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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궁인이 없는 윤비와 청비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고고하게 서 있는 후비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금세 새초롬한 표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행히 오늘의 먹이는 후비가 아니었다.
“찬아.”
“예, 마마.”
“나를 모시고 싶으면 너도 공기가 되어라.”
“마마…….”
찬이 억울하다는 듯이 따졌다. 그러나 후비는 대꾸하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보통 후궁이 걸음 할 때, 뒤를 따르는 궁녀는 그 후궁 가문의 위용을 나타냈다. 앞서 걷는 윤비와 청비의 뒤로 대략 열쯤 되는 궁녀가 따랐다. 그에 비하면 후비는 기껏해야 셋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햇빛 가리개를 들고 있는 두 궁녀와 찬까지 합치면 여섯은 된다. 그래도 확실히 적었다. 그럴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할 뿐이었다.

*

책봉식이 거행되는 중앙궁의 앞마당은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11자 형태로 대신들과 후궁들이 서로를 마주한 채 자리하게 되어 있었다. 몇 단 위에 마련해둔 자리가 바로 황제의 자리였다. 황제의 옆 두 좌석은 공석이었다. 오늘 그 한쪽이 채워지는 것이다.
이미 신하들은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 붉은 의복들이 정갈해 보였다. 그에 비하면 후궁석에는 아직 빈자리가 많았다. 찬을 물리고 후비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서열대로 배치되어 있는지라 헤맬 일은 전혀 없었다. 현비의 자리가 아직 비어 있는 것을 보고는 슬쩍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아마 폐하와 같이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현재 위상이었다.
황후 후보들은 이미 자리를 하여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어 빛이 났다. 아무리 그래도 오십의 후궁만큼 빛날 수는 없었다. 서열이 낮을수록 먼저 오는 법이었다. 가장 서열이 높은 후궁들 빼고는 모두 이미 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장관이었다. 각각 자신을 뽐내고 있어 모아서 보면 과할 것만 같은데도 그렇지 않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름다운 것이 모아 두니 절경이었다. 후비는 그 안에 스르르 녹아들었다. 자신의 기를 죽여 눈에 띄지 않도록 했다.
찬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후비는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황후 후보들보다 더 아름답다. 단연코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고른 장신구와 의복을 입고 자신이 완성한 화장으로 치장한 그녀는 그야말로 선녀였고 최상의 미였다. 그것이 단지 눈에 콩깍지가 씐 것이라 할지라도 찬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어 도착한 후궁들이 맨 앞줄에 자리하자, 곧 내관들이 황제의 입장을 알렸다. 후비가 예상한 대로 황제는 현비와 함께 나왔다. 그리고 그 옆을 세 황자와 일곱 황녀가 따랐다.
현비는 이내 자신의 자리로 향했고 황제는 중앙의 옥좌에 앉았다. 그 옆을 둥글게 둘러싸게끔 놓인 보좌에 황자와 황녀가 자리하고 나자 좌중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이리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모두가 황제에게 집중하며 숨을 죽였다. 광야는 입을 다문 채 주변을 둘러봤다. 전체를 쑤욱 훑고 난 후 후궁석에 시선을 고정했다. 한 자리도 빠짐없이 채워진 것을 보고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중앙에서 조금 먼 자리에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안 오고 싶어 하는 것 같더니 꽤나 공들인 모습이었다. 광야는 이윽고 중앙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塡)황후를 간택, 책봉하기로 하여 이리 자리를 만들었다. 나라의 축일이 될 터이니 모두 낙락한 마음으로 즐기기를 바란다. 어디 진행하여 보아라.”
광야의 말에 다들 표정을 굳혔다. 황제가 원하여 책봉식을 거행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떠밀려서 만든 자리임을 표정에 드러내면서 입으로는 즐기라 하니 그 모순이 너무도 명백했다.
진행을 맡은 총선 대감이 앞으로 나왔다. 황후 후보들에 대해 적혀 있는 상서를 건네자, 광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받았다.
“폐하. 오늘 황후 후보로 모신 다섯 규수는 심도 있고 엄정한 심사를 거쳐 간택되었사옵니다. 그 누가 황후가 되더라도 손색이 없을 줄 아뢰옵니다.”
광야는 황후 후보들이 자리하고 있는 중앙으로 시선을 두었다. 총선의 명을 따라 두꺼운 야외용 방석이 중앙에 놓이고 다섯 후보가 불려 나왔다. 한 사람 한 사람씩 떼놓고 봐도 그 어느 후보도 기죽지 않을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후궁석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광야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내 황제로 즉위한 뒤 말이 많았다. 어찌하여 황후를 들이지 않는지. 바란의 두 황후란 국모일 뿐 아니라, 바란을 떠받드는 두 기둥이다. 그 기둥을 어찌 쉽게 뽑을 수 있겠는가.”
모든 이들이 황제의 말을 경청했다. 몇몇 신하는 저 황제가 변심하여 황후를 안 뽑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근심을 거두지 못했고, 후궁들 쪽에서는 뽑지 않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어디 한번 어떤 황후가 될 것인지 들어나 보자.”
황제의 말이 끝나자 주위가 술렁였다. 총선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분명 후보는 다섯이었으나 이미 상서에 진짜 후보 명호에 밑줄을 그어뒀다. 이 모든 건 이미 정해놓은 예비 황후를 위한 행사일 뿐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시간을 끄는 것이다. 총선이 골머리를 앓든 말든 광야는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자신들을 봐 달라고 치장한 여인들을 앞에 두고 이런 지루한 일을 해야 하는가. 차라리 오십의 후궁과 주지육림을 벌이는 쪽이 더 재밌을 것 같았다. 그것참 좋은 생각이다. 왜 한 번에 한 명의 후궁하고만 즐길 수 있단 말인가. 지존으로서 주지육림 정도는 요구해도 되는 것 아니냐며 광야는 피식 웃었다.
그사이 첫 번째 후보가 일어나 제 생각을 표명했다. 안타깝게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광야는 주지육림을 떠올리며 후궁석을 바라봤다. 봐 달라고 눈빛을 보내고 있다가도 황제가 진짜 바라보자 후궁들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마주했다.
시선 끝에 잡히는 이는 단연 후비였다. 아무리 숨을 죽이고 기를 죽이고 앉아 있어 봤자 눈에 띄었다. 제 깐에는 공기인 양 존재감을 지우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은 관심 없는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일이었다. 오죽 몸이 달았으면 황후 책봉식 아침부터 찾아갔는데, 숨죽이고 있다고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광야는 물끄러미 후비를 바라봤다. 후비는 이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다. 그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하고 싶었다.
[지존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가?]
[황공하옵니다. 신첩, 그런 불충한 생각은 꿈도 꿔 본 적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왜 번번이 거절하는 겐가?]
[……궁인을 들인 몸이옵니다, 폐하. 신첩의 모자란 머리로도 감히 지존의 옥체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사옵니다.]
[궁인을 들인 후궁이 자네 하나인 줄 아나? 그럼 짐은 더러워졌어도 진작에 더러워졌을 것이다.]
[신첩을 죽여 주시옵소서, 폐하.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었사옵니다.]
[다른 변명이 있다면 또 해 보게.]
[신첩이 어찌 그럴 수 있겠사옵니까. 폐하께옵서는 지존이시옵니다. 취하고자 하신다면 취하시옵소서.]
세 치 혀로 저를 요리하던 후비가 떠올라 광야는 피식 웃었다. 막 황후로서의 자신의 포부를 밝힌 후보가 얼굴을 붉혔다. 제 포부가 미약해 황제의 성에 차지 않은 것 같았다. 다들 저 후보는 틀렸어, 하고 한숨을 뱉었다. 총선 역시 어차피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던 후보가 쪽마저 팔리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 꽃을 억지로 꺾으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네.]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대는 짐이 직접 걸음 한 이유를 무참히 짓밟는구려.]
참 당돌한 여인이었다. 승은을 거절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취하라 배짱부리는 것도 우스웠다. 취하라고 하지만 그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정말 마지못해 지존이라 어쩔 수 없다는 그 말투에 기분이 언짢았다. 황제를 이렇게 발걸음 하게 하는 후궁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마치 모르는 것처럼.
[폐하, 신첩은 지존을 품기에는 그릇이 너무 작사옵니다. 지존을 품었다가는 그대로 깨져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협박이었다. 품었다가는 자결해 버리겠다는. 그것이 괘씸해 품어 버릴까 하다가도 그 손끝이, 속눈썹이 떨리는 모습에 마음이 녹아 버렸다. 어떤 사정이 있어 이리도 강경하게 자신을 거부하는지, 그것이 알고 싶어서 내버려 두었다. 그것이 벌써 2년이었다. 후비궁에 발걸음 한 지 2년이나 지난 것이다.
광야는 호전적인 성격이었다. 선대 황제들의 업적으로 천하가 통일되어 전쟁조차 없는 제국은 그는 무척이나 심심했다. 반란이라도 일어날라치면 좋아서 전쟁하러 가곤 했다. 반란군에게 상이라도 주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순애보처럼 후비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 꽃을 꺾기보다는 보듬어 주고 싶어서 여태 내버려 두었다. 후비가 궁인과 살을 대지 않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감히 황제에게 거짓을 고할 수 있는 궁인은 없었다. 소문 같은 건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그래서 결정했다. 오늘은 전황후를 간택하는 날뿐 아니라, 후황후를 뽑는 날이 될 것이다.



4.



총선 대감이 원하는 황후 후보로 표가 몰리고 있었다. 이제 한시름 놓는다는 표정을 지은 총선을 광야는 비웃었다. 광야의 입장에서는 다섯 황후 후보 중 누가 황후직에 올라도 딱히 가릴 것이 없었다. 무엇을 보고 특정 여인을 밀어붙이는지는 나중에 뒤로 조사할 일이지 지금 굳이 꼬집을 필요는 없었다.
총선이 미는 황후 후보는 다섯 후보 중에서도 정중앙에 앉아 있었다. 틀어 올린 머리에 가체까지 쓴 것이, 아주 작당하고 나왔다고 후궁들이 수군거렸다. 후궁들은 딱히 가체를 쓰지 않았다. 오히려 후비처럼 반 묶음으로 곱게 내리는 것을 더 선호했다. 황자나 황녀를 낳은 후궁들은 머리 전체를 틀어 올리는 모양을 선호했지만 그 위에 가체를 씌우지는 않았다.
무관 장철(將鐵)의 첫째 딸로 란(爛)이라 하였다. 이제 막 약관을 지난, 도도한 표정의 그녀는 자신이 황후가 되리라는 믿음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것 같았다. 나머지 네 여인이 기가 죽을 정도이니, 광야가 보기에도 다섯 중에 고르라면 그녀를 택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러하면 장가(將家)의 란을 전황후로 간택하는 것에 이의는 없는 것인가?”
이미 이야기가 끝난 것인지, 아니면 총선의 권세가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어서인지, 대신들은 조용했다. 현비의 아비, 중추 영성 대감마저 딱히 반대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던 광야의 시선에 의외로 잠잠한 후궁들이 들어왔다. 절대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듯이 열기가 뜨겁다. 살기마저 느껴졌다.
광야가 책봉식에 나서는 길에 현비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자기주장이 강해 평소 대립이 확실하던 후궁들이 한마음으로 뭉쳤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후비 역시 그 안에 포함된다 생각하니 재미있기까지 했다. 분명 후비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리라. 그저 반발하지 않을 뿐.
“현비, 후궁의 대표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의 눈에 새로운 전황후가 보이는가?”
광야의 말에 모든 이의 시선이 현비에게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신들이 웅성거렸다. 그럼에도 질문을 받은 현비는 흔들림이 없었다. 아니, 그녀를 둘러싼 후궁 전체가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광야가 그리 물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총선이 신음을 흘렸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총선에게 있어 이것은 세 번째 황후 책봉식이었다. 황제 광야 이전에 12대, 13대 황제의 황후 책봉식 때도 그는 큰 공헌을 했다. 대신들의 뜻을 모아 황제께 진언했고 그 뜻은 다 받아들여졌다.
총선은 이것이 황제를 위한 일이라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대신들이 추앙하는 황후가 국모가 되어야 나라가 평온하다. 이번 책봉식도 그렇게 흘러가게끔 만들었다. 황제가 무슨 정신인지 황후 책봉식을 미루겠다고 했을 때 느낌이 이상했던 것을 기억한다.
몇 년을 미룬 끝에 겨우 황후 책봉식을 이루나 했더니 이번에는 황후를 한 명만 먼저 뽑겠다고 했다. 두 황후를 동시에 뽑아야 황후의 권한을 모두 장악할 수 있는데, 황후가 한 명이 되면 황제의 권한이 그만큼 커지니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나라의 두 기둥을 어찌 따로 뽑으시려 하냐며 두 황후를 동시 책봉하자고 진언하였건만 황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우선 하나라도 건지자는 생각으로 오늘 황후 책봉식을 거행한 것이다.
결국 황후란 강력한 황권 안에서 신하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였다. 황후라 하여도 어느 대신의 여식이니 부모의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두 황후를 아우르는 권한이 황제와 동등하니 두 황후 모두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 뽑기를 원했다.
그런 중요한 황후 책봉식에 후궁들의 의견을 묻는 그 의도가 심상치 않았다. 총선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황제는 아는 듯 모르는 듯 현비가 입을 떼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신첩, 감히 폐하께 아뢰옵건대 신첩의 눈에는 내명부의 수장은 보이지 않나이다.”
“!!”
저런, 저런! 대신들, 그리고 객들의 술렁임이 커졌다. 특히 총선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후궁들이 황후 없이 7년이나 황제를 보필하다 보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아무리 만장일치로 황후를 골랐다고는 하나 현비의 아비인 중추(中錘) 같은 경우는 황후보다 황자의 어미인 제 여식이 더 중요한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호오, 그러하다면 장가의 란이 전황후가 되는 것을 반대한다, 이 뜻이오?”
“제 어찌 반대를 하겠나이까? 혹여 폐하가 원하신다면 신첩들은 그저 따를 뿐이옵니다. 그러나 만약.”
만약, 그 요망함에 총선이 이를 갈았다. 광야는 히죽 웃었을 뿐이었다. 힘이란 분포되기 마련이었다. 대신의 여식이라고만 여겼던 후궁들이 7년간 이렇게나 힘을 가졌으니, 어찌 그 힘을 부모라는 이유로 누를 수 있겠는가. 광야의 눈에는 모든 것이 너무 뻔했다. 후궁들은 굴러 온 돌에 밀려나고 싶지 않고, 대신들은 새로운 꼭두각시로 황권에 대등하게 힘을 쓰고 싶은 것이다.
황제가 히죽히죽 웃는 걸 보며 후비는 조금 불안감을 느꼈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그것이 전해져 왔다.
“만약 폐하께서 윤허하신다면 신첩, 미약하오나마 황후 후보께 몇 가지 여쭙고 싶나이다.”
“역량을 시험하겠다?”
“감히 말씀 올리옵건대 그렇사옵니다.”
대신들의 술렁임은 커져만 갔다. 중추가 안절부절못하며 딸을 바라봤다. 그러나 현비의 표정은 단호했다. 후궁들이 재미있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여우들 같으니라고. 광야가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얼굴이 시뻘게진 황후 후보 란이 부들부들 떠는 것이 멀리서도 보일 지경이었다. 광야는 흔쾌히 허락을 내렸다.
“거 아주 타당한 이야기요. 현비, 아주 현명하구려. 이왕 하는 것, 내 조금 보태리다. 내 황제 즉위 이후 그대들과 7년을 함께해 왔소. 그대들이 나를 보필하며 나라의 기둥 역할을 대신하였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오.”
후궁들을 옹호하는 광야의 말에 총선은 뒷목을 잡고 쓰러질 지경이었다. 만약 후궁들이 지금과 같은 권세를 갖는다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첫째 황자의 현비, 둘째 황자의 희비, 셋째 황자의 영비. 그들이 대세였다. 그중에서도 현비. 게다가 그들의 가문인 중추 영성 대감, 공자 정성 대감, 한지 선관. 한지 선관은 그렇다 치더라도 바란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영성 대감과 정성 대감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가는 세력이 확 기울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그대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싶소. 각자 한 번씩 기회를 주겠소.”
오십의 후궁에게 각각 한 번의 기회를 주니 무려 오십 개의 질문이었다. 이것은 예비 황후를 시험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후궁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했다. 앞서 나온 질문과 겹치지 않게 예비 황후를 시험해야만 했다. 후궁들도 당황했는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광야의 말에 이의를 달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들은 머리를 굴러가며 예비 황후 란인지, 아니면 힘 있는 후궁 가문에 붙어야 하는지를 따지기 시작했다.
“황후의 의의가 무어요.”
현비는 간단하게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순서인 만큼 부담이 없었다. 란 역시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는 질문이었다는 듯이 쉽게 대답했다. 황후가 황제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황후가 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느냐, 내궁을 어떻게 다스리겠느냐, 후궁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황자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등등 모두가 쉽게 생각하는 질문들이 먼저 나오고 있었다.
“황인을 두실 겁니까?”
질문한 이는 14번째 후궁, 윤비였다. 그녀의 질문에 심드렁하게 문답을 듣고 있던 광야가 이번에는 흥미롭다는 듯이 란을 바라봤다. 그 질문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란이 주춤거렸다. 그 순간만큼은 후비도 옅은 웃음을 띠었다. 역시 당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