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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남자의 목소리는 전혀 억양의 변화도 없었고 감정도 없었지만 단정하고 명료해 듣기 좋았다. 이 정도면 괜찮다. 물론 시각적인 공해야 어쩔 수가 없다지만 긴 것도 아니고 한 달뿐이다. 딜리시안 건같이 큰일이라도 걸리면 한 달은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런 걱정이라면 접어 두셔도 되겠네요. 돈 문제는 정말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꼭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갚도록 하겠습니다. 감정적인 소모 같은 거 절대 단언하건대 있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의아한 건 대표님 같은 분한테 제가 어울릴까요? 그 상대 분이 과연 그런 사실을 믿어 주겠습니까?”
지선의 말이 끊어진 건 서브되는 샐러드와 빵 때문이었다. 꽤 값나가 보이는 샐러드는 보기에도 럭셔리했다.
“그러니까 당신의 역할이 중요해.”
그가 포크로 샐러드의 채소를 뒤적거리면서 대답했다. 지하 푸드 코트의 순댓국보다는 훨씬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아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했지?”
말을 잘못한 것 같았다. 그 무슨 일엔……. 어디까지 들어가야 하는 거지. 지선의 굳은 표정을 그가 흘끗 쳐다보았다.
“우선 내가 다니는 단골 식당이나 클럽을 순회할 예정이야. 그러니까 점심이나 저녁은 거의 나와 먹는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주말에도 시간을 비워. 열렬한 사이는 떨어져 있지 않을 테니까, 그걸 보여 줘야겠지. 그 외에 뭐 과도한 애정 행각이나 그런 것들은 할 필요 없어. 아, 그리고 한 두어 번 같이 호텔방까지 올라가는 장면까지만 연출해 줬으면 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독특한 과일 맛이 어우러진 샐러드에 살짝 감탄하고 있다가 그녀의 포크에서 얇게 썬 오렌지가 뚝 떨어져 내렸다. 아 호텔……. 그렇군.
지선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개를 들었을 때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의 눈빛과 마주쳤다. 그의 눈매가 날카롭긴 했지만 쏘아보는 눈빛은 아니었다. 지선의 표정을 읽은 듯 그가 말했다.
“당신, 표정이 복잡한데. 후회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샐러드로 시선을 돌렸다.
그 뒤로 나온 스테이크나 후식은 훌륭했다. 삼각 김밥으로 때울 뻔한 점심치고는 정말로 거한 식사였다. 이 남자와 이런 식으로 한 달 동안 밥을 먹으러 다니면 정말로 몸보신은 끝내주게 하겠구나 싶었다. 시간이 너무 지난 듯해서 커피는 생략하고 일어선 지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서는 남자는 정말로 영화배우 뺨치게 예술적인 외모였다. 무척 날 티 날 것만 같은 실크 셔츠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람도 있구나 싶을 만큼.
화장실에 가서 대충 거울을 다시 보고 나온 지선이 시선을 돌리자 그는 계산을 하며 익숙한 듯 주인인지 지배인인지 하는 사람과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괜찮은 기분이다. 남자들도 예쁜 여자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듯 아무리 아무 감정이 없는 자신 같은 여자라 할지라도 일행인 남자가 잘생기면 기분 나쁠 일은 없었다.
“태워 줘도 괜찮은데. 회사 근방까진 어떤가?”
그의 연보랏빛 차 앞에서 그가 물었지만 지선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차는 그 어느 누가 봐도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차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래, 좀 튀긴 하지. 들어가. 저녁에 연락하겠어.”
아, 저녁에 또 연락을 기다려야 하는 건가. 지선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자신한테는 너무 과한 조건이다. 하늘에서 복이라도 뚝 떨어지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정말로 생길 수 있는 건가? 그런데 뭔가 목구멍에 걸린 것 같은 이런 기분은 뭔가. 사무실에 들어갔다. 몇몇 자리가 비어 있는 게 보였고 자신이 문을 열었으니까 누구든지 반사적으로 문을 쳐다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특히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만 같다. 왜 늦었냐고 묻는 사람도 없는데 지선은 종종걸음을 쳐 자신의 자리로 가 털썩 주저앉아서는 더부룩한 속을 가다듬었다. 마침 그녀의 휴대폰이 울리면서 메시지의 도착을 알렸다.
[아가씨, 너무 고마워요. 통화가 안 되길래……. 일이 잘 될 거 같아요.]
일이 잘 돼야지, 그것 때문에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지선은 곧 생각을 바꿨다. 그렇다. 있는 사람들한테는 이런 돈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이 지금까지 여러 곳의 일을 하면서 보는 돈의 단위는 한참 상식 이상이니까. 그 사람에겐 그 돈이 그만큼의 가치밖에 없는 거고 자신은 험한 꼴 안 당하고 돈을 마련해서 다행인 것이었다. 그냥 여기서 끝내야 했다.
“다정하게 웃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자신의 목소리가 색소폰 소리에 묻혔나. 남자는 푸르스름한 조명 밑에서 호박색 액체가 든 잔을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지선은 앞에 놓인 워셔액 같은 색깔의 잔을 쳐다만 보다가 그래도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서 물었던 건데 남자가 못 들은 건지 혹은 못 들은 척하는 건지 대답이 없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그래도 몇 번 드나들었던 재즈바 같은 데와는 차원이 다른 한마디로 ‘고급스럽습니다.’란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인테리어가 훌륭한 바였다. 독한 담배 연기와 흐느적거리는 듯한 여가수의 목소리와 피아노, 색소폰 소리가 구색을 맞춰 흘러나오고 있었다. 직업병인지 지선은 그런 바의 내부를 보고 인테리어를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가게 등급을 매겨 버리고 마는데, 눈에 보이는 바에 의하면 이것은 아주 상류층 전용의 최고급 바가 분명했다. 절대로 가격표 따위는 보고 싶지 않을 게 분명하리만큼.
점심을 과하게 먹어 별로 생각이 없다는 지선의 말에 그가 데려온 곳이었다. 물론 자신의 차를 가져온 지선이 멀찌감치 보도에 걸친 개구리 주차를 하고 한 블록쯤 걸어온 것이긴 하지만.
남자의 블랙 실크 셔츠는 푸르스름한 이런 바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었다. 낮보다는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 무대를 응시하고 있는 묘한 표정 없는 눈빛, 그리고 푸르스름한 조명 밑에서 창백하게 빛나는 얼굴까지. 그러나 지선이 보고 행동한 바로는 지금 두 사람은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좀 거리감이 있어 보였다.
아까 낮처럼 자연스럽게 지선의 차갑게 식은 손을 붙잡은 그의 따뜻한 손 외에는 다정한 말투라든지 혹은 다감한 표정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재즈 바의 지배인인지 혹은 사장인지 모를 사람과 더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눈 듯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칵테일을 시킨 후-물론 지선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여가수의 흐느적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지 20분째였다.
지선은 여자의 목소리가 짜증스러웠다. 무슨 노래를 저 따위로 해. 끈적끈적 찐덕찐덕……. 남자들은 저런 여자의 목소리가 매혹적으로 들리나? 블랙의 벨벳 튜브 드레스 위의 가슴 선에는 온통 반짝이를 떡칠해서인지 번쩍거림이 멀리서도 보이고 여자의 속눈썹엔 분필을 올려놓아도 될 것만 같아 보였다.
피아노 소리도 흐느적거리고 색소폰 소리도 귀신 곡하는 소리 같고……. 그걸 좋다고 듣는 사람들은 다 뭔가. 지선은 자신의 물음에 대답 없는 남자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뭐 취향이니까, 저런데 푹 빠질 수도 있는 거지. 돈은 사람을 관대하게 만들고도 남았다.
“실없이 웃지 않아도 괜찮아. 그런 건 내가 알아서 주문할 테니까. 아무 주문 사항이 없으면 그냥 당신 하고픈 대로 해.”
참으로 편안한 말이었지만 듣는 사람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방긋 웃으면서 옆에 붙어 앉아, 가끔 팔도 쓰다듬고 팔짱도 끼고……. 그렇게 일일이 안무라도 해 줬으면. 그러나 두 사람은 냉랭하게 같은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하다뿐이지 전혀 연인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 모금 마셔 본 워셔액 같은 색의 칵테일도 별로 탐탁지 않은 맛이었다. 진짜 워셔액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가련하게 비싼 동네의 구석에 주차되어 눈총을 받고 있을 자신의 애마를 위해서라도 더 이상의 알코올은 사양이었다.
소음 같은 여자의 흐느적거리는 목소리보다는 싱크대에 씻어 놓은 그릇이 하나도 없다든지, 혹은 생수까지 떨어졌는데 라든지, 세탁소에서 옷을 찾아와야 하는데 수중에 있는 돈이 모자를 것 같다든지 그런 생각에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집 안에 쌓인 일거리들만 생각하고 있은 지 30분쯤 되었을까, 그가 어딘가를 응시하더니 말했다.
“일어나지.”
그 말이 왜 그렇게 반가운지……. 솔직히 어제는 횡성까지 당일치기로 갔다 온데다 밤새 돈 문제가 깊은 숙면을 방해했었다. 괜히 이유도 없이 집 나간 큰오빠나 혹은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엄마라는 여자가 나타나 악다구니를 쳐 댔으니까, 피곤이 절로 밀려오는 재즈는 영 지선에게 맞지 않는 장르였다. 오히려 악을 쓰는 록이 낫지. 잠깐 정신줄을 놓았는지 무대 위에 흐느적거리던 여자는 사라진 뒤였다. 그러고 보니 바 안에 수런수런 서로의 대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선은 그의 말에 주섬주섬 주위의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는 지선이 가방과 웃옷을 챙기는 것을 보고 때 맞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뒤에 오는 그녀를 배려하는 듯 천천히 걸어 나갔다. 막 거의 입구까지 갔을 때 그는 걸음을 멈췄고 그 뒤를 졸졸 따라나서던 지선마저도 멈춰서야 했다.
“우현 씨 벌써 가는 거예요? 이렇게 오랜만에 와서? 나 아직 한 타임 더 남았는데.”
노래하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허스키한 목소리의 여자는 그의 등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진한 향수 냄새, 화장품 냄새, 담배 냄새 같은 것들과 섞인 체취로 아까의 그 무대 위의 여자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나도 다음 타임이 있어서 말이지.”
그러자 여자는 금방 피부로 닿는 것 같은 적의를 뿜으면서 그의 등 뒤에 숨은 듯 가려져 있는 지선을 넘겨다보았다. 여자의 무시무시한 눈 화장에 움찔했지만 지선은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건너다보는 여자에게 눈인사를 하는 침착함을 선보였다.
“이분이?”
이년이라는 말로 들리는 건 착각일까. 이 남자의 연인은 자기뿐이라고 착각하는 여자는 그 회색 퍼 코트 속의 대양 건설 상무 아니었었나.
“굳이 서로 인사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텐데. 그럼.”
보기보다 싸늘하게 여자의 얼굴을 구길 수 있는 남자의 멘트였다. 그는 손을 뻗어 지선의 어깨를 감쌌다. 굽이 있는 펌프스 덕인지 그의 팔로 감싸지는 어깨의 높이는 딱 맞춘 듯 맞아 떨어졌다. 여자가 뭐라고 한 것도 같은데 마침 막 시작된 요란한 피아노의 선율 덕에 묻혔다. 이로써 오늘 나의 역할은 끝인가? 지선은 그렇게 생각하고만 싶은데 얇은 실크 셔츠 밑의 팔뚝이 주는 무게나 체온은 그녀의 사고를 방해하고 있었다.
“나, 차 안 가져왔어.”
아, 이런 옷차림을 하고 또 저의 차를 타시겠다는 건가요. 지선은 당황스러웠다. 그는 카운터에 가서야 어깨에 둘렀던 팔을 내리고 카드를 내밀어 계산을 했다.
“오셨네요. 몇 년 만이세요?”
“일일이 손님이 몇 년 만에 나타나는지 세고 있나?”
그가 희미하게 웃는 게 보였다. 조명발일 것이라고 지선은 넘기고 싶었다.
“어디 잊히는 손님이셔야죠.”
매니저의 말에 그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아, 정신이 사납구나……. 지선은 한 달이라는 시간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지선 씨 갑자기 얼굴이 좋아졌네? 요즘 연애라도 하나? 늘 바빠.”
지선은 영 기분이 다운된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저런 말을 들으니 화들짝 놀라는 수밖에.
“밥을 잘 먹어서요. 봄 되니까 갑자기 먹는 게 땡기네요. 다이어트에서 손 놓으니까 얼굴이 좋아지는가 보죠.”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먹을 게 당기는 게 자의가 아니라 타의라는 점 빼고는……. 영 맘에 안 드는 머리가 거울에 비치는 게 짜증스러웠다. 몇 달째 바빠서 가지 못한 미용실을 다녀온 게 어제였다. 큰맘 먹고 직장인을 위해 밤늦게까지 하는 곳에 가서 세 시간이나 허비하면서 한 머리는 영 아니올시다였다.
일명 베이비 펌이라는데, 비싸기는 눈이 튀어나오게 비싸고 머리는 전혀 손을 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뭐 물론 뻗쳐서 묶고 다녀야 할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밑에만 살짝 웨이브를 넣어 두곤 그 가격이라니! 당장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어마어마한 사람 옆에서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는데 옷은 둘째 치고 늘 뻗혀서 부스스한 머리는 정말로 예의가 아닌 듯싶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굳게 닫힌 채 열릴 줄 모르는 하얀색 하이그로시 문 주인의 ‘연인’이라는 역을 맡은 지 4일째, 이틀은 브런치라는 이름의 어마어마한 점심을 먹었고 3일 동안은 이탈리안 레스토랑과 회원제 파스타 전문점, 그리고 눈이 튀어나오게 비싼 한정식집……. 정말 가격을 계산하다 우울한 마음에 포기해 버려야만 할 정도였다. 늘 어딜 가든지 양쪽에 단정하게 앉아서 나오는 음식을 꾸역꾸역 먹기만 하다 음식점의 주인들인지 하고만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의 모습을 보는 건 참 어이없는 경험이었다.
직원들과 회식을 하지 않는 한 집에서 3분이 붙는 알루미늄 팩 속의 음식이나, 혹은 캔 맥주로 넘겨 버리는 저녁 식사와 거래처와의 미팅을 겸한 식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편의점표나 분식점표를 애용하는 점심과는 차원이 다른 것들을 먹으니 아무래도 얼굴이 반짝거리는 광채가 어리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몰랐다. 그동안의 푸석한 얼굴이나 쌓이기만 하는 피로는 바로 부실한 식사가 원인이었나? 지선은 유난히 잘 먹은 화장이 신기해질 지경이었다.
어제는 그가 무슨 일이 있다고 저녁 약속을 취소했기 때문에 지선은 미용실로 직행한 것이었는데 아, 이건 영……. 사무실 사람 그 누구도 지선의 머리모양이 바뀐 것을 모르고 있을 정도이니. 하긴 머리를 심하게 자르거나 염색하지 않는 이상 모르는 게 당연했다. 사무실에 있는 다른 여자들은 매번 마법 같은 도구들로 머리 모양을 매일매일 잘도 바꾸고 오니까. 그러니 이 정도 있지도 않을 것 같은 웨이브는 모를 만도 했다. 그냥 여기에 안도를 해야지.
“이번에 입찰 들어가는데 미리 연구 좀 해 둬요. 자자, 이 대리, 조성재 씨, 이지선 씨 여기 책상 위에 올려놓은 거 봤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생각 좀 해 보고. 지선 씨는 딜리시안 마무리 다 된 거야?”
“네. 어제 올려서 오늘이면 다 마무리될 듯한데요.”
“아, 그리고 딜리시안 공사 대금 결제됐다고 오늘 전체 회식이야. 박 실장님, 그쪽은 시간 됩니까?”
“안 돼. 리모델링 팀이 한 건데 뭐. 거기나 하라고.”
박 실장이 분주하게 서류더미를 뒤지면서 대답했다.
“아, 아깝다. 오늘은 대표님이 쏘는 건데.”
“꺅, 정말요? 아우, 박 실장님 나 오늘 빼 줘요.”
“나도!”
조용하던 건설 팀의 여자들이 일거에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조용히 해. 무슨 회식이야. 우리 팀 오늘 전체 야근이라고!”
“아우, 난 회사 그만 둘 거라구요!”
“진짜 오늘 밥 한 끼 먹고 그만둬도 여한이 없겠다. 그 얼굴 보고 있음 밥이 넘어가겠어?”
잘만 넘어가던데. 지선은 혼자 피식 웃음을 날렸다. 그저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나 다시 열어 보기 시작했다. 아, 이번 주말에는 요양원이 있는 춘천에 내려가 봐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뭐 한 달인데, 매번 가도 자신의 얼굴도 제대로 못 알아보는 아버지를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애썼다.
“자자, 우리 너무 수고했지? 자, 대표님이 한 말씀 하시죠!”
음, 차원이 다르긴 다르구나. 9명이나 되는 리모델링 팀은 다들 흡족한 얼굴이었다. 다만 이지선만 빼고. 근사한 일식집에서의 회식이라니 역시 진짜 대표의 씀씀이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게 다들 입을 모아 한 말이었다.
“그동안 추운데 고생하셨습니다. 아직 일이 남긴 했지만 그래도 고생하셨는데 다 같이 저녁이라도 한 끼 먹는 거라 생각하시고 맘껏 드시기 바랍니다.”
돈이 참 썩어 문드러지나 보다. 지선은 평소 같으면 눈앞이 어지러우리만큼 화려한 일식 식당의 스끼다시의 자태에 황홀해했겠지만 연일 화려한 음식을 대하다 보니 시큰둥해졌다. 이렇게 먹는 것도 참 피곤타 싶을 정도로.
다들 고급 참치회의 맛을 음미하느라 정신이 없건만 지선은 상석에 앉아 있는 단정하지만 여전히 얇은 재킷만 입은 그의 모습을 멀리서 힐끗 보고는 사케 잔에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남자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끊이지 않았지만 지선은 이 며칠의 동행으로 보건대 저 남자의 저런 미소는 여자의 메이크업 같은 구실을 할 뿐이었다.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다는 것은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걸까. 오 팀장과 잘도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누며 가끔씩 직원들이 주는 잔을 아무렇지도 않게 잘 받아 마시는 남자는 전혀 흠잡을 데 없이 오너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무엇인가에 씌인 거 아닌가, 저렇게 멀쩡한 남자의 연인이라니……. 남자 탓인지 애인이란 말보다는 연인이라는 말이 더 입에 붙어 있었다. 연인이라니 무슨 지나가던 개도 안 웃을 소릴.
속이 거북스러워진 지선은 엄청난 밑 안주 끝에 메인으로 나온 도미와 참치 등의 화려한 날고기를 보자 속이 메스꺼워졌다.
“나 화장실 좀.”
옆에 앉아서 연신 젓가락을 놀리기에 바쁜 여직원을 보고 잠깐 속삭인 뒤에 지선은 가방을 들고 룸을 나왔다. 자신의 방보다도 더 깨끗해 보이는 화장실의 거울 앞에서 잠시 땀으로 번진 코끝을 휴지로 두드리면서 지선은 거울 속의 여자를 보았다.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어느 직장에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평범한 얼굴, 한 번도 염색 따위는 해 본 적이 없는 짙은 흑갈색의 머리카락, 그리 재주도 없는 화장이 덮인, 겨우 마지막 젊음이라는 덧칠이 빠지는 나이가 되면 건조하고 퍼석해 질 피부……. 단지 표정에 생기가 없고 눈가에 감정이 없기 때문에 남자는 자신을 선택한 것일까. 아무래도 좋다. 벌써 4일이나 지난 걸.
“이 대리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옆에 선 조미정 씨가 멍하니 있는 지선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면서 바쁘게 지워진 립스틱을 다시 그리고 있었다.
“그냥.”
“우리 대표님 진짜 천상의 인물 같지 않아요? 대리님은 팬클럽에 안 드실라나? 그런 거 재미없어 하죠? 아우, 건설 팀 지연 씨랑 희진 씨는 난리 났어요. 오늘 아마 우리 부러워서 죽을라고 할 거야. 진짜 영화배우가 따로 없어요. 그죠?”
“잘나긴 했지.”
“아, 저런 남자랑 연애 한번 해 봤음 소원이 없겠어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그럴까?
“이 대리님도 저런 남자라면 땡기죠? 뭐 남자 보기를 돌같이 하더라도 저 남자는 안 되지!”
“저런 남자랑 연애를 하면 뭐가 좋을 거 같은데?”
지선은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열심히 파우더를 두드리는 미정은 이 목석 같은 리모델링 팀의 대표 건어물녀 이 대리도 저 남자는 땡기는구나 싶어 열심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아우, 뭐 똑똑해. 돈 잘 벌어. 안 벌어도 원래 많아. 그런 건 다 둘째 치고 저 빛나는 얼굴에, 저 키에, 앞에서 쳐다만 봐도 행복하겠죠. 게다가 저 근사한 목소리로 ‘미정아, 싸랑해.’ 해 줘 봐. 와, 그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겠네. 안 그래요?”
“글쎄.”
“에구, 빨리 들어가요. 오늘은 진짜 안 먹어도 배부르다. 어떻게 이따가 도촬이라도 한 방 해야지. 아우!”
바쁘게 뛰어 들어가는 사무실의 제일 막내라 할 수 있는 경리 담당 미정의 뒷모습을 보자니 지선은 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그래야 하는 거야?
“2차도 가셔야죠!”
“대표님이 안 가시면 우리도 안 가요!”
일식집에서 거하게 얼굴을 붉히며 나온 축들이 소란스러웠다.
“아, 즐겁게들 노십시오. 전 약속이 있어서. 자, 오 팀장 잘 부탁해!”
초창기부터 같이했다는 오 팀장 외에는 깍듯하게 경어를 쓰는 남자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왜 나한테만 반말이지? 지선은 남자의 시선 밖에 머물려고 애썼다. 회사 내에서는 결코 비밀로 하기로 했으니까. 그나저나 오늘은 이걸로 끝인 건가. 솔직히 말이 연인이지 쫓아다니면서 먹기만 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 것 같았다. 다행히 딜리시안의 실질적인 공사가 끝났기에 망정이지. 다들 노래방으로 가려는데 지선도 오 팀장에게 슬며시 운을 띄웠다.
“나 들어가요.”
“어딜 가려고!”
“연하남이 기다려요. 누나 빨리 와 달래.”
“뭐? 진짜 연애해?”
“네. 나 시집가게 열외해 줘요.”
“이거 한두 번 속나?”
오 팀장의 눈길이 의심쩍어졌다.
“한두 번이 아니면 세 번 속아 주면 되겠네. 나 가요. 난 어차피 노래도 안 부르는데 뭐.”
지선이 슬며시 빠지는 걸 다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는 게 안타깝기는 했다. 영, 일 외에는 어울리는 것도 잘 하지 않는 그녀를 누구나 잘 알고 있으니까.
지선은 택시를 타고 가야 하나 아니면 아직까지 있을 지하철을 이용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지하철역까지 거리는 꽤 될 것 같고, 어차피 지하철역도 그녀의 원룸까지는 꽤 거리가 멀었다. 차를 두고 왔으니 내일 출근도 만만치 않을 텐데 하는 생각에 고민을 하고 있던 지선은 택시 쪽으로 맘을 잡고 길가로 나갔다. 막 지나가는 택시를 잡으려는데 검은 차 한 대가 다가왔다. 비상등이 켜지고 곧 그녀의 앞에 차가 서더니 차창이 열렸다.
“타, 아직 한 타임 남았어.”
“네?”
그가 뒷좌석에서 내다보고 있었다. 남자의 검은색 포르쉐. 아까 술을 몇 잔이나 받아 넘기는 걸 보았으니 대리 기사라도 불렀나. 지선은 아까 헹구기는 했지만 입안에서 나는 비린내가 신경 쓰인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머뭇거리다가 차 문을 열었다. 그러자 길 쪽의 자리에 있던 그가 몸을 비켜서 안쪽으로 들어갔고 그의 차는 낯선 사람이 운전하고 있었다. 피곤한데요……. 하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지선은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잘 안 어울리는 건가, 아니면 나 때문인가?”
지선이 그의 옆에 올라타는데 그가 물었다. 그러나 그 대답을 하려는 찰나 남자에게서 나는 사케 향이 달착지근하게 느껴지는 건 술이 좀 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둘 다예요. 원래 노래방이 체질이 아닌데다, 덕분에 그동안 너무 고급 음식들만 먹어서인지 별로 안 땡기더라구요.”
지선은 코트 자락을 여미면서 말했다. 그의 피식한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지선은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일루미니아로.”
그도 더 이상 지선의 말에 대꾸도 없이 또다시 낯선 곳의 이름을 댔다. 이번엔 뭐하는 데인가. 저렇게 먹었으니 밥집은 아닐 테고.
“술 좋아하나?”
그가 4일 만에 처음으로 메뉴판을 내밀면서 물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 흐느적거리면서 따로 스테이지도 없는데 나와서 몸을 부비면서 춤을 추는 남녀가 어두운 조명 밑에 보이기도 했다. 지선이 질색하는 생음악, 전자음과 어쿠스틱이 꽤 끈적끈적하게 어울리는 이곳도 꽤 가격대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를 밤에 사무실에서 보았을 때 몸에서 풍기던 퇴폐적인 향기는 바로 이런 곳에서 나는 듯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본 적이 없는데도 짙게 배어 있던 담배 냄새를 생각하니 자신의 코트에도 밴 것만 같았다. 아, 며칠은 이 코트 못 입겠구나 싶었지만 코트를 벗기엔 좀 멋쩍었다. 그렇다고 입고 있기도 뭐하고.
후덥지근한 실내에는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등짝을 훤히 드러낸 홀터넥 이라든지 짧은 미니스커트에 맨다리를 드러낸 여자들 투성이였다. 지금 입고 있는 코트를 벗는다면 참 갑갑한 모직 정장 차림이 되지만, 벗긴 벗어야 했다. 지선은 손을 놀려서 두꺼운 코트를 벗었다.
남자는 언제나처럼 재킷을 벗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새 차 안에서 넥타이를 풀어 버린 건지 또다시 두서너 개의 단추가 풀어진 셔츠 바람이었다. 아무리 봐도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상대였다. 게다가 두 사람이 항상 멀찌감치 떨어져서 앞에 놓인 것만 먹던 것과는 달리 이곳의 테이블은 너무나 좁았다. 두 사람이 마주 앉으면 팔꿈치가 맞닿을 정도였고 의자도 바텐 의자같이 상당히 높고 좁았다. 대체 뭐하는 용도인가. 탁자가 그리 많지 않으나 어둠에 익숙해 진 눈으로 보니 구석구석에 룸이 포진해 있는 분위기였다.
그가 여전히 답을 요구하는 듯 고개를 삐뚜름히 뺀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으므로 지선은 메뉴판을 봐야만 했다. 그러나 울컥할 만한 가격표를 보곤 건조하게 대답했다.
“목말라요. 시원한 맥주 같은 건 안 파나요?”
남자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그는 손을 들어 웨이터를 청하고 귓가에다 뭐라 속삭이듯 주문을 했다. 그사이 주변을 한번 휘둘러본 지선은 얼굴이 화끈거릴 만한 모습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뭐, 우리나라도 외국 못지않게 개성 발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건 발랄이 아니라 발칙할 정도였다. 그대로 춤을 추는 건지 엉켜 있는 건지 자연스럽게 입술을 부비는 이들, 착 붙어서 거의 품에 안겨 있거나 남자의 무릎에 앉은 여자들……. 아, 이 바의 용도는 대체 뭔가.
금방 지선의 앞에는 이 홉들이 조그만 맥주병이 냅킨에 쌓인 채 놓였고 남자의 앞에는 정체불명의 호박색 액체가 놓였다. 저번에도 저것이었던 거 같은데 뭔가 향긋하지만 끝이 독한 향기가 풍기는 술. 저런 술은 그냥 지선에게 양주로 통했다. 지선이 막 자신 앞에 놓인 맥주병에 손을 내밀었을 때 그가 손을 내밀었다. 마치 무슨 유치한 영화처럼 두 사람의 손이 가볍게 부딪쳤다. 영화 속의 찌릿한 느낌은 진짜인가? 아니면 너무 건조해서 정말로 전기가 통한 건 아닐까. 지선이 겸연쩍어하는데 그는 시선도 두지 않고 맥주 뚜껑을 돌려 따더니 지선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흐느적거리는 바 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누굴 기다리는 것인가.
벌컥거리며 한 모금에 다 마실 듯 목이 말랐지만, 시원해 뵈기는 하나 시답지 않은 이 쬐끄만 맥주의 가격을 생각하고는 한 모금 목을 축이고는 지선은 조심스레 맥주병을 내려놓았다. 영 밍밍한 맛. 역시 맥주는 국산이 최고야를 속으로 외치고 있는데 남자는 앞에 놓인 액체를 한 모금 마시더니 갑자기 지선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딜리시안 건은 잘됐어. 내가 시간을 좀 만들려고 월요일 날 당신을 위한 일거리를 만들어 줄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아, 네…….”
지선은 친절하게 알리바이까지 만들어 주시는 이 채무자 분께 감사를 드려야만 해야 할 듯했다. 막 뭐라 더 치하의 말씀을 드려야 하나 고민 중인데 갑자기 누군가 다가왔다.
“아, 이게 누구야? 난 뭐 출가라도 한 줄 알았는데 다시 나타났네?”
여자의 아름다운 미성은 날이 서 있었기에 지선은 놀라서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가 정말로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건 조명발 화장발이라고 해도 숨이 막힐 정도였다. 새까맣게 긴 머리카락은 정말로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웨이브를 그리고 있었고 조막만 하게 보이는 얼굴은 정말로 무슨 스크린에서 막 튀어나온 것같이 완벽했다. 같은 여자지만 정말로 정신이 아득해지도록 완벽한 얼굴은 병원이나 은행에서나 볼 수 있는 두꺼운 잡지의 앞쪽에 포진한 명품 향수나 화장품의 선전에나 나올 법한 얼굴이었다. 수술을 한 건지 타고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숨이 삼켜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게. 출가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게 맘대로 안 되던데. 좋아 보이네?”
어떻게 저런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할 수 있는지 남자의 여성 편력이 궁금해졌다. 웬만한 것에 감동받지 않는 지선이 스스로를 의심할 지경인데……. 한참 뒤에야 여자의 몸매 또한 얼굴 못지않게 축복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바 안의 다른 여자들처럼 짧은, 반짝거리는 재질의 스커트와 퍼 블루종에 쌓인 눈처럼 흰 다리와 팔은 길고 가늘었고 그에 비해 볼륨은 환상적이었다.
“좋아 보여? 눈이 삔 거 아니야?”
그제야 여자는 그의 옆에 어정쩡하게 앉은 지선을 쳐다보았다.
“이 여자야? 맞나 보네. 딱 소문 그대로니까. 뭐 시위라도 하는 거야? 내가 속을 거 같아?”
자신이 앞에 있는데도 전혀 없다는 듯 혹은 바위 덩어리를 두고 조심할 필요 없다는 듯 말하는 것을 듣고서 지선은 날카로운 여자의 말에 이제야 자신의 역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이 남자의 목적은 바로 ‘이것’일 테니까.
“내가 시위 따윌 할 필요라도 있나?”
정말로 약간의 웃음기가 섞인 무심한 말투였다. 딱 아무것에도 관심 없다는 듯한. 그러나 그 무심한 목소리는 오히려 그의 말이나 그 여자가 듣고 있는 소문, 그러니까 옆에 놓여 있는 부자연스러운 지선의 존재를 확인시키려는 간절한 설명보다 훨씬 더 간단명료하게 현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우현, 당신 정말…….”
“내가 누누이 이야기하잖아. 유하경의 매력을 허튼 데다 쏟아 버리는 건 낭비라고.”
그가 하는 말의 요지는 대충 알 것만 같은데 지선은 오늘 밤 꿈자리가 뒤숭숭하겠다 싶었다. 이 아름다운 여자의 깊고 깊은 속눈썹이 경련을 일으키면서 보는 것은 바싹 붙어 앉을 수밖에 없는 지선의 어깨에 둘러진 그의 팔이었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가나 내기할까?”
여자의 목소리는 다시 아름다운 미성으로 바뀌었다.
“글쎄. 그럴 가치가 있을까. 일행이 기다리네.”
그가 이만 가 보라는 듯 그녀의 어깨 너머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 여자는 오히려 웃음을 지으며 돌아서려고 했지만 짧게 공중에서 지선과 얽힌 표정에는 아주 순간적이지만 살기에 가까운 차가움이 서려 있었다.
“꿈자리가 뒤숭숭하겠네요. 이러다 뭐 저주라도 받지 않으려나.”
지선이 어깨에 올려진 팔을 의식하면서 무미건조하게 내뱉었다. 그러자 그가 팔을 거둬들이더니 천천히 말했다.
“그럴 가치도 없어.”
그러나 남자는 금세 표정이 풀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입꼬리를 올리며 또다시 그 정체불명의 미소를 띠우더니 말했다.
“피곤할 텐데 나가지.”
이것은 연인 사이가 아니라 사육사와 가축이다…….
지선이 내린 결론이었다. 대체 그 착각에 빠진 여자는 누구인가? 정말로 단골집도 너무나 많고 어딜 가나 매니저든 주인이든 사장이든 그를 알은척하고 반갑게 대화를 하고 자신을 흘끗 쳐다보는 것으로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려고 한다. 꼭 저녁을 먹고 2차로 바든, 술집이든 어디를 가기만 하면 꼭 와서 차가운 냉소를 뿌리고 가는 여자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섹시한 여자, 예쁜 여자, 매력적인 여자, 도도한 여자……. 정말로 평균 이상의 여자들이 다가와 대화를 하고 남자는 시시껄렁하다는 듯 대화를 끝내 버린다. 대체 뭘 하자는 건지.
그 덕에 너무 잘 먹어서 헐렁하던 겨울 바지가 꽉 끼어 가는 참이었다. 살을 찌워 잡아먹으려나. 제발 점심은 좀 걸러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거 봐, 보스한테 덤비지 말라고 했잖아. 보스가 생긴 건 저렇게 멀쩡해도 엄청 치사한 인간이거든.”
오 팀장이 아기가 생긴 이후로 부쩍 사람들에게 관대해지고 있다. 자식이라는 거, 아이라는 게 저런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 걸까 다시금 생각이 되뇌어졌다. 내 인생에도 그런 아이가 있을 수 있을까. 절대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지선은 하루에도 열두 번도 더 자랑을 하는 쭈글쭈글한 오 팀장의 뚱식이를 보면서 저렇게 사는 게 행복한 거구나 하고 절감하긴 하지만 자신에게 있어서 저런 삶은 정말로 금을 그어 놓은 곳 바깥이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아이라니, 혹은 아이를 만들 수 있는 남편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아니, 딜리시안의 마지막 서류를 몽땅 지선 씨한테 넣으라는 건 억하심정이지. 대체 그날 보스한테 쳐들어가서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