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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r & Dear 1권
1화
Prologue
“……!”
크게 숨을 들이쉬며 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간신히 작게 악 소리를 내는 것으로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몸은 계속 근육을 긴장시키며 비명을 질러 대는 중이었다.
“흐으, 으…….”
나, 나 방금 죽었었는데. 어떻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가 더듬더듬 제 목을 더듬었다. 아직도 질긴 끈이 자신의 목을 졸라 대고 있는 것 같아 손톱으로 긁어 보기도 했다. 그의 머릿속으로 무시무시한 기억의 잔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꿈인 것 같기도 하였으나 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했다. 그가 저도 모르게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그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야, 안 자고 뭐 해…….”
벌떡 일어난 데다가 흐느끼는 소리까지 내니 같이 잠이 깨어 버렸는지 로니 크로거가 짜증을 냈다. 그 행동에 닐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그는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며 휙 이불을 빼앗아 갔다. 그리고 잠깐 뒤척이더니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잠시 동안 그 잠든 얼굴을 바라보니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몸이 덜덜 떨렸다. 정처 없이 방황하던 닐의 시선이 멎은 곳은 벽에 걸린 홀로그램 시계였다. 날짜와 시간을 확인한 그가 숨도 쉬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뭐에라도 홀린 듯 닐이 비틀비틀 일어났다. 토할 것 같아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은 그는 메모지를 찾아낸 뒤 종이 위에 황급히 글씨를 갈겨쓰기 시작했다. 이별을 고하는 내용을 쓰는 손이 여러 가지 감정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렸다.
패닉에 빠진 상태에서 어찌어찌 글을 다 쓴 뒤 잘 보이는 곳에 메모지를 붙이고는 서둘러 대충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경황이 없어 겨우 지갑 정도만 챙기고 있는데 집 한구석에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원통형의 안드로이드가 기계음을 내며 헤드 위로 글씨를 띄웠다.
[테일러 님, 외출하시나요?]
“쉿……. 쉬잇.”
닐이 필사적으로 조용히 하라는 몸짓을 하자 구형 안드로이드가 조용해졌다. 뿐만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나갈 수 있게끔 보안 해제까지 해 주었다. 그 움직임에 순간 가슴에서 어떠한 감정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사라지고 난 뒤 이 안드로이드가 처할 운명을 잠시 떠올려 본 닐이 잠깐 눈을 감았다. 그가 조용히 문을 열자 마치 자신의 뜻을 안 것처럼 안드로이드가 작게 삐삐 소리를 내더니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돌돌 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닐도 그 어둠에 발을 디디고 섰다. 그는 깨어나기 전 자신이 보았던 것들을 떠올렸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감금, 폭력, 학대……. 마침내 찾아온 비참하고도 참혹한 죽음. 그는 미래에 자신이 살해당하는 데 크게 일조하는 끔찍한 애인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갔다.
Chapter 1 : Tear
“지금 나한테 뭘 하라고?”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닐이 귀를 후볐다. 일부러 제프리에게 이것 보라고 한 행동이기도 했다.
[커피가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커피 머신이 굉장히 상냥한 목소리로 닐에게 알렸다. 그가 제프리를 노려보고 있는 동안 부드럽게 다시 한번 진동이 울렸는데 이상하게도 기계가 마치 아양을 부리는 듯한 느낌이 났다. 가게 주인이 ‘저게 저렇게 좋은 기계였나?’ 하는 미심쩍은 시선을 던지거나 말거나 닐은 못 들은 척 커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나 닐과 안면을 트게 된 지 이제 거의 근 몇 년이 넘어가는 단골 술집 바텐더이자, 친한 지인이자, 원수 같은 제프리 파커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달복달 닐에게 매달렸다.
“닐, 진짜 딱 한 달만 하면 되는 일이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매장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
“그런 쉬운 아르바이트를 왜 하필 나에게 하라고 해?”
척 들어 봐도 의도가 불순해서 꺼지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으며 닐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저런 말을 듣고 있자니 아무래도 자신은 주인공 같은 존재는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 회귀란 걸 한 뒤에도 이러고 있지…….
우울한 감성에 푹 젖은 그는 조용히 따뜻한 커피 잔을 어루만졌다. 다시는 제 인생에 빛이 들지 않을 거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전 남자친구에게서 도망치긴 하였으나 그나마도 갈 곳이 없어 가장 친한 친구의 술집에 숨어 있는 상태라 더욱 그랬다. 게다가 제프리가 자신의 유일한 친구란 건 로니 크로거도 잘 안다. 닐은 그 유일한 친구의 간절한 시선을 무시하려고 애쓰며 한숨을 푹 쉬었다.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 닐 테일러는 회귀를 했다.
마치 드라마나 영화, 혹은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죽었다가 눈을 뜨니 제 침실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처음에는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무작정 집에서 뛰쳐나와 한참을 현실 도피를 했다. 그러나 차가운 현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아니, 정확히는 겨울 한밤의 차디찬 바람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보통은 그렇지 않은가. 회귀를 한 뒤 기쁨과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과거에 잘못했던 일이나 실수를 바로잡고, 구하지 못했던 사람을 되살리고……. 아니면 미래의 정보를 이용해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된다거나. 그러나 그 모든 일에 닐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보내 주려면 아예 10년쯤 전으로 보내 줄 것이지, 지금 시점에서 부모님은 돌아가신 지 오래였고 빌어먹을 로니 크로거와 사귀기 전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로또 번호 따위를 기억하고 있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차라리 자신이 마지막에 이런 회귀 따위는 하지 말고 그대로 숨이 끊어져 저승으로 가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마지막 죽음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았던 탓이다.
그는 죽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에 살해당했다. 이젠 자신이 질린다면서 전 남자친구가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 주는 척 어떤 변태에게 팔아넘긴 탓이었다. 그 변태가 브레스 컨트롤을 한답시고 마구잡이로 목을 졸라 버린 끝에 살해당하고 말았는데, 심지어 회귀를 했기 때문에 어디 가서 말도 못 하는 죽음이었다. 이제는 목에 무언가 감기는 것에 트라우마가 생겨서 이렇게 날이 추워도 목도리도 못하고 목걸이는 꿈도 못 꿨다.
그래도 다시 그렇게 죽기는 싫어 멋대로 이별을 선고하고 도망쳐 나온 건데 그나마 도움을 부탁할 사람이 제프리 파커밖에 없다니. 그것도 매우 불순하고도 노골적인 의도가 보이는 제안을 하는 제프리 파커라니…….
아무리 노력해도 이 진창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자 새삼 무거운 감정이 진흙 더미처럼 마음을 덮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프리는 옆에서 열심히 닐을 설득하느라 떠드는 걸 쉬지 않았다.
“내가 괜히 추천하는 줄 알아? 넌 얼굴도 되고, 몸도 되고…… 무엇보다 그게 네 적성에 맞으니까 그러지.”
제프리가 입에 발린 말들을 해 댔다. 힘이 빠진 닐이 아무렇게나 물었다.
“내 적성이 뭔데?”
“너 남에게 보여 주는 거 좋아하잖아.”
아무 생각 없이 대꾸했다가 돌아온 대답에 닐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더니 저를 바라보는 눈이 진심이라 이제는 말할 기운까지도 떨어졌다. 정작 제프리는 방금 상대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이기에 닐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하긴 엄연히 따지자면 거짓말도 아니지……. 자신은 분명 보여 주는 걸 좋아하긴 했다. 남의 시선을 받는 것이 기쁨이요, 때로는 쾌감이었다. 전 애인들과도 종종 그런 종류의 관계를 즐겨 왔었고.
그러나 제프리가 말하는 그런 ‘보여 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성질인 것이다. 지난 일을 떠올리다가 닐이 고개를 저었다.
“닐, 제발 한 번만 도와줘, 응?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절박했던 제프리가 이제는 숫제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닐도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프리가 아니면 갈 곳 없는 자신을 재워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아직은 오지 않은 미래에 그는 자신이 로니에게서 도망칠 때마다 숨겨 주기도 했었다. 돈도 몇 번 빌려줬었고……. 물론 그만큼 저에게 큰 엿을 먹이긴 했지만…….
“대체 무슨 아르바이트이기에 적성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거야?”
우울한 감성에 아직 푹 젖어 있고 싶었던 닐이 짜증을 부렸다. 뭔지 들어나 보자는 생각에서였으나 막상 그에게서 무슨 사정인지 실제로 들어 보니 듣지 말걸 하는 후회만 들이닥쳤다. 어이가 없어서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닐이 따졌다.
“나보고 네가 망가트린 섹스로이드인 척하라고?”
“섹스로이드가 아니라 안드로이드!”
어처구니없는 제프리의 변명을 들으며 닐이 잠시 인내했다. 인내는 짧았다.
“미쳤어? 돌았어? 정신 나갔어?”
“욕하려거든 하나만 택해 줄래.”
“한 대 때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
제프리는 시내 외곽에 위풍당당하게 세워진 ‘Tear’라는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겉은 일반 호텔 같아도 실제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고급 회원제 SM클럽이었다. 일단 들어가 보면 완전 끝내준다고는 하는데 멤버십 조건이 몹시 까다로워서 일반인인 닐은 제프리처럼 아는 사람으로부터 알음알음 그곳이 어떻다더라 들어 보기만 하는 수준이었다.
아무튼 이번에 그 ‘Tear’의 사장이 성인용품점에 정식으로 출시하기 전 큰마음 먹고 안드로이드 하나를 샘플용으로 하나 들여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제프리가 순간의 욕심으로 잠시 ‘손장난’을 쳤다가 안드로이드를 고장 내서 진열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닐이 대신 안드로이드인 척해 달라는 기가 막히는 부탁이었다.
“닐, 진짜 딱 한 달만이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응?”
제프리가 마치 로봇처럼 아까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아니, 사실 듣기 싫어 딴청을 피우는 동안 제 귀에다 대고 저 똑같은 말을 한 다섯 번쯤 반복한 것 같기도 했다. 어이가 없어서 닐이 쾅 커피 잔을 내려놓자 제프리가 약간 움찔했다. 그러더니 제 발이 저려 지레 묻지도 않은 다른 사정 이야기를 훌훌 털어놓았다.
“제발 나 좀 살려 주라. 그 안드로이드, 엄청나게 비싼 거라서 내가 수습하지 못하면 사장이 내 목을 졸라 죽이려고 할 거야. 그 사람 마피아랑 연줄도 있는 사람이란 말이야!”
목을 졸라 죽일 거란 이야기에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닐이 더 기겁했다.
“미쳤어, 마피아랑 엮인 곳에 내가 내 발로 들어가게! 아니, 애초에 왜 그런 짓을 해!”
“아, 아니, 진짜 마피아와 엮였다는 건 아니고 그냥 소문이 그렇다구……. 그리고 안드로이드가 너무 섹시하게 생긴 걸 어떻게 해…….”
반성도 없이 제프리가 터무니없는 변명만 늘어놓았다.
“이 정신 나간 인간아, 궁금해서 건드려 본 건 그렇다 치자. 대체 왜 안드로이드 거기에다 팔을 집어넣는데!”
닐이 조목조목 따지고 들자 제프리가 이제는 변명하는 것도 포기하고 숫제 엉엉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가만 들여다보니 진짜 우는 것 같기도 했다.
닐이 알기로 이맘때쯤의 제프리는 다소 사치하는 습관도 있었고 애인에게 죽고 못 살아서 이것저것 가져다 바치느라 여기저기 빌린 돈이 꽤 많았다. 그래서 주말에는 술집 바텐더를, 평일에는 그 ‘Tear’에서 열심히 일을 하며 돈을 갚는 게 아니던가. 게다가 무엇보다도 그가 ‘Tear’에서 일하기를 고집하는 까닭이 다 있었다.
그는 온갖 하드한 것을 죄다 좋아했다. 스팽킹, 채찍질, 욕설, 걷어차기 등 비슷한 것만 봐도 눈이 회까닥 돌곤 했다. 아픈 건 딱 질색인 닐은 그런 걸 즐기는 제프리를 절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런 인간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비싼 안드로이드에 피스트 퍽을 하느라 작살을 내 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단순히 잡심부름을 하는 기능의 안드로이드조차도 쉬이 살 엄두가 안 나도록 비싸거늘…….
그것도 들어 보니 그냥 안드로이드도 아니었다. 무려 섹스로이드. 거의 사람과 비슷한 훌륭한 수준의 안드로이드란다. 하긴 분명 이맘때쯤에 그런 끝내주는 안드로이드가 출시되기는 했었지……. 아무튼 간에 골이 아파 닐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지끈지끈 두통이 오기 시작했다. 제프리는 이제는 본격적으로 소리 내어 징징 울었다. 이제 영업시간이라며 술집 주인이 짜증을 내기 시작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 여기서 더 빚지면 정말, 정말 죽어. 네 남자친구가 얼마나 성질 더러운지 너도 잘 알잖아.”
“그 인간, 이제 내 남자친구 아니거든.”
몸을 부르르 떨며 닐이 즉각 부정했다. 제프리가 주로 돈을 빌린 대상인 로니 크로거는 닐의 전 남자친구였다. 그냥 전 남자친구도 아니다. 작은 갱단의 두목이었다. 아직까지 자신에게 손을 댄 적은 없었지만 주로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그런 인간 말종이기도 했고.
“내가 저번에 너 집세 몇 번 내준 적 있었잖아. 이미 다 홍보해 놔서 꼭 안드로이드 진열해 놔야 한단 말이야. 그 사장이 네 남자친구보다 더 무서운 인간이라고!”
“글쎄, 로니 크로거는 이제 내 남자친구 아니라니까?! 그리고 말이 안드로이드인 척하라는 거지, 나보고 몸 팔라는 거잖아!”
닐이 버럭 화를 냈다. 술집 주인은 이제 제프리와 닐이 다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제프리가 더욱 애절하게 매달렸다.
“아니야, 진짜 아니야! 거기서는 강제 추행 같은 건 절대 금지라구! 몸을 파는 게 아니라 그냥 일종의 좀 많이 야한 쇼라니까? 아, 그래. 돈, 돈도 줄게. 나 버는 돈의 반 어때, 응?”
섹스로이드 대신에 그 성인용품점에서 안드로이드인 것처럼 ‘진열되어 달라’는 진짜 미친 것이나 다름없는 부탁에도 닐이 한숨만 푹푹 쉬고 제대로 거절을 못 하는 건 제프리가 그만큼 자신을 많이 도와준 까닭이었다. 아니면 매번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는 인간과 왜 그토록 오랫동안 알고 지내 왔겠는가…….
제프리는 무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기 일쑤였지만, 그만큼 정이 많고 눈물도 많았다. 로니 크로거가 억지로 술을 먹여서 토사물에 질식해 가는 닐을 살려 준 것도 몇 번이었고……. 아무튼 사람은 매우 좋았다. 그리고 닐은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약했다.
자신의 처지도 처지인지라 갈팡질팡하고 있는 그의 귀에 제프리가 버는 시급의 액수가 흘러 들어왔다. 구체적인 액수를 듣자 눈과 귀가 번쩍 뜨였다.
“그렇게나 많이 벌어?”
“그러니까 내가 거길 다니지. 너 어디 가서 이런 돈 쉽게 못 벌어. 지금 돈도 없잖아.”
그건…… 그건 그렇다. 닐은 언제나 돈이 많아 본 적이 없었지만 특히나 이 시기에는 완전히 거지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렇게나 많이 번다니, 어쩐지 빚을 진 상태에서도 꼬박꼬박 제 애인에게 선물이니 뭐니 사다 바친다 했다. 하긴 그런 애인을 놓치고 싶지 않았겠지. 제프리의 험악한 취향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으니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닐이 한숨을 쉬며 승낙하고 말았다. 돈이 궁한 것도 궁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전 남자친구를 피하기 위해서는 이 도시를 떠야 했고, 이 도시를 뜨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제프리가 말한 대로라면 한 달 정도면 충분한 돈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한 달만이다?”
“닐! 닐, 이 예쁜 자식. 넌 정말 내 생명의 은인이야!”
제프리가 뛸 듯이 기뻐하면서 와락 끌어안았다. 술 냄새가 훅 독하게 풍겨 와 닐이 떨떠름하게 밀어 냈다. 지금은 전혀 술에 취한 상태가 아닌데도 이렇게 주정뱅이의 냄새가 풀풀 나는 걸 보니, 간밤에 속 좀 썩이며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떨어져. 그래서 언제 가면 되는데?”
제프리의 대답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단호했다.
“오늘 당장!”
“그렇게나 빨리?”
지금쯤 슬슬 자신을 찾고 있을 전 남자친구가 꽤 마음에 걸렸던 닐이 떨떠름하게 물었지만 제프리의 귀에는 거의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이제는 술집 주인이 대놓고 일 안 한다면서 제프리에게 욕설을 퍼부어 댔고 커피 머신은 다시 닐에게 상냥하게 물었다.
“제프리 파커! 너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잘라 버릴 줄 알아!”
[커피를 다시 끓이도록 할까요?]
하지만 제프리가 완전히 막무가내였던지라 둘의―정확히는 술집 주인과 커피 머신의―말은 무시당하고 말았다. 닐도 어쩔 수 없이 제프리의 후드를 빌려 푹 머리에 모자를 뒤집어쓰고 나가야만 했다. 다행히 아침이라 그런지 보통 이 시간까지는 아직 침대에서 구겨져 자고 있을 로니 크로거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제프리와 함께 도착한 ‘Tear’에 들어가기 전, 닐은 잠시 호텔의 외관을 보며 감탄했다. 안에 들어가서는 황금을 발라 놓았는지 번쩍거리는 내부를 보며 한 번 더 감탄했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안이 훨씬 근사했다. 거기에 척 봐도 세련되고 비싼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집에서 급히 빠져나오느라 아무렇게나 입고 나온 후줄근한 옷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졌다.
“지금 시간에 그 사장이 깨어 있을까? 너무 이르지 않아?”
“사장님 매일 밤샘 작업하느라 보통은 이 시간대에 깨어 계셔.”
“그래서 그 사장님이란 분도 네 계획에 대해 알고 있어?”
이상하게 제프리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는데 닐은 슬슬 그 부분에서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설마 사장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아니 허락도 받지 않고 ‘고장 난 안드로이드 대신 사람을 대신 세워 그럴싸한 대역을 시킨다’는 허무맹랑한 계획을 세운 건 아니겠지. 그 정도로 막 나가진 않을 거라 생각하려고 닐이 애를 썼다.
그는 제프리와 함께 호화의 극치를 달리는 장식들 중 하나인, 번쩍거리는 금색 승강기를 타고 5층으로 향했다. 제프리가 일하는 매장이 위치한 곳이었다. 지금까지 이 호텔을 둘러본 결과 닐의 감상은 다음과 같았다. 돈을 사방에 발라 대다 못해 줄줄 흘러내리는군.
들어가기 전, 그는 문 위 공간에 우아한 필기체로 써져 있는 간판을 볼 수 있었다.
‘Dear’
이곳이 어떤 종류의 호텔인지 제프리에게 들어 잘 알고 있기에 닐은 대체 무슨 의미로 저 단어를 썼을까 의문이 들었다. 매장 안의 인테리어는 고급스럽고 깔끔했는데, 한쪽에는 민망하고 기괴하며 다소 무섭기까지 한 성인용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보며 닐이 놀라워하는 동안, 제프리는 마치 꼬리가 달렸다면 있는 힘껏 흔들어 댔을 것 같은 태도로 달려갔다.
“사장님!”
닐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입을 조금 벌렸다. 사장이 굉장히 잘생겼다. 남자에, 그것도 척 봐도 알파로 보이는 사람에게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아무리 봐도 전형적인 금발 미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외모였다.
“사장님. 혹시 시간 되십니까?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제프리가 지극히 공손하게 말을 걸거나 말거나 시선 한번 주지 않고 계산대에서 뭔가 하고 있던 사장이 그제야 제프리를 바라보았다. 그 힐끔 쳐다보는 초록색 눈동자조차 몹시도 예뻐 닐은 잠시 넋을 놓았다. 다시 고개를 숙이자 스륵 흘러내리는 긴 금발은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는데도 마치 헤어 디자이너가 온 힘을 다해 멋을 낸 것처럼 보였다.
“뭔데?”
“제가 아르바이트생을 데려왔는데, 사장님 마음에 드시나 해서…….”
뭔가를 조립하기에 여념이 없던 사장이 제프리의 말을 전혀 이해 못 한 태도로 무심하게 되물었다.
“너 이제 일 그만둬?”
닐이 그제야 사장의 외모를 감탄하는 일에서 벗어나 좀 정신을 되찾았다. 사장과 제프리의 대화에서 아까 느꼈던 불안감을 다시 느꼈던 탓이었다. 제프리는 사장이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계산대 아래에서 뭔가 달가닥거리기 시작하자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 제가 말씀, 말씀드리는 걸 까먹었나 봅니다. 그게, 어제…… 그…… 신상 안드로이드가…….”
안드로이드라는 말을 꺼내자 그제야 사장이 관심을 보였다. 제프리가 입을 뻐끔거리다가 사장의 새파란 시선을 받고는 갑자기 누가 봐도 매우 수상쩍게도 대강 말을 얼버무렸다.
“예, 아무튼 그래서……. 얘는 그 안드로이드를 대신해서…… 알바를 할 사람인데요.”
사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프리의 태도가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이었는데 그건 닐도 마찬가지였다. 중간에 그렇게 애매모호하게 생략을 해 버리니 그냥 솔직하게 대놓고 말하는 것만도 못했다. 이거, 설마 나에게도 불똥 튀는 거 아냐? 게다가 마피아에 연관이 되었다느니 어쨌다느니 했던 것도 그렇고……. 사장이 제프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안드로이드가 있는데 왜 굳이 사람을 거기에 가져다 놔? 백댄서라도 필요한가?”
“그게, 제가 뭘 좀 만졌더니 안드로이드가 고장이, 고장이 나서…….”
횡설수설하는 변명을 들은 사장이 잠시 그 예쁜 초록색 눈동자로 제프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입가에서 미소가 싹 사라지는 걸 볼 때까지도 닐은 그냥 어지간히 화가 났구나 하고 있었다. 사실 그 순간까지도 사장의 외모를 감상하기에 바빴다.
“제프리, 제프리.”
이내 예쁘게도 웃은 사장이 손을 뻗으려 하자 새파랗게 질린 제프리가 바닥에 넙죽 엎드려 싹싹 빌기 시작했다. 왜 그래? 꼭 내가 널 때리려고 하는 사람처럼. 사장이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툭툭 건드릴 때마다 그가 움찔 움찔 움직였다.
“사, 사장님!”
“안드로이드 어디 있어?”
“그게, 그게…….”
“안드로이드 어디 있어?”
정말 순수하게 궁금한 사람처럼 사장이 똑같이 되묻자 제프리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대충 창고 어디에 모셔 두었다는 이야기에 그 자리에서 일어난 사장이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데, 얼굴뿐만 아니라 몸도 잘빠졌다. 사장을 구경하느라 닐은 잠시 제프리의 사정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했다. 그 잘생긴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닐이 아직도 바닥에 엎드려 있는 제프리에게 중얼거렸다.
“사장님 잘생겼네.”
“네가 뭘 몰라서 그렇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제일 무서운 인간이야.”
닐은 제프리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가끔 알파는 같은 알파에게 서열 정리를 당하듯 찍 눌리곤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자업자득인 제프리를 위로해 주는 대신 자신의 호기심을 채웠다.
“사장님 이름이 뭐야?”
“지금 상황에 그게 궁금해?”
“이제 앞으로 내 사장님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름쯤은 알아 둬야지.”
태연하게 묻자 지금 궁지에 몰려 여유가 없었는지 질문하는 의도를 생각도 않고 빠르게 넘어가 버린 제프리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 솔로호프야.”
이름을 듣고는 러시아 사람인가 보다 하고 닐이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긴 생긴 모습이 꼭 러시아 사람같이 생긴 것 같았어. 그건 그렇고 러시아 남자들은 원래 다 저렇게 잘생겼나? 보통 성별에 연연하지 않는 알파와 오메가와 달리, 베타들은 짝을 이루는 데에 있어서 꽤나 성별을 따지곤 했는데 닐은 보통 여자 남자 다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편이었다. 사실 여자보다도 남자가 좀 더 좋았다.
“그런데 대체 무슨 신상을 망가트렸기에 그래? 설마 그 유명한 ‘동물원 시리즈’야?”
“동물원 시리즈가 대체 뭐야?”
전혀 모른다는 듯이 제프리가 되묻자 닐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꽤나 안드로이드들을 좋아했다. 비싸서 사지는 못했지만 대신에 최초로 나온 안드로이드부터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나온 최신 안드로이드까지 정보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특히나 미래에서 ‘Tear’의 안드로이드는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그 화려한 외모와 옵션으로 상당히 인기가 많았었다. 닐이 천천히 제 기억을 되짚었다. 보석을 모티브로 따 와 만든 안드로이드는 제 기억상으로는 조금 더 후에 나왔었다.
“아니면…… 사계절?”
“너 아까부터 자꾸 알 수 없는 소리 할래?”
“그럼 그보다 앞인가? 나비 시리즈?”
자신의 입장에서는 자꾸만 헛소리를 해 대는 닐을 향해 제프리가 손을 휘저었다.
“다 모르겠고, 일단 내가 알기론 이제까지 나온 오리지널 안드로이드는 딱 하나야. 레이디지. 내가 망가트린 건 이제 막 출시하려던 남성 안드로이드고. 아직 이름도 붙이기 전의 신상인데 나 진짜 어쩌지…….”
제프리가 울상을 하거나 말거나 닐이 눈을 반짝였다. 레이디면 아마 이제 막 안드로이드들을 출시하던 때로 자신이 회귀한 모양이었다. 잠시만, 그런데 레이디 다음에 나온 안드로이드라면 최초로 ‘Tear’에서 출시한 안드로이드가 아니던가? 이름이…….
“처음 출시된 남자 안드로이드의 이름이 아마…… 보석의 한 종류였던 것 같았는데.”
닐이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엠버(*Amber : 보석 호박).”
기억을 더듬느라 몰두해 있던 닐이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제프리는 거의 혼비백산해서는 다시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마른침을 삼키며 뒤를 돌자 언제 돌아왔는지 미하일이 바로 뒤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닐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런 미남 앞에 있자니 자신감이 쭉쭉 깎여 나갔다.
“사…장님.”
제프리가 죽어 가는 목소리로 불러도 미하일은 들은 척 만 척 뚫어져라 닐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느긋하게 시선을 돌렸다. 닐은 잔뜩 움츠렸던 어깨를 그제야 좀 편하게 내려놓았다.
“정말 궁금한데, 대체 뭐로 뒤를 찢어 먹은 거야?”
“그게…….”
“아니,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거라니까. 어지간한 크기의 물건은 다 넣을 수 있게 만들었거든.”
힐끔힐끔 사장, 미하일의 눈치를 몹시 보던 제프리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제 팔로 안드로이드의 뒤에 대고 욕구충족을 하다가 결국 고장 내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한참 돌려돌려 설명하고 나자 미하일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생각해 보니 피스트 퍽을 좋아하는 사람도 좀 있었지. 다음에 만들 때는 그런 플레이도 고려를 해야겠어. 그래서 반응은 괜찮던가?”
제프리가 달달달 떨면서 물었다. 화 안 내세요? 미하일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화를 내? 전에 안드로이드 테스트해 보라고 한 건 나잖아.”
“사장님…….”
징그럽게도 제프리가 매우 감격했다는 티를 내면서 미하일을 바라보았는데, 닐은 사장이 참으로 너그러운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그 생각이 착각임을 깨닫게 되는 건 한참하고도 나중의 일이었다. 아무튼 미하일이 계산대의 의자를 끌어다 털썩 앉으며 턱으로 까딱거리면서 물었다.
“고장 난 안드로이드 대신 뭘 어떻게 하라고?”
“그게 그러니까, 어차피 사장님 안드로이드가 겉으로나 속으로나 사람과 거의 차이가 없으니까 대신 사람을 쓰면 어떨까 하는데요…….”
제프리가 굽실거리면서 멀뚱하니 뒤에 빠져 있던 닐을 잡아당겨 미하일 앞으로 끌어왔다.
“흠…….”
미하일은 제프리의 제안에 대답하는 대신 닐을 위아래로 살폈다. 그러고는 솔직하게 중얼거렸다. 별로 고급스러운 티가 안 나는데. 닐은 갑자기 자신이 대강 입고 온 낡은 옷을 감추고 싶은 생각이 들어 움찔했지만 간신히 주먹을 꽉 쥐는 선에서 끝낼 수 있었다. 그마저도 미하일의 시선이 손으로 향하는 바람에 얼른 힘을 풀었다.
“보안 문제는 어떻게 하고?”
“절대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닐 친구가 아니에요! 그, 그리고 제가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 보았는데요, 호텔 사람들을 쓰기엔 이미 얼굴이 많이 알려져 있으니까 안 될 거고, 또, 전문적인 사람을 고용하면 돈도 많이 들 거고……. 얘는 베타라서 페로몬도 안 나고…….”
어디까지나 제프리의 입장에서 돈이 많이 든다는 의미겠지. 닐이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이런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 굳이 자신을 고른 건 어떻게든 자신이 책임질 비용을 줄여 보려고 용을 쓰는 행동일 터였다. 이런 고급 회원제 클럽의 작부를 안드로이드로 고용한다면, 글쎄……. 하루에 한 시간씩 고용한다고 해도 제프리의 지갑 사정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을 테니까.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제프리의 계획을 사장이 허락해 준다는 조건하에서였다. 그렇다고 안드로이드를 수리해 사용하자니 수리 비용은 둘째 치고 이미 예정되어 있는 홍보를 미루었을 때 발생할 손해금 감당도 장난이 아닐 거고…….
미하일이 아무런 대꾸 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닐을 바라보기만 하자 제프리는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반면 닐은 미하일이 자신을 다른 의도로 탐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외모가 안드로이드를 대체하기에 적합한지 아닌지 가늠해 보는 게 아니라 마치……. 그때 갑자기 제프리가 좀 과장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 싫어서 도망간다거나 중간에 그만두거나 혹은 연기를 못하거나 하는 걱정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얘가, 그런 쪽으로는 대단한 애거든요?”
닐은 제프리가 무슨 의도로 저 말을 꺼냈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 자리에서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별수가 없었다. 귀가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미하일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런 쪽이라니 뭐가?”
“남에게 보여 주는 걸 아주 좋아해요. 예전에 술집에서 자기 애인과 섹스하는 걸 남들에게 다 보여 주고서도 좋다고…….”
닐은 무던히 그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열심히 다른 생각을 하면서 안 들리는 척 바닥을 물끄러미 쏘아보았으나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대신, 과거의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로니 크로거와 사귄 지 반년쯤 되었을까. 그때쯤 닐은 로니가 슬슬 제 본성을 드러내는 바람에 우울함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뻔히 베타는 별로라는 이야기를 한다든가, 오메가는 베타와 다르게 아주 매력적이라고 말한다든가. 게다가 낌새를 보면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 같은데 뭐라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로니에게 버림받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가득했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 자신은 좀 많이 바보 같았다.
1화
Prologue
“……!”
크게 숨을 들이쉬며 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간신히 작게 악 소리를 내는 것으로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몸은 계속 근육을 긴장시키며 비명을 질러 대는 중이었다.
“흐으, 으…….”
나, 나 방금 죽었었는데. 어떻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가 더듬더듬 제 목을 더듬었다. 아직도 질긴 끈이 자신의 목을 졸라 대고 있는 것 같아 손톱으로 긁어 보기도 했다. 그의 머릿속으로 무시무시한 기억의 잔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꿈인 것 같기도 하였으나 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했다. 그가 저도 모르게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그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야, 안 자고 뭐 해…….”
벌떡 일어난 데다가 흐느끼는 소리까지 내니 같이 잠이 깨어 버렸는지 로니 크로거가 짜증을 냈다. 그 행동에 닐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그는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며 휙 이불을 빼앗아 갔다. 그리고 잠깐 뒤척이더니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잠시 동안 그 잠든 얼굴을 바라보니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몸이 덜덜 떨렸다. 정처 없이 방황하던 닐의 시선이 멎은 곳은 벽에 걸린 홀로그램 시계였다. 날짜와 시간을 확인한 그가 숨도 쉬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뭐에라도 홀린 듯 닐이 비틀비틀 일어났다. 토할 것 같아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은 그는 메모지를 찾아낸 뒤 종이 위에 황급히 글씨를 갈겨쓰기 시작했다. 이별을 고하는 내용을 쓰는 손이 여러 가지 감정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렸다.
패닉에 빠진 상태에서 어찌어찌 글을 다 쓴 뒤 잘 보이는 곳에 메모지를 붙이고는 서둘러 대충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경황이 없어 겨우 지갑 정도만 챙기고 있는데 집 한구석에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원통형의 안드로이드가 기계음을 내며 헤드 위로 글씨를 띄웠다.
[테일러 님, 외출하시나요?]
“쉿……. 쉬잇.”
닐이 필사적으로 조용히 하라는 몸짓을 하자 구형 안드로이드가 조용해졌다. 뿐만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나갈 수 있게끔 보안 해제까지 해 주었다. 그 움직임에 순간 가슴에서 어떠한 감정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사라지고 난 뒤 이 안드로이드가 처할 운명을 잠시 떠올려 본 닐이 잠깐 눈을 감았다. 그가 조용히 문을 열자 마치 자신의 뜻을 안 것처럼 안드로이드가 작게 삐삐 소리를 내더니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돌돌 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닐도 그 어둠에 발을 디디고 섰다. 그는 깨어나기 전 자신이 보았던 것들을 떠올렸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감금, 폭력, 학대……. 마침내 찾아온 비참하고도 참혹한 죽음. 그는 미래에 자신이 살해당하는 데 크게 일조하는 끔찍한 애인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갔다.
Chapter 1 : Tear
“지금 나한테 뭘 하라고?”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닐이 귀를 후볐다. 일부러 제프리에게 이것 보라고 한 행동이기도 했다.
[커피가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커피 머신이 굉장히 상냥한 목소리로 닐에게 알렸다. 그가 제프리를 노려보고 있는 동안 부드럽게 다시 한번 진동이 울렸는데 이상하게도 기계가 마치 아양을 부리는 듯한 느낌이 났다. 가게 주인이 ‘저게 저렇게 좋은 기계였나?’ 하는 미심쩍은 시선을 던지거나 말거나 닐은 못 들은 척 커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나 닐과 안면을 트게 된 지 이제 거의 근 몇 년이 넘어가는 단골 술집 바텐더이자, 친한 지인이자, 원수 같은 제프리 파커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달복달 닐에게 매달렸다.
“닐, 진짜 딱 한 달만 하면 되는 일이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매장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
“그런 쉬운 아르바이트를 왜 하필 나에게 하라고 해?”
척 들어 봐도 의도가 불순해서 꺼지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으며 닐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저런 말을 듣고 있자니 아무래도 자신은 주인공 같은 존재는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 회귀란 걸 한 뒤에도 이러고 있지…….
우울한 감성에 푹 젖은 그는 조용히 따뜻한 커피 잔을 어루만졌다. 다시는 제 인생에 빛이 들지 않을 거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전 남자친구에게서 도망치긴 하였으나 그나마도 갈 곳이 없어 가장 친한 친구의 술집에 숨어 있는 상태라 더욱 그랬다. 게다가 제프리가 자신의 유일한 친구란 건 로니 크로거도 잘 안다. 닐은 그 유일한 친구의 간절한 시선을 무시하려고 애쓰며 한숨을 푹 쉬었다.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 닐 테일러는 회귀를 했다.
마치 드라마나 영화, 혹은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죽었다가 눈을 뜨니 제 침실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처음에는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무작정 집에서 뛰쳐나와 한참을 현실 도피를 했다. 그러나 차가운 현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아니, 정확히는 겨울 한밤의 차디찬 바람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보통은 그렇지 않은가. 회귀를 한 뒤 기쁨과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과거에 잘못했던 일이나 실수를 바로잡고, 구하지 못했던 사람을 되살리고……. 아니면 미래의 정보를 이용해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된다거나. 그러나 그 모든 일에 닐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보내 주려면 아예 10년쯤 전으로 보내 줄 것이지, 지금 시점에서 부모님은 돌아가신 지 오래였고 빌어먹을 로니 크로거와 사귀기 전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로또 번호 따위를 기억하고 있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차라리 자신이 마지막에 이런 회귀 따위는 하지 말고 그대로 숨이 끊어져 저승으로 가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마지막 죽음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았던 탓이다.
그는 죽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에 살해당했다. 이젠 자신이 질린다면서 전 남자친구가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 주는 척 어떤 변태에게 팔아넘긴 탓이었다. 그 변태가 브레스 컨트롤을 한답시고 마구잡이로 목을 졸라 버린 끝에 살해당하고 말았는데, 심지어 회귀를 했기 때문에 어디 가서 말도 못 하는 죽음이었다. 이제는 목에 무언가 감기는 것에 트라우마가 생겨서 이렇게 날이 추워도 목도리도 못하고 목걸이는 꿈도 못 꿨다.
그래도 다시 그렇게 죽기는 싫어 멋대로 이별을 선고하고 도망쳐 나온 건데 그나마 도움을 부탁할 사람이 제프리 파커밖에 없다니. 그것도 매우 불순하고도 노골적인 의도가 보이는 제안을 하는 제프리 파커라니…….
아무리 노력해도 이 진창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자 새삼 무거운 감정이 진흙 더미처럼 마음을 덮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프리는 옆에서 열심히 닐을 설득하느라 떠드는 걸 쉬지 않았다.
“내가 괜히 추천하는 줄 알아? 넌 얼굴도 되고, 몸도 되고…… 무엇보다 그게 네 적성에 맞으니까 그러지.”
제프리가 입에 발린 말들을 해 댔다. 힘이 빠진 닐이 아무렇게나 물었다.
“내 적성이 뭔데?”
“너 남에게 보여 주는 거 좋아하잖아.”
아무 생각 없이 대꾸했다가 돌아온 대답에 닐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더니 저를 바라보는 눈이 진심이라 이제는 말할 기운까지도 떨어졌다. 정작 제프리는 방금 상대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이기에 닐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하긴 엄연히 따지자면 거짓말도 아니지……. 자신은 분명 보여 주는 걸 좋아하긴 했다. 남의 시선을 받는 것이 기쁨이요, 때로는 쾌감이었다. 전 애인들과도 종종 그런 종류의 관계를 즐겨 왔었고.
그러나 제프리가 말하는 그런 ‘보여 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성질인 것이다. 지난 일을 떠올리다가 닐이 고개를 저었다.
“닐, 제발 한 번만 도와줘, 응?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절박했던 제프리가 이제는 숫제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닐도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프리가 아니면 갈 곳 없는 자신을 재워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아직은 오지 않은 미래에 그는 자신이 로니에게서 도망칠 때마다 숨겨 주기도 했었다. 돈도 몇 번 빌려줬었고……. 물론 그만큼 저에게 큰 엿을 먹이긴 했지만…….
“대체 무슨 아르바이트이기에 적성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거야?”
우울한 감성에 아직 푹 젖어 있고 싶었던 닐이 짜증을 부렸다. 뭔지 들어나 보자는 생각에서였으나 막상 그에게서 무슨 사정인지 실제로 들어 보니 듣지 말걸 하는 후회만 들이닥쳤다. 어이가 없어서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닐이 따졌다.
“나보고 네가 망가트린 섹스로이드인 척하라고?”
“섹스로이드가 아니라 안드로이드!”
어처구니없는 제프리의 변명을 들으며 닐이 잠시 인내했다. 인내는 짧았다.
“미쳤어? 돌았어? 정신 나갔어?”
“욕하려거든 하나만 택해 줄래.”
“한 대 때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
제프리는 시내 외곽에 위풍당당하게 세워진 ‘Tear’라는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겉은 일반 호텔 같아도 실제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고급 회원제 SM클럽이었다. 일단 들어가 보면 완전 끝내준다고는 하는데 멤버십 조건이 몹시 까다로워서 일반인인 닐은 제프리처럼 아는 사람으로부터 알음알음 그곳이 어떻다더라 들어 보기만 하는 수준이었다.
아무튼 이번에 그 ‘Tear’의 사장이 성인용품점에 정식으로 출시하기 전 큰마음 먹고 안드로이드 하나를 샘플용으로 하나 들여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제프리가 순간의 욕심으로 잠시 ‘손장난’을 쳤다가 안드로이드를 고장 내서 진열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닐이 대신 안드로이드인 척해 달라는 기가 막히는 부탁이었다.
“닐, 진짜 딱 한 달만이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응?”
제프리가 마치 로봇처럼 아까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아니, 사실 듣기 싫어 딴청을 피우는 동안 제 귀에다 대고 저 똑같은 말을 한 다섯 번쯤 반복한 것 같기도 했다. 어이가 없어서 닐이 쾅 커피 잔을 내려놓자 제프리가 약간 움찔했다. 그러더니 제 발이 저려 지레 묻지도 않은 다른 사정 이야기를 훌훌 털어놓았다.
“제발 나 좀 살려 주라. 그 안드로이드, 엄청나게 비싼 거라서 내가 수습하지 못하면 사장이 내 목을 졸라 죽이려고 할 거야. 그 사람 마피아랑 연줄도 있는 사람이란 말이야!”
목을 졸라 죽일 거란 이야기에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닐이 더 기겁했다.
“미쳤어, 마피아랑 엮인 곳에 내가 내 발로 들어가게! 아니, 애초에 왜 그런 짓을 해!”
“아, 아니, 진짜 마피아와 엮였다는 건 아니고 그냥 소문이 그렇다구……. 그리고 안드로이드가 너무 섹시하게 생긴 걸 어떻게 해…….”
반성도 없이 제프리가 터무니없는 변명만 늘어놓았다.
“이 정신 나간 인간아, 궁금해서 건드려 본 건 그렇다 치자. 대체 왜 안드로이드 거기에다 팔을 집어넣는데!”
닐이 조목조목 따지고 들자 제프리가 이제는 변명하는 것도 포기하고 숫제 엉엉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가만 들여다보니 진짜 우는 것 같기도 했다.
닐이 알기로 이맘때쯤의 제프리는 다소 사치하는 습관도 있었고 애인에게 죽고 못 살아서 이것저것 가져다 바치느라 여기저기 빌린 돈이 꽤 많았다. 그래서 주말에는 술집 바텐더를, 평일에는 그 ‘Tear’에서 열심히 일을 하며 돈을 갚는 게 아니던가. 게다가 무엇보다도 그가 ‘Tear’에서 일하기를 고집하는 까닭이 다 있었다.
그는 온갖 하드한 것을 죄다 좋아했다. 스팽킹, 채찍질, 욕설, 걷어차기 등 비슷한 것만 봐도 눈이 회까닥 돌곤 했다. 아픈 건 딱 질색인 닐은 그런 걸 즐기는 제프리를 절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런 인간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비싼 안드로이드에 피스트 퍽을 하느라 작살을 내 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단순히 잡심부름을 하는 기능의 안드로이드조차도 쉬이 살 엄두가 안 나도록 비싸거늘…….
그것도 들어 보니 그냥 안드로이드도 아니었다. 무려 섹스로이드. 거의 사람과 비슷한 훌륭한 수준의 안드로이드란다. 하긴 분명 이맘때쯤에 그런 끝내주는 안드로이드가 출시되기는 했었지……. 아무튼 간에 골이 아파 닐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지끈지끈 두통이 오기 시작했다. 제프리는 이제는 본격적으로 소리 내어 징징 울었다. 이제 영업시간이라며 술집 주인이 짜증을 내기 시작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 여기서 더 빚지면 정말, 정말 죽어. 네 남자친구가 얼마나 성질 더러운지 너도 잘 알잖아.”
“그 인간, 이제 내 남자친구 아니거든.”
몸을 부르르 떨며 닐이 즉각 부정했다. 제프리가 주로 돈을 빌린 대상인 로니 크로거는 닐의 전 남자친구였다. 그냥 전 남자친구도 아니다. 작은 갱단의 두목이었다. 아직까지 자신에게 손을 댄 적은 없었지만 주로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그런 인간 말종이기도 했고.
“내가 저번에 너 집세 몇 번 내준 적 있었잖아. 이미 다 홍보해 놔서 꼭 안드로이드 진열해 놔야 한단 말이야. 그 사장이 네 남자친구보다 더 무서운 인간이라고!”
“글쎄, 로니 크로거는 이제 내 남자친구 아니라니까?! 그리고 말이 안드로이드인 척하라는 거지, 나보고 몸 팔라는 거잖아!”
닐이 버럭 화를 냈다. 술집 주인은 이제 제프리와 닐이 다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제프리가 더욱 애절하게 매달렸다.
“아니야, 진짜 아니야! 거기서는 강제 추행 같은 건 절대 금지라구! 몸을 파는 게 아니라 그냥 일종의 좀 많이 야한 쇼라니까? 아, 그래. 돈, 돈도 줄게. 나 버는 돈의 반 어때, 응?”
섹스로이드 대신에 그 성인용품점에서 안드로이드인 것처럼 ‘진열되어 달라’는 진짜 미친 것이나 다름없는 부탁에도 닐이 한숨만 푹푹 쉬고 제대로 거절을 못 하는 건 제프리가 그만큼 자신을 많이 도와준 까닭이었다. 아니면 매번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는 인간과 왜 그토록 오랫동안 알고 지내 왔겠는가…….
제프리는 무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기 일쑤였지만, 그만큼 정이 많고 눈물도 많았다. 로니 크로거가 억지로 술을 먹여서 토사물에 질식해 가는 닐을 살려 준 것도 몇 번이었고……. 아무튼 사람은 매우 좋았다. 그리고 닐은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약했다.
자신의 처지도 처지인지라 갈팡질팡하고 있는 그의 귀에 제프리가 버는 시급의 액수가 흘러 들어왔다. 구체적인 액수를 듣자 눈과 귀가 번쩍 뜨였다.
“그렇게나 많이 벌어?”
“그러니까 내가 거길 다니지. 너 어디 가서 이런 돈 쉽게 못 벌어. 지금 돈도 없잖아.”
그건…… 그건 그렇다. 닐은 언제나 돈이 많아 본 적이 없었지만 특히나 이 시기에는 완전히 거지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렇게나 많이 번다니, 어쩐지 빚을 진 상태에서도 꼬박꼬박 제 애인에게 선물이니 뭐니 사다 바친다 했다. 하긴 그런 애인을 놓치고 싶지 않았겠지. 제프리의 험악한 취향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으니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닐이 한숨을 쉬며 승낙하고 말았다. 돈이 궁한 것도 궁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전 남자친구를 피하기 위해서는 이 도시를 떠야 했고, 이 도시를 뜨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제프리가 말한 대로라면 한 달 정도면 충분한 돈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한 달만이다?”
“닐! 닐, 이 예쁜 자식. 넌 정말 내 생명의 은인이야!”
제프리가 뛸 듯이 기뻐하면서 와락 끌어안았다. 술 냄새가 훅 독하게 풍겨 와 닐이 떨떠름하게 밀어 냈다. 지금은 전혀 술에 취한 상태가 아닌데도 이렇게 주정뱅이의 냄새가 풀풀 나는 걸 보니, 간밤에 속 좀 썩이며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떨어져. 그래서 언제 가면 되는데?”
제프리의 대답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단호했다.
“오늘 당장!”
“그렇게나 빨리?”
지금쯤 슬슬 자신을 찾고 있을 전 남자친구가 꽤 마음에 걸렸던 닐이 떨떠름하게 물었지만 제프리의 귀에는 거의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이제는 술집 주인이 대놓고 일 안 한다면서 제프리에게 욕설을 퍼부어 댔고 커피 머신은 다시 닐에게 상냥하게 물었다.
“제프리 파커! 너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잘라 버릴 줄 알아!”
[커피를 다시 끓이도록 할까요?]
하지만 제프리가 완전히 막무가내였던지라 둘의―정확히는 술집 주인과 커피 머신의―말은 무시당하고 말았다. 닐도 어쩔 수 없이 제프리의 후드를 빌려 푹 머리에 모자를 뒤집어쓰고 나가야만 했다. 다행히 아침이라 그런지 보통 이 시간까지는 아직 침대에서 구겨져 자고 있을 로니 크로거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제프리와 함께 도착한 ‘Tear’에 들어가기 전, 닐은 잠시 호텔의 외관을 보며 감탄했다. 안에 들어가서는 황금을 발라 놓았는지 번쩍거리는 내부를 보며 한 번 더 감탄했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안이 훨씬 근사했다. 거기에 척 봐도 세련되고 비싼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집에서 급히 빠져나오느라 아무렇게나 입고 나온 후줄근한 옷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졌다.
“지금 시간에 그 사장이 깨어 있을까? 너무 이르지 않아?”
“사장님 매일 밤샘 작업하느라 보통은 이 시간대에 깨어 계셔.”
“그래서 그 사장님이란 분도 네 계획에 대해 알고 있어?”
이상하게 제프리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는데 닐은 슬슬 그 부분에서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설마 사장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아니 허락도 받지 않고 ‘고장 난 안드로이드 대신 사람을 대신 세워 그럴싸한 대역을 시킨다’는 허무맹랑한 계획을 세운 건 아니겠지. 그 정도로 막 나가진 않을 거라 생각하려고 닐이 애를 썼다.
그는 제프리와 함께 호화의 극치를 달리는 장식들 중 하나인, 번쩍거리는 금색 승강기를 타고 5층으로 향했다. 제프리가 일하는 매장이 위치한 곳이었다. 지금까지 이 호텔을 둘러본 결과 닐의 감상은 다음과 같았다. 돈을 사방에 발라 대다 못해 줄줄 흘러내리는군.
들어가기 전, 그는 문 위 공간에 우아한 필기체로 써져 있는 간판을 볼 수 있었다.
‘Dear’
이곳이 어떤 종류의 호텔인지 제프리에게 들어 잘 알고 있기에 닐은 대체 무슨 의미로 저 단어를 썼을까 의문이 들었다. 매장 안의 인테리어는 고급스럽고 깔끔했는데, 한쪽에는 민망하고 기괴하며 다소 무섭기까지 한 성인용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보며 닐이 놀라워하는 동안, 제프리는 마치 꼬리가 달렸다면 있는 힘껏 흔들어 댔을 것 같은 태도로 달려갔다.
“사장님!”
닐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입을 조금 벌렸다. 사장이 굉장히 잘생겼다. 남자에, 그것도 척 봐도 알파로 보이는 사람에게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아무리 봐도 전형적인 금발 미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외모였다.
“사장님. 혹시 시간 되십니까?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제프리가 지극히 공손하게 말을 걸거나 말거나 시선 한번 주지 않고 계산대에서 뭔가 하고 있던 사장이 그제야 제프리를 바라보았다. 그 힐끔 쳐다보는 초록색 눈동자조차 몹시도 예뻐 닐은 잠시 넋을 놓았다. 다시 고개를 숙이자 스륵 흘러내리는 긴 금발은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는데도 마치 헤어 디자이너가 온 힘을 다해 멋을 낸 것처럼 보였다.
“뭔데?”
“제가 아르바이트생을 데려왔는데, 사장님 마음에 드시나 해서…….”
뭔가를 조립하기에 여념이 없던 사장이 제프리의 말을 전혀 이해 못 한 태도로 무심하게 되물었다.
“너 이제 일 그만둬?”
닐이 그제야 사장의 외모를 감탄하는 일에서 벗어나 좀 정신을 되찾았다. 사장과 제프리의 대화에서 아까 느꼈던 불안감을 다시 느꼈던 탓이었다. 제프리는 사장이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계산대 아래에서 뭔가 달가닥거리기 시작하자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 제가 말씀, 말씀드리는 걸 까먹었나 봅니다. 그게, 어제…… 그…… 신상 안드로이드가…….”
안드로이드라는 말을 꺼내자 그제야 사장이 관심을 보였다. 제프리가 입을 뻐끔거리다가 사장의 새파란 시선을 받고는 갑자기 누가 봐도 매우 수상쩍게도 대강 말을 얼버무렸다.
“예, 아무튼 그래서……. 얘는 그 안드로이드를 대신해서…… 알바를 할 사람인데요.”
사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프리의 태도가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이었는데 그건 닐도 마찬가지였다. 중간에 그렇게 애매모호하게 생략을 해 버리니 그냥 솔직하게 대놓고 말하는 것만도 못했다. 이거, 설마 나에게도 불똥 튀는 거 아냐? 게다가 마피아에 연관이 되었다느니 어쨌다느니 했던 것도 그렇고……. 사장이 제프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안드로이드가 있는데 왜 굳이 사람을 거기에 가져다 놔? 백댄서라도 필요한가?”
“그게, 제가 뭘 좀 만졌더니 안드로이드가 고장이, 고장이 나서…….”
횡설수설하는 변명을 들은 사장이 잠시 그 예쁜 초록색 눈동자로 제프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입가에서 미소가 싹 사라지는 걸 볼 때까지도 닐은 그냥 어지간히 화가 났구나 하고 있었다. 사실 그 순간까지도 사장의 외모를 감상하기에 바빴다.
“제프리, 제프리.”
이내 예쁘게도 웃은 사장이 손을 뻗으려 하자 새파랗게 질린 제프리가 바닥에 넙죽 엎드려 싹싹 빌기 시작했다. 왜 그래? 꼭 내가 널 때리려고 하는 사람처럼. 사장이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툭툭 건드릴 때마다 그가 움찔 움찔 움직였다.
“사, 사장님!”
“안드로이드 어디 있어?”
“그게, 그게…….”
“안드로이드 어디 있어?”
정말 순수하게 궁금한 사람처럼 사장이 똑같이 되묻자 제프리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대충 창고 어디에 모셔 두었다는 이야기에 그 자리에서 일어난 사장이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데, 얼굴뿐만 아니라 몸도 잘빠졌다. 사장을 구경하느라 닐은 잠시 제프리의 사정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했다. 그 잘생긴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닐이 아직도 바닥에 엎드려 있는 제프리에게 중얼거렸다.
“사장님 잘생겼네.”
“네가 뭘 몰라서 그렇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제일 무서운 인간이야.”
닐은 제프리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가끔 알파는 같은 알파에게 서열 정리를 당하듯 찍 눌리곤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자업자득인 제프리를 위로해 주는 대신 자신의 호기심을 채웠다.
“사장님 이름이 뭐야?”
“지금 상황에 그게 궁금해?”
“이제 앞으로 내 사장님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름쯤은 알아 둬야지.”
태연하게 묻자 지금 궁지에 몰려 여유가 없었는지 질문하는 의도를 생각도 않고 빠르게 넘어가 버린 제프리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 솔로호프야.”
이름을 듣고는 러시아 사람인가 보다 하고 닐이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긴 생긴 모습이 꼭 러시아 사람같이 생긴 것 같았어. 그건 그렇고 러시아 남자들은 원래 다 저렇게 잘생겼나? 보통 성별에 연연하지 않는 알파와 오메가와 달리, 베타들은 짝을 이루는 데에 있어서 꽤나 성별을 따지곤 했는데 닐은 보통 여자 남자 다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편이었다. 사실 여자보다도 남자가 좀 더 좋았다.
“그런데 대체 무슨 신상을 망가트렸기에 그래? 설마 그 유명한 ‘동물원 시리즈’야?”
“동물원 시리즈가 대체 뭐야?”
전혀 모른다는 듯이 제프리가 되묻자 닐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꽤나 안드로이드들을 좋아했다. 비싸서 사지는 못했지만 대신에 최초로 나온 안드로이드부터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나온 최신 안드로이드까지 정보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특히나 미래에서 ‘Tear’의 안드로이드는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그 화려한 외모와 옵션으로 상당히 인기가 많았었다. 닐이 천천히 제 기억을 되짚었다. 보석을 모티브로 따 와 만든 안드로이드는 제 기억상으로는 조금 더 후에 나왔었다.
“아니면…… 사계절?”
“너 아까부터 자꾸 알 수 없는 소리 할래?”
“그럼 그보다 앞인가? 나비 시리즈?”
자신의 입장에서는 자꾸만 헛소리를 해 대는 닐을 향해 제프리가 손을 휘저었다.
“다 모르겠고, 일단 내가 알기론 이제까지 나온 오리지널 안드로이드는 딱 하나야. 레이디지. 내가 망가트린 건 이제 막 출시하려던 남성 안드로이드고. 아직 이름도 붙이기 전의 신상인데 나 진짜 어쩌지…….”
제프리가 울상을 하거나 말거나 닐이 눈을 반짝였다. 레이디면 아마 이제 막 안드로이드들을 출시하던 때로 자신이 회귀한 모양이었다. 잠시만, 그런데 레이디 다음에 나온 안드로이드라면 최초로 ‘Tear’에서 출시한 안드로이드가 아니던가? 이름이…….
“처음 출시된 남자 안드로이드의 이름이 아마…… 보석의 한 종류였던 것 같았는데.”
닐이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엠버(*Amber : 보석 호박).”
기억을 더듬느라 몰두해 있던 닐이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제프리는 거의 혼비백산해서는 다시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마른침을 삼키며 뒤를 돌자 언제 돌아왔는지 미하일이 바로 뒤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닐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런 미남 앞에 있자니 자신감이 쭉쭉 깎여 나갔다.
“사…장님.”
제프리가 죽어 가는 목소리로 불러도 미하일은 들은 척 만 척 뚫어져라 닐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느긋하게 시선을 돌렸다. 닐은 잔뜩 움츠렸던 어깨를 그제야 좀 편하게 내려놓았다.
“정말 궁금한데, 대체 뭐로 뒤를 찢어 먹은 거야?”
“그게…….”
“아니,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거라니까. 어지간한 크기의 물건은 다 넣을 수 있게 만들었거든.”
힐끔힐끔 사장, 미하일의 눈치를 몹시 보던 제프리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제 팔로 안드로이드의 뒤에 대고 욕구충족을 하다가 결국 고장 내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한참 돌려돌려 설명하고 나자 미하일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생각해 보니 피스트 퍽을 좋아하는 사람도 좀 있었지. 다음에 만들 때는 그런 플레이도 고려를 해야겠어. 그래서 반응은 괜찮던가?”
제프리가 달달달 떨면서 물었다. 화 안 내세요? 미하일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화를 내? 전에 안드로이드 테스트해 보라고 한 건 나잖아.”
“사장님…….”
징그럽게도 제프리가 매우 감격했다는 티를 내면서 미하일을 바라보았는데, 닐은 사장이 참으로 너그러운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그 생각이 착각임을 깨닫게 되는 건 한참하고도 나중의 일이었다. 아무튼 미하일이 계산대의 의자를 끌어다 털썩 앉으며 턱으로 까딱거리면서 물었다.
“고장 난 안드로이드 대신 뭘 어떻게 하라고?”
“그게 그러니까, 어차피 사장님 안드로이드가 겉으로나 속으로나 사람과 거의 차이가 없으니까 대신 사람을 쓰면 어떨까 하는데요…….”
제프리가 굽실거리면서 멀뚱하니 뒤에 빠져 있던 닐을 잡아당겨 미하일 앞으로 끌어왔다.
“흠…….”
미하일은 제프리의 제안에 대답하는 대신 닐을 위아래로 살폈다. 그러고는 솔직하게 중얼거렸다. 별로 고급스러운 티가 안 나는데. 닐은 갑자기 자신이 대강 입고 온 낡은 옷을 감추고 싶은 생각이 들어 움찔했지만 간신히 주먹을 꽉 쥐는 선에서 끝낼 수 있었다. 그마저도 미하일의 시선이 손으로 향하는 바람에 얼른 힘을 풀었다.
“보안 문제는 어떻게 하고?”
“절대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닐 친구가 아니에요! 그, 그리고 제가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 보았는데요, 호텔 사람들을 쓰기엔 이미 얼굴이 많이 알려져 있으니까 안 될 거고, 또, 전문적인 사람을 고용하면 돈도 많이 들 거고……. 얘는 베타라서 페로몬도 안 나고…….”
어디까지나 제프리의 입장에서 돈이 많이 든다는 의미겠지. 닐이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이런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 굳이 자신을 고른 건 어떻게든 자신이 책임질 비용을 줄여 보려고 용을 쓰는 행동일 터였다. 이런 고급 회원제 클럽의 작부를 안드로이드로 고용한다면, 글쎄……. 하루에 한 시간씩 고용한다고 해도 제프리의 지갑 사정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을 테니까.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제프리의 계획을 사장이 허락해 준다는 조건하에서였다. 그렇다고 안드로이드를 수리해 사용하자니 수리 비용은 둘째 치고 이미 예정되어 있는 홍보를 미루었을 때 발생할 손해금 감당도 장난이 아닐 거고…….
미하일이 아무런 대꾸 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닐을 바라보기만 하자 제프리는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반면 닐은 미하일이 자신을 다른 의도로 탐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외모가 안드로이드를 대체하기에 적합한지 아닌지 가늠해 보는 게 아니라 마치……. 그때 갑자기 제프리가 좀 과장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 싫어서 도망간다거나 중간에 그만두거나 혹은 연기를 못하거나 하는 걱정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얘가, 그런 쪽으로는 대단한 애거든요?”
닐은 제프리가 무슨 의도로 저 말을 꺼냈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 자리에서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별수가 없었다. 귀가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미하일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런 쪽이라니 뭐가?”
“남에게 보여 주는 걸 아주 좋아해요. 예전에 술집에서 자기 애인과 섹스하는 걸 남들에게 다 보여 주고서도 좋다고…….”
닐은 무던히 그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열심히 다른 생각을 하면서 안 들리는 척 바닥을 물끄러미 쏘아보았으나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대신, 과거의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로니 크로거와 사귄 지 반년쯤 되었을까. 그때쯤 닐은 로니가 슬슬 제 본성을 드러내는 바람에 우울함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뻔히 베타는 별로라는 이야기를 한다든가, 오메가는 베타와 다르게 아주 매력적이라고 말한다든가. 게다가 낌새를 보면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 같은데 뭐라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로니에게 버림받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가득했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 자신은 좀 많이 바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