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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들은 소설 속 신발을 만들어 팖으로써 삶이 더더욱 윤택해져 갔다. 처음 남매를 만났을 때는 먹을 것을 잘 먹지 못해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모습이 참 안쓰러웠었는데, 살이 오른 지금의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자기 힘으로 친구를 돕는 자신이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없어도 이렇듯 잘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복태의 마음속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시화에 대한 연심도 깊어졌다. 시화도 자신에게 같은 마음을 품었다고 느낀 것은 자신이 시화를 바라볼 때마다 자꾸 눈이 마주치는 것 때문이었다. 서로 눈이 맞으면 시화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곤 했었다. 그 모습이 또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세상엔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아직 선택할 수 있는 것들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제는 그 선택을 실행에 옮겨야 할 순간이 왔다. 이 집으로부터 완벽히 독립할 때가 온 것이다.
복태는 방 안에서 자신의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필요한 물건만 챙기다 보니 짐이 생각보다 간소했다. 짐을 들고 대문을 나서면 노비들의 눈에 띌 것이 분명했기에 복태는 담장 밖으로 짐을 던져 놓았고, 평소처럼 외출을 하는 척 대문을 나섰다. 대문을 열고 나가자 마침 퇴청하는 귀호와 마주쳐 버렸다.
해도 떨어져 가는데 밖에 나가려는 복태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귀호가 물었다.
“이 시간에 어딜 가려는 것이냐?”
복태는 나쁜 짓을 한 사람처럼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잠깐 볼일이 있어 다녀오려 합니다.”
“네게 방 안에만 있으라는 말은 아니다만, 요즘 외출이 너무 잦구나. 몸이 성치 않다고 무뢰배들이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 놈들은 약자부터 건드리니 조심하고, 늦게까지 다니지 말거라.”
“네, 어르신.”
귀호는 복태를 지나쳐 대문 안으로 들어서려다 멈추고 다시 그를 불러 세웠다.
“듣자 하니 밤늦게까지 불을 켜 놓고 있다고 하던데 뭘 하느라 잠도 안 자고 있는 게냐. 설마 또 서책을 본 것이냐?”
“…….”
“아직까지 헛된 희망을 품은 것이더냐.”
“아닙니다.”
“허나 어찌해 서책을 그리 열심히 읽는단 말이냐? 너만 상처받는다. 그러지 말아라.”
“……그냥 잠이 안 와서 그렇습니다. 금방 들어오겠습니다. 심려치 마세요.”
복태는 귀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죄짓는 듯한 마음에 볼 수가 없었고 끝까지 완고한 귀호의 태도 때문에 보고 싶지 않았다. 표정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뭔가 하고 싶은 말을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에 귀호는 복태에게 물었다.
“네 진심을 말해 보거라. 화내지 않으마. 언제부턴가 이 아비와는 말도 섞지 않으려 하는구나.”
귀호의 목소리가 슬펐다. 그게 안타까웠지만 귀호와 복태 자신은 평행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꺾일 수는 없었다.
“마음이란 게 없어서 드릴 말씀도 없습니다…….”
복태의 답을 들은 귀호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상처받은 복태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눈에 들어와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귀호를 똑바로 쳐다보며 복태는 이어 말했다.
“어르신께서 바라시던 대로 희망이라는 것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녁에 네가 좋아하는 닭고기를 올리라 할 테니 일찍 들어오너라. 마음이 허하면 몸도 상하는 법이니.”
“……네.”
***
저녁을 먹은 후 귀호는 아까 복태와 나눴던 얘기가 계속 신경이 쓰여 가만있지를 못하고 있었다. 뭔가 초조해 보이는 귀호를 보며 그의 부인이 무슨 일이 있냐며 물었지만 귀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뭔가가 불안했다. 귀호는 부인을 등 뒤로 하고 복태의 방으로 향했다. 복태의 방은 비어 있었다. 귀호는 백숙을 들고 오는 노비를 불렀다.
“복태 못 보았느냐?”
“예? 방에 안 계십니까요?”
노비도 복태의 행방을 모르자 짜증이 일었다. 귀호는 복태의 방에서 복태를 기다리기로 했다. 오기만 해 봐라. 혼쭐을 내 줄 것이다. 이 아비를 어찌 이리 걱정하게 하는 게야. 노비는 귀호의 초조함이 눈에 보여 혹여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얼른 백숙을 방에 두고 방을 나갔다. 뜨거워 김이 폴폴 났던 백숙은 점차 식어 갔고 귀호의 안색 또한 식어 가고 있었다. 밤이 늦었다. 이렇게 늦게까지 안 들어온 적이 없던 아이였다. 필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귀호는 마당에 집 안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노비들에게 복태를 찾으라고 명을 내리려는데 이 소식을 들은 그의 부인이 무슨 일이냐며 다가왔다.
“복태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소. 몸도 성치 않은 것이 무뢰배들의 표적이 되어 무슨 일을 당한 게 분명하오, 부인. 복태를 찾아야 하오. 여봐라!”
“수선 떨 거 없습니다. 놀다 보면 늦을 수도 있지요. 이까짓 걸로 일을 크게 키우시면 이 무슨 집안 망신이랍니까?”
아무리 제 배 속에서 낳은 자식이 아니라지만, 어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귀호는 부인의 심보에 속이 상했다.
“복태가 보통 사내놈이오? 몸이 불편한 아이오. 나쁜 일 당하기에 십상이라니까! 불길하오. 아까 복태가 한 말도 이상하고!”
부인은 호들갑 떠는 귀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를 이렇게 만드는 복태 놈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 아침까지 기다리십시다, 어르신. 그 다음 사람을 풀어서 찾아도 늦지 않습니다! 그놈의 복태, 복태! 우리 용의가 외박을 해도 이리 난리를 안 치시던 분이.”
“그놈이랑 복태랑 같소?!”
“다르죠! 아주 다르죠! 아침까지 기다리세요. 어르신이 이리 걱정하는 줄도 모르고 실컷 놀다가 어기적어기적 기어 들어오겠죠!”
“지금 복태가 무슨 변을 당했는지도 모를 일인데 그런 소릴 하고 있소?!”
귀호의 속 타는 소리가 마당에 허무하게 퍼졌다.
***
“복태야, 무슨 일이야? 지금 군기대신이, 너희 아버지가 널 찾는다고 여기저기 뒤지고 아주 난리가 아니야!”
가게를 닫고 집에 돌아온 시안은 태룡산 뒷자락 중턱으로 오라는 복태의 전언을 시화로부터 전해 듣고 허겁지겁 달려와 물었다. 복태는 소식을 듣고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생각하며 각오를 다졌다.
“하아…… 가출했어, 나.”
“뭐?!”
“난 이제부터 죽은 사람이야, 시안아. 그분 마음에 대못을 박는 일이지만, 이 방법 외엔 그분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날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또다시 그 방 안에 가둘 거야. 그분께는 죄송하지만 나는 내 삶을 살아야겠어. 내가 죽은 자식이 되면 그분도 포기하시겠지.”
복태는 절벽이 있는 끝자락으로 다가가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옷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떨어진 옷이 절벽 아래 흐르던 강물에 휩쓸려 어느새 저 아래로 흘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시안은 복태의 말에 초조해졌다.
‘복태 네가 이래선 안 돼!’
시안은 복태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 몸을 돌렸다.
“가출?!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성년 되면 쫓겨날 거라며! 그래서 일 배운 거라며! 지금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그분도 너도, 아무도…… 날 이해 못 해. 그래도 우린 친구잖아? 가끔은 이해 못 하는 일을 하더라도 친구니까, 그러니까 그냥 봐줄 수도 있잖아……. 그냥 침묵해 줘. 그분이 날 포기할 때까지.”
복태의 눈이 각오로 빛났다. 시안은 우선 이 자리에서 설득하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만약 이대로 강요한다면 복태는 튕겨 나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우선 시안은 복태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앉혀 놨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집으로 데려오기는 했지만 밖의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군기대신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 것인지, 이제는 군사까지 동원해 동네를 뒤지고 있었다. 이대로 복태를 집 안에 뒀다가 함께 있는 것이 발각이라도 되면 혹여 죄를 뒤집어쓸까,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일자 복태에게 다시 화가 났다.
“그래 굳이 아버지가 만들어 준 온실이 지겨워서, 이도 저도 아닌 게 싫어서 평민이 되겠다는 거, 이해된다 치자. 근데 이렇게까지 아버지 마음에 대못을 박아 가면서 연을 끊어야 하는 일이야? 꼭 부모에게 자살한 자식새끼가 돼야 하냐고! 그건 진짜 몹쓸 놈이잖아. 대화하면 되잖아. 나 스스로 살아 보고 싶다고 말하면 되잖아, 이 미친놈아!”
흥분한 시안의 입이 거칠어졌다. 시안은 복태가 이해도 안 되고, 자기에겐 없는 아버지에게 모질게 구는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시안은 방에 복태를 내버려 두고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시화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시안이 밖으로 나오자 시화가 달려가 방문을 다시 열고 복태에게 말했다.
“지금 난리 났어요! 군기대신이 오라버니 옷을 발견하고는 반나절 넘게 끌어안고 울다가 실신하셨대요. 이러다가 초상 치르겠어요…….”
시화가 전해 준 소식에 복태는 마음이 괴로워졌다. 하지만 여기서 약해질 수는 없었다.
“너희는 그분을 몰라……. 대화가 안 통해. 내가 그분 앞에서 얼마나 발버둥을 쳐 왔는지 너희는 모를 거야. 평생 나를 그 집에 가둘 게 분명해. 싫어, 끔찍해.”
중얼거리듯 말하던 복태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 혹시 나 때문에 너희가 곤란해진 거니?”
시화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곤란한 건 사실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주춤거리는 남매를 바라본 복태는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미안해. 다른 곳에 갈게. 내가 죽었다고 아니까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을 거야.”
시안은 복태의 팔을 붙잡았다.
“됐어. 여기에 있어. 네 뜻대로 되어 가는데 섣불리 움직이다가 일 그르치면 어떡해.”
“그래도 네가 곤란…….”
“됐어. 네놈이 이해 안 되지만 그래도 친구니까…… 그러니까 일단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
“고마워…….”
시안은 집에 먹을 게 없다며 장을 봐 오겠다고 하고선 집을 나섰다. 그 뒤를 시화가 뒤따랐다.
“오라버니. 정말 복태 오라버니가 하자는 대로 할 거야?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 정말로 죽은 사람 만들게 둘 거냐고.”
“미쳤냐? 저 또라이 새끼 말대로 하게. 우리는 우리를 보호할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이렇게 아등바등 살고 있는데 저 복을 왜 차냐고! 미친놈이. 저 새끼가 하는 행동, 이해도 안 가고 도와주고 싶지도 않아. 나중에 군기대신이 우리가 숨겨 준 걸 알아봐.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이게 아버지 입장에서 보통 기만하는 거냐고? 자식새끼가 지 목숨으로, 그것도 아픈 손가락인 놈이 지 목숨으로 장난질을 쳤어. 그리고 우리는 그걸 묵인하고, 도와주고!”
“그래서 지금 어디 가는 건데?”
“군기대신 집. 지금 이야기하면 우린 공범이 아닌 거지.”
시화는 바삐 걷는 시안의 팔을 붙잡아 걸음을 세웠다.
“지금 배신하겠다는 거야?! 불똥 튈 게 무서우면 복태 오라버니더러 딴 데 잠깐 가 있으라고 하면 되잖아. 아니면 설득을 하든가, 돌아가라고!”
상황 파악 못 하고 화를 내는 시화가 답답했다. 시안은 시화의 두 어깨를 꽉 붙들고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그놈이랑 고상한 척하며 희희낙락 놀더니 상황 파악이 안 돼? 지금 군기대신이 아들 찾겠다고 군사까지 풀었어. 이 시장 바닥 사람들 그 새끼랑 우리가 친하게 지내는 거 다 아는데 군기대신이 우릴 못 찾아낼 것 같아? 시간문제야. 그전에 우리가 먼저 선수 쳐야만 해. 그리고 그 새끼 애비 덕 좀 보자고 어울려 준 거지, 그 잘난 애비 없으면 걘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절름발이 병신일 뿐이라고!”
복태 욕을 하며 소리 지르는 시안의 모습이 너무 낯설어 시화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우리 그동안 복태 오라버니 덕분에 이만큼 먹고살았어!”
“너는 화 안 나? 아버지 잘 만나서 이런 거지 같은 발악이나 하고 있는 저놈한테. 쟤, 지금 그냥 노는 거야. 평민놀이. 그 놀이 끝나 봐, 못 살겠다 싶을 거야. 우리가 만날 느껴 왔던 그 기분,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 생활을 겪으면 재미없다고, 너랑 소꿉놀이 그만하고 싶다고 지 아버지에게 돌아가 버리면. 아무리 불효자라도 지 새끼인데 쳐 죽이기라도 하겠어? 근데 장단 맞춘 우리? 그 화풀이 우리가 다 받을 거야. 결국엔 우리만 파국으로 치닫게 될 거라고!”
결국 시화는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며 시안은 시화를 살살 달래 보았다.
“일단 복태 들여보내자. 오히려 그렇게 해야 우리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있어. 복태 계속 만나고 싶으면 이게 방법이라고, 시화야.”
***
귀호는 강물에서 건진 복태의 옷을 끌어안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모두가 복태가 죽었다고 말했다. 복태의 시신을 찾기 전까지는 수색을 멈추지 말라 명했지만 자꾸만 불안한 쪽으로 생각이 쏠렸다. 숨이 턱 막혀 왔다.
이런 귀호 앞에 장시안, 장시화가 찾아왔다. 시안은 복태가 자신의 집에 머물고 있음을 고해바쳤다. 복태가 살아 있다는 소식에 귀호는 큰 안도감을 얻었지만 곧바로 밀려오는 배신감과 분노에 눈이 멀어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분노한 귀호는 사람을 시켜 복태를 잡아 오라 명했고, 얼마 후 끌려오며 발버둥 치는 복태가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위복태, 네 이놈!!!!!”
귀호의 진노는 마당에 있던 모든 이의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복태는 무의미한 발버둥을 멈추고 귀호 앞에 섰다. 그리고 장씨 남매를 쳐다봤다.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런 복잡한 심경으로 그들을 쳐다보다 시화와 눈이 마주쳤다. 시화의 눈가에는 눈물의 흔적이 있었다.
‘아아, ……너도 괴로웠구나. ……내가 너에게 그런 마음이 들게 했구나.’
귀호는 납작 엎드려 용서를 빌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여자아이와 눈을 맞추고 있는 복태를 바라보며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복태는 착한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최근 이상하게 굴었던 것이 다 저 여자애 때문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자 귀호의 분노는 시화에게로 향했다.
“저년이 네놈을 홀린 게로구나. 사내가 눈에 뵈는 것도 없이 이리 굴 때는 계집에게 홀렸을 때뿐이다. 저 계집을 포박하고 몽둥이로 매질을 하거라!”
놀란 복태가 앞으로 뛰쳐나와 말했다.
“어르신! 시화는 상관이 없습니다!”
“입 다물어라!”
“언제나 어르신께서는 소인을 믿어 주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소인의 말은 한 치도 들으려 하지 않았던 어르신과 소인의 불신 때문입니다! 소인의 선택은 시화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이도 저도 아닌 채로 보호만 받아야 하는 삶이 싫었습니다. 위로 올라갈 수 없다면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라도 선택하고 싶었습니다. 그뿐입니다, 어르신!”
복태가 호소했지만 귀호에게 시화에 대한 불신만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 줄 뿐이었다. 노비들이 주춤거리고 있자 다시 한 번 불호령을 내려 시화에게 매질을 명했고, 그들은 시화를 붙잡아 매질을 시작했다. 시안이 울부짖으며 시화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이미 장정들에게 꽁꽁 붙들려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시화의 비명 소리가 나자 복태는 안절부절못했다.
“어르신!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복태가 눈물지으며 바닥에 엎드려 싹싹 빌자 귀호는 그 모습이 또 안쓰러워졌다. 시화를 가만두지 않으려 했던 생각이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감히 평민 주제에 제 아들을 넘보다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저년이 다시는 남의 귀한 자식 홀리는 일이 없도록 죽지 않을 만큼만 매질하여 대문 밖으로 내쫓아 버리거라! 그리고 복태 네놈이 저지른 불효를 진심으로 반성할 때까지 외출을 금한다!”
***
난리가 벌어지고 며칠이 지났지만 복태는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고집은 귀호를 쏙 빼닮은 듯했다. 방 안에 계속 갇혀 있는 일이 익숙하여 불편함은 없지만 시화 걱정으로 가득 차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죽……었을까?’
아니다. 그분을 믿고 싶었다. 그렇게 모진 분은 아닐 것이다. 시안은 동생이라면 껌뻑 죽는 사람이다. 그러니 시안이 잘 돌봐 주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무것도 확인할 길이 없으니 생각만 많아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밖에서 소곤거리는 소리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복태야. 복태야.”
“시안이니?”
시안을 부르며 복태가 방문을 열었다. 방 앞을 지키고 있던 노비가 웬일로 자리를 비운 채였다. 노비가 오기 전에 복태는 시안을 방 안으로 들였다.
“시화는? 괜찮아?”
시화 얘기가 나오자 시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니. 안 괜찮아서 왔어. 그날 매질을 당한 이후로 아직도 못 일어나고 있어.”
시화의 소식에 복태가 괴로움에 얼굴을 찡그렸다. 연모하는 여인이 자신 때문에 험한 꼴을 당한 채 아파하고 있다니, 너무 큰 죄책감과 슬픔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 내가 너희 아버지한테 네가 우리 집에 있다는 걸 말했어. 하지만 시화가 그렇게 된 건 내 탓이 아니야.”
“그래……. 내가 그분의 아들이기 때문이지.”
“아니, 그래서도 아니야. 네가 저지른 일 때문이야. 네 계획대로 됐다 치자. 너는 그렇게 평민놀이를 하다가 견딜 수 없이 힘들어지면 이제는 재미없다고 우리랑 소꿉놀이 그만하고 싶다고 네 아버지를 찾아갔겠지. 아무리 불효자라도 자식인데 아버지가 자식을 죽일 수 있겠어? 그런데 장단 맞춰 준 우리는 너와는 달라. 그날처럼 우리는 어차피 다치게 됐을 거야.”
“왜 다들 내가 그렇게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단정 짓는 거야? 어르신도 너도, 왜?”
“발버둥 치지 않아도 편히 먹고살 수 있는 삶이 있는데 어떤 바보가 그걸 마다하겠어?! 당연한 거야. 이건 너에 대한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럼 그때 절벽에서 왜 내가 떠나게 두지 않았어?”
복태는 그 순간을 후회했다. 그냥 아무도 피해 받지 않게 혼자 떠났으면 될 것을 왜 시안을 따라 집으로 갔는지. 복태는 자신에 대한 후회와 질책의 질문을 내뱉었다. 시안은 복태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할 수 없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머리를 굴리다 안 되겠는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복태를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시화 치료비가 많이 들어갔어. 그동안 벌어 놓은 게 있어서 그나마 버텼어.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야……. 도둑놈들…… 발목에 몽둥이를 잘못 맞았대. 후유증이 안 남으려면 정성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한데…… 만들어 놓은 물건 없어? 네가 만든 건 글이든 물건이든 인기가 좋으니 내놓기만 하면 바로 돈이 되겠지.”
“있긴 한데, 팔려고 만든 건 아니라서…….”
복태는 선반 위에 놓인 신발을 슬쩍 쳐다봤다.
“조금만 기다려. 글이든 뭐든 팔 만한 것을 빨리 만들어 볼게.”
“난 다급한 마음에 이 나라 군기대신 집의 담을 넘었어. 그것도 꼴도 보기 싫은 널 만나기 위해서! 그건 지금 당장 그 빌어먹을 돈이 필요하단 얘기야! 시화까지 너처럼 다리병신 만들기 싫으면 뭐든 내놔! 아니면? 시화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거야?!”
복태는 자신의 방을 뒤져 값이 나갈 법한 물건들을 싹 긁어모아 시안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갖다가 팔면 돈이 좀 될 거야. 그런데 말이야. 시화가 다친 건 내 탓이 맞아. 하지만 어르신께 찾아간 네 잘못도 있다고 생각해.”
“뭐?”
“우린 친구잖아. 너는 나를 믿어 줬어야 했어.”
“하아…… 위복태. 너는 너의 재주 말고는 아무것도 내게 증명해 준 게 없어.”
“그럼 너는 왜 나와 친구가 된 거야?”
“……우린 서로가 필요했을 뿐이야. 돈 되는 건 뭐든 해야 하는 나와 어울릴 사람이 필요한 너. 어쨌든 이런 흔해 빠진 물건 말고, 사람들이 좋아서 환장하는, 부르는 게 값인 네 물건. 그게 필요해. 작업해 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어? 지금 네 아버지가 우리 남매 끌고 그 난리를 쳐서 우리에 대한 평이 안 좋아. 하! 우리가 네가 그런 황당무계한 일을 꾸미도록 꼬여 냈단다.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별로 좋지 않게 보고 있어. 시화가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서 너희 집 대문 앞에 나뒹구는데도 당해도 싸다는 그 눈빛들, 하! 환장하겠더라. 불쌍한 절름발이 데리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등쳐 먹으려고 그랬대. 야, 네가 불쌍한 절름발이냐?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 네가 불쌍한 절름발이냐고. 나는 내 발목 부러뜨려서라도 네 아버지 아들 행세 하고 다니고 싶다. 이쪽 업계에선 신뢰가 최고야. 그런데, 나는 네가 저지른 미친 짓에 휘말려 천하의 사기꾼이 됐어. 그런데도 어쨌든 나와 거래를 하는 이유라면 나만 구할 수 있는 빌어먹을 네 물건! 그거라면 계속 거래하겠대. 이까짓 흔한 물건 가지고 안 돼. 정말 없어?!”
“……하나 있어. 팔려고 만든 건 아니라 팔릴지는 모르겠다.”
복태는 선반에 고이 올려놓았던 신을 꺼내어 시안에게 건네주었다.
“있으면서 숨기긴 왜 숨겨? 시화가 당장 치료비가 필요하다는데!”
“……내가 신을 신발이었어, 그건……. 이제 됐어. 아무래도 좋아. 시화만 괜찮아진다면.”
하얀색 무명 신에 힘차 보이는 필체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내디뎌야 한다. 이대로 삶의 무게에 매장되지 않으려면.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소설 속 신발을 만들어 팖으로써 삶이 더더욱 윤택해져 갔다. 처음 남매를 만났을 때는 먹을 것을 잘 먹지 못해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모습이 참 안쓰러웠었는데, 살이 오른 지금의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자기 힘으로 친구를 돕는 자신이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없어도 이렇듯 잘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복태의 마음속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시화에 대한 연심도 깊어졌다. 시화도 자신에게 같은 마음을 품었다고 느낀 것은 자신이 시화를 바라볼 때마다 자꾸 눈이 마주치는 것 때문이었다. 서로 눈이 맞으면 시화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곤 했었다. 그 모습이 또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세상엔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아직 선택할 수 있는 것들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제는 그 선택을 실행에 옮겨야 할 순간이 왔다. 이 집으로부터 완벽히 독립할 때가 온 것이다.
복태는 방 안에서 자신의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필요한 물건만 챙기다 보니 짐이 생각보다 간소했다. 짐을 들고 대문을 나서면 노비들의 눈에 띌 것이 분명했기에 복태는 담장 밖으로 짐을 던져 놓았고, 평소처럼 외출을 하는 척 대문을 나섰다. 대문을 열고 나가자 마침 퇴청하는 귀호와 마주쳐 버렸다.
해도 떨어져 가는데 밖에 나가려는 복태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귀호가 물었다.
“이 시간에 어딜 가려는 것이냐?”
복태는 나쁜 짓을 한 사람처럼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잠깐 볼일이 있어 다녀오려 합니다.”
“네게 방 안에만 있으라는 말은 아니다만, 요즘 외출이 너무 잦구나. 몸이 성치 않다고 무뢰배들이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 놈들은 약자부터 건드리니 조심하고, 늦게까지 다니지 말거라.”
“네, 어르신.”
귀호는 복태를 지나쳐 대문 안으로 들어서려다 멈추고 다시 그를 불러 세웠다.
“듣자 하니 밤늦게까지 불을 켜 놓고 있다고 하던데 뭘 하느라 잠도 안 자고 있는 게냐. 설마 또 서책을 본 것이냐?”
“…….”
“아직까지 헛된 희망을 품은 것이더냐.”
“아닙니다.”
“허나 어찌해 서책을 그리 열심히 읽는단 말이냐? 너만 상처받는다. 그러지 말아라.”
“……그냥 잠이 안 와서 그렇습니다. 금방 들어오겠습니다. 심려치 마세요.”
복태는 귀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죄짓는 듯한 마음에 볼 수가 없었고 끝까지 완고한 귀호의 태도 때문에 보고 싶지 않았다. 표정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뭔가 하고 싶은 말을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에 귀호는 복태에게 물었다.
“네 진심을 말해 보거라. 화내지 않으마. 언제부턴가 이 아비와는 말도 섞지 않으려 하는구나.”
귀호의 목소리가 슬펐다. 그게 안타까웠지만 귀호와 복태 자신은 평행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꺾일 수는 없었다.
“마음이란 게 없어서 드릴 말씀도 없습니다…….”
복태의 답을 들은 귀호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상처받은 복태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눈에 들어와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귀호를 똑바로 쳐다보며 복태는 이어 말했다.
“어르신께서 바라시던 대로 희망이라는 것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녁에 네가 좋아하는 닭고기를 올리라 할 테니 일찍 들어오너라. 마음이 허하면 몸도 상하는 법이니.”
“……네.”
저녁을 먹은 후 귀호는 아까 복태와 나눴던 얘기가 계속 신경이 쓰여 가만있지를 못하고 있었다. 뭔가 초조해 보이는 귀호를 보며 그의 부인이 무슨 일이 있냐며 물었지만 귀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뭔가가 불안했다. 귀호는 부인을 등 뒤로 하고 복태의 방으로 향했다. 복태의 방은 비어 있었다. 귀호는 백숙을 들고 오는 노비를 불렀다.
“복태 못 보았느냐?”
“예? 방에 안 계십니까요?”
노비도 복태의 행방을 모르자 짜증이 일었다. 귀호는 복태의 방에서 복태를 기다리기로 했다. 오기만 해 봐라. 혼쭐을 내 줄 것이다. 이 아비를 어찌 이리 걱정하게 하는 게야. 노비는 귀호의 초조함이 눈에 보여 혹여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얼른 백숙을 방에 두고 방을 나갔다. 뜨거워 김이 폴폴 났던 백숙은 점차 식어 갔고 귀호의 안색 또한 식어 가고 있었다. 밤이 늦었다. 이렇게 늦게까지 안 들어온 적이 없던 아이였다. 필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귀호는 마당에 집 안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노비들에게 복태를 찾으라고 명을 내리려는데 이 소식을 들은 그의 부인이 무슨 일이냐며 다가왔다.
“복태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소. 몸도 성치 않은 것이 무뢰배들의 표적이 되어 무슨 일을 당한 게 분명하오, 부인. 복태를 찾아야 하오. 여봐라!”
“수선 떨 거 없습니다. 놀다 보면 늦을 수도 있지요. 이까짓 걸로 일을 크게 키우시면 이 무슨 집안 망신이랍니까?”
아무리 제 배 속에서 낳은 자식이 아니라지만, 어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귀호는 부인의 심보에 속이 상했다.
“복태가 보통 사내놈이오? 몸이 불편한 아이오. 나쁜 일 당하기에 십상이라니까! 불길하오. 아까 복태가 한 말도 이상하고!”
부인은 호들갑 떠는 귀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를 이렇게 만드는 복태 놈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 아침까지 기다리십시다, 어르신. 그 다음 사람을 풀어서 찾아도 늦지 않습니다! 그놈의 복태, 복태! 우리 용의가 외박을 해도 이리 난리를 안 치시던 분이.”
“그놈이랑 복태랑 같소?!”
“다르죠! 아주 다르죠! 아침까지 기다리세요. 어르신이 이리 걱정하는 줄도 모르고 실컷 놀다가 어기적어기적 기어 들어오겠죠!”
“지금 복태가 무슨 변을 당했는지도 모를 일인데 그런 소릴 하고 있소?!”
귀호의 속 타는 소리가 마당에 허무하게 퍼졌다.
“복태야, 무슨 일이야? 지금 군기대신이, 너희 아버지가 널 찾는다고 여기저기 뒤지고 아주 난리가 아니야!”
가게를 닫고 집에 돌아온 시안은 태룡산 뒷자락 중턱으로 오라는 복태의 전언을 시화로부터 전해 듣고 허겁지겁 달려와 물었다. 복태는 소식을 듣고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생각하며 각오를 다졌다.
“하아…… 가출했어, 나.”
“뭐?!”
“난 이제부터 죽은 사람이야, 시안아. 그분 마음에 대못을 박는 일이지만, 이 방법 외엔 그분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날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또다시 그 방 안에 가둘 거야. 그분께는 죄송하지만 나는 내 삶을 살아야겠어. 내가 죽은 자식이 되면 그분도 포기하시겠지.”
복태는 절벽이 있는 끝자락으로 다가가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옷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떨어진 옷이 절벽 아래 흐르던 강물에 휩쓸려 어느새 저 아래로 흘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시안은 복태의 말에 초조해졌다.
‘복태 네가 이래선 안 돼!’
시안은 복태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 몸을 돌렸다.
“가출?!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성년 되면 쫓겨날 거라며! 그래서 일 배운 거라며! 지금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그분도 너도, 아무도…… 날 이해 못 해. 그래도 우린 친구잖아? 가끔은 이해 못 하는 일을 하더라도 친구니까, 그러니까 그냥 봐줄 수도 있잖아……. 그냥 침묵해 줘. 그분이 날 포기할 때까지.”
복태의 눈이 각오로 빛났다. 시안은 우선 이 자리에서 설득하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만약 이대로 강요한다면 복태는 튕겨 나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우선 시안은 복태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앉혀 놨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집으로 데려오기는 했지만 밖의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군기대신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 것인지, 이제는 군사까지 동원해 동네를 뒤지고 있었다. 이대로 복태를 집 안에 뒀다가 함께 있는 것이 발각이라도 되면 혹여 죄를 뒤집어쓸까,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일자 복태에게 다시 화가 났다.
“그래 굳이 아버지가 만들어 준 온실이 지겨워서, 이도 저도 아닌 게 싫어서 평민이 되겠다는 거, 이해된다 치자. 근데 이렇게까지 아버지 마음에 대못을 박아 가면서 연을 끊어야 하는 일이야? 꼭 부모에게 자살한 자식새끼가 돼야 하냐고! 그건 진짜 몹쓸 놈이잖아. 대화하면 되잖아. 나 스스로 살아 보고 싶다고 말하면 되잖아, 이 미친놈아!”
흥분한 시안의 입이 거칠어졌다. 시안은 복태가 이해도 안 되고, 자기에겐 없는 아버지에게 모질게 구는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시안은 방에 복태를 내버려 두고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시화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시안이 밖으로 나오자 시화가 달려가 방문을 다시 열고 복태에게 말했다.
“지금 난리 났어요! 군기대신이 오라버니 옷을 발견하고는 반나절 넘게 끌어안고 울다가 실신하셨대요. 이러다가 초상 치르겠어요…….”
시화가 전해 준 소식에 복태는 마음이 괴로워졌다. 하지만 여기서 약해질 수는 없었다.
“너희는 그분을 몰라……. 대화가 안 통해. 내가 그분 앞에서 얼마나 발버둥을 쳐 왔는지 너희는 모를 거야. 평생 나를 그 집에 가둘 게 분명해. 싫어, 끔찍해.”
중얼거리듯 말하던 복태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 혹시 나 때문에 너희가 곤란해진 거니?”
시화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곤란한 건 사실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주춤거리는 남매를 바라본 복태는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미안해. 다른 곳에 갈게. 내가 죽었다고 아니까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을 거야.”
시안은 복태의 팔을 붙잡았다.
“됐어. 여기에 있어. 네 뜻대로 되어 가는데 섣불리 움직이다가 일 그르치면 어떡해.”
“그래도 네가 곤란…….”
“됐어. 네놈이 이해 안 되지만 그래도 친구니까…… 그러니까 일단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
“고마워…….”
시안은 집에 먹을 게 없다며 장을 봐 오겠다고 하고선 집을 나섰다. 그 뒤를 시화가 뒤따랐다.
“오라버니. 정말 복태 오라버니가 하자는 대로 할 거야?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 정말로 죽은 사람 만들게 둘 거냐고.”
“미쳤냐? 저 또라이 새끼 말대로 하게. 우리는 우리를 보호할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이렇게 아등바등 살고 있는데 저 복을 왜 차냐고! 미친놈이. 저 새끼가 하는 행동, 이해도 안 가고 도와주고 싶지도 않아. 나중에 군기대신이 우리가 숨겨 준 걸 알아봐.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이게 아버지 입장에서 보통 기만하는 거냐고? 자식새끼가 지 목숨으로, 그것도 아픈 손가락인 놈이 지 목숨으로 장난질을 쳤어. 그리고 우리는 그걸 묵인하고, 도와주고!”
“그래서 지금 어디 가는 건데?”
“군기대신 집. 지금 이야기하면 우린 공범이 아닌 거지.”
시화는 바삐 걷는 시안의 팔을 붙잡아 걸음을 세웠다.
“지금 배신하겠다는 거야?! 불똥 튈 게 무서우면 복태 오라버니더러 딴 데 잠깐 가 있으라고 하면 되잖아. 아니면 설득을 하든가, 돌아가라고!”
상황 파악 못 하고 화를 내는 시화가 답답했다. 시안은 시화의 두 어깨를 꽉 붙들고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그놈이랑 고상한 척하며 희희낙락 놀더니 상황 파악이 안 돼? 지금 군기대신이 아들 찾겠다고 군사까지 풀었어. 이 시장 바닥 사람들 그 새끼랑 우리가 친하게 지내는 거 다 아는데 군기대신이 우릴 못 찾아낼 것 같아? 시간문제야. 그전에 우리가 먼저 선수 쳐야만 해. 그리고 그 새끼 애비 덕 좀 보자고 어울려 준 거지, 그 잘난 애비 없으면 걘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절름발이 병신일 뿐이라고!”
복태 욕을 하며 소리 지르는 시안의 모습이 너무 낯설어 시화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우리 그동안 복태 오라버니 덕분에 이만큼 먹고살았어!”
“너는 화 안 나? 아버지 잘 만나서 이런 거지 같은 발악이나 하고 있는 저놈한테. 쟤, 지금 그냥 노는 거야. 평민놀이. 그 놀이 끝나 봐, 못 살겠다 싶을 거야. 우리가 만날 느껴 왔던 그 기분,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 생활을 겪으면 재미없다고, 너랑 소꿉놀이 그만하고 싶다고 지 아버지에게 돌아가 버리면. 아무리 불효자라도 지 새끼인데 쳐 죽이기라도 하겠어? 근데 장단 맞춘 우리? 그 화풀이 우리가 다 받을 거야. 결국엔 우리만 파국으로 치닫게 될 거라고!”
결국 시화는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며 시안은 시화를 살살 달래 보았다.
“일단 복태 들여보내자. 오히려 그렇게 해야 우리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있어. 복태 계속 만나고 싶으면 이게 방법이라고, 시화야.”
귀호는 강물에서 건진 복태의 옷을 끌어안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모두가 복태가 죽었다고 말했다. 복태의 시신을 찾기 전까지는 수색을 멈추지 말라 명했지만 자꾸만 불안한 쪽으로 생각이 쏠렸다. 숨이 턱 막혀 왔다.
이런 귀호 앞에 장시안, 장시화가 찾아왔다. 시안은 복태가 자신의 집에 머물고 있음을 고해바쳤다. 복태가 살아 있다는 소식에 귀호는 큰 안도감을 얻었지만 곧바로 밀려오는 배신감과 분노에 눈이 멀어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분노한 귀호는 사람을 시켜 복태를 잡아 오라 명했고, 얼마 후 끌려오며 발버둥 치는 복태가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위복태, 네 이놈!!!!!”
귀호의 진노는 마당에 있던 모든 이의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복태는 무의미한 발버둥을 멈추고 귀호 앞에 섰다. 그리고 장씨 남매를 쳐다봤다.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런 복잡한 심경으로 그들을 쳐다보다 시화와 눈이 마주쳤다. 시화의 눈가에는 눈물의 흔적이 있었다.
‘아아, ……너도 괴로웠구나. ……내가 너에게 그런 마음이 들게 했구나.’
귀호는 납작 엎드려 용서를 빌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여자아이와 눈을 맞추고 있는 복태를 바라보며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복태는 착한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최근 이상하게 굴었던 것이 다 저 여자애 때문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자 귀호의 분노는 시화에게로 향했다.
“저년이 네놈을 홀린 게로구나. 사내가 눈에 뵈는 것도 없이 이리 굴 때는 계집에게 홀렸을 때뿐이다. 저 계집을 포박하고 몽둥이로 매질을 하거라!”
놀란 복태가 앞으로 뛰쳐나와 말했다.
“어르신! 시화는 상관이 없습니다!”
“입 다물어라!”
“언제나 어르신께서는 소인을 믿어 주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소인의 말은 한 치도 들으려 하지 않았던 어르신과 소인의 불신 때문입니다! 소인의 선택은 시화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이도 저도 아닌 채로 보호만 받아야 하는 삶이 싫었습니다. 위로 올라갈 수 없다면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라도 선택하고 싶었습니다. 그뿐입니다, 어르신!”
복태가 호소했지만 귀호에게 시화에 대한 불신만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 줄 뿐이었다. 노비들이 주춤거리고 있자 다시 한 번 불호령을 내려 시화에게 매질을 명했고, 그들은 시화를 붙잡아 매질을 시작했다. 시안이 울부짖으며 시화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이미 장정들에게 꽁꽁 붙들려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시화의 비명 소리가 나자 복태는 안절부절못했다.
“어르신!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복태가 눈물지으며 바닥에 엎드려 싹싹 빌자 귀호는 그 모습이 또 안쓰러워졌다. 시화를 가만두지 않으려 했던 생각이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감히 평민 주제에 제 아들을 넘보다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저년이 다시는 남의 귀한 자식 홀리는 일이 없도록 죽지 않을 만큼만 매질하여 대문 밖으로 내쫓아 버리거라! 그리고 복태 네놈이 저지른 불효를 진심으로 반성할 때까지 외출을 금한다!”
난리가 벌어지고 며칠이 지났지만 복태는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고집은 귀호를 쏙 빼닮은 듯했다. 방 안에 계속 갇혀 있는 일이 익숙하여 불편함은 없지만 시화 걱정으로 가득 차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죽……었을까?’
아니다. 그분을 믿고 싶었다. 그렇게 모진 분은 아닐 것이다. 시안은 동생이라면 껌뻑 죽는 사람이다. 그러니 시안이 잘 돌봐 주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무것도 확인할 길이 없으니 생각만 많아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밖에서 소곤거리는 소리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복태야. 복태야.”
“시안이니?”
시안을 부르며 복태가 방문을 열었다. 방 앞을 지키고 있던 노비가 웬일로 자리를 비운 채였다. 노비가 오기 전에 복태는 시안을 방 안으로 들였다.
“시화는? 괜찮아?”
시화 얘기가 나오자 시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니. 안 괜찮아서 왔어. 그날 매질을 당한 이후로 아직도 못 일어나고 있어.”
시화의 소식에 복태가 괴로움에 얼굴을 찡그렸다. 연모하는 여인이 자신 때문에 험한 꼴을 당한 채 아파하고 있다니, 너무 큰 죄책감과 슬픔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 내가 너희 아버지한테 네가 우리 집에 있다는 걸 말했어. 하지만 시화가 그렇게 된 건 내 탓이 아니야.”
“그래……. 내가 그분의 아들이기 때문이지.”
“아니, 그래서도 아니야. 네가 저지른 일 때문이야. 네 계획대로 됐다 치자. 너는 그렇게 평민놀이를 하다가 견딜 수 없이 힘들어지면 이제는 재미없다고 우리랑 소꿉놀이 그만하고 싶다고 네 아버지를 찾아갔겠지. 아무리 불효자라도 자식인데 아버지가 자식을 죽일 수 있겠어? 그런데 장단 맞춰 준 우리는 너와는 달라. 그날처럼 우리는 어차피 다치게 됐을 거야.”
“왜 다들 내가 그렇게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단정 짓는 거야? 어르신도 너도, 왜?”
“발버둥 치지 않아도 편히 먹고살 수 있는 삶이 있는데 어떤 바보가 그걸 마다하겠어?! 당연한 거야. 이건 너에 대한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럼 그때 절벽에서 왜 내가 떠나게 두지 않았어?”
복태는 그 순간을 후회했다. 그냥 아무도 피해 받지 않게 혼자 떠났으면 될 것을 왜 시안을 따라 집으로 갔는지. 복태는 자신에 대한 후회와 질책의 질문을 내뱉었다. 시안은 복태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할 수 없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머리를 굴리다 안 되겠는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복태를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시화 치료비가 많이 들어갔어. 그동안 벌어 놓은 게 있어서 그나마 버텼어.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야……. 도둑놈들…… 발목에 몽둥이를 잘못 맞았대. 후유증이 안 남으려면 정성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한데…… 만들어 놓은 물건 없어? 네가 만든 건 글이든 물건이든 인기가 좋으니 내놓기만 하면 바로 돈이 되겠지.”
“있긴 한데, 팔려고 만든 건 아니라서…….”
복태는 선반 위에 놓인 신발을 슬쩍 쳐다봤다.
“조금만 기다려. 글이든 뭐든 팔 만한 것을 빨리 만들어 볼게.”
“난 다급한 마음에 이 나라 군기대신 집의 담을 넘었어. 그것도 꼴도 보기 싫은 널 만나기 위해서! 그건 지금 당장 그 빌어먹을 돈이 필요하단 얘기야! 시화까지 너처럼 다리병신 만들기 싫으면 뭐든 내놔! 아니면? 시화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거야?!”
복태는 자신의 방을 뒤져 값이 나갈 법한 물건들을 싹 긁어모아 시안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갖다가 팔면 돈이 좀 될 거야. 그런데 말이야. 시화가 다친 건 내 탓이 맞아. 하지만 어르신께 찾아간 네 잘못도 있다고 생각해.”
“뭐?”
“우린 친구잖아. 너는 나를 믿어 줬어야 했어.”
“하아…… 위복태. 너는 너의 재주 말고는 아무것도 내게 증명해 준 게 없어.”
“그럼 너는 왜 나와 친구가 된 거야?”
“……우린 서로가 필요했을 뿐이야. 돈 되는 건 뭐든 해야 하는 나와 어울릴 사람이 필요한 너. 어쨌든 이런 흔해 빠진 물건 말고, 사람들이 좋아서 환장하는, 부르는 게 값인 네 물건. 그게 필요해. 작업해 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어? 지금 네 아버지가 우리 남매 끌고 그 난리를 쳐서 우리에 대한 평이 안 좋아. 하! 우리가 네가 그런 황당무계한 일을 꾸미도록 꼬여 냈단다.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별로 좋지 않게 보고 있어. 시화가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서 너희 집 대문 앞에 나뒹구는데도 당해도 싸다는 그 눈빛들, 하! 환장하겠더라. 불쌍한 절름발이 데리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등쳐 먹으려고 그랬대. 야, 네가 불쌍한 절름발이냐?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 네가 불쌍한 절름발이냐고. 나는 내 발목 부러뜨려서라도 네 아버지 아들 행세 하고 다니고 싶다. 이쪽 업계에선 신뢰가 최고야. 그런데, 나는 네가 저지른 미친 짓에 휘말려 천하의 사기꾼이 됐어. 그런데도 어쨌든 나와 거래를 하는 이유라면 나만 구할 수 있는 빌어먹을 네 물건! 그거라면 계속 거래하겠대. 이까짓 흔한 물건 가지고 안 돼. 정말 없어?!”
“……하나 있어. 팔려고 만든 건 아니라 팔릴지는 모르겠다.”
복태는 선반에 고이 올려놓았던 신을 꺼내어 시안에게 건네주었다.
“있으면서 숨기긴 왜 숨겨? 시화가 당장 치료비가 필요하다는데!”
“……내가 신을 신발이었어, 그건……. 이제 됐어. 아무래도 좋아. 시화만 괜찮아진다면.”
하얀색 무명 신에 힘차 보이는 필체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내디뎌야 한다. 이대로 삶의 무게에 매장되지 않으려면. 지금 이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