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5화
“방금 네가 가져간 건 신발이 아니라 내 결의야. 사람이 나약한 순간이 오면 그 결의는 쉽게 무너지거든. 그래서 결의를 물건에 담아 주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까 봐 이 신에 새겼어. 사람은 나약한 순간이 훨씬 더 많으니까……. 그 순간에 놓쳐 버리면 돌아오지 않는 마음이란 게 있으니까…….”
“뭐라고 하는 거야, 대체. 그냥 한 번 더 만들면 되잖아!”
시안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복태가 답답했다. 뭐 어찌 됐든 신발은 손에 넣었으니 치료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신을 품에 꼭 안고 밖을 나서려고 하는데 잠시 자리를 비웠던 노비가 다시 왔는지 문에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시안은 어떻게든 해 보라는 듯 복태를 노려봤다.
“목이 말라 찾았는데 어딜 갔다 온 거야? 가서 물 좀 가져다줄래?”
“아, 예. 도련님.”
문밖에 비치던 그림자가 사라지자 시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것은 나중에 전해져 알게 된 사실이지만, 황궁의 어느 나이 먹은 상궁이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내어 그 신을 사 갔다고 한다.
***
6개월이란 시간이 지나고 복태는 어느덧 성년이 되었다. 복태는 아직도 귀호에게 잘못을 빌지 않은 채 지내오고 있었다. 그동안 계속 방 안에 갇혀 지내지는 않았지만 대문 밖을 나서지는 못했다. 귀호는 철저하여, 집 담을 높이 올려 더 이상 복태가 월담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노비들에게도 복태가 밖을 나서지 못하게 감시하라고 명을 해 둔 상태였다. 복태에게는 이 모든 난관을 뚫을 만한 의지도 의욕도 없었다.
삼엄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집 안에만 있는 복태의 귀에도 들려올 정도로 큰 소식이 퍼졌다. 공황장애를 심각하게 앓고 있던 머저리 셋째 황자가 황태자와 황태제를 죽이고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으며, 얼마 안 가 황제가 죽자 그가 다음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이었다. 위나라 곳곳이 이 소식으로 들썩였고 새 황제는 각 가문에 칙서를 내렸다. 그 칙서에는 그가 지명한 각 가주의 자식을 자신의 후궁으로 들여보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양자, 양녀를 들여 시집을 보내는 것은 아니 되며, 혹 딸이 없다면 아들이라도 보내라며 철저함을 보였다.
황제의 칙서는 군기대신의 집에도 내려왔다.
“두 형제를 죽이고 황좌에 올랐다더니, 이 말도 안 되는 억지는 뭐랍니까? 특히 우리 가문을 꼬집어 기대하고 있겠다는 이 어투는 뭐란 말입니까. 승하하신 황태자 마마와 가까이했다고 지금 경계하고 있는 거 맞지요?”
“그런 것 같소.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대신에게 이 칙서가 내려진 걸로 봐서 대신들을 경계하고 황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것이겠지.”
“용의는 안 됩니다. 우리 가문의 장남 아닙니까?”
“그럼…….”
“둘째 용와도 안 됩니다. 지금 혼담 얘기가 오가는 처자가 있습니다. 서로 연모하고 있는 아이들을 갈라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어떤 잔악한 성품일지 모르는 황제에게 시집을 보내다니요. 그리고 저는 내 아들들을 꼴사납게 시집 못 보냅니다. 동성애자도 아닌 애들을 어찌! 절대 안 됩니다.”
“복태를 보내자는 소리요?”
되묻는 귀호의 말에 부인은 싫어할 줄 알았다는 듯 비아냥거리며 답했다.
“어르신께서 평생 싸고돌 그놈을 보내겠다 말할 리 없겠지요! 하지만 이번엔 소첩, 절대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럽시다.”
부인은 귀호가 뭐라고 해도 절대 양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복태를 보내겠다고 말하다니, 순간 귀를 의심했다.
“웬일이십니까, 어르신께서?”
요즘 자신을 대하는 복태의 반항적인 태도와 황소고집을 몸소 느끼며 귀호는 아버지로서 언제까지 복태를 통제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게다가 순리대로라면 자신이 복태보다 먼저 세상을 뜨게 될 터였다. 그렇게 자신이 없는 세상을 복태 혼자 남아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가엾고 안쓰러워 편히 눈감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복태가 황제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면 그나마 보호해 주는 사람이 생기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서자로 태어나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외로움을 겪으며 자라 온 아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스스로 제 신분을 내려놓고 너저분한 평민들과 동급이 되어 살아가겠다는 모습을 보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황제와 혼인을 하게 되면 아무리 미천한 몸이라도 신분 상승을 하게 되는 게 이 나라 법도이다. 하물며 복태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복태는 선택지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평민을 선택하게 된 것일 터. 이 혼인으로 복태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선택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복태의 입장에서도 항상 갈망해 왔던 것이니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부인은 현 황제 자황의 성품을 잔악한 자로 생각하고 있지만 황제가 되기 위한 야심이 강한 자일뿐, 황실에서 본 예전 자황의 모습은 악한 기운을 품은 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선하고 인정이 많은 편이었다. 물론 연기였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본인의 사후, 유일하게 복태를 지켜 줄 사람이 자황이 된다면 현재 자신이 걱정하고 고민하는 상황이 모두 타개될 것이 분명했다.
“모두에게 좋은 방안으로 결정한 것뿐이오.”
부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다가 자기 자식이 보내지는 것이 아니니 우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헌데 황실에서 너무 모자란 놈을 보냈다고 트집 잡는 건 또 아닐는지…….”
“내 알아서 처리하리다.”
***
귀호는 복태의 방으로 향했다. 서먹하여 차마 문을 열고 들어가지는 못하고 문 앞에 서서 복태를 불렀다.
“복태야.”
아비인 귀호의 부름에도 역시나 복태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 예상한 반응이었다. 귀호는 씁쓸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대답하기 싫으면 그냥 듣거라. 후궁 간택을 위해 각 대신에게 자녀를 올리라는 칙서가 내려왔다. 하여 방금 네 이름을 담아 사주단자를 올린 참이다.”
이건 말도 안 됐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자신을 낳아 준 부모라지만 자식 인생을 놓고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언제나 습관처럼 미소 뒤로 감춰 왔었던 복태는 얼굴에 감정을 잔뜩 드러낸 채 방문을 열고 나왔다.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이미 결정 난 사항이니 그런 건방진 말투로 되물어도 바뀌는 것은 없다.”
“어르신!”
“얼마 후 황궁에서 가마가 올 것이다. 치장부터 기본 예의까지 익히고 순종하도록 하여라. 만약 한 치라도 어긋나려 하여 나나 황제의 신경을 거스르게 한다면 장담하건대 내 그년을 잡아다 기필코 죽여 버릴 것이다.”
복태의 눈에 공포와 경멸이 서리는 것이 보였다. 귀호는 마음이 아팠지만 이렇게 모질게 하지 않으면 결코 복태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었다.
“아비가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지금은 네가 어려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나 훗날 이 아비를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게다.”
귀호는 복태에게 통보하듯 말을 던져 놓고 냉정하게 뒤돌아 걸어갔다.
“어르신!!!”
복태가 절규하며 외쳤지만 귀호는 매정하게 멀어져 갔다. 복태는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목에서부터 무언가 뜨거운 것이 역류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억울하고 원통하여 눈물이 절로 났다. 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복태는 끅끅거리며 울음을 참아 보았지만 흐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주먹을 너무 꽉 쥐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내디뎌야 한다. 이대로 삶의 무게에 매장되지 않으려면. 지금 이 순간.’
6개월 전 자신이 시안에게 준 신에 새겼던 글귀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시안에게 신을 주었던 것을 후회했다. 그날 시안에게 신만 쥐여 주지 말고 자신도 같이 떠났어야 했다. 내가 정한 미래를 향해 앞을 내디뎠어야 했다. 이 집의 담보다 훨씬 더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황실이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될 줄 알았더라면.
***
복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혼인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황궁에서 가마가 오기 전날까지 안방마님에게 황실의 예법과 예절을 부지런히 익혔다. 태어나 평생 안방마님과 이렇게 오래 같이 있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복태를 싫어하는 기색은 역력했으나 자신의 두 아들이 갈 수도 있었던 후궁의 자리에 대신 들어가 주는 복태였기에 군말 없이 입궁 준비를 도와주었다. 며칠 뒤 황궁에서 가마와 혼례복을 보내왔고 복태는 의미 없는 몸짓으로 혼례복을 입었다. 행여 도망갈까 봐 곁을 지키고 있던 귀호는 복태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데려가 가마에 태웠고,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 안에 있는 대연회장. 상석에는 황제 자황이 앉아 있었고 아래에는 양옆으로 나란히 대신들과 후궁이 될 그 자녀들이 서 있었다. 자황의 앞쪽에 서 있던 한 환관이 교지 속에 있는 대신과 자녀의 이름을 차례차례 불렀고, 이름이 불린 자들은 자황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예를 올리며 얼굴을 마주했다. 자황은 황제라면 항상 근엄하게만 있을 것 같다는 편견을 깨고 예를 올리는 후궁들에게 친절한 인사로 화답해 주었다. 하지만 마주한 사람을 훑어보는 그 눈빛만큼은 날카로웠다.
“군기대신 위귀호의 자제, 위복태.”
“풉!”
복태와 귀호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자황 앞에 걸어 나갔다. 하지만 자황은 환관의 입에서 나온 ‘복태’라는 이름에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조용한 분위기여서 그의 코웃음 소리는 모두에게 들렸고 엄숙했던 분위기가 사그라지는 것 같자 너도나도 조금씩 웃음 지었다.
“흐흠. 복태라. 큭, 참으로 정감 가고 촌스러운 이름 같소, 군기대신. 아들 이름에 신경 좀 쓰지 그러셨소?”
복태는 자황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귀호는 단련되었다는 듯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이 해 오던 대로 차분히 답하였다.
“큰 복을 받으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정색하는 귀호 때문에 웃고 있는 자신이 우스운 사람이 된 것 같아 자황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눌렀다. 끅끅대는 소리가 더 안쓰럽게 들렸지만 감히 누구 하나 지적하지 못했다.
“그래. 이름이야 뭐, 뜻만 좋으면 되는 것 아니겠소?”
자황은 복태의 얼굴을 확인하고자 했으나 군기대신과 나란히 서 있지 않아 가려져 안 보였다.
“우리 복태…… 큭, 얼굴이…… 안 풉, 안 보이오.”
중간중간 웃음을 터뜨리며 복태를 찾는 자황의 말과 모습이 사람들로 하여금 웃음 짓게 했다. 대연회장 안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복태의 걸음걸이를 본 이후 뚝 그치게 되었다. 아까는 엄숙한 분위기에 부를 때를 제외하곤 다들 고개를 들지 못해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들 얼굴을 들고 복태를 주목하고 있었기에, 복태가 다리를 절며 걷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사람들은 황제 앞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수군거렸고 연회장이 온통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하지만 정작 복태 본인은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황제와 마주했다.
“군기대신 위귀호의 아들 위복태. 폐하께 처음 예를 갖춥니다.”
“아, 최근에 무슨 변고라도 있었소?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데?”
“날 때부터 이러하였습니다.”
자황은 복태의 대답에 귀호에게 물었다. 그 모습이 아까와는 달리 사뭇 진지했다.
“남의 장애를 가지고 비난할 생각은 아니지만 아들이 셋이라 들었소. 이 아이를 내게 보내는 이유를 듣고 싶소만?”
“의중을 숨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성격이라 솔직하게 고하겠습니다. 보다시피…….”
“짐도! 짐도 그러하오. 의외로 우리 서로 잘 통하는 것 같소!”
귀호의 대답을 잘라먹으며 자황이 기쁜 듯 동감의 말을 했다. 귀호는 자황의 말이 끝나자 다시 차분히 답을 이어했다.
“보다시피 이 아이는 제게 조금 더 아픈 손가락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평생 제가 보살피고 싶으나 부모가 먼저 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 아니겠습니까? 다른 자식 놈들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지만 이 아이는 아닙니다. 그저 좋은 남편을 만나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면 소신, 만족하옵니다. 폐하께서 그 좋은 남편이 되어 주시면 마음이 놓일 것 같아 이 아이의 이름으로 사주단자를 올렸습니다.”
“길게 말했지만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지금 짐을 떠맡기려 하는 것이 아니가?”
“맞습니다.”
“하하하. 너무 솔직한 것 아니오?”
귀호의 대답에 자황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며 싸늘하게 말했다.
“짐은 그대가 지금보다 더 솔직해지길 바라오.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였지만 그 속의 진짜 의중을 말해 보시오.”
귀호는 진심을 전했지만 자황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폐하께서 이렇듯 파격적인 제안을 하신 것은 훗날 황권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대신들의 힘을 묶어 두기 위함이 아니십니까? 복태는 제 아들 중 제가 가장 아끼는 아이입니다. 이 아이를 조금만 건드려도 제 심기가 많이 불편해질 것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폐하께는 좋은 인질이 될 거라는 뜻입니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자황의 심산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귀호처럼 대놓고 말하는 자는 없었다. 모두가 귀호의 자극적인 말에 또다시 웅성거리며 속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아무리 폐하가 솔직하게 말하라 했지만 어휘 선택이 저 모양이어서야. 하지만 자황은 귀호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다.
“……그대가 짐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오?”
“복태를 폐하의 울타리 안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해 주시면 됩니다.”
“짐이 그 정도도 못 해 주겠소?”
자황은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복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복태의 한쪽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대의 좋은 남편이 되어 주리다.”
싱긋 웃는 자황을 바라보며 복태는 어리둥절했다. 위엄이라고는 없어 보이던 웃음기 많은 황제가 갑자기 정색하며 귀호와 서로 으르렁대더니 다시금 다정하게 굴고 있었다. 자황의 마지막 말은 전혀 달갑지 않았지만.
***
처음 대면하던 그 날, 자황은 마치 복태를 많이 아껴 줄 것처럼 살갑게 굴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복태를 잊은 채 바쁜 나날을 보냈다. 너무 많은 후궁을 한꺼번에 궁에 들여 그런 것도 있지만 정사(政事)에 의욕이 넘치는 성격에 후궁들을 찾는 것보다는 정사를 돌봄에 더 매진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간간이 생각이 났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그의 기억 속에서 복태는 완전히 지워져 버리게 되었다.
***
복태의 처소 입구에 시안이 들어섰다. 복태의 신을 가져간 그날 밤 이후 그들은 친구 사이가 아니게 됐지만 둘 사이에는 소설이 남아 있었다. 시안에게는 복태의 소설이 필요했고 황궁 밖으로 자유롭게 나설 수 없는 복태에게는 소설을 대신 팔아 줄 시안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둘은 인연을 끊지 못하고 지금까지 업무적인 관계만 지속해 왔다.
시안은 손에 든 출입 허가증(후궁이 내준 허가증이 있으면 후궁 전각까지 출입이 가능)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 처소 앞마당을 지나 응접실로 걸어갔다. 응접실로 가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다른 후궁 처소와 비교하자면 복태의 처소는 소박한 처소였지만 궁궐 밖 평민들의 집에 비하면 대궐 같은 곳이었다(말 그대로 대궐이지만). 앞마당 가 쪽에는 복태가 키우는 찻잎으로 정원이 가꾸어져 있었다. 이렇게 크고 넓은 공간에서 자신을 위해 시중을 드는 궁녀만 여러 명에, 한가로이 여느 댁 여인네들처럼 풀이나 키우고 있는 꼴이라니.
“여전히 아버지 덕에 호의호식하는구먼.”
시안의 불평의 말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황제에게 시집가야 함을 싫어했던 걸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시안이 보기에 마마라 불리며 떠받들어지고 있는 복태는 여전히 복에 겨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간 시안은 이미 복태가 있는 것을 보고 간단히 인사를 건넸다. 복태는 시안이 자리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이번엔 잠정적으로 연재를 쉬었으면 해.”
다음 원고를 받으러 온 시안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말이었다. 복태의 소설이 자신의 가장 큰 수입원인데 연재를 쉬겠다니! 시안의 얼굴이 굳어지며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황제 폐하께서 작가 태복을 찾고 계셔. 네가 소설을 납품하러 가면 폐하의 명을 받은 자가 너를 찾아 묻겠지. 나는 네가 내 존재를 밝히지 않았으면 해.”
“왜? 황제 폐하가 네 작품이 좋다는데, 잘 보일 기회 아니야?”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시안은 복태가 하는 말과 행동을 항상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알기로는 복태는 아직 황제와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러 황제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난감해하며 침묵을 지키는 복태를 보며 시안은 의문을 가지다가 문득 시화를 떠올렸다.
“혹시 시화 때문이야? 시화 때문에 폐하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야? 그렇다 한들 굳이 네가 태복이라는 것을 숨길 필요가 있어?”
시화 얘기에 복태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며 시안은 고민했다. 얼마 안 있으면 시화가 시집을 간다. 시화 얘기만 나와도 저렇게 흔들리는데 시집을 가게 됐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면 복태가 어떻게 나올까. 혹여 기분이 상해 앞으로 자신과 거래를 하지 않을지도…… 아니, 큰 상심에 어쩌면 소설을 안 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복태도 시화가 아닌 다른 사람과 혼인을 한 몸이 아닌가. 소설을 안 쓰겠다고 하면 시안의 기준에선 오히려 적반하장이었다. 시안이 혼자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을 때 침묵했던 복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래. 시화 때문이야. 그런데 미련 때문은 아니야.”
복태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숨을 들이켰다.
“지난번 소설에서는 시화를 마음에서 떠나보내는 모습을 썼었어. 하지만 미처 미련을 완전히 거두지는 못했지. 단지 좋아하는 작가의 연심 이야기라면 재미있어 하겠지. 그런데 난 폐하의 후궁이야. 자신의 부인의 연심 이야기라면 얘기는 달라지겠지. 물론 혼인 전 있었던 인연이었고 아직 마음에 미련이 남아 있기도 해. 그래도 어쨌든 그 이후로 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폐하께 추궁당할 만한 객관적인 잘못은 없어. 그런데 그건 내 생각일 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그냥 지어낸 이야기라고 해. 소설이잖아.”
“그냥 애독자라면 그렇게 얘기하면 그만이겠지. 하지만 폐하는…… 광적인 애독자야. 소름 돋을 정도로 소설 속 미세한 요소까지 다 곱씹고 있다고. 내가 태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신발 수집가가 나와 닮았음을 눈치챌 거야…….”
복태는 겉으로는 침착한 모습이었지만 신발 수집가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분노하는 황제의 모습을 상상하며 속으로는 치를 떨고 있었다.
“지나친 기우야. 못 알아챌 수도 있는 거잖아.”
“그래. 하지만 못 알아채 주길 기대하기엔 들켰을 때 시화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 커……. 시화가 어르신께 맞은 거 기억하지?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이었지만 시화가 다 감당해야 했어. 어르신이 그 정도인데 하물며 폐하께서 사실을 알아채신다면 시화는…….”
복태의 말에 시안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복태의 생각일 뿐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만으로 수입원을 포기하기엔 자신의 수입 대부분을 복태의 소설이 책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근심이 공감되지도 않았다.
“……어쨌든 소설 속 이야기일 뿐이잖아. 네 일지도 아니고.”
만약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닥칠 불행과 위험이 얼마나 큰지 시안은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황제가 의심하기 시작하면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복태가 살던 마을을 조사할 것이고 사실이 밝혀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황제의 후궁을 홀렸다는 명분으로는 황제 체면상 시화를 벌하지는 못하겠지만, 없는 죄도 만들어 벌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황실이었다. 황제가 마음먹는다면 얼마든지 죄목을 만들어 시화를 처벌할 수도 있을 일이었다. 황제는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해내는 집착을 보여 왔다. 다시금 황제의 그 성격을 떠오르니 절로 숨이 멎는 듯했다. 자신이 태복이라는 사실을 절대 황제가 알게 해서는 안 되었다.
“어쨌든 이번엔 잠시 쉬자.”
말이 안 통하는 시안에게 다시 통보하며 복태는 자리에서 일어서 뒤돌아 문고리를 잡았다. 시안이 다급하게 따라 일어섰다.
“왜, 이번에는 황제 폐하가 네 감옥이냐? 그래서 그들이 주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보다 또 도망가려 하는 마음인 거야?”
우선 입에서 나온 대로 말을 내뱉었지만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인 것 같았다. 예전 복태와 그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러했듯, 부군인 황제가 주는 보호와 애정 또한 거절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구는 복태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이미 그렇게 생각을 굳힌 시안은 고고한 척 구는 복태의 태도에 심사가 뒤틀렸고, 뒤틀린 심사는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비난하는 듯한 시안의 말과 표정에서 복태는 예전 자신의 방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동안 딱히 부딪힐 일이 없어 잊고 있었던 그 불신의 싹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복태는 등을 돌린 상태 그대로 고개만 돌려 차가운 눈으로 시안에게 말했다.
“내가 태복이라고 말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다만 그전에 귀띔은 해 주었으면 해. 또다시 나와 너 때문에 시화가 다치면 안 되잖아?”
“방금 네가 가져간 건 신발이 아니라 내 결의야. 사람이 나약한 순간이 오면 그 결의는 쉽게 무너지거든. 그래서 결의를 물건에 담아 주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까 봐 이 신에 새겼어. 사람은 나약한 순간이 훨씬 더 많으니까……. 그 순간에 놓쳐 버리면 돌아오지 않는 마음이란 게 있으니까…….”
“뭐라고 하는 거야, 대체. 그냥 한 번 더 만들면 되잖아!”
시안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복태가 답답했다. 뭐 어찌 됐든 신발은 손에 넣었으니 치료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신을 품에 꼭 안고 밖을 나서려고 하는데 잠시 자리를 비웠던 노비가 다시 왔는지 문에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시안은 어떻게든 해 보라는 듯 복태를 노려봤다.
“목이 말라 찾았는데 어딜 갔다 온 거야? 가서 물 좀 가져다줄래?”
“아, 예. 도련님.”
문밖에 비치던 그림자가 사라지자 시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것은 나중에 전해져 알게 된 사실이지만, 황궁의 어느 나이 먹은 상궁이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내어 그 신을 사 갔다고 한다.
6개월이란 시간이 지나고 복태는 어느덧 성년이 되었다. 복태는 아직도 귀호에게 잘못을 빌지 않은 채 지내오고 있었다. 그동안 계속 방 안에 갇혀 지내지는 않았지만 대문 밖을 나서지는 못했다. 귀호는 철저하여, 집 담을 높이 올려 더 이상 복태가 월담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노비들에게도 복태가 밖을 나서지 못하게 감시하라고 명을 해 둔 상태였다. 복태에게는 이 모든 난관을 뚫을 만한 의지도 의욕도 없었다.
삼엄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집 안에만 있는 복태의 귀에도 들려올 정도로 큰 소식이 퍼졌다. 공황장애를 심각하게 앓고 있던 머저리 셋째 황자가 황태자와 황태제를 죽이고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으며, 얼마 안 가 황제가 죽자 그가 다음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이었다. 위나라 곳곳이 이 소식으로 들썩였고 새 황제는 각 가문에 칙서를 내렸다. 그 칙서에는 그가 지명한 각 가주의 자식을 자신의 후궁으로 들여보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양자, 양녀를 들여 시집을 보내는 것은 아니 되며, 혹 딸이 없다면 아들이라도 보내라며 철저함을 보였다.
황제의 칙서는 군기대신의 집에도 내려왔다.
“두 형제를 죽이고 황좌에 올랐다더니, 이 말도 안 되는 억지는 뭐랍니까? 특히 우리 가문을 꼬집어 기대하고 있겠다는 이 어투는 뭐란 말입니까. 승하하신 황태자 마마와 가까이했다고 지금 경계하고 있는 거 맞지요?”
“그런 것 같소.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대신에게 이 칙서가 내려진 걸로 봐서 대신들을 경계하고 황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것이겠지.”
“용의는 안 됩니다. 우리 가문의 장남 아닙니까?”
“그럼…….”
“둘째 용와도 안 됩니다. 지금 혼담 얘기가 오가는 처자가 있습니다. 서로 연모하고 있는 아이들을 갈라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어떤 잔악한 성품일지 모르는 황제에게 시집을 보내다니요. 그리고 저는 내 아들들을 꼴사납게 시집 못 보냅니다. 동성애자도 아닌 애들을 어찌! 절대 안 됩니다.”
“복태를 보내자는 소리요?”
되묻는 귀호의 말에 부인은 싫어할 줄 알았다는 듯 비아냥거리며 답했다.
“어르신께서 평생 싸고돌 그놈을 보내겠다 말할 리 없겠지요! 하지만 이번엔 소첩, 절대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럽시다.”
부인은 귀호가 뭐라고 해도 절대 양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복태를 보내겠다고 말하다니, 순간 귀를 의심했다.
“웬일이십니까, 어르신께서?”
요즘 자신을 대하는 복태의 반항적인 태도와 황소고집을 몸소 느끼며 귀호는 아버지로서 언제까지 복태를 통제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게다가 순리대로라면 자신이 복태보다 먼저 세상을 뜨게 될 터였다. 그렇게 자신이 없는 세상을 복태 혼자 남아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가엾고 안쓰러워 편히 눈감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복태가 황제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면 그나마 보호해 주는 사람이 생기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서자로 태어나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외로움을 겪으며 자라 온 아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스스로 제 신분을 내려놓고 너저분한 평민들과 동급이 되어 살아가겠다는 모습을 보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황제와 혼인을 하게 되면 아무리 미천한 몸이라도 신분 상승을 하게 되는 게 이 나라 법도이다. 하물며 복태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복태는 선택지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평민을 선택하게 된 것일 터. 이 혼인으로 복태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선택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복태의 입장에서도 항상 갈망해 왔던 것이니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부인은 현 황제 자황의 성품을 잔악한 자로 생각하고 있지만 황제가 되기 위한 야심이 강한 자일뿐, 황실에서 본 예전 자황의 모습은 악한 기운을 품은 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선하고 인정이 많은 편이었다. 물론 연기였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본인의 사후, 유일하게 복태를 지켜 줄 사람이 자황이 된다면 현재 자신이 걱정하고 고민하는 상황이 모두 타개될 것이 분명했다.
“모두에게 좋은 방안으로 결정한 것뿐이오.”
부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다가 자기 자식이 보내지는 것이 아니니 우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헌데 황실에서 너무 모자란 놈을 보냈다고 트집 잡는 건 또 아닐는지…….”
“내 알아서 처리하리다.”
귀호는 복태의 방으로 향했다. 서먹하여 차마 문을 열고 들어가지는 못하고 문 앞에 서서 복태를 불렀다.
“복태야.”
아비인 귀호의 부름에도 역시나 복태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 예상한 반응이었다. 귀호는 씁쓸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대답하기 싫으면 그냥 듣거라. 후궁 간택을 위해 각 대신에게 자녀를 올리라는 칙서가 내려왔다. 하여 방금 네 이름을 담아 사주단자를 올린 참이다.”
이건 말도 안 됐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자신을 낳아 준 부모라지만 자식 인생을 놓고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언제나 습관처럼 미소 뒤로 감춰 왔었던 복태는 얼굴에 감정을 잔뜩 드러낸 채 방문을 열고 나왔다.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이미 결정 난 사항이니 그런 건방진 말투로 되물어도 바뀌는 것은 없다.”
“어르신!”
“얼마 후 황궁에서 가마가 올 것이다. 치장부터 기본 예의까지 익히고 순종하도록 하여라. 만약 한 치라도 어긋나려 하여 나나 황제의 신경을 거스르게 한다면 장담하건대 내 그년을 잡아다 기필코 죽여 버릴 것이다.”
복태의 눈에 공포와 경멸이 서리는 것이 보였다. 귀호는 마음이 아팠지만 이렇게 모질게 하지 않으면 결코 복태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었다.
“아비가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지금은 네가 어려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나 훗날 이 아비를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게다.”
귀호는 복태에게 통보하듯 말을 던져 놓고 냉정하게 뒤돌아 걸어갔다.
“어르신!!!”
복태가 절규하며 외쳤지만 귀호는 매정하게 멀어져 갔다. 복태는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목에서부터 무언가 뜨거운 것이 역류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억울하고 원통하여 눈물이 절로 났다. 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복태는 끅끅거리며 울음을 참아 보았지만 흐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주먹을 너무 꽉 쥐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내디뎌야 한다. 이대로 삶의 무게에 매장되지 않으려면. 지금 이 순간.’
6개월 전 자신이 시안에게 준 신에 새겼던 글귀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시안에게 신을 주었던 것을 후회했다. 그날 시안에게 신만 쥐여 주지 말고 자신도 같이 떠났어야 했다. 내가 정한 미래를 향해 앞을 내디뎠어야 했다. 이 집의 담보다 훨씬 더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황실이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될 줄 알았더라면.
복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혼인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황궁에서 가마가 오기 전날까지 안방마님에게 황실의 예법과 예절을 부지런히 익혔다. 태어나 평생 안방마님과 이렇게 오래 같이 있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복태를 싫어하는 기색은 역력했으나 자신의 두 아들이 갈 수도 있었던 후궁의 자리에 대신 들어가 주는 복태였기에 군말 없이 입궁 준비를 도와주었다. 며칠 뒤 황궁에서 가마와 혼례복을 보내왔고 복태는 의미 없는 몸짓으로 혼례복을 입었다. 행여 도망갈까 봐 곁을 지키고 있던 귀호는 복태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데려가 가마에 태웠고,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 안에 있는 대연회장. 상석에는 황제 자황이 앉아 있었고 아래에는 양옆으로 나란히 대신들과 후궁이 될 그 자녀들이 서 있었다. 자황의 앞쪽에 서 있던 한 환관이 교지 속에 있는 대신과 자녀의 이름을 차례차례 불렀고, 이름이 불린 자들은 자황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예를 올리며 얼굴을 마주했다. 자황은 황제라면 항상 근엄하게만 있을 것 같다는 편견을 깨고 예를 올리는 후궁들에게 친절한 인사로 화답해 주었다. 하지만 마주한 사람을 훑어보는 그 눈빛만큼은 날카로웠다.
“군기대신 위귀호의 자제, 위복태.”
“풉!”
복태와 귀호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자황 앞에 걸어 나갔다. 하지만 자황은 환관의 입에서 나온 ‘복태’라는 이름에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조용한 분위기여서 그의 코웃음 소리는 모두에게 들렸고 엄숙했던 분위기가 사그라지는 것 같자 너도나도 조금씩 웃음 지었다.
“흐흠. 복태라. 큭, 참으로 정감 가고 촌스러운 이름 같소, 군기대신. 아들 이름에 신경 좀 쓰지 그러셨소?”
복태는 자황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귀호는 단련되었다는 듯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이 해 오던 대로 차분히 답하였다.
“큰 복을 받으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정색하는 귀호 때문에 웃고 있는 자신이 우스운 사람이 된 것 같아 자황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눌렀다. 끅끅대는 소리가 더 안쓰럽게 들렸지만 감히 누구 하나 지적하지 못했다.
“그래. 이름이야 뭐, 뜻만 좋으면 되는 것 아니겠소?”
자황은 복태의 얼굴을 확인하고자 했으나 군기대신과 나란히 서 있지 않아 가려져 안 보였다.
“우리 복태…… 큭, 얼굴이…… 안 풉, 안 보이오.”
중간중간 웃음을 터뜨리며 복태를 찾는 자황의 말과 모습이 사람들로 하여금 웃음 짓게 했다. 대연회장 안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복태의 걸음걸이를 본 이후 뚝 그치게 되었다. 아까는 엄숙한 분위기에 부를 때를 제외하곤 다들 고개를 들지 못해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들 얼굴을 들고 복태를 주목하고 있었기에, 복태가 다리를 절며 걷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사람들은 황제 앞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수군거렸고 연회장이 온통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하지만 정작 복태 본인은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황제와 마주했다.
“군기대신 위귀호의 아들 위복태. 폐하께 처음 예를 갖춥니다.”
“아, 최근에 무슨 변고라도 있었소?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데?”
“날 때부터 이러하였습니다.”
자황은 복태의 대답에 귀호에게 물었다. 그 모습이 아까와는 달리 사뭇 진지했다.
“남의 장애를 가지고 비난할 생각은 아니지만 아들이 셋이라 들었소. 이 아이를 내게 보내는 이유를 듣고 싶소만?”
“의중을 숨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성격이라 솔직하게 고하겠습니다. 보다시피…….”
“짐도! 짐도 그러하오. 의외로 우리 서로 잘 통하는 것 같소!”
귀호의 대답을 잘라먹으며 자황이 기쁜 듯 동감의 말을 했다. 귀호는 자황의 말이 끝나자 다시 차분히 답을 이어했다.
“보다시피 이 아이는 제게 조금 더 아픈 손가락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평생 제가 보살피고 싶으나 부모가 먼저 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 아니겠습니까? 다른 자식 놈들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지만 이 아이는 아닙니다. 그저 좋은 남편을 만나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면 소신, 만족하옵니다. 폐하께서 그 좋은 남편이 되어 주시면 마음이 놓일 것 같아 이 아이의 이름으로 사주단자를 올렸습니다.”
“길게 말했지만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지금 짐을 떠맡기려 하는 것이 아니가?”
“맞습니다.”
“하하하. 너무 솔직한 것 아니오?”
귀호의 대답에 자황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며 싸늘하게 말했다.
“짐은 그대가 지금보다 더 솔직해지길 바라오.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였지만 그 속의 진짜 의중을 말해 보시오.”
귀호는 진심을 전했지만 자황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폐하께서 이렇듯 파격적인 제안을 하신 것은 훗날 황권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대신들의 힘을 묶어 두기 위함이 아니십니까? 복태는 제 아들 중 제가 가장 아끼는 아이입니다. 이 아이를 조금만 건드려도 제 심기가 많이 불편해질 것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폐하께는 좋은 인질이 될 거라는 뜻입니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자황의 심산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귀호처럼 대놓고 말하는 자는 없었다. 모두가 귀호의 자극적인 말에 또다시 웅성거리며 속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아무리 폐하가 솔직하게 말하라 했지만 어휘 선택이 저 모양이어서야. 하지만 자황은 귀호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다.
“……그대가 짐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오?”
“복태를 폐하의 울타리 안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해 주시면 됩니다.”
“짐이 그 정도도 못 해 주겠소?”
자황은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복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복태의 한쪽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대의 좋은 남편이 되어 주리다.”
싱긋 웃는 자황을 바라보며 복태는 어리둥절했다. 위엄이라고는 없어 보이던 웃음기 많은 황제가 갑자기 정색하며 귀호와 서로 으르렁대더니 다시금 다정하게 굴고 있었다. 자황의 마지막 말은 전혀 달갑지 않았지만.
처음 대면하던 그 날, 자황은 마치 복태를 많이 아껴 줄 것처럼 살갑게 굴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복태를 잊은 채 바쁜 나날을 보냈다. 너무 많은 후궁을 한꺼번에 궁에 들여 그런 것도 있지만 정사(政事)에 의욕이 넘치는 성격에 후궁들을 찾는 것보다는 정사를 돌봄에 더 매진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간간이 생각이 났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그의 기억 속에서 복태는 완전히 지워져 버리게 되었다.
복태의 처소 입구에 시안이 들어섰다. 복태의 신을 가져간 그날 밤 이후 그들은 친구 사이가 아니게 됐지만 둘 사이에는 소설이 남아 있었다. 시안에게는 복태의 소설이 필요했고 황궁 밖으로 자유롭게 나설 수 없는 복태에게는 소설을 대신 팔아 줄 시안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둘은 인연을 끊지 못하고 지금까지 업무적인 관계만 지속해 왔다.
시안은 손에 든 출입 허가증(후궁이 내준 허가증이 있으면 후궁 전각까지 출입이 가능)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 처소 앞마당을 지나 응접실로 걸어갔다. 응접실로 가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다른 후궁 처소와 비교하자면 복태의 처소는 소박한 처소였지만 궁궐 밖 평민들의 집에 비하면 대궐 같은 곳이었다(말 그대로 대궐이지만). 앞마당 가 쪽에는 복태가 키우는 찻잎으로 정원이 가꾸어져 있었다. 이렇게 크고 넓은 공간에서 자신을 위해 시중을 드는 궁녀만 여러 명에, 한가로이 여느 댁 여인네들처럼 풀이나 키우고 있는 꼴이라니.
“여전히 아버지 덕에 호의호식하는구먼.”
시안의 불평의 말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황제에게 시집가야 함을 싫어했던 걸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시안이 보기에 마마라 불리며 떠받들어지고 있는 복태는 여전히 복에 겨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간 시안은 이미 복태가 있는 것을 보고 간단히 인사를 건넸다. 복태는 시안이 자리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이번엔 잠정적으로 연재를 쉬었으면 해.”
다음 원고를 받으러 온 시안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말이었다. 복태의 소설이 자신의 가장 큰 수입원인데 연재를 쉬겠다니! 시안의 얼굴이 굳어지며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황제 폐하께서 작가 태복을 찾고 계셔. 네가 소설을 납품하러 가면 폐하의 명을 받은 자가 너를 찾아 묻겠지. 나는 네가 내 존재를 밝히지 않았으면 해.”
“왜? 황제 폐하가 네 작품이 좋다는데, 잘 보일 기회 아니야?”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시안은 복태가 하는 말과 행동을 항상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알기로는 복태는 아직 황제와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러 황제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난감해하며 침묵을 지키는 복태를 보며 시안은 의문을 가지다가 문득 시화를 떠올렸다.
“혹시 시화 때문이야? 시화 때문에 폐하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야? 그렇다 한들 굳이 네가 태복이라는 것을 숨길 필요가 있어?”
시화 얘기에 복태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며 시안은 고민했다. 얼마 안 있으면 시화가 시집을 간다. 시화 얘기만 나와도 저렇게 흔들리는데 시집을 가게 됐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면 복태가 어떻게 나올까. 혹여 기분이 상해 앞으로 자신과 거래를 하지 않을지도…… 아니, 큰 상심에 어쩌면 소설을 안 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복태도 시화가 아닌 다른 사람과 혼인을 한 몸이 아닌가. 소설을 안 쓰겠다고 하면 시안의 기준에선 오히려 적반하장이었다. 시안이 혼자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을 때 침묵했던 복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래. 시화 때문이야. 그런데 미련 때문은 아니야.”
복태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숨을 들이켰다.
“지난번 소설에서는 시화를 마음에서 떠나보내는 모습을 썼었어. 하지만 미처 미련을 완전히 거두지는 못했지. 단지 좋아하는 작가의 연심 이야기라면 재미있어 하겠지. 그런데 난 폐하의 후궁이야. 자신의 부인의 연심 이야기라면 얘기는 달라지겠지. 물론 혼인 전 있었던 인연이었고 아직 마음에 미련이 남아 있기도 해. 그래도 어쨌든 그 이후로 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폐하께 추궁당할 만한 객관적인 잘못은 없어. 그런데 그건 내 생각일 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그냥 지어낸 이야기라고 해. 소설이잖아.”
“그냥 애독자라면 그렇게 얘기하면 그만이겠지. 하지만 폐하는…… 광적인 애독자야. 소름 돋을 정도로 소설 속 미세한 요소까지 다 곱씹고 있다고. 내가 태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신발 수집가가 나와 닮았음을 눈치챌 거야…….”
복태는 겉으로는 침착한 모습이었지만 신발 수집가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분노하는 황제의 모습을 상상하며 속으로는 치를 떨고 있었다.
“지나친 기우야. 못 알아챌 수도 있는 거잖아.”
“그래. 하지만 못 알아채 주길 기대하기엔 들켰을 때 시화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 커……. 시화가 어르신께 맞은 거 기억하지?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이었지만 시화가 다 감당해야 했어. 어르신이 그 정도인데 하물며 폐하께서 사실을 알아채신다면 시화는…….”
복태의 말에 시안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복태의 생각일 뿐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만으로 수입원을 포기하기엔 자신의 수입 대부분을 복태의 소설이 책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근심이 공감되지도 않았다.
“……어쨌든 소설 속 이야기일 뿐이잖아. 네 일지도 아니고.”
만약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닥칠 불행과 위험이 얼마나 큰지 시안은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황제가 의심하기 시작하면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복태가 살던 마을을 조사할 것이고 사실이 밝혀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황제의 후궁을 홀렸다는 명분으로는 황제 체면상 시화를 벌하지는 못하겠지만, 없는 죄도 만들어 벌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황실이었다. 황제가 마음먹는다면 얼마든지 죄목을 만들어 시화를 처벌할 수도 있을 일이었다. 황제는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해내는 집착을 보여 왔다. 다시금 황제의 그 성격을 떠오르니 절로 숨이 멎는 듯했다. 자신이 태복이라는 사실을 절대 황제가 알게 해서는 안 되었다.
“어쨌든 이번엔 잠시 쉬자.”
말이 안 통하는 시안에게 다시 통보하며 복태는 자리에서 일어서 뒤돌아 문고리를 잡았다. 시안이 다급하게 따라 일어섰다.
“왜, 이번에는 황제 폐하가 네 감옥이냐? 그래서 그들이 주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보다 또 도망가려 하는 마음인 거야?”
우선 입에서 나온 대로 말을 내뱉었지만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인 것 같았다. 예전 복태와 그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러했듯, 부군인 황제가 주는 보호와 애정 또한 거절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구는 복태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이미 그렇게 생각을 굳힌 시안은 고고한 척 구는 복태의 태도에 심사가 뒤틀렸고, 뒤틀린 심사는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비난하는 듯한 시안의 말과 표정에서 복태는 예전 자신의 방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동안 딱히 부딪힐 일이 없어 잊고 있었던 그 불신의 싹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복태는 등을 돌린 상태 그대로 고개만 돌려 차가운 눈으로 시안에게 말했다.
“내가 태복이라고 말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다만 그전에 귀띔은 해 주었으면 해. 또다시 나와 너 때문에 시화가 다치면 안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