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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품에 숨을 은 1권
(개정판)
1화

1. 후비 여(呂) 씨

1.


“마마, 기침하셨사옵니까?”
“……찬이더냐.”
“예, 마마.”
바란력 902년, 바란은 천하를 통일했다. 바란 제9대 황제의 업적이나, 그 업적은 사실 2대 왕부터 이어졌다. 바란의 차기 황제는 황제와 두 황후의 선택으로 정해진다. 선택받은 황자는 약관이 넘으면 황제를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한다. 황자에게 황위를 물려준 황제는 쉰둘의 여인들과 침략한 나라에 기거한다.
황제가 9번 바뀌니 천하가 통일되었다. 바란족이 바란 제국이 되었고 천하를 통일하면서 제국의 법도가 많이 바뀌었다.
바란의 초대 황제 강추(慷酋)는 황제는 두 황후와 오십의 후궁에게 보필을 받아야 한다 말했다.
“마마, 오늘 드디어 폐하께서 첫 황후마마를 책봉하신다 하셨지요?”
“그게 벌써 오늘이더냐?”
“예. 이래저래 말들이 많았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 즉위하신 것이 7년 전인데 아직도 두 황후직이 비어 있음을요.”
“폐하께서 하시는 일을 어찌 함부로 입에 담을꼬?”
“……소인,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강추의 첫째 아들 궁금(擒芎)이 즉위하면서 아비의 명을 받자오니, 천지에 여인들의 분 냄새가 진동하고 하늘이 부러워할 정도의 색으로 황궁이 뒤덮이더라.
그 후로 궁금의 셋째 아들 오백(吳佰)이 그 뜻을 높여 두 황후에게 동등한 권한을 내리고 오십의 후궁은 동등하게 황제의 은(恩)을 한 번씩 받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궁 안에 고른 기운을 퍼트리고 슬픔이 없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바란의 14대 황제 광야(曠惹)의 후궁 여(呂) 씨는 37번째 후궁으로 황제 즉위식 후 궁으로 불려 후비에 봉해졌다. 황제는 법에 따라 오십의 후궁에게 승은을 내리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마마. 책봉식에 나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
오백의 일곱째 아들 호모(好慕)가 말하니, 여인의 기운이 세 황제의 기가 위험하니 두 황후에게는 황인을 내려 그 기를 잠재우고, 후궁들은 궁인을 가질 수 있게 한다. 궁인은 궁녀와 살을 맞대서는 안 되며 그 씨를 잘라 후손을 보지 못하게 하여라.
호모의 다섯째 아들 군단(群團)이 이를 시행하니 문제가 있다 하여 법도를 바꾼다. 황제는 황인, 궁인에 대한 권한을 가지어 윤허하지 않을 시 여인들은 그를 요구할 수 없게 하여라.
“내키지 않는구나.”
“마마…….”
찬은 조식을 들고 오는 궁녀에게서 상을 건네받았다. 발 너머 마마의 아련한 한숨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알고 있다. 마마께서 얼마나 사람들 앞에 나서길 싫어하시는지. 그러나 책봉식과 같이 중요한 행사를 불참할 수는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찬은 딱히 마마를 닦달하지 않았다. 그저 발 너머로 보이는 아스라한 모습에 입을 다물 뿐이었다.
발 근처에 상을 두고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후비 여 씨의 궁인으로 이곳에 들어온 지가 벌써 1년이었다. 후비는 궁인을 세 번이나 내쳤다 하여 평판이 좋지 않았다. 색을 밝혀 한 궁인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찬은 궁에 들어와 단 한 번도 후비의 침상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살을 맞대기는커녕 그 향기조차 맡기 힘든 이였다.
궁녀장 정인이 발을 삼분지 일 정도 들고 상을 안으로 옮겼다. 같은 여인인 정인조차 후비의 얼굴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정인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상을 두고 물러섰다. 후비가 수저를 드는 소리가 잠시 들렸다. 정인과 찬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바란의 3대 황제가 만든 법도로 각 황후와 후궁은 한 명의 남자를 둘 수 있게 되었다. 후궁이 오십이나 되다 보니 황제의 은혜가 다 닿지 못한다 하여 생긴 법도로, 그 연유가 특수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궁인은 합법적으로 왕의 여자를 안을 수 있었다. 애초에 바란족은 그 생활이 문란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바란국에서 제국이 되면서 법도를 다듬었기는 하나 아직 용인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궁의 여인이 사내를 두는 것도 황제의 윤허만 있다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14대 후궁은 모두 황제의 승은을 한 번씩 입었다. 그중 16명의 후궁만이 궁인을 갖고 있었다. 황제와의 궁합이 아예 최악인 후궁들은 첫날밤 이후 바로 궁인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흠이 아니었다. 황제는 궁인을 가진 후궁에게는 승은을 내리지 아니했지만 그래도 후궁과의 연분은 유지하는 편이었다.
그중에서도 궁인을 자의로 세 번이나 바꾼 것은 후비뿐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후비는 끝이 났다고 수군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남자를 세 번이나 갈아치운 후비를 황제께서 찾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한 번 궁인을 바꿀 때마다 후비의 권세는 약해지기만 했다. 후비의 집안에 연줄을 대고자 하는 이들은 줄어 가기만 했다.
궁인이란 그런 의미였다. 황제가 다시 찾을 일 없으니 그 외로운 몸이라도 달래라고 황제가 베푸는 자비였다.
살을 섞기는커녕 그런 낌새 하나 없음을 알고 있는 찬으로서는 어찌 궁인들을 그리 내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적어도 소문처럼 색에 질려서는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탕의 간이 과하구나. 그를 알고 있더냐?”
“평소와 다를 바 없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탕을 다시 올릴까요?”
“아니다, 됐다. 다만 가서 내 과하다 말했다고 일러 주고 오너라.”
“예, 마마.”
정인이 자리를 비키자 후비가 상을 물렸다. 찬은 얼른 다가가 상을 받았다. 그 발 아래로 가늘고 긴 손가락이 슬쩍 보였다. 찬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후비의 향이 감돌았다. 음식 냄새가 나야 하는데 달콤하고 정갈한 향기만 났다.
발 너머 침상 옆 창가에서 아침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발 너머로도 뚜렷이 후비의 얼굴이 보였다. 찬은 옆으로 약간 비켜서 물끄러미 바라봤다.
1년이라는 긴 세월, 어쩌면 찬은 후비에게 있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에 기세등등해지는 법이 없었다. 이전의 궁인들도 한순간에 쫓겨났음을 너무도 잘 알았다.
찬은 참빗을 들어 발 앞에 섰다. 후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가로 몸을 돌렸다. 발을 어깨 높이까지 올린 후 머리를 빗겨 넘기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후비의 머리카락은 마른 편이었다. 머릿기름 바르는 걸 싫어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후궁들이 모두 윤나고 풍성하게 가꾸는 것에 비하면 검소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만큼은 이 단정한 흑발에도 동백기름이나 향지를 발라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천히 빗질하는 동안 후비는 창가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잠시 넋을 놓았던 찬은 제 손이 멈췄음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참빗의 가느다란 빗살 사이로 머리카락이 곱게 넘어갔다. 허리 너머로 내려오는 머리의 끝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어제도 거부하셨습니까?”
“찬.”
“마마께옵서 한사코 거절하시오니…….”
“궁인을 가진 이가 어찌 폐하의 승은을 입겠느냐.”
“하오나 마마께서는…… 한 번도 저를 취한 적 없지 않으시옵니까?”
“찬아.”
찬은 조심스럽게 전도를 들어 머리 끝자락을 다듬어 나갔다. 갈라진 머리카락들이 차차 잘려 나갔다. 가늘기 그지없었다. 힘이 없어 바람에 쉽게 흩날릴 것만 같은, 그런 머리카락이었다.
“폐하께서 소인을 부르셨습니다.”
“……그러셨……더냐?”
목소리가 조금 떨린다고 생각하며 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1년이나 모시다 보니 이제는 무엇을 원하시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오늘 일을 여쭈셨습니다. 책봉식에도 불참하지는 않을까 우려를 감추지 못하셨습니다.”
“……부질없는 걱정이다.”
“마마…….”
“어찌 폐하께서 양반만도 못하실까……. 손님 맞을 준비를 하여라.”
“예? 아, 예. 마마.”
찬은 조금 놀라 창 너머를 바라봤다. 천하의 황제마저도 한낱 손님일 뿐이라니. 후비는 참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찬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달리 황제는 종종 후비를 만나러 오고는 했다. 사실 그래서 더 입소문이 나는 걸지도 몰랐다. 차라리 황제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살고 있는 다른 열다섯 후궁 같았다면 궁인을 몇 명 바꾸든 입방아를 찧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황제는 아직 두 황후를 들이지 않았다. 즉위 후 바로 황후들을 맞이하거나 적어도 2년 이내에는 책봉한 선대 황제들과 달리 벌써 7년째 황후 자리는 비어 있었다.
특히 바란은 두 황후가 하나가 되어 황제와 동등한 권한을 가졌다. 그런 요직이 비어 있으니 후궁들의 권세가 지나치게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 결국 마지못해 황후를 맞이하겠다는 황제의 말은 파장이 컸다. 온 천하에서 황후가 되겠다고 올라온 여인들로 황궁이 시끄러워진 것이다.
후비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온 궁에 이미 들어차 있는 여인들의 분 냄새가 진동했다.
황후가 누가 되었든 후비를 무시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늘 두문불출하는 데다가 궁인을 세 번이나 바꾼 탓에 오십 후궁 사이에서도 이미 무시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씨 가문의 권세가 끊어지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황제의 방문이었다.
“이리 중요한 길일에 어찌 발걸음을 하셨나이까?”
참 마른 느낌이 나는 목소리였다. 시선도, 머리카락도 모두 그랬다. 살아 있는 듯, 죽은 듯 그렇게 자신을 감추고 있었다. 황제 광야는 인상을 찡그렸다. 얼굴 한 번 보기가 어찌 이리 어려울까. 그 의미를 이해한 듯 후비가 시선을 피했다. 황제가 와도 시선조차 주지 않는 냉정함이 서운해 광야는 일부러 코앞에 섰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아는가 보오?”
“물론 알지요. 어찌 모르겠나이까? 천지가 분내로 진동하옵니다.”
“투기라도 하는 건가?”
투기라는 말에 후비가 슬쩍 웃음을 흘렸다. 그것이 마치 비웃는 것만 같아 광야는 또다시 인상을 찡그렸다. 그를 본 후비가 슬쩍 손을 들었다. 원체 먼저 자신에게 다가오는 법이 없는지라 그 손동작을 광야는 믿을 수 없었다. 오른손 아래로 옷자락이 마치 춤을 추듯 가볍게 바람에 흔들렸다. 의복 하나도 정갈하기 그지없다. 후비에게는 화려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전신을 감싸고 있는 기품은 무시할 수 없었다.
“액상에 주름이 집니다, 폐하.”
“……내 후비의 손을 이리 가까이하는 것이 처음인 듯하오.”
“…….”
이마를 슬쩍 훔치며 주름진 미간을 펴도록 하던 후비가 그 말에 슬쩍 손을 뺐다. 아니 빼내려는 순간 광야가 그 손을 붙들었다. 금세 열기가 퍼졌다. 광야의 열기는 뜨겁고도 강해서 메마른 후비의 손에 금세 전해졌다. 그 손에 힘이 하나도 없어 광야는 더 힘을 주어 잡았다. 힘을 주지 않았다가는 그대로 쏙 빠져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단 한 번도 기회를 주지 않는구려.”
광야의 말에 후비가 씁쓸하게 웃으며 슬쩍 시선을 맞췄다. 그래도 황후를 책봉하는 날이라 그럴까, 생각보다 오래 상대해 주고 있었다. 평소에는 시선을 맞추는 법이 없고 대화를 해도 대꾸마저 거의 하지 않았다.
광야는 자신이 후비에게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미 궁인을 내린 후궁에게는 승은을 강요할 수 없다는 법도가 야속했다. 그녀는 궁인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을 상대조차 해 주지 않았다. 너무도 섣불리 궁인을 허하고 말았다.
차라리 그녀를 한 번 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체 누구의 후궁이란 말인가? 궁인이 자신보다 더 소중하단 말인가? 황제인 자신보다도?
7년 전, 후궁을 들였을 때 분명 그녀를 품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지나간 오십 명과의 잠자리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강한 향기를 품고 있는 존재를, 감추고 감추지만 결국 드러나 버리는 존재를 어찌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처음 승은을 요구한 것은 단순한 흥미였다. 궁인을 받았으면 죽은 듯이 살면 될 것을, 감히 궁인을 바꾸기까지 하는 게 흥미로웠다. 다른 후궁들이 궁인과의 잠자리를 어둠에 감춰 두는 것에 비해 그녀의 잠자리 소식은 너무도 요란했다.
궁인도 바꿔 가며 즐긴 주제에 승은을 거절하는 게 황당해 열두 달 후 다시 승은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어찌 궁인을 가진 자가 지존의 옥체를 더럽히리까.
“폐하와 저 사이에 기회라는 것이 무어 필요합니까.”
“…….”
“취하시고 싶으시오면 취하소서. 신첩이 어찌 무엄하게 기회를 드리나이까?”
후비는 덤덤하게 시선을 맞췄다. 황제가 요구하는 ‘승은’을 감히 거부한 것이 벌써 4년이었다.
‘진짜’ 후비 여 씨가 거부한 것이 1년, ‘자신’이 거부한 것이 3년.
후비 여(呂) 씨라는 역할을 맡은 지도 벌써 3년이었다.
“그리 돌려 말하면 내 못 알아들을 줄 아는가?”
“망극하옵니다.”
“내 그대에게…….”
광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감정으로 목이 멨다. 마치 구걸이라도 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4년을 기다려 주었다. 그럼에도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입술을 깨물어 말을 삼켰다. 이렇게 속을 긁으면 결국 터질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만 가리다.”
“황공하옵니다.”
“……이따 봅시다.”
광야는 거칠게 몸을 돌려 궁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후비의 시선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곱게 다듬은 검은 머리가 바람결에 흔들렸다. 햇빛에 말린 듯 머리카락에서는 빛의 냄새가 났다. 화장기 하나 없이 수수한 얼굴에는 기품이 감돌았다. 멀어지는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없이 메말라 있었다.
‘나를 꼭 빼닮았구나!’
바란의 14대 황제 광야(磺惹)의 37번째 후궁, 여(呂) 씨가 병사(病死)했다.
그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시신은 감쪽같이 사라졌으며 다음 날 아침, 여 씨는 별다른 일 없이 기침하였다.
어찰을 보내 승은을 요구하는 것이 바란의 법도였다. 황제는 후궁의 침실에 가지 않는다. 황제가 후궁을 부르는 별궁이 따로 있었다. 후비는 황제를 바람 맞힌 최초이자 최후의 후궁이었다.
오십이나 되는 후궁을 가지고 있는 황제가 단 한 명의 후궁에게 집착할 연유가 어디 있겠는가. 황제는 주저하지 않고 다른 후궁을 불러 안았다. 그렇게 보내온 4년이었다.
황제는 몸이 달았건만, 후비는 응하지 않는다.



2.



[듣거라. 내가 죽으면 너도 죽은 목숨이다.]
[……마마. 그런 불길한 소리 입에 담지 마소서.]
[그것이 바란의 법도이니라. 후궁이 질병을 몰고 오면 가장 먼저 내치는 것이 궁인이다. 살고 싶으냐?]
[마마, 소인의 목숨은 그저…….]
[아니다, 내가 살려야겠다. 내가 너를 살려야겠어. 너를 살려야 우리 가문이 산다.]
후비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찬이 조심스럽고 고운 손길로 향지를 바르기 시작했다. 후비마마의 역할을 하기 위해 여인의 몸짓을 연기하고 있지만 그래도 분칠을 하거나 머릿기름을 바르는 일은 최대한 삼가고 있었다. 그만큼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라의 대사는 달랐다. 혹여라도 꼬투리를 잡힐 건수를 제공해서는 안 됐다.
자신의 생김이 정말 여인네 못지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후비가 되었으니까.
찬은 후비의 머리를 반만 올려 묶어 장식하기로 정했다. 그는 의외로 재주가 깊어 머리를 잘 만지고는 했다. 매일 아침마다 후비의 머리를 빗질하는 것이 그의 일과이기도 했다.
[네가 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 죽는 것이다. 우리 가문 모두를 멸하고 싶다는 것이냐?]
그녀는 표독스러웠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자신이 사는 길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키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황제를 속이는 것이니까.
“수심이 가득하십니다.”
찬의 목소리가 후비를 깨웠다. 넋을 놓고 앉아 있던 탓에 고개가 어느새 옆으로 쏠린 모양이었다. 후비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바로 했다. 찬이 머리를 반쯤 틀어 올려 고정하고 있었다. 꽃무늬의 머리 장식들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찬이 그것을 받아 들어 후비에게 선보였다.
“네 눈에 보기 좋은 것으로 고르거라.”
결정을 미루는 후비를 보며 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보기에는 정갈한 머리카락과 설원같이 하얀 피부를 가진 후비에게는 청금석이 으뜸이었다. 망설임 없이 청금석이 박힌 백합 장식을 들었다. 은색의 백합 위에 청금석을 장식하니 안 그래도 청초한 미모가 더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후비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고 찬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