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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원정대 7화
02. 다른 행성으로 (3)
다음 날, 시간에 맞춰 인공 태양이 뜨자마자 루이스는 산부인과로 향했다. 데이브가 함께 동행해 주겠다고 했지만 루이스는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어쩐 이유에선지 루이스는 혼자서 산부인과에 방문하길 원했다.
항상 그랬지만 산부인과에 방문하는 것은 떨리고 두렵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임신이 처음인데다 혼자서 낯선 병원을 방문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해 보았다.
타이나 행성에서 오메가 남성이 아이를 갖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산부인과엔 남성도 여럿이 보였다. 미리 전화로 예약을 하고 온 터라 루이스는 소파에서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벽면에 걸려 있는 TV에서 나오는 태교 프로그램을 멍하게 바라보던 루이스는 옆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임산부로 보이는 여성과 그 남편으로 보이는 남성이 함께 앉아서 초음파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다리야? 뭐가 뭔지 모르겠어. 진짜 배 속에 있는 거야? 서툴러 보이는 젊은 부부의 대화를 듣던 루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미소 지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지만 어째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다.
멍하게 그들을 바라보던 루이스는 문득 여성과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여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는 다시금 초음파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제이미 아디게일님? 제이미 아디게일님? 제이미 아디게일님 안 계세요?”
“아, 네!”
“2번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세 번이나 이름을 불리고 나서야 뒤늦게 대답하는 루이스에게 간호사는 은근슬쩍 눈치를 주었다. 루이스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민망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앞으로 쓰게 될 가명이 미처 익숙해지지 못한 모양이었다.
진료실로 들어간 루이스는 긴장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루이스 테일러였을 때의 진료 기록을 전부 지워 버린 탓에 루이스는 새로 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다행히도 태아는 건강했다. 간단히 초음파 검사를 한 여의사는 루이스에게 몇 가지 질문과 주의할 점을 알려 주었다.
“임신 경험이 없으시고, 남성 오메가시니 각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남성 임산부가 여성보다 더 유산율이 높은 건 알고 계시죠?”
“네.”
“되도록이면 무리가 되는 일은 피하시고, 카페인이 든 음식이나 의약품도 상담 후 복용하셔야 합니다. 요즘이야 워낙 태아에 영향이 미치지 않게끔 잘 나온다지만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까요.”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늘어놓으며 의사는 핸드북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초보 임산부들이 주의해야 할 점이나 알아야 하는 것들을 간단하게 정리해 놓은 안내서인 듯싶었다.
“보호자 분은 안 계십니까?”
“네? 아…….”
자신도 모르게 눈에 띄게 안색을 굳혔다. 그런 루이스의 모습에 의사는 대강 어떤 사정이 있는지 알겠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이 시기에는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유산이 가장 많은 때입니다. 환승 센터에 도착할 때까지 되도록이면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의사가 건네준 책자와 초음파 사진을 가방에 챙긴 루이스는 짧게 인사를 하고는 진료실을 나왔다. 검사 비용이 정산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루이스는 조용히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가방을 열었다.
루이스가 꺼낸 건 다름 아닌 초음파 사진이었다. 얼마 전 타이나에서 몰래 산부인과에 들렀을 때 받았던 사진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때는 자신의 아이를 처음 접했었다. 그래서인지 혼란스러움에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었는데 지금은 사뭇 달랐다.
사진을 보니 이제야 실감이 났다. 정말 자신의 배 속에 아이가 있긴 있구나. 눈에 띄게 배가 부르지도 않고 평소와 전혀 다를 게 없어서 실감이 안 났었는데. 막상 실감이 나자 덜컥 겁이 났다. 자신의 배 속에 아이가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솔직히 말해서 사진을 봤을 땐 정말 이게 아이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자세히 뜯어보아도 당최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아직 초반이라서 그렇지, 나중에 출산에 임박하면 더 또렷이 보일 거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이게 아기가 된단 말인가?
새삼 자신의 몸이 너무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
루이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에 테일러 가문은 발칵 뒤집히다 못해 거의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다. 루이스의 부재를 보고받은 미하엘은 자신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절대로 믿지 못한다며 직접 루이스의 아버지인 매튜 다인의 집에 들이닥쳤다.
루이스가 남겼다는 편지를 건네받은 미하엘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루이스가 스스로 떠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가드 한 명, 그리고 첸 말고는 아무도 함께 오지 않았으며 루이스가 직접 타 준 차를 마시자마자 정신을 잃었다는 매튜의 증언에도 미하엘은 요지부동이었다.
테일러 가문이 어떤 가문인가. 현 정부를 유일하게 압박할 수 있는 대귀족이었다. 테일러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황제조차도 갈아 치울 수 있다. 그런 대귀족의 안주인이 우여곡절 없이 평탄하게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분명 납치극일 것이다. 루이스가 자신을 스스로 떠날 리가 없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합리화한 미하엘은 미친 듯이 루이스를 수소문했다. 제국군과 황궁 마법사까지 합세해 온 나라를 뒤지고 뒤졌다. 아마 황후가 납치되어도 이 정도로 인력을 총동원하진 않을 거라고 국민들은 수근거렸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혹시나 타 행성으로 납치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여러 행성들에 수사대까지 보냈다. 우주 공항을 압수 수색해 철저히 조사했다. 거의 수십만 명에 달하는 승객들의 신상 정보를 하나하나 뒤져 가며 찾고 또 찾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루이스가 스스로 떠났다고밖에 볼 수 없는 보고만 접하게 되자 미하엘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이스가 스스로 자신을 떠났다는 것을.
사실 그 또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혼 통보 후 갑작스레 돌변한 태도,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을 최대한 안심시키기 위해 애썼던 모습. 미하엘은 자신을 버린 매정한 연인에게 미치도록 분노와 절망을 느꼈다.
루이스를 납치를 사주한 사람이 다름 아닌 데이브 케이린으로 지목되자 케이린가는 절대로 이 일과 가문은 관계가 없다며 그를 파문시켰다. 가문에서 범죄를 저지른 자를 파문한다면 더 이상 가문은 죄가 없다. 파문은 그런 것이었다. 데이브를 파문시킴으로써 케이린가는 모든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고작 파문 하나 가지고 케이린을 믿을 미하엘이 아니었다. 데이브를 파문시킨 케이린가는 더 이상 수색 대상이 아니었기에 대놓고 손을 댈 수는 없었다. 해서 마하엘은 은밀히 케이린을 캐냈다.
혹여나 케이린에서 데이브와의 접촉은 없었는지, 이 일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진 않는지. 표면적으로 루이스가 스스로 떠났다고 입장 표명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미하엘은 일단 모든 화살을 데이브에게 겨눴다.
때문에 루이스의 편지나 매튜와 가드의 증언 또한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했다. 루이스는 철저히 ‘납치당한 공작 부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번 일 때문에 케이린가가 잃은 신용도는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테일러가와의 우호적인 관계가 깨지고, 주가가 폭락하고 기업 매출이 뚝 떨어졌음에도 잔나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바라본 것은 먼 미래였으니까.
지금 당장 케이린이 폭삭 망한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설사 그런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첸이 테일러가의 가주가 되기만 한다면 케이린은 다시 우뚝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주선을 타고 행성을 빠져나간 게 분명하다면, 여기, 여기, 여기. 이 세 곳 환승 센터를 반드시 거쳐 갔을 겁니다. 지금 이곳에서 이 세 환승 센터로 향하고 있는 함대는 총 스물다섯 대이며, 총 승객 수는 수백만 명에 달합니다. 게다가, 타 행성의 승객 수까지 합하면 최소 몇십억은 넘을 겁니다.”
카일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설명했다. 총 승객수가 수십만 명이라는 말에 미하엘은 눈을 질끈 감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와 보좌관을 더욱 긴장시킨 미하엘이 한숨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계속해 봐.”
“잡으려면 반드시 이 세 곳 환승 센터에서 잡으셔야 합니다. 이 세 곳은 항로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환승 센터입니다. 우리 타이나 행성을 포함한, 은하계를 잇는 모든 항로가 이곳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찾아내지 못한다면, 아마 평생 그림자도 못 볼 확률이 큽니다. 이 세 환승 센터와 이어져 있는 항로가 1만 개가 넘습니다. 어떤 웜홀을 거쳐 갔는지, 어떤 행성에 도착했는지 찾아낼 확률이 거의 제로라고 보시면 됩니다.”
미치겠군.
미하엘이 다시금 고개를 꺾으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가는 느낌에 점점 눈동자가 빛을 잃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하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그래, 카일의 말대로 우주는 너무나도 넓다. 그리고 그 넓은 우주는 너무나 많은 항로로 연결되어 있다. 사람 한 명의 머리카락보다 많은, 얽히고설킨 그 길들을 어떻게, 무슨 수로 다 찾아다닌단 말인가.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반지 찾기나 다름없었다.
“승객 수가 몇천 만이든, 몇 억이든 상관없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
“일단 환승 센터에 위치한 연합군의 허가를 받아 놓았습니다. 미리 군 함선을 투입해서, 관광선들이 도착하는 대로 우리 타이나 인들 부터 조사를 실시할 겁니다. 하지만 그도 아마 쉽진 않을 겁니다. 아마 외모와 신상 정보를 조작해서 탑승했을 확률이 큽니다.”
“그렇겠지. 데이브 그 새끼라면.”
“저…… 각하.”
데이브가 우물쭈물 말끝을 흐리자, 미하엘이 힐끗 시선을 돌렸다.
사실 카일은 불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말이야 쉽지. 어떻게 그 많은 승객들을 일일이 조사해서 공작 부인을 찾아낸단 말인가. 사람 두 명 찾겠다고 거의 몇 만에 가까운 병력을 투입하는 것부터가 엄청난 일이었다. 아마 황족이 납치되어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만약에 잡지 못하고 놓친다면? 정말 상상하기도 싫었다.
“만약, 환승 센터에서 부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못한다면?”
“……예에.”
카일의 물음에 미하엘이 생긋 웃었다. 잡지 못한다면?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당연히 찾아내야지. 지나가는 개미 새끼 한 마리까지 확인하는 수가 있다 하더라도 잡아내야지.
미하엘에게 ‘만약’이란 없었다. 그저 ‘잡아내고 만다’라는 생각만 존재할 뿐이다.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럼 백 년이고 이백 년이고 찾아낼 것이다. 온 우주를 다 뒤져서라도, 반드시. 자신의 숨이 끊기는 그때까지.
“그딴 걱정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목이 날아가지 않을까, 그거나 더 걱정해.”
그러니까, 놓치면 모가지가 날아간다는 뜻이다.
“타이나 인은 DNA 채취 단계까지 투입해.”
“D, DNA 채취요……?”
“그래, 타 성인은 법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자성인은 가능하지. 한 명도 빠짐없이, 체취해.”
“알겠습니다.”
……마누라 잡겠다고 자국민들 DNA까지 체취하는 집요한 놈.
카일은 머릿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런 새끼 밑에서 일하는 자신이 불쌍하지. 공작 부인은 어쩌다 저런 미저리한테 걸려 가지고…….
카일은 수수한 인상이 매력적이었던 공작 부인 루이스 테일러의 모습을 떠올렸다. 평민 출신답게 아랫사람들에게도 예의를 갖추고 존중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었는데. 하지만 그를 볼 때마다 가문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가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의 남편인 공작은 그런 생각은 꿈에도 못 하는 것 같았지만. 공작 부인이라는 자리는 얼핏 보기엔 아주 명예롭고 훌륭한 자리로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엄연히 남성인 그에겐 족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차를 마시거나 그림을 그리고 여행을 다니고, 쇼핑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귀부인들의 삶을 평범한 남자가 버텨 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걸 이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대공은 절대 알지 못하겠지.
카일은 작게 혀를 차며 다시금 고개를 내저었다.
***
“……뭐라고요?”
“제국군이 환승 센터에 투입되었다. 함선들이 도착하는 대로 승객들을 조사할 예정이라고, 잔나가 연락을 해 왔어.”
“어떻게 된 거죠? 미하엘이 설마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건지 알아낸 건…….”
“그건 아니야. 아마도 우리가 행성을 빠져나간 것 까지만 알아낸 것 같아. 우리가 향하고 있는 환승 센터에 제국군을 투입시킨 건 아마 그곳이 다른 항로와 연결되어 있는 중심부라 그런 걸 거야. 거길 놓치면 아무리 군이라 할지라도 찾아내기가 힘들거든.”
“……그렇군요.”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넋을 놓은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이제 환승 센터까지 도착하는 데에 남은 시간은 일주일 남짓이다. 근 반 년간 함선 내에서 평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에 안심을 했던 것 같다. 갑작스레 환승 센터에 제국군이 투입되어 조사가 시작될 거라는 잔나의 수신에 루이스는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 타이나 행성인은 DNA 채취 단계까지 철저히 조사한다고 해.”
“DNA요?”
“그래.”
데이브의 말에 루이스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DNA라니. 그렇다면 신상 정보를 조작하고 외모를 아무리 바꾼다 한들, 소용이 없는 게 아닌가?
“그럼 어떻게 해요? 조사할 때 DNA를 체취당하면, 전부 들통날 게 틀림없어요.”
“걱정하지 마. 그건 자성인 한정이니까. 타 행성인의 DNA는 마음대로 채취할 수 없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니까.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우리 정보를 타 행성인으로 조작했어. 우리의 DNA를 채취당할 일은 없을 거야.”
“……정말입니까?”
“그래.”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짓는 데이브의 모습에 루이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제 곧 도착할 환승 센터에 제국군이 자신을 잡겠다고 대기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저절로 온몸이 굳는다. 아직 아이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만약 이 상태로 붙잡힌다면 미하엘에게 아이를 빼앗길지도 모른다. 절대로, 절대로 환승 센터에서 붙잡히는 일은 없어야만 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가 붙잡히는 일은 없을 거야.”
“……네.”
굳어진 얼굴로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 걱정이 완연한 모습이었지만 데이브는 애써 모른 척했다. 걱정이 되지 않을 리가 없다. 사실, 자신 또한 긴장이 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이 고비만 무사히 넘기면 된다. 무사히 환승에 성공하고 환승 센터를 벗어나면 제국군에게 붙잡힐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무수히 많은 우주 항로를 하나하나 가 보면서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실 데이브는 첫 번째 환승 센터에서 이런 고비가 생길 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미하엘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77환승 센터를 이용하는 승객 수가 엄청나기 때문에 자세히 조사하진 않을 거야. 한다 하더라도 자성인 한정이겠지. 그러니까…….”
“알아요, 데이브. 걱정하지 않을게요.”
아까부터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데이브에게 루이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데이브는 머쓱한 듯 어깨를 으쓱였고, 루이스는 다시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첫 번째 환승 센터에 도착하기 직전이라니. 헬기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어 루이스는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하루하루가 길기만 했는데 돌이켜 보면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난 건지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푼 배도.
“몸은 좀 어때?”
“괜찮아요. 허리가 조금 아프고 화장실을 자주 가야 해서 좀 귀찮은 것 빼고는, 딱히 힘든 점은 없어요.”
“다행이군.”
“저…… 데이브.”
루이스가 머뭇거리며 자신을 부르자, 데이브는 ‘그래’라고 대답하며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음, 저……’라며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루이스의 모습에 데이브는 눈을 가늘게 떴다. 대충 예상이 간다. 아마 잔나에게서 수신이 도착했다는 것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거겠지. 첸과 미하엘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게 틀림없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 말해 봐. 왜 그래?”
하지만 데이브는 모른 척 되물었다. 이왕이면 루이스가 아니라고 모른 척했던 마음을 돌리지 않길 바라며 말이다. 이미 고향과의 연을 끊고 떠나긴 했지만 사람 감정이라는 게 그리 독하지 못하다. 그게 사랑했던 연인과 자식에겐 더더욱. 연을 끊고 새 삶을 살아가겠노라 다짐하긴 했지만 이리 마음이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닙니다, 됐어요.”
데이브는 머릿속으로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루이스가 마음을 돌리지 않고 끝까지 버텨 내서. 어차피 루이스가 첸과 미하엘에 대해 물었다 하더라도 이미 떠난 인연이니 궁금해하지 말고 미련 갖지 말라 충고하며 말해 주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된다면 분명 루이스는 또다시 상처를 받을 것이다.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루이스 자기 자신에게. 하지만 루이스는 기특하게 참아 냈다. 궁금해 미쳐 할 게 눈에 보일 정도인데, 끝끝내 그걸 외면하고 참아 냈다. 그런 루이스가 데이브는 씁쓸하면서도 기특했다.
환승 센터에 도착한 뒤, 딱 사흘 후에 두 번째 환승 센터행 함선이 탑승 수속을 시작한다. 루미너스호처럼 큰 함선이 아니라 소함선이었기에 탑승 수속은 약 일주일간 시행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흘간 환승 센터 호텔에서 머문 후 갈아탈 함선에 탑승할 예정이었다. 제국군이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일정이 순조롭게 흘러갈 것이라 예상했다.
두 번째 함선의 운항 기간은 약 한 달 남짓. 아이러니하게도 루이스의 출산 예정일도 한 달 반 정도가 남았다. 세 번째 환승 센터의 민간 종합 병원에서 출산할 예정이었고, 아이를 낳자마자 다시금 출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사고가 터졌다.
02. 다른 행성으로 (3)
다음 날, 시간에 맞춰 인공 태양이 뜨자마자 루이스는 산부인과로 향했다. 데이브가 함께 동행해 주겠다고 했지만 루이스는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어쩐 이유에선지 루이스는 혼자서 산부인과에 방문하길 원했다.
항상 그랬지만 산부인과에 방문하는 것은 떨리고 두렵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임신이 처음인데다 혼자서 낯선 병원을 방문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해 보았다.
타이나 행성에서 오메가 남성이 아이를 갖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산부인과엔 남성도 여럿이 보였다. 미리 전화로 예약을 하고 온 터라 루이스는 소파에서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벽면에 걸려 있는 TV에서 나오는 태교 프로그램을 멍하게 바라보던 루이스는 옆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임산부로 보이는 여성과 그 남편으로 보이는 남성이 함께 앉아서 초음파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다리야? 뭐가 뭔지 모르겠어. 진짜 배 속에 있는 거야? 서툴러 보이는 젊은 부부의 대화를 듣던 루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미소 지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지만 어째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다.
멍하게 그들을 바라보던 루이스는 문득 여성과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여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는 다시금 초음파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제이미 아디게일님? 제이미 아디게일님? 제이미 아디게일님 안 계세요?”
“아, 네!”
“2번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세 번이나 이름을 불리고 나서야 뒤늦게 대답하는 루이스에게 간호사는 은근슬쩍 눈치를 주었다. 루이스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민망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앞으로 쓰게 될 가명이 미처 익숙해지지 못한 모양이었다.
진료실로 들어간 루이스는 긴장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루이스 테일러였을 때의 진료 기록을 전부 지워 버린 탓에 루이스는 새로 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다행히도 태아는 건강했다. 간단히 초음파 검사를 한 여의사는 루이스에게 몇 가지 질문과 주의할 점을 알려 주었다.
“임신 경험이 없으시고, 남성 오메가시니 각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남성 임산부가 여성보다 더 유산율이 높은 건 알고 계시죠?”
“네.”
“되도록이면 무리가 되는 일은 피하시고, 카페인이 든 음식이나 의약품도 상담 후 복용하셔야 합니다. 요즘이야 워낙 태아에 영향이 미치지 않게끔 잘 나온다지만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까요.”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늘어놓으며 의사는 핸드북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초보 임산부들이 주의해야 할 점이나 알아야 하는 것들을 간단하게 정리해 놓은 안내서인 듯싶었다.
“보호자 분은 안 계십니까?”
“네? 아…….”
자신도 모르게 눈에 띄게 안색을 굳혔다. 그런 루이스의 모습에 의사는 대강 어떤 사정이 있는지 알겠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이 시기에는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유산이 가장 많은 때입니다. 환승 센터에 도착할 때까지 되도록이면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의사가 건네준 책자와 초음파 사진을 가방에 챙긴 루이스는 짧게 인사를 하고는 진료실을 나왔다. 검사 비용이 정산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루이스는 조용히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가방을 열었다.
루이스가 꺼낸 건 다름 아닌 초음파 사진이었다. 얼마 전 타이나에서 몰래 산부인과에 들렀을 때 받았던 사진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때는 자신의 아이를 처음 접했었다. 그래서인지 혼란스러움에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었는데 지금은 사뭇 달랐다.
사진을 보니 이제야 실감이 났다. 정말 자신의 배 속에 아이가 있긴 있구나. 눈에 띄게 배가 부르지도 않고 평소와 전혀 다를 게 없어서 실감이 안 났었는데. 막상 실감이 나자 덜컥 겁이 났다. 자신의 배 속에 아이가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솔직히 말해서 사진을 봤을 땐 정말 이게 아이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자세히 뜯어보아도 당최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아직 초반이라서 그렇지, 나중에 출산에 임박하면 더 또렷이 보일 거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이게 아기가 된단 말인가?
새삼 자신의 몸이 너무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루이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에 테일러 가문은 발칵 뒤집히다 못해 거의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다. 루이스의 부재를 보고받은 미하엘은 자신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절대로 믿지 못한다며 직접 루이스의 아버지인 매튜 다인의 집에 들이닥쳤다.
루이스가 남겼다는 편지를 건네받은 미하엘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루이스가 스스로 떠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가드 한 명, 그리고 첸 말고는 아무도 함께 오지 않았으며 루이스가 직접 타 준 차를 마시자마자 정신을 잃었다는 매튜의 증언에도 미하엘은 요지부동이었다.
테일러 가문이 어떤 가문인가. 현 정부를 유일하게 압박할 수 있는 대귀족이었다. 테일러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황제조차도 갈아 치울 수 있다. 그런 대귀족의 안주인이 우여곡절 없이 평탄하게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분명 납치극일 것이다. 루이스가 자신을 스스로 떠날 리가 없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합리화한 미하엘은 미친 듯이 루이스를 수소문했다. 제국군과 황궁 마법사까지 합세해 온 나라를 뒤지고 뒤졌다. 아마 황후가 납치되어도 이 정도로 인력을 총동원하진 않을 거라고 국민들은 수근거렸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혹시나 타 행성으로 납치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여러 행성들에 수사대까지 보냈다. 우주 공항을 압수 수색해 철저히 조사했다. 거의 수십만 명에 달하는 승객들의 신상 정보를 하나하나 뒤져 가며 찾고 또 찾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루이스가 스스로 떠났다고밖에 볼 수 없는 보고만 접하게 되자 미하엘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이스가 스스로 자신을 떠났다는 것을.
사실 그 또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혼 통보 후 갑작스레 돌변한 태도,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을 최대한 안심시키기 위해 애썼던 모습. 미하엘은 자신을 버린 매정한 연인에게 미치도록 분노와 절망을 느꼈다.
루이스를 납치를 사주한 사람이 다름 아닌 데이브 케이린으로 지목되자 케이린가는 절대로 이 일과 가문은 관계가 없다며 그를 파문시켰다. 가문에서 범죄를 저지른 자를 파문한다면 더 이상 가문은 죄가 없다. 파문은 그런 것이었다. 데이브를 파문시킴으로써 케이린가는 모든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고작 파문 하나 가지고 케이린을 믿을 미하엘이 아니었다. 데이브를 파문시킨 케이린가는 더 이상 수색 대상이 아니었기에 대놓고 손을 댈 수는 없었다. 해서 마하엘은 은밀히 케이린을 캐냈다.
혹여나 케이린에서 데이브와의 접촉은 없었는지, 이 일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진 않는지. 표면적으로 루이스가 스스로 떠났다고 입장 표명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미하엘은 일단 모든 화살을 데이브에게 겨눴다.
때문에 루이스의 편지나 매튜와 가드의 증언 또한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했다. 루이스는 철저히 ‘납치당한 공작 부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번 일 때문에 케이린가가 잃은 신용도는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테일러가와의 우호적인 관계가 깨지고, 주가가 폭락하고 기업 매출이 뚝 떨어졌음에도 잔나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바라본 것은 먼 미래였으니까.
지금 당장 케이린이 폭삭 망한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설사 그런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첸이 테일러가의 가주가 되기만 한다면 케이린은 다시 우뚝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주선을 타고 행성을 빠져나간 게 분명하다면, 여기, 여기, 여기. 이 세 곳 환승 센터를 반드시 거쳐 갔을 겁니다. 지금 이곳에서 이 세 환승 센터로 향하고 있는 함대는 총 스물다섯 대이며, 총 승객 수는 수백만 명에 달합니다. 게다가, 타 행성의 승객 수까지 합하면 최소 몇십억은 넘을 겁니다.”
카일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설명했다. 총 승객수가 수십만 명이라는 말에 미하엘은 눈을 질끈 감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와 보좌관을 더욱 긴장시킨 미하엘이 한숨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계속해 봐.”
“잡으려면 반드시 이 세 곳 환승 센터에서 잡으셔야 합니다. 이 세 곳은 항로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환승 센터입니다. 우리 타이나 행성을 포함한, 은하계를 잇는 모든 항로가 이곳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찾아내지 못한다면, 아마 평생 그림자도 못 볼 확률이 큽니다. 이 세 환승 센터와 이어져 있는 항로가 1만 개가 넘습니다. 어떤 웜홀을 거쳐 갔는지, 어떤 행성에 도착했는지 찾아낼 확률이 거의 제로라고 보시면 됩니다.”
미치겠군.
미하엘이 다시금 고개를 꺾으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가는 느낌에 점점 눈동자가 빛을 잃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하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그래, 카일의 말대로 우주는 너무나도 넓다. 그리고 그 넓은 우주는 너무나 많은 항로로 연결되어 있다. 사람 한 명의 머리카락보다 많은, 얽히고설킨 그 길들을 어떻게, 무슨 수로 다 찾아다닌단 말인가.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반지 찾기나 다름없었다.
“승객 수가 몇천 만이든, 몇 억이든 상관없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
“일단 환승 센터에 위치한 연합군의 허가를 받아 놓았습니다. 미리 군 함선을 투입해서, 관광선들이 도착하는 대로 우리 타이나 인들 부터 조사를 실시할 겁니다. 하지만 그도 아마 쉽진 않을 겁니다. 아마 외모와 신상 정보를 조작해서 탑승했을 확률이 큽니다.”
“그렇겠지. 데이브 그 새끼라면.”
“저…… 각하.”
데이브가 우물쭈물 말끝을 흐리자, 미하엘이 힐끗 시선을 돌렸다.
사실 카일은 불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말이야 쉽지. 어떻게 그 많은 승객들을 일일이 조사해서 공작 부인을 찾아낸단 말인가. 사람 두 명 찾겠다고 거의 몇 만에 가까운 병력을 투입하는 것부터가 엄청난 일이었다. 아마 황족이 납치되어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만약에 잡지 못하고 놓친다면? 정말 상상하기도 싫었다.
“만약, 환승 센터에서 부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못한다면?”
“……예에.”
카일의 물음에 미하엘이 생긋 웃었다. 잡지 못한다면?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당연히 찾아내야지. 지나가는 개미 새끼 한 마리까지 확인하는 수가 있다 하더라도 잡아내야지.
미하엘에게 ‘만약’이란 없었다. 그저 ‘잡아내고 만다’라는 생각만 존재할 뿐이다.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럼 백 년이고 이백 년이고 찾아낼 것이다. 온 우주를 다 뒤져서라도, 반드시. 자신의 숨이 끊기는 그때까지.
“그딴 걱정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목이 날아가지 않을까, 그거나 더 걱정해.”
그러니까, 놓치면 모가지가 날아간다는 뜻이다.
“타이나 인은 DNA 채취 단계까지 투입해.”
“D, DNA 채취요……?”
“그래, 타 성인은 법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자성인은 가능하지. 한 명도 빠짐없이, 체취해.”
“알겠습니다.”
……마누라 잡겠다고 자국민들 DNA까지 체취하는 집요한 놈.
카일은 머릿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런 새끼 밑에서 일하는 자신이 불쌍하지. 공작 부인은 어쩌다 저런 미저리한테 걸려 가지고…….
카일은 수수한 인상이 매력적이었던 공작 부인 루이스 테일러의 모습을 떠올렸다. 평민 출신답게 아랫사람들에게도 예의를 갖추고 존중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었는데. 하지만 그를 볼 때마다 가문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가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의 남편인 공작은 그런 생각은 꿈에도 못 하는 것 같았지만. 공작 부인이라는 자리는 얼핏 보기엔 아주 명예롭고 훌륭한 자리로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엄연히 남성인 그에겐 족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차를 마시거나 그림을 그리고 여행을 다니고, 쇼핑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귀부인들의 삶을 평범한 남자가 버텨 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걸 이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대공은 절대 알지 못하겠지.
카일은 작게 혀를 차며 다시금 고개를 내저었다.
“……뭐라고요?”
“제국군이 환승 센터에 투입되었다. 함선들이 도착하는 대로 승객들을 조사할 예정이라고, 잔나가 연락을 해 왔어.”
“어떻게 된 거죠? 미하엘이 설마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건지 알아낸 건…….”
“그건 아니야. 아마도 우리가 행성을 빠져나간 것 까지만 알아낸 것 같아. 우리가 향하고 있는 환승 센터에 제국군을 투입시킨 건 아마 그곳이 다른 항로와 연결되어 있는 중심부라 그런 걸 거야. 거길 놓치면 아무리 군이라 할지라도 찾아내기가 힘들거든.”
“……그렇군요.”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넋을 놓은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이제 환승 센터까지 도착하는 데에 남은 시간은 일주일 남짓이다. 근 반 년간 함선 내에서 평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에 안심을 했던 것 같다. 갑작스레 환승 센터에 제국군이 투입되어 조사가 시작될 거라는 잔나의 수신에 루이스는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 타이나 행성인은 DNA 채취 단계까지 철저히 조사한다고 해.”
“DNA요?”
“그래.”
데이브의 말에 루이스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DNA라니. 그렇다면 신상 정보를 조작하고 외모를 아무리 바꾼다 한들, 소용이 없는 게 아닌가?
“그럼 어떻게 해요? 조사할 때 DNA를 체취당하면, 전부 들통날 게 틀림없어요.”
“걱정하지 마. 그건 자성인 한정이니까. 타 행성인의 DNA는 마음대로 채취할 수 없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니까.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우리 정보를 타 행성인으로 조작했어. 우리의 DNA를 채취당할 일은 없을 거야.”
“……정말입니까?”
“그래.”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짓는 데이브의 모습에 루이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제 곧 도착할 환승 센터에 제국군이 자신을 잡겠다고 대기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저절로 온몸이 굳는다. 아직 아이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만약 이 상태로 붙잡힌다면 미하엘에게 아이를 빼앗길지도 모른다. 절대로, 절대로 환승 센터에서 붙잡히는 일은 없어야만 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가 붙잡히는 일은 없을 거야.”
“……네.”
굳어진 얼굴로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 걱정이 완연한 모습이었지만 데이브는 애써 모른 척했다. 걱정이 되지 않을 리가 없다. 사실, 자신 또한 긴장이 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이 고비만 무사히 넘기면 된다. 무사히 환승에 성공하고 환승 센터를 벗어나면 제국군에게 붙잡힐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무수히 많은 우주 항로를 하나하나 가 보면서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실 데이브는 첫 번째 환승 센터에서 이런 고비가 생길 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미하엘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77환승 센터를 이용하는 승객 수가 엄청나기 때문에 자세히 조사하진 않을 거야. 한다 하더라도 자성인 한정이겠지. 그러니까…….”
“알아요, 데이브. 걱정하지 않을게요.”
아까부터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데이브에게 루이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데이브는 머쓱한 듯 어깨를 으쓱였고, 루이스는 다시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첫 번째 환승 센터에 도착하기 직전이라니. 헬기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어 루이스는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하루하루가 길기만 했는데 돌이켜 보면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난 건지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푼 배도.
“몸은 좀 어때?”
“괜찮아요. 허리가 조금 아프고 화장실을 자주 가야 해서 좀 귀찮은 것 빼고는, 딱히 힘든 점은 없어요.”
“다행이군.”
“저…… 데이브.”
루이스가 머뭇거리며 자신을 부르자, 데이브는 ‘그래’라고 대답하며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음, 저……’라며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루이스의 모습에 데이브는 눈을 가늘게 떴다. 대충 예상이 간다. 아마 잔나에게서 수신이 도착했다는 것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거겠지. 첸과 미하엘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게 틀림없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 말해 봐. 왜 그래?”
하지만 데이브는 모른 척 되물었다. 이왕이면 루이스가 아니라고 모른 척했던 마음을 돌리지 않길 바라며 말이다. 이미 고향과의 연을 끊고 떠나긴 했지만 사람 감정이라는 게 그리 독하지 못하다. 그게 사랑했던 연인과 자식에겐 더더욱. 연을 끊고 새 삶을 살아가겠노라 다짐하긴 했지만 이리 마음이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닙니다, 됐어요.”
데이브는 머릿속으로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루이스가 마음을 돌리지 않고 끝까지 버텨 내서. 어차피 루이스가 첸과 미하엘에 대해 물었다 하더라도 이미 떠난 인연이니 궁금해하지 말고 미련 갖지 말라 충고하며 말해 주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된다면 분명 루이스는 또다시 상처를 받을 것이다.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루이스 자기 자신에게. 하지만 루이스는 기특하게 참아 냈다. 궁금해 미쳐 할 게 눈에 보일 정도인데, 끝끝내 그걸 외면하고 참아 냈다. 그런 루이스가 데이브는 씁쓸하면서도 기특했다.
환승 센터에 도착한 뒤, 딱 사흘 후에 두 번째 환승 센터행 함선이 탑승 수속을 시작한다. 루미너스호처럼 큰 함선이 아니라 소함선이었기에 탑승 수속은 약 일주일간 시행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흘간 환승 센터 호텔에서 머문 후 갈아탈 함선에 탑승할 예정이었다. 제국군이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일정이 순조롭게 흘러갈 것이라 예상했다.
두 번째 함선의 운항 기간은 약 한 달 남짓. 아이러니하게도 루이스의 출산 예정일도 한 달 반 정도가 남았다. 세 번째 환승 센터의 민간 종합 병원에서 출산할 예정이었고, 아이를 낳자마자 다시금 출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사고가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