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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아아아아악!
스산한 바람이 부는 어느 가을밤. 귀뚜라미 소리도 들리지 않는 유난히 조용한 날이었다. 휘황찬란한 금빛 황궁 안의 작은 별채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공포에 물든 소리가 아닌 새 생명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어머니의 소리였다. 궁녀들이 끓는 물과 깨끗한 수건을 분주하게 나르고 있었고 문밖에선 의원들이, 문 안에서는 의원의 지시를 받은 의녀들이 출산에 힘썼다. 문 안팎은 몹시도 긴박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응애앵, 응애!
궁인들의 초조한 기색이 그 순간 환희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위나라의 셋째 황자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황자를 생산했다는 연통을 받은 황제는 직무를 마치고 유 답응(答應 : 성은을 입은 궁녀에게 내리는 직위)에게 걸음 했다. 얼굴은 땀에 절어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지만 출산의 고통에서 조금 벗어난 듯 평화로운 표정의 유 씨는, 아이를 안아 든 어머니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황제는 유 씨에게 다가가 아이를 건네받았다. 갓 태어난 아기는 아직 누구를 닮았다 말할 수는 없었지만 총명해 보였다. 황제의 얼굴에 기쁨도 잠시, 조금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무영(無影)이라 짓겠다. 그리고 수고한 너를 정4품 상재(商才)에 봉하겠노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아이를 다시 건네준 황제는 뒤돌아 방을 나섰다. 유 씨는 멀어져 가는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무영에게 눈을 돌렸다.
“아가야, 네 아버지께서 너를 무영이라고 이름하셨다. 네게 그림자처럼 조용히 살라 하시는구나…….”
황제에게는 이미 황태자인 첫째 아들 용비와 둘째 아들인 지좌보가 있었기에, 셋째 아들은 필요치 않은 것이었다.
무영의 나이 열일곱이 됐을 때 황제는 불치의 병에 걸려 침상에 몸져눕게 되었다. 다음 황권은 당연히 황태자인 용비가 차지하게 될 거라 여겼지만 둘째 황자인 지좌보가 감춰 왔던 본색을 드러내며 황좌를 탐하려 들었다. 이에 자연스럽게 신하들마저 당파끼리 패가 갈려 각자 미는 황자에게 붙었고, 황궁 안은 전시 상황처럼 불붙기 일보 직전의 전쟁터가 되었다.
황궁안의 불안한 상황은 1년이나 계속되었다. 무영은 전쟁터 같은 황궁 안에서 열여덟, 성년이 되었다. 신료들은 추잡하게 서로 물고 뜯고 할퀴다 이내는 체면 불고하고 몸싸움까지 자처했지만, 두 왕자는 보이지 않는 신경전만 벌이는 형세였다. 셋째 황자인 무영은 오래전부터 흐르고 있던 황실의 살벌한 기운에 짓눌러 이미 어릴 적부터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 이 황자들끼리의 싸움은 무영을 완전히 망각할 만큼 촌각을 다투는 형세였다. 탐색전을 벌이기 위해 만나기로 한 두 황자는 만월이 뜬 어느 날 밤, 궁내에 있는 팔각정에서 술잔을 나눴다.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모습이었지만 역시 서로의 세를 간 보며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두 황자는 어린 시절부터 팔각정에서 만나 서로를 견주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무영은 비장한 표정으로 길을 걸었다. 팔각정으로 향하는 그 길을 달빛이 아스라이 비추고 있었다. 그는 황실의 살벌한 무게에 오랫동안 짓눌려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다. 그는 처소 밖으로 나가면 호흡이 빨라지고 뇌가 짓눌리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런 그의 입에서는 늘 가쁜 호흡 소리가 났고, 그것마저도 공포에 짓눌려 항상 떨리고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어둠이 내린 황궁의 길을 위태롭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몸을 구부정하게 움츠린 채 걸었다. 그 뒷모습이 묘했다. 그는 항상 처소 밖을 나설 때마다 심리적 압박감에 그리했으나 이번에는 단순히 위축이라기보다 도약하기 전의 웅크림이 품은 긴장감과 고양된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항상 그의 뒷모습은 기괴했지만 오늘은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어느덧 그리고 어느새 그는, 술은 마시지 않으면서도 술잔을 기울이는 두 황자의 이상한 술자리에 도착했다. 황자들은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가 수상한 소리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무영이 나타나자 이내 방심하고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술자리에 끼어든 무영을 보며 지좌보는 입을 열었다.
“네놈이 여긴 무슨 일이냐? 형님하고 중요한 얘기 중이다. 썩 꺼지거라.”
“에이, 형…… 님! 수…… 수, 술상 아…… 앞에 놓고 술을 아…… 안 드시니 부, 분위기가 어둡지 아아…… 않습니까~ 제 술자, 잔 한 번 바, 받으세요.”
“머저리 같은 놈. 저놈만 보면 속이 뒤집힙니다, 형님. 안 그렇습니까?”
“태어나길 저렇게 생겨 먹은 것을 저라고 어찌할까. 황실의 수치 같으니. 내버려 두어라.”
방금까지 서로를 노려보던 두 황자는 무영으로 인해 다시 의기투합하는 듯 보였다. 무영은 피를 나눈 두 형제에게 무안을 받고 그 분위기를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렀다. 술병과 술잔을 손에 쥐고 비틀거리며 술상을 벗어나 옆에서 호위를 하던 호위무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술잔을 호위무사 가슴께로 들어 올려 술을 부었다.
“추…… 추운데 고, 고생한다. 너도 마, 마셔라.”
“송구합니다. 근무 중입니다.”
“에이~ 그러지 마, 말고…… 어엇!”
무영은 술을 따르다 비틀거리며 호위무사에게 술을 쏟았다. 당황한 호위무사는 옷에 묻은 술을 털어 댔고 그가 방심한 사이 무영은 재빠른 동작으로 그의 허리춤에 매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모두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상황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새에 무영을 조롱하며 비웃던 지좌보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고, 곧바로 용비의 심장에 검이 박혔다. 용비는 충격을 받은 눈으로 무영을 쳐다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열린 그 입으로 피가 한 움큼 뿜어져 나왔다.
“네…… 쿨럭! 네놈이…… 어떻게…….”
“원래 큰 놈들은 자신의 덩치에 도취되어 작은 놈이 무럭무럭 크는 줄 모르는 법입니다, 형님.”
무영은 싸늘한 눈길로 용비를 내려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용비는 이내 숨을 거뒀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호위무사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황실의 공식적인 연회에서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진 이후로 무영의 공황장애는 황궁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런 그가 형제를 칼로 베고도 여유롭게 서 있는 모습은 너무 이질적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준비한 것이다. 천천히 차근차근 공황장애를 넘어서며, 이 화려한 도약의 연출을 꿈꿨던 것이다.
“뭐하더냐? 웃어. 이 나라의 황자가 오랜 정신병을 극복했는데.”
주변을 지키고 있던 호위무사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달려와 검을 뽑아 무영에게 겨누었다. 무영은 용비의 몸에 박힌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을 몸에서 뽑자 용비의 피가 역류하여 무영의 얼굴에 수많은 빨간 점을 찍었다. 얼굴에 튄 피가 볼을 타고 아래로 흘렀다.
“이 나라 마지막 황자의 목을 벨 생각인가?”
얼간이, 머저리 무영이 이 나라 제일 검이라 칭송받던 두 황자를 단숨에 죽인 것도 모자라 말도 더듬지 않고 똑바로 서 있자, 그의 위용에 호위무사들은 기가 죽어 주춤거렸다. 그의 말대로 방금 황태자와 둘째 황자는 죽었고, 황제는 불치병에 걸려 더 이상 황자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나라에서 황위를 이를 황자는 무영, 단 한 사람뿐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호위무사들은 무영을 겨누던 칼을 힘없이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내 소개를 하지. 나는 한때 당 무영(無影) 황자라고 불렸던 당 자황(自皇)이다.”
무영, 아니 자황의 모습이 너무나 거대해 보여 호위무사들은 그의 앞에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었고, 충성을 맹세하였다.
‘어머니. 소자는 더 이상 작은 연못으로는 만족하며 살지 않을 것입니다. 땅끝의 끝없는 바다에서 헤엄치는 비단 잉어가 될 것입니다.’
이후 황태자와 둘째 황자의 추종 세력은 형제를 죽이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 이름을 갖다 붙인 자황의 인격을 비난하며 거세게 반대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남은 황제의 적자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고, 바로 등을 돌려 자황의 편에 선 제삼 세력의 힘이 커지자 자연스럽게 정식 황태자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자황에게 무영이라는 이름을 준 황제는 황태자를 지명하는 칙서에 그 이름을 당 자황이라 하였고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났다. 황제로 등극하는 그 순간에 자황은 생각했다.
‘세상에 노력해서 안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아직 해조차 뜨지 않은 묘시(卯時 : 5시~7시). 황궁은 부지런한 황제 때문에 매일 이른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침상에서 일어나 앉아 세숫물을 가져오는 궁녀를 기다리는 황제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굵지만 섬세하게 내려오는 얼굴선과 티끌 한 점 없는 매끄러운 피부가 그가 미남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살짝 탄 살색은 어려서부터 혼자 갈고닦은 무예를 지금까지도 지속해 왔다는 증거였다. 짙은 눈썹과 그 아래 자리한 깊어 보이는 눈매를 가지고 있어 쉽게 여심을 휘어잡았고, 그의 드높은 기상처럼 콧날 또한 오뚝했다. 입은 작지 않고 붉은 것이 생기 있었다. 그가 웃을 때면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과 입 때문에 해맑아 보이기까지 했다.
환관의 시중을 받아 몸과 의복을 정갈히 한 황제는 편전으로 향했다. 6척(약 180cm)이나 되는 훤칠한 키만큼 기다란 다리를 가진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자 뒤를 따르는 환관들이 바삐 걸음을 했다. 각 기관을 담당하는 신료들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다가 황제가 들자 모두 일어서 예를 갖추었다.
“간밤에 모두 평안들 하셨소?”
화려한 황금 용으로 치장된 의자에 앉아 신료들을 내려다보며 자황이 말했다. 낮게 깔리는 저음이 친절함을 담고 있었다. 그는 항상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신료들의 안부를 묻곤 했다. 그는 선황제들과는 달리 염세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염세적이기는커녕 그가 사용하는 어휘는 배다른 두 형제를 죽이며 황좌에 오른 이치고는 밝았고, 과정이야 어찌 됐든 황제의 정치 태도와 업적으로 봤을 때 자황은 성군이었다. 하지만 예전 그의 이면을 알고 있는 신료들로서는 이 편전 회의가 마냥 편안한 자리일 수만은 없었다.
“예……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한 신료가 대표하여 말하자 뒤이어 모든 신료가 입을 모아 말했다. 생기 있는 자황의 목소리와는 비교되게, 위축되고 불편함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
“이리 보람찬 하루이거늘, 모두들 표정에 왜 그리 기운이 없는 것이오? 삶이 축복이고 각자에게 매달린 의무 또한 삶이 이어지고 있다는 생생한 증거인 것을.”
자황은 자신의 기운이 맑고 긍정적이라면 다른 이들의 기운까지 그리 만들 수 있을 거라 여기며 항상 밝은 태도를 보여 왔다.
“경들 얼굴을 보니 지금이 마치 밤 같소. 이제 막 하루가 시작되었을 뿐이니 활기차게 갑시다. 자, 첫 안건이 무엇이오?”
자황은 이전 어느 황제들보다 자신의 삶에 매우 만족해하는 밝은 사람이었다. 앞으로도 오늘날과 같이 항상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자신에게 복태라는 부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
황실 후궁들이 거처하는 처소들 중에서도 침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 있었다. 그곳은 궁녀조차 제대로 자리를 지키지 않는 처소였다. 그곳에는 자황의 후궁인 위복태라는 사람이 홀로 살고 있었다.
신시(申時 : 3시~5시)쯤 처소 안쪽 방에서 부스럭거리며 그가 일어났다. 그의 주변에는 아침까지 소설을 쓰다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문방사우가 흩어져 있었다. 쓰다 버린 종이는 대충 구겨져 방 곳곳을 배회하고 있었고 책상 위에는 지필묵과 낙관이 아직 찍히지 않은 책이 놓여 있었다. 그 책은 간밤에 막 완성한 그의 소설이었다. 복태는 책을 바라보며 ‘태복(太福)’이라는 낙관을 찍으려다가 황실 정기 연회가 있는 날인 것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시각이 다 되어 슬슬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먹으로 얼룩진 의복은 흐트러졌고, 정갈하게 묶었던 머리카락은 흩어져 삐죽삐죽 나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창문으로 다가가 그것을 활짝 열었다. 해가 쨍쨍해야 할 시각인데 밖은 어두웠고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도 오는데 연회가 취소됐다는 소식은 안 오나? 안 그래도 나가기 싫은 연회였는데 비까지 내리니 더 나가기가 싫어졌다.
“날씨가 좋아도, 안 좋아도…… 뭐 달라지는 게 없네.”
복태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창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는 처소 궁녀가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이는 세숫물로 대충 세수와 양치만 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와 신을 신었다.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 한숨을 쉬고는 우산을 펴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정상적인 사람과는 다르게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처소 궁녀가 처소에 잘 붙어 있지 않아 혼자 모든 걸 준비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그러나 그는 서두르는 성격이 아니었다. 비록 다리를 절지만 뛰자고 하자면 얼마든지 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천천히 걸어갔다.
이미 연회가 시작한 지 일각(약 15분)이 흐르고 나서야 복태는 연회장에 도착했다. 연회장 가운데에는 기다란 상이 있었고 제일 상석에는 당연히 황제인 자황이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 나란히 후궁들이 앉았다. 자황과 가장 가까이에 앉을수록 이야기를 나누고 눈에 띌 기회가 많았기에 후궁들은 항상 보이지 않는 자리싸움을 했었다. 후궁 중에서는 복태처럼 남자도 있었는데 여자 못지않은 미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는 복태와는 달리 황제의 눈에 들고 싶어 했고 현재는 황제의 옆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복태는 문 앞에서 출석 여부를 확인하는 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는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남은 자리는 황제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 자리뿐이었다. 후궁들은 모두 황제의 눈에 들고자 그만 바라보고 있었고, 황제 또한 후궁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 집중했다. 아무도 그의 등장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복태도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에 그 부분에 감사함을 느끼며 황제를 향해 고개만 잠시 숙였다가 구석 자리에 앉았다. 복태는 맞은편,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보이는 비를 바라보다가 생각에 빠졌다.
그는 항상 이 황실에서 완벽하게 잊힌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왔었다. 내리는 듯 내리지 않는 듯 뿌옇게 자리했다가 언젠가는 사라질 이 안개비처럼 자신도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가 이 궁에서 홀연히 사라지고자 했다. 언젠가 이 궁에서 월담을 하더라도 그 누구도 자신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지금 옆에서 떠드는 저들은 자신을 기억하기에는 너무 완벽한 자신들만의 세상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권세가의 가주지만 자신은 서자였고 절름발이였다. 그런 자를 세도가의 자식들인 후궁들은 경쟁 상대로 봐 주지도 않았을뿐더러 없는 사람 취급을 했기에, 자신의 소망대로 지내다 사라지기에는 딱 맞는 환경이었다.
복태는 밖에 내리는 안개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렇게 밝은 곳에서는 조금만 저 빗속으로 들어가면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안개비 속에 들어간 자신을 보려면 똑같이 안개비로 들어와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추적추적한 이 빗속으로 절대 스스로 뛰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이곳에서 안개비처럼 사라지는 상상을 하며 복태는 부푼 기대감에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그때 후궁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 후궁은 간의대부(諫議大夫 : 황제에게 간하고 정치의 득과 실을 논하던 관원) 황만의 여식 황 재인(才人 : 정3품)이었다. 황 재인은 바닥에 글귀가 적힌 비단신을 들고 있다가 황제에게 선물했다. 비단신을 받은 황제는 반달 웃음을 지어 보이며 크게 기뻐했다.
“오오, 이 글귀를 보아하니 태복 선생의 작품이구려. 짐이 좋아하는 글귀이오.”
자황은 들뜬 표정으로 신을 이리저리 쳐다보며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 모습에 새삼 다시 반한 황 재인 또한 얼굴에 웃음을 머금으며 황제에게 대답했다.
“예, 폐하. 아버님께 말씀드려 어렵사리 구한 것이옵니다. 신첩도 폐하처럼 신에 새겨진 그 글귀에 마음이 통한지라.”
그녀는 자황의 마음에 들고자 그와 같은 부분에서 공감했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했다. 상상의 나래에 빠져 있던 복태는 황제의 입에서 ‘태복’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태복’은 자신의 필명이었다.
복태는 사실 소설가였다. 신분을 숨겨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비밀스럽게 집필해 왔다. 소설의 제목은 ‘신발 수집가의 서재’였다. 한 권으로 끝내지 않고 연재를 해 온 장편의 소설이었고, 그 최신판을 오늘 아침에 막 완성한 참이었다.
소설의 내용은 이러했다. 서재에 서책이 아닌 신발을 올려놓았던 어떤 남자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괴짜라고 불렀다. 그중 어떤 이가 그에게 이유를 묻자 그가 이리 답했다.
‘책 한 권보다 이 신에는 더 많은 삶의 글귀가 담겨 있지 않은가.’
그의 서재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겪었던 낙담한 사연이나 고민을 털어놓았고 그는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서재에 올려놓은 신발 중에서 하나를 골라 그 바닥에 그들의 고민을 적어 선물했다. 신발을 선물 받은 방문자들은 그 신을 신고 슬픔을 극복하고 밑바닥에 적힌 글귀가 신을 신고 돌아다니면서 지워지고, 새로 도약하며 그 사람의 인생이 되어 사라진다는 이야기였다.
소설 각 화별로는 방문자들의 사연이 소개된 다음 해결되었고, 큰 흐름으로는 그 괴상한 신발 수집가의 정체와 사연에 대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식이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줄거리는, 그 신발 수집가가 그 서재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누군가가 그가 신고 나갈 신발을 어딘가에 감춰 뒀기 때문이고, 감춰진 신발을 찾게 되는 순간에 비로소 그는 서재를 떠날 수 있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자황은 비단신을 내려놓고 황 재인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다음 권이 나올 때가 지났는데 아직 나오지 않아서 적적하던 차였소. 마치 소설 안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이 신을 보고 있자니 마치이 세상 어딘가에 신발 수집가의 서재가 정말로 존재할 것 같은 기분이 드오.”
“폐하께 기쁨을 드려 가문의 광영이옵니다. 태복 선생의 글귀가 적힌 신은 진귀하여 구하기가 어려우나 폐하를 위하여 다른 신도 찾아 바치겠나이다.”
“기대하고 있겠소. 그나저나 저번 일화에서는 수집가의 이야기가 나와서 다음 내용을 어찌나 궁금하게 만들었던지. 어떤 이유에서인지 수집가가 서재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 않소? 그가 서재에 갇히기 전에 만났던 여인의 연심을 담은 꽃신을 자신의 서재 마룻바닥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그 꽃신이 사라질까 염려하여 문 앞에서 떠나지도 못하면서 말이오. 서재 밖으로 나갈 생각도 있고 여인에 대한 미련도 남아 있으면서 어찌해 그 소중한 꽃신을 밖에 두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오.”
“그가 결국 서재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불행한 결말을 향한 암시가 아닐는지요?”
자황은 태복이 지금처럼 유명해지기 전부터 그의 작품을 좋아했었다. 그리고 그가 연회 자리에서 자신의 취향을 넌지시 말했고, 자황의 눈에 들고자 했던 이들의 입소문에 의해 태복은 더욱 유명해졌다. 원래 잘 팔리는 작가이긴 했지만 황제가 총애하는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고 나서는 그의 작품이 취향에 맞지 않는 사람들조차 관심을 보였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책이 부족하여 못 팔 정도가 되었다.
“그가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라는 설도 있지요.”
다른 후궁이 황 재인을 의식하며 황제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들에게 밀릴 것 같았는지 다른 후궁들도 너도나도 소설 내용에 대해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미 죽은 자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서재는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방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 작은 방이 그런 묘한 분위기를 풍길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서재에 방문하는 자들은 미련을 안고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이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의 서재에는 망자는 신지 못하는 신발만 놓인 것이라는 추측도 우세하지요. 결론적으로 산 자와 죽은 자 사이 집에서 산송장처럼 꼼짝하지 못하고 있는 신세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다들 결말을 두고 이런저런 추측이 난무하는군요. 황제 폐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자황이 대답했다.
“그거야 작가 마음 아니겠소.”
“폐하시라면 태복 선생을 황궁으로 불러들여 그 심중을 떠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자황은 턱을 어루만지며 잠시 생각했다. 다음 소설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재미보다 남들보다 먼저 다음 내용을 알게 되는 재미가 더 쏠쏠할 것 같았다.
“짐이 부르면 과연 그가 올까요?”
“황제 폐하의 부름인데 어찌 안 올 수가 있겠습니까? 가문의 영광이니 버선발로 황궁까지 뛰어올 것입니다.”
대화를 듣고 있던 복태는 차를 마시다가 멈칫했다. 찻잔에 가려진 입가에는 곤란한 미소가 삐뚤대고 있었다.
‘이미 황제 폐하 옆…… 아니 멀찍이 떨어져 있지만 여기 앉아 있습니다만.’
-아아아아악!
스산한 바람이 부는 어느 가을밤. 귀뚜라미 소리도 들리지 않는 유난히 조용한 날이었다. 휘황찬란한 금빛 황궁 안의 작은 별채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공포에 물든 소리가 아닌 새 생명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어머니의 소리였다. 궁녀들이 끓는 물과 깨끗한 수건을 분주하게 나르고 있었고 문밖에선 의원들이, 문 안에서는 의원의 지시를 받은 의녀들이 출산에 힘썼다. 문 안팎은 몹시도 긴박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응애앵, 응애!
궁인들의 초조한 기색이 그 순간 환희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위나라의 셋째 황자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황자를 생산했다는 연통을 받은 황제는 직무를 마치고 유 답응(答應 : 성은을 입은 궁녀에게 내리는 직위)에게 걸음 했다. 얼굴은 땀에 절어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지만 출산의 고통에서 조금 벗어난 듯 평화로운 표정의 유 씨는, 아이를 안아 든 어머니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황제는 유 씨에게 다가가 아이를 건네받았다. 갓 태어난 아기는 아직 누구를 닮았다 말할 수는 없었지만 총명해 보였다. 황제의 얼굴에 기쁨도 잠시, 조금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무영(無影)이라 짓겠다. 그리고 수고한 너를 정4품 상재(商才)에 봉하겠노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아이를 다시 건네준 황제는 뒤돌아 방을 나섰다. 유 씨는 멀어져 가는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무영에게 눈을 돌렸다.
“아가야, 네 아버지께서 너를 무영이라고 이름하셨다. 네게 그림자처럼 조용히 살라 하시는구나…….”
황제에게는 이미 황태자인 첫째 아들 용비와 둘째 아들인 지좌보가 있었기에, 셋째 아들은 필요치 않은 것이었다.
무영의 나이 열일곱이 됐을 때 황제는 불치의 병에 걸려 침상에 몸져눕게 되었다. 다음 황권은 당연히 황태자인 용비가 차지하게 될 거라 여겼지만 둘째 황자인 지좌보가 감춰 왔던 본색을 드러내며 황좌를 탐하려 들었다. 이에 자연스럽게 신하들마저 당파끼리 패가 갈려 각자 미는 황자에게 붙었고, 황궁 안은 전시 상황처럼 불붙기 일보 직전의 전쟁터가 되었다.
황궁안의 불안한 상황은 1년이나 계속되었다. 무영은 전쟁터 같은 황궁 안에서 열여덟, 성년이 되었다. 신료들은 추잡하게 서로 물고 뜯고 할퀴다 이내는 체면 불고하고 몸싸움까지 자처했지만, 두 왕자는 보이지 않는 신경전만 벌이는 형세였다. 셋째 황자인 무영은 오래전부터 흐르고 있던 황실의 살벌한 기운에 짓눌러 이미 어릴 적부터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 이 황자들끼리의 싸움은 무영을 완전히 망각할 만큼 촌각을 다투는 형세였다. 탐색전을 벌이기 위해 만나기로 한 두 황자는 만월이 뜬 어느 날 밤, 궁내에 있는 팔각정에서 술잔을 나눴다.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모습이었지만 역시 서로의 세를 간 보며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두 황자는 어린 시절부터 팔각정에서 만나 서로를 견주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무영은 비장한 표정으로 길을 걸었다. 팔각정으로 향하는 그 길을 달빛이 아스라이 비추고 있었다. 그는 황실의 살벌한 무게에 오랫동안 짓눌려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다. 그는 처소 밖으로 나가면 호흡이 빨라지고 뇌가 짓눌리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런 그의 입에서는 늘 가쁜 호흡 소리가 났고, 그것마저도 공포에 짓눌려 항상 떨리고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어둠이 내린 황궁의 길을 위태롭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몸을 구부정하게 움츠린 채 걸었다. 그 뒷모습이 묘했다. 그는 항상 처소 밖을 나설 때마다 심리적 압박감에 그리했으나 이번에는 단순히 위축이라기보다 도약하기 전의 웅크림이 품은 긴장감과 고양된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항상 그의 뒷모습은 기괴했지만 오늘은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어느덧 그리고 어느새 그는, 술은 마시지 않으면서도 술잔을 기울이는 두 황자의 이상한 술자리에 도착했다. 황자들은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가 수상한 소리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무영이 나타나자 이내 방심하고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술자리에 끼어든 무영을 보며 지좌보는 입을 열었다.
“네놈이 여긴 무슨 일이냐? 형님하고 중요한 얘기 중이다. 썩 꺼지거라.”
“에이, 형…… 님! 수…… 수, 술상 아…… 앞에 놓고 술을 아…… 안 드시니 부, 분위기가 어둡지 아아…… 않습니까~ 제 술자, 잔 한 번 바, 받으세요.”
“머저리 같은 놈. 저놈만 보면 속이 뒤집힙니다, 형님. 안 그렇습니까?”
“태어나길 저렇게 생겨 먹은 것을 저라고 어찌할까. 황실의 수치 같으니. 내버려 두어라.”
방금까지 서로를 노려보던 두 황자는 무영으로 인해 다시 의기투합하는 듯 보였다. 무영은 피를 나눈 두 형제에게 무안을 받고 그 분위기를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렀다. 술병과 술잔을 손에 쥐고 비틀거리며 술상을 벗어나 옆에서 호위를 하던 호위무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술잔을 호위무사 가슴께로 들어 올려 술을 부었다.
“추…… 추운데 고, 고생한다. 너도 마, 마셔라.”
“송구합니다. 근무 중입니다.”
“에이~ 그러지 마, 말고…… 어엇!”
무영은 술을 따르다 비틀거리며 호위무사에게 술을 쏟았다. 당황한 호위무사는 옷에 묻은 술을 털어 댔고 그가 방심한 사이 무영은 재빠른 동작으로 그의 허리춤에 매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모두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상황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새에 무영을 조롱하며 비웃던 지좌보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고, 곧바로 용비의 심장에 검이 박혔다. 용비는 충격을 받은 눈으로 무영을 쳐다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열린 그 입으로 피가 한 움큼 뿜어져 나왔다.
“네…… 쿨럭! 네놈이…… 어떻게…….”
“원래 큰 놈들은 자신의 덩치에 도취되어 작은 놈이 무럭무럭 크는 줄 모르는 법입니다, 형님.”
무영은 싸늘한 눈길로 용비를 내려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용비는 이내 숨을 거뒀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호위무사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황실의 공식적인 연회에서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진 이후로 무영의 공황장애는 황궁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런 그가 형제를 칼로 베고도 여유롭게 서 있는 모습은 너무 이질적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준비한 것이다. 천천히 차근차근 공황장애를 넘어서며, 이 화려한 도약의 연출을 꿈꿨던 것이다.
“뭐하더냐? 웃어. 이 나라의 황자가 오랜 정신병을 극복했는데.”
주변을 지키고 있던 호위무사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달려와 검을 뽑아 무영에게 겨누었다. 무영은 용비의 몸에 박힌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을 몸에서 뽑자 용비의 피가 역류하여 무영의 얼굴에 수많은 빨간 점을 찍었다. 얼굴에 튄 피가 볼을 타고 아래로 흘렀다.
“이 나라 마지막 황자의 목을 벨 생각인가?”
얼간이, 머저리 무영이 이 나라 제일 검이라 칭송받던 두 황자를 단숨에 죽인 것도 모자라 말도 더듬지 않고 똑바로 서 있자, 그의 위용에 호위무사들은 기가 죽어 주춤거렸다. 그의 말대로 방금 황태자와 둘째 황자는 죽었고, 황제는 불치병에 걸려 더 이상 황자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나라에서 황위를 이를 황자는 무영, 단 한 사람뿐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호위무사들은 무영을 겨누던 칼을 힘없이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내 소개를 하지. 나는 한때 당 무영(無影) 황자라고 불렸던 당 자황(自皇)이다.”
무영, 아니 자황의 모습이 너무나 거대해 보여 호위무사들은 그의 앞에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었고, 충성을 맹세하였다.
‘어머니. 소자는 더 이상 작은 연못으로는 만족하며 살지 않을 것입니다. 땅끝의 끝없는 바다에서 헤엄치는 비단 잉어가 될 것입니다.’
이후 황태자와 둘째 황자의 추종 세력은 형제를 죽이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 이름을 갖다 붙인 자황의 인격을 비난하며 거세게 반대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남은 황제의 적자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고, 바로 등을 돌려 자황의 편에 선 제삼 세력의 힘이 커지자 자연스럽게 정식 황태자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자황에게 무영이라는 이름을 준 황제는 황태자를 지명하는 칙서에 그 이름을 당 자황이라 하였고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났다. 황제로 등극하는 그 순간에 자황은 생각했다.
‘세상에 노력해서 안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직 해조차 뜨지 않은 묘시(卯時 : 5시~7시). 황궁은 부지런한 황제 때문에 매일 이른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침상에서 일어나 앉아 세숫물을 가져오는 궁녀를 기다리는 황제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굵지만 섬세하게 내려오는 얼굴선과 티끌 한 점 없는 매끄러운 피부가 그가 미남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살짝 탄 살색은 어려서부터 혼자 갈고닦은 무예를 지금까지도 지속해 왔다는 증거였다. 짙은 눈썹과 그 아래 자리한 깊어 보이는 눈매를 가지고 있어 쉽게 여심을 휘어잡았고, 그의 드높은 기상처럼 콧날 또한 오뚝했다. 입은 작지 않고 붉은 것이 생기 있었다. 그가 웃을 때면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과 입 때문에 해맑아 보이기까지 했다.
환관의 시중을 받아 몸과 의복을 정갈히 한 황제는 편전으로 향했다. 6척(약 180cm)이나 되는 훤칠한 키만큼 기다란 다리를 가진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자 뒤를 따르는 환관들이 바삐 걸음을 했다. 각 기관을 담당하는 신료들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다가 황제가 들자 모두 일어서 예를 갖추었다.
“간밤에 모두 평안들 하셨소?”
화려한 황금 용으로 치장된 의자에 앉아 신료들을 내려다보며 자황이 말했다. 낮게 깔리는 저음이 친절함을 담고 있었다. 그는 항상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신료들의 안부를 묻곤 했다. 그는 선황제들과는 달리 염세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염세적이기는커녕 그가 사용하는 어휘는 배다른 두 형제를 죽이며 황좌에 오른 이치고는 밝았고, 과정이야 어찌 됐든 황제의 정치 태도와 업적으로 봤을 때 자황은 성군이었다. 하지만 예전 그의 이면을 알고 있는 신료들로서는 이 편전 회의가 마냥 편안한 자리일 수만은 없었다.
“예……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한 신료가 대표하여 말하자 뒤이어 모든 신료가 입을 모아 말했다. 생기 있는 자황의 목소리와는 비교되게, 위축되고 불편함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
“이리 보람찬 하루이거늘, 모두들 표정에 왜 그리 기운이 없는 것이오? 삶이 축복이고 각자에게 매달린 의무 또한 삶이 이어지고 있다는 생생한 증거인 것을.”
자황은 자신의 기운이 맑고 긍정적이라면 다른 이들의 기운까지 그리 만들 수 있을 거라 여기며 항상 밝은 태도를 보여 왔다.
“경들 얼굴을 보니 지금이 마치 밤 같소. 이제 막 하루가 시작되었을 뿐이니 활기차게 갑시다. 자, 첫 안건이 무엇이오?”
자황은 이전 어느 황제들보다 자신의 삶에 매우 만족해하는 밝은 사람이었다. 앞으로도 오늘날과 같이 항상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자신에게 복태라는 부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황실 후궁들이 거처하는 처소들 중에서도 침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 있었다. 그곳은 궁녀조차 제대로 자리를 지키지 않는 처소였다. 그곳에는 자황의 후궁인 위복태라는 사람이 홀로 살고 있었다.
신시(申時 : 3시~5시)쯤 처소 안쪽 방에서 부스럭거리며 그가 일어났다. 그의 주변에는 아침까지 소설을 쓰다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문방사우가 흩어져 있었다. 쓰다 버린 종이는 대충 구겨져 방 곳곳을 배회하고 있었고 책상 위에는 지필묵과 낙관이 아직 찍히지 않은 책이 놓여 있었다. 그 책은 간밤에 막 완성한 그의 소설이었다. 복태는 책을 바라보며 ‘태복(太福)’이라는 낙관을 찍으려다가 황실 정기 연회가 있는 날인 것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시각이 다 되어 슬슬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먹으로 얼룩진 의복은 흐트러졌고, 정갈하게 묶었던 머리카락은 흩어져 삐죽삐죽 나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창문으로 다가가 그것을 활짝 열었다. 해가 쨍쨍해야 할 시각인데 밖은 어두웠고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도 오는데 연회가 취소됐다는 소식은 안 오나? 안 그래도 나가기 싫은 연회였는데 비까지 내리니 더 나가기가 싫어졌다.
“날씨가 좋아도, 안 좋아도…… 뭐 달라지는 게 없네.”
복태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창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는 처소 궁녀가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이는 세숫물로 대충 세수와 양치만 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와 신을 신었다.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 한숨을 쉬고는 우산을 펴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정상적인 사람과는 다르게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처소 궁녀가 처소에 잘 붙어 있지 않아 혼자 모든 걸 준비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그러나 그는 서두르는 성격이 아니었다. 비록 다리를 절지만 뛰자고 하자면 얼마든지 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천천히 걸어갔다.
이미 연회가 시작한 지 일각(약 15분)이 흐르고 나서야 복태는 연회장에 도착했다. 연회장 가운데에는 기다란 상이 있었고 제일 상석에는 당연히 황제인 자황이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 나란히 후궁들이 앉았다. 자황과 가장 가까이에 앉을수록 이야기를 나누고 눈에 띌 기회가 많았기에 후궁들은 항상 보이지 않는 자리싸움을 했었다. 후궁 중에서는 복태처럼 남자도 있었는데 여자 못지않은 미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는 복태와는 달리 황제의 눈에 들고 싶어 했고 현재는 황제의 옆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복태는 문 앞에서 출석 여부를 확인하는 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는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남은 자리는 황제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 자리뿐이었다. 후궁들은 모두 황제의 눈에 들고자 그만 바라보고 있었고, 황제 또한 후궁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 집중했다. 아무도 그의 등장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복태도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에 그 부분에 감사함을 느끼며 황제를 향해 고개만 잠시 숙였다가 구석 자리에 앉았다. 복태는 맞은편,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보이는 비를 바라보다가 생각에 빠졌다.
그는 항상 이 황실에서 완벽하게 잊힌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왔었다. 내리는 듯 내리지 않는 듯 뿌옇게 자리했다가 언젠가는 사라질 이 안개비처럼 자신도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가 이 궁에서 홀연히 사라지고자 했다. 언젠가 이 궁에서 월담을 하더라도 그 누구도 자신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지금 옆에서 떠드는 저들은 자신을 기억하기에는 너무 완벽한 자신들만의 세상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권세가의 가주지만 자신은 서자였고 절름발이였다. 그런 자를 세도가의 자식들인 후궁들은 경쟁 상대로 봐 주지도 않았을뿐더러 없는 사람 취급을 했기에, 자신의 소망대로 지내다 사라지기에는 딱 맞는 환경이었다.
복태는 밖에 내리는 안개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렇게 밝은 곳에서는 조금만 저 빗속으로 들어가면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안개비 속에 들어간 자신을 보려면 똑같이 안개비로 들어와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추적추적한 이 빗속으로 절대 스스로 뛰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이곳에서 안개비처럼 사라지는 상상을 하며 복태는 부푼 기대감에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그때 후궁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 후궁은 간의대부(諫議大夫 : 황제에게 간하고 정치의 득과 실을 논하던 관원) 황만의 여식 황 재인(才人 : 정3품)이었다. 황 재인은 바닥에 글귀가 적힌 비단신을 들고 있다가 황제에게 선물했다. 비단신을 받은 황제는 반달 웃음을 지어 보이며 크게 기뻐했다.
“오오, 이 글귀를 보아하니 태복 선생의 작품이구려. 짐이 좋아하는 글귀이오.”
자황은 들뜬 표정으로 신을 이리저리 쳐다보며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 모습에 새삼 다시 반한 황 재인 또한 얼굴에 웃음을 머금으며 황제에게 대답했다.
“예, 폐하. 아버님께 말씀드려 어렵사리 구한 것이옵니다. 신첩도 폐하처럼 신에 새겨진 그 글귀에 마음이 통한지라.”
그녀는 자황의 마음에 들고자 그와 같은 부분에서 공감했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했다. 상상의 나래에 빠져 있던 복태는 황제의 입에서 ‘태복’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태복’은 자신의 필명이었다.
복태는 사실 소설가였다. 신분을 숨겨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비밀스럽게 집필해 왔다. 소설의 제목은 ‘신발 수집가의 서재’였다. 한 권으로 끝내지 않고 연재를 해 온 장편의 소설이었고, 그 최신판을 오늘 아침에 막 완성한 참이었다.
소설의 내용은 이러했다. 서재에 서책이 아닌 신발을 올려놓았던 어떤 남자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괴짜라고 불렀다. 그중 어떤 이가 그에게 이유를 묻자 그가 이리 답했다.
‘책 한 권보다 이 신에는 더 많은 삶의 글귀가 담겨 있지 않은가.’
그의 서재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겪었던 낙담한 사연이나 고민을 털어놓았고 그는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서재에 올려놓은 신발 중에서 하나를 골라 그 바닥에 그들의 고민을 적어 선물했다. 신발을 선물 받은 방문자들은 그 신을 신고 슬픔을 극복하고 밑바닥에 적힌 글귀가 신을 신고 돌아다니면서 지워지고, 새로 도약하며 그 사람의 인생이 되어 사라진다는 이야기였다.
소설 각 화별로는 방문자들의 사연이 소개된 다음 해결되었고, 큰 흐름으로는 그 괴상한 신발 수집가의 정체와 사연에 대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식이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줄거리는, 그 신발 수집가가 그 서재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누군가가 그가 신고 나갈 신발을 어딘가에 감춰 뒀기 때문이고, 감춰진 신발을 찾게 되는 순간에 비로소 그는 서재를 떠날 수 있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자황은 비단신을 내려놓고 황 재인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다음 권이 나올 때가 지났는데 아직 나오지 않아서 적적하던 차였소. 마치 소설 안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이 신을 보고 있자니 마치이 세상 어딘가에 신발 수집가의 서재가 정말로 존재할 것 같은 기분이 드오.”
“폐하께 기쁨을 드려 가문의 광영이옵니다. 태복 선생의 글귀가 적힌 신은 진귀하여 구하기가 어려우나 폐하를 위하여 다른 신도 찾아 바치겠나이다.”
“기대하고 있겠소. 그나저나 저번 일화에서는 수집가의 이야기가 나와서 다음 내용을 어찌나 궁금하게 만들었던지. 어떤 이유에서인지 수집가가 서재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 않소? 그가 서재에 갇히기 전에 만났던 여인의 연심을 담은 꽃신을 자신의 서재 마룻바닥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그 꽃신이 사라질까 염려하여 문 앞에서 떠나지도 못하면서 말이오. 서재 밖으로 나갈 생각도 있고 여인에 대한 미련도 남아 있으면서 어찌해 그 소중한 꽃신을 밖에 두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오.”
“그가 결국 서재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불행한 결말을 향한 암시가 아닐는지요?”
자황은 태복이 지금처럼 유명해지기 전부터 그의 작품을 좋아했었다. 그리고 그가 연회 자리에서 자신의 취향을 넌지시 말했고, 자황의 눈에 들고자 했던 이들의 입소문에 의해 태복은 더욱 유명해졌다. 원래 잘 팔리는 작가이긴 했지만 황제가 총애하는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고 나서는 그의 작품이 취향에 맞지 않는 사람들조차 관심을 보였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책이 부족하여 못 팔 정도가 되었다.
“그가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라는 설도 있지요.”
다른 후궁이 황 재인을 의식하며 황제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들에게 밀릴 것 같았는지 다른 후궁들도 너도나도 소설 내용에 대해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미 죽은 자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서재는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방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 작은 방이 그런 묘한 분위기를 풍길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서재에 방문하는 자들은 미련을 안고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이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의 서재에는 망자는 신지 못하는 신발만 놓인 것이라는 추측도 우세하지요. 결론적으로 산 자와 죽은 자 사이 집에서 산송장처럼 꼼짝하지 못하고 있는 신세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다들 결말을 두고 이런저런 추측이 난무하는군요. 황제 폐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자황이 대답했다.
“그거야 작가 마음 아니겠소.”
“폐하시라면 태복 선생을 황궁으로 불러들여 그 심중을 떠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자황은 턱을 어루만지며 잠시 생각했다. 다음 소설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재미보다 남들보다 먼저 다음 내용을 알게 되는 재미가 더 쏠쏠할 것 같았다.
“짐이 부르면 과연 그가 올까요?”
“황제 폐하의 부름인데 어찌 안 올 수가 있겠습니까? 가문의 영광이니 버선발로 황궁까지 뛰어올 것입니다.”
대화를 듣고 있던 복태는 차를 마시다가 멈칫했다. 찻잔에 가려진 입가에는 곤란한 미소가 삐뚤대고 있었다.
‘이미 황제 폐하 옆…… 아니 멀찍이 떨어져 있지만 여기 앉아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