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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몽 3화
1. 옮길 이(3)


저녁을 먹고 간단히 소세까지 끝난 가연은 사고 친 강아지인 양 시선을 가만두지 못하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잠자리 준비를 끝마친 아혼은 그런 가연의 기척을 느끼고 조용히 바구니 하나를 들었다.
“오는 길에 보니 야영지 근처에 숙면을 도와준다는 향초가 많더라고요.”
뜬금없는 이야기에 가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혼을 보았다.
“따러 가시겠어요?”
아혼의 권유에 가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평감보다 북쪽, 게다가 산 중턱이라 생각보다 날이 빨리 저물었다. 더군다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지만, 큰 변고가 있던 곳 근처에서의 야영은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스러웠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지 평상시보다 다들 날이 서 있었다. 날 선 기운은 날씨마저 예리하게 만들어 혼자서 볼일을 보러 갈 자신이 없었다. 이도 저도 못 하던 차에 아혼의 권유는 그야말로 적절한 때 최적의 변명거리였다.
“응!”
가연의 대답에 아혼은 가뿐히 웃어 보이며 길을 앞장섰다.
“오십 보 밖을 벗어나지 마세요.”
“네, 잊지 않겠습니다.”
병사의 경고에 아혼은 묵직한 무게가 실린 답변을 했다. 가연은 속으로 자신의 걸음 수를 세며 아혼의 소맷자락을 꽉 붙잡고 걸었다.
‘28, 29, ……40.’
“이쯤이면 될까?”
가연의 물음에 아혼은 힐긋 뒤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서로의 움직임은 보일 정도였다. 병사들이 이쪽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혼의 동의에 가연은 아혼에게도 저만치 떨어지라며 손짓을 했다. 그 모습에 아혼은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여기저기 군락 지어져 있는 향초들을 뜯었다. 금세 제 목적을 달성한 가연이 곁에 앉아 아혼이 뜯은 풀잎들을 신기한 눈으로 관찰했다.
“신기해. 꽃도 아니면서 이렇게 향긋한 향이 난다는 게.”
“옆에 두고 주무시면 잠이 잘 올 거예요. 이제 그만 갈까요?”
“그래.”
아혼은 흙이 묻은 가연의 옷자락을 털어 주고서는 야영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야영지를 지키고 있는 병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아혼은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혼의 표정에 불안함을 느낀 가연이 말없이 아혼의 옷자락을 꽉 틀어쥐고는 몸을 밀착했다. 가연의 동그란 눈이 아혼의 긴장을 옮아 불안하게 흔들렸다.
‘빛의 굴절. 아지랑이 같은 시야의 변화……. 환술이다.’
아혼은 솜털 하나까지 오소소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아가씨 환술 파훼법을 기억하십니까?”
“환술?”
가연의 경악 어린 목소리가 목이 졸린 사람처럼 새어 나왔다. 환술은 동쪽 타유라의 고유 능력이었다. 신이 타유라에게 준 그 능력은 공간과 감각을 완벽히 왜곡시킨다. 취약점이 있긴 하나 그것을 깨닫고 파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전쟁에 사용될 정도의 정교한 환술 능력자는 그 숫자도 드물어 나라에서 엄중히 관리하고 있다. 그런 환술자가 황국 깊숙이 침투했다는 사실에 가연은 숨조차 쉬지 못하고 아혼을 바라보았다.
등 뒤의 긴장을 느낀 아혼이 가연의 이목을 저에게로 집중시켰다. 아혼의 단단한 손끝이 가연의 얼굴을 감싸 올렸다. 그 감촉에 놀란 가연의 눈동자가 아혼을 마주 보다가, 드디어 영민하게 반짝였다
“무사히 나갈 수 있습니다. 제 곁에서 두 발자국 이상 떨어지지 마세요. 그리고 찾으세요.”
아혼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가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혼이 눈꼬리를 휘면서 마주 끄덕였다. 걸음을 옮기며 제 허리에 고정되어 있던 검을 언제든 발도할 수 있도록 오른손으로 움켜쥐었다.
밀도 높은 침묵이 주변을 휘감았다. 기민한 감각 사이로 이 공간에 타인이 있음을 느꼈다. 무거운 침묵에 긴장한 몸은 솜털 하나하나가 바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순간 사방에서 두 사람을 향해 비수가 날아들었다. 동시에 아혼은 가연을 끌어안고 나무 사이로 몸을 숨겼다. 비수 뒤에 또 다른 비수가 쉴 새 없이 뒤쫓아 왔다. 셋? 다섯? 아혼은 끊임없이 가연을 제 몸으로 가리며 달렸다. 어떻게든 에워싸인 형국을 풀어야 했다. 비수에 맞지만 않는다면, 사방에서 날아드는 비수는 환술의 생문을 알려 줄 것이었다. 문제는 가연이었다.
가연은 제 몸이 뻣뻣함을 느꼈다. 극한 공포로 인해 의식이 유리된 채 둥실거렸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차가운 날붙이. 그러나 땅에 박히는 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선명했다. 그런 가연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아혼이 어금니를 아프도록 악물었다.
동과 북이 뒤집히고 서와 남이 뒤집힌다. 하늘과 땅이 모호해지고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다. 그 모호한 감각 속에 드디어 날아오던 비수가 그쳤다.
비수를 다 썼나 보군.
아혼은 멍하니 생각하며 밭은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뒤는 내주지 않았다. 아혼은 그리 판단했다. 환술사를 제외하고 다섯. 그리 생각한 인원이 모두 제 앞에 서 있었다. 완연한 성인 남성. 아혼은 땀으로 미끄러지는 검을 재차 움켜쥐었다. 그때 아혼의 눈에 기묘한 나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사방에서 날아든 비수들 틈에 흠집 하나 나지 않은 나무 하나.
“아가씨.”
가연은 자꾸만 통제를 벗어나는 손에 힘을 주며 아혼을 보았다. 파리한 낯빛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가씨 우측의 참나무가 보이세요? 거기예요. 시각에 속지 말고 파괴하세요. 제가 막을 테니까요. 아시겠어요?”
아혼의 말에 가연은 무아지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까지 열 걸음.
두 사람의 시선이 나무에 닿는 것을 본 자객들은 시간 여유를 주지 않고 두 소녀에게 짓쳐 들어갔다.
“뛰세요!”
아혼이 가연을 나무 쪽으로 밀치며 자객들을 향해 내달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연은 되뇌며 정신없이 발을 뻗었다. 등 뒤로 들려오는 어지러운 금속의 소리가 숨 막히게 들려왔다. 다리가 내딛는 땅의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난 뛰고 있는 걸까?
부유하는 감각에 가연은 제 입술을 으득 물어뜯으며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나무 아래 주저앉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품 속에서 짧은 단도를 꺼내 들었다.
“어서 막아!”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다급히 울려 퍼졌다.
눈에 현혹되지 말아라. 믿은 대로 행하라.
배웠던 내용을 입 안으로 중얼중얼 되뇌었다. 과도한 긴장으로 자꾸만 손에서 단도가 미끄러졌다. 가연이 양손을 깍지 끼어 강제로 단도를 손안에 움켜쥐었다. 누가 봐도 단단해 보이는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믿는 거야.
가연은 입술을 으득 씹으며 참나무의 단단한 기둥 안을 향해 단도를 내리찍었다. 막힐 거라 생각한 그 손은 참나무 안으로 쑥 밀려들어 갔다. 손안에 날이 단단한 물건을 만나 부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퍼석하는 소리와 함께 단도가 땅 안에 박히는 감각이 느껴졌다. 기쁨에 고개를 돌린 가연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혼!”
아혼은 근육 한 올 한 올이 힘겨움에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난생처음 받아 보는 합공은 막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반격은커녕 끊임없이 쏟아지는 공격을 받아 내는 것이 전부였다. 상처들이 거듭 같은 자리에 쌓이니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앞을 막으면 옆에서 달려들고, 옆을 막으면 다른 자가 가연을 향해 달렸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방향을 자주 바꾼 팔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차츰 공세에 밀려 어느새 바로 뒤에 가연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가연이 참나무를 찍어 내린 순간, 적의 모든 칼날이 가연을 향해 내리꽂아졌다. 아혼의 검이 유려한 곡선을 뽐내며 몇 개의 검로를 휘어뜨렸다. 아혼의 몸이 가연을 덮었다.
“아혼!”
검격 사이로 가연의 비명이 날카롭게 빠져나갔다.
“수고했다.”
눈을 질끈 감은 아혼의 귀로 울림 좋은 목소리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머리 위로 온기가 느껴졌다. 안도감이 아혼의 폐부를 한 바퀴 휘감고 나갔다. 더듬더듬 시선을 짚어 올라가니, 헌이 긴 장도를 빼 들고 서 있었다. 차가운 금속 위로 체온을 담은 것이 진득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헌의 눈동자 안에 붉은빛이 넘실거렸다.
“한 놈도 남김없이 처단해라. 환술자를 생포해 와라.”
헌의 명령에 수십의 병사들이 효한히 몸을 날리며 뿔뿔이 흩어지는 이들을 뒤쫓았다.
“괜찮으십니까?”
헌이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한 가연에게 물었다. 가연은 멍하니 헌을 바라보다 그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몸을 움쩍거렸다.
“아혼, 아혼!”
“네, 저 여기 있습니다.”
가연은 여전히 저를 감싸고 있는 아혼을 다급히 부르며 시선을 맞댔다.
팔은, 등은, 다리는, 다친 곳은?
차마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염려는 고스란히 행동으로 옮겨져 그녀의 손이 정처 없이 허공을 짚어 나갔다. 그 모습에 아혼은 이제야 안도의 웃음을 흘리며 그 손을 꽉 쥐었다.
“괜찮아요. 어디 가지 않습니다. 약속했잖아요.”
“응. 응…….”
가연의 애끓는 음성이 울음으로 토해져 나왔다. 그 모습에 헌은 혀를 찼다. 어둠에 살라 먹힌 아혼의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한계까지 몰아친 팔은 후들거리고 있었고, 여기저기 칼에 빗맞은 몸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실혈도 컸는지, 입술이 파란 것이 체온마저 떨어진 듯 보였다. 등 뒤로 흘러내리고 있는 붉은 피는 머리 안쪽까지 이어져 있었다.
“야영지로 모시겠습니다.”
헌의 말에 그제야 헌을 바라본 가연은 흡사 구명줄을 잡은 손처럼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만 중얼거렸다.
“연 낭자 덕택에 늦지 않게 왔습니다. 밖에서 환술을 파훼하는 것이 몇 배는 더 오래 걸리는지라.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늦지 않으셨습니다. 둘 다 무사하니 늦지 않으셨습니다.”
가연의 말에 헌은 정중히 묵례하며 답했다.
가연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려 노력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자꾸만 휘어지는 발목이 서 있는 것을 거부했다. 그것을 눈치챈 아혼이 부축하려 했으나, 헌이 그것을 제지하고는 가연을 들어 올렸다.
“실례하겠습니다.”
“놓, 놓아주세요.”
“아가씨의 시비가 많이 다쳤습니다. 어서 돌아가시는 것이 저 아이의 회복에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헌의 말에 가연은 급히 아혼을 돌아보았다. 이지가 돌아온 눈에 어둠 속 아혼의 상태가 인식되기 시작했다. 저 몰골을 하고 어찌 괜찮다고. 다 제 탓 같아 가연은 이내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렸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가연의 허락에 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혼을 돌아보았다.
“따라올 수 있겠느냐?”
“괜찮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혼의 확언에 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야영지로 돌아갔다. 사홀 부인은 두 사람의 몰골에 기함을 토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두 사람을 객잔 안으로 끌고 들어가 요치했다. 심신이 고달팠는지 가연은 본인 몫의 천막 안에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다행히 아혼도 겉보기와 달리 깊은 상처는 없어서 깨끗한 면포로 둘둘 감긴 채 치료가 끝이 났다. 치료받는 내내 아혼은 불안한 기색이었지만 이내 가연의 곁에서 잠이 들었다. 한숨 돌린 사홀은 수하들의 보고를 듣는 헌에게로 다가갔다.
“장령. 어미로서 장령께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홀은 헌에게 깊숙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헌은 그런 그녀에게 가볍게 묵례를 취했다.
“어찌 된 일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누구였습니까?”
“자객들은 모두 사살, 환술사는 생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환술사가 껴 있는 이상, 아주 큰 암살 집단이거나 혹은, 타유라에서 보내 왔을 것입니다. 자세한 건 좀 더 조사를 해 봐야겠지만, 주변을 점검한 결과 더 이상 위협이 될 만한 일은 없습니다.”
“타유라…… 그렇군요.”
사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헌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안언이 오고 갔다. 두 쌍의 눈동자 속에 비친 불빛이 붉게 넘실거렸다.
“내일부턴 바삐 움직일까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리하는 것이 나을 듯싶습니다. 여정에 관한 것은 모두 장령께 일임하였으니 편하신 대로 행하십시오.”
“밤이 늦었습니다.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헌의 권유에 사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연이 있는 막사로 들어갔다. 불안을 담은 수런거림이 야영지 위로 얇게 내려앉았다.


***


여정은 빠르게 이어졌다.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만큼, 불안은 재촉하지 않아도 자연히 빠른 걸음에 묻어났다. 그렇게 한 달여가 지나자 일행은 드디어 융고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황의 수도 융고는 신이 산의 위치를 옮기고자 하였으나 쉽지 않자 산의 밑동을 잘라 낸 곳이라는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그만큼 지대가 높으면서 형태는 평야만큼 넓고 편평했다. 그 덕택에 사대국(四大國)의 침략으로 수세에 몰릴 때도 융고는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굽이치는 물길을 휘어 감고 우뚝 선 그 모습에 처음 온 이들은 압도된 채 멍하니 걸음을 옮겼다.
융고의 동쪽에 위치한 새 거처는 묵직하면서도 고아한 맛이 있었다. 크기는 작아졌으나 다섯 채의 건물과 후원의 연못이 평감의 저택을 축소해 옮긴 듯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장령께서도 부디 가내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낭자께서도 심신을 잘 추스르시고 후일 다시 뵐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가연은 그의 인사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은 그간의 피로와 그날의 여파까지 겹쳐 파리할 정도로 퀭했다. 충격이 컸는지 그날 이후 말수도 줄고 불안한 기색이 가시질 않았다. 그 모습에 헌은 조용히 묵례로 답하며 병사들을 물렸다.
“가자.”
헌이 저택을 벗어나 대로로 나가던 차에 뒤쪽에서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으리!”
며칠간 익숙해진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아직 상처 자국이 얼룩덜룩한 아혼이 다급히 뛰어오고 있었다.
“먼저 귀환하도록.”
“예.”
병사들을 먼저 돌려보낸 헌은 말머리를 돌려 아혼에게 다가갔다.
“어쩐 일이냐?”
아혼은 숨을 고르며 조용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연한 눈 속에 단단한 심지가 헌을 찌르듯 다가왔다.
“천한 소인이 감히 무례를 무릅쓰고 한 가지 여쭈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허한다.”
“어째서 객잔 근처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결정하신 것입니까?”
헌은 조용히 아혼을 응시했다.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이는 모습이 까만 정수리뿐이라 썩 마뜩잖았다. 쥐고 있던 마편으로 아혼의 턱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추자마자 헌은 비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맹랑한 시비의 눈에 들어 있는 불편한 의혹이 느껴졌다.
“물어보는 저의가 무엇이냐.”
“무례를…….”
“내가 답할 의무는 없지. 허나, 내 네가 탐이 나니 네가 참으로 궁금해하는 단 한 가지에 대해서는 답해 줄 수 있겠구나.”
헌의 말에 아혼은 눈을 반짝이며 헌을 올려다보았다. 햇빛 바로 아래 있는 헌의 얼굴이 까무룩 사라졌다 나타났다. 눈이 부셔 제대로 뜰 수 없는 시야 속에 헌의 얼굴이 까맣다.
“난 연가연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다.”
무슨 표정인가.
아혼은 헌의 날카로움 웃음 끝에 걸린 눈이 궁금했다. 보이지 않는 그의 눈을 향해 아혼의 시선이 어지럽게 닿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그저 굵은 턱선과 날카롭게 올라간 입술뿐이었다.
“네가 면천되는 날을 기다리지.”
다붓한 목소리가 아혼의 머리 위를 눌렀다. 급히 고개를 숙인 아혼의 눈 속에 사라지는 말의 편자만이 꽝꽝 내려앉았다. 어쩐지 귓가에 여전히 그의 웃음이 맴도는 기분이었다.


***


이전 집에서 가져온 밥그릇 하나를 새로이 들어가는 집 앞에서 사홀이 발로 깨며 들어섰다. 가연이 손에 받친 작은 묘목 하나를 입구 바로 옆에 심으니 새로 들어가는 집에 대한 예식이 끝이 났다. 어둑해질 무렵에야 이삿짐의 정리가 얼추 끝나, 결국 가연은 몸에 탈이 나 몸져눕고 말았다. 상태가 호전되지 못하고 밤새 열이 오르내려 사홀과 아혼은 뜬눈으로 그 옆에서 밤을 지새웠다.
“아혼아, 손님이 한 분 찾아오셨는데…….”
“손님이요?”
아혼은 밖에서 들려오는 문 총관의 목소리에 잔뜩 감긴 눈을 억지로 떴다. 가연이 열이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설마하니 밤새 열이 오르내려 사람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줄은 몰랐는데. 덕분에 여독이 아직 채 풀리기 전인 아혼도 기진맥진하긴 매한가지였다.
“아가씨를 뵙겠다 찾아온 손님이다. 지금 상태가 좋지 않다 말씀드려도 물건 하나만 건네면 된다 하시니, 혹 아가씨 상태는 어떠하느냐.”
융고에 연고 하나 없는 가연에게 찾아올 손님은 없다 생각했는데 의외의 소식이었다. 마침, 황궁에서 퇴청도 못 한 채 일하고 있는 대감마님을 위해 사홀마저 출타 중이라, 객을 맞을 이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혼은 난감함에 귓불을 살살 문지르며 눈만 간신히 뜬 가연을 보았다.
“아무래도 힘드시죠?”
“응……. 그냥 물건만 받아다 줘. 미안하다 전해 드리고.”
가연은 모래를 한 움큼 삼킨 듯 까끌거리는 목을 느끼며 간신히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아혼은 그런 그녀의 이마를 조심히 어루만지고 나서 밖으로 나섰다. 객은 이미 내실 앞에까지 들어온 상황이었다. 그 모습에 아혼은 미미하게 눈귀를 어그러뜨렸다.
“천한 것이 인사드리옵니다. 소인은 가연 아가씨를 모시는 시비이옵니다.”
“그래, 일어나거라.”
기품 있는 목소리가 버드나무 가지 같았다. 바닥에 반쯤 부복했던 아혼은 그녀의 허락에 몸을 일으켜 고개를 조아렸다.
“내, 연무록 대도위님의 따님께서 융고에 오신다 하여 준비한 것이 있어 이리 찾아왔다. 이왕이면 꼭 뵙고 전해 드리려고 하니 고하도록 하거라.”
“송구합니다, 아가씨. 지금 가연 아가씨께서 편찮으시어 말씀하시는 것조차 힘겨워하십니다. 후일 다시 찾아오심이 좋을 듯합니다.”
“우리 아가씨께서 거듭 요구하고 있거늘 어찌 말도 전하지 않고 안 된다 하는 것이냐!”
조심스럽게 말을 연 아혼에게 객 뒤에 서 있던 이가 날카롭게 언성을 높였다. 아직 어린아이인지라 거듭 거부당한 일에 자존심이라도 상한 듯 보였다. 아혼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나오기 전 아가씨께 의중을 여쭙고 왔으나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하시었습니다. 실례지만, 후일 다시 오시는 것이…….”
“나는 채자경 대군의 여식, 소운(霄云)이다. 다시 전하거라.”
아혼은 제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에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선 여인을 보았다. 가연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이는 목소리의 주인답게 기품 있었으나, 따스함은 일호도 보이지 않는 인상이었다.
“다시 아뢰긴 하겠사오나…….”
“내, 너의 생각을 물은 것이 아니다. 시비는 시비답게 굴도록 하여라. 네년의 섣부른 말이 네 주인에게 화가 될 수도 있음이야.”
매섭게 떨어지는 말에 아혼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평감에서의 버릇을 채 못 버린 제 탓이었다. 깊게 허리를 숙이는데 뒤에서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어찌 첫 방문에…… 기별도 없이 오셨습니까.”
소리조차 나오지 않아 흡사 숨만 빠져나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뜨거운 체온이 훅하고 소운에게 날아갔다. 가연의 드문드문 끊기는 소리를 느끼며 소운은 다소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저 여독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보였다.
“채자경 대군의 여식, 소운이라 합니다. 후일 다시 찾아뵙는 것이 낫겠군요. 제 또래의 벗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뜬 나머지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소운은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가연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제 몸이 이런 상태라…… 귀한 손님을 대접하지 못하는 점 죄송합니다. 다만…….”
목소리를 가다듬는 가연의 표정에 서린 단호함을 보며 소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혼은 그 모습에 아까와 참 다른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오실 땐, 제 시비를 너무 나무라진 말아 주시지요. 제 유일한 벗이며 젖동무랍니다.”
“이런……. 알겠습니다. 허면 후일 다시 기별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빨리 쾌차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람을 시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멀리 나가지 못하는 점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닙니다. 실례는 제가 먼저 한 것을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운은 사분사분하게 답하며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대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참…… 이상한 분이다.”
가연이 열로 흐릿한 눈으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열이 다시 오르고 계세요. 이만 들어가세요.”
아혼의 말에 가연은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주춤주춤 발을 옮겼다. 아혼을 보내 놓고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멍한 머릿속에 어머니의 엄중한 경고도 계속 맴돌았다. 대군의 여식이라 하니 더더욱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어떤 이인지도 모르는데 괜히 아혼만 엄한 꼴을 볼까 걱정되어 나갔는데 잘한 선택인 듯했다.
아, 정말 융고가 싫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한탄이 뜨거운 한숨으로 새어 나왔다.


***


붉은 노을이 넘실넘실 흘러넘치는 방에 두 사내가 마주 앉았다. 단상 위에 앉은 사내는 사람 같지 않은 안광을 노을빛 위로 범람하는 물처럼 흘려보내고 있었다. 형형한 기세와는 달리 그의 모습은 패전하는 전쟁의 마지막 장수와 같이 지치고 고돼 보였다. 그런 그의 기세를 온몸으로 받고 있는 사내는 연무록이었다. 바닥에 깊이 고개를 조아린 무록은 그 나잇대의 다른 중년인과 다르게 당장에라도 박차 오를 것 같은 호랑이같이 탄탄한 몸이었다. 무록의 얼굴엔 마주한 황제와 달리 여전히 생기가 흘러넘쳤다.
“대도위.”
“하명하시옵소서.”
“허허…… 하명이라.”
황제, 함순은 허허로이 웃었다. 그의 웃음 따라 방이 더 어둑해졌다. 한참을 그리 웃던 황제는 느른하게 웃으며 물었다.
“대도위. 그대는 참으로 이 황국의 충신이지.”
“신 연무록. 황국의 충실한 검이옵니다.”
“그래. 그리고 난 그대의 여식을 황실로 보내라 몇 해째 구애 중이고 말이야. 우리 대도위께서 사람을 참 감질나게 하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