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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시작
“잘 알겠습니다. 짐은 모두 한국으로 부쳐 두었으니 차질 없게 처리해 주세요.”
통화를 끝낸 한 여자가 핸드폰을 내려 두고 샌프란시스코의 풍경이 펼쳐진 창밖을 바라본다. 오늘따라 습도가 높아 축축하고 끈적한 탓에 맨살에 닿는 셔츠의 빳빳한 촉감이 거슬렸다. 제의를 수락한 이면에 이곳 날씨가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잔기침이 잦아 폐 기능 이상까지 느끼게 된 그녀는 공기 좋고 사계절이 뚜렷한 곳으로 갈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인 건가?’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설렘이 스쳐 지나간다.
샌드라 닐슨(한국명 김유희), 그녀의 모친이 석유 재벌 잭 닐슨과 재혼해 이곳으로 온 지 오래. 하지만 미국 상류 사회는 동양 출신 어린 딸과 모친을 쉬이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닐슨 가 자녀들도 모녀를 대놓고 무시하며 괴롭혔다. 살아남기 위해 몸을 낮추는 법을 체득하였다. 유일하게 모녀를 보호해 준 계부 잭 닐슨이 재작년 돌아가시고 홀로 남아 외롭게 버텨 왔던 그녀가 마침내 한국행을 선택했다. 꼭 건강상의 이유가 아니더라도 결단을 내릴 이유는 또 있었다.
똑똑.
「들어와요.」
「정말 가는 거예요?」
같은 사무실에서 3년 동안 함께 근무한 동료 바바라 월터였다.
「네.」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바바라와 샌드라는 친한 사이였지만, 한국행에 관해선 알리지 않았던 터라 그녀는 불만을 드러냈다.
「이미 결정을 내린 일이지만 나 서운해요.」
「미안해요.」
사과와 함께 그녀의 얼굴에 미미하게 번지는 미소에 바바라가 잠시 넋을 놓았다.
‘나 지금 여자에게 끌리는 거야?’
샌드라는 동서양이 어우러진 묘한 분위기의 미모를 가진 여자였다. 아치형을 이루는 눈매와 커다란 눈동자를 바라볼 때면 한없이 끌려 들어가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건 그렇고 샌드라가 떠난다는 소식을 들으면 누군가 좋아 죽겠네.’
캐롤린 스웨이드는 샌드라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여자였다. 이유는 유치하지만, 자신보다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있고 수많은 남자들에게 로망으로 자리하기 때문이었다. 캐롤린이 목을 매단 회사 이사 카일 사룰도 그녀보다 샌드라를 두둔하기 일쑤였다. 남자든 여자든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힘, 바로 그것이 샌드라가 가진 최대 강점 중 하나였다.
‘샌드라의 비밀을 알면 뒤로 나자빠지겠지?’
단 한 사람 바바라만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알고 있었다. 샌드라가 떠나야 하는 진짜 이유를.
* * *
한국 CN그룹의 한 계열사 실무경영팀은 후끈 달아오른 열기 때문인지 어수선했다.
“뭐예요? 정말 팀이 별도로 꾸려졌다는 거예요?”
“그렇다니까.”
“……세상에, 마 회장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내가 회장님 속을 어찌 알겠어?”
실무경영 A팀 소속 한유리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A팀은 총 네 명, 마재한, 한유리, 하인국, 박상철. 그들이 회사 브레인 역할과 중추를 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 외 실무팀을 하나 더 만든다는 소식에 반발심과 배신감이 든다.
“팀에 대해 들은 거 있어요?”
“글쎄, 넘치는 인재 중 공인된 사람들로 구성했을 테고, 듣자니 우리 팀과 확실히 차별을 둘 거라고 언급하셨다고 해.”
“…….”
팀원들이 혼란에 빠져 있을 무렵 재한은 실무 A팀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 슬슬 나태해지려던 차에 귀신같은 그의 부친은 갑작스럽게 팀을 구성해 경쟁을 붙이겠다고 선언했다.
‘하여튼 귀신같으신 분이야. 뭐 좋겠지. 경쟁 구도가 피를 말리겠지만 또 다른 발전을 할 기회가 될 수 있을 테니.’
정보도 그 무엇도 없이 이름만 알려졌다. 한 명씩 도착할 예정. 한 명은 해외 업무를 보는 CN 본사 직원, 나머지 세 명은 외부 영입. 여자 한 명에 남자 셋이라……. 그렇게 실무 A팀이 단단히 벼르고 있을 무렵 네 명의 인재가 한국으로 입국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 * *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서 가까운 닐슨 가 소유의 빌딩 120층, 팍하고 유리잔이 벽으로 날아가 부딪치며 낙하한다. 유리잔이 상당한 고가품인 듯 일반 유리와는 다르게 튀지 않고 바스라졌다.
「제길.」
이마에 핏줄이 불거져 나오고 두 눈이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선연한 붉은빛을 띤 남자가 보인다.
「잘도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군. 샌드라.」
조셉 닐슨. 샌드라의 양부 잭 닐슨의 둘째 아들이자 닐슨 가 경제권을 쥐고 있는 대단하신 인물. 어느 때고 이성을 잃지 않고 냉정을 유지한다, 정평이 난 닐슨 가의 기둥. 그가 지금 혼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누구도 자신을 이토록 화나게 한 적이 없었고, 뒤통수를 치지도 못했다. 한국 출신의 자그마한 인형 같은 샌드라가 유일무이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마무리 질 일이었는데 조금만 더…….’
부친이 살아 계실 땐 불가능했던 일, 아주 작은 0.1% 가능성이 보이자 계획을 착착 실행하고 있었다. 때맞춰 방탕하고 지조 없는 아내에게서 이혼 합의를 이끌어 냈다. 환희에 찬 기쁨도 잠시. 방심한 틈을 타 도망친 샌드라, 자신의 의붓 누이. 거의 잡았는데 거의…….
「젠장!」
조셉은 멀리 떠나 버린 그녀를 향한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미칠 것 같은 상실감으로 거의 반 미쳐 가고 있었다. 주위에선 그런 그를 한 번도 본 적 없기에 어느 정도 중증인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작고한 닐슨 회장만이 상황을 간파하고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언제나 배웅하고 맞이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인천공항에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미인이 캐리어를 끌고 이동하자 성형 미인들에 식상한 사람들조차 고개를 돌리고 시선이 집중된다. 늘씬한 각선미 그리고 달걀형 얼굴, 척 봐도 고급스런 옷, 풍기는 묘한 분위기. 비록 눈은 선글라스로 가려졌지만 상당한 미모일 게 분명했다.
샌드라는 감회가 남달랐다. 재혼한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 오랜만에 발을 디딘 고국, 떠날 때 나이가 6살. 친부는 4살 때 중소기업을 운영하다 현장에서 사고로 즉사하셨고, 아버지 회사와 관계가 깊었던 잭 닐슨은 부친이 돌아가신 지 2년 후, 우연히 회사를 방문했고 인연이 이어져 어머니와 재혼을 하게 되었다. 다시 올 일은 없을 줄 알았지만 앞날은 이래서 장담하지 못한다고 하나 보다. 고국, 왠지 그리운 냄새에 유희는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떠날 땐 엄청 넓어 보였던 공항이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지는 건 자신이 뭐든 커다란 미국에서 자란 미국 사람이라서? 아님 자랄 만큼 자라서?
피식.
미국 사람은 무슨, 유희는 냉소를 머금었다. 서양 사교계의 그들은 동양인 모녀를 끝끝내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드러내서 무시하고 괴롭히지 않은 이유는 의붓아버지 잭의 막강한 재력과 영향력 때문이었다.
샌드라 닐슨. 별명 마성의 마녀, 사람들을 설득하고 홀리는데 재주가 탁월하다하여 붙여진 닉네임이다. 물론 백인이 좋은 의미로 붙여 준 별명은 아니다. 그녀를 시기하고 강샘하는 여자들이 붙여 주었다. 샌드라는 성격이 온후하고 부드러우며 사람을 잘 관리하는 인재였다. 조화를 중시하는 성격, 미모, 무엇보다 한없이 빠져들 것 같은 까맣고 투명한 눈은 그녀가 가진 최대 무기였다.
그런 그녀가 한국행을 망설이자 마 회장은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두 사람도 함께 불러들이겠다고 제안했다.
‘스티븐과 라일, 그들과 함께라면…….’
그들은 옥스퍼드대 동기였다.
의붓 오빠 조셉 닐슨의 이혼이 합의되었다는 소식에 맘이 급해졌다.
양부 잭은 샌드라를 친딸처럼 사랑해 주셨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타계한 이후에도 대학까지 보내 주고 아껴 주셨다. 물론 그것 때문에 닐슨 가 형제들에게 견제를 심하게 받았지만. 돌아가실 때도 그녀에게 재산을 분배하려는 걸 겨우 막았었다. 만약 닐슨 가 재산을 양부 유언대로 집행하면 탐욕에 가득 찬 그들이 두고 보지만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결국 유희에겐 작은 별장 한 채와 소액 유산을 남겨 주셨다. 유언 집행 시 그들의 아귀다툼에 끼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만족이었다. 유희는 어머니의 몫과 양도된 것까지 합친다면 꽤 자산가에 해당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유희는 재산에 손대지 않고 공탁 형식으로 맡겨 두었다. 상속된 유산에 의지하기 싫었고 무엇보다 스스로 나태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양부가 살아 계셨을 땐 뻔질나게 드나들던 닐슨 가 형제들은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은 지 오래, 고택은 인적이 드물어졌다. 그런데 그 집에 머물던 유희는 근래 들어 잦은 방문을 하는 조셉 때문에 불편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유희는 이제 보일 리 없는 샌프란시스코의 하늘을 떠올렸다. 하지만 추억 속에 잠긴 것도 잠시 누군가가 기억나 살며시 몸을 떨었다.
한기 탓인지 몸이 부르르 떨렸다. 자신을 옭아맸던 깊은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운 좋게도.
#2화 플랜B
‘이곳이 CN 지사?’
나머지 팀원은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샌드라야 일가친척 없는 혈혈단신, 닐슨 가 의붓 형제들은 그녀를 단 한 번도 동생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황인종에 대한 선입견과 증오로 가득 찬 그들. 그야말로 미개한 종족을 대하는 일관된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양부의 엄한 지시와 강력한 제재, 재산권 언급으로 인해 그들은 싫지만 표면적으론 모녀를 공대하는 척 가장했다.
“잘 알겠습니다. 짐은 모두 한국으로 부쳐 두었으니 차질 없게 처리해 주세요.”
통화를 끝낸 한 여자가 핸드폰을 내려 두고 샌프란시스코의 풍경이 펼쳐진 창밖을 바라본다. 오늘따라 습도가 높아 축축하고 끈적한 탓에 맨살에 닿는 셔츠의 빳빳한 촉감이 거슬렸다. 제의를 수락한 이면에 이곳 날씨가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잔기침이 잦아 폐 기능 이상까지 느끼게 된 그녀는 공기 좋고 사계절이 뚜렷한 곳으로 갈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인 건가?’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설렘이 스쳐 지나간다.
샌드라 닐슨(한국명 김유희), 그녀의 모친이 석유 재벌 잭 닐슨과 재혼해 이곳으로 온 지 오래. 하지만 미국 상류 사회는 동양 출신 어린 딸과 모친을 쉬이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닐슨 가 자녀들도 모녀를 대놓고 무시하며 괴롭혔다. 살아남기 위해 몸을 낮추는 법을 체득하였다. 유일하게 모녀를 보호해 준 계부 잭 닐슨이 재작년 돌아가시고 홀로 남아 외롭게 버텨 왔던 그녀가 마침내 한국행을 선택했다. 꼭 건강상의 이유가 아니더라도 결단을 내릴 이유는 또 있었다.
똑똑.
「들어와요.」
「정말 가는 거예요?」
같은 사무실에서 3년 동안 함께 근무한 동료 바바라 월터였다.
「네.」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바바라와 샌드라는 친한 사이였지만, 한국행에 관해선 알리지 않았던 터라 그녀는 불만을 드러냈다.
「이미 결정을 내린 일이지만 나 서운해요.」
「미안해요.」
사과와 함께 그녀의 얼굴에 미미하게 번지는 미소에 바바라가 잠시 넋을 놓았다.
‘나 지금 여자에게 끌리는 거야?’
샌드라는 동서양이 어우러진 묘한 분위기의 미모를 가진 여자였다. 아치형을 이루는 눈매와 커다란 눈동자를 바라볼 때면 한없이 끌려 들어가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건 그렇고 샌드라가 떠난다는 소식을 들으면 누군가 좋아 죽겠네.’
캐롤린 스웨이드는 샌드라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여자였다. 이유는 유치하지만, 자신보다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있고 수많은 남자들에게 로망으로 자리하기 때문이었다. 캐롤린이 목을 매단 회사 이사 카일 사룰도 그녀보다 샌드라를 두둔하기 일쑤였다. 남자든 여자든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힘, 바로 그것이 샌드라가 가진 최대 강점 중 하나였다.
‘샌드라의 비밀을 알면 뒤로 나자빠지겠지?’
단 한 사람 바바라만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알고 있었다. 샌드라가 떠나야 하는 진짜 이유를.
한국 CN그룹의 한 계열사 실무경영팀은 후끈 달아오른 열기 때문인지 어수선했다.
“뭐예요? 정말 팀이 별도로 꾸려졌다는 거예요?”
“그렇다니까.”
“……세상에, 마 회장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내가 회장님 속을 어찌 알겠어?”
실무경영 A팀 소속 한유리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A팀은 총 네 명, 마재한, 한유리, 하인국, 박상철. 그들이 회사 브레인 역할과 중추를 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 외 실무팀을 하나 더 만든다는 소식에 반발심과 배신감이 든다.
“팀에 대해 들은 거 있어요?”
“글쎄, 넘치는 인재 중 공인된 사람들로 구성했을 테고, 듣자니 우리 팀과 확실히 차별을 둘 거라고 언급하셨다고 해.”
“…….”
팀원들이 혼란에 빠져 있을 무렵 재한은 실무 A팀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 슬슬 나태해지려던 차에 귀신같은 그의 부친은 갑작스럽게 팀을 구성해 경쟁을 붙이겠다고 선언했다.
‘하여튼 귀신같으신 분이야. 뭐 좋겠지. 경쟁 구도가 피를 말리겠지만 또 다른 발전을 할 기회가 될 수 있을 테니.’
정보도 그 무엇도 없이 이름만 알려졌다. 한 명씩 도착할 예정. 한 명은 해외 업무를 보는 CN 본사 직원, 나머지 세 명은 외부 영입. 여자 한 명에 남자 셋이라……. 그렇게 실무 A팀이 단단히 벼르고 있을 무렵 네 명의 인재가 한국으로 입국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서 가까운 닐슨 가 소유의 빌딩 120층, 팍하고 유리잔이 벽으로 날아가 부딪치며 낙하한다. 유리잔이 상당한 고가품인 듯 일반 유리와는 다르게 튀지 않고 바스라졌다.
「제길.」
이마에 핏줄이 불거져 나오고 두 눈이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선연한 붉은빛을 띤 남자가 보인다.
「잘도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군. 샌드라.」
조셉 닐슨. 샌드라의 양부 잭 닐슨의 둘째 아들이자 닐슨 가 경제권을 쥐고 있는 대단하신 인물. 어느 때고 이성을 잃지 않고 냉정을 유지한다, 정평이 난 닐슨 가의 기둥. 그가 지금 혼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누구도 자신을 이토록 화나게 한 적이 없었고, 뒤통수를 치지도 못했다. 한국 출신의 자그마한 인형 같은 샌드라가 유일무이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마무리 질 일이었는데 조금만 더…….’
부친이 살아 계실 땐 불가능했던 일, 아주 작은 0.1% 가능성이 보이자 계획을 착착 실행하고 있었다. 때맞춰 방탕하고 지조 없는 아내에게서 이혼 합의를 이끌어 냈다. 환희에 찬 기쁨도 잠시. 방심한 틈을 타 도망친 샌드라, 자신의 의붓 누이. 거의 잡았는데 거의…….
「젠장!」
조셉은 멀리 떠나 버린 그녀를 향한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미칠 것 같은 상실감으로 거의 반 미쳐 가고 있었다. 주위에선 그런 그를 한 번도 본 적 없기에 어느 정도 중증인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작고한 닐슨 회장만이 상황을 간파하고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언제나 배웅하고 맞이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인천공항에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미인이 캐리어를 끌고 이동하자 성형 미인들에 식상한 사람들조차 고개를 돌리고 시선이 집중된다. 늘씬한 각선미 그리고 달걀형 얼굴, 척 봐도 고급스런 옷, 풍기는 묘한 분위기. 비록 눈은 선글라스로 가려졌지만 상당한 미모일 게 분명했다.
샌드라는 감회가 남달랐다. 재혼한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 오랜만에 발을 디딘 고국, 떠날 때 나이가 6살. 친부는 4살 때 중소기업을 운영하다 현장에서 사고로 즉사하셨고, 아버지 회사와 관계가 깊었던 잭 닐슨은 부친이 돌아가신 지 2년 후, 우연히 회사를 방문했고 인연이 이어져 어머니와 재혼을 하게 되었다. 다시 올 일은 없을 줄 알았지만 앞날은 이래서 장담하지 못한다고 하나 보다. 고국, 왠지 그리운 냄새에 유희는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떠날 땐 엄청 넓어 보였던 공항이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지는 건 자신이 뭐든 커다란 미국에서 자란 미국 사람이라서? 아님 자랄 만큼 자라서?
피식.
미국 사람은 무슨, 유희는 냉소를 머금었다. 서양 사교계의 그들은 동양인 모녀를 끝끝내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드러내서 무시하고 괴롭히지 않은 이유는 의붓아버지 잭의 막강한 재력과 영향력 때문이었다.
샌드라 닐슨. 별명 마성의 마녀, 사람들을 설득하고 홀리는데 재주가 탁월하다하여 붙여진 닉네임이다. 물론 백인이 좋은 의미로 붙여 준 별명은 아니다. 그녀를 시기하고 강샘하는 여자들이 붙여 주었다. 샌드라는 성격이 온후하고 부드러우며 사람을 잘 관리하는 인재였다. 조화를 중시하는 성격, 미모, 무엇보다 한없이 빠져들 것 같은 까맣고 투명한 눈은 그녀가 가진 최대 무기였다.
그런 그녀가 한국행을 망설이자 마 회장은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두 사람도 함께 불러들이겠다고 제안했다.
‘스티븐과 라일, 그들과 함께라면…….’
그들은 옥스퍼드대 동기였다.
의붓 오빠 조셉 닐슨의 이혼이 합의되었다는 소식에 맘이 급해졌다.
양부 잭은 샌드라를 친딸처럼 사랑해 주셨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타계한 이후에도 대학까지 보내 주고 아껴 주셨다. 물론 그것 때문에 닐슨 가 형제들에게 견제를 심하게 받았지만. 돌아가실 때도 그녀에게 재산을 분배하려는 걸 겨우 막았었다. 만약 닐슨 가 재산을 양부 유언대로 집행하면 탐욕에 가득 찬 그들이 두고 보지만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결국 유희에겐 작은 별장 한 채와 소액 유산을 남겨 주셨다. 유언 집행 시 그들의 아귀다툼에 끼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만족이었다. 유희는 어머니의 몫과 양도된 것까지 합친다면 꽤 자산가에 해당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유희는 재산에 손대지 않고 공탁 형식으로 맡겨 두었다. 상속된 유산에 의지하기 싫었고 무엇보다 스스로 나태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양부가 살아 계셨을 땐 뻔질나게 드나들던 닐슨 가 형제들은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은 지 오래, 고택은 인적이 드물어졌다. 그런데 그 집에 머물던 유희는 근래 들어 잦은 방문을 하는 조셉 때문에 불편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유희는 이제 보일 리 없는 샌프란시스코의 하늘을 떠올렸다. 하지만 추억 속에 잠긴 것도 잠시 누군가가 기억나 살며시 몸을 떨었다.
한기 탓인지 몸이 부르르 떨렸다. 자신을 옭아맸던 깊은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운 좋게도.
#2화 플랜B
‘이곳이 CN 지사?’
나머지 팀원은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샌드라야 일가친척 없는 혈혈단신, 닐슨 가 의붓 형제들은 그녀를 단 한 번도 동생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황인종에 대한 선입견과 증오로 가득 찬 그들. 그야말로 미개한 종족을 대하는 일관된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양부의 엄한 지시와 강력한 제재, 재산권 언급으로 인해 그들은 싫지만 표면적으론 모녀를 공대하는 척 가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