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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문이 열리면 1권
8화
#3 (2)

아벨라는 노파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박쥐가 사람도 먹어요?”
“박쥐의 모습을 한 뱀파이어가 사람을 먹지. 생명의 기원인 인간의 피를 말이야.”
“피를요?”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이야. 우리 집시들은 불행하게도 그들의 역사를 잘 알고 있어.”
마침 다른 집시가 뜨거운 물을 가져와 아벨라에게 건네주었다. 아벨라는 오랜만에 느끼는 온기를 반기며 컵 안의 물을 호오, 호오 불어 마셨다. 그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착하고 순수해 보여 노파는 그녀를 더욱 챙겼다.
“행색은 우리와 비슷한데 무리가 없는 걸 보니 떠돌이야?”
아벨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가 생겨 아빠를 잃어버렸어요. 아빠를 만나러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길도 잃어버렸구요. 몰골이 이러다 보니 번번이 마을에서 쫓겨나서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어요.”
“발목의 족쇄는?”
아벨라는 두 발을 움츠렸다.
“귀족의 저택에 잘못 들어갔다가 그만…….”
노파는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큰 곤욕을 치렀겠구나. 듣지 않아도 알겠어. 족쇄를 보고 도망친 하녀이거나 노예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 다행이야. 아들들아, 이리 와 아가씨 발목에 있는 이 흉측한 것 좀 떼어 내거라.”
노파가 저 멀리 있는 집시들에게 말하자 사내 둘이 즉시 도구들을 들고 왔다. 족쇄가 얼마나 튼튼한지 두 명이 그것을 풀어내는 데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아가씨는 이제 어디로 가? 우리는 바로 떠날 생각인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이곳이 어디예요?”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런던이요.”
“도시는 우리가 가는 곳은 아니야. 하지만 우리 목적지는 그 방향과 비슷해. 어때? 근처까진 함께 가도 좋은데 태워 줄까?”
“정말요? 그래도 돼요?”
“물론이지.”
아벨라는 기쁜 마음에 펄쩍 뛰며 노파를 바라봤다.
“고마워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 전에 몸은 좀 씻고 출발해야겠다. 이유는 알지?”
아벨라는 부끄러움에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코를 찌르는 악취가 몸에 배어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속적인 걸 즐기지 않아. 돈이 없다는 얘기지. 그래서 아가씨에게 새 옷을 사 줄 수는 없어.”
“전 그런 걸 바라지 않아요.”
“걱정하지 마. 대신 이곳 어디에서 몸을 씻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우린 어느 지역에 뭐가 있고 누가 살며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거든. 날이 가물 때 어디서 물을 길어 와야 하는지 알고 민둥산 어디에서 나무가 자라고 있는지를 안다는 말이야.”
노파는 인자하게 웃었다.
“몸을 씻고 입은 옷을 빨면 몰골도 나아지겠지. 지금 몰골은 딱 부랑자야.”
노파는 아벨라를 마차로 안내했다. 아벨라는 떠나는 마차 안에서 여전히 나무 주변을 맴도는 박쥐들을 바라보았다. 정말 많은 수였다.
“할머니. 박쥐가 제 몸을 덮고 있었다고 했죠?”
“온몸에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 있었다는구나. 상상만 해도 징그럽고 흉측해.”
“정말 저를 먹으려고 했던 걸까요?”
“포유동물로서 유일하게 날개가 있는 게 저것들이야. 이빨을 가지고 있고 사람처럼 새끼를 낳지. 수가 많았으니 물고 뜯었다면 넌 정말 죽었을 거야.”
먹으려고 달려든 건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이미 밤새 먹혔을 테니까. 그럼 이유는 단 한 가지. 아벨라는 멀어지는 박쥐 떼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날 도와준 거야. 추위를 이겨 내라고 온기를 나눠 준 거야.’
아벨라는 마음으로나마 나무 위를 비행하는 박쥐 떼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박쥐 떼는 그런 아벨라의 마음을 느꼈는지 두 번 더 나무 주변을 비행하다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박쥐들이 간 곳은 어디일까.
아벨라는 사라진 박쥐들을 바라보며 그곳을 떠났다.

런던으로 다시 돌아왔다.
얼마 만에 되돌아온 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집시 무리는 그사이 정이 들었는지 아벨라를 런던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들의 일정에서 벗어난 배려였다.
“자신감을 가져. 도시가 아무리 화려하다 해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별일 없을 테니까.”
“그럴게요.”
“늘 아가씨의 머리카락이 눈에 밟혔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그것도 다 사연이 있는 거겠지? 이걸 쓰도록 해. 한결 나을 거야.”
노파는 자신의 목에 두른 스카프를 그녀의 머리에 예쁘게 씌워 주었다.
“새 머리카락이 날 때까지 두르고 있어. 자칫 나쁜 사람들이 아가씨의 이런 단점조차 물고 늘어질 수 있으니 될 수 있으면 잘 숨기고. 알겠지?”
아벨라는 고마움에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단정하게 차려입으니 이제 좀 사람다워 보이는구나. 어쩌면 폭우가 내리던 날, 박쥐들이 아가씨를 덮친 건 우리가 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짐승도 보는 눈이 있거든.”
노파의 칭찬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지만 아벨라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큰 신세를 졌는데 감사의 표시를 할 게 없어서 어떡해요? 보름 동안 먹을 거 입을 거 전부 공짜로 받았는데. 그것도 마차의 상석에 편히 앉아서요.”
“음식이 넉넉지 못해서 배불리 먹지 못했잖아. 더구나 아가씨가 먹은 건 이 늙은이의 하루 식사량도 되지 않는 소량이었어.”
노파는 아벨라에게 축복의 기도를 해 주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으나 모두 그녀를 위한 것임을 느꼈다.
“오래 굶고 산 사람들은 종종 먹는 법을 잊기도 한다고 하더구나. 그래도 억지로라도 음식을 먹어야 해. 자신이 심하게 마른 걸 알고 있지?”
“네.”
“지금처럼 새 모이 먹듯 하지 마. 먹고사는 게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아빠를 찾으려면 잘 먹고 몸이 튼튼해야 돼.”
“명심할게요. 아 참, 아빠를 찾고 나면 만나러 가도 돼요? 그동안 저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신세를 갚고 싶어요.”
“우린 집시야. 세상을 떠돌지. 인연이 되면 만나게 될 거다. 자, 이건 선물.”
노파는 낡은 신발 한 켤레를 내밀었다.
“처음 만난 날부터 계속해서 맨발로 다닌 게 마음에 쓰였어. 발이 이미 상처투성이지만 여긴 도심이라 맨발로 다녔다가는 사람들의 조롱을 받을 거야. 새 신발은 아니지만 이거라도 신고 다니도록 해.”
아벨라는 울컥하는 마음에 노파를 와락 안았다.
“고마워요. 이 따뜻함,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노파는 진저리를 쳤다. 아벨라는 아차 싶어 뒤로 물러섰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벨라는 갑자기 차가운 몸의 소유자가 되어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얼음장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불과 며칠 전, 집시들과 지내면서였다.
“죄송해요. 제 몸이 차가운 걸 또 깜박했어요.”
멋쩍게 웃는 그녀를 보며 노파도 이 빠진 입을 벌리고 웃었다. 그래도 포옹의 한파가 아직 남았는지 노파는 마차에 오르며 몇 번 더 어깨를 떨었다.
“잘 가요, 할머니.”
마차가 출발했다.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마차를 바라보며 아벨라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행색은 여전히 초라했지만 과거처럼 기가 죽어 있진 않았다.
가끔 눈이 마주친 행인이 형편없게 마른 그녀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무관심한 사람들이었지만 아벨라는 그 무관심을 기뻐하며 서둘러 항구 쪽의 선술집으로 향했다.

항구 주변을 돌아 몇 시간을 헤맨 뒤 드디어 그곳을 찾아냈다. 아빠와 묵었던 선술집을.
“여기야. 이곳이 분명해.”
선술집은 달라진 게 없었다. 기억 속 그대로였다. 아벨라는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나 두려움을 느꼈지만, 용기를 내 낡은 나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선술집 주인은 밤새 영업으로 지저분해진 가게를 정리 중이었다.
“누구쇼? 아직 가게 문 열지도 않았는데.”
그가 갑자기 들이닥친 아벨라를 보고 의아한 눈을 했다. 차림새는 이곳 항구에 사는 사람들과 비슷한 초라한 행색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건 없어 보였으나 너무 마른 몸이라서 시선이 갔다. 아벨라는 그를 보고 놀라움과 충격을 동시에 받았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주인도 그대로야. 선술집만 그대로인 게 아니었어.’
시간은 그녀에게만 변화를 준 모양이다. 이곳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변한 건 자신뿐, 모든 게 그대로였다.
“궁금한 게 있어요! 하루 전! 아니, 며칠 전! 아니, 날짜는 중요하지 않아요. 여기 이 층에 어린 딸과 함께 묵었던 손님 기억나죠? 방값을 못 내서 굶주리다가 다리가 잘린 채 돌아온 남자 말이에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그 남자의 시신은 어떻게 됐어요? 경찰이 처리했나요? 장례는요? 혹시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어요?”
주인은 속사포처럼 쏟아 내는 아벨라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얼굴을 했다. 답답한 아벨라가 참지 못하고 무작정 이 층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어어? 이봐요! 거긴 왜 올라가는 거야?”
주인은 깜짝 놀라 그녀를 후다닥 뒤따라왔다.
“이봐요! 아가씨! 대체 뭘 하는 거요? 여긴 손님들이 자고 있는 곳이오!”
“알아요! 나도 여기에 묵었던 손님이에요. 내가 기억 안 나요? 꽃을 팔아서 밀린 방세를 지불하던 열한 살짜리 여자아이를 못 알아보겠어요? 내가 바로 그 아이예요!”
주인은 기가 막혀 했다. 그는 아벨라를 막아선 채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허 참. 이 아가씨 보게. 지금 자신을 열한 살짜리 아이라고 하는 거요? 그래서 나보고 옛날 일을 기억해 내라고?”
“제발! 그날 죽은 사람이 바로 내 아빠예요. 살인사건이 일어나서 여기 선술집 장사에 큰 방해가 됐다는 건 알지만 부디 알려 주세요. 그의 시신이 어떻게 됐는지를요.”
아벨라의 간곡한 요청에 주인은 그녀의 전신을 쭈욱 훑었다.
“그러니까 아가씨 말은 여기 내 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서 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아가씨의 아버지다?”
“맞아요.”
“근데 내 집에 묵은 건 어제도 아니고 그제도 아닌 열한 살 때라고?”
주인은 기가 막힌 얼굴로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미친 여자 아니야? 멀쩡히 장사하는 집에 와서 갑자기 살인사건이 나지 않았냐니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이야? 누구 장사 망하게 할 일 있어? 우리 집에선 그런 일 없었으니까 당장 나가!”
문도 안 연 아침부터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들이닥친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있지도 않은 살인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났다고 하다니 주인은 기분이 나빠져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다.
“내 말 안 들려? 어서 나가지 못해?”
“그런 일이 없었다뇨! 분명 이곳에서 살인이……!”
“이게 아직도!”
주인은 그녀를 쫓아낼 빗자루를 찾았다. 아벨라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다시금 충격을 받았다. 항구도 그대로고 선술집도 그대로고 주인도 그대로다. 그런데 살인사건만 없었다는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앞뒤가 맞지 않아. 아빠는 분명 이곳에서 마티어스에게 목이 잘려 죽었어! 그런데 왜!’
그녀는 곧장 주인을 밀쳐 내고 자신이 묵었던 방의 문을 확 열어젖혔다. 무례하고 뻔뻔스럽다는 걸 알지만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어 그랬다.
그런데.
닫힌 문을 열자 그곳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 뿌연 먼지가 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매트도 없는 침대는 다리 한쪽이 부러진 채 벽에 세워져 있었고 창문은 실타래처럼 거미줄이 반 이상 내려와 빛을 가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날의 아수라장을 누군가 치웠다고 하기엔 쌓여 있는 먼지들이 너무나도 안정적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빠는 분명 여기서 살해당했어. 그런데 어떻게 여긴 이렇게 멀쩡할 수가 있는 거지?”
“이 방은 손님을 안 받은 지 오래됐어. 보고도 몰라? 수북이 쌓인 이 먼지들이 안 보이냐구!”
“그럴 리 없어요! 아빠는 여기서 살해당했어요! 분명 이 방이 맞다구요! 당신! 내 아빠의 시신을 어떻게 한 거야? 설마 살인자들과 한패인 거야? 그들과 한패지? 그렇지?”
“이 여자 진짜 안 되겠구만! 멱살을 잡고 내쫓아야 그만둘 거야? 이리 나와! 나오라구!”
주인은 아벨라의 뒷덜미를 잡아채 험악하게 끌어냈다. 아벨라는 반항했지만 완강한 힘에 밀려 그대로 밖으로 쫓겨났다. 정녕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인가. 그 어떤 일도? 흙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아벨라는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닫힌 선술집의 문을 미친 듯이 두들겼다. 혼돈이 그녀의 이성을 집어삼켰다. 선술집도 그대로고 주인도 그대로인데 오직 그날의 일만 없었던 일이라니 혼란이 밀려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주인이 양동이에 가득찬 물을 확 뿌렸다.
촤아아악.
“걸레 빤 더러운 물이다. 물벼락을 맞았으니 이제 정신 좀 차려, 이 미친 여자야. 또 소란 피우면 그땐 매질을 할 테니 알아서 해. 알겠어?”
주인은 재수 없다며 아벨라의 얼굴을 향해 양동이를 휘둘러 보이는 위협을 가하더니 다시 문을 닫았다.
콰앙.
부서져라 닫힌 문 앞에서 아벨라는 두 눈만 껌뻑거렸다. 선술집 주변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의 비웃음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벨라는 물벼락에 정말 정신을 차렸는지 떨리는 두 손을 꾹 움켜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가 그녀에게 끈적한 농담을 날렸다.
“아가씨. 옷 말릴 곳이 없다면 이리로 와. 내 방 침대서 아주 바짝 말려 줄게.”
“그건 안 되지. 저 녀석 집엔 마누라가 있어서 머리채 잡히기 십상이야. 걸레 빤 물을 뒤집어쓴 아가씨를 받아 주는 놈은 아무도 없을 테니 편하게 나한테 오는 게 나아. 우리 집엔 빵도 있어. 어때? 하룻밤 같이 있는 건? 응?”
아벨라는 농담을 날리며 추근거리는 사내들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 동네를 뛰쳐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