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화
서울로 가는 셔틀을 기다리는 내내 지선은 발끝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겨우 버스에 올라타니 버스에는 얼굴마다 천진난만한 웃음이 가득한 단체 초등학생이 삼분의 이였고 나머지는 대학생인 듯한 애들이 가득해서 소란스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썩은 프라이드라도 끌고 올 걸 그랬나?
윗사람들은 위에서 놀아야 하는 건지……. 보기에도 낯 뜨거운 애정행각을 보여 주던 그 여자가 딜리시안의 본사인 대양 그룹 회장의 딸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오드의 대표인 정우현이라는 저 남자와는 어떤 사이인지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서 그렇게 딜리시안 건에 관심을 보였던 건가? 자신이 한 디자인이 그 ‘여자’의 맘에 들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혹 그 여자와 그곳들을 다 다녀 봐서인지도 모르지……. 알게 뭐람.
지선을 태우고 오긴 왔는데 그 상무라는 여자와 진하게 해후를 하고는 어디론지 소식도 없어진 그와는 별개로, 자신이 지시해야 할 일들이 다 끝난 것은 예정인 이틀이 아니라 4일이 지난 후였다. 비교적 공사는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완공되기까지는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해야 할 일이었다. 뚱뚱하고 낡은 패브릭 가방 대신 다음에는 뽀대나게 하드 케이스의 캐리어를 끌고 오리라 생각해 보지만 그것들이 문제는 아니었다.
차가운 유리창에 있을 먼지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지선이 머리를 기대자 이마에 서늘한 기운이 타고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머릿속이 콱 가라앉아 버렸다. 차 안의 들썩거리는 듯한, 설렘과 즐거움이 가득한 소란 같은 것들은 단 한 번도 자신의 것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더 나이가 들면 저런 것들하고는 완전히 멀어지겠지. 차창 밖으로 한적한 시골의 작은 집들이 눈을 함빡 뒤집어쓴 채 지나가고 있었다.
“……어쩐 일이에요, 올케.”
지선은 자신의 말끝이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다.
딜리시안의 일이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을 무렵, 날이 좀 풀렸다고 한낮에는 길가가 질척거릴 즈음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꽤 멀긴 하지만 그래도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사는 올케의 갑작스런 전화는 지선의 머릿속에 혹시, 혹은 왜, 하는 헛된 물음표를 던져 주고 있었다.
지금은 연락도 되지 않고 굳이 연락하고 싶지도 않은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하고 어디론가 떠나 버린 큰오빠와 올케의 남편인 작은오빠는 일명 배다른 형제였다. 자신을 던져 놓고 사라진 엄마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가끔씩 아빠를 찾아와서는 고요한 집안을 들쑤시고 가곤 했었다. 한때는 잘나가던 타일공이었던 아버지는 늘 일이 있었고 기술이 좋았기에 소심하긴 했지만 자상했다. 두 오빠와 자신과 함께 이래저래 부족함은 있지만 모자람은 없는 시절을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지선이 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 쓰러진 아버지는 삼 년 내내 누워만 있다가 대학교 갈 때 즈음에는 차라리 누워 있는 게 나은 상태가 되어 버렸다. 알츠하이머라는, 참으로 멀쩡하지만 주변 사람을 괴롭히는 병이 찾아들어서였다. 착실하던 작은오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터로 나섰고 자신도 고등학교 때 편의점이니 패스트푸드점을 전전하면서도 공부를 하려고 애썼다.
자신이 대학에 가는 해에 작은오빠의 손을 잡고 나타난 철없던 올케는 지선이 보기에도 그리 썩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뱃속에는 조카가 들어 있었고 그때부터 그녀의 험난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 어린 나이에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를 수발하는 게 쉬웠을까. 자신도 그렇게 못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지선이었지만 가끔 진짜 너무하다면서 부엌 구석에서 울고 있는 올케를 보면 울컥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기나긴 세월을 지나 지선이 일을 하고 벌이가 생겨서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시고 자신이 그 비용을 전부 감당하고 있는 것으로 지선은 올케를 놔주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보답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버는 돈의 삼분의 이 이상이 아버지가 전에 계시던 병원비 대출금 상환과 지금 요양병원비로 들어간다 해도 지선은 솔직히 지금의 생활이 좋았다. 적어도 집에 가면 싸늘하지만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지긋지긋한 생활의 푸념과 찌든 얼굴들, 천진난만하게 사고만 치는 아버지가 없는 좁은 원룸은 천국이 아닌가.
몇 해 전부터 무슨 장사를 시작했다던 작은오빠네와는 정말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명절 때 생각이 나면 전화나 하는 사이 이상 되고 싶지도 않았고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조카가 둘이나 있는 오빠네에게 그저 생각이나 나면 애들 초등학교, 중학교 입학이나 할 때 가방이나 교복을 사주라고 돈이나 부치고 마는 사이가 편하니까……. 그런 올케가 웬일일까.
[아가씨…….]
말 뒤끝이 영 시원치 못하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지선은 요 몇 주 딜리시안 때문에 찬바람을 쐬어서 그런지 퍼석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할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손끝에 파우더 가루가 묻어 나왔다.
“잘 있었어요? 희준이하고 희성이는 잘 있죠? 아버지도 뭐 병원에서 별 소식 없는 거 보니 여전해요.”
밝음을 가장한 목소리로 목구멍에서는 ‘무슨 일이에요?’하는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지만 차마 꺼내질 못하고 있었다. 수화기 저편에서도 우물거리긴 마찬가지였다. 지선은 전화기를 들고 점심시간이라 텅 빈 사무실을 휘둘러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갔다. 넓은 창밖으로 보이는 주차장이 드문드문 비어 있었다.
[아가씨도 잘 지내죠?]
“뭐, 그저 그렇죠. 오빠는 하는 장사는 잘 되고요?”
별로 살가운 성격이 아닌 지선은 오빠가 대체 무슨 장사를 하더라 하고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생각나는 게 없어서 곤란스러웠다.
[저……. 그게, 아가씨…….]
지선은 전화를 끊고 싶어졌다. 왠지 다음에 나올 말들을 유추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무슨 일 있어요?”
올케도 꽤 강단이 있는 여자였다. 나름대로 요구르트 아줌마며, 정수기 관리원이며, 마트 계산원이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는 억척스러운 여자였다. 그런 그녀에게 저렇게 입을 떼기도 힘든 말이라면…….
[아가씨, 오빠가 사고가 났어요.]
“네? 왜요? 많이 다쳤어요? 어디 병원에 입원이라도…….”
지선이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소리치면서 스스로 놀라 빈 사무실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아, 오빠가 다친 건 아닌데…….]
듣고 있는 지선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지선의 무표정한 얼굴과 퍼석한 머릿결은 사실 이 사무실에서 그다지 나이 많은 편은 아닌 지선을 자신을 가꾸고 스스로에게 돈을 퍼 들이는 여자들보다 나이 들어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지선의 무표정에 더욱 그림자가 깃들었다.
전화를 끊고서 대체 얼마나 멍하니 있었는지 속이 쓰라려서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비어 있던 주차장에 차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전화기의 액정을 보니 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속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몰려가는 만두 전골집을 피해 삼각 김밥이라도 먹어야지 했던 게 전화 때문에 잊어버린 것이었다. 갑자기 삼천만 원이 어디서……. 지선은 이제는 왕래도 없어서 잘 기억이 나지도 않는 오빠가 사고를 내서 합의금이 필요하다고 그것이 없으면 당장 교도소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고 울먹이는 올케에게 나한테 그런 돈이 어디 있냐고 빽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어떻게 해 보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은 게 한참 전이었던 것 같았다. 얼추 그동안 그 빠듯한 돈을 쪼개 일 년 넘게 부은 적금이 한 칠백 정도 있는 것 같고, 자신이 원룸을 얻느라 대출을 받아서 은행권에서는 더 이상 대출이 안 된다는 사실이 조목조목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선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 서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났다.
“밥 안 먹은 거 아니야?”
“속이 안 좋아서요.”
굳은 얼굴을 펴려고 애쓰면서 지선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제발 관심을 꺼 주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아무리 표정을 지우려고 해도 그것이 잘 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아까 전화 온 거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박 대리는 무엇을 듣기라도 한 걸까. 지선이 더욱 인상을 굳히면서 쳐다보자 말을 이었다.
“아까 지선 씨 찾더라고. a-3에 분명히 334번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이번에도 또 346을 보낸 거 같아.”
“뭐라고요?”
지선의 목소리가 커졌다.
“분명히 자기네는 오더가 그렇게 들어왔다는 거야.”
“내가 진짜 이번 기회에 업체를 확 바꿔 버리든지…….”
지선이 전화기를 들자 박 대리가 손을 내저었다.
“아직 한 시 안 됐어. 점심시간은 칼이잖아. 좀 있다 하라고. 그런데 진짜 무슨 문제 있지? 얼굴이 영 아닌데. 공사는 잘 돼 가고 있잖아.”
지선은 파일을 뒤적거리면서 자신이 넘긴 오더를 복사한 종이를 찾아 신경질적으로 종이를 넘기고 있었다. 이럴 땐 정말로 관심 따위는 필요 없는데……. 무심하게 해가 가득한 창밖의 주차장 끄트머리에 검은색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걸 지선은 눈치 채지 못했다.
지선은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저쪽 건설 팀에나 두어 명 있을 뿐 가까운 이쪽의 리모델링 팀에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말했다.
“솔직히 물어볼게요, 박 대리님.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거예요? 관심 있으세요?”
짜증이 났을 뿐이었다. 돈 문제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그리고 저 지칠 줄 모르는 관심도 그렇고…….
“몰라서 물어? 남자가 여자한테 관심 있는 건 자연의 섭리라고.”
“그 정도가 얼마쯤인데요?”
지선이 오더를 보낸 쪽지를 찾아서 파일에서 꺼내면서 시선은 여전히 아래로 내리깐 채였다. 분명 박성진 대리는 자신의 윗사람이고 나이도 자신보다 많았다.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되는 사람이 맞았다.
“말 꺼내기 힘들었는데 잘됐네. 이번에 딜리시안 건 끝나면, 우리 집에 좀 들러.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나도 나이가 있잖아.”
분명히 334번이라고 적혀 있었다. 페인트 색이 얼마나 중요한데, 광택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천지 차이인데……. 그런데 이분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집에 가자니 뭐 인사라도 드리자는 건가?
“그럼 갈 테니까 나 삼천만 꿔 줄래요? 언제 갚을지는 기약 없고.”
정말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억하심정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니 뱃속이 부글부글 차 있어서 어딘가 구멍으로 피시식 김을 빼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고개를 들자 박 대리의 착해 보이는 동그란 눈은 좀 더 커져 있었다.
“뭐? 급해?”
이러다 정말로 적금 깨고 차 팔아서 가져다주겠네. 지선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가방 몇 개 샀더니 카드가 펑크 나서요.”
“이지선.”
“농담이에요. 나랑 같은 농이라고 생각할게요. 뭐 못 들은 걸로 하는 건 웃기잖아요. 귀에 이미 들렸는데 어떻게 안 들은 걸로 해. 그러니까 조크로 알게요. 같은 조크로 들어 줘요. 아까 그런 일 또 있을지 모르니까, 내일 들어가는 필러하고 마감재 다시 한 번 확인 부탁드려요.”
그러고는 지선은 자리에 앉아 책상에 있는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이봐요, 여기 오드예요. 지금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예요?”
한동안 지선이 통화하는 것을 지켜보던 박성진 대리는 슬쩍 혀를 차더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지선은 시선을 전화기와 파일에만 주고 있다가 그가 힘없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마침 미미하게 하얀색의 하이그로시 문이 닫히는 게 보인 것만 같았다.
일단 전화를 하고 그동안 없던 소식을 전하고 나니 올케의 전화는 꽤 자주 왔다. 올케도 친척조차 적조한 여자인데다 부모도 없어서 전화할 데라고는 자신밖에 없었던 거 같았다. 뭐 들어 보니 작은 트럭을 개조해서 거기서 샌드위치니 뭐 그런 것들을 아침에는 출근하는 직장인 상대로 밤에는 번화가에서 팔면서 바쁘게 살긴 살았던 거 같았다. 간간히 엄마 아빠 없는데도 아이들이 끼니 잘 챙겨 먹고, 학원 안 보내도 그럭저럭 공부 잘해 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넋두리처럼 하는 올케의 이야기는 꼭 울먹임으로 끝났다.
몇 년 동안, 아버지 안부 한번 물으러 전화도 안 하다가 일 터지니 엉뚱한 데 매달리지 싶어 짜증만 일고, 돈 이야기도 자꾸만 들으니 이제는 넌더리가 날 것만 같았다. 은행에 확인하니 2년하고도 3개월이나 점심값 아끼고 변변한 옷 한 번 못 사고 모은 적금이 680만원이었다. 700은 넘는 줄 알았던 게 두어 번 자동차 보험이니 원룸 보증금을 올리니 하면서 못 넣었던 것 때문에 그것밖에 되지 않은 거 같았다.
그 돈을 한 푼도 안 빼고 고스란히 올케의 계좌에 송금하고 나니 속이 허탈해졌다. 그런데도 아직 2500은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이 갑갑하게 속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구치소에 창살 너머로 10년은 더 늙어 버려 마치 아버지 같은 아직 마흔밖에 안 된 작은오빠의 몰골을 보지만 않았다면 그 돈도 그렇게 미련 없이 보내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피라는 게 뭔지…….
행여 누가 들을까 지선은 주차장 한 귀퉁이에서 금방 싸늘하게 식는 손을 비비면서 전화 중이었다.
“……이자율이 38%라면서요. 그게 그렇게 되면 50%가 넘는데…….”
전화기 안에서는 목소리만 들어도 계산속 빨라 보이는 여자의 거만한 말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봐요, 뭐 여자용 대출이라면서? 분명히 인터넷 광고에는…….”
그러나 또 전화기 안에서 울리는 소리.
“됐어요.”
지선은 신경질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러 버렸다. 정말로 얼토당토아니한 광고나 스팸 문자를 보고 누가 전화를 하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참 당해 보니 이런 심정이구나 싶었다. 빌리기는 빌려야겠는데 과연 갚을 수 있을까. 전에 아버지의 병원비를 잘못 빌렸다가 원금보다 이자가 세 배나 불어나서 그걸 갚느라 고생한 게 엊그제 같았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뻔히 계산을 해 봐도 말이 안 되는 이율인데 이걸 빌려야 하는 건가.
지선은 또 속이 쓰린 것이 느껴졌다. 어젯밤에도 잠이 안 와서 맥주 캔을 빈속에 네 캔이나 부어 버려서인 듯했다. 그냥 마실 때야 그 정도쯤 했는데 역시 스트레스를 받아서 마시는 술은 술이 아니라 독약인지……. 지선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전화를 열었다.
“거기 ## 캐시죠? 뭣 좀 물어보려는데, 2500만원 빌리면 이자는…….”
지선은 막 시커멓게 먼지가 덮여 눈인지 흙인지 구분이 안 되는 덩어리를 발로 툭툭 차고 있었다. 사람이 없는 맨 끝 쪽에 댄 자신의 차 옆이었다. 분명히 아무도 없고 사무실 사람들이 나오거나 드나들 리 없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고개를 든 순간 지선은 전화기 안에서 흘러나오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검은 슈트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지선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졌다. 왜일까, 뭐 그 남자에게 잘못했나? 전화기 안에서는 남자의 기계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선은 혹여 그 소리가 남자한테 들릴까 몸을 돌리고 전화기를 감싸 쥐었다. 혹 전화기 안의 소리가 밖으로 나올 듯해서……. 전화기 안에서 이율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을 하나도 제대로 듣지 못한 지선은 아, 예예 하는 몇 마디를 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젠장, 왜 이런 데로 다니는 거야. 추워 죽겠는데 나중에 전화를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또다시 멈칫하고 말았다. 이미 들어가 버렸을 것으로 생각했던 그 남자가 아직도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지선은 멈칫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아랫사람으로 인사를 안 해서 그걸 받으려고 서 있나 보다 싶어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는 종종걸음으로 사무실로 들어오는 옆문을 열고는 도망치듯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지선이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이 들어온 옆문이 아닌 아까와는 방향이 다른 정문으로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아, 오셨어요?”
박 실장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는 게 보였다. 마치 모델처럼 쫙 떨어져 내리는 검은색의 매끄러운 재질의 슈트는 보는 이들의 눈조차 호강하게 만들 만큼 멋들어졌다. 정말 건축사무소 대표라는 직함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충무로나 영화 시사회의 무대에 올라가야 할 그런 분위기를 연상시킬 만큼, 단순한 검은색 슈트가 화려하게만 보였다. 박 실장이 이번에 맡게 된 일 때문인지 바리바리 파일들을 들고 일어서서 그 하얀색 하이그로시 문으로 향하는 그를 따라가는 게 보였다.
지선은 곧 시선을 떨어뜨리려는데 아주 잠시 잠깐 그 남자가 자신을 쳐다보자 공중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엉켜들었다. 화들짝 놀란 지선이 금방 시선을 떨어뜨렸지만 대체 무슨 표정인지 알 수 없는 창백한 눈동자는 왜 자신을 본 것일까? 혹 아까 전화 내용을 들었나? 아니 자신의 직원이면 사채 같은 거 쓰면 안 되는 건가. 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곧 있다가 박 실장이 문 안으로 들어가고 문은 금방 닫혔다. 전화 내용을 들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아니 뭐 들었으면 어쩔 건데.
박 실장이 영 안 좋은 얼굴로 그 하얀색 하이그로시 문을 열고 나왔을 때쯤이었다. 지선은 자신이 그 문 뒤쪽의 사람에 대해 신경 쓰고 있는 건, 전화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였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거의 이 주일쯤 얼굴도 안 보이던 대표라는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 그 사람의 휘황찬란한 차와 그 남자의 입에서 나온 라싸라는, 무심결에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던 평온한 티베트와 신장과 네팔의 사람들에 대한 단상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남자에게 달려들어 만지면 차가운 냉기가 흐를 것만 같은 창백한 얼굴에 입을 맞추던 붉은 입술의 여자까지 연상하고 있는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러워졌다. 게다가 무슨 우연인지 막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사무실의 문이 열리더니 저쪽에서 한 여자가 부산스럽게 들어오는 게 보였다.
“아, 어떻게 오셨습니까?”
박 실장의 놀란 듯한 목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거래처나 현장에 가 있는 직원들 덕에 군데군데 비어 있는 사무실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모든 직원들의 시선을 받은 곳에는 한눈에 봐도 꽤 고가라는 티가 물씬 나는 회색빛 퍼 코트를 입은 늘씬한 여자 하나가 거만한 미소를 띠면서 대답했다.
“거래처잖아요. 정 대표 있죠? 어떻게 매번 하청업체 대표를 일일이 자리에 계시나 확인해야 되는지 몰라.”
“아이고, 무슨 그런 말씀을…….”
얼굴은 모르겠는데 꽤 미인상인 여자의 목소리는 금방 기억이 났다. 지선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면서 자신의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하필 저 여자의 붉은 입술을 생각해 내고 있었는데 그 주인이 나타날 게 뭐람. 마치 자기 집인 듯 하얀색 하이그로시 문을 열고 여자가 들어가자 옆쪽 칸막이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났다.
“와, 진짜 예쁘네, 누구야?”
“아우, 저 여자를 몰라? 뉴스도 안 보냐. 우리 딜리시안 리조트 본사 회장 딸이잖아. 이름이 변희정인가? 얼마나 유명한 여잔데…….”
“헐, 그런데 그런 대단한 여자가 왜 이런 사무실까지 찾아와?”
“보면 몰라, 우리 대표한데 목을 매는 거. 몇 년째야. 정 대표님이 거기 티베트 가기 전부터, 아니 뭐 대학 동기라나……. 뭐 예전부터 다 집안이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여자 쪽에서는 목을 매는 모양인데 그쪽 집안에서 반대인 거지. 그쪽 집안이 뭐 좀 대단해야지…….”
아주 간단명료한 설명이었다. 음……. 그랬었군. 지선은 뉴스나 인터넷에서만 볼 수 있는 가십거리를 눈앞에서 보다니 참 재밌구나 싶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다들 하나둘씩 퇴근할 때까지-순수한 퇴근은 거의 없었다. 다들 거래처나 혹은 현장에 들렀다가 곧장 들어가는 식으로- 하얀색의 문은 열리지 않고 있었다. 그것에 신경 쓰고 있는 자신이 싫어진 지선은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대표가 자기 방에 멀쩡하게 있고, 양대 산맥인 박 실장과 아내가 해산한 지 얼마 안 돼 매일 산후조리원으로 퇴근하는 오 팀장조차 자리를 뜨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나기란 힘들었다.
그때였다. 하얀색 하이그로시 문이 열리고 여자의 퍼 코트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코트는 눈부시게 하얀 와이셔츠에 짙은 푸른색의 넥타이를 맨 남자의 손에 들려 있었고 여자는 회색의 니트로 된 원피스를 입은 늘씬한 모습이었다.
“왜, 이렇게 날 내쫓으려고 하는 건데.”
작은 소리지만 지선은 문 가까운 쪽이라 여자의 칭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귀에 또렷이 들어 왔다.
“쫓긴, 여긴 작아 보여도 회사라고. 일터야.”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고 그는 익숙하게 그녀의 퍼 코트를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주면서 그녀가 팔을 내밀어 입을 수 있게 도와줬다. 그제야 여자는 표정관리를 하는 듯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다시 그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는 듯하더니 앞장을 섰다. 그는 그녀를 마중이라도 하듯 따라나서서는 슈트도 없이 와이셔츠 바람으로 문밖을 나섰다. 나간 지 한참이나 된 후에도 소식이 없자 눈치를 보고 있던 오 팀장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흠, 아니 보스는 왜 안 들어와. 나 먼저 가 볼께. 박 실장님, 나 들어가요.”
“그래. 가 봐.”
오 팀장이 문을 나서자 그제야 하얀색 셔츠 바람의 남자는 창백한 얼굴로 사무실로 들어왔다.
“대표님…….”
“아, 그건 내일 이야기하고 퇴근해요. 나 눈치 보지 말고.”
그리고 문 안으로 그가 사라지자 그제야 눈치를 보던 직원들은 하나둘씩 일어났다. 지선도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영 마음이 무거웠다. 남자가 어떤 여자와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그건 상관이 없다, 라고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는 게 웃겼다. 자신은 지금 2500이 문제라고, 낼 모레까지 마련하지 못하면 그 늙은, 고생만 하던 오라비는 교도소로 가 버릴 것이고 올케는 또 주구장창 전화를 하겠지……. 지선은 잔뜩 저장되어 있는 대부업체의 전화번호를 넘겨보면서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막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하얀색 하이그로시 문이 열리더니 그 문보다 더 하얀 와이셔츠가 불쑥 내밀어졌다.
“이지선 씨, 잠깐 들어오지.”
“네?”
주춤거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선은 어깨에 멘 가방을 힘주어 잡고는 싸늘한 검은색 방으로 들어섰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체 왜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딜리시안 건이 복잡한 사유가 많으니까. 게다가 석연치 않게 전화 내용이 목구멍에 거치적거리고 있었다. 정말 사채 쓰는 직원 따위는 문제가 되는 건가.
차갑고 싸늘한 검은 방을 연상했지만 보이기에 싸늘한 방 안은 온기가 돌고 있었다. 아마 얼마 전에 나간 퍼 코트의 여인 때문이리라. 남자의 하얀 와이셔츠가 푸르스름하게 보였다. 남자는 검은색의 강화유리로 된 탁자 위에 엉덩이를 걸친 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지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 때문이시죠? 뭐가 잘못됐나요……. 어느 하나 이 상황에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다. 잠깐 들어오라는데, 그래서 잠깐 들어왔는데 왜 저 남자는 저 자세로 쳐다만 보고 있는 거지? 잘못 들어왔으니 나가 봐야 하는 건가?
“이지선 씨.”
남자의 목에서는 분명히 우리말이 흘러나왔다. 금방 듣고서 알아들을 수가 있으니까. 그런데도 우리말이 아닌 것처럼 들리는 것은 아마 제 착각인 듯싶었다. 남자의 성대에서 울리는 깊은 울림이 있는 발음은 저가 27년 동안 들은 자신의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헤라자드라든지 혹은 루드밀라 같은 동화 속의 여주인공의 이름 같아 보인다. 참 착각도 가지가지지. 아마 낯선 남자의 하얀 와이셔츠와 검은색 하의, 그리고 비정상적인 비례에서 오는 시각적 착각의 청각적 귀결일 것이리라.
“무슨 일이십니까?”
상대는 자신에게 3년이나 월급을 줘서 자신에게 딸린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게 한 회사의 대표다. 어디까지나 오너의 물음에 정중하게 대답할 의무가 있었다.
“본의 아니게.”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본의 아니게, 본인의 뜻이 아닌 거면 아무래도 회사 일이 용건이 아닌 듯싶었다. 지선의 이마가 미미하게 구겨지는 것을 보았을까.
“본의 아니게 내가 이지선 씨 사생활을 좀 엿들은 거 같은데.”
미미한 구김은 좀 더 깊어졌다.
“내가 굳이 잘못한 것 같지는 않아. 왜냐, 서로 필요로 하는 걸 제공하는 건 서로에게 이익이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드라마틱했지만 지선의 심정은 그렇지 못했다. 그냥 자신의 사생활이라는 게 그 추운 주차장에서의 전화 통화였고 그것을 이 남자가 들었고 그 내용을 문제 삼아 이곳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 후로는 감각의 회로라는 게 멎어 버린 것 같았다.
지선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자 그가 강화유리 탁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좀 앉지.”
한참이나 키가 큰 그가 자세를 바꾼 것을 보고 잠시 미망에서 헤매던 지선은 정신을 차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오드는 직장 내에서의 사적인 전화까지도 문제가 되는 회사라는 말씀이십니까?”
지선의 날 선 대답에 그는 약간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당황스러운 모습이 약간의 곤란스러운 미소를 띤 것이라는 거였다.
“마 가브떼 라 나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언뜻 당황스러울 수 있었다.
지선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미소를 띠면서 자신을 삐뚜름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피시시식.”
지선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의 얼굴에 퍼지는 미소란…….
“당신 굉장히 맘에 드는데.”
움베르토 에코였다.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빌린, 표지가 예쁘다는 이유로 빌렸지만 너무나 난해해서 볼 수 없었던, 몇 번이고 보려고 애썼다가 포기한 책, 푸코의 추. 우연하게 대학교 선배의 자취방에서 상편만 보고선 선배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 가져온 책, 아르바이트 비용을 쪼개고 쪼개서 산 하편, 아직도 잠 안 오는 밤이면 수십, 수백 번을 읽던 그 책에서 나온 말.
피에몬트식의 멜랑꼴리에 젖은 주인공이 늘 냉소적으로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쓸데없이 열변을 토하는 사람에게 무심코 던지는 피에몬트식 농담, 마 가브떼 라 나타. 마개를 뽑아서 김을 좀 빼란 말이야……. 사람이 너무나 열을 올려 머릿속에 증기가 가득 차면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빨라진다. 그때 한마디 하는 것이었다. 뒤통수 어딘가에 있는 코르크 마개를 뽑아서 김을 좀 빼라고…….
솔직히 지선은 김을 뺄 만큼은 아니었다. 다만 무언가 같은 것을 알고 있다는 동질감이 팽팽하게 지선을 당기고 있던 경계심과 자괴심에 마개를 뽑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남자의 웃는 모습은 정말로 매력적이었다. 눈앞의 이 남자는 정말로 외모 하나는 가끔 돌이켜도 숨을 들이쉬다 멈출 지경이었다. 그런 남자가 자신의 대답에 웃고 있다…….
“나와 거래를 하지.”
거래의 정의는 주고받는 것이다. 이 남자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건 있는지 몰라도 자신이 이 남자에게 줄 수 있는 건 전무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 잠깐 사이의 친밀감을 토대로 지선이 겨우 대답했다.
“아까, 전화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 이천오백만 원, 내가 빌려 줄 테니까 당신이 내가 원하는 것을 좀 줬으면 하는데?”
“네?”
표정을 관리해야만 했다. 기쁜 건지 혹은 당황스러운 건지 뭔가 정리를 해야만 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지선은 아까 그 움베르토 에코 때문에 형성되었던 친밀한 기류를 애써 무시하고 냉랭하게 대답하려 애썼다. 그냥 본능적인 육감으로 이 남자와 얽히는 건 뭔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엄습했기 때문일까.
“다시 한 번 천천히 정리해 보지. 난 우연하게도 당신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들었을 뿐이고, 나에게는 돈보다 당신이 필요한 역할이 있다는 것이니, 서로 거래를 하는 것, 아니 거래를 흥정해 보는 게 어떤가 하는 거지.”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이것은 지선에게 천상의 기회일 수도 있었다. 우연히 가게에서 전 재산 이천 원을 놓고 한 로또가 당첨되는 것보다 더 확률이 낮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아니 이런 기회란 게 현실에서 생길 수 있는 일인가?
“내가 듣기에, 이천오백만 원이라는 돈이 필요하다고 들었어. 사람에 따라서 그 돈의 가치는 다르지. 누구에겐 그 돈의 가치가 크고 누구한테는 미미하다고 해서 사람의 가치를 거기에 매길 생각은 없어. 다만 나한테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역할을 당신이 제공해 줬으면 하는 거지.”
지선은 지금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헷갈렸다. 나 같은 거한테 어떤 가치가, 어떤 역할을 해야 이천오백만 원이라는 커다란 돈만큼 있다는 것일까.
“……저한테 그런 돈의 가치가 있다는 겁니까?”
“나한테는, 당신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데.”
“원하시는 게 뭔데요.”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어서 신장이 필요해, 라든지 하는 말이 훨씬 더 현실적이었을지도 몰랐다.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런데……. 당분간 나의 연인 역할을 해 줬으면 해.”
입주 가정부가 필요하니 집을 청소해 줘야겠어, 라든지 혹은 숨겨 놓은 딸이 있는데 과외 선생이 되어 주는 게 어때, 따위였다면 지선은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지금 말이 되는 소릴 하는 건가? 연인이라니? 저 남자는 참 말도 드라마틱하게 한다. 무슨 소설이나 드라마처럼 “애인 대행은 어때?” 하는 말이었으면 오히려 픽 하고 웃음을 날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늘 웃고 있는 것 같던 얼굴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건조한 얼굴로 연인의 역할이라니.
“하루의 생각할 기회를 주겠어. 내일 가타부타를 정해서 이야기해 주길 바라. 그럼 가 보도록.”
지선은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벗어 놓은 슈트를 검은색 가죽 소파에서 들어 올렸다. 그것으로 자신의 용건은 끝났다는 제스처를 하고 있었다.
“연인이라니요. 무슨 뜻이죠?”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지선을 쳐다보았다.
“연인……. 뜻을 모르나? 애인? 그렇게 이야기해야 하나? 일이 끝나면 만나고, 사랑을 속삭이고, 곁에 있어서 남들이 보기에 두 사람이 서로 아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그런 역할.”
남자의 목소리는 띄엄띄엄, 마치 시 낭송같이 혹은 노랫소리같이 흘러나왔다. 너무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자신에게는 물과 기름같이 겉도는 저 이야기는 무엇인가.
“애인 대행이라도 하라는 건가요? 제가 보기엔 대표님의 그 말씀은 전혀 타당하지 못한 것 같은데요. 제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보시는 겁니까?”
보기에도 미스잖아……. 지선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이 남자 지금 사람 앞에 두고 장난하는 거야.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긴 있어. 당신이 예스를 하면 그 이유를 이야기하지. 노라고 하면 이유 따위는 들어야 할 필요도 없는 거니까. 다만 조건은 기간은 딱 한 달, 아마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아, 돈은 상관없어. 그냥 지불해도 되겠지만 당신이 갚고 싶다면 갚아. 이자는 받지 않을 테니까. 기간도 정하지 않을 테니. 그 정도 조건이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될 듯해 보이는 건 나의 착각인가. 연인의 역할이라는 건 딱 남들한테 그렇게 보일 만큼이면 되니까 감정적인 소비는 필요 없어. 괜찮은 조건이라고 생각하는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그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돈을 길바닥에 버리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지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을 보고 그가 말했다.
“당신은 그만한 가치가 있어.”
그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어이없어하는 지선을 보더니 덧붙였다.
“나한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그러고는 지선에게서 몸을 돌렸다. 용건이 끝났다는 것일까. 지선은 다시 이마를 찌푸렸다. 그리고 아무래도 석연치 않아 물었다.
“왜, 하필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가 지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남자의 웃는 얼굴이…….
참 차가웠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나쁜 여자니까.”
“……?”
샤워를 하고 추위에 떨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굴에 수분 크림을 바르면서도 지선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왜? 내가 뭘 했다고 나쁜 여잔데?”
혼자 중얼거리는 버릇 같은 건 없었다. 티브이를 보고 광분하는 것도 취미에 없다. 그러나 싸구려 화장대 너머의 피곤에 지친 말간 얼굴을 가진 여자는 그리……. 나쁜 짓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냥 열심히, 좀 악착같이 살았을 뿐이다. 박성진 대리한테 함부로 군 거? 마음에 있지도 않으면서 그걸 거절 안 하는 게 더 나쁜 거 아닌가, 오더가 잘못됐다고 우기는 거래처에 폭언을 퍼붓는 거 따위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삶의 대처 자세 아닌가? 뭐가 그렇게 나쁜데…….
남자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자꾸만 목구멍에 거치적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