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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문이 열리면 1권
1화
#열리는 문

도시는 생각보다 찬란하지 못했다. 건물 사이의 도로를 넓히느라 공사 소음이 심했고 부족한 주택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바닥에 함부로 쌓아 놓은 건축 자재들은 위험스럽기만 했다. 그뿐인가. 줄지어 달리는 마차들 사이를 함부로 가로지르는 사람들로 인해 그야말로 무질서의 혼돈이었다.
영국은 수천 년 동안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던 농경사회였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지금은 그 누구도 농업에 의지하지 않는다.
“여기가 런던이에요?”
나는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큰 키에 마른 몸을 한 남자는 대답 대신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수렵을 하는 그의 손은 굳은살이 자리 잡아 투박하고 거칠었다.
“그래. 버킹엄 궁전도 이곳에 있어. 도시란 아름답고 우아하지?”
나는 먼 거리를 이동해 온 터라 지치고 힘없는 눈동자로 런던을 차분히 눈에 담았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만큼 전체적으로 화려한 곳인 건 틀림없었다. 웅장하고 커다란 아치형의 저택들과 우아한 옛 건물들이 과거부터 이곳이 얼마나 호화롭고 부유한 곳이었는지를 단면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판 위에 건물을 세운다면 이런 형태일까. 나는 산업화로 인해 과거와 현재가 무질서하게 섞여 있는 도심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이제 우린 어디로 가요?”
“항구로 갈 거야. 동쪽의 런던 항 인근으로.”
“여기서 멀어요?”
“조금은. 하지만 무리할 정도의 거리는 아니야. 혹시 배고프니? 뭘 좀 먹고 움직일까?”
남자의 말에 나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침은 이미 먹은 후다. 오후가 됐다고 점심까지 먹는 사치를 부릴 생각은 전혀 없다. 돈이 넉넉하게 남아 있지 않다는 건 이미 며칠 전부터 파악한 상태다. 런던까지 오는 여정은 길었고 생각보다 비싼 물가 때문에 예정된 여비는 예산 초과였다. 나는 단순히 우리가 정착할 곳이 어딘지 궁금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배가 고프면 참지 말고 말하도록 해. 그 정도 돈은 있으니까.”
“하나도 배고프지 않아요. 조금도요. 아빠는 배고파요?”
그는 내 물음에 빙그레 웃었다. 다정한 미소가 걸린 얼굴은 얼마나 딸을 애정하는지 보여 주는 듯했다.
“아니. 전혀 배고프지 않아.”
나는 빈곤한 그 웃음에 힘을 실어 주고자 그를 따라 활짝 미소 지었다.
“항구까진 천천히 걸어가도록 하자. 볼거리가 많을 거야. 네가 보고 싶어 하던 성도 구경하고.”
“그래도 돼요?”
“그럼.”
“친구를 먼저 만나지 않아도 돼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항구로 가는 거니까 괜찮아.”
“그럼 친구의 도움 없이 도시를 구경할 수 있는 거예요? 아빠는 도시의 지리를 잘 알아요?”
“조금은.”
우리 부녀는 도심이 처음이다. 내가 알기론 그랬다. 그런데 이곳의 지리를 안다니 의아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도심으로 오는 동안 사람들에게 길을 물은 적이 없다. 처음 도시에 도착해 우왕좌왕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우리 부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도심 속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이상할 건 없다. 그는 지금껏 나의 호기심과 궁금한 질문들에 단 한 번도 해답을 내놓지 않은 적이 없을 만큼 명석하고 지식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나의 지식도 모두 그로부터 쌓인 것들이다.
“아빠는 모르는 게 없어서 좋아.”
나는 그의 손에 볼을 비볐다. 그는 그런 나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더니 두 팔로 번쩍 안았다. 나는 어엿한 열한 살의 숙녀로 누군가가 내 몸을 허락 없이 안는 것에 대해 무례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버지의 손길은 결코 뿌리치지 않는다. 나는 말 잘 듣는 당나귀처럼 고분하게 따뜻한 아빠의 품에 안겼다.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해가 지기 전에 우리가 머물 곳도 미리 찾아봐야 하니까.”
우리는 대로변을 구경하며 천천히 항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도심이 어떤 곳인지 차근히 설명해 주었고 중요한 유적지 앞을 지나갈 때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과거의 역사를 알려 주기도 했다. 내딛는 걸음마다 세상에 대한 소식과 지식을 가르쳐 주는 그는 정말 박식했다.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도시야. 외국의 모든 지역과 연결되는 유일한 곳이자 가장 많은 식민지를 만들고 있는 곳이지.”
그로 인해 런던은 세계 각지에서 흘러들어 온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도입으로 문화도 새롭게 창출해 내고 있다고 했다. 파리나 베를린이 유럽 대륙의 중심도시를 둘러싸고 발전할 때 런던은 유럽을 넘어서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의 도시를 버리고 또 다른 도시를 만들어 내는 런던.
“도시에 안개가 많아요.”
“그래. 저것들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역할을 하지. 모든 문물과 인종을 유혹한 뒤 흡수하고 감추고 변화시키는 능력 말이야.”
그는 런던을 이렇게 정의했다.
“여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놀라운 신세계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신세계. 나는 익히 들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단어들을 작은 입술로 천천히 따라 했다.
“신세계. 기대돼요.”
“아벨라.”
“네, 아빠.”
“새로운 세계에 입성한 걸 축하한다.”
나는 기대와 흥분이 배제된 조용한 축하를 소중하게 받았다.
런던에 오기까지 우리의 여정은 사실 녹록지 않았다. 노숙이 빈번했고 끼니도 많이 걸렀으며 강도를 피해 야밤에 강을 건너기도 했다. 사고 없이 무사히 도착한 것도 따지고 보면 나름대로 행운이었다. 19세기의 영국은 찬란했으나 그 영광은 사실 그 뒤에 가려진 사회 하층민과 약소국의 희생 덕택에 가능한 것이었다. 빛과 어둠의 시대. 영광의 이면에 잔혹한 착취를 숨기고 있던 시대.
1837년 내 나이 열한 살.
나는 수렵꾼인 아버지와 함께 그 시대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나의 이름은 아벨라 모리스Avella Morris다.



#1 (1)


템스 강엔 부두가 많았다. 영국의 강대함은 작은 부두를 통해 차츰 역사를 이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그가 설명해 주었다.
부둣가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짐을 넣어 두어야 할 창고가 생겼다. 망가진 배를 수선하기 위해 물품을 만드는 공방이 들어섰고 공방이 생겨나니 이번엔 인력이 필요해 그들을 위한 숙소와 술집이 생겨났다. 그래서 항구가 늘어날수록 국가는 튼튼해지고 문화는 새로워지지만 항구지역은 난장판이 되고 만다.
나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도시를 벗어나 근교로 이동할 때 본 광경을 떠올렸다. 이륜마차에서 내리는 신사들을 향해 꽃을 파는 어린 소녀들의 굶주린 얼굴. 신사의 구두를 닦는 소년들의 부르튼 손. 굴뚝 청소를 하고 나온 청소부의 얼룩진 옷과 지친 병사들의 낡은 군화들을.
이곳은 도시와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크고 작은 배에서 쉴 새 없이 짐을 내리는 인부들이 가득했고, 그들을 통솔하는 사람들의 고함 소리로 아수라장이었다. 무엇보다 불결한 쥐들이 아무런 제지도 없이 길 위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고 있었다. 나는 시뻘건 눈의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한쪽 발을 땅 아래에 붙잡히고 말았다. 느닷없이 나타난 진흙 웅덩이에 발이 빠진 것이다. 신발 안으로 묵직하고 물컹한 무엇이 한꺼번에 파고들어 왔다. 진흙 속으로 감춰진 발을 보며 난감해하는 나를 그가 위로 들어내 마른 땅으로 옮겨 주었다.
“강 주변이라 진흙 구덩이가 많으니 조심해야겠다.”
그가 진흙 속에 파묻힌 신발을 꺼낸 나를 업었다. 나는 그의 등에 업힌 채 발에 달라붙은 진흙을 털어 내기 위해 한쪽 다리를 열심히 흔들어 댔다.
“이곳은 깨끗하지 않아요.”
“항구는 어디든 깨끗하지 않아.”
“어째서요?”
“열려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지. 배를 이용해 외국의 범죄자가 제일 먼저 도착하는 곳이기도 하고. 그들을 통해 전염병이 가장 먼저 상륙하는 곳이 바로 여기야.”
짐만 실어 나르는 게 아니라 사람도 함께 오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는 항구. 나는 다양한 인종들이 오고 가는 항구를 구경하며 그의 등에 바짝 매달렸다.
“여관을 찾을 때까지 조금만 참아. 그럴 수 있지?”
“네. 얼른 찾으면 좋겠어요.”
그는 나를 업은 채 많은 여관을 돌아다녔다. 외지인을 무시하는 여관 주인들이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숙박비를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매일 들어오는 배의 선원들과 짐꾼들은 언제나 부족한 방을 두고 쟁탈전을 벌였다. 그래서 여관 주인들은 굳이 뜨내기를 받지 않았다. 그들을 투숙시키지 않아도 숙박업은 이미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해가 진 늦은 저녁에서야 빈방이 있다는 문구가 적힌 선술집을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선원이나 계약된 공장 노동자가 아니라면 가격은 불변이오. 며칠을 묵을 거라고 했지?”
선술집 위층의 마지막 방을 빌리기로 한 우리에게 주인은 뭐가 못마땅한지 영 불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3일요. 하지만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까지 합쳐 반값 더. 머물 거면 제시한 가격을 주고 지내고 아니면 관둬요. 방 필요한 사람은 많으니까.”
주인은 더 이상 우리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는 시끄러운 선술집의 내부를 가만히 둘러보더니 이내 머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방을 쓰겠습니다.”
“선불.”
“후불 아닙니까?”
“잠깐 묵는 척하며 애 버리고 도망가는 것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무조건 선불. 아니면 다른 데로 가든가.”
그가 돈을 지불하기 위해 업고 있던 나를 잠시 내려놓았다. 나는 맨발 아래로 스며드는 찬 기운에 발가락을 움츠리며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초저녁이었지만 이미 술에 취한 사내들이 자리에 앉아 우리를 힐끔거렸다. 무례한 시선이었다. 여차하면 시비를 걸 것처럼 짜증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주인이 돈을 받으며 위층의 방 열쇠를 건네주었다.
“식사는 하루 두 번이야. 아침저녁 한 조각의 빵이 제공되고 추가는 돈을 더 받소.”
“겨우 빵 한 조각이란 말입니까?”
“서비스를 해 줘도 싫어? 그렇다면 관두든가.”
불친절한 주인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무례하고 경망스러웠다.
“혹시 아이가 씻을 만한 곳이 있습니까?”
주인은 대답 대신 돈을 세는 것에 열중한 모습을 보이는 걸로 그런 곳이 없다는 걸 알려 주었다. 나는 우리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해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는 나의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고 말없이 열쇠를 쥔 뒤 다시 나를 업었다.
우린 삐걱거리는 낡은 계단을 올라 이 층의 마지막 방으로 들어갔다. 비좁은 방 안에는 침대 하나가 전부일 뿐 아무것도 없었다. 방에서는 눅눅한 곰팡내가 났다. 내가 코를 막기 전 그가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강바람의 축축한 습기가 꾸역꾸역 흘러들어 왔다.
“배고프지? 먹을 걸 사 올 테니 쉬고 있어.”
그가 나가고 나는 깨끗하지 못한 침대 모서리에 억지로 걸터앉아 발바닥에 말라붙은 진흙을 손으로 떼어 냈다. 나는 흙먼지가 되어 떨어지는 진흙을 손가락으로 뭉개며 런던으로 오기 전 우리가 살던 곳을 생각했다.
숲 속의 오두막집은 부족한 게 없었다. 산줄기를 타고 흐르는 맑은 물과 신선한 공기가 가득했고, 산짐승과 강의 물고기 등이 지천에 있어 먹을 것이 풍족했다. 산은 학습의 장으로 매일 새로운 모습으로 나와 놀아 주었고, 계절은 푸근한 어머니처럼 자연의 세계를 보여 줬다. 먼지와 곰팡내와, 상쾌하지 않은 강바람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나는 다소 우울해졌다.
“런던은 별로야.”
어쩐지 기분이 가라앉은 나는 걸터앉은 침대 모서리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한참이 지나 그가 마실 물과 마른 빵 두 덩이를 들고 들어왔다. 마른 진흙을 손으로 뜯어내고 있는 나의 손을 훌훌 털어 깨끗하게 해 주고 제일 큰 빵을 손에 놔 주었다. 나는 빵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빠 친구는 이곳으로 오나요?”
“여기로 와 달라고 연락을 하면.”
“빨리 와 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될 거야.”
그가 나를 다독이며 딱딱한 빵을 뜯어 입안에 넣어 주었다. 만든 지 오래된 듯 온기와 고소함이 없는 그것을 씹으며 그가 내민 물도 마셨다. 그리고 늘 먹는 약도.
숲에서의 생활이 행복했던 건 아빠와 함께였기 때문이다. 나를 웃게 하고 기쁘게 하고 사랑해 주는 그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어쩐지 오늘은 힘이 나지 않았다. 런던에 오고 나서부터일까, 아니면 이 방에 들어오면서부터일까. 나는 딱딱한 빵을 반도 못 먹고 그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숲에서 놀던 날의 꿈을 꿨다. 오랜만에 숲에 돌아왔다고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 숲 속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저 멀리 내가 살던 오두막집이 보였다. 아빠가 집 앞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신이 나 그 먼 거리를 숨 한 번 안 쉬고 달려갔다. 숲으로 돌아와서인지 몸이 무척이나 가볍고 빨랐다. 이상했다. 나는 심장이 약해 달릴 수 없는 몸인데 심장이 터지도록 달리자 기분이 너무 상쾌했다. 그런 나를 보고 그가 기특한 얼굴로 웃어 주었다.
“때맞춰 왔네. 마침 물이 끓던 중이었는데. 오늘 식사는 그거니?”
무슨 말인지 몰라,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괜찮다며 웃었다.
“괜찮아. 먼저 맛봤다고 큰일 나는 건 아니니까. 아빠는 고기만 있으면 돼.”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른다. 숲에 들어가 뛰어놀면서 뭘 했었지? 갑자기 기분이 좋았던 건 왜였지? 손에 쥐고 있는 것의 정체는 대체 뭐지?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뜨끈한 무언가가 다리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툭, 툭 소리를 내며 발을 적시고 있는 붉은 액체. 나의 하얀 발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붉은 피는 누구의 것?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것은 작은 혓바닥을 길게 빼고 죽어 가는 어린 양이었다. 흰색의 순결한 털을 가진 양이 목을 물어뜯긴 채 피에 젖어 있었다. 나는 경악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이슬을 품고 가물가물 지는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연약한 눈동자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손에 묻은 피를 무의식적으로 옷에 닦다가 울음이 터질 뻔했다. 옷에는 그것보다 더 많은 피가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