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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그대가 알아준다 하니 좀 낫군. 아까 중영의 표정이 영 좋지가 않아 내 의아해 했다오.”
“……!”
그 순간 후비가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황제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아주 작은 소리였다. 가체를 고정시키는 것을 마무리하던 궁녀가 휘청거리는 후비에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렇게 휘청거린 후비를 찬이 받아 안았다. 궁녀가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왠지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셨습니까, 폐하. 심려를 끼쳐 송구하옵니다. 신첩이 무지하여 혹여 폐하께 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이라 하셨습니다.”
“그대들은 걱정도 참 많군.”
“망극하옵니다.”
후비의 치장이 모두 끝났다. 찬이 독자적인 향보로 만든 향수까지 뿌려 마지막을 장식하자, 은은한 향이 창문 밖으로도 퍼져 나갔다.
“내 황제라고는 하나, 내 여인 하나 내 마음대로 곁에 둔 적이 없소. 오로지 그대만이…….”
황제가 쑥스러운 듯 말을 끝내지 못했다. 옷자락을 쥔 후비의 손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찬이 안쓰러운 듯 그를 쳐다봤다.
황제는 후비의 준비가 끝났음을 알고 같이 가자 했다. 두 황후의 책봉식을 하는데 황제가 한 명의 황후와 함께 나타난다면 그 여파가 클 것임을 알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그를 잘 알고 있는 후비였지만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이니 황제의 뜻을 굳이 거스를 필요는 없다 생각하여 같이 회장으로 가기로 했다.
창문이 있는 뒤뜰에서 걸어 나와 기다리고 있는 황제 앞에 후비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 가리개를 들고 있는 내관들이 먼저 나와 길을 열어 주고, 후비의 치마 끝자락을 잡은 궁녀들이 그 뒤를 따랐다. 후비가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황제에게 예를 취했다.
광야는 크게 숨을 삼켰다.
“……그대는 참 아름다운 여인이요.”
2. 후황후 등극
7.
“제14대 황후 책봉식을 거행하도록 하겠나이다. 상단 앞으로 걸음 하여 주시옵소서.”
총선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려 오는 것을 광야는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다.
회장은 충격의 도가니에 휩싸여 있었다. 모습을 드러낸 황제가 후비와 함께 걸음 한 것이다. 그 모습 하나만으로도 이미 실세는 전황후가 아닌 후황후임을 알 수 있었다. 신하들이 그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되면 총선이 가진 권력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중추 영성 대감과 한호 중영 대감의 연합이 그려졌다. 저쪽이 실세다. 두리번거리는 신하들의 눈에 낯빛이 허옇게 질린 중영 대감이 들어왔다. 후궁으로 7년을 보낸 여식이 황후가 된다니 어찌 긴장되지 않겠냐며 쑥덕거렸다.
전황후는 입술을 깨문 채 앞으로 나섰다. 오늘을 빛내는 이는 자신이라고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뭔가? 황후 후보로 나섰는데 황제는 관심도 없고 후궁들에게 공격이나 받고 마침내는 후황후를 황제가 친히 지명하기까지 했다. 모든 이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후황후에게 쏠렸다.
황제와 같이 등장하는 후황후라니! 란은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저를 뒷받침해 준다던 총선 영감의 얼굴에는 낭패감이 역력했다. 힘이 없는 아비를 대신해서 저를 여기까지 밀어준 이가 총선 영감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도 황제 앞에서는 별수 없는 것이 확실했다.
황제와 함께 걸어온 후황후의 눈부신 자태에 모든 이가 눈을 떼지 못하자 그녀는 더 속이 탔다. 아까 후궁으로 있을 때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더니 후황후로 분하니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격이었다.
“바란의 위대한 초대 황제께서는 바란의 황제는 즉위하는 대로 두 황후와 오십 후궁의 보필을 받아야 한다고 하시었다. 내 덕이 부족한 탓에 그러지 못하였다. 오늘 내 이 자리에서 전황후와 후황후를 들여 짐을 보필하도록 이르니 그 뜻을 바란의 천하에 알리도록 한다.”
황제 즉위식과 따로 떼어놓고 보니 황후 책봉식은 그 절차가 매우 간단했다. 책봉식 후에 연회가 있을 예정이기는 하나 책봉식 자체에는 별것이 없었다. 딱히 예를 따지는 것도 아니었다. 대기하고 있는 궁녀들을 배정하는 것이 다였다. 후황후의 궁녀들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선은 후비궁의 궁녀들이 계속 모시기로 하였다.
황후는 최소 스무 명의 궁녀들의 시중을 받게 되어 있었다. 후황후의 경우는 궁녀가 일곱밖에 없었다. 나머지 열셋의 궁녀를 차후 배정하기로 하니 겉보기만큼은 전황후 쪽에 더 힘이 쏠려 보였다.
총선이 황제가 따른 첫 번째 술을 받아 전황후에게 넘기고 두 번째 술은 후황후에게 넘겼다. 세 사람이 동시에 술잔을 들어 황후 책봉을 알렸다.
그 후 황자들이 나와 황후들에게 예를 올렸다. 효난이 후황후 앞으로 가 웃으며 예를 올리자, 전황후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물론 두 황후 사이에는 순서가 없으니 어느 쪽을 먼저 가든 상관없었다. 전황후는 황제의 품을 메우는 역이고 후황후는 황제의 품을 두텁게 하는 역이었다.
다만 총선이 전황후를 먼저 대접한 것처럼 첫째 황자 효난이 자신에게 먼저 예를 취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게 문제였다.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후황후에게 다가가는 첫째 황자를 보며 전황후는 분을 숨기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어린 황자들이 놀라 자연스레 후황후에게 먼저 다가갔다. 그 모습을 모든 이들이 보고 있으니 그녀가 얼마나 수치스러워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경하드리옵니다! 마마.”
“고맙소, 황자.”
효난의 인사에 후황후는 아련하게 웃었다. 아이의 천진난만함이 느껴졌다. 물론 현비가 시키기도 하였겠지만 그보다 워낙 저를 따르는 아이였기에 제게 왔음을 알고 있었다.
오늘을 기점으로 권력의 판세가 많이 바뀔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는 후황후로서 권력의 풍파에 시달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아이에게도 몹쓸 기억을 남길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왔다. 그가 지금 비는 것은 단 한 가지, 황제가 일을 조용히 처리해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사약을 내리면 받을 것이다. 능지처참하시겠다 하셔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일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사내라고 밝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제게 시선이 모이지 않는 틈을 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돌렸다. 그래서 전황후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황후의 책봉이 끝났으니 비어 있는 37번째 후궁의 자리가 화두에 올랐다. 그 자리를 고스란히 다른 여인으로 채우자니 그다음 서열의 후궁들이 인정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후궁들의 서열을 하나씩 앞당기고 마지막 오십 번째 후궁을 들이기로 하였다. 게다가 이 자리를 빌려 41번째 후궁 유비가 궁인을 청하니 황제는 흔쾌히 그 청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유비가 후비의 궁으로 옮기고, 유비의 궁을 새 후궁이 쓰기로 했다.
황후가 되겠다고 먼 걸음을 한 여인들이 모두 후궁이 되고자 몰려들었다. 연회를 열기 전에 후궁을 간택하기로 하자, 책봉식은 어느 정도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폐하, 이것이 ‘은’의 날짜이옵니다.”
총선이 종이를 건네며 나직이 속삭였다. 황후의 첫 승은이 있기 전까지 황제는 누구와도 동침할 수 없었다. 승은이란 모든 황후와 후궁이 동등하게 얻는 첫 기회였다. 첫 승은이 끝나면 황제도 원하는 여인을 골라 동침할 수 있게 된다.
첫 승은 때 회임을 한 경우는 현비가 유일했다. 그러나 모든 첫 승은은 다 ‘가임기’에 이뤄진다. 오십의 후궁의 가임기에 맞춰 한 명씩 황제와 동침하는 것이다. 새로 책봉된 두 황후도 가임기가 먼저 오는 쪽이 황제와 동침하게 된다. 그 후에 새로운 후궁의 승은이 이뤄지게 된다. 총선이 내민 것은 전황후의 가임기 날짜였다. 오늘 후황후를 뽑을 예정이 없었기 때문에 후황후의 가임기를 알 리가 없었다.
광야는 전황후의 것을 받아 들고 찬에게 눈짓했다. 찬이 조심스럽게 움직여 황제 앞으로 나섰다. 총선 영감 옆에 준비된 종이에 붓을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후황후는 오히려 담담했다.
달거리를 속이는 것 정도는 이미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너 달에 한 번씩 동물의 피를 준비했다. 그것은 진짜 후비의 말을 따른 것이다. 몸이 안 좋았던 그녀는 달거리를 매달 하지 못했다. 그래서 주기적이지 못했던 그녀의 달거리에 맞춰 가짜 달거리를 만들었다.
그 사실을 단지 후비의 몸이 좋지 않아 달거리가 잦지 못하다고만 알고 있는 찬이 잠시 고민했다. 달거리가 주기적이지 못하면 황궁의에게 진찰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후비는 그것을 질색했다. 후궁이 병이 있거나 몸이 안 좋으면 최악의 상황을 몰고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붙잡고 비밀을 엄수하기를 부탁하는 후비를 보고 찬도 그것을 숨기기로 했었다.
찬은 마지막 달거리 날짜를 따져 봤다. 다행히도 두 달 전이었다. 그렇다면 가임기가 이번 달 내지는 다음 달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 날짜를 따진 찬이 그 날짜를 적어 냈다.
종이를 받아 든 황제가 양쪽 종이를 비교했다. 전황후의 ‘은’의 날짜가 빨랐다. 6일 뒤인 전황후에 비해 후황후의 가임기는 앞으로 3주나 지나야 했다. 그는 속으로 쓴 입맛을 다셨다. 하필이면 첫 승은이 이리도 늦게 걸릴 줄이야.
멀리서 그를 본 총선 역시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이제 모든 것은 전황후에 달렸다. 앞으로 3주나 황제는 후황후를 건들지 못한다. 그사이에 얼마든지 황제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확신했다.
“…….”
가임기의 날짜를 슬쩍 본 후황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찬이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우선 3주라는 시간이 있었다. 그 안에 황제와 담판을 지어야만 했다. 차라리 ‘은’의 날짜가 가까웠으면 나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봤다. 어느 쪽이든 나을 것은 없었다.
과연 황제를 안달 나게 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다. 당연히 화만 키울 것이 뻔했다. 3주……. 그전에 결판을 내야 했다.
*
“경하하옵니다, 마마.”
“현비…….”
연회로 어수선한 가운데 현비는 후황후의 곁으로 다가갔다. 목석처럼 앉아 있는 모습이 어디를 봐도 위태로웠다. 저 화장 속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을 것이 빤히 보였다. 같은 여인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긴장이 아니었다. 현비라서 더 잘 알았다. 평소 두문불출해 사람들과의 만남을 꺼려 왔던 후비를 그나마 만났기에.
후비, 이제는 후황후인 그를 대하는 현비의 말투는 바뀌었어도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무례하지 않게 느껴지지 않았다. 후황후를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땀방울마저 보였다. 화장이 지워지겠습니다, 하며 현비가 작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후황후는 설핏 웃었다.
“그리 싫습니까?”
현비의 질문이 황제가 던졌던 질문과 똑같아서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현비와 광야는 닮은 점이 많았다. 괜히 아이를 가진 부부가 아니다 싶을 정도로 생각하는 바가 비슷했다. 후황후는 입을 열지 않은 채 현비를 바라만 봤다. 황제였다면 얼른 부정해야 했지만 현비에게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현비가 그녀의 강인한 눈매를 다잡았다. 눈에 힘을 주고 등을 펴라는 뜻이었다. 어느새 위축된 후황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였다. 눈빛에 조금이나마 힘이 돈다.
“마마께서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지 신첩의 아둔한 머리로는 짐작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단단히 마음먹길 바랍니다.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라의 기둥이기 이전에 폐하의 기둥이 되시라고. 나라의 기둥이 되는 건 잠시 잊으셔도 됩니다. 마마께서 바로 폐하의 기둥이십니다.”
“현비……. 내…….”
후황후는 입을 열다 황급히 다물었다. 현비의 뒤로 황제가 보였다. 그가 멀리서 슬쩍 시선을 보내왔다. 입 모양만 보여도 읽어낼 사람이었다.
“폐하께서 마마와 함께 자리하셨을 때, 신첩의 마음에는 보이더군요. 폐하께서 후비궁까지 걸음 하시는 것이 너무 멀게 느끼셨구나. 이 여인을 곁에 두고 싶다는 그 마음을요.”
후황후는 아련하게 현비를 바라봤다. 진정으로 황제의 마음을 아는 현비, 당신이 진정 황후 감이십니다. 말하지 못하는 속을 애써 삼켜낸다.
사실 그것은 황제 광야도 동의했다. 사실 그는 현비를 전황후로, 후비를 후황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방해한 것이 의외로 ‘효난’의 존재였다. 그녀를 전황후로 올리면 그녀는 무조건 효난을 황태자로 만들 것이다. 게다가 그녀를 따르는 후비라면 이미 얘기는 끝난 것이다. 광야가 반대한다 하더라도 황후들이 뭉치면 황제도 자기주장을 내세울 수 없게 되니까. 그래서 총선이 황후를 뽑아 올렸을 때도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현비…….”
아무리 눈으로 많은 것을 말한다 한들 그 복잡한 심경을 현비가 알아줄 수 있을 리 없었다.
현비. 나는 소리치고 싶다오. 나는 사내라고. 당신이 내게 기대하는 것, 다 헛짓이라고.
“현비.”
“폐하.”
“…….”
후황후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속눈썹이 흠칫흠칫하면서 위로 올라갔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황제가 시선에 잡혔다. 현비의 어깨에 손을 올린 그는 일어서려는 둘을 제지했다.
“황후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광야의 말에 후황후는 부들부들 떨었다. 표정 하나로 이미 모든 것을 들킨 기분이었다. 현비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예를 표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신첩, 마마를 부담스럽게 하였나 봅니다.”
“이만 물러가 보시오.”
“예, 다시 한 번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고맙소.”
현비가 빠르게 물러섰다. 현비 다음으로 황후에게 접근해 잘 보이려 생각하고 있던 이들이 다들 주춤했다. 황제가 현비를 물렸음을 눈치챈 것이다. 전황후 주변에 신하들이 몰려 얼굴을 익히며 줄을 서는 반면, 후황후 주변에는 황제 때문에 아무도 다가서지 못했다. 누가 봐도 전황후가 실세처럼 보이지만 황제의 곁에 있는 이가 결국 진짜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어찌 안색이 그렇소?”
“예?”
“꼭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군.”
“……아니옵니다. 심려를 끼쳐 송구…….”
“그런 소리 말게. 이런 자리가 부담스럽나?”
“…….”
후황후가 시선을 들었다. 광야는 머리에 올린 가체라도 당장 벗겨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신의 욕심으로 황후 자리에 올렸지만 그녀가 평소 두문불출하고 자신을 감추고 산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이런 자리를 싫어할 것은 알았지만 저렇게 아플 정도인 줄은 알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자리보전하고 누워야 할 것같이 보이는 모습에 광야는 손을 올렸다. 아까 닦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흘러내린 땀을 닦아 줄 생각이었다. 그 손의 움직임에 후황후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몸이 완전히 경직되어 있는 것이 광야에게도 전해질 정도였다.
“먼저 들어가 보시오. 내 연회를 파할 수는 없으나…….”
“신첩, 괜찮사옵니다. 황공하옵니다.”
“그대의 면부를 직접 보여 주고 싶군. 긴말 말고 들어가 보시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결국 후황후가 한 수 접었다. 실랑이를 벌여 봤자 이목만 더 집중시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자리에서 비켜서려는 그에게 광야는 작게 한 마디 속삭였다.
“내 오늘 밤 가리다.”
“……!”
황후가 흠칫하는 것을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바로 곁에 있던 광야조차도.
“그대가 알아준다 하니 좀 낫군. 아까 중영의 표정이 영 좋지가 않아 내 의아해 했다오.”
“……!”
그 순간 후비가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황제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아주 작은 소리였다. 가체를 고정시키는 것을 마무리하던 궁녀가 휘청거리는 후비에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렇게 휘청거린 후비를 찬이 받아 안았다. 궁녀가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왠지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셨습니까, 폐하. 심려를 끼쳐 송구하옵니다. 신첩이 무지하여 혹여 폐하께 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이라 하셨습니다.”
“그대들은 걱정도 참 많군.”
“망극하옵니다.”
후비의 치장이 모두 끝났다. 찬이 독자적인 향보로 만든 향수까지 뿌려 마지막을 장식하자, 은은한 향이 창문 밖으로도 퍼져 나갔다.
“내 황제라고는 하나, 내 여인 하나 내 마음대로 곁에 둔 적이 없소. 오로지 그대만이…….”
황제가 쑥스러운 듯 말을 끝내지 못했다. 옷자락을 쥔 후비의 손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찬이 안쓰러운 듯 그를 쳐다봤다.
황제는 후비의 준비가 끝났음을 알고 같이 가자 했다. 두 황후의 책봉식을 하는데 황제가 한 명의 황후와 함께 나타난다면 그 여파가 클 것임을 알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그를 잘 알고 있는 후비였지만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이니 황제의 뜻을 굳이 거스를 필요는 없다 생각하여 같이 회장으로 가기로 했다.
창문이 있는 뒤뜰에서 걸어 나와 기다리고 있는 황제 앞에 후비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 가리개를 들고 있는 내관들이 먼저 나와 길을 열어 주고, 후비의 치마 끝자락을 잡은 궁녀들이 그 뒤를 따랐다. 후비가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황제에게 예를 취했다.
광야는 크게 숨을 삼켰다.
“……그대는 참 아름다운 여인이요.”
2. 후황후 등극
7.
“제14대 황후 책봉식을 거행하도록 하겠나이다. 상단 앞으로 걸음 하여 주시옵소서.”
총선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려 오는 것을 광야는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다.
회장은 충격의 도가니에 휩싸여 있었다. 모습을 드러낸 황제가 후비와 함께 걸음 한 것이다. 그 모습 하나만으로도 이미 실세는 전황후가 아닌 후황후임을 알 수 있었다. 신하들이 그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되면 총선이 가진 권력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중추 영성 대감과 한호 중영 대감의 연합이 그려졌다. 저쪽이 실세다. 두리번거리는 신하들의 눈에 낯빛이 허옇게 질린 중영 대감이 들어왔다. 후궁으로 7년을 보낸 여식이 황후가 된다니 어찌 긴장되지 않겠냐며 쑥덕거렸다.
전황후는 입술을 깨문 채 앞으로 나섰다. 오늘을 빛내는 이는 자신이라고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뭔가? 황후 후보로 나섰는데 황제는 관심도 없고 후궁들에게 공격이나 받고 마침내는 후황후를 황제가 친히 지명하기까지 했다. 모든 이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후황후에게 쏠렸다.
황제와 같이 등장하는 후황후라니! 란은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저를 뒷받침해 준다던 총선 영감의 얼굴에는 낭패감이 역력했다. 힘이 없는 아비를 대신해서 저를 여기까지 밀어준 이가 총선 영감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도 황제 앞에서는 별수 없는 것이 확실했다.
황제와 함께 걸어온 후황후의 눈부신 자태에 모든 이가 눈을 떼지 못하자 그녀는 더 속이 탔다. 아까 후궁으로 있을 때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더니 후황후로 분하니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격이었다.
“바란의 위대한 초대 황제께서는 바란의 황제는 즉위하는 대로 두 황후와 오십 후궁의 보필을 받아야 한다고 하시었다. 내 덕이 부족한 탓에 그러지 못하였다. 오늘 내 이 자리에서 전황후와 후황후를 들여 짐을 보필하도록 이르니 그 뜻을 바란의 천하에 알리도록 한다.”
황제 즉위식과 따로 떼어놓고 보니 황후 책봉식은 그 절차가 매우 간단했다. 책봉식 후에 연회가 있을 예정이기는 하나 책봉식 자체에는 별것이 없었다. 딱히 예를 따지는 것도 아니었다. 대기하고 있는 궁녀들을 배정하는 것이 다였다. 후황후의 궁녀들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선은 후비궁의 궁녀들이 계속 모시기로 하였다.
황후는 최소 스무 명의 궁녀들의 시중을 받게 되어 있었다. 후황후의 경우는 궁녀가 일곱밖에 없었다. 나머지 열셋의 궁녀를 차후 배정하기로 하니 겉보기만큼은 전황후 쪽에 더 힘이 쏠려 보였다.
총선이 황제가 따른 첫 번째 술을 받아 전황후에게 넘기고 두 번째 술은 후황후에게 넘겼다. 세 사람이 동시에 술잔을 들어 황후 책봉을 알렸다.
그 후 황자들이 나와 황후들에게 예를 올렸다. 효난이 후황후 앞으로 가 웃으며 예를 올리자, 전황후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물론 두 황후 사이에는 순서가 없으니 어느 쪽을 먼저 가든 상관없었다. 전황후는 황제의 품을 메우는 역이고 후황후는 황제의 품을 두텁게 하는 역이었다.
다만 총선이 전황후를 먼저 대접한 것처럼 첫째 황자 효난이 자신에게 먼저 예를 취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게 문제였다.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후황후에게 다가가는 첫째 황자를 보며 전황후는 분을 숨기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어린 황자들이 놀라 자연스레 후황후에게 먼저 다가갔다. 그 모습을 모든 이들이 보고 있으니 그녀가 얼마나 수치스러워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경하드리옵니다! 마마.”
“고맙소, 황자.”
효난의 인사에 후황후는 아련하게 웃었다. 아이의 천진난만함이 느껴졌다. 물론 현비가 시키기도 하였겠지만 그보다 워낙 저를 따르는 아이였기에 제게 왔음을 알고 있었다.
오늘을 기점으로 권력의 판세가 많이 바뀔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는 후황후로서 권력의 풍파에 시달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아이에게도 몹쓸 기억을 남길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왔다. 그가 지금 비는 것은 단 한 가지, 황제가 일을 조용히 처리해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사약을 내리면 받을 것이다. 능지처참하시겠다 하셔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일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사내라고 밝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제게 시선이 모이지 않는 틈을 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돌렸다. 그래서 전황후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황후의 책봉이 끝났으니 비어 있는 37번째 후궁의 자리가 화두에 올랐다. 그 자리를 고스란히 다른 여인으로 채우자니 그다음 서열의 후궁들이 인정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후궁들의 서열을 하나씩 앞당기고 마지막 오십 번째 후궁을 들이기로 하였다. 게다가 이 자리를 빌려 41번째 후궁 유비가 궁인을 청하니 황제는 흔쾌히 그 청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유비가 후비의 궁으로 옮기고, 유비의 궁을 새 후궁이 쓰기로 했다.
황후가 되겠다고 먼 걸음을 한 여인들이 모두 후궁이 되고자 몰려들었다. 연회를 열기 전에 후궁을 간택하기로 하자, 책봉식은 어느 정도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폐하, 이것이 ‘은’의 날짜이옵니다.”
총선이 종이를 건네며 나직이 속삭였다. 황후의 첫 승은이 있기 전까지 황제는 누구와도 동침할 수 없었다. 승은이란 모든 황후와 후궁이 동등하게 얻는 첫 기회였다. 첫 승은이 끝나면 황제도 원하는 여인을 골라 동침할 수 있게 된다.
첫 승은 때 회임을 한 경우는 현비가 유일했다. 그러나 모든 첫 승은은 다 ‘가임기’에 이뤄진다. 오십의 후궁의 가임기에 맞춰 한 명씩 황제와 동침하는 것이다. 새로 책봉된 두 황후도 가임기가 먼저 오는 쪽이 황제와 동침하게 된다. 그 후에 새로운 후궁의 승은이 이뤄지게 된다. 총선이 내민 것은 전황후의 가임기 날짜였다. 오늘 후황후를 뽑을 예정이 없었기 때문에 후황후의 가임기를 알 리가 없었다.
광야는 전황후의 것을 받아 들고 찬에게 눈짓했다. 찬이 조심스럽게 움직여 황제 앞으로 나섰다. 총선 영감 옆에 준비된 종이에 붓을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후황후는 오히려 담담했다.
달거리를 속이는 것 정도는 이미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너 달에 한 번씩 동물의 피를 준비했다. 그것은 진짜 후비의 말을 따른 것이다. 몸이 안 좋았던 그녀는 달거리를 매달 하지 못했다. 그래서 주기적이지 못했던 그녀의 달거리에 맞춰 가짜 달거리를 만들었다.
그 사실을 단지 후비의 몸이 좋지 않아 달거리가 잦지 못하다고만 알고 있는 찬이 잠시 고민했다. 달거리가 주기적이지 못하면 황궁의에게 진찰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후비는 그것을 질색했다. 후궁이 병이 있거나 몸이 안 좋으면 최악의 상황을 몰고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붙잡고 비밀을 엄수하기를 부탁하는 후비를 보고 찬도 그것을 숨기기로 했었다.
찬은 마지막 달거리 날짜를 따져 봤다. 다행히도 두 달 전이었다. 그렇다면 가임기가 이번 달 내지는 다음 달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 날짜를 따진 찬이 그 날짜를 적어 냈다.
종이를 받아 든 황제가 양쪽 종이를 비교했다. 전황후의 ‘은’의 날짜가 빨랐다. 6일 뒤인 전황후에 비해 후황후의 가임기는 앞으로 3주나 지나야 했다. 그는 속으로 쓴 입맛을 다셨다. 하필이면 첫 승은이 이리도 늦게 걸릴 줄이야.
멀리서 그를 본 총선 역시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이제 모든 것은 전황후에 달렸다. 앞으로 3주나 황제는 후황후를 건들지 못한다. 그사이에 얼마든지 황제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확신했다.
“…….”
가임기의 날짜를 슬쩍 본 후황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찬이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우선 3주라는 시간이 있었다. 그 안에 황제와 담판을 지어야만 했다. 차라리 ‘은’의 날짜가 가까웠으면 나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봤다. 어느 쪽이든 나을 것은 없었다.
과연 황제를 안달 나게 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다. 당연히 화만 키울 것이 뻔했다. 3주……. 그전에 결판을 내야 했다.
*
“경하하옵니다, 마마.”
“현비…….”
연회로 어수선한 가운데 현비는 후황후의 곁으로 다가갔다. 목석처럼 앉아 있는 모습이 어디를 봐도 위태로웠다. 저 화장 속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을 것이 빤히 보였다. 같은 여인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긴장이 아니었다. 현비라서 더 잘 알았다. 평소 두문불출해 사람들과의 만남을 꺼려 왔던 후비를 그나마 만났기에.
후비, 이제는 후황후인 그를 대하는 현비의 말투는 바뀌었어도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무례하지 않게 느껴지지 않았다. 후황후를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땀방울마저 보였다. 화장이 지워지겠습니다, 하며 현비가 작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후황후는 설핏 웃었다.
“그리 싫습니까?”
현비의 질문이 황제가 던졌던 질문과 똑같아서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현비와 광야는 닮은 점이 많았다. 괜히 아이를 가진 부부가 아니다 싶을 정도로 생각하는 바가 비슷했다. 후황후는 입을 열지 않은 채 현비를 바라만 봤다. 황제였다면 얼른 부정해야 했지만 현비에게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현비가 그녀의 강인한 눈매를 다잡았다. 눈에 힘을 주고 등을 펴라는 뜻이었다. 어느새 위축된 후황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였다. 눈빛에 조금이나마 힘이 돈다.
“마마께서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지 신첩의 아둔한 머리로는 짐작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단단히 마음먹길 바랍니다.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라의 기둥이기 이전에 폐하의 기둥이 되시라고. 나라의 기둥이 되는 건 잠시 잊으셔도 됩니다. 마마께서 바로 폐하의 기둥이십니다.”
“현비……. 내…….”
후황후는 입을 열다 황급히 다물었다. 현비의 뒤로 황제가 보였다. 그가 멀리서 슬쩍 시선을 보내왔다. 입 모양만 보여도 읽어낼 사람이었다.
“폐하께서 마마와 함께 자리하셨을 때, 신첩의 마음에는 보이더군요. 폐하께서 후비궁까지 걸음 하시는 것이 너무 멀게 느끼셨구나. 이 여인을 곁에 두고 싶다는 그 마음을요.”
후황후는 아련하게 현비를 바라봤다. 진정으로 황제의 마음을 아는 현비, 당신이 진정 황후 감이십니다. 말하지 못하는 속을 애써 삼켜낸다.
사실 그것은 황제 광야도 동의했다. 사실 그는 현비를 전황후로, 후비를 후황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방해한 것이 의외로 ‘효난’의 존재였다. 그녀를 전황후로 올리면 그녀는 무조건 효난을 황태자로 만들 것이다. 게다가 그녀를 따르는 후비라면 이미 얘기는 끝난 것이다. 광야가 반대한다 하더라도 황후들이 뭉치면 황제도 자기주장을 내세울 수 없게 되니까. 그래서 총선이 황후를 뽑아 올렸을 때도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현비…….”
아무리 눈으로 많은 것을 말한다 한들 그 복잡한 심경을 현비가 알아줄 수 있을 리 없었다.
현비. 나는 소리치고 싶다오. 나는 사내라고. 당신이 내게 기대하는 것, 다 헛짓이라고.
“현비.”
“폐하.”
“…….”
후황후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속눈썹이 흠칫흠칫하면서 위로 올라갔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황제가 시선에 잡혔다. 현비의 어깨에 손을 올린 그는 일어서려는 둘을 제지했다.
“황후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광야의 말에 후황후는 부들부들 떨었다. 표정 하나로 이미 모든 것을 들킨 기분이었다. 현비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예를 표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신첩, 마마를 부담스럽게 하였나 봅니다.”
“이만 물러가 보시오.”
“예, 다시 한 번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고맙소.”
현비가 빠르게 물러섰다. 현비 다음으로 황후에게 접근해 잘 보이려 생각하고 있던 이들이 다들 주춤했다. 황제가 현비를 물렸음을 눈치챈 것이다. 전황후 주변에 신하들이 몰려 얼굴을 익히며 줄을 서는 반면, 후황후 주변에는 황제 때문에 아무도 다가서지 못했다. 누가 봐도 전황후가 실세처럼 보이지만 황제의 곁에 있는 이가 결국 진짜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어찌 안색이 그렇소?”
“예?”
“꼭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군.”
“……아니옵니다. 심려를 끼쳐 송구…….”
“그런 소리 말게. 이런 자리가 부담스럽나?”
“…….”
후황후가 시선을 들었다. 광야는 머리에 올린 가체라도 당장 벗겨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신의 욕심으로 황후 자리에 올렸지만 그녀가 평소 두문불출하고 자신을 감추고 산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이런 자리를 싫어할 것은 알았지만 저렇게 아플 정도인 줄은 알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자리보전하고 누워야 할 것같이 보이는 모습에 광야는 손을 올렸다. 아까 닦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흘러내린 땀을 닦아 줄 생각이었다. 그 손의 움직임에 후황후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몸이 완전히 경직되어 있는 것이 광야에게도 전해질 정도였다.
“먼저 들어가 보시오. 내 연회를 파할 수는 없으나…….”
“신첩, 괜찮사옵니다. 황공하옵니다.”
“그대의 면부를 직접 보여 주고 싶군. 긴말 말고 들어가 보시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결국 후황후가 한 수 접었다. 실랑이를 벌여 봤자 이목만 더 집중시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자리에서 비켜서려는 그에게 광야는 작게 한 마디 속삭였다.
“내 오늘 밤 가리다.”
“……!”
황후가 흠칫하는 것을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바로 곁에 있던 광야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