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복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최근 후궁들과의 연회에서 왜 자기 소설에 대한 얘기만 하는지! 황제에 눈에 들고자 함이겠지. 황제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신발 수집가의 서재’ 이야기만 나오는 것이겠고.
‘줏대 같은 거라곤 없는 사람들 같으니! 아아…… 그나저나 계속 내 소설 이야기만 해 대면 휩쓸려 버린다. 사람들 시선에! 기준에. 아아…… 이런 흐름은 별로인데……. 내 세상이 흔들려. 위험해…… 위험해!’
이런 복태의 마음을 모르는 황제와 후궁들은 계속하여 소설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문제는 그 작가가 태복이라는 필명만 있을 뿐, 그가 어디 사는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설마 황제 폐하께서 사람 하나 못 찾아내시겠습니까? 작정하고 숨으려 드는 자가 아닐 바에야.”
“짐이 이토록 호의적인데 왜 숨으려 하겠소? 그래! 사람을 풀어 찾아보라 명해야겠소.”
자황의 말에 모두들 수긍하였고, 자황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그런 점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복태의 마음속에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마음의 평화를 찾자……. 찾아야 해……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마음의 평화를 찾…… 기는 개뿔! 으아아아아아아!! 다가오지 마! 당신은 태풍이야! 산들바람이고 싶은 나와는 흐름 자체가 다르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 마음속 절규와는 달리 복태의 겉모습은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하지만 자신이 뱉은 말을 바로 실행에 옮겨 명을 내린 자황의 말과 기대에 들뜬 호탕한 웃음소리가 연회장 안에 울려 퍼지자 눈썹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연회장을 가득 메운 저들의 웃음소리가 커지자 복태의 마음속 절규 또한 커지고 있었다.
복태는 항상 의욕이 넘치는 자황이 자신과는 달라 서로 상성이 맞지 않다고 여겨 왔다. 자황은 항상 주위 사람을 자황의 기준대로 휩쓸리게 했다. 그가 황제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의 기질과 성정이 그러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휩쓸리는 것에 아주 질색하는 자가 바로 복태였다. 그러니 부부라 해도 서로 잘 맞지 않으면 멀찍이 떨어지는 것이 서로의 정신 건강에 좋다고 복태는 생각했다.
자황과의 혼인은 정치적 관계 맺음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첫날밤도 갖지 않고(절대 첫날밤을 치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첫날밤을 안 치러서 좋았다. 정말이다.) 국경 시찰을 해야 한다며 갑자기 의욕에 넘쳐선 말을 타고 밤에 궁을 나섰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자황은 수많은 후궁 사이에서 복태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것이다.
‘역시 당신과는 안 맞아. 당신과 나는 상성도 안 맞을뿐더러 그놈의 의욕 때문에 당신, 내가 후궁인 것도 기억 못 하잖아. 항상 그렇게 의욕이 넘치지. 지금도 그 의욕을 불태우고 있고! 뭐든 당장 해낼 때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인간인데……. 으아! 하우! 우아아!! 상성이 안 맞는 걸 떠나서…… 왜 내가 그녀를 정리하는 심정을 소설 속에 집어넣은 거지?! 아무리 그때 감정이 그러했고 딱히 쓸 내용이 없었다지만 왜 하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 ……후우 ……후우! 마음의 평화를 찾자……, 그래. 설사 황제가 태복이 나라는 것을 알아차린대도 소설 속 이야기는 내가 지어낸 이야기일 뿐, 내 실제 이야기라는 것은 모를 거야……. 으으, 아니야! 알아챌지도 몰라……. 황제가 얼마나 소름 돋는 애호가인데! 저런 애호가 반대야, 반대!’
“폭풍우다…….”
마음속 혼란에 복태는 육성으로 낮게 읊조렸다. 하지만 복태의 옆에 앉아 있던 다른 후궁은 복태의 말을 들었고, 밖을 바라보았다. 밖은 조용한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후궁은 잠시 복태를 이상한 눈으로 흘겨보다가 다시 자황에게 시선을 돌리며 그의 장단에 맞춰 웃었다.
폭풍우다……. 마음에 폭풍이 몰아치고 주변 사람들에 의해 내 몸이 휩쓸리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복태가 가장 싫어하는 감정 상태였다. 폭풍우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복태의 귀에 이어지는 자황의 말이 맹렬한 속도로 날아와 꽂혔다.
“세상엔 노력해서 안 될 것은 아무것도 없소. 짐이 마음을 먹었는데 사람 하나 못 찾겠는가.”
복태는 연회에 참석한 이후 처음으로 황제에게 고개를 돌렸다. 황제를 바라보는 복태의 얼굴에 분노를 억누르는 가장된 웃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염병할!!!’

***


세상엔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이 있다.
복태의 이야기.

무영이 태어나던 해, 민가의 작은 집 안에서 숨을 헐떡이며 신음을 삼키는 여자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허름한 이불로 볼록한 배와 발가벗은 아랫도리를 가리고 치아로 입술을 앙다문 채 이불을 쥐어뜯고 있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과 흑요석처럼 빛나는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아직 시기가 아닌데 아이가 태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비밀스럽게 이 아이를 낳아야 했다.
아이의 아버지인 위귀호는 지체 높은 귀족 신분에 처자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황궁에서도 군기대신으로서 그러잖아도 명예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명예는 유명한 세도가의 딸이 그의 부인이었기에 얻은 결과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부인의 말에는 꼼짝도 못하는 애처가 아닌 애처가 노릇을 해 왔다.
귀족 신분에 첩 한둘 얻는 것쯤이야 흠도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처가에 흠이 잡힐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아이를 밴 여자 하나 떳떳하게 내세우지 못하고 이런 작은 집에 몰래 그녀를 피신하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간간이 들러 맛있는 것도 가져다주고, 어느 때는 사랑하고, 볼록한 배에 귀를 갖다 대고 말을 걸며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감도 함께 나누었다. 비록 숨겨진 여자였지만 그녀는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귀호의 장인의 생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귀호는 그녀와 아이가 걱정되었지만 아직 산달이 되려면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가족들과 다 함께 장인이 거주하는 지방으로 내려갔고, 하필이면 생신날에 산통이 시작돼 버린 것이었다.
양수가 터졌는지 이불이 축축한 게 느껴졌다. 아랫배 쪽이 묵직한 게 아이가 출구를 두드리고 있다고 자연스레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주위에는 아무도 도와줄 이가 없었다. 오로지 그녀 스스로 모든 일을 해내야만 했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고 규칙적으로 힘을 주기 시작했다.
“으으음!!”
아이를 밖으로 내보내려고 하는 움직임에 마침내 아이의 신체 일부가 질 입구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머리가 아닌 발이 먼저 빠져나왔다. 아무도 가르쳐 줄 이 하나 없으니 그녀는 당연히 알아채지 못했고 계속하여 힘을 줬다. 이대로라면 아이는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었다. 질 입구에 발이 걸린 채 죽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위험한 것은 산모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는 결국 탈진하여 기절하고 말았다.
그렇게 몇 시진이 흘렀을까. 귀호가 떠나기 전, 부리던 종놈에게 그녀가 걱정되니 여기 남아 자주 들여다보라고 명령을 내렸었다. 그 종놈이 그녀에게 찾아갔고 상황의 심각함을 깨닫고 야밤에 산파와 의원을 찾아 돌아다녔다. 산파는 쉽게 찾게 되어 먼저 집으로 보냈고, 의원은 좀처럼 닫힌 문을 열어 주지 않아 한참을 헤매다 급한 대로 로마에서 왔다는 서양 의원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방 안으로 들어서니 산파는 피가 통하지 않아 시퍼레진 아기의 발을 잡고 다시 배 속으로 집어넣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의원은 사색이 되어 산모의 호흡부터 확인했지만 이미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아이의 맥박은 아직 뛰고 있었으나 그것도 머지않아 끊길 참이었다. 의원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산모는 죽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아기도 죽습니다.”
그 말에 종놈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의원의 다리에 매달리며 애원했다.
“아기…… 아기라도 살려 주십시오!”
“이 나라의 의술로는 아이를 살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의술이라면 가능합니다.”
“뭐든, 뭐든 해 주십시오. 이대로 둘 다 죽는다면 소인도 죽습니다!”
“알겠습니다. 가서 뜨거운 물과 깨끗한 마른 수건을 가져오세요.”
의원의 명령에 종놈은 얼른 방문을 나섰고, 의원은 가방에서 의술 도구를 꺼냈다. 그 안에는 산파가 평생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이상한 기구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의원이 그중에서 끝이 날카로워 보이는 칼을 집어 들자 산파는 기겁하며 도망을 쳤다. 의원은 개의치 않고 산모 옆에 자리를 잡고 칼로 그녀의 아랫배를 갈랐다.
뜨거운 물과 수건을 가져온 종놈은 산모의 배가 갈라져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 자빠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당신 미쳤어?!”
“아이를 살리고 싶으면 내가 가져오라고 했던 거 가져오십시오!”
“사람의 배를 가르는 게 의원이 할 짓이야! 백정도 사람 배는 안 갈라!”
“아이마저 죽이고 싶습니까?”
의원이 서슬 퍼런 눈초리로 종놈을 협박했다. 의술에 대해 차근히 설명을 해 주기엔 시간이 너무나 촉박했다. 종놈은 저도 모르게 물과 수건을 내밀었고 그 이후 의원은 순조롭게 아이를 산모의 배 속에서 꺼냈다. 탯줄을 자르고 아이의 엉덩이를 쳐 울음을 터뜨리게 했고 그렇게 아이는 살아났다. 종놈은 아이고, 아이고 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의원은 아이의 다리를 살펴보다가 이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에게 장애가 남을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귀호가 돌아왔다. 종놈은 귀호에게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에 대해 자세히 고했다. 하지만 여자의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낸 부분은 대충 얼버무렸고, 시체는 산에 잘 묻어 주었다고 말했다. 그 부분까지 사실대로 고해바쳤다가는 자신도 그 옆에 나란히 묻힐 게 뻔했다.
이야기를 들은 귀호는 깊은 슬픔에 눈물지었다.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의 아이를 낳다가 죽음에 이르다니……. 게다가 아이는 평생 다리를 절게 생겼다고 한다. 태어나면서 어미를 잃은 불쌍한 아이가 자신을 보며 방긋방긋 웃는데 죄책감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불쌍한 아이를 위해서라도 자신은 강해져야 했다. 집으로 데려가 부인에게 사실을 말하고 자신의 품 안에서 키울 것이라 다짐했다.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할 텐데 뭐가 좋을까……. 복태, 복태가 좋겠구나. 이처럼 불행하게 태어났으니 앞으로는 큰 복을 받으라는 의미이다.”
아이가 다시 생글생글 웃었다. 그 작고 여린 손이 귀호의 손가락을 부여잡았다.
“복태야. 이제 집에 가자꾸나.”
아기를 안고 집에 돌아온 귀호를 바라보던 부인은 잠시 얼이 나가 있다가 이내 곧 불같이 화를 내며 절대 받아 줄 수 없다 선언했다. 자신 몰래 딴 여자와 놀아난 것도 배신감에 치가 떨리는데 그 씨까지 뿌려 받아 오다니. 자신은 남편을 사랑하는데 남편은 마치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듯 느껴졌고, 자신의 배경만 원했나 하는 자격지심까지 들어 분해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천륜을 저버릴 수 없다는 남편의 간곡한 부탁의 말을 끝까지 무시할 만큼 못된 성정이 아니었기에 부인은 끝내 아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복태는 아버지의 과하다 싶을 정도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 왔다. 덕분에 안 그래도 자신을 고깝게 여기는 마님과 도련님은 자신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그래서 잘 마주치지 않으려고, 주로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집을 전체적으로 봤을 땐 외진 곳이었지만, 볕이 잘 드는 방이었다. 부족하다 느낄 틈도 없이 아버지가 모든 것을 챙겨 주고 지켜봐 줘서 방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는 절름발이인 자신이 조금이라도 불편함을 느낄까 걱정하여 하는 행동이었지만 복태는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비록 다리를 절지만 걸을 수 있었고, 빠르지는 않지만 마음만 먹으면 뛸 수도 있었다. 다리가 조금 불편하다 하여 뜻을 이루지 못할 것도 아닌데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자신은 결코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처럼 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너무 완벽한 온실은 언제나 밀실이었다.
마루 아래 디딤돌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자신의 신발은 그 바닥이 항상 깨끗했다. 한 발짝만 나서도 바닥에 모래가 끼일 텐데, 그 한 발짝도 디딜 일이 없으니 언제나 그의 신발은 새 신발 그대로였다.
어느 날 복태는 신지도 못할 신발을 밖에 두어서 뭐하나 싶어 방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선반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그 신발을 보며 세상이 그에게 줄 수 있는 의미와 이야기를 부여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신발을 신을 수 없으니 그 누구보다 신발에 의미를 붙여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것이 복태의 생활이었고, 인생이었고, 세계였다.
방 안에서 생활하고 생각하고 공부하는 일밖에 할 일이 없었기에 복태는 매일 서책만 파고 앉아 있었다. 다른 애들처럼 서당에 나가 서로의 지식을 겨루는 것은 해 보지 못했지만 자신이 더 똑똑할 것이라 짐작했다. 방 안에서 할 것이라곤 서책을 읽는 거밖에 없었으니까. 이처럼 계속 공부를 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나랏일을 하는 귀족이 될 수 있을 거라 여겼고, 장남인 자신의 형보다 두 배, 세 배 더 노력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생각했다.

***


복태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복태는 아버지 귀호와 이복형인 용의가 공부를 하고 있는 방 앞에서 서성거렸다. 귀호는 시제를 치르듯 그동안 용의가 공부했던 서책들을 살펴보며 질문을 했고 용의는 그에 답변했다. 귀호가 다시 질문했고 이제까지 잘 대답했던 용의는 기억이 나지 않는지 답변을 하지 못하고 주춤거릴 때였다. 복태는 그 답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더 똑똑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은 치기 어린 마음에 닫혀 있던 문을 열고 들어가 그 답을 말해 버렸다. 귀호는 형도 풀지 못한 문제를 쉽게 풀어 버린 복태의 모습에 흐뭇했지만 복태는 서자였다. 형보다 잘난 아우는 있을 수 없고, 본 혈통인 용의보다 잘난 서자는 더더욱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안 그래도 질투심이 많은 용의는 복태의 잘난 체하는 얼굴이 꼴사나웠고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하지만 아버지 앞에서 그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중에 반드시 되갚아 주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귀호가 읽기라도 하듯, 한 번도 손을 올린 적이 없던 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태의 뺨을 후려쳤다.
“용의가 곧 대답할 참이었다. 그것 조금 안다 하여 용의를 조롱하려던 심산이더냐!”
복태는 아버지에게 맞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부분에서는 용의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귀호는 용의의 눈치를 살피다 더 혼내려는 사람처럼 복태를 질질 끌고 복태의 방으로 향했고, 방 안에 들어서면서 복태를 잡아끌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냥 아비가 주는 대로 먹고 입고, 평생 일을 하지 않아도 남부러울 것 없이 살 수 있는데 왜 안 될 일을 하겠다고 그리 애를 쓰는 것이냐.”
귀호는 일찌감치 복태가 품은 희망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똑똑한 아이이니만큼 그냥 내버려 둬도 크면 자기 주제를 알고 포기할 거로 생각했다. 감히 서자가 나랏일을 꿈꾼다는 것은 이 나라에서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아니, 사실 아내 집안의 권세를 타고 간다면 무리하면 작은 관직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의 집안이 복태에게 그런 기회를 줄 리가 만무했다. 귀호는 사실 복태의 치기 어린 태도보다, 아내 집안의 힘이 자신의 온전한 힘이 되지 않은 것에 더 화가 났다. 그가 복태에게 내는 화는 사실은 모두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저는 도련님보다 글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항상 이 문밖에서 도련님이 글공부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것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어보시면 뭐든 잘 대답할 자신이 있습니다!”
포기할 줄 모르는 복태의 태도에 귀호는 엄하게 꾸짖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가 잘해 봤자지! 병신으로 태어났는데 어찌 보통 사람을 따라잡아? 뭐든 잘해 봤자 딱 거기까지다. 네가 가진 복은 그저 아비에게 사랑받고 보호받으며 온실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왜 그걸 감사히 여기지 못하는 것이냐? 내가 어찌 만들어 준 온실인데! 너는 아무 데서나 막 자라기엔 너무 약하단 말이다……. 장애를 가지고 어찌 살 것이냐? 피조차 탁한 네가 무엇을 견딜 것이야.”
복태가 다리를 저는 것은 복태보다는 아버지 귀호의 자격지심이었다. 복태가 위를 바라볼 때마다 그 발목을 자신이 붙잡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죄책감과 분노가 동시에 일어 복잡했다. 복태는 귀호가 야속했지만 포기할 줄 몰랐다.
“노력해서 아니 될 것은 없습니다.”
“아니! 안 된다. 네놈이 헛똑똑이로구나. 세상 물정 모르는 병신이구나! 세상에 나가 보거라. 네놈 생각과 그 말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야.”
“그럼 세상으로 나가게 해 주십시오. 세상으로 나가 배우겠습니다, 아버……, 어르신.”
귀호는 행여 세상으로 나갔다가 다쳐서 돌아올까 봐 걱정되어 복태가 해 달라는 대로 해 줄 수 없었다. 자기 자식인 복태가 그 하찮은 평민들한테 당하는 꼴은 두고 볼 수 없었다.
“네가 가진 행복을 깨달을 때까지 이 문지방을 넘을 생각 말거라.”
귀호는 복태를 방 안에 가두었다. 복태는 문 앞에서 귀호를 연신 불러 댔지만 귀호는 단단히 마음먹고 뒤돌아 가 버렸다. 귀호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복태는 문 앞에서 힘없이 주저앉았다.
‘세상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이 있다.’

***


복태와 귀호가 소원해진 지도 어느새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귀호의 변하지 않는 강압적인 태도에 복태는 드디어 포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귀호는 복태가 다리를 절게 된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아 그 장애를 잊을 만큼 보상해 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는 복태를 과보호하는 것으로, 그래서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는 방식으로 방향이 틀어졌다. 그 사실을 귀호 본인도 복태도 완전히 깨닫지 못하였다.
복태는 자신이 귀족도 평민도 아닌 그런 어중간한 입장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할 줄 알게 되었다. 집안에서조차 도련님 아닌 도련님이라 몸종들도 같이 말 섞기를 꺼렸다. 별 힘없는 서자인 걸 알지만 주인어른인 귀호의 남다른 애정을 알기에 함부로 대할 수 없었으나, 적자인 용의 도련님만큼 깍듯이 모시기도 싫은 것이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복태와 굳이 어울릴 필요는 없었다. 이 모든 돌아가는 상황을 인정하고 나니 복태는 더 이상 위를 향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자신은 아직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위가 안 된다면 자신이 아래로 내려가면 될 일이었다. 복태는 스스로 지금의 위치에서 내려가 평민의 삶을 살아가기로 선택했다. 그에게 그 선택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는 그 선택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과 지식이 필요했다. 패잔병이 되어 아버지의 확신에 힘을 실어주고 담 안에 다시 갇히는 실패를 겪을 수는 없었으니까. 아버지의 그 오랜 확신에 자기가 스스로 ‘그의 신념이 옳았다.’라는 답을 주기는 정말 싫었다.
어느 날이었다. 정사가 바빠 귀호가 며칠 동안이나 귀가하지 못하고 황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놓고 스스로 결정을 내렸던 그때 이후, 마치 자신이 선택한 세상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반에 놓인 신발은 발이 점점 커질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늘어 갔다. 그중 제일 마지막에 놓아두었던 비단신을 조심스럽게 꺼냈고, 꽉 닫혀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방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갔다. 디딤돌에 신을 놓고 조심스럽게 발을 맞췄다. 꼭 맞았다. 복태는 신을 신고 마당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생전 처음 밟아보는 땅은 아니었지만 그 느낌과 기분이 많이 달랐다. 설렘에 양 볼이 붉게 물들고 미소가 만연했다. 복태는 바로 마주해 있는 담벼락을, 그리고 그 너머 하늘을 바라보았다. 처음 발을 디디게 될 세상,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그런 세상이 저 담 너머에 있을 것이다.
대문 근처에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쪽으로는 나갈 수 없었다. 이 담을 넘어야만 했다. 복태는 주변을 살폈다. 담 가까이에 낮은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나무를 이용하면 다리가 불편하더라도 이 담을 넘을 수 있을 것이었다. 복태는 몸을 기우뚱거리며 나무로 향했고 낮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담에 다리를 걸쳐 올렸다. 그리고는 기듯이 담 쪽으로 몸을 숙이고는 완전히 넘어 담 밖의 땅으로 착지했다. 담에서 내려올 때 발목이 살짝 접질렸지만 고대했던 세상이 눈앞에 실제로 펼쳐지는 순간,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넓은 길가에 사람들이 각각 짐을 메고, 오고 가는 모습. 그 길을 따라 조금만 나아가면 나오는 커다란 시장. 골목골목에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냇물 가에선 여인들이 투덕투덕 빨래를 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 웃음소리가 너무나 황홀했다. 모든 것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복태는 자연스럽게 시장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자신이 보지 못했던 물건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책에서만 봐 왔던 매매의 장을 눈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신나고 재밌었다. 다리를 저는 자신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이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애써 무시하며 주변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문득 신발 가게 앞에서 발걸음이 멈춰졌다. 자신은 항상 좋은 신발만 봐 왔었는데 앞에 놓인 이 신들은 어설펐다. 저렇게 뛰노는 아이들이 신으면 금방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곳에서는 모두 이런 신을 신는 걸까?’
복태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발을 쳐다봤다. 많이 신어 낡아 보이긴 했지만 이렇게 엉망이지는 않았다. 문득 주인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애가 가게를 지키며 신발을 만들고 있었는데, 앞에 놓인 신발도 모두 남자애가 만든 것처럼 보였다. 장사가 될까?
신발을 만드는 재주는 별로 없는 신발 가게 주인의 이름은 장시안이었다. 도매상을 하던 아버지를 어려서 여의고, 하나뿐인 여동생을 보살피며 힘겹게 살아가는 소년이었다. 보다시피 딱히 재주는 없으나 그나마 신발은 만들 수가 있어서 시작하게 된 것이 이 가게였다. 하지만 잘 만들지 못해 항상 헐값에 신을 팔아야 했고, 그래서 돈벌이가 잘 되지 않았다. 이곳에 오는 손님은 늘 허름한 복장의 가난한 사람들뿐이었다. 그래서 발을 절룩거리며 가게 앞을 기웃거리는, 보기 드문 비단옷을 입은 복태의 모습에 놀라며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