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밤의 문이 열리면 1권
10화
#3 (4)
“내가 이곳 생활 10년 차인 고참으로서 말해 주는데, 부엌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아. 물론 실내에서 일하기 때문에 겨울엔 춥지 않으니 나름 좋기도 하지. 하지만 우린 사계절 내내 접시 닦고 음식 만드느라 손에 습진이 없어질 날이 없어. 하루 종일 서서 일해야 하고 밥 먹을 때 한 번 앉는 게 다야. 닭도 직접 잡아야 하고 종종 양도 잡아. 털을 벗기고 목을 잘라 내장을 발라낸 뒤 맛있는 부위를 찾아내서 고기를 굽지. 그런 일, 할 수 있겠어?”
“그건.”
“칼질은?”
“해 본 적 없어요.”
“손을 보니 그런 것 같네. 얼마나 못 먹고 살았으면 이 지경일까? 아사 직전에 구출된 노예 같다. 그런데도 용케 후작 댁에 차출되어 들어오다니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테라는 앙상한 아벨라의 몸을 훑어보더니 말문이 막혀 했다.
“얼마나 굶고 산 거니?”
“조금. 아니, 좀 많이.”
“농사꾼의 딸은 아니지?”
“아빠는 사냥꾼이에요. 숲에서 짐승을 잡는 사람이요.”
“아하. 지방 출신의 촌뜨기구나?”
테라의 말에 하녀들이 소리 내서 웃음을 터트렸다. 아벨라는 괜히 기가 죽었다. 그러나 그것뿐, 하녀들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그 이상 그녀를 비웃지 못했다.
“자. 슬슬 움직여 볼까? 점심 준비 전에 양부터 잡아야 하는 건 알지?”
“너무해. 고작 물 같은 스튜 한 그릇 먹여 놓고 또 힘쓰게 만들기야?”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 시간이라도 더 잘 수 있다는 거 몰라? 신참이 들어왔으니 솜씨들 좀 보여 줘.”
테라가 커다란 칼을 손에 쥐고 밖으로 나가자 나머지 하녀들도 그 뒤를 따랐다.
“어이, 신참. 잘 봐 둬. 여기 부엌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면 이거라도 잘 배워 둬야 안 쫓겨나니까 이제부터 정신 집중해.”
테라의 말에 하녀들이 양의 앞발과 두 다리를 각각 잡았다. 하얀 양은 곧 닥쳐올 자신의 죽음을 느꼈는지 시끄럽게 울부짖었다.
“워. 워. 진정해. 난 베테랑이야. 한 방에 보내 줄 테니 염려하지 말라고.”
테라가 손에 든 칼을 뒤로 숨기며 진정시켰지만 양은 버둥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이놈의 양이 오늘따라 왜 이래? 곱게 죽여 준대도 반항이 심하네.”
양이 뒷다리를 마구 버둥거리자 다리를 잡고 있던 하녀가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며 어서 시작하라고 소리쳤다. 순간, 테라의 칼이 양의 목에 콱 박혔다. 양이 경련했다. 포근한 털을 마구 흔들더니 이윽고 천천히 경련을 멈추고 몸을 축 늘어트렸다.
투욱.
목에서 다량의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녀가 양동이를 가져와 떨어지는 피를 받았다. 짐승의 뜨끈한 피 냄새는 서서히 퍼져 나가 주변을 뒤덮었다. 뒤늦게 한 남자가 도끼를 들고 나타났다.
“빌리. 때마침 왔네. 저녁 재료야. 야들하게 잘 익혀서 올려야 하니 한 번에 딱 잘라 줘.”
“그 전에 저거 한 잔 줘.”
빌리의 말에 테라가 눈을 흘기는가 싶더니 서슴없이 양동이에 컵을 집어넣어 양의 피를 가득 담았다.
“양의 피를 마신 후 아픈 다리는 좀 나아졌어?”
“그냥 그래.”
“그러게 내가 뭐랬어? 그런 말은 미신이라고 했잖아. 짐승의 피가 사람 몸에 좋을 리 있겠어? 차라리 의사를 찾아가라니까.”
“그럴 돈이 어딨어? 잔소리 말고 한 잔 더 줘.”
“주방장이 알면 혼나는 거 알지? 냉큼 마셔.”
테라의 말에 빌리가 벌컥, 하고 피를 들이켰다. 아벨라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피를 마시는 빌리의 목젖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목도 근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침이 말랐다. 아니, 신물이 밀려오며 배가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이 느낌. 이 감각. 이건 뭐지? 아벨라는 뒷걸음질 쳤다. 그때 빌리가 양의 목을 향해 닭목 자르듯 도끼질했다.
퍼억.
아벨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돌아서서 도망쳤다. 최대한 빠르게. 최대한 멀리.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 곳을 향해 심장이 터져라 뛰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돌부리에 걸려 바닥으로 엎어지는가 싶더니 배를 부여잡고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우웨에에엑.”
잔인해서가 아니다. 사냥꾼의 딸인 아벨라는 이런 모습이 낯설지 않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걸까?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싶은 저 광경은 대체 뭘까? 아벨라는 주먹으로 명치를 두들겼다.
“처음엔 다 그래.”
어느새 테라가 다가와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부엌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테라가 아벨라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넌 딱 봐도 청소를 해야 할 타입이야. 바닥에 광이나 내면서 먼지를 털어 내는 게 적성에 맞을 것 같아.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애로는 안 보여.”
“그 남자. 피를 먹다니 제정신이 아니에요.”
“오해할 만해. 하지만 빌리도 나름 사정이 있어. 몇 달 전에 짐을 옮기다가 마차 바퀴에 다리가 깔렸는데 살이 자꾸 썩어 들어간대. 이것저것 약도 썼지만 효과가 없나 봐.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 돌팔이 연금술사의 말을 듣고 저렇게 짐승의 피를 마셔. 잘못된 거라고 말려 봐도 좀체 말을 듣지 않아.”
“그렇다고 피를 마셔요? 어떻게 피를 마실 생각을 해요?”
“그래. 끔찍하지. 하지만 빌리의 입장도 이해해 줘야 해. 다리가 아파도 가족을 위해 계속 일을 해야 하거든. 동생이 다섯이야. 그 심정은 오죽하겠어?”
그래도 이해할 수 없다. 아벨라는 끔찍하고 징그럽다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너는 내일 하녀장에게 말해서 소속을 바꿔 달라고 하는 게 좋겠다. 저택에서 할 일이야 지천으로 널렸으니 어디든 보내 주겠지. 이제 속은 좀 괜찮아?”
아벨라가 상체를 일으키며 고개를 저었다.
“속이 너무 안 좋아요.”
“그러고 보니 너 피부가 굉장히 하얗구나. 하얗다 못해 파리한걸.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음식 하는 데 있으면 곤란해.”
“난 건강해요. 아픈 데는 없어요.”
“그럼 다행이고. 몸에 열이라도 나면 즉각 말해. 하녀들은 모두 숙소생활을 하다 보니 여긴 한 명이 아프면 금방 전염되거든. 무슨 말인지 알지?”
아벨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테라를 따라갔다. 가는 도중에 도망을 칠까 생각했지만 눈치 빠른 테라가 미리 엄포를 놓으며 의지를 꺾어 버렸다.
“도망치다가 잡히면 너 하나 죽는 걸로 끝나지 않아. 하녀를 관리하는 담당자가 네 가족들을 찾아가 끊임없이 괴롭히거든. 문제가 생긴 것에 대한 보상을 하라며 생떼를 쓰는데 정말 독해. 결국 그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들고 나서야 용서를 해 준다니 말 다했지 뭐. 그러니 도망은 꿈도 꾸지 마.”
“난 팔려 온 게 아니에요.”
“그럼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스스로 하녀가 됐니?”
아벨라는 길에 떨어진 옷을 주운 뒤 일이 이렇게 됐다고 말하지 못했다.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를 테라는 이해한다는 듯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팔려 오는 애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부들의 딸이야. 나도 그렇고. 난 열 살이 되기 전 아빠가 이곳의 하녀로 팔았어. 뭐, 그전에 이미 굶어 죽느니 하녀가 되겠다고 스스로 마음먹고 있었지만.”
테라는 동생이 여섯이나 된다고 했다. 빌리보다 한 명이 더 많아서 허리가 휘다 못해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내일 당장 먹을 게 없어서 구걸을 할 판인데도 아기를 계속 낳는 거야. 아무리 욕을 하고 난리를 쳐도 대책도 없이 계속 낳는 거지. 그래서 하녀로 팔리기 전 약속을 받았어. 여기서 동생이 하나 더 생기면 그날 바로 도망을 쳐서 모두 굶어 죽게 만들 테니 그리 알라고. 귀족한테 한 번 찍히면 죽는다는 걸 아니까 그들도 조심하는 듯하더니 결국 하나를 더 낳더라구. 그 뒤론 내가 연락을 끊었어. 물론 월급은 보내 줘.”
“왜요?”
“난 여기서 의식주가 해결되니 돈 쓸 일은 없거든. 하지만 그들은 돈이 없으면 바로 굶어 죽으니까.”
그러면서 테라는 자신은 평생 가난뱅이 팔자를 벗어날 수 없다고 덧붙였다.
“하나 있는 남자친구 놈이 내 월급을 탐내. 아 참, 여긴 작긴 하지만 용돈 정도의 월급을 줘. 팔려 왔어도 예외는 아니야. 후작님이 그런 점에선 굉장히 진보적이신 분이거든. 덕분에 하녀라고 해도 돈을 모을 수 있어. 다행이지?”
모르겠다.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러고 보니 넌 몇 살이야?”
나이를 묻는 말에 아벨라는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은 몇 살이 된 걸까? 사람들에게 몇 살로 보이는 걸까?
“테라는 몇 살이에요?”
“스물한 살.”
아벨라는 자신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럼 동갑이네. 하긴, 이곳 부엌데기들은 다 그 정도 나이야. 우리 나이가 제일 힘이 좋아서 부려먹기 딱 좋거든. 앞으론 편하게 말해.”
“으응.”
테라가 양동이에 물을 부었다. 빌리가 먹은 피만큼의 물이었다.
“하녀장은 눈썰미가 좋거든. 여차하면 걸리기 때문에 조심해야 해.”
“피를 어디에 쓰는데?”
“몰라. 우린 그냥 시키는 대로 일할 뿐이니까. 어디에 쓰는지 알고 싶지도 않고.”
테라는 그 말을 끝으로 양동이 안에 침을 탁 뱉었다. 눈살을 찌푸리는 아벨라에게 테라가 한쪽 눈을 찡끗해 보였다.
“너도 곧 내 행동을 이해하게 될 거야. 늙은 하녀장이 얼마나 우릴 괴롭히는지 이런 건 소소한 복수 측에도 못 낀다는 걸.”
테라는 피가 든 양동이를 마차에 실었다. 그리고 곧장 빌리에게 소리쳤다.
“빨리 가. 조금 지체했어. 피가 식으면 하녀장이 또 난리 칠 테니 서둘러.”
곧이어 아까 양의 피를 마시던 빌리가 마차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빌리가 가고 난 뒤, 주방의 하녀들은 설거지를 하고 또다시 점심과 저녁 식사 준비를 한 후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그곳을 떠났다. 아벨라는 테라와 룸메이트가 되어 한방을 쓰게 되었다. 새로운 신입은 그들끼리 따로 모여 생활하는데 아벨라는 침대 부족으로 인해 당분간 테라의 방에 신세를 지게 됐다.
“방이 춥지? 불을 떼 주지 않아서 그래.”
테라가 온기 없는 이유를 알려 주었다.
“추위엔 익숙해.”
“그렇겠지. 이유야 어쨌든 이곳에 올 정도의 신세니.”
테라는 자신의 얇은 이불을 아벨라에게 내밀었다.
“그래도 이불 정도는 덮고 자는 게 좋을 거야. 안 하던 주방일 며칠 하면 곧 몸살이 나거든. 다들 그래.”
받아도 될지 고민이 됐다. 아벨라가 선뜻 이불을 받지 않자 테라가 이불을 휙 던졌다.
“내게 이걸 주면 너는?”
“난 추운 건 딱 질색이야.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기도 하고. 근육이 딱딱해지면 피도 안 통해서 손발이 저리고 아파.”
“그런데 내게 이불을 줘도 돼?”
“물론 안 되지. 하지만 난 여기서 자지 않을 거니까 빌려주는 거야.”
테라는 부끄러움 없이 아벨라 앞에서 하녀복을 훌떡 벗더니 일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오늘처럼 쌀쌀한 날엔 차라리 사내한테 시달리는 게 나아. 위스키도 얻어 마실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아침에 맛있는 음식도 사 주거든.”
테라는 묶었던 머리를 풀어 가볍게 흐트러트리더니 싱긋 웃어 보였다.
“나 괜찮아?”
앞섶의 단추를 세 개나 풀며 테라가 예쁘냐고 물었다. 아벨라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테라가 단추 하나를 더 풀었다. 가슴이 반 이상 드러났다.
“난 애인이 있어. 굴뚝 청소부의 아들.”
“애인을 만나러 외출하는 거구나.”
“그럴 리가. 말했잖아. 그 녀석은 착하지만 너무 가난하다고. 오히려 내가 주방에서 남은 빵을 몰래 가져다줘야 하는 판이라니까. 오늘 내가 만나러 가는 사람은 조프리야.”
“조프리?”
“푸줏간 아저씨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너랑 같이 고기를 배달했는데 기억 안 나?”
테라의 말에 아벨라는 성당에서 만났던 덩치 좋은 중년의 남자를 떠올렸다.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 사람이 테라와?
“만약 누가 나를 찾으면 화장실에 갔다고 말해 줘. 난 지독한 변비라서 내가 한번 화장실을 가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걸 다들 알거든.”
테라는 실없는 웃음을 터트리면서 마지막으로 가슴골 사이에 싸구려 향수를 뿌려 댔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건 허락받지 않은 외출이야. 팔려 온 주제에 외출이라니 도망이나 마찬가지지. 하지만 이런 재미도 없다면 어떻게 버티겠어? 안 그래?”
테라는 벗어 놓은 자신의 하녀복을 둘둘 말아 아벨라의 베개 밑에 숨겼다.
“그건 왜?”
“내가 며칠 전 밖에서 하녀복을 잃어버렸거든.”
“하녀복을?”
“애인을 만나러 갔다가 잃어버렸어. 분수대 근처였는데 그 새벽에 누가 옷을 훔쳐 갈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 뭐야? 그런 이유로 어젯밤 내가 다른 애 거를 훔쳤어. 아마 그 하녀는 오늘 의복이 없어져서 난리가 났을 거야. 의복은 후작 댁에서 지급해 준 거니까 잃어버리면 물어내야 하거든.”
테라는 그런 이유로 앞으로 의복 쟁탈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며 아벨라에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다.
“그러니까 내 옷도 잘 좀 지켜 줘. 알겠지?”
테라는 부탁의 말을 남기고 도둑고양이처럼 창문을 넘어 총총히 사라졌다. 야밤에 외출하는 게 아주 익숙해 보였다. 아벨라는 어둠을 향해 급하게 뛰어가는 테라를 한참 지켜보았다.
추위가 싫어서 사내의 품을 찾아간다는 테라. 그리고 그런 테라의 옷을 훔친 죄로 하녀가 된 나.
지금이 기회였다. 테라를 따라나서면 다시 자유의 몸이 된다. 그럼 얼토당토않게 하녀가 된 일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벨라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입고 있던 하녀복을 벗고 테라가 했던 것처럼 의복을 돌돌 말아 베개 아래에 감췄다. 그리고 그녀가 남겨 놓고 간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갈 곳이 없었다. 또다시 하수구의 쥐들과 생활하고 싶지는 않았다. 깨끗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실 수 있는 이곳이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 아벨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종일 일을 하는 하녀조차 가난과 배고픔에 허덕이며 밤거리를 헤매는데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아벨라는 더 비참한 생활을 할 게 뻔했다. 지금 상황에선 하녀가 된 것조차 어쩌면 운이 좋은 일일 수도 있었다.
10화
#3 (4)
“내가 이곳 생활 10년 차인 고참으로서 말해 주는데, 부엌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아. 물론 실내에서 일하기 때문에 겨울엔 춥지 않으니 나름 좋기도 하지. 하지만 우린 사계절 내내 접시 닦고 음식 만드느라 손에 습진이 없어질 날이 없어. 하루 종일 서서 일해야 하고 밥 먹을 때 한 번 앉는 게 다야. 닭도 직접 잡아야 하고 종종 양도 잡아. 털을 벗기고 목을 잘라 내장을 발라낸 뒤 맛있는 부위를 찾아내서 고기를 굽지. 그런 일, 할 수 있겠어?”
“그건.”
“칼질은?”
“해 본 적 없어요.”
“손을 보니 그런 것 같네. 얼마나 못 먹고 살았으면 이 지경일까? 아사 직전에 구출된 노예 같다. 그런데도 용케 후작 댁에 차출되어 들어오다니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테라는 앙상한 아벨라의 몸을 훑어보더니 말문이 막혀 했다.
“얼마나 굶고 산 거니?”
“조금. 아니, 좀 많이.”
“농사꾼의 딸은 아니지?”
“아빠는 사냥꾼이에요. 숲에서 짐승을 잡는 사람이요.”
“아하. 지방 출신의 촌뜨기구나?”
테라의 말에 하녀들이 소리 내서 웃음을 터트렸다. 아벨라는 괜히 기가 죽었다. 그러나 그것뿐, 하녀들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그 이상 그녀를 비웃지 못했다.
“자. 슬슬 움직여 볼까? 점심 준비 전에 양부터 잡아야 하는 건 알지?”
“너무해. 고작 물 같은 스튜 한 그릇 먹여 놓고 또 힘쓰게 만들기야?”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 시간이라도 더 잘 수 있다는 거 몰라? 신참이 들어왔으니 솜씨들 좀 보여 줘.”
테라가 커다란 칼을 손에 쥐고 밖으로 나가자 나머지 하녀들도 그 뒤를 따랐다.
“어이, 신참. 잘 봐 둬. 여기 부엌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면 이거라도 잘 배워 둬야 안 쫓겨나니까 이제부터 정신 집중해.”
테라의 말에 하녀들이 양의 앞발과 두 다리를 각각 잡았다. 하얀 양은 곧 닥쳐올 자신의 죽음을 느꼈는지 시끄럽게 울부짖었다.
“워. 워. 진정해. 난 베테랑이야. 한 방에 보내 줄 테니 염려하지 말라고.”
테라가 손에 든 칼을 뒤로 숨기며 진정시켰지만 양은 버둥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이놈의 양이 오늘따라 왜 이래? 곱게 죽여 준대도 반항이 심하네.”
양이 뒷다리를 마구 버둥거리자 다리를 잡고 있던 하녀가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며 어서 시작하라고 소리쳤다. 순간, 테라의 칼이 양의 목에 콱 박혔다. 양이 경련했다. 포근한 털을 마구 흔들더니 이윽고 천천히 경련을 멈추고 몸을 축 늘어트렸다.
투욱.
목에서 다량의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녀가 양동이를 가져와 떨어지는 피를 받았다. 짐승의 뜨끈한 피 냄새는 서서히 퍼져 나가 주변을 뒤덮었다. 뒤늦게 한 남자가 도끼를 들고 나타났다.
“빌리. 때마침 왔네. 저녁 재료야. 야들하게 잘 익혀서 올려야 하니 한 번에 딱 잘라 줘.”
“그 전에 저거 한 잔 줘.”
빌리의 말에 테라가 눈을 흘기는가 싶더니 서슴없이 양동이에 컵을 집어넣어 양의 피를 가득 담았다.
“양의 피를 마신 후 아픈 다리는 좀 나아졌어?”
“그냥 그래.”
“그러게 내가 뭐랬어? 그런 말은 미신이라고 했잖아. 짐승의 피가 사람 몸에 좋을 리 있겠어? 차라리 의사를 찾아가라니까.”
“그럴 돈이 어딨어? 잔소리 말고 한 잔 더 줘.”
“주방장이 알면 혼나는 거 알지? 냉큼 마셔.”
테라의 말에 빌리가 벌컥, 하고 피를 들이켰다. 아벨라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피를 마시는 빌리의 목젖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목도 근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침이 말랐다. 아니, 신물이 밀려오며 배가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이 느낌. 이 감각. 이건 뭐지? 아벨라는 뒷걸음질 쳤다. 그때 빌리가 양의 목을 향해 닭목 자르듯 도끼질했다.
퍼억.
아벨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돌아서서 도망쳤다. 최대한 빠르게. 최대한 멀리.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 곳을 향해 심장이 터져라 뛰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돌부리에 걸려 바닥으로 엎어지는가 싶더니 배를 부여잡고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우웨에에엑.”
잔인해서가 아니다. 사냥꾼의 딸인 아벨라는 이런 모습이 낯설지 않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걸까?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싶은 저 광경은 대체 뭘까? 아벨라는 주먹으로 명치를 두들겼다.
“처음엔 다 그래.”
어느새 테라가 다가와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부엌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테라가 아벨라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넌 딱 봐도 청소를 해야 할 타입이야. 바닥에 광이나 내면서 먼지를 털어 내는 게 적성에 맞을 것 같아.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애로는 안 보여.”
“그 남자. 피를 먹다니 제정신이 아니에요.”
“오해할 만해. 하지만 빌리도 나름 사정이 있어. 몇 달 전에 짐을 옮기다가 마차 바퀴에 다리가 깔렸는데 살이 자꾸 썩어 들어간대. 이것저것 약도 썼지만 효과가 없나 봐.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 돌팔이 연금술사의 말을 듣고 저렇게 짐승의 피를 마셔. 잘못된 거라고 말려 봐도 좀체 말을 듣지 않아.”
“그렇다고 피를 마셔요? 어떻게 피를 마실 생각을 해요?”
“그래. 끔찍하지. 하지만 빌리의 입장도 이해해 줘야 해. 다리가 아파도 가족을 위해 계속 일을 해야 하거든. 동생이 다섯이야. 그 심정은 오죽하겠어?”
그래도 이해할 수 없다. 아벨라는 끔찍하고 징그럽다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너는 내일 하녀장에게 말해서 소속을 바꿔 달라고 하는 게 좋겠다. 저택에서 할 일이야 지천으로 널렸으니 어디든 보내 주겠지. 이제 속은 좀 괜찮아?”
아벨라가 상체를 일으키며 고개를 저었다.
“속이 너무 안 좋아요.”
“그러고 보니 너 피부가 굉장히 하얗구나. 하얗다 못해 파리한걸.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음식 하는 데 있으면 곤란해.”
“난 건강해요. 아픈 데는 없어요.”
“그럼 다행이고. 몸에 열이라도 나면 즉각 말해. 하녀들은 모두 숙소생활을 하다 보니 여긴 한 명이 아프면 금방 전염되거든. 무슨 말인지 알지?”
아벨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테라를 따라갔다. 가는 도중에 도망을 칠까 생각했지만 눈치 빠른 테라가 미리 엄포를 놓으며 의지를 꺾어 버렸다.
“도망치다가 잡히면 너 하나 죽는 걸로 끝나지 않아. 하녀를 관리하는 담당자가 네 가족들을 찾아가 끊임없이 괴롭히거든. 문제가 생긴 것에 대한 보상을 하라며 생떼를 쓰는데 정말 독해. 결국 그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들고 나서야 용서를 해 준다니 말 다했지 뭐. 그러니 도망은 꿈도 꾸지 마.”
“난 팔려 온 게 아니에요.”
“그럼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스스로 하녀가 됐니?”
아벨라는 길에 떨어진 옷을 주운 뒤 일이 이렇게 됐다고 말하지 못했다.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를 테라는 이해한다는 듯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팔려 오는 애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부들의 딸이야. 나도 그렇고. 난 열 살이 되기 전 아빠가 이곳의 하녀로 팔았어. 뭐, 그전에 이미 굶어 죽느니 하녀가 되겠다고 스스로 마음먹고 있었지만.”
테라는 동생이 여섯이나 된다고 했다. 빌리보다 한 명이 더 많아서 허리가 휘다 못해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내일 당장 먹을 게 없어서 구걸을 할 판인데도 아기를 계속 낳는 거야. 아무리 욕을 하고 난리를 쳐도 대책도 없이 계속 낳는 거지. 그래서 하녀로 팔리기 전 약속을 받았어. 여기서 동생이 하나 더 생기면 그날 바로 도망을 쳐서 모두 굶어 죽게 만들 테니 그리 알라고. 귀족한테 한 번 찍히면 죽는다는 걸 아니까 그들도 조심하는 듯하더니 결국 하나를 더 낳더라구. 그 뒤론 내가 연락을 끊었어. 물론 월급은 보내 줘.”
“왜요?”
“난 여기서 의식주가 해결되니 돈 쓸 일은 없거든. 하지만 그들은 돈이 없으면 바로 굶어 죽으니까.”
그러면서 테라는 자신은 평생 가난뱅이 팔자를 벗어날 수 없다고 덧붙였다.
“하나 있는 남자친구 놈이 내 월급을 탐내. 아 참, 여긴 작긴 하지만 용돈 정도의 월급을 줘. 팔려 왔어도 예외는 아니야. 후작님이 그런 점에선 굉장히 진보적이신 분이거든. 덕분에 하녀라고 해도 돈을 모을 수 있어. 다행이지?”
모르겠다.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러고 보니 넌 몇 살이야?”
나이를 묻는 말에 아벨라는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은 몇 살이 된 걸까? 사람들에게 몇 살로 보이는 걸까?
“테라는 몇 살이에요?”
“스물한 살.”
아벨라는 자신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럼 동갑이네. 하긴, 이곳 부엌데기들은 다 그 정도 나이야. 우리 나이가 제일 힘이 좋아서 부려먹기 딱 좋거든. 앞으론 편하게 말해.”
“으응.”
테라가 양동이에 물을 부었다. 빌리가 먹은 피만큼의 물이었다.
“하녀장은 눈썰미가 좋거든. 여차하면 걸리기 때문에 조심해야 해.”
“피를 어디에 쓰는데?”
“몰라. 우린 그냥 시키는 대로 일할 뿐이니까. 어디에 쓰는지 알고 싶지도 않고.”
테라는 그 말을 끝으로 양동이 안에 침을 탁 뱉었다. 눈살을 찌푸리는 아벨라에게 테라가 한쪽 눈을 찡끗해 보였다.
“너도 곧 내 행동을 이해하게 될 거야. 늙은 하녀장이 얼마나 우릴 괴롭히는지 이런 건 소소한 복수 측에도 못 낀다는 걸.”
테라는 피가 든 양동이를 마차에 실었다. 그리고 곧장 빌리에게 소리쳤다.
“빨리 가. 조금 지체했어. 피가 식으면 하녀장이 또 난리 칠 테니 서둘러.”
곧이어 아까 양의 피를 마시던 빌리가 마차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빌리가 가고 난 뒤, 주방의 하녀들은 설거지를 하고 또다시 점심과 저녁 식사 준비를 한 후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그곳을 떠났다. 아벨라는 테라와 룸메이트가 되어 한방을 쓰게 되었다. 새로운 신입은 그들끼리 따로 모여 생활하는데 아벨라는 침대 부족으로 인해 당분간 테라의 방에 신세를 지게 됐다.
“방이 춥지? 불을 떼 주지 않아서 그래.”
테라가 온기 없는 이유를 알려 주었다.
“추위엔 익숙해.”
“그렇겠지. 이유야 어쨌든 이곳에 올 정도의 신세니.”
테라는 자신의 얇은 이불을 아벨라에게 내밀었다.
“그래도 이불 정도는 덮고 자는 게 좋을 거야. 안 하던 주방일 며칠 하면 곧 몸살이 나거든. 다들 그래.”
받아도 될지 고민이 됐다. 아벨라가 선뜻 이불을 받지 않자 테라가 이불을 휙 던졌다.
“내게 이걸 주면 너는?”
“난 추운 건 딱 질색이야.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기도 하고. 근육이 딱딱해지면 피도 안 통해서 손발이 저리고 아파.”
“그런데 내게 이불을 줘도 돼?”
“물론 안 되지. 하지만 난 여기서 자지 않을 거니까 빌려주는 거야.”
테라는 부끄러움 없이 아벨라 앞에서 하녀복을 훌떡 벗더니 일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오늘처럼 쌀쌀한 날엔 차라리 사내한테 시달리는 게 나아. 위스키도 얻어 마실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아침에 맛있는 음식도 사 주거든.”
테라는 묶었던 머리를 풀어 가볍게 흐트러트리더니 싱긋 웃어 보였다.
“나 괜찮아?”
앞섶의 단추를 세 개나 풀며 테라가 예쁘냐고 물었다. 아벨라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테라가 단추 하나를 더 풀었다. 가슴이 반 이상 드러났다.
“난 애인이 있어. 굴뚝 청소부의 아들.”
“애인을 만나러 외출하는 거구나.”
“그럴 리가. 말했잖아. 그 녀석은 착하지만 너무 가난하다고. 오히려 내가 주방에서 남은 빵을 몰래 가져다줘야 하는 판이라니까. 오늘 내가 만나러 가는 사람은 조프리야.”
“조프리?”
“푸줏간 아저씨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너랑 같이 고기를 배달했는데 기억 안 나?”
테라의 말에 아벨라는 성당에서 만났던 덩치 좋은 중년의 남자를 떠올렸다.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 사람이 테라와?
“만약 누가 나를 찾으면 화장실에 갔다고 말해 줘. 난 지독한 변비라서 내가 한번 화장실을 가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걸 다들 알거든.”
테라는 실없는 웃음을 터트리면서 마지막으로 가슴골 사이에 싸구려 향수를 뿌려 댔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건 허락받지 않은 외출이야. 팔려 온 주제에 외출이라니 도망이나 마찬가지지. 하지만 이런 재미도 없다면 어떻게 버티겠어? 안 그래?”
테라는 벗어 놓은 자신의 하녀복을 둘둘 말아 아벨라의 베개 밑에 숨겼다.
“그건 왜?”
“내가 며칠 전 밖에서 하녀복을 잃어버렸거든.”
“하녀복을?”
“애인을 만나러 갔다가 잃어버렸어. 분수대 근처였는데 그 새벽에 누가 옷을 훔쳐 갈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 뭐야? 그런 이유로 어젯밤 내가 다른 애 거를 훔쳤어. 아마 그 하녀는 오늘 의복이 없어져서 난리가 났을 거야. 의복은 후작 댁에서 지급해 준 거니까 잃어버리면 물어내야 하거든.”
테라는 그런 이유로 앞으로 의복 쟁탈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며 아벨라에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다.
“그러니까 내 옷도 잘 좀 지켜 줘. 알겠지?”
테라는 부탁의 말을 남기고 도둑고양이처럼 창문을 넘어 총총히 사라졌다. 야밤에 외출하는 게 아주 익숙해 보였다. 아벨라는 어둠을 향해 급하게 뛰어가는 테라를 한참 지켜보았다.
추위가 싫어서 사내의 품을 찾아간다는 테라. 그리고 그런 테라의 옷을 훔친 죄로 하녀가 된 나.
지금이 기회였다. 테라를 따라나서면 다시 자유의 몸이 된다. 그럼 얼토당토않게 하녀가 된 일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벨라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입고 있던 하녀복을 벗고 테라가 했던 것처럼 의복을 돌돌 말아 베개 아래에 감췄다. 그리고 그녀가 남겨 놓고 간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갈 곳이 없었다. 또다시 하수구의 쥐들과 생활하고 싶지는 않았다. 깨끗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실 수 있는 이곳이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 아벨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종일 일을 하는 하녀조차 가난과 배고픔에 허덕이며 밤거리를 헤매는데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아벨라는 더 비참한 생활을 할 게 뻔했다. 지금 상황에선 하녀가 된 것조차 어쩌면 운이 좋은 일일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