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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어둠 속에서 보았을 땐, 그래도 느슨하게 넥타이가 매어져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헐렁한 셔츠만, 단추가 두어 개 풀어진 채인 남자는 자신의 손에 들린 묵직한 머그컵을 가볍게 들고서 책상 옆에 있는 검은색의 책장에 기대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새카만 옷만 입어서 창백하게 보이던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실크 재질 같은 옅은 회색의, 환한 불빛 밑에서 보니 희미한 세로줄 스트라이프 무늬가 들어간 셔츠를 입고 있었다.
밝은색의 셔츠와 아까 소파 위에 던져졌던 재킷과 같은 재질의 짙은 회색빛 하의. 약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이마에 드리워져 있고 네이라고 하던 풀 향, 혹은 꽃향기 같은 차향 속에 옅은 담배 냄새가 어딘가 꼭 재즈 바나 퇴폐적인 소울 카페 같은 느낌이 묻어나는 묘한 향기를 공중에 흩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이 무슨 어이없는 착각이람……. 지선은 고개를 숙이고는 초록색의 찻잔 속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가 얼른 한 모금을 마시고 곧 책상 위에 컵을 놓고는 다시 마우스 위에 손을 올렸다. 얼른 1분 1초라도 빨리 이곳에서 탈출해야겠다, 자신의 머릿속에 이 생각만으로 가득 차게 하려고 애쓰면서.
“거의 다 했군. 진짜 다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전에 요행으로 입사 2년 만에 이런 프로젝트 맡은 거 아니냐고 했던 말은 취소해야겠어.”
남자의 말은 칭찬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걸 느낄 새는 없었다. 어느 사이엔가 다가와서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화면을 들여다보는 남자한테서 나는, 퇴폐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 묘한 향기 때문에……. 부담스러움에 시선을 돌린 지선은 기계적으로 뻣뻣하게 흘러내린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말았다. 그것은 그녀가 곤란하거나 난처할 때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하필이면 남자의 드러난 목선, 갑갑한지 두서너 개 풀어 젖힌 매끄러운 실크 셔츠 밑의 팽팽한 목선과 쇄골이었다.
아, 이런 젠장…….
당신은 건어물녀입니까?
그 비슷한 질문이 적혀 있던 설문지가 문득 떠올랐다. 최근에 가슴이 두근거린 것은 계단을 오를 때뿐이었다. 그 항목에 동그라미를 치면서 언제쯤 가슴이 두근거리려나, 심장병이라도 걸려야 가능한 건가 하고 피식거리던 게 엊그제인데. 이건 무슨 조화람?
“한 시간이면 하겠네. 마저 다 끝내.”
남자가 고개를 들면서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지 않았다면 지선은 아직도 그 설문지에 동그라미를 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미묘하게 남자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불만은 무엇인가?
“뭐가 잘못됐나요?”
지선이 딱딱하게 되물었다.
“맘에 안 드시는 거라도?”
그건 그녀 스스로가 묻는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도 맘에 들지 않으니까.
남자는 그녀가 앉아 있는 푹신한 그의 회전의자 옆에서 채 30센티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서는 말없이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2.
1. 집으로 돌아오면 트레이닝복 차림이다.
2. 휴일은 노 메이크업&노 브라.(휴일뿐이랴!)
3. ‘귀찮아’, ‘대충’, ‘뭐, 어때’가 입버릇이다.
4. 술 취한 다음 날, 정체 모를 물건이 방에 있다.
5. 제모는 여름에만 해도 된다.(여름에도 안 해도 된다.)
6. 까먹은 물건이 있으면 구두를 신은 채로 까치발로 방에 가지러 간다.(심지어 까치발도 안 해!)
7. 메일(문자)의 답변은 짧고 늦게.(남친 曰 “얜 보고 대답 안 해도 되겠다 싶고 귀찮으면 아예 안 보낸다니까.”)
8. 문자 보내는 걸 너무 귀찮아해서 전화 오는 게 편하다.
9. 텔레비전을 향해 혼자 열을 낸 적이 있다.
10. 냉장고에 변변한 먹을 게 없다. 그러나 안주용 건어물은 늘 비치되어 있다.
11. 냄비에다 직접 대고 라면을 먹는다.(이건 다 이러지 않나? 티브이에서나 따로 담는 거 아님? 귀찮게 왜?)
12. 방에 널어놓은 세탁물은 개기 전에 입어 버린다.
13. 최근 두근두근했던 일은 계단을 뛰어 올라갔던 것 정도.
14. 1개월 이상, 일이나 가족 관계 이외의 이성과 10분 이상 말하지 않았다.
15. 솔직히 이걸 전부 체크하는 게 귀찮았다.
16. 솔직히 질문에 체크하면서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나 자신을 깨달았다.
허기와 추위에 지쳐 목 늘어난 티셔츠와 무릎 나온 트레이닝복을 입고 냉장고를 열자 맥주 캔 다섯 개와 둘둘 말린 비닐 지퍼 백에 든 오징어포, 그리고 쌈장 통이 눈에 들어왔다. 망설임 끝에 손끝에 닿은 것만으로도 냉기가 솟아오르는 맥주 캔 두 개를 꺼낸 뒤에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서 뒤를 돌아보니 3일 전에 한 빨래들이 고대로 건조대에 걸린 채 있는 것을 보고 떠오른 것이었다.
당신은 건어물녀입니까?
일을 다 끝낸 건 열두 시쯤이었고 그때까지 그 남자는 자신의 시야에서 얼쩡거리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도 한 듯 유리로 된 파티션 뒤에 모습을 감춘 채였다. 일을 끝냈다고 했을 때 남자는 잔뜩 찌푸린 인상이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회사를 나와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면서 길가에 가득 주차돼 있는 차들 옆에 겨우 주차를 하고 정말로 거짓말 안 보태고 체감온도 영하 30도쯤 되는 추위 속을 이백여 미터도 더 걸어 집에 오면, 파김치가 되어서 쓰러져야 하는 거 아닌가.
이 넘의 얼음장 같은 맥주, 정말로 뜨거운 물에 데워 먹고 싶은 심정이다. 허기를 싸늘한 맥주로 채워 넣으면서 내일 또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을 해야 하는데……. 최근에 두근거린 것은 계단을 뛰어올라갔던 정도? 최근에 심장이 두근거린 적은 올림픽 대로에서 있는 힘껏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남의 차를 추월했을 때밖에 더 있던가? 아깐 왜 그랬지? 지선은 반도 더 남아 묵직한 맥주 캔이 손에 들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빈속에 넘어가는 찌르르한 냉기 때문에 아까까지만 해도 날이 곤두서 있던 신경이 갑자기 불이 꺼지듯 확 꺼져 버리는 것을 느꼈다.
아, 너무 피곤했어. 이틀이나 거의 날밤을 새웠다고……. 아이 씨, 대표인지 보스인지 따위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뭐야. 간신히 침대에 들어가 잠에 빠져 버린 지선의 방에는 푸르스름한 컴퓨터 화면이 여전히 켜져 있었다.
오전 내내 팀 회의를 하고, 바뀐 디자인으로 또 회의를 하기 위해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은 거의 다 무거운 표정이었다. 이 엄동설한에 공사를 시작하는 것도 그렇고, 또 금액이 만만치 않은지라 부담감도 그렇고, 혹은 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기도 하고……. 그러나 역시 가장 표정이 굳은 것은 지선이었다.
“자자, 이쪽 자재 수급부터, 박 대리하고 이정미 씨 전에 연락했던 데 다 되지요? 그리고 내부 공사 팀은 외벽 먼저 시작하고 천장은 우선 이쪽을 한 다음에…….”
신이 난 사람은 오로지 오 팀장밖에 없었다. 지선은 이마를 찌푸린 채였다. 프레젠테이션이 되고 있는 설계도가 맘에 안 들어서일까. 아니다. 그것은 절대 아니었다. 디자인은 맘에 들었다. 그런데 엊그저께까지만 해도 영 맘에 안 들던 것이 왜 갑자기 맘에 들게 된 것일까? 지선이 분명히 3일 내내, 이틀 밤을 새워 가면서 한 디자인인데 영 맘에 안 들던 부분을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완성이라도 해 주었던 것일까?
석굴암의 깨진 맨 위 덮개돌(龕蓋)을 다시 만들려던 김문성의 고집이 지겨워 석공들이 몰래 밤새 맞춰 놓고는 부처님의 힘으로 완성됐다고 했다는 전설처럼 지선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도면이 대체 어디가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자신이 완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영 기분이 편치 않았다.
“아, 진짜 굉장해요. 딜리시안에서 아주 만족해서 돌아갔다고.”
그럼 저걸 손댄 사람은? 그 ‘대표님’은 어디로 사라진 거지? 어제는 물론이고 오늘도 깜깜무소식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듯 나타나지 않아도 어느 누구 하나 찾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원래 이런 건가?
지선은 자신이 입사하기 전부터 얼굴을 보이지 않던 사람이라 정말로 오 팀장과 박 실장이 공동 대표인 회사인 줄 알았었다. 이런 업계가 그렇듯 일명 바지 사장도 흔하기 때문에 저 열리지 않는 문은 그야말로 바지 사장이나 혹은 전에 일을 하다가 회사를 넘기고 간 사람의 방인 줄만 알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난데없이 나타난 오너를 전부 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이 사람들은 대체 뭐고, 또 그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도 늘 있는 다반사라 여기는 사람들은 대체 뭐인가? 그동안 자신이 느꼈던 이 사람들과의 일체심이나 애사심 따위는 다 신기루였나?
“지선 씨, 내일 딜리시안에 가야 하는 거 알지? 아마 며칠 거기 있어야 할 걸. 그러니까 짐 싸서 가져와. 지선 씨가 총괄 현장 책임자니까.”
박 실장이 와서 한마디 하는 통에 지선은 겨우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오 팀장님도 같이 가는 거 아니에요?”
“가지. 그런데 오 팀장 와이프가 산달이잖아. 오늘 낼 한다는데……. 하필 꼭 이럴 때 맞춰서 저런다니까. 그리고 안 그렇다고 해도 디자이너 총괄이 지선 씨니까 가서 이리저리 손봐야지. 이거 얼마나 큰 건인 줄 알지?”
알기야 알고 있다. 그런데 딜리시안 그 산속에 있다가 폭설이라도 내리면 꼼짝도 못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갑자기 몇 년 전에 아주 대유행을 했던 드라마도 생각났다. 한류열풍을 일으키기까지 했던. 아마 이렇게 한겨울에 리조트 내부 공사를 하다가 두 남녀가 눈이 맞았다지? 지선은 흥 하고 저절로 콧방귀가 나오는 것만 같았다. 적어도 그 드라마가 나오던 시절에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남자 따위 세상에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지선 씨, 점심 뭐 먹을래?”
두근거림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쳐다보고 있으면 하품이 날 듯한 대한민국의 딱 평균 30대 직장인의 얼굴이 지선의 칸막이 위로 드리워졌다.
“저기…….”
딱히 거절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남녀가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 그냥 좋으면 좋은 거였다. 그와 반대로 좋지 않은데도 이유가 없다.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도 좋아지지 않는 건 좋아지지 않는 거다.
“아무 거나요.”
지선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시큰둥하게 내뱉었다. 이 정도면 정말 지칠 만도 한데…….
“음, 그래. 날도 추운데 이따 만두 전골이나 먹지 뭐.”
만두 전골만 빼고요, 라는 말을 잊은 자신의 둔한 머리가 한스러워졌다. 아무렴 어떠랴. 어차피 위장을 타고 내려가서 허기를 면하면 화장실에서 다 나와 버리는 걸. 지선은 한숨만 내쉬고는 다시 세부 지시사항을 점검하고 인터넷으로 자재를 알아보고 전화를 하는 등 실무 공사에 관한 일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건설 팀은 벌써 또 다른 일이 있는지 자리는 절반쯤 비어 있었다. 오후에는 거래처에 가서 직접 자재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할 일이 많았다. 그냥 혼자서 편의점표 김밥으로 때우는 게 나았을 텐데. 지선은 언제부터 자신이 만두 전골을 싫어하게 되었을까 생각하다가 왜 이런 생각을 이런 귀중한 시간에 해야 하는 건지 싶어 다시 일에 신경을 쓰려고 애썼다.
어제보다는 한결 풀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영하 10도와 영하 8도의 미묘한 차이지만 그동안 연일 어제보다 더한 추위라는 말에 질려서 어제보다는 조금 기온이 올라갔다는 말에도 위안이 되는 것인지 하여튼 어제보다는 나았다. 화상에 좋다는 하이드로 밴드를 붙인 지 이틀째, 상처가 있는 부분은 하얗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무릎 밑이라 흉이 질 것 같기도 한데 원체 치마 따위는 입지 않기 때문에 별 미련은 없지만 아픈 건 아픈 것이었다.
간단하게 겉옷 한 벌씩과 속옷 두어 벌, 양말은 넉넉하게 싼 짐은 단출했다. 뭐, 당분간 눈 예보는 없다니 드라마처럼 로맨틱하거나 혹은 곤란해질 상황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다행스러웠다. 지선은 옷 가방보다는 산더미 같은 파일과 회사용 노트북, 디스켓 같은 것들이 더 중요했다.
오래전부터 손질하기 힘들었던 머리는 질끈 묶고, 출근할 때는 괜스레 정장 비슷한 옷을 입기 위해 애썼지만 이번에는 리조트의 현장에 가는 거라 그나마 편한 복장으로 두꺼운 폴라티에 기모가 든 둔중한 검은색 바지로 중무장을 한 채, 여전히 인조털이 무성한 야상에다가 장갑이며 목도리까지 챙겼다. 워낙에 추운 곳임을 잘 알고 있으니까.
“아, 큰일이네…….”
오 팀장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가득했다. 항상 웃는 상인 두꺼운 턱살 밑에 근심스러운 표정은 정말로 일 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든 표정이었다.
“왜요?”
지선은 차라리 혼자 가는 게 나을까 싶었다. 아무래도 그의 근심스런 이유를 아니까.
“나 혼자 가도 돼요. 가 보세요.”
“에구, 안 돼. 내가 책임자인데. 그래도 얼굴은 한번 비쳐야 해. 차라리 애가 빨리 나오면 좋겠구먼…….”
남들은 애 낳을 때 옆에서 머리채를 뜯기니 어쩌니 하는데 첫 애를 낳는 아내 곁에 있어 주지도 못하는 심정을 어렴풋이 알 듯도 했다.
“그쪽에서도 사정을 이야기하면 알아듣겠죠. 뭐 오늘 낼 한다니까 애기 낳는 거 보고 오시라고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언제 나올 줄 알아야 말이지. 딜리시안 쪽에 체면도 있는데 책임자가 가야지.”
책임자……. 그게 문제지. 지선은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디자인이며 자재 수급이며 다 자신이 담당한 거고 가서도 세부 지시사항은 다 자신의 손에서 떨어질 텐데도 책임자가 문제였다.
“박 실장님은요? 못 가시나?”
“박 실장은 이번에 라인 뮤지움에서 별관 짓는다고 거기 입찰 보러 갔어. 그 건도 꽤 크잖아. 우리한테 떨어질 확률이 커서, 떨어지면 오늘 못 들어와. 아이고. 큰일이네.”
덩치에 안 맞게 발을 동동 구르는 오 팀장의 이마에서는 또 땀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저 덩치에 신생아를 안고 있음 참 안 어울리겠다 싶은 실없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촉박해서 혼자라도 가야 하나, 거기까지 혼자 가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오 팀장의 내비게이션이라도 빌려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다시 한 번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들리자마자 통화 버튼을 누르는 오 팀장의 잽싼 손놀림은 참으로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아, 진짜? 지금 분만실로? 아, 알았어요. 내 지금 간다고…….”
지선은 혼자 어떤 길로 가야 하나 머릿속을 굴리면서 전화기를 든 채 재킷을 드는 오 팀장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났다.
“얼른 가 봐. 거긴 내가 갈 테니까.”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 보스!”
아무래도 적응이 안 되는 저 명칭…….
“미화 씨한테 내가 맞아 죽어. 출근 같은 건 왜 했어? 가서 머리채라도 당기게 옆에 있었어야지. 운전 조심해서 가. 또 급하다고 마구 밟지 말고. 아예 택시 타고 가든지.”
“아, 염려 마십쇼. 보스가 가 준다면야 내가 우리 미화랑 우리 뚱식이하고 같이 보스한테 절을 하지.”
“태명이 뚱식이가 뭐야, 이름도 그따위로 지을라. 얼른 가. 그리고 몇 호실인지 메시지 남겨. 꽃이라도 좀 보내게.”
졸지에 옆에서 방관자가 돼 버린 지선은 문소리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창백한 얼굴만 또 동동 떠 보이게 오늘도 역시 올 블랙 컬러의 셔츠, 재킷, 바지……. 게다가 여전히 보는 사람마저 한기가 들도록 셔츠 단추는 풀어진 채였다.
“참 내, 나처럼 추위 막아 줄 피하지방층도 없으면서 안 얼어 죽나 몰라.”
“수다 떨 시간이 어디 있어? 얼른 튀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오 팀장은 잽싸게 감사하니 사랑한다니 하는 말을 퍼부으면서 사무실을 뛰어나갔다. 그러자 넓은 사무실에는 두 사람밖에는 남지 않았다.
“늦었네. 가지.”
그는 대체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르게 나타나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앞장섰다. 지선이 멍하게 있자 그가 돌아보았다.
“이미 늦은 거 아니야?”
그 말에 지선은 자신이 바보같이 멍하게 있었던 것을 깨닫고는 얼른 파일들을 챙겨서 긴 다리로 성큼거리면서 걷는 남자의 뒤를 잰걸음으로 쫓았다. 아니 저 남자랑 횡성까지 가야 한다고? 좀처럼 당황해 본 적이 없는 지선에게 당황이라는 단어가 확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사무실 문을 열고 나서자 막 점심때가 지난 뒤라 한기가 좀 가신 듯했지만 차가운 날씨는 여전했다. 특히 저 남자 같은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보는 사람마저도 심기가 편치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곧 지선은 생각했다. 차는? 차는 대체 어쩌지? 저 남자 차로 가? 그 생각이 머릿속에 떨어지기도 전에 남자의 손에 들린 키가 삐릭 소리를 내더니 다들 나가 버려 휑한 주차장 한쪽 끝에 어디서 본 듯은 한데 영 기억이 가물거리는 미끈한 외제차가 응답이라도 하듯 라이트를 반짝거렸다.
“당신 차로 가면 좁겠지.”
왜, 다리가 길어서 뭐 접히나? 지선은 자신의 프라이드를 창피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튼튼하고 연비 좋고 가끔 이렇게 추운 날 말썽이지만 뚜벅이 시절보다 훨씬 자신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 준 기특한 녀석이었다. 그러나 매끈해서 꼭 주인을 닮은 것 같은 외제차 앞에서는 내세울 게 없는 건 사실이었으니 아예 기름 값 굳었다는 쪽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오랜만에 비싼 차 한번 타 보자는 생각도 들었다.
“짐은? 그게 다인가?”
그가 돌아보았다. 지선이 올려다보자 그는 전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까의 오 팀장과 친밀하게 말을 섞던 약간의 따사로움이 섞인 웃는 표정이 아닌 아무것도, 아무런 느낌도 없는 것 같은 건조한 표정이었다.
“짐 없나?”
이런 바보……. 지선은 근래에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실사로 본 적이 드물어서 이런 증세가 나타나는가 보다 하고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말했다.
“차에 있어요.”
어깨에 멘 숄더백과 두 손 가득한 파일을 든 채 자신의 회색 프라이드로 가서 짐을 꺼내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그가 다가왔다.
“그걸 다 들고 차 문은 어떻게 열어?”
참 바보 같은 짓을 가지가지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선에게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두 손 가득한 파일과 도면을 받아 들었다. 지선은 문득 남자의 검은색 재킷에서 풀 향기 같은 것이 스치는 것 같은 착각에 또 멍하니 빠져 있을까 봐 얼른 몸을 돌려서 자신의 차로 뛰어갔다.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횡성은커녕 고속도로 올라가다 죽겠구나……. 지선은 오로지 열쇠구멍에 차 키를 똑바로 꽂는 데만 신경을 쏟을 뿐이었다. 오 팀장의 마누라는 왜 이럴 때 애를 낳아 가지고.
자신의 낡은 여행용 가방을 꺼내 든 지선은 뒷좌석 문을 열고 서 있는 새까만 옷의 남자와 새까만 차를 보고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리고 그 도면에 대해서 물어봐야 한다. 지선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중얼거리며 똑바로 걸어서 그의 차로 갔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녀의 손에서 가방을 받아 뒷좌석에 놓고는 운전석 문을 열더니 올라탔다. 아, 저 남자의 옆에 타야 돼? 갈수록 태산이었다.
아, 이래서 돈을 벌어야 하는 거구나.
지선은 늘 느끼는 거지만 또다시 절감하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포르쉐라니, 날렵한 스포츠카만 있는 줄 알았더니 꽤 큰 중형차 이상이었다. 가끔 신호에 걸려 서면 차가 시동이 걸린 건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될 만큼 적막이 감돌았다. 면허 딴 지는 6년이나 되었고 차를 끌고 다닌 지는 1년째, 초보치고는 과감하다는 소리를 듣긴 했었는데 이 남자의 운전은 안정적이다. 차가 좋아서 그런 건가. 하긴 이런 차라면 옆에 얼씬거릴 생각도 안 날 듯하긴 한데.
무슨 말이든 꺼내야 했다. 횡성까지라면 2시간 거리이고 거기서 또 딜리시안까지는 40분 남짓, 거의 세 시간 정도를 단둘이 가야 하는데 이 가라앉다 못해 콱 막힌 것 같은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하지? 지선은 무릎에 가득 놓인 파일을 폈다. 그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옷을 두껍게 입었으니까 히터 따로 틀지 않아도 되겠지?”
“아……. 네.”
타고난 냉혈한인가. 그의 말 덕분에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던 차 안은 싸늘하게만 느껴졌다. 하긴 과도하게 히터를 틀어서 두꺼운 점퍼를 벗느라 수고를 하는 것보다는 낫긴 하지만 이 엄동설한에 히터도 안 틀고 세 시간을 가야 한다는 것도 참 어이없었다. 갑자기 적막한 차 안에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핸들에 달린 리모컨인가. 자신을 배려해서인지 꽤 크게 시작된 볼륨이 낮아지는 게 들렸다.
시내 한가운데 대로에는 없지만 외곽 도로 쪽으로 빠지면서 수많은 먼지를 뒤집어써서 저것이 눈인지 오물인지 알 수 없게 된 검은 덩어리들이 엄동설한에 어쩌지도 못하고 길가에 말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가끔씩 시야를 방해하는 방음벽들 사이로 끝없이 펼쳐진 아파트들. 건물을 짓는 일을 하면서도 저렇게 틈도 없이 들어선 콘크리트 덩이들을 보면 질식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늘 자신이 운전을 하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다가 오랜만에 아무런 소음도 없는 쾌적하기 그지없는 다른 사람의 차를 타서인가.
지선이 굳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늘 차가운 손을 마주 잡고 꾹꾹 누르고 있는 것을 보았는지 그가 손을 내밀어 히터를 켰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답답하다면서요?’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금방 쏟아져 나오는 따듯한 공기가 반가웠다.
“추우면 말을 하지.”
앞만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의 행동을 보았나, 지선은 뭐라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이 남자와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고집스러운 생각에 침묵을 지켰다. 자신의 잔잔한 거울 같은 마음에 조금의 파장이라도 줄 것 같은 남자와는 애초에 가까이할 필요조차 없다고 조심하는 것일까.
“라싸(拉薩)에서 겨울을 두 번 났어. 원래 추위를 잘 안 타는 편인데, 갑갑한 인공의 더운 바람을 맞으면 그런 것에 초연한 그곳 사람들이 생각나서 말이지.”
묻지도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설명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라싸?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히말라야? 티베트, 포탈라 궁이 있는 곳?
“실은 라싸라고도 할 수 없지. 내가 있었던 곳은 더 변두리였으니까.”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건지 남자는 말을 아꼈다. 냉기를 몰아내는 정도밖에는 안 되지만 그래도 온기가 있는 차 안에서 지선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파일만 뒤적이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두 시간을 더 이러고 가나…….
그러나 세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아니 차가 좋은 건지 남자가 운전을 잘 하는 건지 두 시간 반도 안 걸린 것만 같았다. 남자는 익숙한 듯 길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운전 실력도 굉장히 좋아 차 안에서 파일을 검토하고 거래처와 전화를 하는 데 전혀 거슬림이 없었다.
“철제빔이 사이즈가 25는 안 돼요. 너무 가늘어요. 거기 사이트에 보니까 32짜리 있던데 무늬 있는 거……, 그거 단가가 어떻게 되죠? ……아, 그건 너무하다. 우리가 그쪽 거 한두 번 써요? 그거 거기에 해 놓으면 광고 효과도 엄청날 텐데, 그걸 감안하셔야죠.”
옆에 누가 있는지 상관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지선은 곧 무아지경의 경지로 갔다. 자신이 운전을 하게 되면 이런 일을 동시에 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집중을 한 탓이었다. 아무래도 빡빡한 공사 기간 때문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를 지경이었으니까.
열심히 전화 통화를 하는데 익숙한 딜리시안 리조트의 웅장한 건물이 보였다. 한참 스키 철이기 때문에 주차장에는 차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이런 평일에 이런 곳에서 저렇게 여가를 한가하게 즐기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건 항상 위화감을 느낄 만했고 그것은 아무리 일을 하러 이런 곳에 많이 다녀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오드가 짓거나 리모델링하는 곳은 일명 ‘있어 보이는 곳’이었다. 공사 단가 따위보다는 예술적이거나 참신성을 따지는 클라이언트들이 드나드는 곳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지선은 주로 디자인이나 실무적인 일을 할 뿐 직접적인 클라이언트와의 면담에선 늘 소외되어 있었다. 소외라기보다는 지선도 의도적인지 아닌지 그쪽으로 나서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옆에서 익숙하게 직원용 주차장을 찾아 주차를 하는 남자의 고급스러움이 철철 넘치다 못해 흘러내리는 옷차림이나 차, 혹은 그런 것들을 배제하더라도 그냥 외모에서 풍기는 뭔가 다른 세계에서 온 듯한 타고난 귀티 있는 향기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피부로 직접 느껴졌다. 이런 사람이 대표이니 회사 분위기가 그쪽으로 흘러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겠지.
지선이 안전벨트를 풀고 무릎에 가득 쌓인 파일을 들고 문을 열려는데 옆에 있던 남자가 빙긋이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난 기사가 아니야. 그런 회사 기밀쯤은 내가 봐도 되는데 말이지.”
버릇처럼 악착같이 자신의 파일과 디스켓이 든 서류 봉투 등을 모두 들고 내리려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세 시간 동안 거의 없는 것 같았던 남자가 어느새인가 옆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아, 우리 회사 분이셨죠.”
분명히 자신의 설계도에 손을 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것에 화가 난 것인지도 몰랐다. 지선은 이 남자가 풍기는 묘한 분위기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리고 저런 세계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무장하고 싶었다. 어차피 저런 세계의 사람들은 다른 삶을 사는 거니까.
지선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칼 같은 산속의 겨울바람에 몸을 움츠렸다. 아무리 실내 공사라 하지만 이런 곳에서 한겨울에 일을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힘든 일임에는 분명했다. 지선은 뒷좌석의 문을 열고 자신의 큼지막한 패브릭 가방을 꺼내 들었다. 남자는 정말 초봄에도 입기 힘들 법한 얇은 검은색 재킷만 입은 채 창백한 표정으로 자신이 힘겹게 들고 있던 파일을 한쪽 옆구리에 끼고는 차 문을 닫고 있었다.
검은색의 매끄러운 차체와 검은색의 미묘한 광택이 있는 재킷과 새카맣다 못해 푸르스름한 기가 보이는 머리카락까지, 지선은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비현실적인 외모에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너무나 비현실적이니까 격리되는 게 당연하게 보일 정도로…….
“가지.”
지선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가 성큼성큼 걸어서 별관 쪽으로 갔다. 아무래도 이곳을 정말로 잘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선은 추위에 종종걸음 치면서 그를 따라 들어갔다. 회전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제야 리조트 안의 온기가 얼굴에 느껴져 다행스러웠다.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형형색색의 스키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개미처럼 바글거리는 것을 보고는 혀를 찼다. 이 추위에 뭐하는 짓이람. 지선이 가방을 들고 프런트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남자 쪽으로 갔다.
그러자 곧 안쪽에서 전에도 몇 번 보았던 이곳의 관리 과장이 보였다.
“아, 오셨군요. 공사 팀은 벌써 왔는데 설계 팀이 안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그리고 오랜만입니다. 정 대표님.”
자신보다 자신의 오너를 반기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원래 윗선이 환영받는 거니까. 그는 파일을 프런트에 올린 채 한쪽 팔로 기대서서 미소를 띠면서 대답했다.
“한 과장도 여전하네. 아직도 이 산속에 박혀 있는 거 보니 여기에 정들었나 보네.”
“하, 별말씀을. 본사에서 상무님 오셔서 기다리십니다. 올라가시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이마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파일을 집으려고 손을 내민 지선은 우연히 0.1초쯤 스친 그의 표정을 보았는데 지선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미소를 띠웠다. 아주 자연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치 접대용인 듯한 미소를…….
“본사에서 내려왔다는데 가 봐야지. 가 봅시다, 이지선 씨.”
이지선 씨라……. 분명히 저를 지칭하는 거 같은데 그게 자신의 이름이 아닌 것만 같다. 왜일까.
화려한 전망 엘리베이터가 뻥 뚫려 있는 실내를 오르기 시작했다. 눈이 휘황하도록 현란한 샹들리에들이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앞에 정장을 잘 차려입은 한 과장에게서는 싸한 알코올의 남자 스킨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고 있었다. 가방을 두고 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지선은 옷이 들어서 흉측하게 배가 부른 낡은 패브릭 가방이 영 미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오 팀장이랑 올 것이었고, 우선 숙소에 갖다 놓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잘 모셔 놓은 하드케이스의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게 번거롭다는 것을 알고는 편한 맘으로 가져온 것이었는데. 게다가 자신의 옷차림도 공사용이지 접대용은 아니었다.
딜리시안 리조트의 책임자도 아니고 본사의 상무라니, 그럼 대양 건설에서 나온 건가? 지선은 대표와 같이 왔으니 자신이 굳이 거기까지 갈 이유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엘리베이터는 열리고 있었고 한 과장과 자신의 오너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무거운 서류철을 가뿐하게 들고 성큼성큼 걷는 남자의 뒤태는 마치 모델의 워킹 같은 모습이었다. 지선은 한쪽 손에 든 서류 봉투가 흘러내릴까 봐 걱정을 하면서 종종걸음으로 두 사람을 따라갔다.
“들어가시죠.”
복도 끝에 있는 방에 노크를 하더니 한 과장이 문을 열었다. 그가 먼저 들어서고 지선이 따라 들어가자 지선은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호화스러운 사무실이 나타났다. 아니 사무실이라기보다는 사장실이라든지 혹은 접견실을 연상시키는 널찍한 방 한쪽 벽면의 커다란 창 바깥으로는 하얀 설경과 맞닿은 뼛속까지 시리게 보이는 푸른 하늘, 그리고 설원을 수놓은 듯한 가지각색의 점으로 보이는 스키어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리조트여서 그런지 따뜻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아이보리빛 소파들이 줄지어 있고 맞은편에는 커다란 마호가니의 사장님용 책상과 의자가 보였다. 그러나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 잠시 나가셨나. 기다리십시오. 계속 기다리셨는데…….”
“천천히 해.”
그는 한 손에 들고 있던 파일들을 소파 앞의 유리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창문 쪽으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지선은 멀뚱하니 있기가 뭐해서 가방을 소파 쪽의 안 보이는 사각지대에 살그머니 내려놓고는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아까 확인하던 파일을 열었다. 막 파일을 넘기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정 대표님. 상무님께서…….”
지선은 그 말을 듣고는 용수철이라도 달린 듯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본사 상무라는 게 어지간히 목구멍에 걸리듯 하던 지선으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돌아본 문에는 한 과장과 마치 무슨 화보에서 나온 것 같은 미인이 서 있었다. 리조트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딱 떨어지는 아이보리빛 타이트 스커트와 크림색 블라우스, 맵시 있는 재킷, 꽤 진한 화장과 자연스러운 듯 찰랑거리는 생머리……. 나이가 어린 것 같지는 않은데 도무지 몇 살인지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아, 상무님인가, 이제는?”
아는 사람인가?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면서 막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갑자기 여자는 뛰듯이 창가로 달려오더니 그대로 몸을 던져 그 남자의 목에 두 팔을 벌려 매달렸다.
“2년하고도 8개월 만이라고! 이 무정한 남자야!”
그의 차갑도록 창백한 볼에 입을 맞추는 여자는 뒤에 선 한 과장이나 어정쩡하게 서 있는 지선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