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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건어물
1화
1
“아무래도 누가 나갔다 와야겠는데……. 누구 손?”
거대한 몸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애교 섞인 목소리였지만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사람은 없었다. 칸막이로 나눠진 사무실에는 누구의 책상 위라 해도 산더미 같은 서류나 도안 혹은 모형이나 그 밖의 잡스런 것들이 쌓여 있어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뭔가 일감은 많구나 싶어 보였다.
굳이 바깥을 내다보지 않더라도 이 날씨에 나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만했다. 눈보라가 치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며칠 전 쌓인 눈이 전혀 녹을 만한 날씨가 아니었고 다들 주차를 하고 사무실까지 오는 그 짧은 거리에서도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다고 느꼈는데 이런 날에 현장에 가야 한다니 차라리 죽은 시늉을 하는 게 나을 듯했다.
“에이……. 손! 대신 보너스로 현장에 갔다가 바로 퇴근할 수 있는 쿠폰 지급!”
잠시 마우스를 딸깍거리던 손들이 멎었다. 골똘히들 생각하는 거겠지. 갔다 오는 게 나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쌓인 일을 쾌적하고 따뜻한 사무실에서 하는 것이 나은가. 그러나 대부분 오늘 일찍 퇴근한다고 해서 자신 앞에 쌓인 일들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죽은 척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하다가 느지막이 퇴근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한참 그리던 도안을 거의 완성시킨, 뚱뚱한 남자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여자의 손이 올라갔다. 그러고는 바로 붙는 소리.
“쿠폰 발행해 놓고 유효기간 지났다는 건 아니겠죠?”
“아, 용감한 우리 오드의 간판 디자이너 이지선 씨 당첨! 당근, 쿠폰의 유효기간은 오늘 단 하루입니다. 가시죠!”
“30분 후에요.”
짧은 목소리가 들리자 주위의 몇몇 사람들의 머릿속에 내가 가는 게 나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지선은 어차피 디자인은 끝났고 마감재는 협력 업체에 일일이 전화를 해야 하는 일이어서 이미 날이 저물어 가는 터라 오늘 하기에는 그른 것이기에 눈치 보면서 사무실에 앉아 있느니 추위를 무릅쓰고 길을 나서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지금 하는 현장 일도 자신하고 관련도 있었고 또 근처에 아주 유명한 부대찌개 집이 있는 것도 큰 이유였다. 오늘 같은 날 부대찌개에 소주 한 잔……. 물론 그건 집에 사 가지고 가서 혼자 먹게 되겠지만. 누군가와 어울려서 먹는 건 질색이니까.
날이라도 덜 춥다면 캔 맥주에 사다 재어 놓은 오징어포면 그만이지만 오늘 같은 날은 뭔가 따뜻한 걸 목구멍에 넘기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도 만들어 먹을 만한 능력도, 노력도 부족해 사 먹는 게 고작이지만. 대신 아침부터 상태가 안 좋던 차가 걸릴 뿐이었다.
“클라이언트가 하도 성화를 해 대서 말이지…….”
친히 그 육중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자리까지 와서 설명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항은 위중하고 가기는 싫다는 증거일 것이었다. 선심 쓰고 해 준다는 이 자리를 즐길 테면 즐겨야겠지.
이제 만 삼 년차가 되어 가는, 건축 사무소 오드의 신참이라고 하기엔 참신함이 떨어지고 고참이라고 하기엔 보잘 것 없는 직원인 이지선은 1년은 아르바이트로, 2년은 정식 직원으로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여자 직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건축학과 출신이라고 해서 디자인이나 우아하게 한다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쪽 계통의 일을 하다 보면 때론 막노동꾼이 되어야 했고, 때론 협잡꾼이 되기도 했으며 밀린 대금을 받을 때는 스스로 사채업자로 전환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다사다난 다이내믹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잡초처럼 잘 견디는 게 스스로 대견할 정도로. 그러나 그러지 않으면 또 어쩔까. 그녀가 살아온 세월 자체도 그것만큼 다이내믹한 일인 걸. 오히려 이런 날씨에 거래처를 나가는 것은 무료한 겨울날 개울 넘어 이웃에 산보나 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회사에서 유지비를 대 주는 조건으로 산 자가용까지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을 보면 지선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충분했다. 지독하게 일해서 버는 돈은 그 나이 또래 여자들이 사무실에서 전화 받고 커피 타며 버는 돈보다는 한참이나 많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생활을 평범한 소득의 여자들처럼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불만은 없었다. 그런 것들하고는 체질적으로 맞질 않으니까.
지선은 막 끝낸 프로그램을 저장하고 컴퓨터를 끄고 아까 오 팀장이 열심히 설명해 준 서류 뭉치를 들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등받이에 걸쳐 놓은 인조 퍼가 가득 달린 커다란 사파리 점퍼를 집어 들었다.
그놈의 인조 퍼 때문에 늘 운전할 때 목구멍이 간질거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감내해야만 했다. 물론 큰맘 먹고 겨울에 지른 걸 여름까지 갚느라 애쓴 천연 라쿤이 붙은 코트도 있었지만 운전하는 데 코트나 재킷은 영 불편스러웠다. 오늘같이 바람이 칼로 에이듯 부는 날에는 무조건 따뜻한 것이 최고니까.
“지선 씨, 조심해. 들어오는 진입로 다 얼었더라.”
박 대리가 지선이 짐을 싸들고 나가는 것을 보더니 짐짓 걱정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아까 봤어요. 퇴근할게요. 다들 수고하세요.”
그의 호의가 무슨 뜻인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가뭄의 콩 날 것만 같은 감정조차 솟아나지 않는 상대에게 쓸모없는 미련 따위를 안겨 주고 싶지는 않았다. 모두 다에게 인사하는 걸로 자신의 감정을 내뱉기는 하지만 저 둔한 남자는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건지 혹은 알아듣지 못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깨에 둘러멘 커다랗고 낡은 숄더백이 자꾸만 흘러내리는 통에 밖으로 나가는 길에 걸음을 멈춘 지선은 마치 버릇처럼 눈처럼 하얀, 그리고 마치 얼음으로 얼어서 굳어져 버린 것 같은 문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이 회사에 들어온 지 3년이 되도록 한 번도 열리지 않은 그 방은,-물론 안쪽을 못 본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열고 들어간 적은 있으니까.- 주인에 의해서 열린 적이 없다는 게 중요했다.
언뜻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올 블랙 컬러의 단 한 점의 군더더기도 없이 완벽한 인테리어의 방. 직원들의 난장판 같은 사무실과는 사뭇 다른, 클라이언트를 위한 접견실과 비슷한 분위기이지만 왠지 차갑고 날카로움이 더해진 검은색의 방과 그와 대조되는 눈부시게 하얀 문.
그 방의 주인이 이 기상천외한 ‘오드’ 건축사무실의 오너이자 대표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3년 동안 얼굴 한번 들이비추지 않는데도 그 사람의 이름을 걸고 회사가 돌아가고 있는 건지 의심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3년쯤 이런 상태라면 더 이상의 궁금증 따위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가방이 흘러내렸고, 그 틈에 시선이 한 번 닿았을 뿐. 지선은 사파리 점퍼를 여미고 마치 전쟁터를 나가는 군인같이 스카프를 목에 잘 감은 뒤에 폴라폴리스 장갑을 꺼내 들었다. 쓸데없이 뻣뻣하고 비싸고 차갑기만 한 가죽장갑보다 값은 훨씬 싸고 부드러워서 운전하기 편하지만 대신, 그만큼 볼품은 없었다.
그러나, 해 질 녘의 바깥은 의외로 너무나 추웠다. 아침이 춥다춥다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연일 최저기온을 갱신하는 한파가 일주일째라고 이제는 좀 꺾일까 했더니 그 절정이 바로 지금인 듯싶었다. 과연 현장에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건물 뒤 그늘 덕에 생긴 빙판 옆으로 늘어서 주차된 차들 중 척 보기에도 연식이 좀 되어 보이는 그녀의 작은 은회색 프라이드는 디젤인데다 뭐가 문제인지 추운 날에는 시동이 제대로 단번에 걸린 적이 없는지라 머리가 아파졌다. 혹 또 저놈의 차가 말썽이라도 피우려나……. 종종걸음으로 차로 다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바람만 없다 뿐이지 차 밖이나 차 안이나 차갑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털 달린 방석을 깔긴 했으나 그 방석마저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옆 좌석에 손에 잔뜩 들고 있던 서류와 가방을 던지고는 하얗게 입김을 내뿜으며 차 키를 꽂았다. 그리고 힘차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려 보았지만 역시 우려했던 바대로 피리릭 소리와 함께 깜빡거리던 계기판은 꺼져 버리고 말았다.
끼리릭……. 픽, 끼리리리릭……. 픽, 끼리릭……픽…….
마치 바람이 새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낡은 소형차는 안간힘을 쓰는 차 주인하고는 상관없이 추위에 맥을 못 추고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한참 그렇게 애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이 시커멓게 보였다. 벌써 해가 져 버렸나. 지선이 고개를 들자 바로 자신의 차 앞으로 검은색의 커다란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오고 있었다. 문제는 그 차가 주차공간이 없는데 지선의 차가 나가야 할 곳까지 막으면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선은 제 차가 움직일 생각을 못하고 있긴 하지만, 우선은 나가야 하기에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을 누르기 시작했다. 와이퍼라도 움직인다면 앞에 하얗게 낀 성에를 제거하고 누구 차인지라도 확인해 볼 텐데. 사무실에 검은색의 저런 차가 누구 거더라. 날이 추워서인지 생각조차 잘 나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빵빵거리는 작은 차의 클랙슨 소리를 들었을까. 눈앞의 검은 차는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미끄러지듯 후진해서 마치 검은색의 옷을 차려입은 신사가 여자가 먼저 나가길 기다리듯 진입로 앞에서 비상등을 깜빡이며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누군지 매너는 좋네.”
시동이 걸리지 않아 화가 난 걸 저기다 푼 것일까. 너무 심하게 클랙슨 소리를 울렸다 싶은 지선은 미안스러운 맘에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여전히 끼리릭거리는 이 낡고 작은 차는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차 주인의 마음과는 달리 신음소리만 낼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싸늘한 바깥보다 더 차가웠던 차 안은 낑낑대며 애쓰는 그녀의 열기 덕에 녹아가는 것만 같았다. 성에가 서린 창 안쪽에 뿌옇게 김이 서리기 시작했고 얼굴마저 붉어진 지선은 키 박스에 키를 넣은 채 부러져라 돌려대고 있었지만 피리릭 하는 소리만 날 뿐 여전히 차는 움직임이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시커먼 어둠이 드리우더니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 환청인가? 붉어진 얼굴로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지선은 누군가 자신의 작은 운전석 창문을 두드리고 있는 게 보였다.
창문을 내리는 버튼을 눌러 보았지만 시동이 켜지지 않은 차가 창문이 열릴 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것이 지극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도 잊은 채 지선은 차문을 열었다. 문을 연 순간 들이치는 찬바람과 시커먼 남자의 형상에 지선은 아무래도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에 도로 닫아야 하나 하고 10센티미터쯤 열린 문을 급하게 다시 닫으려는 순간 ‘앗’ 하는 남자의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문 틈 사이로 보이는 하얀 손가락을 보고 기겁을 한 지선이 문을 닫을 수도 열 수도 없는 상태일 때 문 밖에서 다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닛 좀 열어 봐.”
바람소리, 차들의 소음소리…….
수많은 잡음들이 뒤엉켜 있는데도 남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린 건 그만큼 그 목소리가 근사하다는 증거였다.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남자의 실루엣은 위협적이었지만 짧게 들린 목소리만으로도 문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워서 시동이 안 걸리는 게 아닌 거 같아.”
자신이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되는 걸 망설이고 있음을 알아챈 것인지 남자는 굳이 말을 덧붙였다. 지선은 보닛을 여는 버튼을 황급하게 찾았다. 잘 쓰지 않는 것이라 한참을 찾다가 겨우 누르자 달칵 소리가 났다.
지선은 뿌연 차창 너머의 남자가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찬바람이 쌩쌩 부는 날씨에 자신의 고물차를 살피는 것을 보고는 차문을 열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자마자 쏟아져 들어오는 찬 바람에 윽 소리가 저절로 났지만 아무래도 나가 봐야 할 것 같아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오지 말고, 시동 걸어 봐.”
시종일관 반말이라는 것도 잊은 채 지선은 마치 명령을 받드는 기계처럼 차 안으로 들어가서는 미안스러운 마음으로 차 키를 돌려 넣었다. 끼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불들이 점멸하더니 한참을 힘겹게 털털거리던 차가 부르르 떨리면서 시동이 걸렸다.
곧 열린 채로 자신의 시선을 막았던 보닛이 도로 쿵 소리를 내며 내려갔고 그 앞에 여전히 키 큰 남자의 시커먼 형상이 보이자 지선은 재빨리 차창을 내렸다.
“정말 고마워요!”
들이치는 찬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커다란 고함 소리가 되어 나오는 감사의 말에 스스로 놀랄 지경이었다.
“차 빼. 거기에 주차하게.”
그러나 시크함이 지나친 건지 남자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일언지하에 그녀의 감사인사를 무시하고 자신의 용건을 전달할 뿐이었다.
“아…….”
머뭇거리는 지선의 눈에,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만큼 정말로 얇아 보이지만 또한 비싸 보이는 검은색 가죽 재킷이 들어왔다. 검은색의 정장 바지와 검은색 폴라티를 입은 남자의 얼굴은 비정상적으로 새카매서 푸른빛이 돌 듯 보이는 검은색 머리카락 밑에서 유독 하얗게 빛났다.
채 얼굴을 제대로 관찰하기도 전에 휙 돌아서서였는지 날카로운 콧대와 근사하게 이어지는 이마의 선만 보여 준 남자의 뒷모습은 지나치게 큰 키 덕에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
지선이 차가운 바람을 고대로 맞으며 멍하니 있자 처음 보는 모양의 새카맣게 윤기가 흐르는 커다란 외제차에서는 요란한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지선은 정신을 차린 듯 차창을 올리고는 급하게 차를 빼다가 하마터면 옆 차를 스칠 뻔했다. 떨리는 손으로 차를 몰아 검은 차 옆으로 가자 그 차는 재빠르게 지선의 차가 주차되어 있던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여전히 옆모습만 뿌연 차창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콧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만큼 반듯하고 날카로웠다. 백미러로 힐끗 보니 한 번에 차를 밀어 넣은 남자가 차에서 내려 느긋한 걸음걸이로 오드의 건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 추워, 추워…….”
누구도 들을 리 없는 대사이지만 버릇처럼 내뱉은 말이 컴컴한 원룸 안에 울려 펴졌다. 불보다 보일러 스위치를 먼저 찾은 손은 다행이다 싶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9시. 남보다 일찍 퇴근이라니, 말도 안 되는 쿠폰이었다. 시멘트가 쩍쩍 얼어붙은 이런 날씨에 무슨 공사를 하겠다고……. 부대찌개 때문에 자처한 일은 부대찌개 집이 문을 닫을 때나 되서야 끝났다. 설사 문을 열었다고 할지라도 그 날씨에 식당 앞에 차를 세우고 주문이 나오길 기다렸다가 포장한 그릇을 들고 돌아오는 번거로운 일을 할 생각은 나지 않았다.
외출로 해 놓은 덕에 따듯한 기운은 없지만 그래도 냉골 같지는 않은, 자신의 방이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삼고는 얼른 온몸을 둘둘 감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옷들을 풀어 내렸다. 오늘 같은 날은 샤워는커녕 화장을 지우기 위한 세수 따위도 하기 싫을 만큼 춥고, 힘들고, 배고픈 날이었다.
배가 고프다 못해 허기가 진 지선이 급하게 싱크대를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즉석 밥 하나와 맛없다고 먹지 않은, 새로 나온 3분 카레 두 개가 남아 있었다. 라면이라도 있으면 따뜻한 국물이라도 먹겠는데…….
일단은, 어느 정도 추위가 가시고 나니 보일러를 꽤 세게 틀었는데도 한기가 가시지 않았다. 밖이 어지간히 추운 모양이었다.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월급이 센 만큼 할 일도 많은지라 지선은 수면양말을 꿰어 신고서는 침대 위에 있던 이불을 통째로 끌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나마 제도나 디자인이 끝나서 망정이지 그 큰 프로그램을 돌리는 것은 이 똥컴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다만 이리저리 그녀가 자주 다니는 거래처의 내장재나 디자인 용품을 검색하면서 이번에 맡은 리조트의 식당 겸 카페의 리모델링 건에 알맞은 것들을 미리미리 찾아 놓아야만 했다. 늘 하듯 옆에 맥주 캔이라도 끼고 있어야 했는데 날이 어찌나 추운지, 냉장고 안에 차게 식혀 둔 맥주가 영 내키질 않았다. 다만 아쉬운 대로 벌써 밑바닥이 보이기 시작하는 오징어포를 씹으면서 졸린 눈을 비비며 검색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뭐라고요? 아니 이게 오케이 사인이 난 지 언젠데 백지화라니! 그게 말이나 돼요? 오 팀장님!”
지선이 꽥 하고 지르는 소리에 사무실의 반은 무슨 일인가, 나머지 반은 저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팀장의 자리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당사자는 그런 시선을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니 백지화라니, 어젯밤에 졸린 눈을 비비며 거래처에 쪽지까지 보내고 오늘 점심 약속까지 잡아 놨는데 전면 백지화라니!
“타당한 이유를 대시라고요. 오케이 사인 떨어진 지가 이 주 반이에요. 20일이라구요. 공사 들어가야 할 날짜가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미친 거 아니에요?”
한겨울에도 늘 흥건하게 땀이 흐르는, 본인의 말에 의하면 보온 단열 효과가 큰 진피 층을 가졌다는 거대한 배 둘레의 팀장은 늘 하는 버릇처럼 눈처럼 하얀 손수건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를 닦아내면서 말했다.
“알아, 안다고. 그럼 내가 제일 잘 알지.”
“잘 아시는 분이 이게 말이나 되요? 부하 직원이라고 막 약 올려도 되는 거예요?”
“아, 이지선 씨 그건 아니지, 위에서 안 된다는데 어떡해……. 나도 다 월급받는 월급쟁이라고.”
지선은 억울함에 책상을 내리쳤다. 어떻게 그런 행동까지 나왔을까.
“뭐라구요? 아니 오 팀장님 본인께서 오케이 하시고, 박 실장님이 오케이 했으면 됐지, 우리 사무실에 또 어느 높은 분이 있어서 여기에 브레이크를 거는데요?”
건축 사무소 오드를 이끌고 있는 박 실장과 리모델링 팀과 건설 팀으로 나눠진 두 개의 부서 중에 리모델링 팀의 팀장인 오 팀장은 분명히 말했었다. 딜리시안 리조트의 200여 평 규모의 꼭대기 층 전체의 리모델링 디자인을 세 사람의 디자이너가 맡게 되었고, 그중에 이지선의 시안이 발탁되었다고.
그에 대한 주위의 축하와 시기를 받은 것이 불과 이 주일 전이었다. 그것 때문에 지선이 전부터 맡았던 일을 거의 올 스톱하다시피 하고 여기에 매달려 식음을 전폐하고 날밤을 새운 것이 몇 날 며칠인데…….
눈에서 불이 나올 것 같은 지선의 얼굴을 보면서 손수건을 든 손을 더욱 바쁘게 움직이던 오 팀장이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
“그게 말이지……. 딜리시안 건이 보통 큰 건이 아니잖아. 그래서인지 아니면 뭐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진짜 보스가 오셨어. 그분이 안 된다잖아.”
“에?”
가뜩이나 퀭해서 더 커진 것만 같은 그녀의 눈이 일그러졌다. 아니 보스라니, 여긴 건축사무소가 아니라 무슨 조폭 사무실인가?
“아니 또 누가 있다고…….”
그러나 그녀의 말문은 거기서 닫히고 말았다. 실장의 윗사람이라면, 바로 저 늘 닫혀 있는 하얀색 문 뒤에 있는 방의 주인?
“맞아. 3년 만이야. 지선 씨가 들어오고 얼마 안 되서 한국을 떴거든. 거, 뭐 왕의 귀환이라고 해야 하나?”
일이야 매섭게 잘하지만 늘 실없는 말을 달고 사는 살진 얼굴에서는 어색한 웃음과 농담이 새어 나왔다.
왕이라니 젠장, 왕이 아니라 염라대왕 오라비라 해도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어디가 문제란 말인가.
“지금 있어요?”
지선이 책상 위를 내려치느라 흐트러진 서류뭉치를 챙기면서 도전적으로 물었다. 흡사 콧구멍에서 김이라도 뿜을 분위기였다.
“아, 왜…… 가 보려고? 아니, 그게 좀……. 내 말 좀 들어 보라고.”
“오 팀장님은 브레이크 건 적이 없다면서요. 그러니까 거기 가만히 계시라고요.”
“저기, 그러지 말고 말이지.”
“그러지 말고 말이지가 어디 있어요? 지금까지 한 일이 다 물거품이 되게 생겼는데. 됐다고요. 내 그 왕님인지 눈이 제대로 안 붙어 있는 장님인지한테 직접 물어볼 테니까!”
오 팀장의 얼굴에는 난처함과 곤란함이 가득 차긴 했지만 한쪽 구석, 그러니까 살진 턱 주위의 입가에는 슬쩍 기대가 서려 있기도 했다. 저 바싹 말라서 바늘로 찔러대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여자가 보스를 대면하면 어떤 느낌일까?
지선은 두툼한 서류철을 들고는 화가 났다는 표시를 하고 싶은 듯 성큼성큼 걸어서 그 늘 닫혀 있던 하얀색의 하이그로시 문에 달린 은빛 문고리를 잡고 잠시 분을 삭이고는 신경질적으로 노크를 했다. 사무실의 복잡한 미로 같은 칸막이 뒤로 각자 자기 일을 하고 있던 모든 직원들의 눈빛이나 시선이 모두 그곳으로 집중되어 지선의 뒤통수에 꽂히는 것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기에, 담당자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근 이십 일이나 공을 들인 일을 일거에 백지화시키는 건지 꼭 따지고 봐야 했다. 그러나 문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없었다. 사람을 무시하는 건가? 지선은 다시 한 번 신경질적으로 문을 두드리고는 벌컥 문을 여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문을 열자마자 문 안에서 느껴지는 것은 불어 나오는 것 같은 찬바람이었다. 한겨울인 것도 맞고 또 이상 한파라며 연일 갱신되는 최저기온이라지만 수입 좋은 사무실은 두터운 겉옷은 벗고 적당한 카디건 하나로도 버틸 만큼 늘 난방과 습도 조절이 잘 되어 있는 곳이라 퇴근할 때는 싸늘한 집이 싫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대표이사의 방이라는 데가 이렇게 냉골이라니…….
지선은 소름이 쫙 끼칠 것 같은 바람과 냉기 속에서 혹 아무도 없는가 싶어서 도로 나가야 하나 생각하면서 근 3년 동안 제대로 본 적이 없는 베일 속의 검은 방을 훑어보았다.
광택 나는 하이그로시의 하얀 문과는 달리 온통 무광의 새카만 색으로 도배가 된 싸늘한 방은 검은색 하이그로시의 탁자나 천장에 반 간접 식으로 매립된 LED등이 켜져 푸르스름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색의 푹 파묻힐 만한 가죽의자와 역시 검은색으로 된 철제구조의 책장, 스틸구조의 스탠드까지. 분명히 3년 동안 닫혀 있던 방이므로 인테리어를 새로 했을 리 없는데 워낙에 군더더기가 없고 완벽하게 심플한 구성으로 되어 있어서인지 전혀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다.
‘인테리어 하나는 딱 떨어지네.’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이라서 목구멍 안으로 삼키면서 지선은 자신의 손에 들린 지중해풍의 클래식한 디자인하고 살짝 비교를 하고 말았다.
지선은 머리를 흔들면서 이 싸늘한 집무실에 있을 리 없는 그 왕님을 어디 가서 찾아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쏟아낼 수 있을까 싶었다. 막 돌아 나가려는 순간 검은색 강화유리로 된 파티션 뒤에서 갑자기 무슨 소리가 났다.
“……됐어. 됐다. 이제 그만해라. 안 들은 걸로 할 테니. 그만해.”
전화통화 중이었나? 아까의 그 적막은 뭐였지? 본의 아니게 전화통화를 엿듣게 된 지선은 부글거리는 화는 여전했지만 뭔가 타이밍이 좋지 않은 듯싶어 당황스러웠다. 그러다가 곧 자신이 두 번이나 노크를 했고 그 정도면 안에서 귀가 먹지 않은 이상은 들었을 게 분명하니 제멋대로 상사의 집무실에 쳐들어왔다는 혐의는 벗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됐기에 한 발자국 나서서 헛기침을 했다.
“음……, 흠……. 저기…….”
뭐라고 불러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유리 파티션 뒤에서 커다란 손이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쫙 펴 허공에 멈춰 세웠다. 아마 지금은 말하지 말란 뜻이겠지. 숨만 들이쉬고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서 있는 지선 대신 안쪽에서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미안하다고 할 테니 그만. 이제 그만해. 더는 관심 없다.”
지선은 아까의 당황스러움이 가시자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지막하고 깊게 울리는 목소리, 밖에 있는 사람들의 성대 구조로는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목소리, 그리고 또한 낯설지 않은 목소리……. 아, 어디서 들어 봤더라?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손은 사라지고 검은색의 강화유리 파티션 뒤에서 나타난 목소리의 주인공은 지선을 당황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는 금방 입에서 뿌옇게 입김이라도 뿜어질 것만 같은 차가운 방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검은색의 셔츠만 달랑 입은 채였다. 여름인지 가을인지 구별이 안 되게 목줄기가 드러나도록 단추 두어 개가 풀어진 셔츠 밑으로 보이는 하얀 목덜미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 위에 있는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무슨 일이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입고 있는 새카만 셔츠와 정반대로 지나치게 새하얀 남자였다. 그 무슨 흡혈귀가 주인공이어서 분칠을 떡칠하고 나오는 남자 주인공보다 더한, 창백하리만큼 하얀 얼굴의 남자가 약간의 조소를 띤 채 지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 안보다 싸늘한 눈빛, 한쪽만 비뚜름하게 올라간 입술선, 손을 벨 듯한 날카로운 콧대, 뒤로 넘긴 새카만 머리 아래로 시원스레 드리워진 이마……. 너무 비현실적인 미모의 남자가 지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이 남자 그 주차장에서의 그 남자로구나. 순간적으로 멍해진 지선은 빨리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 많으면 수백 명의 사람들과 스치고 부대끼며 살았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하도 친구가 졸라대서 그 무슨 영화의 시사회인지에 갔다가 본 영화배우도 이 남자 같지는 않았다. 이 남자……. 고개를 옆으로 삐뚜름하게 빼는 게 버릇인가.
“음.”
지선답지 않게 헛기침을 했다. 아니 너무 추웠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지선은 자신의 이 흐트러진 정신 상태를 재빨리 추슬러야 했다. 그래, 이 냉골 같은 시커먼 방 안에 온 건 이유가 있었다.
“딜리시안 건 때문인데요.”
지선은 되도록이면 딱딱하게 말을 꺼내려고 애썼다. 남자의 외모 따위에 당황한다는 것은…… 자신과 절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딜리시안?”
남자가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려는 듯 커다랗고 하얀 손으로 쓸어 올리면서 되물었다. 분명히 자신의 입에서도 나온 단어인데 남자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네, 그 딜리시안요. 딜리시안 스카이라운지 구조 변경 건, 다음 주부터 공사 들어가야 하는데 전면 수정? 아니 뭐라고 해야 되죠?”
“전면 백지화.”
마치 총알이라도 쏘듯 몰아붙이는 지선의 목소리에 찬물을 끼얹듯, 아니 이건 싸늘한 찬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묘한 울림 때문에 습기가 가득한 것만 같으니까. 뭔가 뜨거운 물을 끼얹은 것 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명료하게 울렸다.
“아, 당신이 그랬군요. 이유가 뭐죠?”
이제야 남자의 얼굴보다는 자신의 그동안의 노고가 생각났다. 아니 어디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놈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그동안 며칠을 밤잠을 설치고 한 작업을 온통 뒤집어엎다니 무슨 이유인가 하는 억하심정이 이제 적나라하게 솟아 나오고 있었다. 원래 사는 게 투쟁이자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지선의 성미에 딱 맞는 분야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가 막 입을 채 열기도 전에 지선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눈앞에 있는 탁자 위에 쿵 하고 소리가 나도록 던지듯 내려놓고는 쏟아내듯 내뱉었다.
“저희가 맡은 이번 일은 규모도 지난 일들에 비해서 비교도 안 되게 크기도 하거니와 이미 그쪽 딜리시안에서도 오케이 사인이 났고 일부 협력 업체에 벌써 하청이 들어간 상태라고요. 그리고 이 시안을 위해서 대체 몇 사람이 고생했는지 아시는 겁니까? 그런 건 생각도 없이 단칼에 캔슬한 이유가 뭐죠?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거죠?”
마치 기관총을 난사하듯 말을 쏟아내는 지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키 큰 남자는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음을 날렸다. 지선은 ‘아’ 하는 소리가 입 밖에 나오지 않게 조심해야만 했다. 마치 무슨 화보 촬영이라도 하듯 입꼬리를 올린 남자의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남자는 그녀가 항의조로 쏟아 놓은 서류철들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정확하게 도면이 그려진 파일을 펴더니 입을 열었다.
“여기, 가 봤거든.”
“……?”
아니 아직 완공은커녕 설계도만 있는 곳에 어떻게 간단 말인가? 딜리시안의 지금 있는 스카이라운지를 가 봤다는 이야기인가?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공사하기 전에 공사할 곳을 가 보는 건…….
“당연하죠. 가 보셔야겠죠. 그런데 그거하고 무슨 상관이라는 거죠?”
다분히 도전적인 지선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듯 그는 천천히 세세한 도면을 넘기면서 말했다.
“……아니 거기 말고, 여기 있는 이 장식 말이야. 이건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베이에서였던 거 같은데. 이 연결된 복도와 레스토랑으로 넘어가는 턱 있는 복도에 설치된 장식창, 음, 가운데 장식은 좀 다르군. 그리고 여기 창틀은 이그니스인가, 아마 시드니에 있었던 거 같은데. 내 기억이 맞는다면 거기 유럽식 디너 전용 레스토랑이었던 이그니스의 바다 쪽 창틀이었을 거야. 색깔을 안 써 놔서 모르겠지만 재질이 대리석이라면 화이트나 아이보리 계열……. 음, 그리고 가운데 여기 로비 장식 이건……. 저쪽 중동 쪽이었던 것 같은데 버즈 알 아랍은 아니었던 거 같고. 아, 파크 하얏트, 거기도 좋았지. 또 다른 곳들도 이야기해야 되나?”
콧김이라도 뿜을 듯한 기세로 서 있던 지선은 서서히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아, 뭐야……. 저거 다 진짠가? 이번 리모델링 디자인은 유럽식으로 콘셉트를 잡고 그곳의 책임자와 여러 번 말을 나눈 뒤에 몇몇 호텔의 고급 식당 사진을 뒤적이면서 상담을 했던 내용들이었다. 솔직히 지선은 해외여행이라고는 가 본 적도 없었고 심플하고 간결한 디자인을 주로 해 왔던지라 이런 유럽식의 고풍스러운 앤티크풍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어서 그냥 평소에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 배경화면에서 본 이미지를 조금씩 차용했을 뿐이었다. 남자의 입에서 나온 곳들은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전 그런 것들 몰라요. 제가 뭐 다른 디자인들을 그대로 카피했다는 겁니까?”
자신은 전혀 그런 기억이 없기에 여전히 꼿꼿하게 대답을 요구하는 듯한 표정으로 남자를 쏘아 보았다.
“글쎄, 그대로 카피는 아닌데 워낙에 인상 깊은 곳들이 고스란히 보이니 말이지. 하지만 가운데 장식이나 들어오는 동선도 그렇고 천장의 디자인도 맘에 들어. 그러니까 내가 캔슬한 이유는 굳이 남의 디자인을 베낄 필요가 없는 거 같은데 군데군데 짜 맞춰 놓은 게 눈에 너무 보여서 말이지.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인테리어를 한곳에 모아서 그럴듯하게 통일시킬 수 있는 건 뛰어난 재능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까 그냥 당신 머릿속에 든 걸로 해 보라고. 훨씬 나을 것 같은데?”
1화
1
“아무래도 누가 나갔다 와야겠는데……. 누구 손?”
거대한 몸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애교 섞인 목소리였지만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사람은 없었다. 칸막이로 나눠진 사무실에는 누구의 책상 위라 해도 산더미 같은 서류나 도안 혹은 모형이나 그 밖의 잡스런 것들이 쌓여 있어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뭔가 일감은 많구나 싶어 보였다.
굳이 바깥을 내다보지 않더라도 이 날씨에 나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만했다. 눈보라가 치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며칠 전 쌓인 눈이 전혀 녹을 만한 날씨가 아니었고 다들 주차를 하고 사무실까지 오는 그 짧은 거리에서도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다고 느꼈는데 이런 날에 현장에 가야 한다니 차라리 죽은 시늉을 하는 게 나을 듯했다.
“에이……. 손! 대신 보너스로 현장에 갔다가 바로 퇴근할 수 있는 쿠폰 지급!”
잠시 마우스를 딸깍거리던 손들이 멎었다. 골똘히들 생각하는 거겠지. 갔다 오는 게 나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쌓인 일을 쾌적하고 따뜻한 사무실에서 하는 것이 나은가. 그러나 대부분 오늘 일찍 퇴근한다고 해서 자신 앞에 쌓인 일들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죽은 척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하다가 느지막이 퇴근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한참 그리던 도안을 거의 완성시킨, 뚱뚱한 남자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여자의 손이 올라갔다. 그러고는 바로 붙는 소리.
“쿠폰 발행해 놓고 유효기간 지났다는 건 아니겠죠?”
“아, 용감한 우리 오드의 간판 디자이너 이지선 씨 당첨! 당근, 쿠폰의 유효기간은 오늘 단 하루입니다. 가시죠!”
“30분 후에요.”
짧은 목소리가 들리자 주위의 몇몇 사람들의 머릿속에 내가 가는 게 나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지선은 어차피 디자인은 끝났고 마감재는 협력 업체에 일일이 전화를 해야 하는 일이어서 이미 날이 저물어 가는 터라 오늘 하기에는 그른 것이기에 눈치 보면서 사무실에 앉아 있느니 추위를 무릅쓰고 길을 나서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지금 하는 현장 일도 자신하고 관련도 있었고 또 근처에 아주 유명한 부대찌개 집이 있는 것도 큰 이유였다. 오늘 같은 날 부대찌개에 소주 한 잔……. 물론 그건 집에 사 가지고 가서 혼자 먹게 되겠지만. 누군가와 어울려서 먹는 건 질색이니까.
날이라도 덜 춥다면 캔 맥주에 사다 재어 놓은 오징어포면 그만이지만 오늘 같은 날은 뭔가 따뜻한 걸 목구멍에 넘기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도 만들어 먹을 만한 능력도, 노력도 부족해 사 먹는 게 고작이지만. 대신 아침부터 상태가 안 좋던 차가 걸릴 뿐이었다.
“클라이언트가 하도 성화를 해 대서 말이지…….”
친히 그 육중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자리까지 와서 설명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항은 위중하고 가기는 싫다는 증거일 것이었다. 선심 쓰고 해 준다는 이 자리를 즐길 테면 즐겨야겠지.
이제 만 삼 년차가 되어 가는, 건축 사무소 오드의 신참이라고 하기엔 참신함이 떨어지고 고참이라고 하기엔 보잘 것 없는 직원인 이지선은 1년은 아르바이트로, 2년은 정식 직원으로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여자 직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건축학과 출신이라고 해서 디자인이나 우아하게 한다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쪽 계통의 일을 하다 보면 때론 막노동꾼이 되어야 했고, 때론 협잡꾼이 되기도 했으며 밀린 대금을 받을 때는 스스로 사채업자로 전환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다사다난 다이내믹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잡초처럼 잘 견디는 게 스스로 대견할 정도로. 그러나 그러지 않으면 또 어쩔까. 그녀가 살아온 세월 자체도 그것만큼 다이내믹한 일인 걸. 오히려 이런 날씨에 거래처를 나가는 것은 무료한 겨울날 개울 넘어 이웃에 산보나 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회사에서 유지비를 대 주는 조건으로 산 자가용까지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을 보면 지선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충분했다. 지독하게 일해서 버는 돈은 그 나이 또래 여자들이 사무실에서 전화 받고 커피 타며 버는 돈보다는 한참이나 많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생활을 평범한 소득의 여자들처럼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불만은 없었다. 그런 것들하고는 체질적으로 맞질 않으니까.
지선은 막 끝낸 프로그램을 저장하고 컴퓨터를 끄고 아까 오 팀장이 열심히 설명해 준 서류 뭉치를 들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등받이에 걸쳐 놓은 인조 퍼가 가득 달린 커다란 사파리 점퍼를 집어 들었다.
그놈의 인조 퍼 때문에 늘 운전할 때 목구멍이 간질거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감내해야만 했다. 물론 큰맘 먹고 겨울에 지른 걸 여름까지 갚느라 애쓴 천연 라쿤이 붙은 코트도 있었지만 운전하는 데 코트나 재킷은 영 불편스러웠다. 오늘같이 바람이 칼로 에이듯 부는 날에는 무조건 따뜻한 것이 최고니까.
“지선 씨, 조심해. 들어오는 진입로 다 얼었더라.”
박 대리가 지선이 짐을 싸들고 나가는 것을 보더니 짐짓 걱정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아까 봤어요. 퇴근할게요. 다들 수고하세요.”
그의 호의가 무슨 뜻인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가뭄의 콩 날 것만 같은 감정조차 솟아나지 않는 상대에게 쓸모없는 미련 따위를 안겨 주고 싶지는 않았다. 모두 다에게 인사하는 걸로 자신의 감정을 내뱉기는 하지만 저 둔한 남자는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건지 혹은 알아듣지 못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깨에 둘러멘 커다랗고 낡은 숄더백이 자꾸만 흘러내리는 통에 밖으로 나가는 길에 걸음을 멈춘 지선은 마치 버릇처럼 눈처럼 하얀, 그리고 마치 얼음으로 얼어서 굳어져 버린 것 같은 문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이 회사에 들어온 지 3년이 되도록 한 번도 열리지 않은 그 방은,-물론 안쪽을 못 본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열고 들어간 적은 있으니까.- 주인에 의해서 열린 적이 없다는 게 중요했다.
언뜻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올 블랙 컬러의 단 한 점의 군더더기도 없이 완벽한 인테리어의 방. 직원들의 난장판 같은 사무실과는 사뭇 다른, 클라이언트를 위한 접견실과 비슷한 분위기이지만 왠지 차갑고 날카로움이 더해진 검은색의 방과 그와 대조되는 눈부시게 하얀 문.
그 방의 주인이 이 기상천외한 ‘오드’ 건축사무실의 오너이자 대표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3년 동안 얼굴 한번 들이비추지 않는데도 그 사람의 이름을 걸고 회사가 돌아가고 있는 건지 의심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3년쯤 이런 상태라면 더 이상의 궁금증 따위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가방이 흘러내렸고, 그 틈에 시선이 한 번 닿았을 뿐. 지선은 사파리 점퍼를 여미고 마치 전쟁터를 나가는 군인같이 스카프를 목에 잘 감은 뒤에 폴라폴리스 장갑을 꺼내 들었다. 쓸데없이 뻣뻣하고 비싸고 차갑기만 한 가죽장갑보다 값은 훨씬 싸고 부드러워서 운전하기 편하지만 대신, 그만큼 볼품은 없었다.
그러나, 해 질 녘의 바깥은 의외로 너무나 추웠다. 아침이 춥다춥다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연일 최저기온을 갱신하는 한파가 일주일째라고 이제는 좀 꺾일까 했더니 그 절정이 바로 지금인 듯싶었다. 과연 현장에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건물 뒤 그늘 덕에 생긴 빙판 옆으로 늘어서 주차된 차들 중 척 보기에도 연식이 좀 되어 보이는 그녀의 작은 은회색 프라이드는 디젤인데다 뭐가 문제인지 추운 날에는 시동이 제대로 단번에 걸린 적이 없는지라 머리가 아파졌다. 혹 또 저놈의 차가 말썽이라도 피우려나……. 종종걸음으로 차로 다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바람만 없다 뿐이지 차 밖이나 차 안이나 차갑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털 달린 방석을 깔긴 했으나 그 방석마저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옆 좌석에 손에 잔뜩 들고 있던 서류와 가방을 던지고는 하얗게 입김을 내뿜으며 차 키를 꽂았다. 그리고 힘차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려 보았지만 역시 우려했던 바대로 피리릭 소리와 함께 깜빡거리던 계기판은 꺼져 버리고 말았다.
끼리릭……. 픽, 끼리리리릭……. 픽, 끼리릭……픽…….
마치 바람이 새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낡은 소형차는 안간힘을 쓰는 차 주인하고는 상관없이 추위에 맥을 못 추고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한참 그렇게 애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이 시커멓게 보였다. 벌써 해가 져 버렸나. 지선이 고개를 들자 바로 자신의 차 앞으로 검은색의 커다란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오고 있었다. 문제는 그 차가 주차공간이 없는데 지선의 차가 나가야 할 곳까지 막으면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선은 제 차가 움직일 생각을 못하고 있긴 하지만, 우선은 나가야 하기에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을 누르기 시작했다. 와이퍼라도 움직인다면 앞에 하얗게 낀 성에를 제거하고 누구 차인지라도 확인해 볼 텐데. 사무실에 검은색의 저런 차가 누구 거더라. 날이 추워서인지 생각조차 잘 나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빵빵거리는 작은 차의 클랙슨 소리를 들었을까. 눈앞의 검은 차는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미끄러지듯 후진해서 마치 검은색의 옷을 차려입은 신사가 여자가 먼저 나가길 기다리듯 진입로 앞에서 비상등을 깜빡이며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누군지 매너는 좋네.”
시동이 걸리지 않아 화가 난 걸 저기다 푼 것일까. 너무 심하게 클랙슨 소리를 울렸다 싶은 지선은 미안스러운 맘에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여전히 끼리릭거리는 이 낡고 작은 차는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차 주인의 마음과는 달리 신음소리만 낼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싸늘한 바깥보다 더 차가웠던 차 안은 낑낑대며 애쓰는 그녀의 열기 덕에 녹아가는 것만 같았다. 성에가 서린 창 안쪽에 뿌옇게 김이 서리기 시작했고 얼굴마저 붉어진 지선은 키 박스에 키를 넣은 채 부러져라 돌려대고 있었지만 피리릭 하는 소리만 날 뿐 여전히 차는 움직임이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시커먼 어둠이 드리우더니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 환청인가? 붉어진 얼굴로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지선은 누군가 자신의 작은 운전석 창문을 두드리고 있는 게 보였다.
창문을 내리는 버튼을 눌러 보았지만 시동이 켜지지 않은 차가 창문이 열릴 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것이 지극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도 잊은 채 지선은 차문을 열었다. 문을 연 순간 들이치는 찬바람과 시커먼 남자의 형상에 지선은 아무래도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에 도로 닫아야 하나 하고 10센티미터쯤 열린 문을 급하게 다시 닫으려는 순간 ‘앗’ 하는 남자의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문 틈 사이로 보이는 하얀 손가락을 보고 기겁을 한 지선이 문을 닫을 수도 열 수도 없는 상태일 때 문 밖에서 다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닛 좀 열어 봐.”
바람소리, 차들의 소음소리…….
수많은 잡음들이 뒤엉켜 있는데도 남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린 건 그만큼 그 목소리가 근사하다는 증거였다.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남자의 실루엣은 위협적이었지만 짧게 들린 목소리만으로도 문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워서 시동이 안 걸리는 게 아닌 거 같아.”
자신이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되는 걸 망설이고 있음을 알아챈 것인지 남자는 굳이 말을 덧붙였다. 지선은 보닛을 여는 버튼을 황급하게 찾았다. 잘 쓰지 않는 것이라 한참을 찾다가 겨우 누르자 달칵 소리가 났다.
지선은 뿌연 차창 너머의 남자가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찬바람이 쌩쌩 부는 날씨에 자신의 고물차를 살피는 것을 보고는 차문을 열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자마자 쏟아져 들어오는 찬 바람에 윽 소리가 저절로 났지만 아무래도 나가 봐야 할 것 같아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오지 말고, 시동 걸어 봐.”
시종일관 반말이라는 것도 잊은 채 지선은 마치 명령을 받드는 기계처럼 차 안으로 들어가서는 미안스러운 마음으로 차 키를 돌려 넣었다. 끼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불들이 점멸하더니 한참을 힘겹게 털털거리던 차가 부르르 떨리면서 시동이 걸렸다.
곧 열린 채로 자신의 시선을 막았던 보닛이 도로 쿵 소리를 내며 내려갔고 그 앞에 여전히 키 큰 남자의 시커먼 형상이 보이자 지선은 재빨리 차창을 내렸다.
“정말 고마워요!”
들이치는 찬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커다란 고함 소리가 되어 나오는 감사의 말에 스스로 놀랄 지경이었다.
“차 빼. 거기에 주차하게.”
그러나 시크함이 지나친 건지 남자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일언지하에 그녀의 감사인사를 무시하고 자신의 용건을 전달할 뿐이었다.
“아…….”
머뭇거리는 지선의 눈에,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만큼 정말로 얇아 보이지만 또한 비싸 보이는 검은색 가죽 재킷이 들어왔다. 검은색의 정장 바지와 검은색 폴라티를 입은 남자의 얼굴은 비정상적으로 새카매서 푸른빛이 돌 듯 보이는 검은색 머리카락 밑에서 유독 하얗게 빛났다.
채 얼굴을 제대로 관찰하기도 전에 휙 돌아서서였는지 날카로운 콧대와 근사하게 이어지는 이마의 선만 보여 준 남자의 뒷모습은 지나치게 큰 키 덕에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
지선이 차가운 바람을 고대로 맞으며 멍하니 있자 처음 보는 모양의 새카맣게 윤기가 흐르는 커다란 외제차에서는 요란한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지선은 정신을 차린 듯 차창을 올리고는 급하게 차를 빼다가 하마터면 옆 차를 스칠 뻔했다. 떨리는 손으로 차를 몰아 검은 차 옆으로 가자 그 차는 재빠르게 지선의 차가 주차되어 있던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여전히 옆모습만 뿌연 차창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콧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만큼 반듯하고 날카로웠다. 백미러로 힐끗 보니 한 번에 차를 밀어 넣은 남자가 차에서 내려 느긋한 걸음걸이로 오드의 건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 추워, 추워…….”
누구도 들을 리 없는 대사이지만 버릇처럼 내뱉은 말이 컴컴한 원룸 안에 울려 펴졌다. 불보다 보일러 스위치를 먼저 찾은 손은 다행이다 싶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9시. 남보다 일찍 퇴근이라니, 말도 안 되는 쿠폰이었다. 시멘트가 쩍쩍 얼어붙은 이런 날씨에 무슨 공사를 하겠다고……. 부대찌개 때문에 자처한 일은 부대찌개 집이 문을 닫을 때나 되서야 끝났다. 설사 문을 열었다고 할지라도 그 날씨에 식당 앞에 차를 세우고 주문이 나오길 기다렸다가 포장한 그릇을 들고 돌아오는 번거로운 일을 할 생각은 나지 않았다.
외출로 해 놓은 덕에 따듯한 기운은 없지만 그래도 냉골 같지는 않은, 자신의 방이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삼고는 얼른 온몸을 둘둘 감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옷들을 풀어 내렸다. 오늘 같은 날은 샤워는커녕 화장을 지우기 위한 세수 따위도 하기 싫을 만큼 춥고, 힘들고, 배고픈 날이었다.
배가 고프다 못해 허기가 진 지선이 급하게 싱크대를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즉석 밥 하나와 맛없다고 먹지 않은, 새로 나온 3분 카레 두 개가 남아 있었다. 라면이라도 있으면 따뜻한 국물이라도 먹겠는데…….
일단은, 어느 정도 추위가 가시고 나니 보일러를 꽤 세게 틀었는데도 한기가 가시지 않았다. 밖이 어지간히 추운 모양이었다.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월급이 센 만큼 할 일도 많은지라 지선은 수면양말을 꿰어 신고서는 침대 위에 있던 이불을 통째로 끌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나마 제도나 디자인이 끝나서 망정이지 그 큰 프로그램을 돌리는 것은 이 똥컴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다만 이리저리 그녀가 자주 다니는 거래처의 내장재나 디자인 용품을 검색하면서 이번에 맡은 리조트의 식당 겸 카페의 리모델링 건에 알맞은 것들을 미리미리 찾아 놓아야만 했다. 늘 하듯 옆에 맥주 캔이라도 끼고 있어야 했는데 날이 어찌나 추운지, 냉장고 안에 차게 식혀 둔 맥주가 영 내키질 않았다. 다만 아쉬운 대로 벌써 밑바닥이 보이기 시작하는 오징어포를 씹으면서 졸린 눈을 비비며 검색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뭐라고요? 아니 이게 오케이 사인이 난 지 언젠데 백지화라니! 그게 말이나 돼요? 오 팀장님!”
지선이 꽥 하고 지르는 소리에 사무실의 반은 무슨 일인가, 나머지 반은 저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팀장의 자리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당사자는 그런 시선을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니 백지화라니, 어젯밤에 졸린 눈을 비비며 거래처에 쪽지까지 보내고 오늘 점심 약속까지 잡아 놨는데 전면 백지화라니!
“타당한 이유를 대시라고요. 오케이 사인 떨어진 지가 이 주 반이에요. 20일이라구요. 공사 들어가야 할 날짜가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미친 거 아니에요?”
한겨울에도 늘 흥건하게 땀이 흐르는, 본인의 말에 의하면 보온 단열 효과가 큰 진피 층을 가졌다는 거대한 배 둘레의 팀장은 늘 하는 버릇처럼 눈처럼 하얀 손수건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를 닦아내면서 말했다.
“알아, 안다고. 그럼 내가 제일 잘 알지.”
“잘 아시는 분이 이게 말이나 되요? 부하 직원이라고 막 약 올려도 되는 거예요?”
“아, 이지선 씨 그건 아니지, 위에서 안 된다는데 어떡해……. 나도 다 월급받는 월급쟁이라고.”
지선은 억울함에 책상을 내리쳤다. 어떻게 그런 행동까지 나왔을까.
“뭐라구요? 아니 오 팀장님 본인께서 오케이 하시고, 박 실장님이 오케이 했으면 됐지, 우리 사무실에 또 어느 높은 분이 있어서 여기에 브레이크를 거는데요?”
건축 사무소 오드를 이끌고 있는 박 실장과 리모델링 팀과 건설 팀으로 나눠진 두 개의 부서 중에 리모델링 팀의 팀장인 오 팀장은 분명히 말했었다. 딜리시안 리조트의 200여 평 규모의 꼭대기 층 전체의 리모델링 디자인을 세 사람의 디자이너가 맡게 되었고, 그중에 이지선의 시안이 발탁되었다고.
그에 대한 주위의 축하와 시기를 받은 것이 불과 이 주일 전이었다. 그것 때문에 지선이 전부터 맡았던 일을 거의 올 스톱하다시피 하고 여기에 매달려 식음을 전폐하고 날밤을 새운 것이 몇 날 며칠인데…….
눈에서 불이 나올 것 같은 지선의 얼굴을 보면서 손수건을 든 손을 더욱 바쁘게 움직이던 오 팀장이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
“그게 말이지……. 딜리시안 건이 보통 큰 건이 아니잖아. 그래서인지 아니면 뭐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진짜 보스가 오셨어. 그분이 안 된다잖아.”
“에?”
가뜩이나 퀭해서 더 커진 것만 같은 그녀의 눈이 일그러졌다. 아니 보스라니, 여긴 건축사무소가 아니라 무슨 조폭 사무실인가?
“아니 또 누가 있다고…….”
그러나 그녀의 말문은 거기서 닫히고 말았다. 실장의 윗사람이라면, 바로 저 늘 닫혀 있는 하얀색 문 뒤에 있는 방의 주인?
“맞아. 3년 만이야. 지선 씨가 들어오고 얼마 안 되서 한국을 떴거든. 거, 뭐 왕의 귀환이라고 해야 하나?”
일이야 매섭게 잘하지만 늘 실없는 말을 달고 사는 살진 얼굴에서는 어색한 웃음과 농담이 새어 나왔다.
왕이라니 젠장, 왕이 아니라 염라대왕 오라비라 해도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어디가 문제란 말인가.
“지금 있어요?”
지선이 책상 위를 내려치느라 흐트러진 서류뭉치를 챙기면서 도전적으로 물었다. 흡사 콧구멍에서 김이라도 뿜을 분위기였다.
“아, 왜…… 가 보려고? 아니, 그게 좀……. 내 말 좀 들어 보라고.”
“오 팀장님은 브레이크 건 적이 없다면서요. 그러니까 거기 가만히 계시라고요.”
“저기, 그러지 말고 말이지.”
“그러지 말고 말이지가 어디 있어요? 지금까지 한 일이 다 물거품이 되게 생겼는데. 됐다고요. 내 그 왕님인지 눈이 제대로 안 붙어 있는 장님인지한테 직접 물어볼 테니까!”
오 팀장의 얼굴에는 난처함과 곤란함이 가득 차긴 했지만 한쪽 구석, 그러니까 살진 턱 주위의 입가에는 슬쩍 기대가 서려 있기도 했다. 저 바싹 말라서 바늘로 찔러대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여자가 보스를 대면하면 어떤 느낌일까?
지선은 두툼한 서류철을 들고는 화가 났다는 표시를 하고 싶은 듯 성큼성큼 걸어서 그 늘 닫혀 있던 하얀색의 하이그로시 문에 달린 은빛 문고리를 잡고 잠시 분을 삭이고는 신경질적으로 노크를 했다. 사무실의 복잡한 미로 같은 칸막이 뒤로 각자 자기 일을 하고 있던 모든 직원들의 눈빛이나 시선이 모두 그곳으로 집중되어 지선의 뒤통수에 꽂히는 것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기에, 담당자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근 이십 일이나 공을 들인 일을 일거에 백지화시키는 건지 꼭 따지고 봐야 했다. 그러나 문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없었다. 사람을 무시하는 건가? 지선은 다시 한 번 신경질적으로 문을 두드리고는 벌컥 문을 여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문을 열자마자 문 안에서 느껴지는 것은 불어 나오는 것 같은 찬바람이었다. 한겨울인 것도 맞고 또 이상 한파라며 연일 갱신되는 최저기온이라지만 수입 좋은 사무실은 두터운 겉옷은 벗고 적당한 카디건 하나로도 버틸 만큼 늘 난방과 습도 조절이 잘 되어 있는 곳이라 퇴근할 때는 싸늘한 집이 싫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대표이사의 방이라는 데가 이렇게 냉골이라니…….
지선은 소름이 쫙 끼칠 것 같은 바람과 냉기 속에서 혹 아무도 없는가 싶어서 도로 나가야 하나 생각하면서 근 3년 동안 제대로 본 적이 없는 베일 속의 검은 방을 훑어보았다.
광택 나는 하이그로시의 하얀 문과는 달리 온통 무광의 새카만 색으로 도배가 된 싸늘한 방은 검은색 하이그로시의 탁자나 천장에 반 간접 식으로 매립된 LED등이 켜져 푸르스름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색의 푹 파묻힐 만한 가죽의자와 역시 검은색으로 된 철제구조의 책장, 스틸구조의 스탠드까지. 분명히 3년 동안 닫혀 있던 방이므로 인테리어를 새로 했을 리 없는데 워낙에 군더더기가 없고 완벽하게 심플한 구성으로 되어 있어서인지 전혀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다.
‘인테리어 하나는 딱 떨어지네.’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이라서 목구멍 안으로 삼키면서 지선은 자신의 손에 들린 지중해풍의 클래식한 디자인하고 살짝 비교를 하고 말았다.
지선은 머리를 흔들면서 이 싸늘한 집무실에 있을 리 없는 그 왕님을 어디 가서 찾아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쏟아낼 수 있을까 싶었다. 막 돌아 나가려는 순간 검은색 강화유리로 된 파티션 뒤에서 갑자기 무슨 소리가 났다.
“……됐어. 됐다. 이제 그만해라. 안 들은 걸로 할 테니. 그만해.”
전화통화 중이었나? 아까의 그 적막은 뭐였지? 본의 아니게 전화통화를 엿듣게 된 지선은 부글거리는 화는 여전했지만 뭔가 타이밍이 좋지 않은 듯싶어 당황스러웠다. 그러다가 곧 자신이 두 번이나 노크를 했고 그 정도면 안에서 귀가 먹지 않은 이상은 들었을 게 분명하니 제멋대로 상사의 집무실에 쳐들어왔다는 혐의는 벗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됐기에 한 발자국 나서서 헛기침을 했다.
“음……, 흠……. 저기…….”
뭐라고 불러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유리 파티션 뒤에서 커다란 손이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쫙 펴 허공에 멈춰 세웠다. 아마 지금은 말하지 말란 뜻이겠지. 숨만 들이쉬고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서 있는 지선 대신 안쪽에서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미안하다고 할 테니 그만. 이제 그만해. 더는 관심 없다.”
지선은 아까의 당황스러움이 가시자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지막하고 깊게 울리는 목소리, 밖에 있는 사람들의 성대 구조로는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목소리, 그리고 또한 낯설지 않은 목소리……. 아, 어디서 들어 봤더라?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손은 사라지고 검은색의 강화유리 파티션 뒤에서 나타난 목소리의 주인공은 지선을 당황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는 금방 입에서 뿌옇게 입김이라도 뿜어질 것만 같은 차가운 방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검은색의 셔츠만 달랑 입은 채였다. 여름인지 가을인지 구별이 안 되게 목줄기가 드러나도록 단추 두어 개가 풀어진 셔츠 밑으로 보이는 하얀 목덜미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 위에 있는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무슨 일이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입고 있는 새카만 셔츠와 정반대로 지나치게 새하얀 남자였다. 그 무슨 흡혈귀가 주인공이어서 분칠을 떡칠하고 나오는 남자 주인공보다 더한, 창백하리만큼 하얀 얼굴의 남자가 약간의 조소를 띤 채 지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 안보다 싸늘한 눈빛, 한쪽만 비뚜름하게 올라간 입술선, 손을 벨 듯한 날카로운 콧대, 뒤로 넘긴 새카만 머리 아래로 시원스레 드리워진 이마……. 너무 비현실적인 미모의 남자가 지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이 남자 그 주차장에서의 그 남자로구나. 순간적으로 멍해진 지선은 빨리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 많으면 수백 명의 사람들과 스치고 부대끼며 살았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하도 친구가 졸라대서 그 무슨 영화의 시사회인지에 갔다가 본 영화배우도 이 남자 같지는 않았다. 이 남자……. 고개를 옆으로 삐뚜름하게 빼는 게 버릇인가.
“음.”
지선답지 않게 헛기침을 했다. 아니 너무 추웠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지선은 자신의 이 흐트러진 정신 상태를 재빨리 추슬러야 했다. 그래, 이 냉골 같은 시커먼 방 안에 온 건 이유가 있었다.
“딜리시안 건 때문인데요.”
지선은 되도록이면 딱딱하게 말을 꺼내려고 애썼다. 남자의 외모 따위에 당황한다는 것은…… 자신과 절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딜리시안?”
남자가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려는 듯 커다랗고 하얀 손으로 쓸어 올리면서 되물었다. 분명히 자신의 입에서도 나온 단어인데 남자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네, 그 딜리시안요. 딜리시안 스카이라운지 구조 변경 건, 다음 주부터 공사 들어가야 하는데 전면 수정? 아니 뭐라고 해야 되죠?”
“전면 백지화.”
마치 총알이라도 쏘듯 몰아붙이는 지선의 목소리에 찬물을 끼얹듯, 아니 이건 싸늘한 찬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묘한 울림 때문에 습기가 가득한 것만 같으니까. 뭔가 뜨거운 물을 끼얹은 것 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명료하게 울렸다.
“아, 당신이 그랬군요. 이유가 뭐죠?”
이제야 남자의 얼굴보다는 자신의 그동안의 노고가 생각났다. 아니 어디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놈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그동안 며칠을 밤잠을 설치고 한 작업을 온통 뒤집어엎다니 무슨 이유인가 하는 억하심정이 이제 적나라하게 솟아 나오고 있었다. 원래 사는 게 투쟁이자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지선의 성미에 딱 맞는 분야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가 막 입을 채 열기도 전에 지선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눈앞에 있는 탁자 위에 쿵 하고 소리가 나도록 던지듯 내려놓고는 쏟아내듯 내뱉었다.
“저희가 맡은 이번 일은 규모도 지난 일들에 비해서 비교도 안 되게 크기도 하거니와 이미 그쪽 딜리시안에서도 오케이 사인이 났고 일부 협력 업체에 벌써 하청이 들어간 상태라고요. 그리고 이 시안을 위해서 대체 몇 사람이 고생했는지 아시는 겁니까? 그런 건 생각도 없이 단칼에 캔슬한 이유가 뭐죠?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거죠?”
마치 기관총을 난사하듯 말을 쏟아내는 지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키 큰 남자는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음을 날렸다. 지선은 ‘아’ 하는 소리가 입 밖에 나오지 않게 조심해야만 했다. 마치 무슨 화보 촬영이라도 하듯 입꼬리를 올린 남자의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남자는 그녀가 항의조로 쏟아 놓은 서류철들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정확하게 도면이 그려진 파일을 펴더니 입을 열었다.
“여기, 가 봤거든.”
“……?”
아니 아직 완공은커녕 설계도만 있는 곳에 어떻게 간단 말인가? 딜리시안의 지금 있는 스카이라운지를 가 봤다는 이야기인가?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공사하기 전에 공사할 곳을 가 보는 건…….
“당연하죠. 가 보셔야겠죠. 그런데 그거하고 무슨 상관이라는 거죠?”
다분히 도전적인 지선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듯 그는 천천히 세세한 도면을 넘기면서 말했다.
“……아니 거기 말고, 여기 있는 이 장식 말이야. 이건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베이에서였던 거 같은데. 이 연결된 복도와 레스토랑으로 넘어가는 턱 있는 복도에 설치된 장식창, 음, 가운데 장식은 좀 다르군. 그리고 여기 창틀은 이그니스인가, 아마 시드니에 있었던 거 같은데. 내 기억이 맞는다면 거기 유럽식 디너 전용 레스토랑이었던 이그니스의 바다 쪽 창틀이었을 거야. 색깔을 안 써 놔서 모르겠지만 재질이 대리석이라면 화이트나 아이보리 계열……. 음, 그리고 가운데 여기 로비 장식 이건……. 저쪽 중동 쪽이었던 것 같은데 버즈 알 아랍은 아니었던 거 같고. 아, 파크 하얏트, 거기도 좋았지. 또 다른 곳들도 이야기해야 되나?”
콧김이라도 뿜을 듯한 기세로 서 있던 지선은 서서히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아, 뭐야……. 저거 다 진짠가? 이번 리모델링 디자인은 유럽식으로 콘셉트를 잡고 그곳의 책임자와 여러 번 말을 나눈 뒤에 몇몇 호텔의 고급 식당 사진을 뒤적이면서 상담을 했던 내용들이었다. 솔직히 지선은 해외여행이라고는 가 본 적도 없었고 심플하고 간결한 디자인을 주로 해 왔던지라 이런 유럽식의 고풍스러운 앤티크풍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어서 그냥 평소에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 배경화면에서 본 이미지를 조금씩 차용했을 뿐이었다. 남자의 입에서 나온 곳들은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전 그런 것들 몰라요. 제가 뭐 다른 디자인들을 그대로 카피했다는 겁니까?”
자신은 전혀 그런 기억이 없기에 여전히 꼿꼿하게 대답을 요구하는 듯한 표정으로 남자를 쏘아 보았다.
“글쎄, 그대로 카피는 아닌데 워낙에 인상 깊은 곳들이 고스란히 보이니 말이지. 하지만 가운데 장식이나 들어오는 동선도 그렇고 천장의 디자인도 맘에 들어. 그러니까 내가 캔슬한 이유는 굳이 남의 디자인을 베낄 필요가 없는 거 같은데 군데군데 짜 맞춰 놓은 게 눈에 너무 보여서 말이지.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인테리어를 한곳에 모아서 그럴듯하게 통일시킬 수 있는 건 뛰어난 재능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까 그냥 당신 머릿속에 든 걸로 해 보라고. 훨씬 나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