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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들켰다가는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어찌 황제께서 후비를 마음에 두셨단 말인가. 한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날 정도의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아버님, 부디 만수무강하소서.]
후비는 병을 얻었다. 그 연유를 알 수 없었으나, 집안 주치의의 보살핌을 받아도 고칠 수가 없었다. 후궁이 병을 얻으면 가문은 멸족당한다. 병이라는 것이 천명이기는 하나, 황제의 귀하신 옥체를 병마로 위협했다는 죄였다. 그래서 나온 고육지책이 가짜 후비였다.
[그 아이가 집안의 사생아인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마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요. 감히 입에 담지 마소서.]
[이미 다 알아보았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렇게 꼭 빼닮을 수 있단 말입니까.]
[마마…….]
[아버님을 추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만이 가문이 사는 법입니다.]
일부다처제. 그것은 황제만의 권한이었다. 일부일처제인 바란에서 사생아라는 존재는 쉬쉬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 아이를 궁인으로 보내소서. 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동안이라도 그 아이를 교육하겠습니다. 그 아이가 후비로서 사는 동안은 아버님도 쥐 죽은 듯 사셔야 합니다. 황태자가 책봉되는 순간까지만 참으소서. 이 못난 딸아이가 아버님께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마마!]
한호의 눈에 눈물마저 맺혔다. 주변에서는 얼마나 황송하면 울기까지 한다고 수군거렸다. 그의 눈물에 후비는 가슴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황제를 향해 몸을 돌리고는 크게 조아렸다. 얼굴이고 머리고 땅에 붙이듯이 조아린 채 말했다.
“제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신첩, 미약하고 무지하여 나라의 기둥이 될 그릇이 되지 못하옵니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오나, 부디, 부디……!”
광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부녀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눈물을 보이는 아비나 명백히 거절의 뜻을 내비치는 여식이나.
평소에도 늘 자신을 피하기만 하던 후비였기 때문에 이해했다. 그래서 놀라는 모습도 사랑스럽다 봐줄 수 있었다. 그런데 묘하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내 기분이 상한 광야는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뜻을 그리 밝혔으니 그리들 아시오. 오찬을 든 후, 책봉식을 거행하겠다.”
그렇게 이르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궁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황제를 보필하는 신하들이 대거 따라 들어간 후에야 회장에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대신들이 대거 총선에게 모이기 시작했다.
이미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한호는 떨리는 무릎에 힘을 줘 자리에서 일어섰다. 굳은 표정으로 후비를 향해 반절을 올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 뜻이 알현 신청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찬이 후비를 모시며 한호의 뒤를 따랐다.
당사자들이 모두 사라진 회장은 쑥대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6.
“마마…… 어찌, 어찌하면 좋습니까……. 폐하께서는 대체 어찌!”
한호 대감의 목소리는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찬마저도 물리치고 후비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었다. 자신이 처신을 똑바로 하지 못해 일이 커졌다고 생각했다.
진짜 후비가 생존해 있었을 당시 황제는 어찰을 보내기는 했어도 직접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어찰도 단 한 번의 일이었다. 황제가 자신을 찾아오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후비가 병사한 후 1년이나 지난 뒤의 이야기였다.
이치를 따지자면 그의 잘못이라고는 황제에게 알 수 없는 매력을 보였다는 것 정도겠으나 일이 커져 버린 지금은 그것을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모두 소인의 불찰이옵니다. 대감마님…….”
한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찬이 바깥에서 감시하고 있어 아무도 이 안에 들어설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래도 말을 조심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후비는 단 한 번도 한호 대감을 아버님이라 불러 본 적이 없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단어였다.
“마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애초에 폐하를 기만하고 명줄을 붙잡았던 욕심이 문제였으니.”
한호는 끝내 후비에게 말을 놓지 않았다. 기껏해야 종놈 취급을 받던 기억이 생생한지라 황송하기만 했다.
후비는 크게 몸을 떨었다. 이러나저러나 죽은 목숨이었다. 진짜 후비가 병사했을 때 끝냈어야 했다. 그 명줄을 여태 붙잡고 왔을 뿐, 이제 죽어도 어차피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래도 역시 제 죄인 것만 같았다. 제가 행동만 잘했어도 키워 주신 은혜를 갚을 수는 있었을 터였다. 자신이 쥐 죽은 듯이 살았다면, 공기처럼 살았다면……!
눈물이 눈 주변의 고운 화장을 일그러뜨렸다. 한호가 무릎을 꿇은 채 후비의 앞으로 기어갔다. 조아린 손을 붙잡는 행동에 목소리가 짐짓 떨렸다.
“소인이 폐하께 선처를 부탁드려 보겠습니다. 모든 것은 제가 저지른 일이라고, 집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요. 소인의 목숨을 구명삭으로 삼으세요. 전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시옵소서.”
그 말에 한호의 표정이 야차와 같이 구겨졌다. 그는 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가늘기만 하지, 사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손이었다. 이 손을 단 한 번도 잡아 준 적이 없었다. 안아 준 적도, 따듯한 소리 한 번 뱉어 준 적도 없었다. 한호의 시선이 일렁였다.
“마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황제를 능멸한 죄를 마마의 목숨과 바꾸라니요……!”
후비가 흠칫 떨었다. 간청한다 해도 그 화가 가문에 미칠 것이 뻔하다는 소리에 이내 눈물을 떨어뜨린다. 분칠을 한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 주변을 칠했던 먹물이 검은 눈물비를 만든다.
그러나 한호의 뜻은 달랐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후비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에 후비가 몸을 들자 그를 안아 주었다. 그 몸짓이 조심스럽기 짝이 없어 후비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호는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은 사기그릇을 품듯이 후비를 품에 안아 주었다.
“신이 업이 많은가 봅니다. 내 자식도 살리지 못하는 신을 용서해 주소서.”
한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투명한 눈물이었음에도 피눈물처럼 느껴져 가슴이 찢어진다. 첫 아이를 병으로 잃었다. 그를 슬퍼할 수조차 없었다. 잃었다는 것에 가슴을 치지도 못하고 아닌 척 몸을 사렸다. 그런데 내 아이라고 명명해 줄 수도 없던 아이마저 잃게 된단다.
“대감마님…….”
후비는 떨리는 눈을 깜박였다. 검은 먹물이 앞을 가린다.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껏해야 후궁 때 승은을 입었으니 황후로의 승은은 안 해도 된다고 우기는 정도지만 황제에게는 먹히지 않을 것이다.
대체 왜 황제가 자신을 후황후로 추대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황후로의 덕목을 갖춘 것도 아니고 그의 거짓말처럼 학문을 두루 섭렵한 것도 아니었다. 왜? 대체 왜? 알 수 없는 의문만이 강하게 남았다.
“내 너를 따듯이 안아 줄 수조차 없었건만!”
한호의 비통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후비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없던 부모, 이상하게 꼭 빼닮았던 대감의 여식. 그래도 감히 입에 담지 못했다. 설마 일개 영해인 자신이 대감의 피붙이였을까, 후비는 이를 꽉 깨물었다. 울음을 멈추고자 했다. 그래도 비통하게도 두 눈 가득 그렁그렁 매달고 있던 눈물을 속절없이 떨구고 만다.
“마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사옵니다.”
멀리서 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화를 듣지 못하게끔 멀리 세워 뒀더니 그 자리에서 소리 높여 말하는 찬의 목소리 역시 비장했다. 후비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낀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 그대에게…….]
혼미해진 정신 너머로 황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왔던 황제. 그가 속으로 삼킨 그 한 마디. 그것이 이 황후 책봉에 관한 것이었을까. 후비는 한호 대감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 주먹의 가냘픈 떨림이 한호는 가슴이 아팠다.
“마마, 신을 보호하려 하지 마소서. 마마 덕에 삼 년이나 명줄을 연장하였지 않사옵니까? 신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사옵니다.”
“…….”
후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빈말로라도 위로해 주는 한호의 배려가 절실히 느껴졌다. 아비라는 것을 모르고 평생을 살아왔다. 부정은 받지 못하였지만 키워 준 은혜를 잊을 만큼 배은망덕한 놈은 아니다.
“그저 마음을 단단히 먹으소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그리고 행여나 다른 마음을 품으셨다면 내려놓으소서. 마마께 큰 화가 미치는 것, 신은 원치 않사옵니다.”
그저 사약을 내린다면 가장 편하리라. 후비는 눈을 뜰 힘도 없이 휘청거리면서 그리 생각했다. 차라리 곱게 죽여 주신다면 그것이 가장 나을 것이다. 목을 내려치신다면 곱게 목을 빼 드리리라 생각했다.
차라리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
의복을 추스른 한호 중영 대감이 자리를 뜬 후, 찬은 궁녀들보다 먼저 방에 들어섰다. 바닥에 흐트러진 채 주저앉아 있는 후비를 보고 놀라 황급히 부축했다. 궁녀들이 들어오기 전에 우선 해결해야겠다 싶어 후비를 의자 위에 곱게 앉히고, 의자를 닫힌 창문 쪽을 보게끔 돌렸다.
후비는 몸에 기운이 없는 듯이 그의 행동을 내버려 두었다. 먹물 범벅이 된 얼굴을 보는 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먹물의 번짐이 눈물 자국임을 알아차렸다.
아까 황제 폐하께서 후비를 황후로 맞이하시겠다 하였을 때, 사실 찬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가 알기로 황제가 친히 걸음을 하는 후궁은 후비가 유일했다. 혹여 강제로 취하실까 봐 마음을 졸였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보다 찬이 놀란 것은 후비의 반응이었다. 물론 싫어하시리라 예상은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천지가 무너진 것 같은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후황후 책봉 소식에 후비는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찬은 본분도 잊고 그대로 후비에게 달려갈 뻔했다. 그 자리가 그럴 수 있는 자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꽉 깨물고 버텼다. 후비의 모습은 마치 황후 간택이 아니라 사약을 받은 것같이 보였다.
그리고 이리 무너져 버렸다. 천을 적셔 후비의 고운 얼굴을 닦아 내며 궁녀들을 시켜 황후의 복식을 가져오게 했다. 화장기 하나 없이 말끔히 닦아 낸 후, 꿀을 발라 피부를 진정시켰다. 그러는 와중에도 후비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시라 말하니 후비는 눈을 두어 번 떠는가 싶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꿀 위로 타고 흐른 눈물 한 방울을 찬은 보고도 모르는 척 넘겼다.
“칡차입니다.”
후비는 감았던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칡차의 향이 강하게 콧속을 스며들었다. 찻잔을 받아 들자, 찬이 꿀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후비는 가만히 찻잔에 손을 데웠다. 손끝에서부터 따듯한 기운이 퍼져 올라오는 것 같았다.
후비는 망설이고 있었다. 책봉식 이전에 모든 것을 밝혀야 하는 건지, 책봉식이 끝난 후 밝혀야 하는 건지. 어느 것이 가문에 피해가 덜 갈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책봉식이 끝난 후 황제와 둘이 있을 때 밝혀야 그나마 선처를 바랄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해 보지만, 황제를 능멸한 죄는 더욱 커질 것이다.
입술 위의 꿀을 닦아 내는 찬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천이 부드럽게 녹은 꿀을 흡수한다. 이마 위에서부터 물을 흘려 얼굴을 꼼꼼히 닦고 나자 후비의 평소 얼굴이 드러났다. 평소 화장기 하나 없이 지내던 그 얼굴이.
후비가 칡차를 잠시 음미하는 동안 찬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황제가 오찬을 드는 사이, 황후로서의 준비를 끝내야 했다. 후궁으로의 치장을 했던 터라 그것을 풀고 새로 해야 하니 시간이 두 배로 걸린다. 그런데 후비가 한호를 만나느라 시간을 쓰기까지 했으니 더 촉박했다.
찬은 란이 전황후로서 어떻게 치장했는지 이미 샅샅이 보고 왔다. 절대 그녀에게 뒤지지 않게, 아니, 그녀에게 시선을 줄 틈도 주지 않게 후비를 꾸미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황후의 복식은 이미 내정되어 있어 후비나 전황후나 같은 의복을 입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차이는 화장과 머리 장식, 장신구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찬이 궁녀들에게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기 바쁜 사이, 후비는 궁녀 하나를 시켜 창문을 조금 열게 했다. 시원한 바람이 흘러 들러온다.
그제야 마음의 준비를 마친 후비는 찬에게 시작하라 명했다. 찬의 손놀림이 바쁘게 얼굴 위를 지난다. 이미 창백하게 핏기가 가신 얼굴이라 분을 칠하기조차 민망하였지만 그는 뚝심 있게 진주 분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한 번 오갈 때마다 후비의 얼굴에 화려함이 감돌았다.
후비가 입을 연 것은 찬이 볼에 연지를 펴 발라 생기를 불어넣었을 때였다. 입술을 마무리하려던 찬이 화들짝 놀라 손을 멈췄다.
“어찌 이리 발걸음 하셨사옵니까.”
그것은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투였다. 찬이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황후의 복식을 들고 대기하고 있는 궁녀들뿐이었다. 그러나 그에 답하는 목소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흘러나왔다.
“내 신경이 쓰이는 것이 있어 걸음 했소.”
“신첩이 감히 폐하께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까?”
황제의 목소리, 그리고 이어진 ‘폐하’라는 호칭에 찬이 서둘러 자리에서 물러나 몸을 숙였다. 그러나 후비가 계속하라 명했다. 찬은 망설이다가 황제가 창문 밖에서 모습을 드러낼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손길이 아까보다 몇 배는 더 조심스러웠다.
“아니라 하는 것이요?”
황제가 낮게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팽팽한 긴장감처럼 느껴져서 찬이 괜히 침을 크게 삼켰다.
“망극하옵니다, 폐하. 신첩, 그런 뜻은 품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 싫었던 게요?”
후비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창문 밖 황제에게도 전해졌다. 사라락, 의복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 복식을 갈아입는 듯했다. 창문이 반쯤 닫힌다.
의복을 벗어 속곳과 속속곳만을 남긴 후비에게 궁녀들이 달라붙어 황후의 복식을 입히기 시작했다. 그 의복이 살을 스치는 소리가 밖에까지 똑똑히 들려왔다.
“……신첩이 어찌 그런 불충한 마음을 갖겠사옵니까. 다만 신첩이 폐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이 앞섰을 뿐이지요. 심려를 끼쳤다면 황공하옵니다.”
광야가 내쉬는 한숨이 방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당연한 소리지만 한 번도 후비는 제 속마음을 털어놓는 법이 없었다. 당연하리라. 누가 감히 폐하의 뜻을 거스르리.
“내 그대를…… 칠 년 전에 처음 보았지.”
그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은 황제 즉위식조차 볼 수 없던 일개 영해였다. 대감 집에 귀속된 종놈. 그날엔 오늘보다 더 한 장관이 펼쳐졌을 것이다. 오십 후궁이 축복하는 가운데 제위에 오르는 황제. 후비는 천천히 그 모습을 그려 본다. 일곱이나 어린 나이의 황제는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대를 기억하지 못한다. 분명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인이었겠지.”
살을 섞었다. 그러나 그것은 의례적인 절차였다. 어떤 여인이 어땠는지 광야는 조금도 기억하지 못했다.
“2년 전, 그대를 보러 걸음을 하고 난 뒤, 처음을 떠올려 보려 애를 써 봤소.”
떠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녀를 빼닮았어도 그녀 본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는 후비 자신조차 확답할 수 없었다. 이 황궁 내에 진짜 후비를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황후 복식에 맞춰 찬이 후비의 머리를 염발하여 모양을 잡았다. 가체를 씌우기 위해 가지런히 고정하고 향지를 더 발라 윤기가 흐르고 칠흑같이 검게 만들었다. 하얀 얼굴에 대비되는 짙은 색이 잘 어울렸다. 가체에 다는 머리 장식을 금강석과 청금색 보석들로 마무리하고 다른 장신구를 달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소. 마치 그때의 기억만 지워진 것처럼 흐릿했지. 오히려 지금의 그대가 더 또렷해졌소.”
후비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자, 찬이 슬쩍 인상을 찡그렸다. 입술 화장이 망가지는 것보다 얼마나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는지 표정에 드러난 탓이었다. 눈동자가 흔들릴 정도로 괴로워하는 후비는 그것을 조금도 티 내지 않고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눈과 입술은 울고 있는데 나오는 목소리는 달콤하기 그지없어서 찬이 대신 인상을 썼다. 차라리 울고 소리치면 가슴이나 안 아플 것을.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내 그대를 황후로 책봉하는 것은 하루 이틀 고려한 것이 아니요. 2년간 그대를 봐 온 정인으로서 내린 결단이니 부디 그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소리 없는 눈물이다. 보이지 않는 눈물이로다. 찬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상대가 황제만 아니었더라면 대신 소리치고 싶었다. 대신 말해 주고 싶었다. 당신이 이 사람을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지 아느냐고. 공기처럼 살고 싶다고 비는 사람이라고. 황제의 여인이지만 쥐 죽은 듯, 아무도 살아 있는 것을 모르게,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
왜 그런 사람을 계속 물 밖으로 끄집어내려 하시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