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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복태는 신발을 보며 늘 생각에 잠기던 습관처럼 이번에도 앞에 놓인 신발을 계속 바라봤다. 어설프고 매듭이 고르지 않아 금방이라도 망가질 것 같은 이 신발에서, 그래도 이런 거라도 팔아 삶을 연명해야 하는 만든 이의 고단함과 절박함이 느껴졌다. 자신의 방 선반에 놓인 신발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그런 신발이었다. 갖고 싶었다. 복태는 한 신발을 집어 들고 주인에게 가격을 물었다.
시안은 그런 복태가 아니꼬웠다.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지만 동정받는 것은 질색이었다. 좋은 비단신을 신고 있는 주제에, 자신이 만든 신발은 복태의 신발과 비교하면 객관적으로 봤을 때 별로 좋은 신은 아니었다. 동정받고 있다는 느낌에 시안은 날카롭게 복태를 노려보았다.
“아무도 안 사는 이 신을 사려는 이유가 뭐야? 돈이 많아서?”
그냥 봐도 귀족 같은 복태였지만 자존심이 다친 시안은 입에서 그냥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그런 시안의 태도는 복태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이 만든 물건은 사념이라는 게 담겨. 확실히 신기에는 불편해 보이지만 나에게 중요한 건 사념이야. 고되지만 스스로 살아남겠다는, 만든 이의 의지와 생각 그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곱씹고 또 곱씹어 볼 만한 그런 의미를 줘.”
전혀 언짢아 보이지 않는 복태의 모습에 시안이 조금 누그러든 태도로 말했다.
“어느 댁 도련님이야? 아, 반말하면 안…… 되나…… 요?”
“격식 차릴 것 없어. 그리 귀한 신분은 아니니.”
시안이 복태의 대답에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돈이 많은 어느 상단 장사치의 자제인가, 추리해 본다. 귀족이 아니라면, 자신과 같은 평민이라면 말을 편하게 놔도 상관이 없을 터였다.
“그런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서 귀한 신분이 아니라고?”
복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를 생각하자 잠시 기분이 우울해졌다. 궁금해하는 시안의 얼굴을 보며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사정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만, 이 세상에서 처음 맺은 인연인데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나를 낳아 주신 분은 항상 죄책감을 느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셔. 어떤 때는 버럭 화를 내시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잘해 주시기도 해. 물론 대부분 물질적으로.”
복태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왜 부모님을 낳아 주신 분이라고 해?”
“내 어머니는 정실부인이 아니셨거든. 서자야, 나.”
“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인데?”
“이 나라의 군기대신.”
시안이 숨을 들이켜다가 사례에 걸린 듯 캑캑거렸다. 군기대신의 서자라니. 장사치의 자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귀한 신분이었다. 평민인 자신 앞에서 으스대지 않는 복태의 겸손한 태도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함부로 굴 수는 없었다. 아니, 비참하지만 오히려 복태와 가까이할수록 자신과 하나뿐인 동생 시화가 그 덕을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가 생전에 진 빚 때문에 항상 무뢰배들에게 핍박을 받으며 살아야만 했다. 최근에는 여동생이 점점 크면서 고운 얼굴을 담아내자 그 무뢰배들이 시화를 쳐다보는 눈길이 뭔가 큰일이 날 것만 같아 괴로웠던 터였다. 복태를 가까이하면 조그마한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그 떨어진 콩고물로 어떻게든 빚을 갚아 내서 그놈들로부터 시화를 안전하게 지키고 싶었다. 시화를 생각하니 아니꼬웠던 마음은 아예 없어지고 무조건 복태에게 붙어 있어야겠다는 마음만 남았다.
“흠, 저기…… 그 아까 보니까 다리를 다친 것 같던데…….”
“다친 거 아니야. 걸음마를 떼기 전부터 이랬어.”
“어쨌든 다리가 불편하면 더 좋은 신을 신어야지. 내가 열심히 해서 더 좋은 신을 만들어 볼게.”
시안이 말하며 복태의 손에 들려 있던 신발을 뺏어 들었다.
“그러니까 이거 말고 다음에 다시 사러 와.”
“이건 신으려고 산 게 아닌데?”
신으려고 산 게 아니라니! 역시 동정이었던 건가. 하지만 시안은 자신의 기분을 내색하지 않으며 물었다.
“그럼 오늘 굶지나 말라고 사 주는 거야?”
“아니, 선반 위에 올려놓을 거야.”
“신발을 왜 선반에 놔? 도자기처럼 장식하는 것도 아니고.”
“난 그런 용도로 써.”
복태가 미소 지으며 시안에게서 다시 신발을 가져왔다. 이대로 끝인 건가 싶은 생각이 시안의 머릿속을 스쳤다. 복태와의 인연을 이어 가야만 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눠 봤지만 사람이 좋아 보였다. 약속 같은 걸 하면 왠지 어기지 않을 것 같았다. 값을 치르고 뒤돌아 걸음을 옮기는 복태의 등에 대고 시안은 다급하게 불렀다.
“저기! 이런 신발 사는 사람은 너밖에 없거든. 신발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와. 혹시 문이 닫혀 있으면, 이 매대 뒷집 보이지? 저기가 우리 집이야. 놀러 와.”
복태는 처음 세상으로 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 이렇듯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기뻤다. 아직은 서로가 진정한 우정이라고 말하기엔 짧은 만남이었지만, 앞으로 이 인연을 이어 나가다 보면 서로를 이해하는 순간이 올 것이고, 서로의 우정이 진심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모르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친우가 함께라면 무서움이 덜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복태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너 이름이 뭐니?”
“장시안. 너는?”
“위복태야. 다음에 왔을 땐 아까 네가 말한 좋은 신이 완성돼 있길 바랄게.”
***
복태는 시안과 인연을 맺은 후부터는 틈만 나면 귀호 몰래 담을 넘어 시안을 만나러 가곤 했다. 때론 가게에서, 때론 시안의 집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고 밥을 먹고 놀았다. 집을 드나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안의 여동생, 시화와도 안면을 익히게 되었다. 아직 어렸지만 오라버니와 단둘이 힘겹게 살아가는 환경에 있다 보니 의젓함을 엿볼 수 있는 고운 처자였다. 오라버니와 그 친구인 자신을 살갑게 대하며 웃고 재잘대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시화의 얼굴이 계속 아른거리기 시작했고, 남매의 집에 자주 들락거리는 이유가 시안보다는 시화에게 더 치우치게 됐다.
오늘은 아버지 귀호가 궁에 등청하지 않는 날이어서 낮에는 밖을 나설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방 안에 있으면서 떠오르는 것은 시화의 얼굴뿐이었다. 서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오로지 시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만 계속해서 반복됐다. 저녁 시간이 지나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을 때, 복태는 위험하지만 월담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는 방을 나섰다. 주변을 살피며 늘 넘어 다니는 담으로 다가가 낮은 나무 위에 발을 걸치려고 한 그때, 등 뒤에서 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짓이냐?”
복태는 놀란 마음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뒤를 돌아 귀호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르신…….”
“그리도 답답하더냐. 그 다리로 이 높은 담을 넘으려 할 정도로?”
평소 같으면 불벼락을 쳤을 귀호인데 오늘은 웬일인지 목소리가 좀 누그러진 듯했다. 복태는 잠깐 망설이다가 답했다.
“네.”
“위험하다. 담을 넘는 것도, 내 눈을 피해 이 시간에 나가는 것도.”
귀호의 목소리는 누그러져 있었지만 하는 말은 평소와 같았다. 복태는 순간 울컥했다.
“그럼 전 영원히 이 집 담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겁니까?”
“……위험하게 담 넘어 다니지 말고 대문으로 다니라고, 이놈아. 해가 저물면 저 밖은 특히나 더 위험해지니 옆에 힘 잘 쓰는 몸종이라도 데리고 다니든지 해라.”
몸종을 데리고 다닐 마음은 없지만 복태는 그래도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
세상을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했다. 지금까지는 귀호가 넉넉히 줬지만(사용할 일은 전혀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스스로 구해야 했다. 돈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노동을 한다. 복태는 다리가 불편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은 손으로 하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배운 건 글뿐이었지만 이 나라에서 글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은 나라에서 녹을 받고 사는 귀족들뿐이었다. 글깨나 공부했다는 사람이라도 궁에서 일하지 않으면 넉넉한 돈을 벌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복태는 틈이 나면 시안을 찾아가 신을 만드는 재주를 익혔다. 복태는 손재주가 좋은지 금방 배웠다.
이제는 혼자 잘 만드는…… 아니, 억울하지만 자신보다 더 신을 잘 만드는 복태를 바라보며 시안이 물었다.
“너는 왜 신 만드는 재주를 익힐 생각을 한 거야?”
복태는 시안의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복태가 망설이고 있자 시안이 멋대로 추측하여 다시 물었다.
“아버지가 성년도 되어 가니 이제 자기 밥은 자기가 벌어먹으라시냐? 서자라 이제 신경 쓰기 싫어지셨대?”
“……응.”
복태는 침묵을 지키다 대답했다. 시안과 시화는 하루하루를 힘겹고 치열하게 살아 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신도 물론 이도 저도 아닌 존재의 무의미함을 고민하고, 자신의 인생을 놓고 아버지와 힘든 싸움을 하고는 있지만 복태의 간절함을 이해하기에 장씨 남매는 자기들 일만으로도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 있어 타인의 고민 같은 건 들어 줄 여유가 없는 자들이었다. 목숨을 담보로 살아가는 장씨 남매가 생각하기엔 배부른 투정으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자신과 장씨 남매는 친근했지만 이러한 부분에서는 분명히 간극이 존재했다. 그들에게는 그 간극을 좁힐 만큼 함께한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복태는 거짓말로 대충 얼버무렸다.
“그래도 자식인데 모르는 척하시겠어? 아이고, 아버지. 소자 굶어 죽겠어요~ 하면 쌀 한 되 정도는 주시겠지.”
능청스럽게(복태의 눈에는 능청이었지만 시안은 비아냥거림이었다.) 정말로 굶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흉내 내는 시안을 보며 복태가 살짝 미소 지었다.
“괜찮아. 신 만드는 재주 하나 있으면 이런들 저런들 먹고는 살겠지.”
시안과 복태 옆에서 같이 신을 만지던 시화가 대화에 끼어들어 신세 한탄을 했다.
“지겨워. 먹고살아 보자고 이렇게 발버둥 치는 거……. 남들은 쉽게 사는 것 같은데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해요?”
시화의 말에 복태와 시안 모두 말을 잇지 못했다. 시안은 격하게 공감하며 몸을 부르르 떤 듯했으나, 복태는 달랐다. 또다시 느껴지는 간극에 어찌할 바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복태가 집안을 드나드는 용의 도련님의 친구인 귀족가 자제들과도, 집안 잡일이나 허드렛일을 하는 노비들과도 어울리지 못했던 그 이유와는 너무도 달랐다. 저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삶의 치열함에 지겨움을 느꼈지만 복태는 그런 저들의 삶의 치열함을 항상 갈망해 왔다.
***
장씨 남매와 함께 신을 만들던 복태는 어려서부터 해 왔던, 물건에 몽상을 넣어 두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신을 바라보며 또 생각에 잠겼다. 어떤 사소한 물건이라도 사념이 담기고 인생이 담기면 귀한 물건이 된다. 자신이 신을 만들고 이 신에서 느끼는 감정과 의미를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된다면, 같은 기분을 공유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비록 닳아 없어질 신발일 뿐이지만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고 신어 준다면 이 신발 또한 기분 좋아할 것만 같았다. 복태는 어려서부터 내내 접한 글로 자신이 말하고자 함을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신발 바닥에 글을 새기는 것이었다. 비단신 같은 건 밑창이 두툼하여 조각칼로 흠을 내어 글을 새겼고, 짚신 같은 건 색깔이 있는 실로 수를 놓아 글을 새겼다. 그 모습을 본 시안은 퉁퉁거리며 말했다.
“뭐냐, 그 꼬부랑은? 그런 걸 새길 동안 하나라도 더 만들겠다.”
“그냥. 글귀가 생각난 김에.”
간식으로 감자를 삶아 온 시화가 감자를 내려놓고 복태의 손에 들려 있던 신을 뺏어 들고 물었다.
“이게 글이라는 거예요?”
복태는 말없이 짧게 끄덕였다. 시화는 글귀가 새겨진 신을 신기한 눈으로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복태에게 다시 건네었다. 그러다 신을 받은 복태의 손과 시화의 손이 맞부딪쳤다. 서로 깜짝 놀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굴을 붉혔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손을 떼고는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안은 둘 사이를 의심하며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 처음엔 여동생을 사랑하는 오라비로서, 여동생이 다른 남자와 이상한 기류를 풍기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여동생의 남자로 복태가 썩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서자라도 복태의 집안은 부유했다. 비록 복태가 성년이 되면 후원을 끊겠다고 했다지만 말이다. 그리고 복태는 이상한 데서 자존심을 세우며 자립하겠다며 신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지금이야 제 고집을 부릴 수 있겠지만, 연모하는 여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꺾을 수도 있으리라. 복태가 제 고집만 부릴 꽁생원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시화를 시키기 위해 제 아비에게 매달릴 것이다. 소문으로는 위귀호는 복태를 고명딸처럼 금지옥엽으로 키웠다고 한다. 그런 복태가 매달린다면 분명 아주 내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시화와 복태가 혼인이라도 하게 된다면 평민이었던 신분이 조금이라도 올라가게 될 거고, 돈 많은 시아버지의 후원을 받으며 생계 걱정할 것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시화와 복태를 바라보는 시안의 눈이 반짝 빛나는 듯했다.
***
복태가 만든 신을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돈이 제법 있는 손님들도 가게를 방문하게 되었다. 대부분 복태가 만든 신이 팔려 나갔지만 복태는 돈에 큰 욕심이 없어서 거의 장씨 남매에게 주다시피 했다. 그래서 장씨 남매의 생활도 어느 정도 피게 되었다. 아버지가 진 빚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삶의 여유가 어느 정도 생기다 보니 항상 신경질적이었던 시안의 얼굴도 이제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어느 날은 돈이 많아 보이는 선비가 가게에 들렀다가 복태가 만든 신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제값보다 더 큰 돈을 쥐여 주고 신을 사 갔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신기한 신으로만 여겼지만 글을 아는 선비는 큰돈을 내고도 크게 기뻐했다. 그 모습이 시안의 기억에 남아 있었는데 그 선비가 소문을 냈는지 언제부턴가 가게에는 돈 많은 귀족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시안은 신에 글귀를 새기던 복태를 항상 한심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이렇게 큰돈을 불러올 줄이야 하며 감탄했다.
“이 꼬부랑이 제대로 한몫한다. 너 글 좀 하나 본데.”
기분 좋은 시안이 장난기 짙은 얼굴로 놀리듯 복태에게 말했다. 복태는 늘 별거 아닌 것 취급당해 왔던 자신의 실력을 시안이 인정해 주자 기분이 좋았다.
“아예 글로 밀고 나가는 건 어때?”
시안의 제안은 기뻤지만 과연 글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고 있던 복태는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시안의 끊임없는 격려와 신을 사 가는 사람들의 인정이 복태를 들뜨게 했다. 나랏일을 하지 않아도 정말 자신의 글솜씨만으로 벌이를 할 수가 있을까.
“도전해 보자. 해서 안 되면 지금처럼 그냥 신발 다시 만들면 되고. 안 그래?”
복태는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시안의 제안을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시안은 도매상을 했던 아버지의 예전 인맥을 이용해 세책가에서 소소히 필사나 대필 작업일 같은 걸 가져다주었다. 그 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갈 때쯤에 복태는 신발과 관련된 몽상을 주 내용으로 소설을 써 보기로 본격적으로 마음먹었다. 시안이 물었다.
“책을 쓰려면 필명인가 뭔가가 필요하다고들 하던데, 생각해 둔 건 있어?”
복태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다가 바로 대답했다.
“태복.”
“오오, 네가 지은 거니 뭔가 거창한 뜻이겠지?”
“아니, 그냥 내 이름을 거꾸로 한 것뿐인데?”
기대에 차 있던 시안이 맥 빠진 듯 투덜거렸다.
“그래도 필명인데 좀 더 의미가 있고 거~창하게 지어야 하는 거 아냐?”
“이런들 저런들 소설의 내용이 바뀌는 것도 아니잖아.”
“하여간, 너는 너무 남들 시선에 신경을 안 쓴다니깐. 우리 잘 팔리는 작가님께서 말이지!”
시안은 복태의 목에 팔을 둘러 힘을 주며 목을 장난스럽게 졸랐다. 복태는 캑캑거렸지만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
복태의 책이 세책가에서 제일 잘 나가는 상품이 되고, 찾는 이가 많아져 유명해졌을 때쯤이었다. 판매되는 책의 개수가 많아질수록 세책가에 판매 수익금의 일부를 내야 하는 돈이 점점 커지자 시안은 그 돈이 아까워졌다. 그래서 복태를 설득해 더 이상 세책가를 통하지 않고 시안이 직접 책을 판매할 수 있도록 체계를 바꾸었다. 세책가로 줘야 했던 돈을 시안이 갖게 되자 빚도 모두 청산하고 남매의 생활은 윤택해지기 시작했다. 돈에 맛이 들린 시안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벌이가 없을까 생각하다가 복태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그 소설이란 게 웃기더라. 진짜가 아닌데 소설 속 인물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울고, 웃고.”
“소설 속 신발 수집가도 방문자도 이 세상엔 없는 사람이지만, 그걸 읽는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감정은 진짜니까.”
“소설 속 신발 수집가, 복태 오라버니 아니었어요?”
시화는 여태까지 소설 속 수집가가 복태라고 생각해 왔었다. 시안은 비웃었다.
“무슨 소리야. 복태가 서재에 갇혀 있냐?”
무시당한 느낌에 시화의 볼이 쀼루퉁해졌다.
“오라버니는 돈 벌 궁리에만 머리가 돌아가지, 무식하긴. 사람들은 그런 걸 상…… 상…… 아, 상 뭐였는데?”
시화가 도움을 청하듯 복태를 바라보며 눈짓했다. 복태는 피식 웃으며 입 모양으로 답을 벙긋거렸고, 답을 알아챈 시화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징성! 완전히 똑같지 않아도 상징적으로 같은 사람이라는 말씀!”
스스로 똑똑하다는 듯이 시안을 가르치는 시화의 모습이 귀여워서 복태는 시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복태 오라버니는 선반에 신발을 올려놓고 생각에 빠지는 이상한 버릇이 있잖아요. 오라버니는 왜 자기가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시화의 질문에 복태는 난감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복태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동안 이 남매와 메우지 못했던 사연의 간극을 채우고자 결심했다. 하지만 시안은 흥미가 없다는 듯 원래 목적에 충실하기로 했는지 말을 돌렸다.
“그래서 말인데, 사람들의 환상을 돈 주고 사게 하는 건 어때?”
복태는 시안이 꺼낸 ‘환상’이라는 단어가 살짝 거슬렸지만 그저 작게 웃음 지었다.
“왜? 너무 상술 같아서 마음에 안 들어?”
자신의 불편한 마음이 들킨 것 같아 깜짝 놀란 복태가 얼결에 되물었다.
“어?”
“방금 불쾌할 때 짓는 표정 지었잖아. 그 쓴 거 억지로 입에 물고 있는 것 같은 그 웃음 말이야.”
그랬다. 복태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에 항상 속마음을 웃음 뒤에 숨기고 감춰 왔었다. 순간 일어난 불쾌한 마음이나 불편함을 웃음으로써 스스로 치유하고자 했던 복태만의 습관이고 의식이었다. 그것을 알아본 시안이 놀라울 뿐이었다.
“어……? 알아보는구나.”
“뭐야. 그런 것도 모를 줄 알고? 우린 친구잖아.”
복태가 스스로 느꼈던 시안과의 거리가 그리 넓지만은 않은 듯해서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싫어……? 그런 상스러운 상술? 싫다고 말해도 돼. 네 소설이 팔리는 것만으로도 일단 당장 먹고살 만은 하니까.”
“아니, 그런 것보다…… 환상이 아니야. 적어도 그 소설 속 감정은. 그냥 그게 조금 거슬렸을 뿐이야. 그리고 돈 버는 건 나도 좋아. 오히려 필요하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어르신께서 자신이 옳았다고 생각하게 놔두고 싶지 않거든.”
시안은 조금 안심하며 복태에게 물었다.
“너는 왜 그렇게 아버지를 싫어해? 정말 아버지가 널 내친 거 맞아? 가끔은 네가 뛰쳐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신발 수집가의 서재를 밖에서 잠근 이가 그분이시니까.”
“그거야 세상은 치열하니까. 그런 세상의 험난함을 겪게 하고 싶지 않으신 거야. 부모 마음이 그래. 그리고 세상의 많은 부모가 그럴 능력이 안 돼서 못 해 주는 게 바로 그거고.”
‘뭐야. 그런 것도 모를 줄 알고? 우린 친구잖아.’라고 했던 시안의 말에서 느꼈던 감정이 사라져 갔다. 가까워진 줄 알았던 사이가 복태가 느꼈던 간극만큼 다시 벌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실망하고 싶지 않아 복태는 화제를 돌렸다.
“그 돈을 더 벌 방법이란 게 뭐야?”
“아, 그래! 돈 벌 방법. 사람들은 그 신발 수집가의 서재가 정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단 말이지. 그리고 그 서재 속 신발들이 세상에 나온다면? 정말 믿지 않아도 애독자들은 기념하고 싶어서 안달이 날 거야! 그리고 그 신발이 세상에 나오면 네 소설도 다시 한 번 회자할 거고.”
시안이 즐거운 듯 떠들었다. 복태는 작게 웃음 지어 보였지만 시안은 미처 보지 못했다.
“그래. 만들자, 신발.”
“많이 만들면 가치가 떨어지니까, 적게 만들어서 돈 많은 귀족들한테 비싸게 팔자!”
“그래, 그러자.”
복태는 신발을 보며 늘 생각에 잠기던 습관처럼 이번에도 앞에 놓인 신발을 계속 바라봤다. 어설프고 매듭이 고르지 않아 금방이라도 망가질 것 같은 이 신발에서, 그래도 이런 거라도 팔아 삶을 연명해야 하는 만든 이의 고단함과 절박함이 느껴졌다. 자신의 방 선반에 놓인 신발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그런 신발이었다. 갖고 싶었다. 복태는 한 신발을 집어 들고 주인에게 가격을 물었다.
시안은 그런 복태가 아니꼬웠다.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지만 동정받는 것은 질색이었다. 좋은 비단신을 신고 있는 주제에, 자신이 만든 신발은 복태의 신발과 비교하면 객관적으로 봤을 때 별로 좋은 신은 아니었다. 동정받고 있다는 느낌에 시안은 날카롭게 복태를 노려보았다.
“아무도 안 사는 이 신을 사려는 이유가 뭐야? 돈이 많아서?”
그냥 봐도 귀족 같은 복태였지만 자존심이 다친 시안은 입에서 그냥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그런 시안의 태도는 복태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이 만든 물건은 사념이라는 게 담겨. 확실히 신기에는 불편해 보이지만 나에게 중요한 건 사념이야. 고되지만 스스로 살아남겠다는, 만든 이의 의지와 생각 그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곱씹고 또 곱씹어 볼 만한 그런 의미를 줘.”
전혀 언짢아 보이지 않는 복태의 모습에 시안이 조금 누그러든 태도로 말했다.
“어느 댁 도련님이야? 아, 반말하면 안…… 되나…… 요?”
“격식 차릴 것 없어. 그리 귀한 신분은 아니니.”
시안이 복태의 대답에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돈이 많은 어느 상단 장사치의 자제인가, 추리해 본다. 귀족이 아니라면, 자신과 같은 평민이라면 말을 편하게 놔도 상관이 없을 터였다.
“그런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서 귀한 신분이 아니라고?”
복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를 생각하자 잠시 기분이 우울해졌다. 궁금해하는 시안의 얼굴을 보며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사정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만, 이 세상에서 처음 맺은 인연인데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나를 낳아 주신 분은 항상 죄책감을 느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셔. 어떤 때는 버럭 화를 내시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잘해 주시기도 해. 물론 대부분 물질적으로.”
복태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왜 부모님을 낳아 주신 분이라고 해?”
“내 어머니는 정실부인이 아니셨거든. 서자야, 나.”
“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인데?”
“이 나라의 군기대신.”
시안이 숨을 들이켜다가 사례에 걸린 듯 캑캑거렸다. 군기대신의 서자라니. 장사치의 자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귀한 신분이었다. 평민인 자신 앞에서 으스대지 않는 복태의 겸손한 태도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함부로 굴 수는 없었다. 아니, 비참하지만 오히려 복태와 가까이할수록 자신과 하나뿐인 동생 시화가 그 덕을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가 생전에 진 빚 때문에 항상 무뢰배들에게 핍박을 받으며 살아야만 했다. 최근에는 여동생이 점점 크면서 고운 얼굴을 담아내자 그 무뢰배들이 시화를 쳐다보는 눈길이 뭔가 큰일이 날 것만 같아 괴로웠던 터였다. 복태를 가까이하면 조그마한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그 떨어진 콩고물로 어떻게든 빚을 갚아 내서 그놈들로부터 시화를 안전하게 지키고 싶었다. 시화를 생각하니 아니꼬웠던 마음은 아예 없어지고 무조건 복태에게 붙어 있어야겠다는 마음만 남았다.
“흠, 저기…… 그 아까 보니까 다리를 다친 것 같던데…….”
“다친 거 아니야. 걸음마를 떼기 전부터 이랬어.”
“어쨌든 다리가 불편하면 더 좋은 신을 신어야지. 내가 열심히 해서 더 좋은 신을 만들어 볼게.”
시안이 말하며 복태의 손에 들려 있던 신발을 뺏어 들었다.
“그러니까 이거 말고 다음에 다시 사러 와.”
“이건 신으려고 산 게 아닌데?”
신으려고 산 게 아니라니! 역시 동정이었던 건가. 하지만 시안은 자신의 기분을 내색하지 않으며 물었다.
“그럼 오늘 굶지나 말라고 사 주는 거야?”
“아니, 선반 위에 올려놓을 거야.”
“신발을 왜 선반에 놔? 도자기처럼 장식하는 것도 아니고.”
“난 그런 용도로 써.”
복태가 미소 지으며 시안에게서 다시 신발을 가져왔다. 이대로 끝인 건가 싶은 생각이 시안의 머릿속을 스쳤다. 복태와의 인연을 이어 가야만 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눠 봤지만 사람이 좋아 보였다. 약속 같은 걸 하면 왠지 어기지 않을 것 같았다. 값을 치르고 뒤돌아 걸음을 옮기는 복태의 등에 대고 시안은 다급하게 불렀다.
“저기! 이런 신발 사는 사람은 너밖에 없거든. 신발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와. 혹시 문이 닫혀 있으면, 이 매대 뒷집 보이지? 저기가 우리 집이야. 놀러 와.”
복태는 처음 세상으로 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 이렇듯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기뻤다. 아직은 서로가 진정한 우정이라고 말하기엔 짧은 만남이었지만, 앞으로 이 인연을 이어 나가다 보면 서로를 이해하는 순간이 올 것이고, 서로의 우정이 진심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모르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친우가 함께라면 무서움이 덜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복태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너 이름이 뭐니?”
“장시안. 너는?”
“위복태야. 다음에 왔을 땐 아까 네가 말한 좋은 신이 완성돼 있길 바랄게.”
복태는 시안과 인연을 맺은 후부터는 틈만 나면 귀호 몰래 담을 넘어 시안을 만나러 가곤 했다. 때론 가게에서, 때론 시안의 집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고 밥을 먹고 놀았다. 집을 드나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안의 여동생, 시화와도 안면을 익히게 되었다. 아직 어렸지만 오라버니와 단둘이 힘겹게 살아가는 환경에 있다 보니 의젓함을 엿볼 수 있는 고운 처자였다. 오라버니와 그 친구인 자신을 살갑게 대하며 웃고 재잘대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시화의 얼굴이 계속 아른거리기 시작했고, 남매의 집에 자주 들락거리는 이유가 시안보다는 시화에게 더 치우치게 됐다.
오늘은 아버지 귀호가 궁에 등청하지 않는 날이어서 낮에는 밖을 나설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방 안에 있으면서 떠오르는 것은 시화의 얼굴뿐이었다. 서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오로지 시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만 계속해서 반복됐다. 저녁 시간이 지나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을 때, 복태는 위험하지만 월담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는 방을 나섰다. 주변을 살피며 늘 넘어 다니는 담으로 다가가 낮은 나무 위에 발을 걸치려고 한 그때, 등 뒤에서 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짓이냐?”
복태는 놀란 마음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뒤를 돌아 귀호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르신…….”
“그리도 답답하더냐. 그 다리로 이 높은 담을 넘으려 할 정도로?”
평소 같으면 불벼락을 쳤을 귀호인데 오늘은 웬일인지 목소리가 좀 누그러진 듯했다. 복태는 잠깐 망설이다가 답했다.
“네.”
“위험하다. 담을 넘는 것도, 내 눈을 피해 이 시간에 나가는 것도.”
귀호의 목소리는 누그러져 있었지만 하는 말은 평소와 같았다. 복태는 순간 울컥했다.
“그럼 전 영원히 이 집 담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겁니까?”
“……위험하게 담 넘어 다니지 말고 대문으로 다니라고, 이놈아. 해가 저물면 저 밖은 특히나 더 위험해지니 옆에 힘 잘 쓰는 몸종이라도 데리고 다니든지 해라.”
몸종을 데리고 다닐 마음은 없지만 복태는 그래도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세상을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했다. 지금까지는 귀호가 넉넉히 줬지만(사용할 일은 전혀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스스로 구해야 했다. 돈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노동을 한다. 복태는 다리가 불편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은 손으로 하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배운 건 글뿐이었지만 이 나라에서 글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은 나라에서 녹을 받고 사는 귀족들뿐이었다. 글깨나 공부했다는 사람이라도 궁에서 일하지 않으면 넉넉한 돈을 벌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복태는 틈이 나면 시안을 찾아가 신을 만드는 재주를 익혔다. 복태는 손재주가 좋은지 금방 배웠다.
이제는 혼자 잘 만드는…… 아니, 억울하지만 자신보다 더 신을 잘 만드는 복태를 바라보며 시안이 물었다.
“너는 왜 신 만드는 재주를 익힐 생각을 한 거야?”
복태는 시안의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복태가 망설이고 있자 시안이 멋대로 추측하여 다시 물었다.
“아버지가 성년도 되어 가니 이제 자기 밥은 자기가 벌어먹으라시냐? 서자라 이제 신경 쓰기 싫어지셨대?”
“……응.”
복태는 침묵을 지키다 대답했다. 시안과 시화는 하루하루를 힘겹고 치열하게 살아 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신도 물론 이도 저도 아닌 존재의 무의미함을 고민하고, 자신의 인생을 놓고 아버지와 힘든 싸움을 하고는 있지만 복태의 간절함을 이해하기에 장씨 남매는 자기들 일만으로도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 있어 타인의 고민 같은 건 들어 줄 여유가 없는 자들이었다. 목숨을 담보로 살아가는 장씨 남매가 생각하기엔 배부른 투정으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자신과 장씨 남매는 친근했지만 이러한 부분에서는 분명히 간극이 존재했다. 그들에게는 그 간극을 좁힐 만큼 함께한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복태는 거짓말로 대충 얼버무렸다.
“그래도 자식인데 모르는 척하시겠어? 아이고, 아버지. 소자 굶어 죽겠어요~ 하면 쌀 한 되 정도는 주시겠지.”
능청스럽게(복태의 눈에는 능청이었지만 시안은 비아냥거림이었다.) 정말로 굶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흉내 내는 시안을 보며 복태가 살짝 미소 지었다.
“괜찮아. 신 만드는 재주 하나 있으면 이런들 저런들 먹고는 살겠지.”
시안과 복태 옆에서 같이 신을 만지던 시화가 대화에 끼어들어 신세 한탄을 했다.
“지겨워. 먹고살아 보자고 이렇게 발버둥 치는 거……. 남들은 쉽게 사는 것 같은데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해요?”
시화의 말에 복태와 시안 모두 말을 잇지 못했다. 시안은 격하게 공감하며 몸을 부르르 떤 듯했으나, 복태는 달랐다. 또다시 느껴지는 간극에 어찌할 바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복태가 집안을 드나드는 용의 도련님의 친구인 귀족가 자제들과도, 집안 잡일이나 허드렛일을 하는 노비들과도 어울리지 못했던 그 이유와는 너무도 달랐다. 저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삶의 치열함에 지겨움을 느꼈지만 복태는 그런 저들의 삶의 치열함을 항상 갈망해 왔다.
장씨 남매와 함께 신을 만들던 복태는 어려서부터 해 왔던, 물건에 몽상을 넣어 두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신을 바라보며 또 생각에 잠겼다. 어떤 사소한 물건이라도 사념이 담기고 인생이 담기면 귀한 물건이 된다. 자신이 신을 만들고 이 신에서 느끼는 감정과 의미를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된다면, 같은 기분을 공유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비록 닳아 없어질 신발일 뿐이지만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고 신어 준다면 이 신발 또한 기분 좋아할 것만 같았다. 복태는 어려서부터 내내 접한 글로 자신이 말하고자 함을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신발 바닥에 글을 새기는 것이었다. 비단신 같은 건 밑창이 두툼하여 조각칼로 흠을 내어 글을 새겼고, 짚신 같은 건 색깔이 있는 실로 수를 놓아 글을 새겼다. 그 모습을 본 시안은 퉁퉁거리며 말했다.
“뭐냐, 그 꼬부랑은? 그런 걸 새길 동안 하나라도 더 만들겠다.”
“그냥. 글귀가 생각난 김에.”
간식으로 감자를 삶아 온 시화가 감자를 내려놓고 복태의 손에 들려 있던 신을 뺏어 들고 물었다.
“이게 글이라는 거예요?”
복태는 말없이 짧게 끄덕였다. 시화는 글귀가 새겨진 신을 신기한 눈으로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복태에게 다시 건네었다. 그러다 신을 받은 복태의 손과 시화의 손이 맞부딪쳤다. 서로 깜짝 놀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굴을 붉혔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손을 떼고는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안은 둘 사이를 의심하며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 처음엔 여동생을 사랑하는 오라비로서, 여동생이 다른 남자와 이상한 기류를 풍기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여동생의 남자로 복태가 썩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서자라도 복태의 집안은 부유했다. 비록 복태가 성년이 되면 후원을 끊겠다고 했다지만 말이다. 그리고 복태는 이상한 데서 자존심을 세우며 자립하겠다며 신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지금이야 제 고집을 부릴 수 있겠지만, 연모하는 여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꺾을 수도 있으리라. 복태가 제 고집만 부릴 꽁생원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시화를 시키기 위해 제 아비에게 매달릴 것이다. 소문으로는 위귀호는 복태를 고명딸처럼 금지옥엽으로 키웠다고 한다. 그런 복태가 매달린다면 분명 아주 내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시화와 복태가 혼인이라도 하게 된다면 평민이었던 신분이 조금이라도 올라가게 될 거고, 돈 많은 시아버지의 후원을 받으며 생계 걱정할 것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시화와 복태를 바라보는 시안의 눈이 반짝 빛나는 듯했다.
복태가 만든 신을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돈이 제법 있는 손님들도 가게를 방문하게 되었다. 대부분 복태가 만든 신이 팔려 나갔지만 복태는 돈에 큰 욕심이 없어서 거의 장씨 남매에게 주다시피 했다. 그래서 장씨 남매의 생활도 어느 정도 피게 되었다. 아버지가 진 빚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삶의 여유가 어느 정도 생기다 보니 항상 신경질적이었던 시안의 얼굴도 이제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어느 날은 돈이 많아 보이는 선비가 가게에 들렀다가 복태가 만든 신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제값보다 더 큰 돈을 쥐여 주고 신을 사 갔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신기한 신으로만 여겼지만 글을 아는 선비는 큰돈을 내고도 크게 기뻐했다. 그 모습이 시안의 기억에 남아 있었는데 그 선비가 소문을 냈는지 언제부턴가 가게에는 돈 많은 귀족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시안은 신에 글귀를 새기던 복태를 항상 한심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이렇게 큰돈을 불러올 줄이야 하며 감탄했다.
“이 꼬부랑이 제대로 한몫한다. 너 글 좀 하나 본데.”
기분 좋은 시안이 장난기 짙은 얼굴로 놀리듯 복태에게 말했다. 복태는 늘 별거 아닌 것 취급당해 왔던 자신의 실력을 시안이 인정해 주자 기분이 좋았다.
“아예 글로 밀고 나가는 건 어때?”
시안의 제안은 기뻤지만 과연 글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고 있던 복태는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시안의 끊임없는 격려와 신을 사 가는 사람들의 인정이 복태를 들뜨게 했다. 나랏일을 하지 않아도 정말 자신의 글솜씨만으로 벌이를 할 수가 있을까.
“도전해 보자. 해서 안 되면 지금처럼 그냥 신발 다시 만들면 되고. 안 그래?”
복태는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시안의 제안을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시안은 도매상을 했던 아버지의 예전 인맥을 이용해 세책가에서 소소히 필사나 대필 작업일 같은 걸 가져다주었다. 그 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갈 때쯤에 복태는 신발과 관련된 몽상을 주 내용으로 소설을 써 보기로 본격적으로 마음먹었다. 시안이 물었다.
“책을 쓰려면 필명인가 뭔가가 필요하다고들 하던데, 생각해 둔 건 있어?”
복태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다가 바로 대답했다.
“태복.”
“오오, 네가 지은 거니 뭔가 거창한 뜻이겠지?”
“아니, 그냥 내 이름을 거꾸로 한 것뿐인데?”
기대에 차 있던 시안이 맥 빠진 듯 투덜거렸다.
“그래도 필명인데 좀 더 의미가 있고 거~창하게 지어야 하는 거 아냐?”
“이런들 저런들 소설의 내용이 바뀌는 것도 아니잖아.”
“하여간, 너는 너무 남들 시선에 신경을 안 쓴다니깐. 우리 잘 팔리는 작가님께서 말이지!”
시안은 복태의 목에 팔을 둘러 힘을 주며 목을 장난스럽게 졸랐다. 복태는 캑캑거렸지만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복태의 책이 세책가에서 제일 잘 나가는 상품이 되고, 찾는 이가 많아져 유명해졌을 때쯤이었다. 판매되는 책의 개수가 많아질수록 세책가에 판매 수익금의 일부를 내야 하는 돈이 점점 커지자 시안은 그 돈이 아까워졌다. 그래서 복태를 설득해 더 이상 세책가를 통하지 않고 시안이 직접 책을 판매할 수 있도록 체계를 바꾸었다. 세책가로 줘야 했던 돈을 시안이 갖게 되자 빚도 모두 청산하고 남매의 생활은 윤택해지기 시작했다. 돈에 맛이 들린 시안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벌이가 없을까 생각하다가 복태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그 소설이란 게 웃기더라. 진짜가 아닌데 소설 속 인물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울고, 웃고.”
“소설 속 신발 수집가도 방문자도 이 세상엔 없는 사람이지만, 그걸 읽는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감정은 진짜니까.”
“소설 속 신발 수집가, 복태 오라버니 아니었어요?”
시화는 여태까지 소설 속 수집가가 복태라고 생각해 왔었다. 시안은 비웃었다.
“무슨 소리야. 복태가 서재에 갇혀 있냐?”
무시당한 느낌에 시화의 볼이 쀼루퉁해졌다.
“오라버니는 돈 벌 궁리에만 머리가 돌아가지, 무식하긴. 사람들은 그런 걸 상…… 상…… 아, 상 뭐였는데?”
시화가 도움을 청하듯 복태를 바라보며 눈짓했다. 복태는 피식 웃으며 입 모양으로 답을 벙긋거렸고, 답을 알아챈 시화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징성! 완전히 똑같지 않아도 상징적으로 같은 사람이라는 말씀!”
스스로 똑똑하다는 듯이 시안을 가르치는 시화의 모습이 귀여워서 복태는 시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복태 오라버니는 선반에 신발을 올려놓고 생각에 빠지는 이상한 버릇이 있잖아요. 오라버니는 왜 자기가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시화의 질문에 복태는 난감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복태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동안 이 남매와 메우지 못했던 사연의 간극을 채우고자 결심했다. 하지만 시안은 흥미가 없다는 듯 원래 목적에 충실하기로 했는지 말을 돌렸다.
“그래서 말인데, 사람들의 환상을 돈 주고 사게 하는 건 어때?”
복태는 시안이 꺼낸 ‘환상’이라는 단어가 살짝 거슬렸지만 그저 작게 웃음 지었다.
“왜? 너무 상술 같아서 마음에 안 들어?”
자신의 불편한 마음이 들킨 것 같아 깜짝 놀란 복태가 얼결에 되물었다.
“어?”
“방금 불쾌할 때 짓는 표정 지었잖아. 그 쓴 거 억지로 입에 물고 있는 것 같은 그 웃음 말이야.”
그랬다. 복태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에 항상 속마음을 웃음 뒤에 숨기고 감춰 왔었다. 순간 일어난 불쾌한 마음이나 불편함을 웃음으로써 스스로 치유하고자 했던 복태만의 습관이고 의식이었다. 그것을 알아본 시안이 놀라울 뿐이었다.
“어……? 알아보는구나.”
“뭐야. 그런 것도 모를 줄 알고? 우린 친구잖아.”
복태가 스스로 느꼈던 시안과의 거리가 그리 넓지만은 않은 듯해서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싫어……? 그런 상스러운 상술? 싫다고 말해도 돼. 네 소설이 팔리는 것만으로도 일단 당장 먹고살 만은 하니까.”
“아니, 그런 것보다…… 환상이 아니야. 적어도 그 소설 속 감정은. 그냥 그게 조금 거슬렸을 뿐이야. 그리고 돈 버는 건 나도 좋아. 오히려 필요하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어르신께서 자신이 옳았다고 생각하게 놔두고 싶지 않거든.”
시안은 조금 안심하며 복태에게 물었다.
“너는 왜 그렇게 아버지를 싫어해? 정말 아버지가 널 내친 거 맞아? 가끔은 네가 뛰쳐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신발 수집가의 서재를 밖에서 잠근 이가 그분이시니까.”
“그거야 세상은 치열하니까. 그런 세상의 험난함을 겪게 하고 싶지 않으신 거야. 부모 마음이 그래. 그리고 세상의 많은 부모가 그럴 능력이 안 돼서 못 해 주는 게 바로 그거고.”
‘뭐야. 그런 것도 모를 줄 알고? 우린 친구잖아.’라고 했던 시안의 말에서 느꼈던 감정이 사라져 갔다. 가까워진 줄 알았던 사이가 복태가 느꼈던 간극만큼 다시 벌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실망하고 싶지 않아 복태는 화제를 돌렸다.
“그 돈을 더 벌 방법이란 게 뭐야?”
“아, 그래! 돈 벌 방법. 사람들은 그 신발 수집가의 서재가 정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단 말이지. 그리고 그 서재 속 신발들이 세상에 나온다면? 정말 믿지 않아도 애독자들은 기념하고 싶어서 안달이 날 거야! 그리고 그 신발이 세상에 나오면 네 소설도 다시 한 번 회자할 거고.”
시안이 즐거운 듯 떠들었다. 복태는 작게 웃음 지어 보였지만 시안은 미처 보지 못했다.
“그래. 만들자, 신발.”
“많이 만들면 가치가 떨어지니까, 적게 만들어서 돈 많은 귀족들한테 비싸게 팔자!”
“그래, 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