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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나로서, 후비로서 살거라.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래두! 궁인을 가진 후궁을 누가 건드린다는 말이냐? 내 안 그래도 내 얼굴을 알고 있는 궁녀들을 하나둘씩 갈아치우고 있다. 너 말고는 그 누구도 내 얼굴을 몰라!]
[마마…….]
[폐하께서 지난해 나를 한 번 찾으신 적이 있다. 내 그를 거절하였지. 그것이 이 나라의 법도다. 궁인을 가진 후궁은 황제라 하더라도 건드리지 않는다. 아무도 모를 것이야. 네가 부귀영화를 누리기만 하면 얼마나 많은 이가 살 수 있을지 생각해 봐라.]
[그러나…… 소인은 미천한 남정네이온데…… 어찌, 감히…….]
[그러니 그 누구도 의심치 않을 것이야. 이미 황제의 눈 밖에 난 후궁을 누가 찾는다고 그를 알아차린단 말이냐. 황실에서 배정해 주는 궁녀들과 달리 궁인은 후궁의 외가에서 데려오는 것이다. 폐하는 윤허만 해 주실 뿐이지. 그러니 아무도 모른다.]
[…….]
[생각해 보아라. 너를 먹여 주고 키워 준 가문을 살리는 일인 걸 알지 않느냐!]
그랬다. 그는 여씨 가문에서 나고 자랐다. 귀족도 아니었고 신분에 뒷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궁인으로 뽑혀 올 만한, 그런 힘 좋은 사내도 아니었다. 그저 한 사람의 시종으로 일을 하고 있던 그는 궁인으로 황궁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은 생각지도 못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의도적이었다. 가장 그녀를 닮았으면서 문제 될 것이 없는 존재.
그것이 지금의 후비였다.
“인상을 찡그리시면 분을 곱게 바를 수 없습니다, 마마.”
찬의 말을 듣고서야 후비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오늘 다시 황제 폐하를 뵈어서 그런지, 자꾸만 상심에 빠져들었다. 그날의 기억이 늘 자신을 괴롭혔다. 그녀의 명을 받들어 그녀의 삶을 대신 산 것이 벌써 3년이었다. 모두 다 그녀의 계획대로였다.
후궁이 병이 들면 그 화는 온 가문에 미친다. 황제를 모시는 이가 역병을 몰고 온다는 것이었다. 황제와 몸을 섞은 이에게 부정한 기운이 있다는 것은 죄가 된다. 병이란 천운에 달린 것임에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죽은 후비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그를 이용했다. 후비의 얼굴을 아는 궁녀들을 이런저런 이유로 좌천시키고, 새로운 궁녀들에게는 발을 쳐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다. 후비의 침실 안에서만 생활하는 궁인이었던 그의 얼굴을 아는 궁녀는 없었다.
“핏기가 가신 것이…… 혹여 미령하기라도 하신 겁니까?”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분내가 조금 과하구나.”
“언짢으십니까?”
“……그냥, 그냥 조금 쉬었다 하자꾸나.”
“예, 마마.”
찬은 붓을 내려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후비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마저도 찬은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분을 바르기는 하였지만 후비의 얼굴은 아직도 청초해 보였다. 화장을 싫어하는 것을 알기에 가장 연하고 살색에 가까운 분을 쓴다. 그럼에도 그 향이 거슬린다고 하니 오늘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은 고개를 돌려 정인에게 말했다. 발 너머에 서 있는 정인은 후비의 얼굴을 보지 않고자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대조차를 달여 오너라.”
“예, 나리.”
후비는 찬의 말에 딱히 토를 달지 않았다. 대조차라, 이런 날에는 그런 달곰씁쓸함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황후 책봉식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은 것은 아니었다. 정오에 시작될 책봉식 때문에 온 황실이 시끌벅적했다.
후비의 궁은 황궁 중심부에서는 꽤나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객을 위한 궁 쪽에 더 가까운 편이었다.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창틀에 기댄 채 그를 즐기고 있자, 바깥에서 누군가 인사를 건넸다.
“후비마마, 기침하셨어요?”
앳된 목소리와 함께 황금 공이 굴러 왔다. 후비는 슬쩍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황자를 내려 봤다. 창가 근처에서 멈춘 공을 잡은 황자가 활짝 웃었다. 제1 후궁 현비의 아이였다.
현비는 첫 승은에 바로 황자를 가졌다. 그 후 궁인을 윤허 받아 황자의 어미임에도 불구하고 본궁에서 멀리 떨어진 후비의 옆 궁에 머물렀다. 궁의 위치가 황태자 책봉에 영향을 끼치지 않음을 알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황궁의 중심으로 향할수록 투기도 심하다. 황자의 교육에 좋지 않다며 현비는 전황후궁 옆, 첫 번째 후궁의 궁을 마다했다. 그럼에도 아무 문제 없이 장자의 어미로 대접받았다.
이제 여섯 살 난 황자 효난(曉暖)이 쪼르르 창가 아래로 다가왔다. 쑥쑥 자라고 있는 그는 최근 몸높이가 창틀을 넘어섰다. 후비는 웃으며 효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황자는 아침부터 기운이 넘칩니다.”
“네! 어마마마께서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하였습니다.”
“그랬나요? 황자는 그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효난이 큰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임에도 조숙한 것이 조금 전 공을 차고 놀던 모습과 많이 달라 보였다.
“국모를 모시는 날이라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그렇지요, 전(塡)황후마마이시지요.”
“예! 황후마마는 새로운 마마가 맞으시죠?”
효난의 말에 후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오늘 책봉되는 황후는 한 명뿐이었다. 다른 한쪽(후(厚)황후)이 책봉되지 않으면 황후의 권한은 고스란히 전황후에게 넘어갈 터였다.
후비는 어찌하여 황제가 두 황후를 한 번에 들이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역사에 황후 자리가 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황후가 없으면 후궁들의 힘이 세진다. 그것은 곧 태자 책봉에 영향을 미친다. 두 황후가 없으면 황제 홀로 권한을 가지니 황제를 구워삶은 후궁이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혹 이번처럼 한 명의 황후만 책봉되면 그녀가 낳은 용종이 다음 황제가 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우리 황자는 아주 똑똑하군요. 제가 다 기쁩니다.”
“후비가 기뻐 봤자 무엇에 쓸까.”
후비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효난의 어깨를 감싸며 다가온 현비가 입을 내밀었다. 후비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황자를 찾아오셨습니까?”
“그렇소. 어찌 아직도 치장을 마치지 않았소?”
“예, 지금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래도 어찌 분칠은 했구려. 설마 오늘도 두문불출할까 싶었다오.”
현비는 앙칼진 목소리와 쏘는 말투에 비해 성품이 따듯했다. 늘 후비궁에 숨어서 자신을 감추고 사는 후비를 걱정해 주었으면 걱정했지 남들처럼 무시하지 않았다.
“현비는 폐하와 같군요.”
“폐하도 그리 걱정하셨소?”
“예. 허나 어찌 일개 후궁이 황후 책봉식에 빠진단 말입니까? 괜한 걱정이십니다.”
후비의 말에 현비가 눈을 흘겼다. 그녀는 이미 책봉식에 갈 채비를 끝마친 모습이었다. 장자의 어미로 화려함과 기품을 두루 갖춘 현비는 서 있는 그 자체로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금강석으로 장식한 머리채부터 그 세를 나타내는 황색의 의상까지. 그럼에도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는 말에 후비는 질색을 했다.
찬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조속히 궁녀를 시켜 가장 화려한 의상을 가져오라 시켰다. 후비가 내민 거부의 손짓은 가볍게 무시되었다. 그사이에서 황자 효난은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현비가 효난에게 궁으로 돌아가 의복을 갈아입으라고 명했다. 현비의 궁인, 호가 효난을 따랐다.
“아름다우십니다, 현비.”
“그래야지요.”
찬이 항료를 섞은 먹으로 호를 그려 눈썹을 채웠다. 연하기 그지없던 후비의 눈썹이 짙어지면서 그와 함께 인상도 한결 강해졌다. 과하지 않을 정도로 색을 맞춘 후 버들잎처럼 부드럽게 아래로 내려 빼자, 현비도 마음에 드는지 드물게 칭찬을 했다.
“감히 폐하를 감싸 안을 수 없다 해도 나는 내가 후궁의 얼굴이라 생각합니다, 후비. 나는 첫째 황자의 어미이자 첫 번째 후궁이요. 내가 아름답고 내가 강해야 황후가 우리를 무시하지 않겠지요.”
현비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후비는 그녀의 내면을 좋아했다. 그녀는 강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나는 폐하의 속을 모르오. 지존의 뜻을 어찌 함부로 잴까. 그러나 전황후는 누가 간택되든 오늘 톡톡히 신고식을 당할 것이요.”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현비.”
“것 보시오. 늘 궁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소식을 알 리가 있나. 우리가 궁에 들어온 지 7년이 지났소. 공석이었던 국모의 자리를 꿰차고 올 여인이 궁금하지도 않소?”
“그야…… 맞는 말씀이기는 합니다만, 어쩌시려 그러십니까. 혹여 폐하의 심기를 어지를까, 심려되옵니다.”
후비의 눈썹이 조금 찡그려지자 찬이 바로 지적했다. 속눈썹 사이사이를 가느다란 붓으로 먹칠하고 있던 찬의 지적에 후비는 표정을 지우려고 애를 썼다. 연하기만 하던 인상이 조금씩 뚜렷해진다. 꾸밀수록 화려해지는 인상에 현비가 가만히 찬의 솜씨를 감상했다.
“별다른 게 아닙니다. 단지 아무나 인정할 수 없다는 거지요. 지존을 품을 여인이 한낱 토끼여서 되겠습니까?”
아이고, 현비. 암사자라도 오지 않는 이상 인정하기 싫다는 듯이 들립니다. 후비는 차마 입은 열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이윽고 눈꼬리를 길게 빼 순하던 인상을 조금 날카롭게 바꾼 찬이 비켜섰다.
“여하튼 의복도 다시 고르시오, 후비. 설마 오십 후궁 전체의 뜻을 거스르지는 않겠지요?”
“현비, 내 명을 받잡겠소이다.”
거스르지 말라는 말씀을 참 곱게도 하십니다. 후비는 설핏 웃고 말았다. 후궁들의 모임에는 전혀 나가지 않는지라 그녀들의 모의(?)에 대해 무지했다. 사실 그 누가 황후로 들어오든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남자인 자신은 자식이 없다. 태자 책봉 문제로 골을 썩일 필요도 없고, 황후가 패악을 부린다 하더라도 궁인을 가진 후궁들은 알아서 제외될 것이다.
자신의 유일한 벗과 같은 현비였고, 또 후궁들의 우두머리 격인 그녀의 말이니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웃은 것뿐이다.
복숭앗빛 연지로 입술을 마무리한 찬이 그런 후비의 웃음에 얼굴을 붉혔다. 그에게는 화장을 해드리는 지금이 유일하게 후비의 얼굴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화장하지 않아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만큼 꾸며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본연의 아름다움은 저만 알면 된다고, 남들에게는 기품 있고 강한 모습을 보여 주겠다는 작은 욕심이었다.
찬이 조금 떨리는 손길로 머리카락을 정리한 후 한 걸음 물러섰다. 후비는 거울을 보는 대신 현비를 바라봤다. 현비는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물러갔다. 아무래도 좀 더 치장하고 싶은 듯싶었다.
“오늘 한바탕 폭풍이 일겠구나.”
뒤에서 의복을 준비하던 찬이 후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3.
“소인은 오늘 마마가 새로워 보입니다.”
“그 무슨 뜻이더냐?”
책봉식을 위해 궁을 나서는 길이었다. 궁녀들이 후비의 좌우로 서서 양산을 받쳐 햇빛을 가려 주었다. 찬은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책봉식을 위해 궁에 들어간 후에는 따로 궁인의 자리에 서야 한다. 후궁의 자리에 함께할 수는 없었다.
궁녀들은 종종 궁인과 후궁의 대화를 듣는다. 그리고 그 대화는 궁녀들 사이에 퍼지고는 했다. 처녀인 궁녀들에게 후궁과 궁인의 사랑 이야기는 꽤 흥미로운 소재 거리였다. 후비는 의외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 연유는 감추어야 할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후비의 궁녀에게 후비와 궁인의 관계에 대해 묻는 이들이 많았지만, 그녀들은 해줄 말이 하나도 없었다. 찬은 궁인이라기보다는 집사라 하는 편이 더 어울렸다.
“마마께서 평소 질색하시는 장신구까지 이리 차셨으니 어찌 새롭지 않겠습니까. 화장과 의복이 사람을 만든다 하더니 마마께서 딱 그 표본이십니다.”
“어허, 네가 말재간을 부려 무엇을 원하는고.”
“마마께서도 싫지는 않으시지요? 오늘 모두 마마를 되돌아볼 것입니다.”
이 아이가 철이 덜 들었구나. 후비는 쓰게 웃었다. 그는 사람들이 저에게 시선을 주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왕이면 없는 듯이 살고 싶었다. 괜히 두문불출하는 것이 아니었다. 외로워도 홀로 숨죽이고 사는 자신을 찬은 이해하지 못했다.
“찬아.”
“예, 마마.”
“나는 공기이고 싶구나.”
“…….”
“아무도 곁에 있는지 모르는 공기 말이다.”
하늘이 내린 목숨이 질겨 아직 죽지는 못하니 투명한 공기처럼 살고 싶다.
후비의 말에 찬이 입을 다물었다.
언제 들킬까 조마조마하게 간을 졸이는 삶은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황제의 돌변이었다. 죽은 후비도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복병.
궁인을 내렸다고 해도 후궁은 후궁이었다.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있는 자는 천하에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궁인을 가진 후궁에게 승은을 강요할 수 없다 한들 황제의 승은을 거부할 후궁은 없었다. 상대가 제 지아비인 황제인 데다가 승은은 곧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기회였다. 황자, 태자, 다음 황제. 그 꿈에 부풀어 후궁들은 승은을 기다린다.
후궁이 오십이나 되니 황제는 굳이 궁인을 붙여준 후궁을 부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황제가 궁인을 가진 후궁을 부를 때가 있었다. 흔한 일은 아니었다. 어쩌다 생각나면 제비뽑기하듯 승은을 내릴 후궁을 뽑아 보는데, 마침 뽑힌 후궁이 궁인을 가진 자일 뿐이었다.
그렇게 뽑힌 37번째 후궁이 거절의 답신을 보내오자 황제는 흥미가 돋았다. 궁인과 사랑에라도 빠졌는가. 그리 자조하며 다른 후궁을 불렀다.
열두 달이 지나고, 37번째 후궁의 ‘후’라는 명호가 다시 나왔다. 어떤 여인인가 살펴보니 집안도 꽤 좋았다. 7대 황제 때 황제의 거처를 위한 토벌에 참가해 공훈을 세운 후로 권력을 가졌다. 후궁을 배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런 집안이라면 승은을 반길 만도 한데 두 번째에도 돌아온 것은 정중한 거절이었다.
어찌 궁인을 가진 몸으로 지존을 더럽히겠습니까.
스스로를 더럽다고 비하하며 거절하니 그걸 또 괜찮다고 부르기도 뭐했다. 그래서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자꾸만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또 몇 달이 지났을 때는 어찰을 내리지 않고 직접 발걸음을 옮겼다. 오십의 후궁이 각각 궁을 가지고 있는 황실의 제도 때문에 37번째 궁은 참으로 멀었다. 도중에 지쳐 다른 후궁의 궁을 방문하기도 했다. 후비의 궁까지 가는 길에는 유혹이 너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또 몇 달이 지나 겨우 후비의 궁에 도착했다. 말이라도 타야 할 거리였다. 도착하고 나니 첫 번째 후궁, 현비의 처소와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황자 효난의 경우 현비가 데리고 중앙궁으로 오니 현비의 궁에도 행차했던 적이 없었다.
후비는 당황했다. 황제가 궁을 방문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않았다. 궁인으로 후비를 모시고 있을 때도 황제가 직접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죽은 후비의 자리를 대신한 후에도 어찰이 한 번 내려왔을 뿐이었다. 후비가 했던 것처럼 거절하니 딱히 이러한 답변 없이 흘러 지나갔다. 그래서 이대로만 지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숨죽이고 죽여서 그 누구도 후비라는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게 공기처럼 살면 되는 거다.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다. 실제 황제가 후비궁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정말 그랬다. 황제의 승은을 거부한 후궁이라는 꼬리표가 붙기는 했어도 그걸 꼬집는 이는 거의 없었다. 오십이나 되는 후궁이다. 다들 황제의 애첩에 관심을 가졌지, 궁인을 가진 후궁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황제가 직접 걸음을 했다. 그 면면을 보자고. 그때부터 이야기가 달라졌다. 후비는 구설에 올랐다. 감히 지존을 거부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후궁이라고. 궁인을 두 번이나 바꿨다고. 색을 그렇게 밝힌다고.
후비는 그래도 다 좋았다. 구설에 오르는 것은 상관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대꾸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소문이란 가라앉는 법이다. 그 소문을 좋게 바꿀 필요가 없으니 내버려 두면 됐다. 그런데 자꾸만 황제가 그것을 망쳤다.
[그대가 후비요?]
[예, 폐하.]
[그대 면부가 참으로 비싸 내 직접 걸음을 하였구려.]
[황공하옵니다, 폐하. 신첩이 불충하옵게 지존의 걸음을 이끌었나이까. 대처분을 하옵소서.]
[뭐…… 딱히 그런 소리를 들으러 온 것은 아니오.]
한참을 걷던 후비가 두 궁녀가 서자, 같이 멈춰 섰다. 중앙궁으로 가는 길이 일통하다 보니 다른 후궁들과 마주쳤다. 중앙궁에 가까울수록 서열이 높아 후비가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14번째 후궁이 고깝게 말했다.
“거, 누군지 얼굴도 잊어버릴 지경이요. 어쩜 그렇게 꼭꼭 숨어 사시오?”
“어머, 윤비도 참. 자리가 좋으니 어디 지존이 성이 찰까? 굳이 왜 나오겠소.”
후비는 대꾸하지 않았다. 뒤에서 찬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직 어려 감정을 숨기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후비는 내버려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