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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문이 열리면 1권
9화
#3 (3)

젖은 옷차림으로 내달린 아벨라는 또다시 부랑자가 되어 갔다. 음탕한 사내들을 피해 숨을 곳을 찾다가 어두운 다리 밑으로 들어갔고 빛 한 점 들지 않는 그 어둠 속에서 더러운 쥐들과 며칠을 보냈다.
“목말라.”
배는 고프지 않았으나 가끔 목이 말랐다. 그러나 낮에 물을 마시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질 나쁜 사내들의 희롱을 받은 뒤론 밖으로 나가기가 꺼려졌다.
“사람들은 이기적이야. 단순히 내가 더럽다는 이유로 물조차 함께 나눠 마시길 거부해. 분수대의 물은 넘치도록 흐르는데도.”
도심엔 비가 자주 왔고 비가 오면 다리 아래엔 쥐들이 더 들끓었다. 웅크리고 앉아 있는 아벨라의 근처를 오고 가는 수많은 녀석들의 소리. 그것은 불결한 하수도의 실제 모습이었고 아벨라가 인식해야 할 현실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쥐들은 그녀의 등을 타고 오르거나 연약한 다리를 물어뜯지 않았다. 오히려 아벨라를 피해 비켜 다녔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해야 할 일도 아니었다. 덕분에 보다 편히 숨어 있을 수 있어 다행일 뿐이었다.
안개가 낀 새벽에 분수대의 물을 몰래 마시고 돌아가는 도중 아벨라는 길에 버려진 옷 한 벌을 발견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옷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주인은커녕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다. 옷은 누군가 일부러 버리기라도 한 듯 깨끗한 상태였다.
아벨라는 지나가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와 그 옷을 주워 손에 쥐었다. 그리고 다리 아래에서 갈아입었다. 언제까지 숨어 지낼 수는 없었다. 아벨라는 집시 노파가 주었던 스카프로 머리를 단정히 감싸고 넝마 옷으로 얼굴을 대충 문질러 닦은 뒤 다리 아래에서의 생활을 끝냈다.

그 시각.
옷의 주인인 테라는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자신의 옷이 사라진 걸 뒤늦게 알았다.
“어떻게 된 거야? 내 옷이 어디로 갔지?”
그녀는 후작 댁의 하녀로 새벽에 저택을 몰래 빠져나와 남자친구의 집에서 머물고 있던 참이었다. 사랑을 나눈 후 다시 돌아가기 위해 의복을 찾던 테라는 아연실색해졌다. 있어야 할 옷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 퍼질러 누워 있고 당장 나와서 내 옷 좀 찾아봐. 나 목 날아가기 전에.”
테라와 사랑을 나누던 남자가 그녀의 날이 선 목소리에 게슴츠레 눈을 떴다.
“왜 그래? 옷이 뭐 어쨌다구.”
“옷이 없어졌다구! 내 옷! 하녀복 말이야!”
테라의 성화에 남자가 밖으로 나와 옷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정말 어떻게 된 거지? 하녀 옷인 걸 뻔히 알면서 누가 가져갈 리도 없을 텐데.”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그러게 뭐가 급하다고 밖에서부터 옷을 벗긴 거야? 이제 어떡할래?”
“어떡하긴 뭘? 이렇게 된 이상 한 번 더 하고 가면 되지. 아직 해도 뜨지 않았어.”
남자가 능글맞게 테라의 맨가슴을 움켜쥐었다. 테라가 신경질을 내며 그 손을 탁 쳐 냈다.
“멍청한 놈아. 옷을 잃어버린 걸 알면 마귀 같은 하녀장이 가만 놔둘 것 같아? 몇 달 동안 외출 금지령이 내려질 거 아냐! 그렇게 되면 앞으로 날 못 만나게 될 텐데 이런 상황에서 그 짓이 또 하고 싶어?”
테라의 따끔한 말에 남자가 멍청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어떻게 해?”
“뭘 어떡해?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서 자고 있는 다른 하녀의 옷이라도 훔쳐 입어야지. 안 그러면 채찍질을 당할 텐데.”
“하지만 옷도 없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그러니까 집에 들어가서 당장 걸칠 걸 찾아 가지고 나오란 말이야.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남자는 테라의 고함 소리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입을 것을 찾았으나 마땅한 것을 가지고 나오진 못했다. 가난한 자들은 남녀노소 단벌 신사니 넉넉한 여분의 옷이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남자가 가지고 나온 것은 테이블 위를 덮고 있던 낡은 식탁보.
테라는 참지 못하고 욕지기를 내뱉었다.
“이 가난뱅이 새끼!”
음식물 찌꺼기가 붙은 지저분한 식탁보를 몸에 두르며 테라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채찍질을 맛보지 않으려면 이거라도 감지덕지하며 서둘러 돌아갈 수밖에. 테라는 자신의 옷을 가져간 사람을 한껏 욕하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아벨라는 도심을 걸었다. 처음 런던에 도착했던 날, 아빠와 함께 걸었던 길을 종일 반복해서 걷고 또 걸었다.
“잊어선 안 돼.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전부 기억해 둬야 해.”
그래야 잘못된 실타래를 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을 잊지 않고 있어야 이 혼란을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길을 걷는 중에 작은 성당을 발견했다. 아벨라는 성당으로 들어가 가만히 무릎을 꿇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이곳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건 신뿐이었다. 이 두려운 현실을 헤쳐 나갈 힘을 신이 주길 바랐다.
“신이시여.”
아벨라는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은 채 진심으로 기도했다.
“전 하루아침에 어른이 됐어요. 눈을 떠 보니 아빠는 사라지고 런던이 아닌 곳에 제가 있었어요. 제가 그 먼 거리를 어떻게 걸어간 걸까요? 그날 밤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전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죠?”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떠올라 감정이 복받쳤다. 아벨라는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흐르는 눈물이 얼마나 많은지 가슴팍을 흠뻑 적시고도 남았다. 그만큼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이란 걸 누가 알까. 그때 기도하고 있는 그녀의 머리맡에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다.
“어라?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지금 한창 아침 준비하느라 바쁠 시간인데?”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아벨라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우락부락한 체구의 중년 사내가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벨라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기서 뭘 하고 있어?”
“그, 그게 기도를.”
“기도? 농땡이 치고 싶어 성당으로 숨어든 게 아니고?”
“아니에요. 기도 중이었어요. 정말이에요.”
사내는 의구심 어린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승낙은 받은 거야? 윗선에 보고는 했냐구.”
아벨라는 사내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기도를 하는데도 누구의 승낙이 필요한 것인가? 신부의 허락? 아니면 성당도 따로 주인이 있는 건가? 아벨라는 사내의 딱딱한 말투에 자신이 뭔가 실수했나 싶어 얼른 사과했다.
“승낙도 받지 않고 기도를 해서 죄송해요.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어요. 급한 마음에 그만…….”
사내는 연신 고개 숙여 사과하는 아벨라를 보고 갑자기 픽, 하고 웃었다.
“이거 참. 후작 댁 하녀장이 툭하면 하녀들에게 매질을 한다더니 정말인가 보군. 왜 그렇게 바들바들 떨어? 내가 뭘 어떻게 한대?”
사내는 아벨라에게 눈가에 매달린 눈물이나 먼저 닦으라고 말했다.
“하녀장에게 승낙을 받지 않고 몰래 나온 거라면 걱정 마. 내가 마침 그쪽으로 가는 길이니 태워 줄게.”
“어디로요?”
“하녀가 일하러 가야지 어딜 가겠어?”
“하, 하녀요?”
“말장난할 시간 없어. 어서 타. 나랑 함께 가면 일하다 온 줄 알고 아무도 뭐라 안 할 테니 몰래 나온 걸 들키지 않을 거야.”
사내는 성당 앞에 세워 둔 마차에 올라타며 아벨라를 재촉했다.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는 착한 여자를 하녀장에게 고자질할 마음은 없어. 그렇지만 후작 댁의 하녀복을 입고 성당에 오지는 마. 딱 봐도 그 집 하녀들만 입는 의복인 걸 아는데 다른 사람이 봤다면 넌 바로 끌려가 매질을 당했을 거야.”
“하녀의 의복?”
“그래. 지금 입고 있는 그 옷 말이야. 그러니 다음에 기도하러 나올 땐 숄이라도 두르라고. 이 순진한 아가씨야.”
이럴 수가!
아벨라는 그제야 자신이 분수대에서 주워 입은 옷이 후작 댁에서만 입는 하녀의 의복이란 걸 알고 할 말을 잃었다.

사내는 후작 댁이 사는 저택에 고기를 납품하는 푸줏간 주인이었다. 이름은 조프리로 나이는 오십이 된 중년이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도축해 온 고기가 드디어 일등품으로 판정이 나 저택에 주 1회에 납품하던 걸 2회로 늘렸다며 들떠 있었다. 조프리는 마차에 싣고 온 생고기 한 덩이를 아벨라에게 덥석 안겨 주었다. 갑작스러운 무게감에 아벨라가 옆으로 휘청거렸다.
“부엌으로 가지고 들어가. 난 나머지를 가지고 갈 테니까.”
“네? 아, 네.”
“왜 늦었냐고 하면 마차 바퀴가 진흙에 빠져서 늦었다고 말해. 그 정도 거짓말은 할 줄 알지?”
아벨라는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 안으로 들어갔다. 친절한 사람이었다. 아벨라는 조프리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한 채 무거운 고깃덩이를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음식을 만드느라 바쁜 하녀들은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거기!”
뜨거운 솥 앞에 서 있던 테라가 아벨라에게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녀는 손에 든 국자를 위협스럽게 흔들어 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그, 그게 마차 바퀴가 진흙에 빠져서.”
“그럼 더 서둘렀어야지! 오늘 아침 메뉴는 고기 스튜라고 몇 번을 말했어? 당장 손질해서 이리 가져와.”
테라의 사나운 말투에 아벨라는 고기를 들고 손질할 곳을 찾았다. 그 모습을 본 테라가 답답한지 다른 사람에게 대신 일을 시켰다. 낯선 하녀가 아벨라가 들고 있는 고기를 얼른 받아 가지고 나갔다. 손에 들고 있던 고깃덩어리가 사라지자 아벨라는 뭘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멀뚱히 서 있게 되었다.
“비켜! 거기서 뭘 하는 거야?”
누군가가 그녀를 밀치며 소리쳤다.
“감자! 감자가 부족해. 손질해 놓은 감자 없어?”
“정신들 차려. 오늘 아침엔 왜들 이렇게 우왕좌왕이야? 벌써 여덟 시야. 후작님의 식사가 조금이라도 늦으면 굶어야 한다는 거 몰라? 일들 이렇게 할래?”
열 명이 넘는 하녀들이 각자 맡은 아침 준비를 하며 소란스럽게 난리를 쳤다. 그때 테라가 마른 수건을 아벨라에게 던졌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접시라도 닦아. 얼룩 남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테라의 말에 아벨라는 허리만큼 높이 쌓여 있는 접시들을 닦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하는 일이라 서툴고 불안했지만 테라가 말한 대로 얼룩을 남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가 닦은 접시 위에 음식이 담기기 시작했다. 그 일도 얼마나 부산스럽게 진행되는지 하녀들은 서로를 향해 주의를 주고 비난을 하며 제대로 음식을 담으라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자. 후작님께서 식사를 하러 오셨다. 다들 식당으로 이동들 해.”
주방장의 말에 하녀들이 앞치마에 두 손을 깨끗이 닦은 뒤 음식이 든 접시를 들고 제각기 부엌을 나갔다.
하녀들은 복도까지만 음식을 나른다. 나머진 그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주방장들이 접시를 받아 최종적으로 음식 상태와 모양을 확인한 뒤 집사에게 건넨다. 귀족이 식사하는 곳에는 집사와 지정된 주방장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사이 나머지는 모두 전원 기립 상태로 부엌에서 대기한다. 중간에 음식이 맛이 없다고 물리거나, 다른 걸 주문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늘은 특별한 문제가 없는 듯 조용히 식사 시간이 흘러갔다.
“식사가 끝나셨다는구나. 다들 주방 정리한 후 아침 식사들 해.”
주방장의 말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겨우 아침인데 삼시 세끼를 만든 것처럼 온몸이 피곤하다는 누군가의 말이 이어졌다.
“이거 다 정리하다 보면 또 점심 식사 시간이 돌아올 텐데. 어휴, 오늘도 그냥 스튜나 만들어 먹자.”
“오늘도 스튜야? 일주일 내내 스튜만 먹다니 이러다 쓰러지겠어.”
“바쁜 걸 어떡해? 다들 틈틈이 빵이라도 열심히 먹어서 허기를 달래도록 해.”
테라의 말에 너 나 할 것 없이 다들 불만을 토로했다.
“후작 댁 하녀라고 해서 굶고 살진 않을 거라고 부러워했는데 실상은 빵 하나 넉넉하게 먹기 힘드니.”
“그래도 우리처럼 운 좋은 하녀들도 없지 않니? 난 파티가 있는 날은 아침부터 신나 죽겠어. 고급 샴페인과 달콤한 케이크. 넘쳐 나는 고기들을 전부 먹을 수 있잖아.”
“남이 먹다 남긴 건데도?”
“입도 안 대고 버리는 게 얼마나 많은데? 그 정도면 차려 놓은 산해진미지.”
누군가가 앞치마를 다시 동여매고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 앞에 서 있던 아벨라는 자연스럽게 설거지를 돕게 됐다. 아침 식사만 한 것치곤 방대한 양의 접시가 줄줄이 설거지통에 쌓였다.
“이게 고작 한 명이 먹은 거라니.”
하녀 세 명이 달라붙어 통에 물을 받고 접시를 씻고 닦았다. 마지막으로 테라가 마른 수건으로 접시를 닦아 내려놓자 그들 손에 식은 스튜가 한 그릇씩 놓였다. 하녀들은 부엌 안에서 각자 앉을 곳을 찾아 스튜를 먹었다.
“떠먹을 것도 없는데 숟가락은 왜 주는 거야?”
누군가 투덜댔다. 그러고 보니 아벨라에게 주어진 스튜 그릇 안에도 건더기는 보이지 않았다. 단시간 안에 만들기 위해 건더기는 일부러 뺀 것이다. 아벨라는 스튜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거 안 먹을 거니?”
테라가 대답도 듣지 않고 아벨라의 스튜 그릇을 빼앗아 갔다. 한 그릇이라도 더 먹어야 버틸 수 있다는 걸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는 그녀였다.
“아까 보니 일하는 게 엄청 서툴던데, 배정을 다시 받아야 하는 거 아냐?”
테라는 열심히 숟가락으로 스튜를 떠먹으면서 빠르게 물었다.
“얘, 너 말이야.”
아벨라는 테라를 쳐다보았다. 촌스러운 붉은색 머리를 질끈 동여맨 테라는 제법 호리한 몸매를 가진 소유자였다. 그녀는 스튜가 묻은 숟가락으로 아벨라를 가리켰다.
“너. 부엌일해 본 적 없지?”
아벨라는 엉겁결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길에 버려진 옷을 입고 이곳까지 오게 됐다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일손이 부족해서 다섯 명이 새로 오기로 했었는데 그중 하나가 넌가 보네. 이름이 뭐야? 나이는?”
“이름은 아벨라. 아벨라 모리스예요.”
“그래. 아벨라. 난 테라라고 해. 부엌일은 직접 지원한 거니?”
아벨라가 역시나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