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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황실 정기 연회가 돌아왔다. 태복을 찾으라고 명한 지 오래인데 아직까지 자황은 태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일이 걸리자 자황은 초조함에 괜한 짜증이 일었고, 사람을 더 풀어 반드시 태복을 찾아내라 엄명을 내린 지도 어느덧 닷새가 지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자황은 정사를 돌볼 때도, 황실 정기 연회에서도 태복에 관한 생각만 하며 조금씩 그 집착을 보이고 있었다. 자황은 연회장에 들어서 자리에 앉자마자 태복에 관해 한탄하듯 말을 내뱉었다.
“대체 다음 소설은 언제 나오는 것이고, 또 태복 선생은 왜 찾을 수 없단 말인가.”
지난 며칠간 자황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생각만 맴돌고 있었다. 혹시 태복이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아 일부러 피해 다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태복에게 무슨 변고가 생겨 더 이상 소설을 집필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어느 쪽으로 생각을 해도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퇴고 중인 것이 아닐까요?”
한 후궁이 자황의 말에 되물었지만 자황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갑자기 무슨 변고를 당한 것은 아니겠지?”
자황의 혼잣말을 들은 근처의 다른 후궁이 되물었다.
“변고를 당했다고 합니까?”
안 그래도 초조한데 멍청한 질문을 하는 후궁이 꼴 보기 싫어졌다. 자황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자황의 눈치를 보던 또 다른 후궁이 얄밉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거겠지요. 변고는 아닐 겁니다, 폐하.”
“태복 선생은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는 귀한 작가이오.”
자황은 소설을 집필하지 못할 이유가 될 수 있는 수백 가지의 경우의 수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점점 낙담했다. 눈에 띄게 저렇게 우울해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맨 끝에 앉아 있던 복태는 양심에 걸려 차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저 모습을 더 보고 있다간 체할 것 같아 애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늘 화려하고 떠들썩했던 연회였는데 자황으로 인해 분위기가 많이 처져 있었다. 후궁들은 분위기를 여느 때처럼 돌려놓기 위해 태복에 대한 얘기를 계속 시도했지만 이야기가 나오면 나올수록 자황은 우울해했다. 차라리 태복이 아닌 다른 얘기를 하든지. 평소에는 안 그렇더니만 오늘따라 멍청한 말들만 하는 후궁들이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러다 자황은 맨 끝자락에 앉아 잘 보이지도 않는 복태를 발견했다. 모두들 자신 쪽으로 몸을 돌려 서로 말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데 혼자만 먼 산 바라보듯 멍하니 차를 홀짝거리는 모습이라니. 자황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자황은 복태를 부르려 했지만 마땅히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랐다.
‘이름이 뭐였지……?’
자황은 구석에 서 있던 환관을 불러 귓속말로 물었다.
“저기 맨 끝에 하얀 옷을 입고 있는 후궁이 누구냐?”
환관은 자황의 말에 고개를 들어 복태의 얼굴을 확인했다.
“위 재인(才人)이옵니다, 폐하.”
대답을 마친 환관은 다시 구석으로 물러났고, 자황은 복태에게 물었다.
“위 재인은 대답해 보시오. 태복 선생에 대한 그대의 생각이 궁금하오.”
지난 3년간 한 번도 거론되어 본 적이 없던 복태는 갑자기 자신에게 질문이 돌아오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들고 있던 찻잔의 차는 고요했다. 복태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고 무미건조한 표정과 말투로 자황에게 답했다.
“변고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자황은 복태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타까움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어 보이는 감정 없는 투라니. 태복의 애독자로서 복태의 태도가 자황의 신경을 묘하게 긁고 있었다. 저자는 태복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태복에 대해 의견을 나눴던 적이 없는 것 같았다(라기보단 다른 말도 나눈 적이 없지만).
“태복 선생의 신변 말고, 평소 태복 선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오?”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 답답해. 자황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겼다.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라…… 그대뿐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 그를 개인적으로 모르오. 짐의 말은 그러니까 그의 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말이오.”
복태는 최대한 피해 보려 조금씩 어긋난 대답을 해 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첫째, 좋다고 대답한다. 이럴 경우 자신이 태복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에게는 무난한 대답일지 모르겠으나, 복태는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 같아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둘째, 자신의 작품에 대한 부족한 점을 평소 느꼈던 대로 솔직하게 말한다. 이럴 경우에는 다들 태복에 대한 칭찬만 해 댔는데 자신만 단점을 꼬집어 얘기한다면 오히려 인상에 남을 수 있으므로 기각.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대답을 서둘러 종용하는 것 같은 모두의 시선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 복태는 그냥 처음을 선택하기로 했다.
“……좋습니다.”
자황은 많은 사람과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 그들이 전하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진상을 파악하는 것이 특기였다. 다른 이가 봤을 땐 표정 변화가 없고 차분해 보였지만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이나 뜸을 들이거나 하는 복태의 모습을 미루어 봤을 때, 복태는 지금 거짓을 고하고 있었다. 자황은 솔직한 것을 좋아했다.
“그대의 솔직한 생각을 듣고 싶소만?”
“…….”
‘그때나 지금이나 솔직한 거 참 좋아하시네.’
마음속 복태의 표정이 비틀어졌다.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자황의 눈빛에 복태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보통 후궁들은 내명부 최고인 황후의 허가 하에 주기적으로 궁 밖 출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황후 자리가 비어 있는 탓에, 태후가 이를 허락해 주곤 했다. 보통은 그날 처가에 들러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하지만 복태는 집으로 가 봤자 하나도 편하지 않았기에 항상 주막이나 술집을 찾아다니며 소설 소재를 찾고는 했었다. 주막이나 술집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넘쳐 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이야기를 듣는 걸로 토대를 삼아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살을 덧붙여 소설을 썼다. 하지만 우선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본 적도 없고 될 수도 없었기에 실제처럼 자세히 알 수는 없었고, 그로 인해 각 일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묘사와 상황 설명에 있어 표현이 얕다고 생각해 왔었다.
“소설이…… 얕습니다.”
평소 생각했던 것을 길게 말을 해야 했지만 복태는 귀찮았다. 그래서 중간 설명은 다 잘라먹고 결과만 얘기했다. 당연히 사람들은 복태의 대답에 기함했다. 그것은 자황도 마찬가지였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신이 칭찬했던 태복에 대한 생각을 말해 보라 했는데 얕다고? 솔직하게 말해 보라 명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솔직해도 너무 솔직한 거 아닌가. 괜스레 자황은 시비조로 복태의 말을 복창했다.
“얕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하아…… 솔직하게 말해 보라며!’
“당대 최고의 작가 류혼, 진사에 비하면 얕다는 말입니다. 작가로서 아직 연륜이 충분히 차지 않은 태복이 그분들과 동급으로 거론되는 건, 그저 황제 폐하께서 총애하는 작가…… 이기…….”
연회장 안을 채우던 웅성거림이 복태가 말을 하면 할수록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험악해진 분위기를 파악한 복태는 말을 하던 중간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자황은 복태의 말을 들으며 속이 답답하였지만 애써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차분히 다스렸다.
“뭐, 모두가 생각이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니 취향이 다르다 하여 그대를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겠지. 되었소.”
황제에게 이런 말은 망극하지만, 토라진 듯 입이 삐죽거리는 모양이 애처로웠다. 태복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거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자황은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복태를 노려보는 자황의 눈빛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복태와의 대화가 단절되자 기회를 노리던 후궁들이 또다시 들개 떼처럼 서로 입을 열며 태복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미 기분이 많이 상한 자황은 그런 후궁들이 피곤해졌다. 의례적으로는 이 연회를 마친 후 후궁 한 명을 선택하여 그날 밤 부부의 정을 쌓아야 하지만, 눈치 없이 떠드는 후궁 중 어느 누구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자리를 어떻게 빠져나갈까 고민하던 자황은 다시금 혼자 조용한 복태에게 눈길이 갔다.
태복에 대해 평가를 절하한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다른 후궁들처럼 말이 많지 않아 모든 것이 귀찮은 지금 딱 안성맞춤이었다. 선택당하면 당연히 자신과의 잠자리를 기대하겠지만 잠자리를 해 주지 않을 것이다. 다른 후궁들 같으면 섭섭해하겠지만 복태에게는 그리 대해도 전혀 미안함이 느껴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밤이 깊었소. 그만 연회를 파하겠소.”
자황의 말에 후궁들이 모두 기대하는 눈빛으로 자황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이 노골적인 시선들이 아무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자황은 얼른 시선을 복태에게 고정했다.
“그대.”
복태는 여전히 딴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가 또 어느 후궁을 선택했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자황은 타인의 무관심에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복태가 자신의 말을 못 들은 척하자 심기가 불편해졌다. 하지만 넓은 자애를 가지고 다시 생각해 보니, ‘그대’라고만 불러서 자신을 부르는 것을 몰라 그럴 수 있다고 여겨졌고, 이번에는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
‘……음. 아…… 이름이 다시 생각나지 않아.’
“하얀 옷.”
자황의 말에 모두가 자신의 옷을 바라봤지만 하얀 옷이 아니자 다들 실망하였다. 복태는 모두가 자신의 옷을 바라볼 때도 두리번거리지 않고 딴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은 하얀 옷을 입고는 있었지만 지난 3년간 한 번도 불린 적이 없었다. 설마 자신을 부른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황은 이번에도 모르는 체하는 복태를 보자 복장이 터지는 것 같았다. 앓느니 죽지. 자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복태에게 다가갔고, 복태의 손목을 휘어잡았다. 갑자기 손이 들리자 복태는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아……!”
자황은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시오. 오늘 밤은 그대와 함께 하겠소.”
복태의 사고 회로가 잠시 정지했다.
‘……응? ……아아아아아아아! 대체 왜!! 왜! 왜! 왜 갑자기, 뭐야 이게!!’
마음속으로 복태가 절규했지만 모두가 본 복태는 또 다른 자신을 철저하게 마음속에 가둔 복태였다. 황제가 친히 선택을 해 주었는데도 아무 변화가 없는 복태를 바라보며 자황은 답답함과 민망함이 밀려왔다.
“이럴 땐 그냥 ‘황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대답하면 되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모두의 경악한 시선을 뒤로한 채 자황은 복태를 이끌고 연회장을 나섰다. 연회장을 나선 후 복태의 처소로 향하고 있는 자황과 복태 뒤로 여러 명의 환관이 뒤를 따랐다. 복태는 또다시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모두가 자신의 걸음걸이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합궁할 생각인가? 왜? 3년간 그냥 놔뒀다가 갑자기 왜? 도대체 왜? 설마 아까 태복의 소설을 비판했다고 나에게 설파하려고? 내가 쓴 소설 내가 비판하겠다는데 왜 잔소리를 들어야 하냐고……. 아, 지나치게 열정적인 독자는 정말…… 민폐다. 설마. 진짜? 그런 이유로? 설마! 갑자기 날 부른 그럴듯한 다른 이유라면 뭐가 있을까?’
복태는 옆에서 걷고 있는 자황을 힐끗 쳐다보았다. 평소와는 달리 만사가 귀찮아 보였다.
‘아…… 다른 후궁들과는 달리 내가 귀찮게 굴지 않을 것 같아서구나!’
시시각각 미묘한 표정 변화를 일으키던(물론 속으로만) 복태는 마음에 드는 결말을 도출해 내자 마음의 평화를 되찾은 듯했다.
한편 자황은 다른 후궁들의 앙알거리는 소리가 지겨워져서 복태를 선택하긴 했는데 막상 같이 걷고 있으니 다리도 절고, 또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말도 없는 복태 때문에 처소까지 가는 길이 너무 적막하여 숨이 막히는 듯했다. 뭔가 말을 건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주는 압박감에 자황은 무슨 말을 꺼낼지 생각했다. 다리를 다쳐 걷는 게 불편해 보이는 복태에게 안부를 물어보자 결정한 자황은 크흠, 목을 가다듬고 말을 걸었다.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데 무슨 변고라도 당한 것이오?”
‘변고는 지금 당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여느 날과 같은 하루였습니다.”
“여느 날과 같은 하루라니, 다리를 다치지 않았소?”
복태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한 채 자황을 바라보았다. 이 대화는 복태가 처음 자황에게 시집오던 날 했던 대화와 같은 내용이었다. 관심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자황의 무심한 기억력에 놀라며 복태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대답은 없고 미소만 짓고 있는 복태를 보며 자황은 다시 물었다.
“어쩌다 다친 것이오?”
복태는 처음 만남처럼 덤덤하게 답하였다.
“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아…….”
자황은 난감해졌다. 어서 화제를 돌려야 했다.
“그런데 아까 그대가 입고 있는 옷의 색으로만 지칭한 것이 실례인지 알면서도,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소. 무심한 나를 용서하시오.”
“위복태라 합니다.”
“풉!”
‘정말 한결같구나.’
그날처럼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는 자황을 보며 복태는 속으로 한숨지었다. 한편 자황은 복태의 이름을 듣고 웃음을 참을 수 없으면서도 3년 전 복태를 처음 만난 날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그때도 자신은 환관이 말한 복태의 이름을 듣고 지금처럼 똑같이 웃었었다.

“흐흠. 복태라. 큭, 참으로 정감 가고 촌스러운 이름 같소, 군기대신. 아들 이름에 신경 좀 쓰지 그러셨소?”
“큰 복을 받으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그래. 이름이야 뭐, 뜻만 좋으면 되는 것 아니겠소?”
“군기대신 위 귀호의 아들 위 복태. 폐하께 처음 예를 갖춥니다.”
“아, 최근에 무슨 변고라도 있었소?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데?”
“날 때부터 이러하였습니다.”

예전에 이미 나눴었던 대화 내용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시 복태에게 장애에 관해 물었으니 그 심정이 어떠할까. 세심하지 못했던 자신의 언사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름 자신은 자상한 성품을 지녔다 생각했는데 이렇듯 무심함의 극치를 보였다니, 복태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군기대신의 자제였지, 그대가.”
“예, 폐하.”
그 뒤로는 복태의 처소로 가는 내내 둘 사이에 다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처소에 도착하자마자 복태는 자신의 침실까지 자황을 안내했다. 자황은 미안함에 슬금슬금 복태의 눈치를 보며 어설픈 동작으로 자리에 앉았다. 복태는 그런 자황 따위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복태는 평소 늦게 자는 습관 때문에 약간 불면증이 있었다. 그래서 앞마당에 있는 정원에서 불면증 치료에 도움이 되는 찻잎을 키우고 직접 다려서 매일 차를 즐겨 마시곤 했었다. 뭔가 귀찮아 보이고 피곤해 보이는 자황의 얼굴을 보며 복태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차를 내 올까요? 좋은 밤을 지내기에 알맞은 차가 있습니다.”
‘좋은 밤? 그딴 차 없어도 내 것은 끄떡없거늘.’
“응? 아, 아니 됐소. 그런데 처소 궁녀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거요?”
복태는 주로 저녁이나 새벽에 글이 더 잘 써지는 편이었다. 자신이 태복이라는 것이 들켜서는 안 되었기에 되도록 처소 궁녀들을 가까이 두지 않으려고 일부러 쫓아내곤 했었다. 매일 쫓아내니 이제는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는 형국이었다. 오늘 황제가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한 채 어딘가에서 언제나 그랬듯 자기네들끼리 희희낙락 놀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 딱히, 저녁엔 시킬 일이 없어서 편히 쉬라 일렀습니다. 저녁에는 혼자 조용히 지내는 게 더 편하기도 하고요.”
“저녁에 시킬 일이 왜 없소? 오늘 같은 연회가 열리는 날엔 모두들 처소를 단장하느라 분주하던데.”
“아, 예상치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위 재인 탓이 아니오. 하긴, 이 처소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짐이 자주 오지 않…… 았…….”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복태를 달래던 자황은 문득 처음 보는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보는 처소, 기억에서 지워졌던 복태, 복태와의 잠자리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왜지? 첫날밤조차 생각이 나질 않아!’
당혹스러운 상황에 머릿속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왜, 첫날밤 생각이…….”
“출타하셨습니다. 국경 순찰 때문에.”
복태는 평소와 같이 덤덤하게 말했지만 자황의 귀에는 원망하는 말투로 들렸다. 시무룩해 보이는(착각이다!) 복태의 눈빛이 자신의 목을 죄어 오는 것 같았다. 자황은 팔을 휘적거리며 변명의 말을 내뱉었다.
“절대! 위 재인이 싫어서가 아니었소. 그때는…… 국경 순찰이 급했던 게 분명하오. 암! 오해하지 마시오.”
“네.”
복태는 왜 저렇게 변명을 하는 걸까 속으로 생각하면서 자황에게 다가갔다. 자황이 편히 잠들 수 있도록 거추장스러운 의관을 내려 주고 버선을 벗겨 주었다. 자황은 복태의 시중을 받으며 마음이 불편하여 목에 뭔가 걸린 듯 갑갑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의관을 내려 주려 손을 올렸을 때 서운함에 복태가 자신의 목을 조르진 않을까, 절로 상상이 되었다.
연회장에서 나온 이후부터 복태에게 미안해할 일만 생기는 것 같았다. 이 미안함을 어떻게 사죄해야 복태의 마음이 풀릴까. 정력에 좋은 차까지 내놓겠다고 하는 걸 보면 오늘 자신과의 밤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연회장에서 막 온 상태로 첫날밤을 보내기에는 복태의 복장이 너무 수수하여 저도 아쉬울 테니 가서 치장이라도 하고 오라고 해야겠다, 생각한 자황은 복태의 손을 물리며 말했다.
“환관에게 시킬 테니 그대는 그대 일을 보시오.”
복태는 반색하며 대답했다.
“아, 그리해도 됩니까? 감사합니다.”
복태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자황은 뿌듯함을 느꼈다.
복태는 침실에서 나오자마자 처소 안에 있는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영락없이 자황과 잠자리를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내 볼일을 보라고 해 주다니, 역시 피곤했었던 모양이었다. 복태는 여분의 침구를 꺼내 자리를 편 후 그대로 잠을 청했다.

***


자황은 환관의 수발을 받아 잠자리 준비를 마치고 침상에 앉아 있었다. 아직 오지 않는 복태를 기다리며 자황은 자기반성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작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솔직히 비평을 했단 이유만으로 속 좁게 군 것부터 첫날밤을 치러 주지도 않은 채 3년간 복태를 잊고 살았다는 점까지, 곱씹어 볼수록 미안한 마음만 커져 갔다. 지금까지 이렇듯 무심한 자신을 생각하며 복태가 얼마나 상심했을까. 연회장에서 복태를 선택한 것은 다른 후궁들과 잠자리를 가지기 귀찮아서였지만 이렇게 된 이상 복태에게 지금까지의 잘못을 한꺼번에 보상을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황은 갑자기 얼굴에 힘을 빡 주고 결의를 다졌다.
‘위 재인을 섭섭하지 않게 해 줄 것이다.’
갑자기 자황의 얼굴이 능글능글해지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려왔다 쉴 틈 없이 움직여 댔다. 자황은 앉은 자리에서 다시 엎드려 팔을 굽혔다 펴며 운동을 시작했다. 이런저런 상상도 하고 운동도 한 자황은 이제는 초조해하며 방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복태가 오지 않았다.
“왜 이리 오래 걸려! 왜 이리 오래 걸리느냔 말이다.”
아직도 치장 중이란 말인가. 기다리다가 목이 빠지겠다. 자황은 답답함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을 열었지만 밖으로는 나가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방문을 닫고 뒤돌아서며 말했다.
“그래……. 간만의 기회인데 잘 보이고 싶겠지. 좀 더 기다려 보자.”
성미 급하게 복태를 찾아갔다가 치장 중인 복태와 마주하면 복태가 얼마나 민망해할까. 곧 오겠지 생각하며 자황은 다시 침상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