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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3.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참 나약하기 짝이 없다. 제정신이라면 비웃어 줬어야 하는 게 맞다. 당신 같은 돈이 썩어 문드러지는 사람은 사람이 우습게 보여서 그런 소리를 척척 하는 거냐? 라고 말해 줬어야만 했다. 그러나 우편함에 꽂혀 있는 각종 공과금, 대출금 상환 안내 엽서들, 병원에서의 월 수납금액 안내 문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올케의 전화가 지선의 고단한 밤을 장식하였기에 쓰린 속을 안고서 냉장고가 비어 알코올 기운도 빌리지 못한 채 잠들면서 잠꼬대처럼 되뇌게 되었다.
“나쁜 여자면 어때……. 장기매매라도 할 판인데…….”
자신이 그렇게 작은오빠를 생각하고 있었나. 스스로도 의심스러워졌다.

푸석한 얼굴로 회사에 출근한 지선은 딜리시안의 마지막 뒤처리가 많았기에 정신없이 일에 치여야 했다. 또 내려가 봐야 할 듯한데 문제는 저 하얀 문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저 남자는 그 흔해 빠진 휴대폰도 없다고 했었다. 어제 한 소리는 헛소리인가? 기한은 내일까지인데 어제 들었던 것은 너무 간절한 나머지 보였던 환청이었던가 싶었다.
“지선 씨 출발 안 해? 마지막 시즌이라 길 막힐지도 모르는데.”
박 실장의 목소리가 은근한 재촉으로 들렸다.
“가야죠. 갈 거예요. 오 팀장님은 바쁘다고 그랬죠?”
“어, 와이프 오늘 조리원에서 나온다고 가 봐야 한다고 했어. 어차피 팀장은 내일 내려 갈 거니까 지선 씨가 공사 마무리된 거 보고 와야지. 아, 그래도 사고 없이 빨리 끝나 가네. 페인트 빼고는 문제없었던 거지?”
그나마 박 실장이 살갑게 대해 주니 다행이었다. 오 팀장이 없는 지금 박 실장이 최고위직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아무래도 말 꺼내기가 멋쩍었지만 박 실장의 살가움에 은근히 지나가는 투로 물으려고 애쓰면서 슬쩍 말을 꺼냈다.
“저기, 저 대표님은 오늘도 출근 안 해요?”
“글쎄, 그 양반이야 자기 나오고 싶을 때 나오지, 뭐.”
힘들게 물은 질문이지만 맥 빠지는 답이었다.
“이구, 뭐 그래요? 참 오너가 좋긴 좋구나.”
“그게 편해. 지선 씨가 저 사람이랑 일 안 해 봐서 그래. 뭐 하는 거마다 작품이 나오긴 하지만 그 눈에 제대로 맞추려면 아주 일하는 사람들은 경을 친다고……. 그러니까 안 나와 주는 게 도와주는 거야. 그냥 마나님들한테 얼굴 마담만 해 줬으면 좋겠다고. 지선 씨 아마 처음 봤지? 얼굴 마담으로는 끝내주잖아.”
박 실장이 저렇게 농담하는 것은 또 처음이다. 어설프게 얼굴 근육을 움직여 웃음으로 대꾸해 주기는 했다. 하긴 자신의 설계도를 마무리한 거 보면 실력이 나쁜 것은 아닌 듯했다. 그렇게 안 풀리던 걸 정말로 자연스럽게 마무리 지어 놓은 거 보면 아티스트적인 기질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래서? 그래서 그런 일반인은 상상하기 힘든 말을 꺼낼 수 있는 건가?
지선은 저번처럼 높은 사람들을 봐도 곤란하지 않게 그나마 정장으로 차려입고 벗어 놓은 털 점퍼를 걸쳤다. 운전할 때는 그게 편하니까. 물론 차 안에는 코트도 잘 모셔 놓고 있었다. 여벌의 옷조차 트렁크에 챙겨 놓았으니…….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하얀색 문을 한번 건너다보고는 지선은 씩씩하게 사무실을 나섰다. 어떻게든 되겠지.
“다녀오겠습니다.”
씩씩한 인사를 대충 받아 주는 사람을 뒤로하고 지선은 자신의 작은 프라이드에 몸을 실었다. 아까부터 간절해 보이는 올케의 문자에 정말로 어찌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아직 이틀이나 남았다 치고 정말 안 되면 오늘 밤이라도 대부업체에 전화해서 쇼부를 봐야겠다 생각하고는 더 이상 그 문제를 접어 버렸다. 그것 아니라도 머리 아픈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독한 내장제의 페인트 냄새도 자꾸 맡으면 중독이 될 수 있었다. 자욱하게 연기처럼 독한 냄새가 퍼져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맡으니 머릿속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환각 증세인가.
“음, 생각보다 괜찮은데요. 위에 장식등은 아직 안 왔나 봐요.”
“왔어요. 그런데 아직 여기 도색이 마무리돼야 하거든요. 고가라 괜히 도료 같은 거 묻으면 안 되니까 좀 참는 거죠. 여기 좀 어색하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처음 할 때는 그래 보였는데 괜찮네요. 사진 좀…….”
한 부장의 손에 들린 디카가 요란하게 울렸다. 마무리 도장 중인데 도료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난 거치고는 그래도 제대로 잘 나온 것 같긴 했다. 함께 여러 번 공사했던 나이 든 공사 책임자가 이따 저녁에 소주에 삼겹살이나 한잔하자고 계속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래도 늦어도 올라가야만 할 것 같았다. 마침 시즌이 막바지라 아무리 공사용이라 해도 리조트에 방도 모자란 듯 보여 방을 점거하기에도 불편스러웠다.
아침나절에 출발했는데 벌써 어둑해지고 있었다. 아, 이 동네 눈이 많이 와서 밤에는 길이 안 좋을 텐데……. 걱정스럽긴 했지만 아직 확인해야 할 것이 몇 군데 남아 있었다. 게다가 점심도 대충 오면서 우동 한 그릇으로 때운지라 속이 허했지만 자리를 비우기 힘들었다.
“아, 디자이너 선생, 이따 한잔하자니까.”
공사 책임자인 최 부장의 걸걸한 목소리가 울렸다.
“끝나야 하죠. 얼른 끝이나 내세요. 그래야 한 잔이든 한 짝이든 하지.”
“아이고, 우리 디자이너 선생은 저게 좋다니까. 그래, 꼭 한 짝 해야 돼. 도망가면 안 돼.”
“얼른 마무리하시라고요.”
지선은 채근을 하고는 돌아섰다. 진짜 저 자리에 있다가는 소주 한 짝을 해치워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둑해지는 하늘과는 반대로 스키장의 설원에는 이미 야간 조명이 눈부시게 켜져 있었다. 그냥 돌아다니기에도 추워 죽겠는데 뭣 하러 밤까지 저 난리를 치면서 스키 따위를 타려고 애쓰는지, 스키복이나 스키 값을 얹어 준다고 해도 지선은 손사래를 칠 거라 생각했다.
서류와 영수증, 그리고 여러 팀들이 일을 하고 남긴 증빙 서류 등을 여기에 상주해서 공사 감독을 맡아 온 이 대리에게 받아 든 지선은 그나마 디자이너니까 여기에 상주는 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공사하는 현장은 난방은 되지 않았고, 또한 독한 염료 덕에 문을 열어 놓은 곳이 많아서 바깥이나 마찬가지의 온도였다. 체면을 차리느라 코트로 바꿔 입고 온 지선은 으슬으슬한 추위에 손이 곱아 들어서 영수증과 서류철을 넘기는 손놀림이 뻣뻣해지고 있었다.
“따뜻한 데 들어가서 하세요.”
“아, 다 했어요.”
지선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지나가던 안면이 있는 공사 팀 직원이 한마디 하고 지나갔다. 춥고 불쌍해 보이나. 속이 비어서 더욱더 추운 지선은 겨우 영수증과 공사 팀의 공사 확인서를 체크하고 자신도 사인을 했다. 이제 얼추 일이 끝났으니 뭔가 좀 먹고 출발을 해야 하나 아니면 살인적인 스키장의 물가를 감안해서 나가서 휴게소에 들러서 끼니를 때워야 하나 생각을 하다가 후자로 정하고 막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저녁 안 했으면 같이하지?”
뒤꼭지에 좌르르 소름이 돋았다. 아, 어디서 저렇게 툭툭 튀어나오나. 지선은 뻣뻣해진 안면 근육을 풀려고 애쓰면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젯밤에 무슨 소리를 해서 자신의 숙면을 방해했든 간에 그는 적어도 그녀의 상사니까.
“저녁은…….”
어쩔 셈이었을까. 음, 같이하시죠? 그쪽이 사시는 거예요? 이미 먹었는데요……. 말을 삼키는 자신이 바보 같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보가 되는 건 어째서일까.
남자는 전혀 리조트와는 어울리지 않는, 늘 저렇게 입어야 한다는 공식인지 또 단정한 정장 바지에 하얀색의 와이셔츠에 여전히 추위를 막기엔 제 구실을 못해 보이는 재킷 차림이었다. 다만 새카만 색이 아니라 약간의 음영이 있어 보이는 짙은 회색빛이라는 게 좀 달라진 점이었다. 대체 딜리시안에는 왜 나타난 건가. 스키를 타러 온 것도 아닐 테고.
“여긴 어쩐 일이세요.”
대답 할 타이밍을 놓쳐 버린 지선이 다른 화두를 꺼내 들었다.
“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서 말이지. 아직 저녁 식사 하긴 이른 시간인데 좀 먹고 출발하는 게 어때?”
혼란스럽다. 저번 공사 때 태풍으로 인해 외장재가 전부 날아가 버린 것이나, 공사 비품 등을 실은 차가 전복돼서 안에 것을 다 못 쓰게 되었을 때의 뒷수습도 다 자신이 했었건만, 그런 물리적인 데미지가 아닌 이런 심리적인 혼란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지선은 느긋하게 휘적거리면서 걷는 남자의 뒤를 따라가면서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지만 그 생각이라는 것들이 몇 주 동안 정리하지 못한 이삿짐처럼 제자리를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였다. 남들이 하는 말에 크게 의미를 두면서 곱씹는 성격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남이 하는 말을 하찮게 여기는 게 버릇일지도 몰랐다. 그것은 사회생활을 하는데 영 좋지 못한 버릇이다.
그러나 왜 저 남자의 말은 명치끝을 후벼 파는 것같이 쉬이 잊히지도 않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까 한 말은 나 때문에 여길 왔다는 건가? 서울에서 딜리시안까지 말인가, 아니면 우연하게 횡성까지 와서 딜리시안에 있다가 단지 할 말이 생각나서 위로 올라왔다는 것인가. 그 어느 쪽도 맘에 들지는 않았다.
“날이 추운데 따뜻한 게 어때? 지하에 국물 있는 것들 팔던데.”
눈부신 와이셔츠와 새카만 머리를 잘 넘긴 모델 같은 남자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묻는 말은 영 분위기가 안 맞는 말이었다. 저런 남자한테는 생음악의 피아노 연주가 흐르는 레스토랑의 우아한 스테이크가 어울리는 거 아닌가.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그가 들어가 열림 버튼을 누른 채 서 있었다. 지선은 안 들어갈 수 없는 노릇이라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단둘이, 거울도 혹은 식당의 전단조차도 어디 한 군데 시선을 둘 곳이 없는 단조로운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뒤에 서 있는 남자에게서 미미한 향이 느껴졌다. 언젠가 맡았던 그런 퇴폐적인 체취도 아니었고 싸한 남자의 스킨 냄새 같은 것도 아닌 묘한 마른 풀 냄새 같은 게 느껴졌다. 이 엄동설한에, 저런 남자에게서 풀 냄새라니……. 지선은 아마 저 광택 있는 재킷이 다녀온 세탁소에서 쓰는 세제 냄새이리라고 단정하고 말았다.
남자는 한마디 말도 없었다. 12층에서 지하 2층까지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선은 갑갑함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계단을 오를 때처럼 숨이 차지는 않는다는 것?

“왜, 이런 거 안 좋아하나?”
남자의 말에 지선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지선은 조심스럽게 물을 따라 마시고는 대답했다.
“안 좋아하는 건 아닌데 순전히 바가지네요.”
의외로 남자가 시킨 것은 순대국밥이었다. 게다가 테이블은 달랑 4인용임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같이 다리가 긴 남자는 혼자 앉기도 벅찬 좁은 자리에 다닥다닥 테이블을 채워 놓아서 마트의 푸드 코트보다도 못해 보이는데 순댓국이 만 이천 원씩이나 하다니. 게다가 금방 나온 저 가격만 럭셔리한 순대국밥에 순대가 대체 몇 개나 들었나. 세 개도 안 들은 것 같은데다 정체불명의 머리 고기도 수를 세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남자는 가타부타 말이 없이 먹기만 했다. 같이 딸려 나온 썰기 귀찮아서 대충 토막 친 것 같은 섞박지의 국물을 부어서 뻘겋게 만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지선은 자신의 눈에 뭐가 씌었는지 남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대국밥을 떠먹는 모습조차 우아한 아가씨가 티타임에 홍차에 밀크를 넣어 밀크티를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별로 맛이 없나? 내가 메뉴 선택을 잘못했나 봐.”
지선이 배가 고픈 와중에도 남자의 눈에 그다지 푹 하지 못하게 보인 이유는 순대국밥에 취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남자의 말이 목구멍에 걸려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대신 맛이 없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훨씬 적당하고 타당하게 보일 정도의 수준이기도 했고.
“나가서 먹을 걸 그랬나 보네. 사실은 오늘 같은 으슬으슬한 날에는 뗌뚝 같은 게 먹고 싶었는데 말이지.”
뭐, 뗌뚝? 지선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봤을 텐데도 남자는 부연 설명을 하는 친절을 보여 주지는 않았다. 지선이 숟가락을 놓은 지 한참 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짧은 산속의 해는 넘어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게다가 한결 더한 추위는 지선같이 추위에 약한 사람에게는 가혹하리만큼 더해져 어깨를 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뭔가 더 이야기가 없다. 그냥 성큼성큼 앞서 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로비는 너무 넓어서 난방이 되고 있지만 지선을 추위에 떨게 만들었고 이 추위에 나가면 바로 차를 타고 가 버려야 할 것만 같은데 지선은 이 남자에게 할 말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입을 뗄 수 없을 만큼 힘든 말이.
딴 일 같으면 당신들같이 잘난 사람은 나 같은 없어 보이는 인간은 무시하는 거냐고 덤빌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가 한 말은 돈을 빌려 준다는 것도 아니었고 그 대가가 정당하지도 않았으며 그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와 반면에 자신이 처한 상황은 이런 곤란스러운 상황을 무시하지 못할 만큼 사람을 절박하게 만들 지경이었다. 지선이 뭔가 말을 하려고 발걸음을 멈췄을 때 앞서 주차장을 향해 난 옆문으로 가던 그가 돌아섰다.
“차를 각자 가져가면 할 말을 못할 거고, 내 차로 가면 내일 당신이 출근하는 데 지장이 있을 테니까 당신 차로 같이 가지. 늦은 밤 운전이 곤란하다면 내가 할 수도 있는데?”
지선은 당황스러웠다. 아니 왜 내 차를 같이 타고 가야 하는 건데? 그러나 그 당황스러움의 이유는 자신의 좁고 작은 차에 이 남자를 태울 맘이 없다는 것, 혹은 더 자세히 까놓고 말하자면 그게 창피하다는 것이 진짜 이유일지도 몰랐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여기서 하세요. 그런 수고를 하실 필요가 없잖아요.”
“여기서?”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쌍의 젊은 남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스키복인지 보드복인지 눈이 아프리만큼 현란한 형광 주황과 연두의 옷에 스키에 폴대에……. 그리고 같이 딸려 들어온 냉기와 바람 한 무더기. 그들이 두 사람의 말을 듣지 못할 만큼 지나친 뒤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어제 내가 한 제의 어때? 예스인가, 노인가?”
그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저기요, 왜 어제 한 말 다시 안 하시는 거죠? 잊은 거 아닙니까? 나 돈 필요한데요……. 하고 장황한 사설을 늘어놔야만 했었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단답식의 대답도 어려웠다. 그러나 해야만 했다.
“예스예요. 그만큼 돈이 급한 건 사실이니까.”
“좋아. 그러면 당신 차로 가지. 당신이 말한 순간 계약 성립이니까. 세부사항을 설명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더 어두워지기 전에 올라가야 할 테니까. 그리고 당신 차로 가야 하는 이유, 아까 말한 거에 새로운 이유가 하나 더 붙었어. 이제 ‘연인’ 사이니까.”
정말로 그의 이유는 타당하다. 그래서 지선은 이마를 찌푸리면서 대답했다.
“대표님 차는요?”
“괜찮아. 내 차도 아니니까. 가지.”
지선의 얼굴에 곤란스러움이 가득 피어오르고 있는데 그는 문을 열고 찬바람이 부는 산속의 주차장으로 곧장 향했다. 종종걸음을 치면서 그의 뒤를 따르는 지선은 그가 자신의 차가 있는 곳으로 정확하게 가는 것을 보고 의아함이 더해졌다.
그가 자신의 차에 탄다고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어쩌지……. 아, 그건 안 될 말이다.
“저기……. 차는 그냥 타고 가세요. 제 차는…….”
그러나 지선의 목소리는 차가운 바람소리에 들리지 않는 걸까. 아니면 들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는 빽빽하게 주차된 차들 가운데서 그녀의 차를 바로 찾아내고는 빨리 문을 열라는 듯 서 있었다. 이 산바람 속에 그 얇은 재킷만을 입은 채.
지선은 종종걸음으로 차로 뛰어가서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가 옆으로 타려고 했지만 지선의 옆 좌석에는 서류와 점퍼 따위가 가득했다. 지선은 곤란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뒤로 옮겼고, 묵묵히 기다리던 그는 구겨지듯 차 안으로 몸을 들이밀곤 조수석에 앉더니 불편한 듯 의자를 더듬어 뒤로 뺐다. 최대로 뺐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와 같은 체구의 남자가 타기에는 좁은 차였다.
“불편하실 텐데, 괜찮겠어요?”
내리라는 것도 미안스러웠고 아까 계약이 성립됐기에 이제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달리 그를 물리칠 만한 이유가 생각나지도 않았다. 지선은 문을 닫자 차가운 차 안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그가 언뜻 보기에도 굉장히 마른 편이었지만 키 덕분에 좁은 프라이드의 안은 자신이 혼자 탈 때와는 사뭇 달랐고 싸늘한 차 안에 왠지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지선은 재빨리 키를 돌려 시동을 켰다. 그러고는 라이트를 켜면서 생각했다.
무사히 서울까지 갈 수 있을까…….

무사히 가지는 못했다. 겨우 미끄러운 딜리시안의 급경사 길을 쩔쩔매면서 내려온 뒤에는 그가 운전석을 차지했다. 포르쉐 파나메라든 프라이드 디젤이든 운전하는 사람에 따라 차가 달라지는 것이라는 걸 절감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어떻게 세 시간을 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를 강남 어딘가에 내려주고는-그가 운전했으니까 그가 어딘가에 내리고는 운전석을 다시 차지했을 뿐이었으니 어디인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겨우 집으로 와서 자신의 침대에 겨울 코트가 구겨지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몸을 던진 뒤에 생각나는 것은 그의 한마디 말이었다.
“……회사에서는 곤란하지 않게 하겠어. 이 일이 끝나더라도 회사에서 계속 일을 해 줬으면 하니까. 대신 내일부터 한 달 동안은 알아서 연락할 테니까 그때 내 부름에 응해 주면 돼. 주로 퇴근 후나 주말에 말이지. 그리고 메모지 있으면 당신 전화번호하고 계좌번호 적어서 줘.”
세 시간 내내 그 외에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그럴 거라면 왜 내 차를 타고 온 거지? 너무 넓고 편한 차에는 질렸나?
지선은 남자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걸 포기해야만 했다.

아침은 늘 언제나와 똑같았다. 언제나 찌뿌드드하게 싸늘한 날씨, 추위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겨울은 여전히 도시에 웅크리고 있었다. 오늘은 어제와 달라야 했다. 그러나 다른가? 뭐가……. 지선이 바쁘게 머리를 감고, 화장을 하면서 유일하게 하나 남은 깨끗한 컵에 마지막으로 남은 생수병의 물을 부어 렌지에 데우고는 컵 스프를 꺼내 들었을 때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기를 들면서 번호를 확인하니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지만 그것을 볼 새가 없었다. 전화기에 떠 있는 번호는 지긋지긋한, 올케의 번호였다.
“무슨 일이에요? 돈은 오늘 어떻게 될 거 같아요.”
이런 짧은 말을 하기도 바빴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렌지에서 뜨거운 물이 담긴 컵을 꺼내려다 손을 데일 뻔한 지선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이미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거의 한 10분쯤 늦었다는 것도 짜증스러운 아침이었다.
[아가씨……. 아침이라 바쁠 텐데.]
바쁘지만 어떻게 됐나는 거겠지.
“오늘 안으로 해결할 테니까. 이따 회사 가서 전화할게요. 나 이미 늦어서 말이에요.”
그 심정을 이해하긴 하지만 마치 빚쟁이처럼 구는 건 기분이 좋지 못했다. 지선은 서둘러 전화를 끊고서는 컵 스프 봉지를 뜯어 컵에 부었다. 늘 자주 흘리곤 하지만 오늘은 싱크대 위에 떨어지는 가루조차 짜증스러웠다. 갑자기 저걸 먹으려는 맘이 뚝 떨어져 버리고 있었지만 한 봉지 가격을 생각하고는 저런 걸 기분에 따라 버려 버릴 만큼의 사치를 누려 본 적이 없는 지선은 알루미늄 재질의 봉지를 돌돌 말아 컵에 녹고 있는 스프가루를 저어서는 뜨거움에도 불구하고 훌쩍 마셨다.
맛은 늘 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따뜻한 것이 빈속에 들어가니 아까의 기분은 좀 사그라졌다. 그러고는 여전히 떠 있는 휴대폰의 메시지를 보고는 확인을 눌렀다. 그것을 보는 지선의 이마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그건 긍정인가, 부정인가.
[돈은 송금했어. 앞으로 이 번호로 연락해.]
낯선 번호지만 누구의 것인지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진짜인가? 갑자기 뭔가에 뒤통수를 맞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며칠 동안 마치 농담인 듯 혹은 꿈인 듯했던 일들이 이제 사실이 되는 건가. 갑자기 오 팀장의 목소리가 리플레이되어 뇌리를 스쳐갔다. 지독하게 족쇄 같은 걸 싫어해서 아직도 휴대폰도 없는 원시인 같은 남자라는…….

늘 똑같은 쳇바퀴 속의 나날 같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오늘 지선은 자신의 계좌에 들어와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과 그 돈을 이체한 사람의 낯선 이름과 그리고 그것을 올케한테 보내고 우는 소리를 바쁘다는 핑계로 끊어 버리고는 잠시 멍한 상태로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인가? 아니 이 무슨 동화 속 같은 일이지? 이 남자 정말로 어이없는 말을 하더니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그럼 앞으로 한 달간 난 뭘 해야 하는 거지? 애인 대행? 아니다, 그가 말한 건 그런 거 하고 달랐는데. 아, 연인. 연인들은 대체 뭘 하는데? 그런 것 따위 되어 본 적이 없어서 알 수가 없었다. 혹, 육체적인 관계를 원하는 건가? 지선은 잠시 멍해졌지만 그 돈이라면……. 뭐든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
뭔가 더 이야기를 했던 거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몇 번이고 보았던 그 낯선 번호는 이미 외울 것만 같았다. 거기에 돈은 잘 받았어요. 앞으로 무얼 해야 하죠, 혹은 고마워요, 아니 이도 저도 아니면 감사하다고 한마디 했어야 했지만 결국 아무 답장도 못한 채 오전 내내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우리의 강철 체력녀께서 오늘은 왜 이리 기운이 없으시나?”
“딜리시안까지 하루에 왔다 갔다 해 봐요. 강철도 알루미늄 호일이 되지.”
지선은 정신을 차리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조 대리가 지나가면서 던져 준 공사비 명목의 계산서는 어마어마했다. 아, 이걸 다 정리하려면 또 며칠 밤을 새워야겠네. 지선은 이마가 찌푸려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을 하는 게 붕 떠서 뒤죽박죽되어 버리는 머릿속을 정리하는 데는 훨씬 낫다는 생각에 서류들을 받아 들었다.
“너무 많다. 조 대리, 좀 나눠. 이지선 씨 아직 20대다. 20대 아가씨 연애할 시간 좀 줘라. 양심도 없이 일을 다 넘기냐?”
오 팀장의 한결같은 평범한 위함이었다. 그러나 왜 그 말에 지선은 얼굴이 붉어지려고 하는 걸까. 연애할 시간이라니 뭘 알고라도 있나.
“괜찮아요. 조 대리님이 먼저 가야지. 요즘 누가 20대에 연애를 해요.”
지선이 볼멘소리로 대답하자 오 팀장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지선의 마음 한구석은 영 불편했다. 누가 20대에 연애를 하는가.

“야, 이번에 꿩 만두 스페셜 나온 거 봤어? 와, 완전 죽이심. 가자. 자리 없을라.”
아 저놈의 만두……. 만두 전골을 좋아하는 건 오 팀장뿐이지만 그래도 매번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게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지선, 꿩 잡아먹고 우리 힘내자. 일어나.”
정확히 11시 50분이었다.
“아, 나 할 일도 많고, 다이어트도 할 거고, 꿩 따위 먹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 패스해 줘요. 이 서류 다 안 보여요?”
“아, 그 몸에 무슨 다이어트야, 가자.”
들은 체도 안 하는 지선을 보고 낄낄거리고 웃는 건설 팀 여자들의 목소리는 멀리서도 잘 들렸다.
“박 실장님, 우리 밥 먹고 바로 현장 가요.”
“그래. 이따 거기서 다들 만나지.”
다들 또 썰물처럼 우르르 빠져나갔다. 요즘처럼 두 팀 다 공사가 걸려 있으면 다들 외근이라 디자인이나 서류 정리를 하는 지선과 저쪽의 몇몇 사람들만 오늘 또 사무실을 지키게 되었다. 오 팀장의 만두 전골 팀은 지선에게 더 이상 채근하지 않고 서둘러 나섰다. 아무래도 줄을 서기 싫어 미리 자리를 차지할 셈인 모양이었다. 지선은 혼자 앉아 서류를 뒤적거렸지만 그 많은 숫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배가 고픈 것도 같았다. 점심을 먹긴 먹어야 할 텐데 오늘 같은 날 싸늘한 편의점표 삼각 김밥 같은 건 영 내키질 않았고, 팀원들이 다 나가 버려서 혼자 뭘 시켜 먹기도 그랬다. 어떻게 할까. 집에 아무것도 없는데 잠시 이 시간을 이용해서 마트라도 갔다 와야 하나, 했지만 역시 점심시간에 나가기에는 시간이 녹록지 않았다.
한참 고민 중일 때 그녀의 휴대폰의 진동음이 울렸다. 아, 아까 대충 뭉갠 올케의 전화인가 싶어 뭔가 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전화기를 들었다 낯선 번호에 잠시 머뭇거렸다. 처음 보지만 뭔가 눈에 익은 번호.
“이지선입니다…….”
뭐라 말을 꺼내기 힘든 지선이 딱딱하게 말했다.
[점심 먹으러 나간 건 아니겠지?]
이미 나갔다고 했어야 하나. 그러나 지선은 또다시 어마어마한 금액을 생각해 내고는 대답했다.
“네, 나가기 전인데요.”
[거기서 멀지 않은데, 택시 타고 강남의 이라인이라 하면 대충 알 거야. 모른다고 하면 제일생명 본사 옆이라고 하고. 가까워. 밑에 와서 전화해.]
남자의 목소리는 그리 친절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았다. 마치 거래처 주문서에 오더를 내리듯 딱 떨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의 설명이나 그 밖의 것도 필요 없이 전화는 끊어졌다.
지선은 기계적으로 일어나면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자신이 좋아서 혹은 정말로 연애를 하고 싶어서 이런 돈을 주고 이런 역할을 시켰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면 적어도 그 역할이나마 제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진 지선은 머리도 손으로 다듬고는 코트를 꺼내 입고 가방을 들고 나섰다.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자신은 그 돈을 받았으므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꽤 만만치 않은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린 건물은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웠다. 콘크리트빛의 건물은 묘하게도 너덜거리는 듯한 얼룩진 색이지만 럭셔리한 단출한 간판이나 안이 언뜻 보이는 인테리어만 봐도 강남틱한 건물이었다. 그리고 약간은 오드틱 하기도 하고. 지선은 한숨을 내쉬고는 마치 시험을 보러 가는 수험생인 양 씩씩하게 건물로 향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그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지선은 소리만 듣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껏 튜닝이니 뭐니 하는 차들의 골골대는 굉음 소리, 어디 또 마후라에 빵꾸라도 냈나……. 그러나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지선이 한번쯤은 힐끗거려 줘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의 눈앞에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차는 아무리 강남이고 지금 서 있는 건물 앞에 주차된 차들이 반은 아우디니 벤츠니 하는 일명 외제차들로 즐비한데도 불구하고 눈이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는 묘한 차였다. 바닥에 바짝 붙어 있는 듯한 낮은 차체, 으르렁거림이 마치 천둥소리만 같은 차는 광택이 있는 연보랏빛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묘한 보라색 차라니……. 금속성의 광택이 든 연보랏빛은 묘하게도 미래에서 온 것 같은 스포츠카의 외견과 그럴 듯하게 어울렸다.
차는 익숙하게 빈자리에 섰다. 지선이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또 한 번 희한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시동이 꺼지는 것과 동시에 쉬익 하는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차문이 하늘 위로 올라가듯 천장을 향해 열리는 게 아닌가. 참 별구경 다한다 싶은 지선이 꽤 점심시간이 지났다 싶은 것도 잊은 채, 희한하고 그것과는 별개로 아름답게마저 보이는 묘한 차를 구경하고 있는데 또 한 번 지선을 당황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났다.
대체 저딴 차 같지도 않은 것은 누가 타고 다니는 걸까, 가끔 굉음을 내며 눈 깜짝할 사이에 자유로를 내달리는 저런 차들은 가격대가 어마어마한 것도 알고 있지만 지선에게는 한심스럽게만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차에서 누군가 나오다니, 어떤 인간인가 구경해야겠다 싶었는데 거의 누워 있는 듯 낮은 차체에서 몸을 일으켜 나온 사람은 어이없게도 올 블랙으로 통일한 복장의 익숙한 실루엣의 남자였다.
광이 나는 매끄러운 구두, 그리고 좀 타이트하다 싶지만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매끈하게 떨어지는 정장 하의와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얇은 실크 재질의 셔츠, 물론 손에는 재킷이 들린 채였다. 그리고 또 하나, 하얀색의 창백한 얼굴을 삼분지 일쯤 가린 속이 전혀 보이지 않아 새카만 옷과 통일된 보잉 선글라스…….
하, 정말 완벽하게 기죽이는 차림이었다.
“먼저 왔었군. 들어가서 기다리지.”
그가 하늘로 열린 문을 가볍게 밀어 닫으면서 말했지만 지선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이유가 뭘까. 너무 어마어마해서? 아니면 현실이 아닌 것 같은 남자가 자신에게 한 어이없는 제의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게 황당해서?
멍하니 있는 지선을 정신 차리게 한 것은, 아니 더욱더 혼란에 빠지게 한 것은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가 싸늘하게 굳어 있는 지선의 차가운 손을 아주 자연스럽게 잡고 콘크리트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고급 식당의 문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손끝에서 저는 매우 당황스럽다는 신호가 찌릿거리면서 가고 있는 것일까. 그가 걸어 들어가면서 낮게 말했다.
“서로 약속을 지키자고.”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아주 간단명료했다. 그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익숙한 듯이 안으로 들어가 밥이라는 것을 먹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었다. 익숙하게 그에게 인사를 하는 식당의 점원들에게 그는 선글라스를 벗으면서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고, 식당 안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런 그를 한 번씩 힐끗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건 연예인도 아니었지만, 곁에 서서 멍하니 따라가는 지선에게 당황스러움을 안겨 준다는 점에서 이 남자의 눈이 부실 것 같은 외모는 지극히 부담스러웠다.
그가 안내된 자리에 앉고 익숙하게 식당 매니저에게 인사를 건네고 자신한테는 한마디 묻지도 않고 주문을 하는 동안에 지선은 대체 뭘 한 걸까. 남자의 매끄러운 블랙 실크 셔츠 밑에 드러난 창백한 쇄골에 시선을 꽂고 있었다면 머리가 어떻게 된 여자가 되는 걸까.
“사무실에 전화해. 좀 늦는다고.”
그의 목소리가 없었더라면 아마 자신의 눈빛 때문에 그의 양쪽 어깨뼈가 만나는 오목한 곳이 타 버렸을지도 모를 듯했다. 지선은 기계적으로 전화를 들었다. 한참 동안 벨소리가 울리고 익숙한 사무실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지선은 남자를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고 그 남자 역시 그런 지선의 시선을 전혀 피하지 않았으나 그것을 흩뜨린 것은 서브된 애피타이저를 가져온 종업원과 탁자에 놓인 앙증맞은 애피타이저였다.
“아, 조 대리님 저예요, 이지선. 아, 지금 바깥인데요. 일이 있어서 좀 늦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고요…….”
빤히 쳐다보던 남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남자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서리자 쳐다보고 있던 지선은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전화를 끊고서 가방에 넣은 지선이 앞에 놓인 정체불명의 작은 접시들을 무시한 채 여전히 자신에게 시선을 꽂고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정말로 며칠 동안 지선을 괴롭힌 질문을 해야만 했다.
“이제부터 제가 뭘 해야 하는 거죠?”
“뭘 해야 한다니?”
자신이 한 말을 되묻고 있는 그 때문에 지선은 또다시 숨을 삼켜야만 했다.
“제가 정리를 해 드리죠. 전 돈이 필요했고 그걸 빌려 주신다고 하신데다가 대가는…….”
지선은 말을 하기가 겸연쩍어졌다. 분명히 머릿속에는 간단명료하게 정리를 할 맘이 있는데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대가는 연인인 척, 한 달간. 난 오늘 아침에 정확하게 입금했고, 그 역할은 지금부터 시작이고. 자, 또 뭐가 필요하지?”
“이유를 알려 주겠다고 한 적도 있고, 그 방법을 말하겠다고 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이건 정말 너무 밑도 끝도 없잖아요. 저야 급한 불을 끄느라 어떤 짓이라도 해야 하니까 예스라고 한 것이지만. 대표님께서는 사람의 곤경을 즐기시는 겁니까?”
깊이 생각하지 말아야 했다. 눈앞의 것에 심취하지도 말아야 했다. 그래야 뭔가 말을 하고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마침 스프가 서브되어 나왔다. 지선이 아침에 타 먹은 가루 스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가 스푼을 들고 그녀에게 후추까지 밀어 주면서 천천히 말했다.
“미안한데, 지금 이지선 씨 말 중에서 엉뚱한 곳에 포커스가 맞춰져서 말이야.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건 무슨 뜻이지?”
왜 하필 거긴가…….
“제가 먼저 물었는데요.”
그가 대표라는 걸 알기 전에 박 실장이건, 오 팀장이건 혹은 그 전에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의 사장님이건, 지선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의견을 묵살당해 본 적이 없었다. 이 남자한테도 마찬가지여야만 했다.
“아, 좋아. 내가 이런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제의를 하는 건, 빤한 이유지. 나이가 꽉 찬 미혼 남자가 내놓을 만한 연인이 있어야 한다는 건 그럴 소지의 사람이 있는데, 피하고 싶다는 게 이유거든. 게다가 그 사람이 날 너무 잘 알고 있어. 내 취향이 어떤지, 혹은 내가 원하는 상대가 어떤지……. 그게 자기라는 착각에 빠져 있지. 그래서 생활하기에 곤란스러울 만큼 날 억압하고 있거든. 그러나 좋은 점은 그 사람의 관심이 한 달이면 사라져 줄 거라는 거지. 한 달 만, 그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을 만큼의 역할이 필요했을 뿐이고 이런 제의를 아무에게나 할 수는 없는 건데 딱 좋은 조건이 나한테 떨어진 거니까. 내가 운이 좋은 거겠지.”
간단명료하다. 그리고 보기와는 다르게 감정이 상할 이유도 없다. 이 남자가 자신을 택한 건 단지 무던하고 무감각하게 보이는 자신의 성격 때문이었다. 지선의 머릿속을 꿰뚫어보는 듯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스프를 몇 모금 떠먹더니 말을 이었다.
“요지는, 내가 미친놈 소리를 듣지 않고 정당하게 조건을 제시할 수 있어서 좋은 거고, 내가 짧은 시간 관찰해 보기에 이지선 씨는 그런 일을 사심 없이 해 줄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이지. 뭐 드라마나 영화에서 아주 흔하게 나오잖아. 연인인 척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가까워지고 진짜 연인이 되었다……. 그런 거 곤란하거든.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혹여 그런 감정적인 허비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면 지금 이야기해. 돈이야 뭐 천천히 갚기로 하고, 그 외에는 없었던 걸로 하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