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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문이 열리면 1권
7화
#3 (1)

아벨라는 마을을 벗어나 들판을 배회 중이었다. 그녀는 마구간에서 하인들에게 폭행을 당한 뒤,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말의 피를 흡혈하고 스스로 마구간을 걸어 나온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왜 들판을 걷고 있는지도 몰랐다. 단지 발목에 걸려 있는 족쇄의 쇠사슬이 끊어져 있는 걸 보고 자신이 운 좋게 탈출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 마구간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었을까? 누군가의 도움? 아니면 그들이 기절한 나를 이곳에 버린 걸까?’
이유가 뭐든 무자비한 폭력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아벨라는 족쇄를 풀려고 애를 썼지만 발목에 단단히 채워진 족쇄는 열쇠가 없는 한 결코 풀어지지 않을 듯 꼼짝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족쇄와 한 몸이 되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갈 곳이 없어 노숙을 했다. 들판에서 서늘한 추위와 어둠을 견뎠고 이슬을 핥아 수분을 섭취했다. 머리카락과 몸에서 거북한 냄새가 심하게 났다. 몰골도 형편없는데 좋지 않은 냄새까지 풍기니 부랑자가 따로 없었다. 아벨라는 흙바닥에 주저앉아 발목의 쇠사슬을 만지작거렸다.
“……아빠.”
세상에 혼자라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슬펐다. 천애고아가 됐다고 생각하니 이대로 죽고만 싶었다.
“이제 어떡하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계속 이렇게 들판을 걸어 다니며 방황할 수도 없는데 큰일이었다. 아벨라는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용기를 내 마을로 들어갔다. 밤은 모습을 감춰 준다. 얼룩진 옷도, 타다 만 머리카락도, 보기 흉한 족쇄도.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에구머니. 깜짝이야. 웬 거지가 골목에 숨어 있어?”
“뭐라고? 거지?”
“저 흉측한 몰골 좀 봐.”
“죽은 거 아냐? 살아 있는 게 맞아?”
“살아 있어. 우리 목소리를 듣고 도망치잖아. 얼마나 굶고 살았길래 몸이 저렇게 삐쩍 말랐지? 숨을 쉬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인 몰골이네.”
“다가가지 마. 저런 떠돌인 전염병을 옮길지도 몰라. 더 큰 부정이 타기 전에 당장 마을에서 내쫓아야 해!”
그녀를 본 사람들은 빗자루와 몽둥이를 휘둘렀다. 음식을 구걸한 것도 아니고 허락 없이 동네 우물물을 마신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은 반응으로 아벨라를 냉대했다. 심술궂은 누군가는 이유 없이 돌을 던지기도 했고 질이 안 좋은 사내들은 먹을 것을 내밀며 그녀를 잡아끌기도 했다.
아벨라는 결국 마을에서 쫓겨나듯 도망쳐 사람이 없는 곳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어디로든 도망쳤다. 발길 닿는 대로 달리고 뛰었다. 고립은 그렇게 타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난관을 헤쳐 나갈 지혜가 없으니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아벨라는 어두운 곳을 찾아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안 돼. 그러지 말아요. 때리지 말아요. 나는 아직 어려요. 난 잘못한 게 없어요.”
아벨라는 인적이 드문 야산에 숨어 홀로 악몽과 싸웠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둠은 환상을 보여 줬고 무서운 마귀가 되어 그녀를 흔들고 옥죄였다.
“싫어. 무서워. 그러지 마. 내게 돌을 던지지 마.”
뜨거운 열이 온몸을 달구고 식은땀이 흘러도 누구 하나 그녀를 도와주거나 돌봐 주는 이가 없었다. 아벨라는 꿈속에서조차 아빠를 찾으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목이 없는 시체는 그녀에게 어떤 말도 해 주지 못했다.
“마티어스.”
아벨라는 그 이름을 떠올렸다. 그날, 야만적인 폭행이 자행된 그 방 안에서 아빠는 분명 그를 그렇게 불렀다. 마티어스라고. 아벨라는 그를 생각하며 분노에 몸을 떨었다.
문제는 그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가 누군지, 뭘 하는 사람인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아벨라는 얼굴도 모르는 그를 어떻게 찾을까 골몰했다. 그를 찾을 단서가 없었다. 단서가 없다. 아는 게 없다. 그것은 아벨라를 또다시 고뇌에 빠지게 만들었다.
“단서를 찾아야 해. 단서가 필요해. 그를 찾아낼 단서가!”
아벨라는 어둠 속에서 어떻게 하면 그를 찾을 수 있을까 고심했다. 그의 몸짓, 행동, 목소리, 그리고 그가 풍겼던 그만의 냄새까지.
“아.”
아는 건 전부 기억해 내야 한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떠올렸던 아벨라가 문득 해결법을 찾은 듯 표정을 바꿨다.
“그래. 냄새. 나는 그의 냄새를 기억해. 왜 그걸 몰랐을까? 난 그의 냄새를 알아.”
아벨라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것은 어둠을 마시듯 폐부 깊숙이까지 들어가 그녀의 지혜를 깨웠다. 잊었던 본능을 두드렸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의 냄새는 맡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런던이라면. 그가 머문 선술집이라면 그의 냄새를 찾아 추적할 수 있지 않을까?
“런던의 그 선술집.”
불현듯 선술집이 생각났다.
“그래. 그곳으로 가야 해. 그곳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야. 그곳을 시작으로 마티어스를 찾아야 해.”
아벨라가 고개를 틀었다. 옅은 붉은색으로 바뀐 그녀의 눈동자가 런던을 향했다. 저 안에 그가 있다. 그의 냄새가 저곳에서 피어나고 있다고 후각이 알려 주고 있었다. 아벨라는 자신의 후각을 믿었다. 아빠와 숲에서 살 때 그녀의 후각은 천재적으로 빛났다. 저 먼 천 리 길 밖에서도 다친 동물을 용케 찾아낼 줄 아는 능력이 있었으니 말이다.
아벨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숙으로 인해 형편없는 몰골의 그녀가 숲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눈빛을 가진 채로 런던을 향해 걸었다. 런던으로 가면 만나게 될 것이다. 그를 만나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다. 아벨라는 반드시 그래야만 해, 라는 말을 내뱉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족쇄에 달린 쇠사슬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그녀와 함께 움직였다.

런던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대체 자신은 어디까지 흘러와 있던 걸까. 런던항의 선술집에서 어디까지 떠나와 있는 건지 가늠되지 않는다.
폭우가 내렸다. 오직 런던으로 가야 된다는 생각만으로 길을 나섰던 그녀는 자연과 날씨에 무책임하게 노출된 상태로 고생을 많이 했다. 차가운 바람을 견뎌 낼 옷은 얇은 누더기 하나뿐, 신발도 없어 흙과 돌에 치인 발은 생채기투성이였고, 오랫동안 씻지 못한 얼굴은 땟국물로 이목구비를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아벨라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오로지 마티어스만 생각하며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았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을까. 두통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미약한 두통이라 치부하고 런던으로 가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버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벨라는 잠시 쉴 곳을 찾다가 썩은 나무 기둥 안으로 몸을 피했다.
폭우는 천둥 번개를 동반해 하늘까지 가려 버렸다. 빛이 없는 세상은 무서웠다. 아벨라는 나무 기둥 속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몸의 체온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들판에서 온기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세상을 집어삼킬 듯 쏟아지는 폭우 속에선 더욱이 힘든 일이었다. 아벨라는 두 팔로 있는 힘껏 자신의 몸을 감싼 후 덜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썼다. 전신에 추위를 이기지 못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추위를 버텨 보려고 이를 악물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아벨라는 두통과 오한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푸드드드득.
그때 어둠 속에서 새의 날갯짓과 비슷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정체 모를 무언가가 나무 기둥 안으로 쏙 들어왔다. 그것은 잔뜩 몸을 웅크린 채 힘겨워하는 아벨라의 손등에 가만히 앉더니 끼룩, 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새?”
보이지 않았지만 손등 위에 느껴지는 건 분명 조류의 두 다리였다.
“너도 비를 피할 곳이 없었나 보구나.”
아벨라는 작은 날짐승을 향해 말했다. 새는 아벨라의 손등에서 훌쩍 날아 이번에는 어깨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마치 지치고 슬픈 그녀를 위로하듯 한참 ‘끼리릭, 끽끽’ 하고 기이한 소리를 냈다. 새의 소리치곤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지만 어둠 속에 혼자 있을 때보단 한결 위로가 됐다.
“그래. 우리 함께 이 비를 피하도록 하자. 자고 일어나면 비는 그쳐 있을 거야. 그러니까…….”
아벨라는 어깨 위의 새에게 죽기 전 아빠가 한 말을 해 주었다.
“그러니까 울지 말고 오늘 밤을 버텨 내야 해. 그러면 난 여왕이 되어 있을 테니까. 눈을 뜨면 이 악몽에서 벗어나 여왕이 되어 있을 테니까 말이야.”
아빠는 늘 그 말을 해 주었다. 자장가처럼 따뜻하고 사랑의 고백처럼 달콤한 여왕 이야기. 아벨라는 주문처럼 그 말을 되뇌다가 결국 스르륵 눈을 감았다.

푸드드드득.
수많은 새들이 한꺼번에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쫓아내도 도망가지 않고 주변을 빙빙 도는 그것들은 놀랍게도 수백 마리의 박쥐 떼였다.
“이 흡혈박쥐 새끼들! 대체 이 많은 박쥐들이 어디서 나타난 거야?”
나무 기둥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건 다름 아닌 흑색의 박쥐들이었다. 긴 나무 막대기를 휘두르며 박쥐를 내쫓는 집시가 연신 놀라운 목소리를 내다가 급기야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악!”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또 뭐가 있어?”
“사, 사람이! 사람이 죽어 있어!”
막대기를 휘두르던 집시 뒤로 두 명의 집시가 더 나타났다.
“사람이?”
“나무 기둥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박쥐 무리를 쫓아내고 나니까 거기에 사람이 죽어 있었어.”
집시들이 죽었다는 사람을 향해 고개를 쭉 들이밀었다. 나무 기둥 안쪽에 어린아이처럼 웅크리고 누워 있는 사람이 보였다. 집시 한 명이 나뭇가지를 들어 아벨라를 쿡 찔렀다. 그때까지 날아가지 않고 아벨라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박쥐 한 마리가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 소란스러움에 아벨라가 눈을 떴다. 집시들이 그 모습을 보고 더욱 기겁을 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살아 있잖아! 죽지 않았어!”
집시들의 고함 소리에 놀란 아벨라가 황급히 나무 기둥 안으로 바짝 몸을 피했다.
“뭐, 뭐예요. 당신들……?”
낯선 남자가 나무 기둥 앞을 막고 서 있었다. 그것도 세 명이나. 아벨라는 놀라 비명 같은 목소리를 냈다.
“말을 하잖아! 시체가 아니었어?”
“맙소사! 저 몸으로 살아 있단 말이야?”
집시 한 명이 들판을 향해 누군가를 불렀다.
“대모! 대모, 이리 와 봐요! 여기 이상한 일이 있어요! 어서요!”
늙은 노파 한 명이 그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팔과 목에 크고 작은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노파는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나무 기둥 안에 숨어 있는 아벨라를 차근히 뜯어보았다.
“썩은 나무 기둥 속에 사람이 있었군. 거지가 분명한데. 남자야, 여자야?”
노파가 나무 기둥 안을 보다 자세히 보기 위해 상체를 수그리자 아벨라가 겁에 질려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오오. 진정해. 놀라지 마. 여자였구만. 우린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야. 침착해요, 아가씨.”
노파는 더 이상의 오해가 생기기 전에 자신들이 누군지 설명해 주었다.
“우린 이 지역의 집시들이야. 여기 나무 기둥은 일시적이지만 우리의 숙소였어. 떠나기 전 두고 간 짐이 있어서 그걸 가지러 온 것뿐이야. 안을 살펴봐.”
아벨라는 그 말에 기둥 안을 서둘러 살피다가 정말 짐 하나를 발견했다.
“맞아. 그거야. 우리 생필품이 담긴 짐이지.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나무 기둥 안에 박쥐 수백 마리가 있는 거야. 그것들을 내치고 짐을 꺼내려고 했는데 그 안에 아가씨가 있었어.”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아벨라는 나무 안에 있던 짐을 꺼내 노파에게 내밀었다.
“죄,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침입자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아벨라는 겁먹은 표정으로 즉시 엎드려 빌었다.
“임자 있는 곳인지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밤에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이곳에 들어왔는데 잠이 들었나 봐요. 그러니까…… 너무 추워서…….”
집시들은 갑자기 용서를 비는 아벨라를 보며 뜨악해했다. 노파는 나무 기둥 입구를 막고 있는 남자 집시들을 뒤로 물러서게 했다. 사람을 보자마자 엎드려 비는 행동이 아벨라의 신분을 짐작케 했기 때문이다.
“침입자라니. 그런 매몰찬 말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야.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왔었다면 우리의 친구인 것을.”
노파는 주름진 손으로 아벨라를 일으켜 세워 나무 기둥에서 나오게 했다. 아벨라는 불안한 눈동자를 한참 굴리더니 노파의 손을 잡고 그곳에서 걸어 나왔다. 노파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자신의 낡은 망토를 아벨라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녀가 흠칫했다. 그 모습이 사람의 손길에 익숙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 몸이 얼음장 같구나. 밤새 폭우로 인해 기온이 많이 내려갔는데 용케 잘 버텼어. 자, 다들! 어서 뜨거운 물과 모포를 가져와. 어서어서. 이대로 두다간 아가씨가 얼어 죽겠어.”
노파의 말에 집시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노파는 아벨라를 부축해 작은 불을 피운 곳에 앉게 했다. 아벨라는 거부하지 않았다. 기진한 몸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아가씨. 어디 다친 데나 아픈 곳은 없어?”
아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추워요. 무섭고 많이 추웠어요.”
“그래. 그래. 이제 걱정 마. 우리가 발견했으니까.”
노파는 아벨라의 목을 확인했다.
“다행히 문제는 없는 것 같군.”
“무슨 문제요?”
“동굴에 사는 저것들이 해가 뜬 아침에도 무리를 지어 나왔다는 건 나름대로 문제가 있기 때문이거든. 수십 마리도 아니고 수백 마리잖아. 그런데 저것들이 아가씨와 밤새 나무 기둥 속에 있었다니 의아하고 이상해서 말이야.”
아벨라는 노파가 가리키는 박쥐를 보았다. 나무 주변을 낮게 날고 있는 박쥐 떼들. 그 수는 어마어마했다.
“수가 너무 많아. 끔찍할 정도로. 저것들은 그냥 박쥐도 아니고 흡혈박쥐야.”
노파는 박쥐 떼를 노려보았다. 아벨라는 박쥐를 처음 보았다. 날개가 달린 검은색의 박쥐들은 그녀의 시선이 머물자 묘하게도 소리를 죽이고 조용한 비행을 했다.
“이곳을 빨리 떠야겠어. 우리 말고 아가씨 말이야.”
“저요?”
“박쥐가 아가씨 몸 위에 앉아 있었어. 전신을 틈 없이 덮고 있었지. 이유는 모르지만 이유가 있을 거야. 짐작이지만 먹으려고 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