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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지선은 뭔가 말을 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꼿꼿한 자세와 도전적인 표정을 짓고 있기에도 벅찼다. 남자의 삐뚜름한 얼굴은 한 꺼풀 옅은 기름종이라도 씌운 듯 몽롱하고 비현실적이었다.
“스스로의 것으로……. 자신의 것으로 디자인하라고. 알아듣겠어?”
뒤에 ‘알아듣겠어?’라는 말이 없었다면 아주 어리바리하게 감동만 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말 한마디가 지선의 오기에 확 불을 붙였다.
“정말 죄송하네요. 나름대로 사측하고 충분한 상의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대표님이 그렇게 지적질을 하시면 어쩔 수 없지요. 다시 하겠습니다.”
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대답이었다. 지적질이라는 말을 들은 것인지 아닌지 남자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띤 채였다. 그러나 지선이 조금만 자세히 봤다면 그의 눈에 전혀 웃음기가 없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지선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흩어진 파일과 서류들을 신경질적으로 챙기고 있는 지선을 여전히 강화유리 탁자에 한쪽 엉덩이만 걸친 채로 보고 있던 그가 말했다.
“뭐, 기한이 촉박하다니까 그럼 창틀하고, 복도 디자인하고 그것만 바꿔 봐. 전체적인 분위기는 맘에 들어. 그 가운데 장식도……. 그러니까 3일이면 되겠지?”
“뭐라고요?”
그녀의 입에서 날카로운 목소리와 하얀 입김이 휙 불어 나왔다.
“3일, 공사 기간의 연장은 없어. 우린 위약금 같은 거 물 생각 없으니까. 부자재 업자 선정 같은 건 딴 사람 시킬 테니까 당신은 디자인에만 신경 써.”
뭐라 말을 해야만 했다. 3일 만에 그걸 다시 하라는 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억지에 가까운 오더였다. 무려 열흘이나 걸린 것을……. 그러나 지선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것은, 어이없게도 ‘당신’이라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엉뚱한 소리 때문이었다. 당신? 당신이라고? 단 한 번이라도 그런 호칭으로 누구에게 불려 본 적이 있던가? 아니 무슨 생각으로 저런 호칭을 쓰는 거지? 그러나 지선은 정신을 차려야 했다.
억척스럽게 일을 하는 무식하리만치 저돌적인 생활 방식 하나만으로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아무리 전체적인 분위기가 잡혀 있다 해도 캐드 작업하는 데만 그 시간은 걸린다구요. 삼 일 안에 그걸 어떻게…….”
“안 돼?”
그가 몸을 일으켰다. 한쪽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어도 큰 키였다. 온통 새카만 색의 바지와 셔츠, 구두와 하얀 이마 위에 잘 넘겨진 머리카락까지 단 한 조각도 어긋남 없는 검은색이 싸한 냉기와 함께 눈앞에서 몸을 일으키니 지선은 정말로 무의식적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는지 아니면 움찔거리는 동작에 의아했는지 몸을 일으키다 말고 잠시 멈칫한 그는 그녀를 위해서인지 몰라도 슬쩍 뒤로 물러섰다.
“2년 만에 그렇게 큰 디자인의 총괄을 맡을 정도라면 능력이 있는 거겠지. 혹 능력도 없이 그 자리에 있는 거라면 오드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거고.”
“뭐라고요?”
남자의 말에 지선은 다시 발끈해서 소리 쳤다. 아니 이 자리, 이 위치에 오기까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멀대 같은 너 따위가 뭘 안다고.
“소리 지를 기운이 있다면 당장 나가서 이것부터 어떻게 해 봐. 문 열어 줘?”
그가 진짜 문이라도 열어 줄 듯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가려고 하자 지선이 대답했다.
“친히 안 열어 주셔도 알아서 나갈 다리와 문을 열 팔 따위는 달렸으니까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남자의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외모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지선은 신경질적으로 앞에 흩어진 서류들을 챙겼다. 그러고는 남자의 손에 들린 서류마저도 거의 억하심정으로 빼앗으려는데 그가 휙 팔을 올렸다.
“이건 폐기할 거니까 가져갈 필요 없잖아.”
지선의 키가 작은 건 아니었다. 다만 오늘 여러 군데 바깥 협력업체에 직접 갈 일이 있는데다 어제만큼 추울 것 같은 날씨를 염두에 두고 굽이 거의 없는 어그 부츠를 신고 있었다. 그 탓에 딱 바닥에 붙어 버린 것 같은 모양새라 남자가 긴 팔을 휘둘러 서류철을 위로 빼 올리자 마치 장난꾸러기 동급생이 같은 반 여학생을 놀리는 것 같은, 그것도 초등학교 저학년에서나 보일 만한 모습이 되어 버렸다.
지선은 손을 올렸다가는 곧 거둬들여 버렸다. 뭐라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더 이상 말을 섞을 기분도 아니었다.
그가 빤히 자신의 도면을 보고 있는 것을 이를 악물고 쳐다보다가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인사 비슷한 시늉을 하고는 획 하고 바람이 불 정도로 몸을 휘돌려 그 냉골 같은 방을 나섰다. 손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 때문에 소름이 쫙 끼칠 것 같았지만 문을 열자 곧 밀려 들어오는 따뜻한 공기에 푸르딩딩했던 안색마저 돌아올 지경이었다.
‘정말 악취미네. 난방비조차 아까운 거야?’
일부러 꽝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씩씩거리면서 방을 나선 지선에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수십 개의 눈동자가 화살처럼 꽂혔다. 살아 나온 그녀를 다시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뭐라 셔?”
마치 문을 귀에 대고 엿듣기라도 한 듯 문가에 가까이 선 오 팀장이 득달같이 물었다. ‘다시 하래요.’하고 이야기하면 자신의 시안이 선택되지 못했다고 샘을 내던 다른 디자이너들한테 고것 봐라 하는 듯한 조소의 눈빛이 쏟아질 것이 뻔할 것 같았다. 아예 다시 하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좀 고치라고 했어요. 기일이 촉박하니까.”
“어? 그래? 내가 듣기에는 아예 다시 하라고 했던 거 같은데 말이지. 근데 이유가 뭐래?”
‘내가 디자인을 베꼈대요.’라고 하기엔 또 자존심이 상했다. 지선이 뭐라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등 뒤에서 달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어디 나가십니까?”
오 팀장의 시선이 자동으로 지선에게서 벗어났고 지선에게 박혀 있던 수십 개의 눈동자도 일제히 지선의 등 뒤를 향했다. 한꺼번에 시선이 옮겨진다는 게 이런 느낌이군. 지선은 씁쓸하게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자신도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고 싶은 것을 꾹 참아야만 했다.
“수고.”
남자의 목소리가 짧게, 그러나 뇌리에 콱 박히도록 지선의 뒤통수를 스쳤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작은 한숨 소리, 혹은 숨을 삼키는 소리…….
발소리가 멀어진다. 지선은 그제야 출입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온통 새카만 옷의 남자는 빈티지 풍의 가죽 재킷을 한 손에 든 채 유유히 문을 열고 저 차가운 바람이 난무하는 곳으로 나가 버렸다. 다리가 길어서인지 일부러 행동을 빨리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와……. 진짜 키 크다.”
“어머! 더 멋있어진 거 같아. 울 대표님은 완전히 나이를 거꾸로 먹나 봐.”
“아우, 미쳐.”
여직원들의 탄성이 이어지고 남자들의 불만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 팀장은 마치 저 빛나는 외모의 남자가 자신의 자랑거리라도 되는 듯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뿌듯한 얼굴을 해서는 지선에게 말했다.
“이지선 씨는 진짜 강심장 맞아. 보스한테 따지러 들어가고 말이지. 그래서 어딜 고치래?”
오 팀장의 목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남자의 비현실적인 외모는, 책장을 접어 두듯 접어 넣을 수 있다. 그러나 남자가 말한 그 ‘당신’이라는 말이 주는 묘한 어감이, 왜 아까는 그다지 큰 느낌이 없었는데 그 남자가 차가운 바람 속을 헤치고 나서자 머릿속에 울리는 건가? 아니 그런 어감 따위를 기억하고 있는 자신은 또 뭔가?
“아, 젠장. 더럽게 춥네…….”
지선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한테나 이런 말이 나올 만한 날씨였기 때문이었다. 연일 최저기온을 갱신하기 바쁜데 날이 풀린다는 소식은 들릴 기미도 없었다.
“킁, 휴지 없어요?”
잔기침을 하던 지선이 따뜻한 공기가 가득한 실내에 적응하지 못하고 킁킁거리면서 물었다.
“이구, 여자가 좀 조신하게 가방에서 꽃무늬 손수건 같은 거 좀 꺼내서 새초롬하게 얼굴 돌리고 킁 못해?”
“더럽게 손수건에 코 풀고 가방에 도로 넣으란 말이에요? 꽃무늬 휴지도 널렸구먼, 주기 싫음 마세요.”
지선은 일부러 보란 듯이 문가에 있는 조 차장의 크리넥스 티슈를 잔뜩 뽑아 들고는 요란하게 킁킁거리면서 옆을 지나갔다.
“에구, 저걸 누가 데려가?”
뒤통수에 대고 소리치는 조 차장의 목소리는 금방 깨끗하게 지워지고 없다. 데려가긴, 그런 끔찍한 일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선이 짐짝을 부리듯 책이며 카탈로그며, 파일 철들을 자신의 책상 위에 쏟아 놓자 소리가 요란했지만 이른 출근이라 오 팀장 자리조차 비어 있었다.
너무 추워서 머리도 못 감고 부스스한 채라 오늘은 하루 종일 구석진 자신의 자리에 처박혀서 캐드 프로그램에나 매달리기로 작정을 했다. 이럴 때는 자리가 구석진 것이 다행스럽기도 했다.
새로운 도면에 매달린 지 이틀째였다. 남자가 말한 삼 일이란 게 내일까지인지 그 다음 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제도 늦게까지 하다 집에 갔는데 이놈의 똥컴이 도저히 이 커다란 프로그램을 돌리질 못하기에 밤새 스케치만 해 댔다. 얼른 이것을 도면으로 옮겨야 할 텐데 오늘 하루로 될지가 걱정이었다. 제발 이걸 다 하기 전에 어제처럼 그 시커먼 남자가 사무실에만 나타나지 않길…….
“대표님 안 오셨어? 아, 이거 딜리시안에서 전화 한번 해 달라던데……. 전화번호 아나?”
“보스가 전화 가지고 다니는 거 봤어요?”
오 팀장이 이를 쑤시면서 대답했다. 얼굴이 벌건 거 보니 또 근처 만두 전골집에서 공기밥 두 개를 해치운 게 분명했다. 추우면 추위를 녹이려고 얼큰한 거, 더우면 이열치열이라 얼큰한 거라는 지론이지만 지선이 보기엔 푸짐한 양에 저렴한 가격 때문일 것이었다. 그러니 11시 40분부터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팀장이니 뭐라 말은 못하겠지만, 지선은 하얀 셔츠에 두어 방울 튄 뻘건 국물을 보고 터질 듯한 배에 그걸 다 담아 넣고 싶나 싶었다.
지선이야 몸도 옴짝하기 싫어서 근처 편의점에서 아침에 사 들고 온 컵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느끼함에 치를 떨며 진한 커피 믹스 두 봉지씩을 넣은 커피를 두 잔째 마시고 있었다. 커피가 바닥을 드러내자 오히려 커피 맛을 중화시키고 싶어 라면 국물 생각이 난다는 참으로 황당한 딜레마에 빠진 지선은 여전히 손목이 시큰거릴 만큼 마우스만 딸깍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지선 씨, 밥은 제대로 먹고 해?”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오히려 근심을 불러일으켰다.
“삼 일 안에 끝내라는데 밥이 넘어갈까요. 다 넘긴 다음에나 한꺼번에 먹을 생각이에요.”
“그럼 나랑 하루치 먹어. 날도 추운데 속도 비면 병 나.”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제발 말뿐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슬쩍 꺼내 보았지만 저쪽은 그렇게 해석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뿐이 아니라니까. 식었나? 아까 뜨거웠는데, 한 잔 마시면서 하라고.”
박 대리가 슬쩍 들이밀고 가는 종이 상자가 보였다. 일명 된장녀들만 먹는다는 별다방표 커피, 냄새가 달착지근한 거 보니 다들 노래를 부르는 캐러멜 마끼아또인 듯했다. 좀 진작 갖다 주던지, 이미 덜척찌근한 커피 믹스를 두 잔이나, 봉지 수로 따지자면 네 봉이나 마신 뒤였다.
물론 박 대리 같으면 그야말로 일등 신랑감이 따로 없었다. 남들이 이야기하듯 딱 적당한 30살의 나이. 어설프게 웃으면서 아홉 수 무사히 넘겼으니 올해는 장가를 갈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걸 기억하고 있는 자신의 기억력에 짜증이 났다. 처음 이곳에서 일하게 됐을 때부터 친절하게 일을 가르쳐 준다거나 저녁을 산다거나 하면서 맴돈 걸 잘 알고 있으니까.
3년이란 시간 동안 그렇게 뜨뜻미지근한 반응만을 보이는 여자의 감정을 이해 못하는 건지 아니면 백 번쯤 찍으면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그도 저도 아니면 그냥 버릇인지 이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불쾌한 건 사무실 모든 사람들이, 다들 그런 기류를 눈치채고 기대하다가 지쳐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아마 지치지 않은 것은 그 당사자뿐일 것이다.
지선은 달짝지근한 냄새가 나는 커피 박스를 슬쩍 발치에 내려놓았다. 냄새가 역할 지경이었으니까. 그러고는 얼른 미친 듯이 마우스를 클릭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또 높다란 칸막이가 참으로 긍정적인 역할을 해 주고 있어 다행이었다.
전쟁 같은 하루가 지루하게, 그러나 꿈틀거리면서 기어가고 있었다. 목 뒤가 뻐근한 지선은 가끔 기지개를 켜긴 했지만 자리에 일어날 시간도 아까울 지경이었다. 캐드 작업에 매달리다 보니 저번에 자신이 며칠이고 심사숙고해서 한 디자인보다는 훨씬 못한 것만 같아 속상하긴 했지만 그걸 채 느낄 시간조차 없었다. 이걸 어떻게 삼 일 만에 하라고……. 아마 그 남자의 그 무심한 얼굴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쓸데없는 오기를 부렸나 싶을 정도였다. 마우스를 클릭하는 손목이 다 시큰거릴 지경이었지만 지선은 늘 하던 대로 이를 악물고 맡은 일을 하려고 애썼다.
“와, 벌써 거기까지 다한 거야? 거의 신의 손일세. 참 대단하이. 그나저나 퇴근은 언제 해? 우리 일 끝나서 한잔하러 갈 건데.”
“말 시키지 마요. 나 오늘 날 새워야 될 거 같으니까. 잘들 가서 한 수십 잔씩들 해요.”
지선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구, 얼굴은 동안인데 진짜 온몸과 마음은 노친네일세. 그걸 어떻게 인간이 삼 일 만에 다 해? 다 하라는 거 농담이지. 걍 나가자. 잘생긴 남자가 농담도 잘하는 거라고.”
“가세요. 잔말 말고. 불 끄고 나가세요. 조 대리님이 전기세 많이 나온다고 뭐라 하셨어요. 나 불 꺼도 된다고…….”
지선의 볼멘소리에 여직원들은 다들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분명히 속닥거림인데 그것을 빙자한 볼륨이 너무 큰 듯했다.
“이구, 누가 건어물녀 아니랄까 봐. 하긴 나래도 대표님이 시킨 건 지문이 없어져도 다 하겠다. 또 알아? 다시 독대를 할지?”
“일부러 더 열심히 인 거 같다. 안 그래?”
저넘의 주뎅이를……. 지선은 이를 악물었지만 거기다 대고 뭐라 해서 저들의 입방아에 대놓고 오르내리기는 싫었다. 평소 같으면 뭔가 세게 한 방 쏘아 줄 수도 있었지만 이제 슬슬 끝이 보이는 일이 자꾸만 빨리 하라고 재촉하는 듯해 지선은 귀를 막아 버렸다.
“아이고, 알았어. 열심히 하쇼. 우리 간다. 난방은 어떻게?”
“꺼요. 나 열나.”
형광등도 아니고 60평이 넘는 넓은 사무실에 자기 한 명 때문에 난방을 돌리기도 뭣한 지선이 다시 대답했다. 열이야 나고 있지만 몇 번 남아서 일을 해 본 기억으로는 밤에 홀로 있으면 춥기는 춥다. 그러기에 인터넷 공구 때 산 전기스토브를 유용하게 쓰고 있으므로 지금도 그것으로 될 것 같았다. 한 두어 시간쯤이면 오늘 계획한 분량은 다 될 것 같아서 오늘 마무리를 짓고 내일 아침에 정리를 하면 되겠지 하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 가늠을 하고 무관심한 듯 컴퓨터에 시선을 꽂은 채 대꾸가 없자 나서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무실의 불을 껐다. 곧 푸르스름한 비상구 등만 몇 개가 켜진 채 사무실은 지선의 컴퓨터와 그 옆의 스탠드만 빼고는 암흑에 휩싸였다.
“어우, 무서워. 저런 데서 어떻게 일을 한데.”
“냅둬라. 집에 캐드 돌아갈 컴터가 없으시댄다. 그거 하나 새로 사기도 아까운가 부지, 뭐.”
“그 돈 벌어 다 뭐한다냐? 어디 강남에 땅 투기라도 한대? 호호호호…….”
창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꺼진 온풍기 덕에 적막에 싸인 사무실 안으로 슬쩍 울려오고 있었다. 다들 있는 집 자식들에 한 달 월급의 삼분의 이 이상을 명품 백이나 옷에다 투자하면서 사는 이들과 무슨 말이 통할까. 지선은 안 들리는 셈 치려고 했지만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한파가 절정이라는 밤답게 그전에는 난방 없이도 잘만 견디던 사무실에 금방 한기가 돌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책상 밑에 들어 있는 앙증맞은 전기스토브를 켰다. 금방 빨간빛을 내면서 다리 밑쪽의 공기가 데워지는 게 느껴지긴 했지만 어깨는 여전히 시렸다. 벗어 두었던 라쿤 털의 야상을 어깨에 뒤집어쓰고는 얼른 컴퓨터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다 차갑게 식는 손끝은 간간히 다리 밑의 스토브에 녹여 가면서…….
사무실 사람들이 나간 것은 거의 10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건설 팀 쪽에서 이번에 완공이 되면서 자축 술자릴 하러 가는데 리모델링 팀도 낀 것이었다. 리모델링 팀이야 딜리시안 건이 걸려 있긴 했지만 우선 자신이 손 보고 있는 설계가 완성돼야 그 밑에 자재 팀이나 공사 팀이 바빠지므로 그들도 함께 나가 버린 것이었다.
언뜻 화면 밑의 시계를 보니 1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12시 전에 사무실을 나가야 무인 경비 팀의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 텐데. 지선의 손이 바빠졌지만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 일은 쉬이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디자인의 문제인가…….
게다가 추위는 더 심해지고 있었다. 지선은 과열되면 안 된다는 주의 사항이 붙어 있는 것을 생각할 새도 없이 스토브를 최고 온도로 올린 채 다리 밑에 바싹 붙였다. 어깨가 뭉치는 게 이제는 감각이 없어지는 것 같고 눈알의 뻑뻑함이 정말 도를 넘는 것만 같은데 갑자기 삐리릭 소리가 났다. 등 뒤가 쭈뼛하게 서는 느낌이었다. 이 시간에 뭐지? 한 번도 사무실에 도둑이 들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럼 누가 도로 온 건가? 다들 회식을 하러 갔을 텐데. 건축일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다들 애주가라는 사실이었다. 한 번 마셨다 하면 두세 시가 기본인데 누가 뭘 잊었나? 지선이 잠깐 손을 멈칫한 사이에 삐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러고는 아주 익숙한 듯이 누군가가 문을 닫고 들어왔다. 발소리를 듣건대 외부인은 아닌 듯했다.
“누구세요?”
지선이 허공에 대고 소리를 쳤지만 제 심리만큼 물리적으로 나온 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워낙에 고요한지라 그녀의 목소리는 사무실에 공허하게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지선의 귓가에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 목소리의 주인은 절대 자신이 외부인이 아님을 아주 직설적으로 내뱉고 있었다. 어떤 이방인이 이곳에 남아 있는가 하는 불쾌함이 약간 묻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사무실에 있는 평범한 남자들의 목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아, 그렇다면…….
지선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자리가 구석인지라 사람이 있는 것이 잘 보이지 않아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물론 불빛이 보이겠지만 그것을 확인하러 저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은 더욱더 좋지 않았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아서 그러는데요.”
다른 사람이라면 좀 퉁명스럽게 ‘일하는 거 안 보여요?’라고 할 수도 있었다. 워낙에 다들 한 식구처럼 친하다고나 할까, 물론 표면적이지만. 그러나 저 목소리의 주인공은 친할 수도 없고 친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이 보고를 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컴퓨터의 화면 때문에 일시적으로 컴컴한 사무실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위치를 쳐다보았지만 제대로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멍한 채로 서 있는데 그쪽에서 잠시 침묵하더니 목소리가 들렸다.
“원래 이렇게 냉골을 좋아하나?”
‘냉골을 좋아하는 사람은 당신 같은 이상한 사람이나 그렇죠, 어디 좋아서 그러겠어요?’하는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지만 지선은 우선 앞이 보이질 않았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시트로마가 겨우 어둠에 반응을 했는지 어렴풋이 남자의 커다란 실루엣이 보였다. 그나마 쉽게 남자의 위치를 눈치 챌 수 있었던 것은 남자가 늘 하듯 시커먼 옷을 입은 게 아니라 오늘은 뭔가 희끄무레한 옷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혼자 있자고 60평이 넘는 사무실에 난방을 하는 건 낭비니까요.”
지선이 대답을 하는데 갑자기 무릎 쪽에 따끔함이 느껴졌다.
“뭐 타는 냄새 나는데?”
그와 동시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타긴 탄 게 맞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죽어 버린 여배우가 등장했던 드라마에 나온 대사가 생각나는 걸까, 껄떡거리는 남자 조연이 어디서 타는 냄새 안 나요? 내 마음이 타고 있잖아요, 라는 대사를 하던. 지선은 일어서 있느라 너무 가까이 붙은 자신의 다리와 스토브 사이의 거리를 생각해 내고는 최대한 천천히 다리를 뒤로 떼었다. 그러자 알싸하게 무릎 밑 한 10센티쯤 되는 부위에서 따끔거리는 느낌이 났다. 동시에 바지는?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밑으로 내밀어 황급하게 확인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냥 저 어둠 속에 희끄무레한 옷을 입은 남자에게 절대 조급하거나 허술한 면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이상스러운 오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뭐가 타는데? 뭐야?”
“전기스토브에 옷자락이 닿았을 뿐이에요. 조심하겠습니다.”
다리가 타들어 갈 뻔했는데도 조심해야만 했다. 저 남자, 그러니까 이 훌륭한 사무실의 오너께는 사무실의 안위가 훨씬 중요하실 테니까. 괜히 이런 난방 기구를 사용한다고 쓴소리를 들을 걸 생각하니 금세 짜증이 확 나기도 했다. 다 당신 때문인데 한마디만 더 해 봐라 같은 쓸데없는 오기까지 생겼다.
“다친 건 아니고?”
제발 좀 용무를 봤으면 사라져 줬으면 좋겠는, 지금 이 엄동설한에 이런 곤혹을 치르면서 일을 해야 하는 원흉이 된 남자는 짐짓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제발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해 주길.
“네.”
짧은 답을 하면서도 지선은 머릿속을 굴려야만 했다. 한 시간 정도 분량이 남은 이 일을 내일 새벽에 와서 해야 하는가? 왜 퇴근을 안 했느냐고 채근받을 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한술 더 떠 그까짓 것을 아직도 하냐고 할 수도 있을 터……. 따가운 것 같은 느낌이 올라오는 다리의 안위 따위는 관심 저 밖이었다.
남자가 잠시 생각에 잠긴 모습이 잘 보이는 것으로 보아 눈에서는 확실하게 암반응이 일어나고 있었다. 남자가 입은 옷이 회색 비슷한 재킷이라는 걸 확인한 지선이 밑에 있는 스토브를 신경 써 가면서 슬쩍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남자가 말했다.
“아직 할 일이 남은 건가? 그 딜리시안 건이지?”
순순히 그렇다고 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기엔 아직 일이 남아 있었다. 지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네, 조금 일이 남았습니다만 사무실을 비워야 한다면 퇴근하겠습니다.”
비상구를 나타내는 푸른 불빛 밑의 남자가 회색빛 슈트에 느슨해진 넥타이를 맨 채인 걸로 보아 사무실에 뭔가 다른 볼일이 있는 것만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 지선은 얼른 자신이 사라져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 뿐이었다. 대출금 이자 상환이 끝나면 12개월 할부로 컴퓨터를 하나 장만해야겠다고 늘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토록 뼈저리게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일이 얼마만큼 남았지?”
그가 다시 묻자 지선은 정말로,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입에서 말이 나가자마자 후회했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다 해서 나가려는 참이라고 했어야 했다. 그렇게 덧붙이려는 찰나 그가 말했다.
“컴퓨터 꺼.”
제기랄…….
지선의 입에서 짧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오너? 좋아, 좋다고. 그렇지만 잘난 당신 그 한마디 때문에 이 개고생을 이 개같이 추운 날 밤에 혼자 하고 있는데 당장 집어치우라고? 원하는 바다. 지선은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면서 당장 여유만 된다면 새로운 컴퓨터를 질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고는 열심히 손을 놀려 마우스를 바삐 움직여서 저장을 누르고는 컴퓨터를 껐다. 한 시간만 하면 얼추 정리될 것 같은 도면은 보기에는 안쓰러웠지만 어쩌랴, 끄라는데…….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이 야심한 밤에 여자가 혼자 회사에서 뭐 야동을 볼 것도 아닌데, 그만하고 일찍 들어가라든지 하는 단어도 얼마든지 구사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프로그램 종료를 알리는 음이 나는 동시에 달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가는지 안 가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참인가?
“들어와. 그 밑에 있는 것도 끄고.”
남자의 목소리가 고요한 사무실의 괴괴한 어둠 속에서 울렸다.
“……?”
지선이 멀뚱한 표정으로 있을 때 그 눈부시게 하얀 문 안에서 남자의 창백한 얼굴과 상체가 눈부신 빛을 뒤로하고 불쑥 튀어나왔다.
“60평 난방보다는 10평 난방 하는 게 낫겠지. 그거 오늘 내로 다 해야 돼. 다 못하면 차질 많아. 벌써 다 한 건 아니겠지?”
“네?”
“들어와서 하라고, 괜히 사무실에 불 내지 말고. 컴퓨터 다 메인 서버하고 연결돼 있으니 이쪽에서 로그인하면 될 거 아니야. 이 방 컴퓨터 3년이나 묵은 거라 신형은 아니지만 캐드는 돌아가는 거 그제 확인했어.”
“아…… 그게.”
당황스럽기는 했다. 그러나 이건 일을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자신이 일을 하면 저 사람은 대체 뭘 할 거지?
그러나 뭘 하러 다시 왔느냐 하고 묻기도 그랬다. 물을 만한 사이도 아니고 그런 질문을 함으로써 형성되는 애매한 친밀감도 불쾌했다. 지선은 상사의 명령이라고 여기고 옆에 쌓인 파일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순간 다리 밑이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제야 아까 스토브에 스친 다리와 입은 바지가 생각났다. 아, 다리에 이 정도 통증이 왔으면 바지는……. 낭패감에 짜증이 일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조건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스토브를 끄면서 살펴보니 스토브에는 눌어붙은 자국이 있고 베이지색 기모 바지는 흉하게 얼룩져 있는 게 언뜻 보였다.
기모 안감에 광택이 있는 폴리에스테르 100%라 비닐이 타는 냄새가 나긴 났다. 아니 자신도 몰랐는데 저 먼 곳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타는 냄새를 맡은 거지? 지선은 밑을 제대로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확인한다고 해서 갈아입을 것도 아닌지라 그냥 아예 보기를 포기했다. 본다면 아마 낭패감이 백 배는 더 심해질 것 같아서일지도 몰랐다.
일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컴컴한 사무실의 싸늘한 공기는 뒷목에 소름이 돋을 만했지만 등에 걸치고 있던 인조 라쿤이 달린 야상까지 끌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난방을 한다고 했으니 이곳보다는 낫겠지. 지선은 야상을 두고 되도록이면 똑바로 걸어서-쓰라린 다리 쪽을 무시한 채- 문이 열린 채 눈부신 빛을 뿌리는 검은색 방으로 향했다.
막 온기가 돌기 시작한 사무실은 그제와 별 다른 것은 없었다. 다만 자신이 써야 할 컴퓨터가 놓인 검은색의 강화유리로 된 작업용 책상이 눈에 들어 왔고 그 책상 위에 놓인 투명한 아크릴로 된 명패에 쓰인 대표 정우현이라는 단정한 서체가 한눈에 확 들어왔다는 것이 그제와는 달랐다고나 할까.
“그쪽에 있는 책상을 써. 책상 위에 컴퓨터 켜고, 패스워드 따위는 없으니까.”
밝은 조명 밑에서 듣는 남자의 목소리는 아까보다는 훨씬 명료하게 들렸다. 그러나 남자의 모습은 묘연했다. 또 강화유리 파티션 뒤인가? 차라리 남자가 안 보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는 지선은 걸음을 빨리해서 책상 쪽으로 갔다. 자신의 다리 아래쪽으로 시선이 떨어지려는 것도 막고 싶었고 또 1분 1초라도 일을 빨리 끝내고 사라지고 싶은 심정이니까. 각자의 책상 위에 있는 얇은 LCD 모니터보다는 약간 두꺼운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의 매끄러운 강화유리 책상에는 누가 와서 청소라도 했는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지선이 고개를 숙여 밑에 있는 꽤 둔중한 본체의 파워 스위치를 켜자 컴퓨터는 곧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막 검은 화면이 지나가고 푸르스름한 화면이 뜨자 이내 꽤 널찍한 대표실에는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지선이 화면에 뜬 로그인 창에 자신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는데 퐁 하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리는 것 같더니 어디선가 물이 끓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전기 주전자 소리인가? 지선은 되도록이면 여러 가지 감각 중에 시력만을 남겨 놓고 다른 것은 의도적으로 닫으려고 애쓰면서 자신이 저장한 지금까지의 노고가 담긴 아이콘을 클릭했다. 갑자기 아까 초저녁에 다들 퇴근하면서 비아냥거리던 여직원들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그네들이 지금 이 상황을 알면 참으로 할 말이 많겠다…….
도면이 로딩되느라 한참이나 버벅거리는 컴퓨터를 빤히 보고 있는데 뇌 한구석에서 묘한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왜 이런 ‘느낌’이 나는 걸까, 이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러나 지선은 더 이상 머릿속을 굴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책상 위에 올려놓은 파일을 넘기고 마우스를 딸깍거리면서 프로그램이 로딩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뇌를 비우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언뜻 컴퓨터 화면에서 벗어난 시선이 꽂힌 것은 검은색 덩어리 같은 가죽 소파였다. 디테일이 보이지 않을 만큼 온통 검은색인데 시선이 꽂힌 이유는 거기에 걸쳐진 남자의 회색 슈트 상의 때문이었다.
한창 은갈치처럼 번쩍거리는 게 유행을 해서 참 그것같이 보기 흉한 색도 없다고 했었는데 그 옷은 묘하게 짙은 회색으로, 번쩍거리는 광택은 없지만 왠지 매끄러울 것 같아 보였고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져 놓은 듯한데도 어깨선이 말끔하게 살아 있는 것같이 보였다.
‘별게 다.’
스스로 어이없어하는 사이 화면에는 그녀가 애써 손질한 도면이 떴다. 속도는 느리지만 화면은 큼직해서 자신의 것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게다가 연결되어 있는 마우스는 특이한 디자인으로 손을 올렸을 때 참으로 편안했다. 하루 종일 클릭을 하느라 손목이 시큰거릴 지경이었는데 착 붙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지선은 아마 컴퓨터를 끄고 이쪽 방으로 오는 짧은 시간이나마 쉬었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결론을 내 버리고는 열심히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고요한 가운데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칙칙거리는 수증기가 뿜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커피향이 나는 것도 아니니 커피를 끓이려는 것도 아닐 텐데……. 지선은 자꾸만 떠오르는 생각을 무시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또다시 머릿속에는 선으로 복잡하게 교차된 도면보다는 푸른 벌판, 그리고 꽃으로 만개한 초원 같은 것이 아스라하게 퍼졌다.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딸깍.
“마셔.”
소리가 난 곳에는 남자의 하얀 손끝과 투명한 머그컵에 담긴 녹차 같은 초록색의 액체가 모락모락 김을 올리면서 놓여 있었다. 녹차 색인데 전혀 다른, 뭐라고 말하기 힘든 꽃향기 같은 향기가 솟아오르는 잔은 뭉툭하지만 투명해서 그냥은 보기 힘든 디자인이었다.
“감사합니다.”
지선은 기계적으로 대답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길쭉한 손이 달린 몸통을 올려다보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면서 컵을 무시한 채 마우스를 놀리면서 말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없을 만큼 일이 밀렸나?”
이 남자 말투가 꼭 저런 식인가? 마셔 가면서 해, 라든지 한 잔 마셔 보지, 했다면 쳐다보지도 않을 수 있는데…….
지선은 마우스를 놓고 두꺼운 투명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가 찌르르 하니 마우스질 때문에 차갑게 굳은 손가락들을 녹이는 것 같았다. 아찔하도록, 향긋하다는 말 이상의 뭔가가 필요한 차향은 뇌리를 흔들 만큼 묘했다. 꽃도 아니고 풀도 아니고 무슨 새싹 같기도 하고.
“티베트에 고산지대에만 나는 네이차라고 하지. 스님들이 수양할 때, 이걸로만 끼니를 때우기도 해. 머릿속을 맑게 해 준다고 전해지니까.”
몽롱한 차향 사이로 더욱더 몽환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시하려고 애를 썼지만 말을 하는 사람을 쳐다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