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화

황후는 황인을 가진다고 해서 뒤로 밀려나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황인을 갖는다면 후계를 볼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더 신중히 생각해야 하는 일이었다.
“폐하께서 윤허하실 일이지요.”
란이 조심스럽게 답을 피해 갔다. 그걸 가만히 둘 리가 있나. 15번째 후궁, 청비가 되받아쳤다. 표독스럽던 미소조차 이 순간에는 보기 좋았다. 당찬 아름다움이었다.
“허면, 폐하께 윤허를 청하겠다는 뜻이군요?”
“…….”
꽤 당돌하게 대답을 하던 란도 그 말에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린다. 황인이 황후의 권리라는 것은 황후가 먼저 요구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황제가 옜다, 하고 내려 주는 것이 아니었다. 광야는 결국 껄껄대고 웃었다. 후궁들의 한판승이었다. 란이 조금 구겨진 표정을 애써 관리하며 슬쩍 총선 대감을 바라봤다. 총선의 무시무시한 눈빛에 그녀는 결국 포기를 선언했다.
“제 어찌 폐하의 총애를 받으며 황인을 두겠습니까? 그리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그러나 후궁들은 집요했다. 청비 다음은 진비였다. 그녀는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은 채 다소곳하게 입술 끝을 올렸다. 포동포동한 그녀의 입술이 예쁘게 호를 그렸다.
“어머, 황후직을 맡았다 하여 폐하께서 그저 은애하실 거라 보십니까?”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집요한 질문들은 란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대의적인 명분들을 물어보던 초반의 후궁들과는 달랐다. 아예 발조차 붙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 딱 보였다. 차례가 후비에게 가까워는 사이 란은 만신창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야속하게도 광야는 그것을 내버려 두었다. 그것은 대신들에게 보내는 경고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총선의 기를 죽이는 일이었다. 그들이 준비한 여인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조금 불쌍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란은 힘겹게 하나하나 받아쳐 나갔다. 적나라하고 표독스러운 후궁들에 의해 이리 까이고 저리 까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공개 처형도 아니고 그녀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녀가 황후가 된다면 오십의 후궁 등쌀에 시달려 제명에 죽지 못할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다 보니 후비의 차례가 왔다. 바로 치고 나오는 질문이 들리지 않기에 란도 후비를 바라봤다. 다른 후궁들과 달리 표독스럽기는커녕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후비의 눈에 지쳐 보이는 란 너머로 ‘진짜’ 후비의 아비가 보였다. 자신을 키워 준 대감님이었다. 잠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의 긴장이 전해져 왔다.
한호 중영 대감은 표정이 그리 썩 좋지 않았다. 저기 앉아 있는 후비가 가짜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리고 그 대역이 사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불안함에 마음 졸이고 있었다. 아무리 겉보기에 여인네 같아도 언제 어디서 꼬투리가 잡힐지 모르는 일이었다.
후비가 바로 질문을 하지 않자 란이 얼른 숨을 돌렸다. 후비는 시선을 옮겨 황제를 바라봤다. 뚫어지게 후비를 바라보고 있던 광야가 그 시선을 받았다. 이리 멀리 있음에도, 둘 사이에 꽃들이 널려 있는데도 그 무엇도 광야의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후비가 입을 여는 것이 그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나라의 기둥이기 전에 폐하의 기둥이 되셔야만 할 것입니다.”
후비의 말이 끝나자 주위가 숙연해졌다. 그것은 질문이 아닌 경고였다. 본분을 잊지 말라는 그 말을 하는 후비는 그 누구보다 고고해 보였다. 서로 할퀴기만 하던 후궁도 예비 황후도 모두 다 잠잠해졌다.
광야는 후비가 눈을 내리까는 것을 가만히 바라봤다. 가까이 있다면 턱을 잡고 그 시선을 다시 맞추고만 싶었다.
오늘 후비는 참 아름다웠다. 평소 화장기 하나 없고 수수한 옷차림으로 있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저 많은 꽃 사이에서도 꿀리지 않을 만큼 화려했다. 게다가 본연의 기품은 어딜 가도 사라지지 않는 듯이 저 홀로 고고히 피어 있었다.
목을 한 겹 감싼 후 목에서부터 가슴으로 곡선을 그리며 시작되는 옷은 소매 부분이 없었다. 속이 비치는 비단을 여러 겹 겹쳐 소매를 대신하여 걸치고 허리에 고정했다. 하얀 피부를 더 빛내 주는 푸른 원단이었다. 짙은 색의 비단이 가슴을 가리고 아래는 옅은 청색으로 떨어졌다. 품이 꽉 죄어 호리호리한 허리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광야는 침을 꿀꺽 삼켰다. 후비의 주변에 앉아 있는 후궁들을 저리 치우고 싶었다. 그녀를 가리고 있는 것이 거슬렸다. 아니, 후비를 제 옆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황후의 자리에 앉혀 두면 마음이 조금 풀릴까? 그의 눈이 가늘어진다.



5.



마지막 오십 번째 질문까지 모두 끝나자 회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몇 질문에 답하지 못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란은 꽤 선전했다.
총선은 물끄러미 황제를 바라봤다. 그의 눈치를 아무리 살펴도 속내를 알아내기가 영 어려웠다.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일을 시킨 것부터가 예비 황후를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것 아닌가. 그를 알고 있는 대신들은 황후 책봉을 반대해야 하는 건지, 밀어붙여야 하는 건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황제가 황후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책봉만 되면 황후는 권한을 갖게 된다.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서 다들 황제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다.
현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후직을 평생 비워 둘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예 황제의 은애를 받지 못하는 황후를 꼭두각시 삼아 자리에 두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래야 제 아이 효난이 황태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커지는 것이니까. 그러나 황제의 뜻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 같으면서도 시큰둥했다. 현비는 잔뜩 긴장한 채로 효난을 바라봤다.
아이는 아주 의젓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몇몇 어린 황녀가 먼저 자리를 뜬 것에 비하면 이미 이 자리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효난보다 어린 황자들이 그에 의지해 같이 자리를 지켰다. 어미의 눈으로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효난보다 더 나은 아이는 없었다.
효난을 다음 황제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현비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를 도와줄 수 있는 황후라면 현비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황제는 지아비였으나 은애하는 이는 아니었다. 효난을 갖게 된 것은 첫날밤 승은을 입었을 때 딱 맞아떨어진 덕이었다. 한 마디로 우연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아이다. 사랑스럽지 아니할 리가 없다.
책비 후 첫 승은은 각각 후궁의 가임기에 맞춰 날짜가 정해진다. 현비는 가문의 세력이 강해 첫 번째 후궁으로 가장 먼저 승은을 입었으니 그야말로 황제의 기가 가장 강할 때였다. 첫 승은 의식 중에 수태한 것은 그녀뿐이었다.
그 자체가 효난이 다음 황제에 걸맞은 아이라는 증거라고 현비는 생각했다. 그 생각을 감히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황제였다.
황제는 황자들에게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첫째 황자가 6살이고, 황태자 책봉까지는 열다섯 해나 남았으니 서두르지 않는 것은 이해하나 그의 무관심은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몇 번이나 효난을 데리고 알현을 청해도 무심하게 쳐다볼 뿐, 애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않는 것 같은 태도였다. 그런 냉랭함이 현비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내 지켜보니 장가의 여식을 전황후로 맞이하는 것에 큰 무리는 없다 판단했소. 물론 아직 약관밖에 되지 않은바 나라의 기둥이 되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 생각하오.”
황제의 말에 총선의 얼굴에는 급 화색이 돌았다. 결국 자신이 바라는 대로 전황후 책봉이 거행되는 것이다. 게다가 여운이 남는 것이 이참에 밀어붙여 후황후까지 뽑아 버리자고 건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총선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리 생각이 드니 불안함이 들기도 했소. 그래, 내 후황후도 이 자리에서 같이 책봉할까 하오. 내 후황후를 나중에 뽑겠다고 얘기했으나 썩 좋은 생각이 아니었소.”
광야의 말에 총선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앞의 나머지 후보들을 둘러봤다. 저 중 가장 누구를 올려야 하나, 머리를 굴린 총선이 바로 건의했다.
“그리하시면 폐하, 후황후는 누구를 염두에 두고 계시온지요? 역시 윤가의 미(媺)가 좋지 않나, 신이 감히 말씀을 올리옵니다만…….”
총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광야는 손을 내저었다. 주위를 쓱 둘러봤다. 후황후마저 뽑는다는 소리에 후궁들은 낭패의 기색이 역력했고 대신들은 총선처럼 계산하는 것이 빤히 보였다. 그러나 받아 주는 것은 한 번이면 족했다.
“아닐세. 내 미리 염두에 둔 이가 있네.”
“!!!”
광야의 말에 주위가 시끄럽게 웅성이기 시작했다. 전황후를 뽑을 때만 해도 원하는 대로 하든가 말든가, 하는 심드렁한 태도를 취했던 황제가 단호하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말 자체가 이미 윤가의 여식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에 총선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야 했다.
이번 황제는 만만치 않다. 총선은 광야가 즉위했을 때부터 느낀 것을 또 느껴야만 했다. 뭐 하나 자신들의 뜻을 따르는 법이 없었다. 오십 후궁이라는 점은 신하들에게 오히려 좋았다. 베갯머리송사로 황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기도 했지만 황제가 쾌락에 허우적대는 동안 황권을 약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광야는 남달랐다. 9대 황제가 천하를 제패한 이후 나태해지고 평온해진 황실을 뒤엎은 것이 광야였다. 반란의 기미만 보여도 척살해 내고 황권을 위협하는 낌새는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베갯머리송사도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런 황제가 직접 간택하는 후황후라니, 총선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광야의 평이한 표정이 더 의미심장했다.
“내 후비, 여(呂) 씨를 후황후로 승격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마치 화포로 포격을 당한 것과 같은 반응이었다. 장내의 모두가 잘못 듣기라도 한 듯이 다시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들은 것이 틀렸다는 듯이, 황제가 다시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광야는 그 정도 반응은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후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후비의 놀란 표정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마치 사약이라도 받은 것과 같은 표정이었다. 충격을 받거나 상처를 받지 않은 것이 후비답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우스워 광야는 살짝 웃음을 띠었다. 심히 놀라 엉덩이를 들고 일어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럴 만도 했다. 황후는커녕 후궁으로의 역할도 마다해왔으니까. 광야는 타오르는 눈빛으로 후비를 마주했다. 시선이 떨리는 것을, 그 눈동자에 서린 충격을 고스란히 맛보았다.
서서히 여기저기서 경악의 목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반대의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그조차도 광야는 예상하고 있었다. 총선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고했다.
“폐, 폐하. 그것만은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어찌 후궁을 황후로 맞이하신다 하시는지요!”
“그리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소?”
“그런 것은 아니오나 그래도 후궁과 황후에는 격의 차이가 있사옵니다. 후비마마는 후궁의 격에 맞춰 간택되신 분이옵니다.”
총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후궁과 황후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선정된다. 집안의 세력이나 개인의 자질 같은 것에서 황후가 훨씬 더 많은 것을 갖추게 되어 있다. 그러나 광야는 피식 웃어넘겼다. 그 웃음이 총선은 왠지 두려웠다. 지고 들어가는 싸움이다.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보시게, 총선. 자네들이 추앙한 장가의 란, 그리고 여가의 후비. 문관인 장지와 한호 중영 대감. 어느 쪽이 더 황후에 어울리나?”
“그, 그것이…….”
당연히 가문의 권세만을 본다면 후비의 권세가 더 높은 게 사실이었다. 외척의 힘을 경계해 보통 황후는 권세가 약한 가문에서 뽑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관습일 뿐, 자질 면으로 따진다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신하들이 황후의 권한을 이용하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기에 황제가 그 부분을 따져 온다면 총선으로는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광야는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재차 공격했다.
“게다가 내 즉위한 지 벌써 7년이나 지났소. 후궁으로 7년을 지냈으면 일반 대신의 여식하고는 격이 다르게 되지. 누구보다 황실을 잘 알고 또한 짐을 바로 보필할 수 있지 않은가. 후비의 어디가 모자라는지, 내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어디 얘기해 보시오.”
“……폐하…….”
총선은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했다. 총선이 말을 하지 못하는 사이 목소리는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광야는 첫 번째 반대자가 후궁 쪽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궁인을 가진 점을 꼬투리 잡거나 혹은 궁인을 여러 번 바꾼 점을 짚으며 반대할 것이라고. 평소 후비를 찾아가는 자신 때문에 후궁들이 후비를 투기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신이 감히 아뢰옵건대, 후비마마는 이미 예전에 궁인을 들여 폐하의 온정을 저버린 몸이 아니옵니까?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런데 뜻밖에도 한호 중영 대감, 후비의 아비였다. 광야는 한쪽 눈썹을 들었다. 대답하기 전, 저도 모르게 후비에게로 시선이 갔다. 후비가 황후가 되면 가장 기뻐해야 하는 것이 후비의 집안이 아닌가? 그래서 그 아비의 발언을 광야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제의 시선에 잡힌 후비는 가슴에 손을 모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떨림이 심상치 않았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냐며 말을 거는 후궁들도 무시한 채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황후 간택이 그렇게 충격이었다는 말인가? 광야는 그것에 강한 의문을 가졌다. 어찌하여 부녀가 같은 반응을 보일까. 마치 그래서는 안 되는 것처럼?
“……궁인이 어찌 문제가 되는가. 황후 역시 황인을 들일 수 있는바, 내 후비가 원하면 궁인을 같이 황인으로 승격시킬 마음도 있소.”
“폐하! 어찌 궁인을 황인으로!”
그제야 다른 신하들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통촉하여 달라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반대는 해야겠는데 딱히 반박할 수 있는 이유가 없었다.
후비의 집안은 영성 대감이나 정성 대감에 비하면 권세가 약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알아주는 집안이었다. 여식이 후궁으로 뽑혀 권세가 오르는 듯싶었으나 이내 잠잠히 고개를 숙이기는 하였다. 그것이 마치 호랑이가 발톱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늑대가 개인 척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것을 후비의 소문이 안 좋아 몸을 사리는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다.
세력 다툼에서 짐짓 물러난 듯 보였던 여가가 황후를 배출한다면 그야말로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것이니 다른 대신들이 반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 그러하시다면 폐하, 빈 후궁석은 어찌하실 생각이옵니까?”
“그야 이 앞에 후보가 넷이나 있는데 무엇이 문제겠소. 총선이 권했던 윤가의 여식이 되어도 좋겠지.”
으음, 총선의 신음이 광야에게는 그저 즐겁게만 느껴졌다. 광야가 쐐기를 박듯이 현비를 바라봤다. 이미 생각을 마친 듯 차분해 보이는 그녀에게 물었다.
“현비, 그대도 내 틀렸다고 보는가?”
“폐하. 신첩이 어찌 지존의 뜻을 옳지 않다 아뢰겠나이까? 폐하, 폐하의 성명이 하해와 같으니 신첩은 그 뜻을 따르겠사옵니다.”
현비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후비는 효난을 유달리 아꼈다. 물론 세 황자 중 효난밖에 마주할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쩌다 스치는 두 황자와 달리 효난은 가끔 후비를 찾아가기도 하면서 눈도장을 확실히 찍어 뒀다. 게다가 후비가 폐하의 승은을 거부하는 것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항이었다. 아무리 첫 승은은 가져야 한다 하지만 수태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첫 승은만 무사히 지나친다면 후비가 수태를 할 거라 보기는 어려웠다.
답은 간단했다. 후비가 후황후가 된다면 효난의 황태자의 길은 가까워진다. 희비나 영비가 까무러치는 소리가 들려옴에도 현비는 가뿐히 무시했다.
후궁들은 소란스러웠다. 윤비가 이를 갈며 청비에게 속삭였다.
“아니, 궁인을 세 번이나 갈아치운 이가 어찌 국모가 되리오. 그게 말이 되오?”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폐하께서는 어찌…… 게다가 후비가 승은을 거절한 것이 하루 이틀이요?”
“아이 참, 폐하도……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옵고…….”
둘의 대화는 곧 후궁의 목소리였다. 그것이 겉으로는 지적할 수 없으나 후비의 이름을 깎아내리는 진짜 이유였다. 광야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는데 마치 들은 것처럼 그에 대해 입을 열었다.
“내 평소에도 후비궁에 들르곤 하였소. 후비의 학식이 넓고 깊어 감탄하였지. 게다가 주변을 두루 살필 줄 아는 마음 씀씀이도 있어 황후가 되어도 부족함이 없다 싶었소. 내 그대들이 후비의 궁인에 대해 걱정하는 바는 알고 있소. 허나, 짐이 직접 알아본바, 그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였소.”
거짓말이다. 완전히 거짓말. 그 거짓말에 낯빛이 질린 것은 후비와 그의 아비, 한호였다. 후비가 궁에 들어오기 전을 생각하면 학식이 넓고 깊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진짜 후비와 달리 그는 배움의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다. 후비가 된 후 학문을 연구하였다 하더라도 고작 3년이었다. 황제의 입에서 학식이 넓다는 말이 나올 리는 없었다.
황제의 의도가 너무 분명해서 한호는 치를 떨었다. 은근슬쩍 후비의 가치를 올리고 궁인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한호가 퍼렇게 질려서 후비를 바라봤다. 후비 역시 시체 같은 낯짝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