2화
1. 옮길 이 (2)


“천 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중앙군부의 중간 직책입니다. 각령의 위로는 도위와 대도위 위(位)뿐입니다.”
“너에게 물은 것이 아니다.”
“송구합니다.”
사홀은 아혼의 대답을 내치고 조용히 가연을 응시했다.
“그럼 너와 각령 중 누가 더 높으냐?”
“같은 위치입니다.”
“틀렸다.”
단호히 대답하는 사홀의 어조에는 채 숨기지 못한 허탈함이 담겨 있었다. 그걸 느끼지 못할 가연이 아니기에, 기어이 발끈하고 말았다.
“어째서요? 전 대도위의 여식입니다. 또한, 황국의 남쪽 국경을 수호해 온 연가문의 여식입니다.”
“너의 지위가 무엇이냐?”
“없지만…….”
“그래 없다. 허나 헌 장령은 젊은 나이에 각령까지 오른 가문의 영식이지. 네가 저 이보다 높다 누가 그러더냐?”
사홀의 단호한 음성에 가연은 그저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도 납득할 수 없다. 그렇다 해도 그이의 행동은 영 거슬렀다. 평감에서도 저런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양민이라면 순수하게 아혼에게 호감을 가졌다 생각하겠지만 가문의 영식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제 배경에 홀려 다가왔다. 그러나 곧 사내들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조금이라도 틈을 만들고자 아혼에게 눈길을 돌리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가끔 몇몇 이들은 아혼에게 자신의 첩실로 들어오라고 권하기도 했다. 첩실이라니. 절대 허락 못 할 일이었다. 제깟 것이 황제도 아니면서 첩실이라니. 기본적으로 황국은 축첩이 불가하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하는 머저리 같은 놈들.
“그분이 너에게 공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오로지 단 하나. 아버님에 대한 공경 때문이다. 헌데 너는 어찌 그러한 것도 고려치 않고 원행 내내 흰 눈을 뜨고, 그리 오만방자하게 구느냐.”
“허나 어머니, 그자가…….”
“어허!”
사홀이 꾸짖었지만, 가연은 입술을 비죽이며 본인이 하고자 하려던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장령께서 아혼에게 자꾸만 관심을 표하고 추파를 던지니 그 무례함을 보고도 제가 어찌 참고 넘깁니까?”
가연의 말에 사홀은 큰 소리가 날 정도로 혀를 찼다.
“그것이 무례더냐?”
“어머니, 아혼은 저와 함께 자란 동기입니다.”
“노비다.”
“어머니!”
가연은 기어이 새된 음성을 높였다. 자신의 앞에서 아혼이 노비라 말하는 것은 금기였다. 평감에선 그 누구도 자신의 앞에서 아혼을 노비라 천히 여기지 못했다. 어릴 적 치열하게 싸워 올린 작은 금자탑이었다. 어머니도, 심지어 아버지께서도 아혼을 천하게 여기지 않고 양민처럼 대했다. 헌데 어찌 어머니께서 이제 와 아혼을 노비라 칭하는가.
“노비란 그 가치가 천하여 어떤 이는 재물로만 여기기도 한다. 그런 이에게 장령께서 관심을 표한 것이 무례이더냐? 지나가는 강아지를 귀엽다 쓰다듬은 것이 무례이냐? 아니다. 그건 그저 고마워하고 넘길 일이지 저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이를 흰 눈 뜨고 노려볼 일이 아니다. 네가 보인 태도야말로 무례고 결례다.”
“아니요, 어머니. 아혼은 제 친동기나 다름없고, 곧 양민으로 환속될 것이며, 저의 분신과도 다름없는 이입니다.”
“허면 아혼은 융고에 가자마자 곧 죽겠구나.”
사홀의 말의 의미가 형체를 갖추기도 전에 가연의 심장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순간적으로 펄떡이는 심장의 둔통에 가연은 숨도 못 쉰 채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어,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죽이시겠다는 뜻입니까?”
“네가 천지 분간을 못 하고, 융고에서도 아혼을 노비로 대하는 이들에게 그와 같은 태도를 보이면 열흘도 못 가 사달이 나겠지. 명망 높은 가문에서 노비의 수급을 보내라 하면 어찌 막겠느냐. 그러니 곧 죽겠다는 것이다.”
아혼은 가연의 손이 발발 떨리는 것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융고로 가는 것이 결정된 순간 언젠가 발생할 사달일 줄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터져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가연이 나고 자란 곳이 평감이라, 가연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일은 거의 전무했다. 연 가문은 평감에서 황실보다 가까운 지배자였고 수호자였다. 그런 가문의 막내딸 가연은 황녀와 진배없었다. 가연은 의식할 틈도 없이 그 귀함을 당연스레 받으며 자랐다. 무엇을 하든, 무엇을 원하든 뜻대로 되었다. 그중 가장 오래 걸린 것이 아혼의 위치를 높이는 일이었다.
아혼이 핍박받은 것도 아니었다. 몸가짐이 바르고 예의 바른 아혼은 노비임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이쁨을 받았다. 사내들이 눈여겨보았고 심지어 계집들이 풋정을 품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제 동기, 제 단 하나뿐인 친구가 노비라는 것을 가장 못 견뎌 한 것은 가연이었다. 가연은 평감의 모든 이들과 싸웠다. 그런 가연의 억지에 아혼은 노비이되 노비가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19년을 살았다.
허나 융고가 어디던가. 지엄한 황실의 발아래 있는 신화가 숨 쉬는 땅이다. 가혹한 천형과 찬란한 신성이 뿌리내린 수도 융고는 신분과 지닌 능력이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는 땅이었다. 같은 신분이더라도 어떤 일을 하는 지가 중요했다. 같은 천민이라도 기술자들은 대우를 받았다. 천민 중에서도 가문에 귀속되어 일하는 노비는 가장 아래였다.
그곳에서 노비는 그저 제물이었다. 그렇기에 아혼은 평감에 남고 싶었다. 마님께서도 그걸 원했고. 그러나 가연이, 아혼이 가지 않으면 저도 가지 않겠다 하여 별수 없이 따라나섰다. 더구나 가연을 혼자 보내는 것이 불안하기도 했다. 끝없는 내적 갈등의 승리자는 가연이었다.
그러나 분명 융고에서 가연과 저 사이의 관계는 평감과 같을 수 없었다. 격을 떨어뜨린다 하여 같은 미혼 여성 사이에서 따돌림당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떠나는 그날까지 그렇게 조심하라 당부했는데 지금 보니 여태 귓등으로도 안 들은 성싶었다.
“이 황국의 가장 높은 지위에 계신 분은 당연, 황제시니라. 그리고 그분 주변엔 수많은 황실 직계가족분들과 방계 황족들이 계시지. 그다음으로 높은 지위가 누구더냐 바로 왕사와 세 분의 삼위공이시다. 그리고 삼위공의 지위를 가지신 영감 중엔 너와 같은 또래의 여식이 있는 분도 계시다. 허면 그 여식이 너의 무례를 이유 삼아 아혼의 목을 치면 너는 막을 수 있느냐.”
가연은 숫제 온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제가 혼나야 하는 이유를 이제야 실감했다.
“평감에서도 내 너희들에게 그리 행동해서는 아니 된다, 누누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여전히 가연의 실수를 아혼 네가 감히, 수습하고 다닌다더구나.”
“……천것이 감히 무례를 저질렀나이다.”
아혼은 고개를 더 깊이 조아렸다. 가연은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를 깜박깜박 눈꺼풀로 닦아 냈다.
“시비가 대신 사과를 하는 것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행동이니 삼가라 누누이 이야기했다. 스스로 저지른 잘못을 어찌 다른 이가 대신 사과함이 있을 수 있더냐. 또한, 아래 신분인 자가 대신 용서를 구함은 상대의 위치가 자신보다 아래라고 말하는 바와 같으니 경계하라 하였다. 네가 황실의 일원이 아닌 이상에야 아랫것에게 대신 사과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리 가르쳤거늘, 어찌 잘못을 바로잡지 않는 것이냐!”
기어이 사홀의 언성이 높아졌다. 난생처음 보는 어머니의 모습에 가연은 가늘게 떨었다. 두려움으로 빳빳이 굳은 혀를 간신히 움직였다.
“죄, 죄송합니다, 어머니. 경계하고 또 경계하겠나이다.”
가연의 말에 사홀의 시선이 부복하고 있는 아혼에게로 옮겨 갔다. 숙인 머리 위로도 느껴지는 사홀의 매서운 눈길에 아혼도 속절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명심하겠나이다.”
사홀은 복잡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내려 보았다. 평감에서 그저 자유롭게 크게 두었더니 예절은 글로만 익혀 서투름투성이였다. 두 아이가 융고에 제대로 정착이나 가능할지, 밀려오는 걱정이 태산과도 같았다.
“가연은 잊지 말고 장령께 무례를 사죄하도록 하여라. 둘 다 나가 보아라.”
사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두 사람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조용히 방문을 닫은 가연이 붉어진 눈을 연신 팔로 문질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아혼은 슬며시 웃음을 지으며 차가운 손끝으로 눈가를 가만히 쓸었다.
“속상하세요?”
“무서웠어…….”
가연의 대답에 아혼은 시선 아래에 있는 가연의 얼굴을 가만히 매만져 주었다. 다정한 손길 아래 빳빳이 긴장했던 몸이 풀려 갔다. 가연이 총기 있는 눈을 반짝이며 아혼을 바라보았다.
“융고에 도착하기 전에 어머니께 이것저것 배워야 할 것 같아.”
“네. 그게 좋으실 것 같아요.”
아혼의 칭찬 섞인 수긍에 가연은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해맑게 웃었다. 까짓, 모르면 배우면 되는 거다. 아직 융고까지는 두 달이 남았다.


***


“간밤은 평안하셨나요.”
어제 일은 다 잊은 듯 헌은 가볍게 가연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 눈치를 주는 아혼 때문에 언제 말을 걸어야 하나 고민하던 가연은 찾아온 기회를 냉큼 잡았다.
“덕분에 평안히 잘 보냈답니다. 장령께선 평안하셨나요?”
바뀐 가연의 태도에 헌은 가볍게 너털웃음을 흘리며 아혼을 흘깃 보았다. 눈이 마주친 시비는 헌에게 다소곳하게 묵례를 취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짐작이 가는 터라 헌은 입가를 날렵하게 올렸다.
“첫 장거리 여행일 터인데 훌륭한 시비 덕에 아가씨께서 건강을 상하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편히 가는 것이 어찌 시비 탓이겠습니까. 어제는 제가 처음 겪는 일들 탓에 심신이 다소 불편하여, 장령께 결례가 컸습니다. 불민한 모습을 보여 부끄럽습니다.”
“아닙니다. 저의 무례 또한 사실인 것을,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가연은 담담한 그의 대답에 다소 안도의 기색을 보였다. 그리곤 의기양양하게 아혼을 바라보니 결국 아혼도 헌도 소리 내어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산길은 고즈넉했고 든든한 각령 밑의 군사들 덕에 여행길은 안전했다. 기어이 가연은 아혼을 붙잡고 평탄한 원행길을 불평불만을 터뜨렸다. 꿈꾸던 모험, 고난, 역경. 그런 건 일행을 덮치는 고라니보다도 찾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예기치 않게 닥친 노숙은 가연에게 있어서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노숙을 한다는 게 참이에요?”
“그래 곧 당도할 객잔에 도적 떼가 휩쓸고 가, 아직 복구가 덜 되었다 하더구나. 불편하겠지만 참고 오늘 밤은 밖에서 하룻밤을 보내야겠더구나.”
“꺄아!”
가연은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내지르며 아혼을 바라보았지만, 아혼은 울상을 지으며 가연의 옆을 흘깃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사홀의 눈꼬리가 딱딱하게 굳은 것이 보였다.
“아가씨…….”
아혼의 부름에 가연이 목을 자라처럼 움츠리고 사홀의 눈치를 보며 어설피 웃음을 지었다.
“도적 떼 휩쓴 곳 인명 피해 없을 리 없고, 무릇 노숙을 하면 밑의 사람들이 더 고생하는 법이거늘 어찌 그리 환호성을 지르느냐.”
“그걸 생각지 못한 것은 아니나…… 어머니께서야 젊을 적 많이 겪으셨겠지만 전 한 번쯤 겪어 보고 싶었는걸요. 너무 평탄하기만 한 여행은 재미없어요.”
뭘 기대하는 건지 얼굴은 발그레 달아올라 도리질을 치는 가연의 모습에 사홀의 얼굴이 결국 무름하게 녹고 말았다. 그녀가 이마를 짚으며 아혼에게 신신당부를 하였다.
“저 녀석 고삐 잘 쥐고 있으려무나. 가연이 사고라도 쳤다간 너도 같이 혼이 날 게야.”
사홀의 말에 아혼은 맥없이 웃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사홀의 웃음이 아혼의 머리 위로 흘렀다. 두 사람 사이에서 묘한 공감이 흘렀다. 이를 느낀 가연이 입을 비죽거리면서도 짐짓 모른 체하며 발끝만 톡톡 두드렸다.
객잔 안을 살피러 간 병사들이 돌아왔다. 엉망진창인 상태로 방치된 객잔은 인명 피해까지 있었는지 짐승에게 파 먹힌 시체부터 핏자국까지 스산히 흩어져 있었다. 결국, 객잔 밖에서 모두 노숙을 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비록 도적 떼가 다시 올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으나, 군병까지 있는데 어설피 덤벼 오지는 않으리라 판단했다. 마흔 명이 넘는 인원이 작은 객잔 마당에서 모두 몸을 누일 수는 없는지라 객잔 밖으로도 하나둘 찬 이슬 가릴 천막이 펼쳐졌다. 노숙 준비로 정신없는 이들 사이로 가연은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정신이 없었다. 팔랑팔랑 흔들리는 몸이 예닐곱 아이 같아 일꾼들의 얼굴에 웃음이 돌았다.
“멀리 가시는 건 아니 되십니다.”
“알아, 알아. 멀리 나갈 생각도 없어. 도적이라잖아. 내가 그 망할 놈의 가란의 침략은 숱하게 봤지만, 도적은 난생처음이라고. 어디서 튀어나올지도 모르는데 나도 함부로 튀어 나갈 정도로 철없진 않아.”
여전히 자신을 애 취급하는 것 같은 아혼의 태도에 가연은 적잖이 골이 났는지 볼을 빵빵하게 불리고 아혼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가연의 시선 끝에 아혼이 패용한 물건이 걸리자 입 안 가득 차 있던 바람이 푸시시 빠져나갔다. 그리곤 새삼스레 제 벗을 보았다. 아혼은 알까. 그녀가 저 모습으로 다니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어쩐지 들뜬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는 것을.
“허. 연 낭자께선 대단한 이를 시비로 두셨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헌이 새삼스런 표정으로 아혼을 훑어 내렸다. 그 시선이 어째 불편스런 아혼이 조심스레 고개를 수그렸다.
“평감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모두 검 정도는 기본이지요.”
가연은 여상스레 대답하며 아혼을 끌어다 제 뒤에 세웠다. 대놓고 경계하는 태도에 헌은 웃음을 집어삼켰다. 화해 이후, 가연은 어느 정도 경계를 허문 듯했다. 그러나 시비에 대한 관심만 드러내면 어째 강아지가 집을 지키겠다 왕왕대는 모양으로 눈에 불을 켰다. 헌의 날카로운 시선이 아혼의 허리춤에 가 멈추었다. 칼자루 끝에 꽃피듯 얽힌 세 개의 곡선이 손때가 묻어 반드레하게 패여 있었다.
“볼수록 탐이 나는군요.”
“글쎄요. 전 장령이 그다지 탐나지 않는답니다.”
가연의 뾰족한 대답에 헌은 기어이 듣는 이의 가슴까지 울렁일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인으로 저 아이가 탐이 난다는 의미는 아니니 그리 날을 세우지 마시지요. 아가씨께서 저 아이를 퍽 아낌을 아니까요. 그저 수하로 탐이 난다는 의미였습니다.”
헌의 말에 가연은 결국 얼굴을 복사꽃같이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어째 민망하여 저도 모르게 아혼의 뒤로 살그머니 몸을 가렸다. 그 모습에 헌의 웃음은 더 짙어져 이젠 향기마저 올라올 것 같았다. 오래간만에 가연의 당황한 기색을 보게 된 아혼은 결국 무례를 무릅쓰고 헌에게 말을 올렸다.
“감히 말을 올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평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있었던지라, 아가씨께서 다소 오해를 하셨나 봅니다.”
“아아. 그럴 수 있다. 네가 고운 미색은 아니나, 가진바 기색이 꽤 사람의 시선을 끄는 부분이 있으니. 미색이라 함은 너의 주인에게 더 맞는 말이겠지. 내가 너에게 눈을 둔 이유는 꽤 무예에 실력이 있어 보여 그랬다. 어떠하냐? 들어 보니 면천도 곧이라 하는 것 같고, 그 후에 무엇을 할지 결정이 안 되었다면, 내게 오너라. 여자 무관이 적은지라, 너도나도 오라고 난리일 것이다.”
“쓰임을 높게 봐 주셔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민망함이 출렁출렁 차올랐다. 가연은 얼굴을 총천연색으로 물들이다 결국은 고개를 떨구고는 아혼의 옷자락만 꼭 쥔 채 헌을 노려보았다. 보드레하게 부푼 눈동자가 제법 앙칼지게 빛나며 헌에게 닿았다.
“연 낭자. 주변이 어수선하니, 병사가 경계를 서고 있는 곳에서 반경 오십 보 이상 멀어지지는 마십시오. 제 수하들이 몸이 날래 오십 보까지는 괜찮습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나, 오십 보까지 멀어질 일은 없을 듯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병사들을 점검하러 가 보겠습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가연의 정중한 인사에 헌은 입가를 부드럽게 올리며 인사를 받고 떠났다. 헌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혼은 저를 보는 기색이 느껴져 시선을 돌렸다. 가연이 저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연하게 부푼 눈매가 다소 애달팠다.
“왜 그러세요?”
“저 각령이 마음에 들어?”
“대단한 분입니다. 기도와 그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은 분이세요. 아마도 이 나라에 크게 쓰일 겁니다.”
“마음에 들었구나.”
“대감마님과 그 맥을 같이 하시는 분입니다.”
아혼의 대답에 가연의 입가가 옴팡지게 악 물렸다. 아까만 해도 기분이 좋았는데 이제는 평감을 떠난 날 같아졌다.
“나보다 더 좋아?”
기어이 가연이 입을 비죽이며 묻자 아혼은 결국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밤하늘 아래로 낭랑한 목소리가 맑게 울리자 가연이 얼굴을 붉히며 팽 돌아 걸어갔다. 아혼이 그 뒤를 쫓으며 여전히 웃음이 조롱조롱 매달린 목소리로 답했다.
“그럴 리가요. 전 일편단심 아가씨뿐인걸요.”
아혼의 말에 가연은 하얗게 웃어 보이며 거만한 모습을 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멀리서 그들을 보던 헌은 두 사람의 소꿉장난 같은 모습에 결국 새어 나오는 웃음을 헛기침에 숨겨 토해 냈다.
가연은 병사들이 접근을 금지한 지역까지 죄 둘러보며 일행들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더니 못마땅한 듯 손톱 밑 살을 잠시 괴롭히다가 다소 굳은 기색으로 아혼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아혼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가연은 얼굴을 곱게 물들이며 속삭였다.
“큰일이야……. 측간도 막아 놨어. 상태가 어떻길래 막아 놓은 거지?”
“급하세요?”
“그건 아니지만…… 밤은 길어, 아혼. 이동 중에야 별수 없지만…… 있는데도 못 쓰는 건 좀…….”
가연의 말에 아혼은 침음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마님과 가연에게는 꽤 큰 문제였다. 그동안 이동하면서도 그 부분을 불편해했지만, 대부분 날이 밝을 때 이동했고 위험하지도 않아서 멀리 떨어져 급한 볼일을 해결해 왔다. 하인들이야 장소가 큰 문제가 없겠다만, 지체 높은 여인들에게는 지금처럼 사주경계가 엄격할 때 뒤처리를 하는 건 부담일 터였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가연의 시선을 느끼며 아혼은 귓불을 살살 긁었다. 일단 측간 상태부터 확인해야겠다.
“제가 한번 다녀오도록 할게요. 일단은, 마님 곁에 계시겠어요?”
“응, 그럴게. 이왕이면 좋은 소식 가져와 줘.”
가연의 당부에 아혼은 다기지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서히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평감에서 북으로 보름 거리, 게다가 산 중턱으로 제법 올라온 터라 날씨도 제법 싸늘해졌다. 아혼은 선득하게 파고드는 한기에 치를 떨며 객잔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객잔은 참혹했다. 해가 뉘엿뉘엿 누워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객잔 안은 당시 꽤 잔혹하게 휩쓸고 간 듯 사방이 거뭇한 핏자욱으로 얼룩덜룩했다. 얼추 정리된 덕에 시신을 볼 일은 없었지만 여기저기 꾸덕하게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말라붙은 지 오래라 치우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갖고 측실 쪽으로 다가갔다.
“노고가 많으십니다.”
아혼의 목소리에 흙으로 핏자국을 덮고 있던 병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중 나이가 제법 되어 보이는 이가 아혼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객잔에 혹시라도 사용 가능한 설비가 있는지 아가씨께서 궁금해하시기에 제가 대신 찾아왔습니다.”
아혼의 공손한 말에 사십에 접어든 듯 보이는 병사는 짐작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뒤쪽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툴툴대는 젊은 병사와는 다른 반응에 아혼은 그저 가벼이 웃음 지어 보였다.
“흠. 볼 필요도 없다. 사용이 불가해. 더군다나 그쪽은 아직 수습도 안 되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한번 살펴볼 수 있겠습니까.”
아혼의 말에 혀를 찬 병사는 턱으로 측간을 가리켰다. 아혼은 그가 가리킨 곳으로 다가갔다. 갈대와 싸리나무로 엮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퀴퀴한 썩은 내가 훅하고 입 안에 자취를 남기며 밀려 들어왔다.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으며 측간 안을 살폈다. 세 사람 정도 들어갈 작은 공간에 한 사내가 온몸이 촘촘히 베어져 벽 쪽을 바라본 채 널브러져 있었다. 돈 많은 상인인 듯 의복이 깔끔하고, 솜을 얇게 펼쳐 누빈 옷을 입고 있었다. 허리에는 전대였던 것으로 보이는 물건이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측간 바닥과 벽에는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피가 나무 벽 사이로 구석구석까지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측간 벽이나 설비 상태는 멀쩡했으나 수습한다고 사용이 가능한 상태도 아니었다.
아혼은 명복을 비는 축원을 입 안으로 외며 수많은 손길이 닿았을 측간 내벽을 손끝으로 매끄럽게 쓸어내렸다. 손끝에 파스스 부서지는 피의 감촉만이 선명했다. 반개했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기민한 감각에 석연치 않은 것이 걸렸다.
가연 옆에 있어야겠다. 아혼은 날래게 몸을 돌려 야영지 한가운데로 바삐 걸어갔다.
“아혼!”
어머니 손을 잡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가연은 저 멀리 보이는 아혼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조급했는지 아혼을 향해 걸어온 가연이 기대를 품고 물어 왔다.
“어때? 가능하겠어?”
“아뇨. 측간 사용은 힘들겠어요.”
시무룩해지는 가연의 모습에 아혼은 죄송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사홀의 곁을 지키는 단영에게 굳은 시선을 건넸다. 아혼의 시선을 느낀 단영은 입가를 단단히 굳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툭툭 쳤다.
저녁 식사는 단출하게 진행되었다. 불 사용이 필수 불가결하므로 차라리 곳곳을 밝히기로 한 야영지는 흡사 저잣거리처럼 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