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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아무튼 문제의 발단은 언제나 그렇듯이 제프리였다. 그는 ‘Tear’에 일하러 다니면서 마치 자신이 그쪽 분야의 전문가라도 된다는 듯이 온갖 사람들의 이상한 취향에 대해 떠들어 대곤 했다. 하루는 ‘Tear’에서 벌어진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듣다가 그만 술에도 취했겠다 흥도 올랐겠다 제프리에게 자신의 취향을 말해 버린 적이 있었다. 지금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지만 그때는 제프리가 정말 신뢰가 가는 친구처럼 느껴졌었다.
제프리는 좋은 녀석이지만 믿을 만한 녀석은 되지 못한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아무튼 잔뜩 취한 그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난 남에게 보여 주는 걸 좀 좋아하는 것 같아.’
‘아, 그런 녀석들이 있지. 누가 보고 있어야만 흥분이 된다나.’
‘맞아. 하지만 정말 남들에게 보여 줄 수는 없으니까 가끔 공중 화장실 같은 곳에서 상상하면서 해결할 때도 있고……. 예전 애인은 아예 이해를 못 하더라고.’
‘용기를 내, 닐! 그런 취향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
그때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닐은 제프리의 멱살을 쥐고 한 백 대 쯤 거칠게 뺨을 날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빌어먹을 용기고 나발이고 아예 제프리에게 그런 취향이 있다는 것 자체를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제프리가 로니 크로거에게 네 애인 취향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제 애인이 가지고 있다는 취향을 알게 된 로니 크로거가 닐에게 한 짓은 간단했다. 약을 먹이고 섹스를 했다.
아니, 정확히는 제프리의 술집에서 몰래 술에 약을 타 먹인 뒤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테이블에 닐을 눕혀 놓고 섹스를 했다. 글쎄, 대체 무슨 약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이성이 날아갈 정도로 기분이 붕붕 뜨는 약이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닐이 실실 웃는 사이 로니 크로거는 살살 그를 꼬드겨서 테이블에 눕혔다.
약에 취한 닐은 제정신이라면 할 수 없었을 일들을 테이블 위에서 해치웠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는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 야유 소리, 낄낄 웃는 소리가 그날로부터 며칠 동안이나 한참을 귓가에 울려 대는 것 같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사람들에게 걸레라고 소문이 나서 한동안 밖에 나가지도 못했다. 평판도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그런데 이 눈치 없는 자식은―닐이 이를 악물었다―아직까지도 자신이 정말로 좋아서 자의로 그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한 번만 더 제프리가 적성이니 어쩌니 떠들어 댄다면 그때야말로 정말 멱살을 잡고 두드려 패 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닐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놀랍게도 사장이 직원의 터무니없는 제안을 받아들여 줬기 때문이었다.
“좋아.”
“정말입니까?!”
제프리는 뛸 듯이 좋아하며 정말 그 자리에서 펄쩍 뛰다시피 했는데, 그 모습을 보자니 닐의 마음속에서 저 기쁨을 망쳐 주고 싶은 심술이 새록새록 생겨났다. 과거 일을 떠올려 보면 자신에게는 다소 그런 권리가 있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
“원판은 그렇게 나쁜 것 같지 않으니까 일단 대강 꾸며 보지. 타냐에게 데려가.”
타냐? 누군지는 몰라도 메이크업 아티스트쯤 되나 보다 생각했던 닐은 별로 달갑지 않아 하는 친구의 얼굴을 보고 단순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아님을 깨달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받아들여진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토를 달지 않았다. 아니면 감히 달 수가 없었든가. 미하일은 귀찮은 얼굴로 계산대 아래에서 절그럭거리고 있던 것들을 들어 올렸다. 닐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였다.
그가 계속 만지고 있던 것은 기계 부품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안드로이드의 머리였다. 반은 인조 피부가 덮여 있고 나머지 반은 그대로 골조가 드러난 그 물건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모양새였다. 아니, 잠시만. 닐이 파란색의 안구와 예쁘게 늘어진 긴 머리카락을 보며 충격에 빠졌다. 이거 보석 시리즈의 하나인 안드로이드 사파이어 아냐? 그가 알고 있는 사파이어와는 좀 다른 것 같았지만 어쨌든 저 색의 안드로이드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걸 직접 만드는 장면을 볼 수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눈빛이 반짝거리는 닐을 미하일이 잠시 의아한 얼굴로 흘깃 보고는 이내 흥미를 껐다. 그러고는 그대로 옆구리에 머리를 끼고 휘적휘적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휴, 십년감수했네.”
제프리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진심으로 사장과의 대면이 많이 두렵고 긴장되던 눈치였다. 하긴 보석 시리즈의 안드로이드라면 어지간한 돈으로는 감당도 되지 않을 터다.
그나저나 호박(Amber)이라. 닐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알기로 보석 시리즈에 크리스털 혹은 루비 등은 있어도 호박이란 보석은 없었다. 아, 그렇군. 과거에는 제프리가 망가트려서 출시되지 않은 모양이다. 동시에 닐은 이전 삶에서 이 시기의 제프리가 갑자기 여기저기 돈을 꾸러 돌아다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는 일이 잘 안되었던 모양이지. 뭔가 찜찜하게 마음에 걸렸으나 미루어 두고 닐은 일단 궁금한 걸 물었다.
“그런데 타냐는 대체 누구야?”
“으으. 있어, 좀…… 또라이 같은 알파가.”
닐과 함께 지하로 향하던 제프리가 질색팔색하는 표정으로 팔을 문질러 댔다. 듣자 하니 미하일이 그 타냐라는 사람에게 데려가라고 한 이유는 이 회원제 클럽에서 진행되는 대형쇼나 이벤트 의상이나 장식 등을 전담할 정도로 손재주와 보는 눈이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보통은 바텐더 일을 하니까 항상 지하에 있거든. 아무튼 칵테일 하나는 무진장 끝내주게 잘 만들어.”
“으흠.”
“참고로 말하는데 남자니까 헷갈리지 말고.”
지하의 칵테일 바로 내려온 닐은 제프리가 왜 그런 충고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타냐는 굉장히 여자인지 남자인지 헷갈리게 생긴 외모였는데, 사실 그런 중성적인 외모는 놀랄 축에도 끼지 않을 정도로…… ‘소름 끼칠 정도로’ 놀라운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야?”
타냐가 약간 느릿느릿한 어조로 모둠 과일을 다듬으며 물었다. 손님에게 내주는 건가, 하고 바라보고 있자니 예쁘게 깎아서는 쏙쏙 자신의 입으로 넣는 중이었다. 닐은 그 예쁜 모둠 과일 조각에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그렇지 않으면 타냐를 보고 뭔가 무례한 표정을 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닐,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모든 취향은 존중해 줘야 해. 알겠어? 아무리 하드, 고어한 취향이라도 존중해 줘야 한다고. ……그건 그렇고 대체 이마에 있는 저 작은 뿔은 어떻게 박은 거지?
“먹을래?”
“가, 감사합니다.”
닐이 모둠 과일만 쳐다보고 있는 걸 먹고 싶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그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일단 넙죽 받아 들자 닐과는 다르게 조금 인상을 쓰고 있던 제프리가 정신을 차렸다.
“사장님이 얘 좀 꾸며 달라는데요.”
“어떤 식으로?”
오렌지 껍질을 슥슥 능숙한 솜씨로 벗겨 내며 타냐가 역시나 덤덤한데도 이상하게 허스키한 느낌으로 물었다. 얼마나 깔끔한 솜씨이던지 마치 조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좀 취향 타는 취미기는 해도 타냐의 모습에는 일종의 미적 기준이 있었다. 신체적인…… 아무튼 그런 부분은 닐의 취향이 아니지만 옷이나 헤어스타일은 확실히 센스가 좋았다.
“안드로이드처럼.”
“안드로이드처럼?”
“말 그대로 딱 안드로이드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 일이구요.”
“좋아.”
타냐는 휘리릭 과도를 돌려 행주 위에 푹 꽂아 넣고는 다 깐 오렌지를 닐의 손에 안겨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닐은 약간 당황하다가 오렌지 반을 쪼개 제 친구에게 주려고 했지만 제프리는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난 이제 일하러 간다.”
“나만 여기 내버려 두고?”
“넌 그냥 꾸며 주는 대로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잘 부탁한다, 하고 제프리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저 혼자서 휭하니 위로 올라가 버렸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닐은 서둘러 오렌지를 우물우물 까먹으며 타냐를 졸졸 따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타냐의 등에 손바닥만 한 작은 날개가 달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단순한 액세서리가 아니라 피어싱으로 연결해 둔 것이었다. 얼른 숨을 작게 들이쉬며 시선을 돌렸다. 그는 별로 비위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일단 씻고 나와.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사우나실과 의상실을 합한 것처럼 보이는 장소에 도착한 타냐가 무심한 어조로 닐에게 휙 수건과 목욕용품을 던져 주었다. 좀 더러워 보였나……? 아니면 이게 그 꾸미는 일의 시작인가. 닐이 어정쩡하게 수건을 받아 들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시킨 대로 한참을 몸 어느 곳에서나 뽀득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깨끗이 씻었다. 닐이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타냐는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닐은 몇 가지인지 셀 수도 없는 종류의 향유와 바디 오일, 그리고 젤이 제 몸에 발리고, 씻기고, 또다시 발리는 일을 겪어야만 했다.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 주는 마사지와 각질 제거 작업까지는 좀 부끄러운 마음으로 그럭저럭 참아 낼 수 있었는데, 이윽고 타냐가 손에 든 것을 보자 닐은 그만 식겁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저, 저는…….”
그가 뭐라 항변하려는 것을 타냐가 그 특유의 허스키하면서도 섹시한 어조로 딱 잘랐다.
“가랑이와 겨드랑이에 털 달린 안드로이드는 없어.”
“…….”
“알았으면 이만 다리 벌려. 팔 올리고.”
“…….”
“뭐해? 묶인 채로 시작하고 싶어? 나 시간 없는 사람이야. 빨리.”
“……네에.”
자신의 취향이 취향이다 보니 제 거시기를 보여 주는 일로 혹시나 민망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잠시 걱정했지만, 정말 잠시뿐이었다. 타냐는 닐이 헐벗든 말든 상관도 하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속성으로 해치우는 제모는 마취약도 안 쓰고 하는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파서 흥분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다소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제모 시간까지 지나자 닐은 시간이 지나면 좀 사그라질 만한, 그러나 당장 그 순간에는 강력하고도 사소한 원한이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제프리의 부탁을 들어주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절반이 아니라 꼭 월급의 70퍼센트 정도는 떼어 가야겠다…….
제모를 한 뒤 가랑이와 겨드랑이에는 쿨팩을, 얼굴에는 또다시 뭔지 모를 향기 나는 팩을 덮어 준 타냐는 한쪽 구석에서 뭔가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가 들고 온 건 홀로그램처럼 반짝거리는 가짜 타투 스티커였다. 숫자와 알파벳이 적절히 섞인 걸 보아하니 안드로이드 제조 번호인 모양이었다. 타냐는 쇄골 바로 아래와 팔목에서 한 뼘보다 조금 윗부분에 붙인 뒤 화끈한 느낌을 주는 스프레이까지 뿌려 단단히 고정시켰다.
“음.”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얼굴에 뭔가 뿌리고 얇게 바르는 일을 끝으로 한참을 위아래로 닐을 살펴보더니 제법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닐은 민망한 기분으로 손질되어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 머리를 만졌다. 자신의 모습이 궁금할 닐을 위해 타냐가 거울을 보여 주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너무 생소하고 완전히 처음 보는 외모라 그는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내가 원래…… 이런 얼굴이었나?
“괜찮지?”
“네…….”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닐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게 정돈된 피부 위에서 반짝거리는 홀로그램 스티커나, 언뜻 자연스럽게 헝클어진 것처럼 보이는 멋진 머리나…… 눈썹……. 거울 속의 제 파란 눈동자 위로 인공적인 빛이 고여 말갛게 빛났다.
“그럼, 누가 했는데.”
미하일이 찾아온 것은 타냐가 마지막으로 한 바퀴 빙글빙글 주위를 돌며 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괜찮게 됐나?”
하도 한참 동안 알몸으로 있어서 타냐에게는 거의 수치심에 대한 면역이 강력하게 생기려고 하던 차에 갑자기 미하일이 나타나니 닐은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자 유일하게 몸을 가리고 있던 가랑이의 아이스 팩 쪼가리가 툭 떨어졌다. 미하일의 시선이 바닥에 철퍽 소리를 내며 달라붙은 아이스 팩에 향했다. 닐은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야, 야, 야. 안 돼. 안 돼. 일어나지 마. 약간 울상이 되어 닐이 필사적으로 제 다리 사이를 가리려고 애를 썼다.
“어떻습니까?”
타냐가 다소 의기양양한 태도로 물었는데 닐에게 대하던 것과는 다소 좀 느낌이 달랐다. 닐에게는 알파처럼 굴었다면 미하일에게는…… 마치 오메가처럼 고분고분하게 굴었다고 할까. 아까 분명 제프리가 알파라고 하지 않았나? 아무튼 그가 미하일을 대하는 태도에는 단순히 사장을 대하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그 말에 미하일이 스윽 닐을 위아래로 살폈다.
“글쎄……. 금발은 좀 싸구려 같은데.”
그 평가가 준 마음의 상처 탓에 타냐가 꾸민 결과를 보고 조금씩 살아나던 닐의 자신감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귀가 다시 빨갛게 달아올라서 이리저리 시선만 방황하고 있자니 미하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은색이 더 낫겠는걸.”
놀라서 닐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바로 그때 처음으로 미하일과 닐의 시선이 딱 정면으로 마주쳤다. 미하일이 눈이, 그리고 그 얼굴이 얼마나 근사하고 아름답던지, 간신히 숨을 쉬면서도 닐은 그의 시선을 도무지 피할 수가 없었다. 미하일이 조금 눈을 접어 웃자 완전히 숨이 막혔다.
사실 검은색 머리가 더 어울리겠다는 미하일의 말에 나름 놀란 이유가 있다. 원래 닐의 머리는 금발이 아니라 검은색이었으니까. 로니 크로거는 닐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며 간섭하는 걸 좋아했는데, 금발로 염색한 이 머리카락도 그의 개인적인 취향 중 하나였다. 금발이어야 그나마 칙칙한 분위기가 가려진다는 이유였다.
“검은색 말이죠.”
고개를 끄덕이며 타냐가 염색약을 집어 들었다. 염색약 특유의 알싸한 향기가 잠시간 맴돈 후 순식간에 닐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그는 가만히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색이라 좀 낯설기까지 했다. 그리고 확실히 미하일의 말대로 검은색이 더 잘 어울렸다.
“이름이 뭐야?”
“예?”
“당신 이름. 뭐냐고.”
제프리와 타냐에게만 말을 걸었지 이제까지 닐은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말도 붙이지 않던 미하일이 가만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장신이라 좀 키 차이가 났다. 닐은 문득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잘생긴 남자가 앞에 있으니 반사적으로 설레었다. 미하일이 웃자 그도 어색하게 웃었다.
“닐 테일러예요.”
“좋아. 테일러.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 안드로이드는 그냥 안드로이드가 아니야. 이 호텔이 무슨 호텔인지는 알고 있지?”
“그럼요.”
닐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프리에게서 하도 많이 들어 이 호텔 ‘Tear’가, 사실은 호텔로 위장한 고급 회원제 SM클럽이란 건 잘 알고 있다. 1층부터 5층까지는 마사지샵, 성인용품점, 사우나실, 레스토랑 등 주로 고객 서비스를 위한 곳이고 6층부터 꼭대기 층까지는 스위트룸과 온갖 테마의 룸으로 가득 찼다는 것도.
그러니 닐이 할 안드로이드가 어떤 종류이겠는가. 이미 제프리가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건 다르거든. 나중에 놀라서 사고를 치거나 하면 곤란하니까 일단 체험을 해 볼 생각인데.”
그렇게 말하며 미하일이 주머니에서 뭔가 꺼냈다. 닐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였다. 자신이 죽었던 때가 떠오르면서 저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제 목에 손이 갔다. 사장이 꺼낸 것은 목을 딱 맞게 감싸도록 제작된 초커형 목줄이었다.
“그건 싫어요.”
“음?”
닐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목이 졸려 죽는 경험을 한 뒤로는 목도리는 물론이고 목걸이까지, 절대로 자신의 목을 심하게 조르지 않는 물건이라도 죄다 착용할 수가 없었다. 숨이 막히다 못해 호흡곤란이 오고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탓이었다. 굳은 얼굴로 닐이 물러나자 미하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싫나?”
“네.”
새로 얻게 된 아르바이트를 망치게 되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흠.”
미하일이 목줄을 들고 다가서자 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그가 목줄을 한번, 닐을 한번 바라보고는 가타부타 별 말없이 다시 내려 두었다.
“알았어. 타냐, 그러면 목에 두를 만한 것으로 홀로그램 타투.”
목줄을 다시 내려놓은 순간부터 갑자기 미하일을 향한 호감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닐은 조금 당황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로니 크로거와 지내 왔던 탓일까? 하지만 호감을 가진들 무얼한다고, 닐이 제 마음을 잘 다독여 보았다.
“어차피 안드로이드에 목줄은 좀 무식해 보여서 다른 게 필요하긴 했어. 지금 바꾸도록 하지.”
갑자기 닐의 머릿속에 이런 게 떠올랐다. 내가 회귀를 한 게…… 혹시 미하일을 만나기 위해서인가?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과 만나기 위해 회귀를 했다는 건 너무 주제넘는 상상이 아닌가. 이런 사람과 제가 잘되는 건 상상도 되지 않았다. 고개를 저으며 닐이 미하일이 골라 내미는 옷을 입었다. 뭔가 했더니 옷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검은색 천 쪼가리였는데 정확히는 피부에 찰싹 달라붙는 소재의 검은 브리프였다.
닐이 부끄러워하며 옷을 입는 사이 타냐가 오펄 색으로 반짝거리는 홀로그램 타투 스티커를 만들어 그의 목에 붙이기 시작했다. 손이 닿는 순간부터 바짝 긴장했지만, 다행히도 이 가짜 타투 스티커는 피부에 붙여도 거의 느낌이 없어서 트라우마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Tear’에서 낸 안드로이드라면 다 몸에 새겨져 있는 특유의 홀로그램 스티커 덕에 정말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좀 설레기도 하고 약간 쪽팔리기도 해서 닐의 뺨에 홍조가 올라왔다.
“좋아, 한 바퀴 돌아 봐.”
약간 어색해하면서 닐이 한 바퀴 돌자 미하일이 다시 손가락으로 부리면서 시켰다. 좀 더 자연스럽게. 지시에 따라 노력하며 빙글 돌자 타냐와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에 주제도 모르고 닐의 마음속 한구석에서 다시 희미한 자신감이 얼쩡거렸다.
“이름을 무엇으로 하지…….”
동공이 보일 정도로 미하일이 바짝 다가오자 주춤 뒤로 물러난 닐의 허리에 방금까지 누워 마사지와 제모를 받던 돌침대의 딱딱한 모서리가 닿았다. 생각에 잠긴 미하일의 손가락이 다가닥 단단한 침대 윗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오싹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지금 환경이 좀 추워서 그런가? 헷갈려서 잘 모르겠네…….
“귀여우니까…….”
“큐티요?”
홀로그램 제작할 준비를 하던 타냐가 다시 아까처럼 무심하면서 허스키하면서 섹시한…… 아무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오묘하면서도 매력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웃음소리가 잠시 난 것 같은데 닐은 타냐가 냈는지 미하일이 냈는지 아니면 너무 떨려서 제 심장이 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프리티(Pretty).”
엥? 예상치 못한 이름에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때 미하일이 툭 닐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화들짝 놀라자 그가 씩 웃으며 느리게 속삭였다.
“당신, 섰어.”
***
완전히 붉어진 얼굴로 닐이 엉거주춤 종종 미하일의 뒤를 따라갔다. 섰다는 이야기에 몹시 당황해 넘어질 뻔한 걸 잡아 준 미하일은 순식간에 다시 싹 웃음기를 지웠다. 도무지 종잡을 수도 없고 속내를 알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닐이 하도 허둥지둥하자 타냐가 가엾게 보았는지 원래 저런 사람이니 그렇게 귀엽게 굴지 말라는 조언까지 해 줄 정도였다.
아니 잠시만, 내가 언제 귀엽게 굴었다고? 얼빠지게 굴었다면 모를까…….
아무튼 도망치듯 피한 화장실에서 대충 흥분을 가라앉히고 온 뒤 따라가는 상황에서도 화끈화끈하니 얼굴에 열이 올랐다. 달랑 브리프 한 장 차림으로 이런 고급스러운 호텔 복도를 걸어가 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맨발에 닿는 카펫의 느낌이 푹신하고 부드러운 게 확실히 죽여주게 끝내주기는 했다.
“…….”
걸어가면서 닐은 흘깃흘깃 미하일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걸어가는 내내 핸드폰만 쳐다보면서 뭔가 열심히 메시지를 보내느라 아무런 말도 없었다. 사장이 그러니 확정도 안 난 임시 고용인에 불과한 닐이 뭔가 말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따라가는 수밖에.
매장으로 다시 돌아오니 제프리가 열심히 바닥을 쓸고 닦고 있다가 딸랑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헤 입을 벌렸다. 마치 저를 처음 보는 듯한 태도에 우쭐해지는 마음이 조금 고개를 들었다. 미하일은 제프리가 무슨 반응을 보여 주든 상관치 않고 휙 지나쳐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졸졸 따라 들어가자 작은 무대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무대라고는 해도 바닥 위로 무릎 높이의 아주 커다란 원형 플라스틱판이 놓여 있는 정도였다. 그중 한 무대에는 벌써 누군가가 누워 있는 중이었다. 레이스가 하늘거리는 야한 속옷을 입고 있는 금발의 여성으로, 부드러워 보이는 가슴과 팔에 레이디라는 모델명과 무언지 모를 숫자들이 적힌 홀로그램이 반짝거렸다. 여성 안드로이드였다.
닐은 이 안드로이드를 보고 제법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은 인터넷에서 영상들을 보며 간접적으로 체험하기만 했을 뿐 실제로 미하일의 안드로이드를 직접 보지는 못했던 까닭이었다. 그의 안드로이드 레이디는 정말로…… 사람 같았다.
부드러운 피부, 미소 짓는 분홍색의 입술, 치아, 깜박이는 눈꺼풀……. 구불거리는 금발과 숨을 쉬는 것처럼 들썩이는 가슴, 이따금 뒤척이는 몸짓.
“정말…….”
깊은 한숨을 쉬면서 닐이 중얼거리자 미하일이 응? 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는 완전히 정신이 빠져 레이디를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다워요.”
“그렇다고 반하면 안 돼. 반할 거라면 안드로이드를 사고 나서 반해.”
현실적인 미하일의 말을 듣고 나서야 닐은 시무룩해져선 현실로 돌아왔다. 하긴, 엄청나게 비싼 안드로이드지. 예쁘게 방긋방긋 미소 짓고 있던 안드로이드 레이디는 닐이 가까이 다가가자 수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안녕, 레이디.”
닐은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며 레이디에게 인사를 돌려주었다. 그러자 안드로이드가 희고 고른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상품 진열대에서 뭔가 열심히 고르고 있던 미하일이 돌연 홱 돌아서며 레이디를 쳐다봤다. 아니, 사실은 거의 쏘아보는 수준이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닐은 레이디에 정신이 빠져 있느라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음……. 프리티야.”
닐 테일러라고 말하려다가 순간 힐끔 제 가슴팍에 붙은 홀로그램을 바라본 닐이 얼른 고쳐 말했다. 어쨌든 자신은 지금 안드로이드 프리티가 아니겠는가. 레이디는 두 손을 꼭 모아 쥐며 마치 나비처럼 길고 풍성한 금색 속눈썹을 예쁘게 파닥거려 보였다. 그러더니 다음과 같이 수작을 걸었다.
“괜찮다면 내 옆에 앉지 않을래요? 당신과 함께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싶어요, 프리티.”
그때 갑자기 미하일이 성큼 앞으로 걸어오는 바람에 닐이 조금 놀랐다. 팔짱을 낀 그가 다소 딱딱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레이디, 명령 프로토콜 A-002.”
“명령을 수행합니다. 10초 뒤 포맷이 시작됩니다.”
갑자기 레이디가 예쁘게 두 손을 꼭 모아 쥔 상태 그대로 덜거덕 고개를 숙이며 얼어붙는 통에 닐은 좀 놀랐다. 생기를 잃은 모습은 아까와는 달리 더할 나위 없이 부자연스럽고 어색해 보여 안드로이드라는 게 이제 실감이 났다. 그나저나 이건 점검의 일종인가? 미하일과 레이디를 힐끔거리던 닐은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이 윤활액으로 쓰이는 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덜컥 다시 긴장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모든 포맷이 완료되었습니다.”
레이디가 다시 고개를 들며 상냥하게 목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닐을 바라보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요.”
“안녕…….”
미하일의 눈치를 보면서 닐이 레이디에게 다시 인사했다. 레이디가 수줍게 손으로 입을 가리며 닐을 예쁘게 올려다보았다.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나와 함께 있어요. 그 말을 듣자 이제 숫제 미하일의 얼굴은 거의 구겨진 상태였다. 마침내 닐이 처음으로 미하일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레이디를 한참 노려보던 미하일이 한참 만에 아니, 하고 대답하고는 다른 무대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아직 홍보 시작하기 전이니까 여기서 가볍게 테스트를 해 보자. 일단 앉아 봐.”
“그냥…… 이렇게요?”
“양아치처럼 털썩 앉지 말고.”
닐의 자세를 교정해 주면서 미하일이 무심하게 충고했다. 잡지 모델 같은 걸 보고 참고하면 될 거야. 아무튼 이렇게 저렇게 어떻게 자세를 잡은 닐이 눈을 깜박이며 올려다보자 미하일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어떤 분위기가 좋나? 안드로이드마다 성격 패턴 설정이 다르니까……. 태도는 편할 대로 취해도 돼. 기본적으로는 유혹하는 분위기고, 튕기는 부위기, 애교 부리는 분위기, 까칠한 분위기, 반항적인 분위기 등등이 있거든.”
완전히 처음 듣는 설명에 닐이 조금 입을 벌렸다. 미하일이 그런 닐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아니면 백치도 괜찮겠는데.”
“네?”
“엎드려 봐.”
우물쭈물 닐이 무대 위에 엎드렸다. 대리석 무대라고는 해도 바닥에는 푹신하고 고급스러운 양모 카펫이 깔려 있어서 딱히 무릎이 베기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미하일의 손이 등에 닿자 반사적으로 몸이 굳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안드로이드는 사용자의 명령에 거부하지 않고 충실히 따르도록 되어 있어.”
“알고 있어요.”
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이 매장에 들르는 고객들이 무슨 짓을 시켜도 해야 한다는 거야.”
그것 또한 알고 있다. 제프리가 이런 부탁을 할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으니까. 뭐 빌어먹을 놈의 적성이 어쩌고저쩌고……. 아무리 취향에 맞는다고 해도 수치심을 못 느낀다는 건 아닌데, 생각해 보면 제프리 이 자식도 꽤나 나쁜 놈이었다.
아무튼 다음으로 이어진 미하일의 말은 퍽 엉뚱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헛소리처럼 들렸다.
“러시아에서는 직원들의 복지를 항상 최우선으로 여겨.”
“네?”
“그리고 난 러시아인이지.”
“……네?”
어리둥절해하는 닐을 엎드리게 만들고 이리저리 살피던 미하일이 한쪽 발목을 잡아당겨 자연스럽게 둥글게 카펫 위에 눕도록 만들었다. 머리카락 모양을 이리저리 다듬거나 손톱 모양을 살피고 위아래로 꼼꼼히 상태를 체크하는 모습이 굉장히 전문적으로 보였는데, 그는 왠지 자신을 안드로이드 다루듯 체크한다는 느낌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러시아…… 복지요?”
미하일이 턱을 붙잡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닐이 물었다.
“아, 잘 이해가 안 가나?”
안드로이드, 고객, 러시아, 직원 복지. 이 네 단어의 연관성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일단 시범을 보여 주지.”
아까부터 레이디에게 다소 이상한 기색인 미하일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미심쩍은 시선을 힐끗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디는 턱을 괴고 닐을 바라보며 방긋방긋 꽃처럼 웃고 있던 참이었다.
“레이디.”
미하일이 정말 아가씨 대하듯 사뭇 다정하게 뺨을 쓰다듬자 레이디가 발그레한 얼굴로 얼굴을 문지르며 애교를 부렸다. 나도 저렇게 해야 하나? 저렇게 할 자신은 없는데……. 아무튼 닐이 열심히 바라보는 동안 연인에게 하듯 미하일이 명령을 내렸다.
“자위해 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레이디가 다리를 벌리더니 속옷 위로 손가락을 올려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닐이 입을 조금 벌렸다. 점점 발갛게 달아올라 상기되는 뺨이나 반쯤 감긴 눈꺼풀, 달게 들리는 신음 소리에 이내 젖기 시작해 질척거리는 야한 소리까지 한 치의 위화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시 이어지는 미하일의 명령에 레이디가 이번에는 입고 있던 속옷을 벗고는 엎드려 둥글고 흰 예쁜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한 치의 수치심도 없는 분위기였다. 그야, 안드로이드이니까 당연하겠지만……. 미하일이 무심한 얼굴로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가 놓자 놀랍게도 사람 피부처럼 손자국도 남았다.
신음 소리부터 체온, 피부까지 이렇게 별 차이가 없다면 과연 안드로이드 대신 사람을 가져다 놓아도 정말 아무도 모를 정도였다. 미하일이 진열대에 있는 샘플 상품 하나를 가져오자 닐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조금도 야한 짓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시큰둥한 얼굴로 엉덩이 사이를 손가락으로 들쑤시다가 딜도를 비부에 밀어 넣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크게 날수록 안드로이드의 신음 소리도 커졌다. 마침내 마구 쑤셔 넣던 손을 떼자 레이디가 그 상태 그대로 엎드려 촉촉한 눈빛으로 미하일을 올려다보았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극히 덤덤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행한 미하일이 닐에게 물었다.
“이런 일도?”
뒤에 생략된 말을 닐은 쉬이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이런 일도 할 수 있느냐 이거겠지……. 보통 사람들이라면 분명 질색할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종종 상상하곤 하던 섹스 판타지와 비슷한 상황이기도 했다……. 돈도 급하고, 취향에도 맞고……. 그러나 이 순간 하필 갑자기 자신의 전 남자친구가 생각날 건 뭐란 말인가. 다시 그 술집에서의 야유 소리가 떠오르는 것 같아 닐이 퍼뜩 고개를 저었다.
‘이 도시를 뜨기 위해서라도 돈은 꼭 있어야 해.’
다시는 그런 끔찍한 식으로 목숨을 잃기 싫었다. 닐이 다짐하느라 잠시 침묵하는 걸 망설인다고 생각했는지 미하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당연히 안전장치도 있어.”
“안전장치요?”
대답 대신 미하일은 갑자기 다짜고짜 레이디가 엎드려 있는 무대 위로 올라섰다. 레이디가 순진하게 눈을 깜박이며 미하일을 시선으로 좇았다. 대뜸 그가 버클을 푸르고 지퍼를 내리자 닐이 헉 소리를 냈다. 그가 아직 다 발기하지 않았는데도 제법 두둑해 보이는 성기를 속옷 위로 주무르자 레이디가 있던 무대가 돌연 붉은색으로 바뀌며 바닥이며 옆면 전체 가득히 흰 글씨로 경고 문구가 떴다.
[본점에서는 외설적인 행위가 금지되어 있으며, CCTV의 촬영이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중입니다.]
아무튼 문제의 발단은 언제나 그렇듯이 제프리였다. 그는 ‘Tear’에 일하러 다니면서 마치 자신이 그쪽 분야의 전문가라도 된다는 듯이 온갖 사람들의 이상한 취향에 대해 떠들어 대곤 했다. 하루는 ‘Tear’에서 벌어진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듣다가 그만 술에도 취했겠다 흥도 올랐겠다 제프리에게 자신의 취향을 말해 버린 적이 있었다. 지금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지만 그때는 제프리가 정말 신뢰가 가는 친구처럼 느껴졌었다.
제프리는 좋은 녀석이지만 믿을 만한 녀석은 되지 못한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아무튼 잔뜩 취한 그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난 남에게 보여 주는 걸 좀 좋아하는 것 같아.’
‘아, 그런 녀석들이 있지. 누가 보고 있어야만 흥분이 된다나.’
‘맞아. 하지만 정말 남들에게 보여 줄 수는 없으니까 가끔 공중 화장실 같은 곳에서 상상하면서 해결할 때도 있고……. 예전 애인은 아예 이해를 못 하더라고.’
‘용기를 내, 닐! 그런 취향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
그때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닐은 제프리의 멱살을 쥐고 한 백 대 쯤 거칠게 뺨을 날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빌어먹을 용기고 나발이고 아예 제프리에게 그런 취향이 있다는 것 자체를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제프리가 로니 크로거에게 네 애인 취향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제 애인이 가지고 있다는 취향을 알게 된 로니 크로거가 닐에게 한 짓은 간단했다. 약을 먹이고 섹스를 했다.
아니, 정확히는 제프리의 술집에서 몰래 술에 약을 타 먹인 뒤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테이블에 닐을 눕혀 놓고 섹스를 했다. 글쎄, 대체 무슨 약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이성이 날아갈 정도로 기분이 붕붕 뜨는 약이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닐이 실실 웃는 사이 로니 크로거는 살살 그를 꼬드겨서 테이블에 눕혔다.
약에 취한 닐은 제정신이라면 할 수 없었을 일들을 테이블 위에서 해치웠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는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 야유 소리, 낄낄 웃는 소리가 그날로부터 며칠 동안이나 한참을 귓가에 울려 대는 것 같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사람들에게 걸레라고 소문이 나서 한동안 밖에 나가지도 못했다. 평판도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그런데 이 눈치 없는 자식은―닐이 이를 악물었다―아직까지도 자신이 정말로 좋아서 자의로 그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한 번만 더 제프리가 적성이니 어쩌니 떠들어 댄다면 그때야말로 정말 멱살을 잡고 두드려 패 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닐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놀랍게도 사장이 직원의 터무니없는 제안을 받아들여 줬기 때문이었다.
“좋아.”
“정말입니까?!”
제프리는 뛸 듯이 좋아하며 정말 그 자리에서 펄쩍 뛰다시피 했는데, 그 모습을 보자니 닐의 마음속에서 저 기쁨을 망쳐 주고 싶은 심술이 새록새록 생겨났다. 과거 일을 떠올려 보면 자신에게는 다소 그런 권리가 있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
“원판은 그렇게 나쁜 것 같지 않으니까 일단 대강 꾸며 보지. 타냐에게 데려가.”
타냐? 누군지는 몰라도 메이크업 아티스트쯤 되나 보다 생각했던 닐은 별로 달갑지 않아 하는 친구의 얼굴을 보고 단순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아님을 깨달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받아들여진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토를 달지 않았다. 아니면 감히 달 수가 없었든가. 미하일은 귀찮은 얼굴로 계산대 아래에서 절그럭거리고 있던 것들을 들어 올렸다. 닐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였다.
그가 계속 만지고 있던 것은 기계 부품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안드로이드의 머리였다. 반은 인조 피부가 덮여 있고 나머지 반은 그대로 골조가 드러난 그 물건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모양새였다. 아니, 잠시만. 닐이 파란색의 안구와 예쁘게 늘어진 긴 머리카락을 보며 충격에 빠졌다. 이거 보석 시리즈의 하나인 안드로이드 사파이어 아냐? 그가 알고 있는 사파이어와는 좀 다른 것 같았지만 어쨌든 저 색의 안드로이드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걸 직접 만드는 장면을 볼 수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눈빛이 반짝거리는 닐을 미하일이 잠시 의아한 얼굴로 흘깃 보고는 이내 흥미를 껐다. 그러고는 그대로 옆구리에 머리를 끼고 휘적휘적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휴, 십년감수했네.”
제프리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진심으로 사장과의 대면이 많이 두렵고 긴장되던 눈치였다. 하긴 보석 시리즈의 안드로이드라면 어지간한 돈으로는 감당도 되지 않을 터다.
그나저나 호박(Amber)이라. 닐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알기로 보석 시리즈에 크리스털 혹은 루비 등은 있어도 호박이란 보석은 없었다. 아, 그렇군. 과거에는 제프리가 망가트려서 출시되지 않은 모양이다. 동시에 닐은 이전 삶에서 이 시기의 제프리가 갑자기 여기저기 돈을 꾸러 돌아다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는 일이 잘 안되었던 모양이지. 뭔가 찜찜하게 마음에 걸렸으나 미루어 두고 닐은 일단 궁금한 걸 물었다.
“그런데 타냐는 대체 누구야?”
“으으. 있어, 좀…… 또라이 같은 알파가.”
닐과 함께 지하로 향하던 제프리가 질색팔색하는 표정으로 팔을 문질러 댔다. 듣자 하니 미하일이 그 타냐라는 사람에게 데려가라고 한 이유는 이 회원제 클럽에서 진행되는 대형쇼나 이벤트 의상이나 장식 등을 전담할 정도로 손재주와 보는 눈이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보통은 바텐더 일을 하니까 항상 지하에 있거든. 아무튼 칵테일 하나는 무진장 끝내주게 잘 만들어.”
“으흠.”
“참고로 말하는데 남자니까 헷갈리지 말고.”
지하의 칵테일 바로 내려온 닐은 제프리가 왜 그런 충고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타냐는 굉장히 여자인지 남자인지 헷갈리게 생긴 외모였는데, 사실 그런 중성적인 외모는 놀랄 축에도 끼지 않을 정도로…… ‘소름 끼칠 정도로’ 놀라운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야?”
타냐가 약간 느릿느릿한 어조로 모둠 과일을 다듬으며 물었다. 손님에게 내주는 건가, 하고 바라보고 있자니 예쁘게 깎아서는 쏙쏙 자신의 입으로 넣는 중이었다. 닐은 그 예쁜 모둠 과일 조각에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그렇지 않으면 타냐를 보고 뭔가 무례한 표정을 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닐,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모든 취향은 존중해 줘야 해. 알겠어? 아무리 하드, 고어한 취향이라도 존중해 줘야 한다고. ……그건 그렇고 대체 이마에 있는 저 작은 뿔은 어떻게 박은 거지?
“먹을래?”
“가, 감사합니다.”
닐이 모둠 과일만 쳐다보고 있는 걸 먹고 싶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그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일단 넙죽 받아 들자 닐과는 다르게 조금 인상을 쓰고 있던 제프리가 정신을 차렸다.
“사장님이 얘 좀 꾸며 달라는데요.”
“어떤 식으로?”
오렌지 껍질을 슥슥 능숙한 솜씨로 벗겨 내며 타냐가 역시나 덤덤한데도 이상하게 허스키한 느낌으로 물었다. 얼마나 깔끔한 솜씨이던지 마치 조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좀 취향 타는 취미기는 해도 타냐의 모습에는 일종의 미적 기준이 있었다. 신체적인…… 아무튼 그런 부분은 닐의 취향이 아니지만 옷이나 헤어스타일은 확실히 센스가 좋았다.
“안드로이드처럼.”
“안드로이드처럼?”
“말 그대로 딱 안드로이드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 일이구요.”
“좋아.”
타냐는 휘리릭 과도를 돌려 행주 위에 푹 꽂아 넣고는 다 깐 오렌지를 닐의 손에 안겨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닐은 약간 당황하다가 오렌지 반을 쪼개 제 친구에게 주려고 했지만 제프리는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난 이제 일하러 간다.”
“나만 여기 내버려 두고?”
“넌 그냥 꾸며 주는 대로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잘 부탁한다, 하고 제프리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저 혼자서 휭하니 위로 올라가 버렸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닐은 서둘러 오렌지를 우물우물 까먹으며 타냐를 졸졸 따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타냐의 등에 손바닥만 한 작은 날개가 달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단순한 액세서리가 아니라 피어싱으로 연결해 둔 것이었다. 얼른 숨을 작게 들이쉬며 시선을 돌렸다. 그는 별로 비위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일단 씻고 나와.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사우나실과 의상실을 합한 것처럼 보이는 장소에 도착한 타냐가 무심한 어조로 닐에게 휙 수건과 목욕용품을 던져 주었다. 좀 더러워 보였나……? 아니면 이게 그 꾸미는 일의 시작인가. 닐이 어정쩡하게 수건을 받아 들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시킨 대로 한참을 몸 어느 곳에서나 뽀득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깨끗이 씻었다. 닐이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타냐는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닐은 몇 가지인지 셀 수도 없는 종류의 향유와 바디 오일, 그리고 젤이 제 몸에 발리고, 씻기고, 또다시 발리는 일을 겪어야만 했다.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 주는 마사지와 각질 제거 작업까지는 좀 부끄러운 마음으로 그럭저럭 참아 낼 수 있었는데, 이윽고 타냐가 손에 든 것을 보자 닐은 그만 식겁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저, 저는…….”
그가 뭐라 항변하려는 것을 타냐가 그 특유의 허스키하면서도 섹시한 어조로 딱 잘랐다.
“가랑이와 겨드랑이에 털 달린 안드로이드는 없어.”
“…….”
“알았으면 이만 다리 벌려. 팔 올리고.”
“…….”
“뭐해? 묶인 채로 시작하고 싶어? 나 시간 없는 사람이야. 빨리.”
“……네에.”
자신의 취향이 취향이다 보니 제 거시기를 보여 주는 일로 혹시나 민망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잠시 걱정했지만, 정말 잠시뿐이었다. 타냐는 닐이 헐벗든 말든 상관도 하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속성으로 해치우는 제모는 마취약도 안 쓰고 하는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파서 흥분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다소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제모 시간까지 지나자 닐은 시간이 지나면 좀 사그라질 만한, 그러나 당장 그 순간에는 강력하고도 사소한 원한이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제프리의 부탁을 들어주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절반이 아니라 꼭 월급의 70퍼센트 정도는 떼어 가야겠다…….
제모를 한 뒤 가랑이와 겨드랑이에는 쿨팩을, 얼굴에는 또다시 뭔지 모를 향기 나는 팩을 덮어 준 타냐는 한쪽 구석에서 뭔가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가 들고 온 건 홀로그램처럼 반짝거리는 가짜 타투 스티커였다. 숫자와 알파벳이 적절히 섞인 걸 보아하니 안드로이드 제조 번호인 모양이었다. 타냐는 쇄골 바로 아래와 팔목에서 한 뼘보다 조금 윗부분에 붙인 뒤 화끈한 느낌을 주는 스프레이까지 뿌려 단단히 고정시켰다.
“음.”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얼굴에 뭔가 뿌리고 얇게 바르는 일을 끝으로 한참을 위아래로 닐을 살펴보더니 제법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닐은 민망한 기분으로 손질되어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 머리를 만졌다. 자신의 모습이 궁금할 닐을 위해 타냐가 거울을 보여 주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너무 생소하고 완전히 처음 보는 외모라 그는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내가 원래…… 이런 얼굴이었나?
“괜찮지?”
“네…….”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닐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게 정돈된 피부 위에서 반짝거리는 홀로그램 스티커나, 언뜻 자연스럽게 헝클어진 것처럼 보이는 멋진 머리나…… 눈썹……. 거울 속의 제 파란 눈동자 위로 인공적인 빛이 고여 말갛게 빛났다.
“그럼, 누가 했는데.”
미하일이 찾아온 것은 타냐가 마지막으로 한 바퀴 빙글빙글 주위를 돌며 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괜찮게 됐나?”
하도 한참 동안 알몸으로 있어서 타냐에게는 거의 수치심에 대한 면역이 강력하게 생기려고 하던 차에 갑자기 미하일이 나타나니 닐은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자 유일하게 몸을 가리고 있던 가랑이의 아이스 팩 쪼가리가 툭 떨어졌다. 미하일의 시선이 바닥에 철퍽 소리를 내며 달라붙은 아이스 팩에 향했다. 닐은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야, 야, 야. 안 돼. 안 돼. 일어나지 마. 약간 울상이 되어 닐이 필사적으로 제 다리 사이를 가리려고 애를 썼다.
“어떻습니까?”
타냐가 다소 의기양양한 태도로 물었는데 닐에게 대하던 것과는 다소 좀 느낌이 달랐다. 닐에게는 알파처럼 굴었다면 미하일에게는…… 마치 오메가처럼 고분고분하게 굴었다고 할까. 아까 분명 제프리가 알파라고 하지 않았나? 아무튼 그가 미하일을 대하는 태도에는 단순히 사장을 대하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그 말에 미하일이 스윽 닐을 위아래로 살폈다.
“글쎄……. 금발은 좀 싸구려 같은데.”
그 평가가 준 마음의 상처 탓에 타냐가 꾸민 결과를 보고 조금씩 살아나던 닐의 자신감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귀가 다시 빨갛게 달아올라서 이리저리 시선만 방황하고 있자니 미하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은색이 더 낫겠는걸.”
놀라서 닐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바로 그때 처음으로 미하일과 닐의 시선이 딱 정면으로 마주쳤다. 미하일이 눈이, 그리고 그 얼굴이 얼마나 근사하고 아름답던지, 간신히 숨을 쉬면서도 닐은 그의 시선을 도무지 피할 수가 없었다. 미하일이 조금 눈을 접어 웃자 완전히 숨이 막혔다.
사실 검은색 머리가 더 어울리겠다는 미하일의 말에 나름 놀란 이유가 있다. 원래 닐의 머리는 금발이 아니라 검은색이었으니까. 로니 크로거는 닐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며 간섭하는 걸 좋아했는데, 금발로 염색한 이 머리카락도 그의 개인적인 취향 중 하나였다. 금발이어야 그나마 칙칙한 분위기가 가려진다는 이유였다.
“검은색 말이죠.”
고개를 끄덕이며 타냐가 염색약을 집어 들었다. 염색약 특유의 알싸한 향기가 잠시간 맴돈 후 순식간에 닐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그는 가만히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색이라 좀 낯설기까지 했다. 그리고 확실히 미하일의 말대로 검은색이 더 잘 어울렸다.
“이름이 뭐야?”
“예?”
“당신 이름. 뭐냐고.”
제프리와 타냐에게만 말을 걸었지 이제까지 닐은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말도 붙이지 않던 미하일이 가만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장신이라 좀 키 차이가 났다. 닐은 문득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잘생긴 남자가 앞에 있으니 반사적으로 설레었다. 미하일이 웃자 그도 어색하게 웃었다.
“닐 테일러예요.”
“좋아. 테일러.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 안드로이드는 그냥 안드로이드가 아니야. 이 호텔이 무슨 호텔인지는 알고 있지?”
“그럼요.”
닐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프리에게서 하도 많이 들어 이 호텔 ‘Tear’가, 사실은 호텔로 위장한 고급 회원제 SM클럽이란 건 잘 알고 있다. 1층부터 5층까지는 마사지샵, 성인용품점, 사우나실, 레스토랑 등 주로 고객 서비스를 위한 곳이고 6층부터 꼭대기 층까지는 스위트룸과 온갖 테마의 룸으로 가득 찼다는 것도.
그러니 닐이 할 안드로이드가 어떤 종류이겠는가. 이미 제프리가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건 다르거든. 나중에 놀라서 사고를 치거나 하면 곤란하니까 일단 체험을 해 볼 생각인데.”
그렇게 말하며 미하일이 주머니에서 뭔가 꺼냈다. 닐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였다. 자신이 죽었던 때가 떠오르면서 저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제 목에 손이 갔다. 사장이 꺼낸 것은 목을 딱 맞게 감싸도록 제작된 초커형 목줄이었다.
“그건 싫어요.”
“음?”
닐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목이 졸려 죽는 경험을 한 뒤로는 목도리는 물론이고 목걸이까지, 절대로 자신의 목을 심하게 조르지 않는 물건이라도 죄다 착용할 수가 없었다. 숨이 막히다 못해 호흡곤란이 오고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탓이었다. 굳은 얼굴로 닐이 물러나자 미하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싫나?”
“네.”
새로 얻게 된 아르바이트를 망치게 되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흠.”
미하일이 목줄을 들고 다가서자 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그가 목줄을 한번, 닐을 한번 바라보고는 가타부타 별 말없이 다시 내려 두었다.
“알았어. 타냐, 그러면 목에 두를 만한 것으로 홀로그램 타투.”
목줄을 다시 내려놓은 순간부터 갑자기 미하일을 향한 호감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닐은 조금 당황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로니 크로거와 지내 왔던 탓일까? 하지만 호감을 가진들 무얼한다고, 닐이 제 마음을 잘 다독여 보았다.
“어차피 안드로이드에 목줄은 좀 무식해 보여서 다른 게 필요하긴 했어. 지금 바꾸도록 하지.”
갑자기 닐의 머릿속에 이런 게 떠올랐다. 내가 회귀를 한 게…… 혹시 미하일을 만나기 위해서인가?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과 만나기 위해 회귀를 했다는 건 너무 주제넘는 상상이 아닌가. 이런 사람과 제가 잘되는 건 상상도 되지 않았다. 고개를 저으며 닐이 미하일이 골라 내미는 옷을 입었다. 뭔가 했더니 옷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검은색 천 쪼가리였는데 정확히는 피부에 찰싹 달라붙는 소재의 검은 브리프였다.
닐이 부끄러워하며 옷을 입는 사이 타냐가 오펄 색으로 반짝거리는 홀로그램 타투 스티커를 만들어 그의 목에 붙이기 시작했다. 손이 닿는 순간부터 바짝 긴장했지만, 다행히도 이 가짜 타투 스티커는 피부에 붙여도 거의 느낌이 없어서 트라우마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Tear’에서 낸 안드로이드라면 다 몸에 새겨져 있는 특유의 홀로그램 스티커 덕에 정말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좀 설레기도 하고 약간 쪽팔리기도 해서 닐의 뺨에 홍조가 올라왔다.
“좋아, 한 바퀴 돌아 봐.”
약간 어색해하면서 닐이 한 바퀴 돌자 미하일이 다시 손가락으로 부리면서 시켰다. 좀 더 자연스럽게. 지시에 따라 노력하며 빙글 돌자 타냐와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에 주제도 모르고 닐의 마음속 한구석에서 다시 희미한 자신감이 얼쩡거렸다.
“이름을 무엇으로 하지…….”
동공이 보일 정도로 미하일이 바짝 다가오자 주춤 뒤로 물러난 닐의 허리에 방금까지 누워 마사지와 제모를 받던 돌침대의 딱딱한 모서리가 닿았다. 생각에 잠긴 미하일의 손가락이 다가닥 단단한 침대 윗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오싹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지금 환경이 좀 추워서 그런가? 헷갈려서 잘 모르겠네…….
“귀여우니까…….”
“큐티요?”
홀로그램 제작할 준비를 하던 타냐가 다시 아까처럼 무심하면서 허스키하면서 섹시한…… 아무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오묘하면서도 매력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웃음소리가 잠시 난 것 같은데 닐은 타냐가 냈는지 미하일이 냈는지 아니면 너무 떨려서 제 심장이 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프리티(Pretty).”
엥? 예상치 못한 이름에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때 미하일이 툭 닐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화들짝 놀라자 그가 씩 웃으며 느리게 속삭였다.
“당신, 섰어.”
완전히 붉어진 얼굴로 닐이 엉거주춤 종종 미하일의 뒤를 따라갔다. 섰다는 이야기에 몹시 당황해 넘어질 뻔한 걸 잡아 준 미하일은 순식간에 다시 싹 웃음기를 지웠다. 도무지 종잡을 수도 없고 속내를 알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닐이 하도 허둥지둥하자 타냐가 가엾게 보았는지 원래 저런 사람이니 그렇게 귀엽게 굴지 말라는 조언까지 해 줄 정도였다.
아니 잠시만, 내가 언제 귀엽게 굴었다고? 얼빠지게 굴었다면 모를까…….
아무튼 도망치듯 피한 화장실에서 대충 흥분을 가라앉히고 온 뒤 따라가는 상황에서도 화끈화끈하니 얼굴에 열이 올랐다. 달랑 브리프 한 장 차림으로 이런 고급스러운 호텔 복도를 걸어가 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맨발에 닿는 카펫의 느낌이 푹신하고 부드러운 게 확실히 죽여주게 끝내주기는 했다.
“…….”
걸어가면서 닐은 흘깃흘깃 미하일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걸어가는 내내 핸드폰만 쳐다보면서 뭔가 열심히 메시지를 보내느라 아무런 말도 없었다. 사장이 그러니 확정도 안 난 임시 고용인에 불과한 닐이 뭔가 말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따라가는 수밖에.
매장으로 다시 돌아오니 제프리가 열심히 바닥을 쓸고 닦고 있다가 딸랑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헤 입을 벌렸다. 마치 저를 처음 보는 듯한 태도에 우쭐해지는 마음이 조금 고개를 들었다. 미하일은 제프리가 무슨 반응을 보여 주든 상관치 않고 휙 지나쳐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졸졸 따라 들어가자 작은 무대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무대라고는 해도 바닥 위로 무릎 높이의 아주 커다란 원형 플라스틱판이 놓여 있는 정도였다. 그중 한 무대에는 벌써 누군가가 누워 있는 중이었다. 레이스가 하늘거리는 야한 속옷을 입고 있는 금발의 여성으로, 부드러워 보이는 가슴과 팔에 레이디라는 모델명과 무언지 모를 숫자들이 적힌 홀로그램이 반짝거렸다. 여성 안드로이드였다.
닐은 이 안드로이드를 보고 제법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은 인터넷에서 영상들을 보며 간접적으로 체험하기만 했을 뿐 실제로 미하일의 안드로이드를 직접 보지는 못했던 까닭이었다. 그의 안드로이드 레이디는 정말로…… 사람 같았다.
부드러운 피부, 미소 짓는 분홍색의 입술, 치아, 깜박이는 눈꺼풀……. 구불거리는 금발과 숨을 쉬는 것처럼 들썩이는 가슴, 이따금 뒤척이는 몸짓.
“정말…….”
깊은 한숨을 쉬면서 닐이 중얼거리자 미하일이 응? 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는 완전히 정신이 빠져 레이디를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다워요.”
“그렇다고 반하면 안 돼. 반할 거라면 안드로이드를 사고 나서 반해.”
현실적인 미하일의 말을 듣고 나서야 닐은 시무룩해져선 현실로 돌아왔다. 하긴, 엄청나게 비싼 안드로이드지. 예쁘게 방긋방긋 미소 짓고 있던 안드로이드 레이디는 닐이 가까이 다가가자 수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안녕, 레이디.”
닐은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며 레이디에게 인사를 돌려주었다. 그러자 안드로이드가 희고 고른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상품 진열대에서 뭔가 열심히 고르고 있던 미하일이 돌연 홱 돌아서며 레이디를 쳐다봤다. 아니, 사실은 거의 쏘아보는 수준이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닐은 레이디에 정신이 빠져 있느라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음……. 프리티야.”
닐 테일러라고 말하려다가 순간 힐끔 제 가슴팍에 붙은 홀로그램을 바라본 닐이 얼른 고쳐 말했다. 어쨌든 자신은 지금 안드로이드 프리티가 아니겠는가. 레이디는 두 손을 꼭 모아 쥐며 마치 나비처럼 길고 풍성한 금색 속눈썹을 예쁘게 파닥거려 보였다. 그러더니 다음과 같이 수작을 걸었다.
“괜찮다면 내 옆에 앉지 않을래요? 당신과 함께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싶어요, 프리티.”
그때 갑자기 미하일이 성큼 앞으로 걸어오는 바람에 닐이 조금 놀랐다. 팔짱을 낀 그가 다소 딱딱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레이디, 명령 프로토콜 A-002.”
“명령을 수행합니다. 10초 뒤 포맷이 시작됩니다.”
갑자기 레이디가 예쁘게 두 손을 꼭 모아 쥔 상태 그대로 덜거덕 고개를 숙이며 얼어붙는 통에 닐은 좀 놀랐다. 생기를 잃은 모습은 아까와는 달리 더할 나위 없이 부자연스럽고 어색해 보여 안드로이드라는 게 이제 실감이 났다. 그나저나 이건 점검의 일종인가? 미하일과 레이디를 힐끔거리던 닐은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이 윤활액으로 쓰이는 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덜컥 다시 긴장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모든 포맷이 완료되었습니다.”
레이디가 다시 고개를 들며 상냥하게 목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닐을 바라보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요.”
“안녕…….”
미하일의 눈치를 보면서 닐이 레이디에게 다시 인사했다. 레이디가 수줍게 손으로 입을 가리며 닐을 예쁘게 올려다보았다.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나와 함께 있어요. 그 말을 듣자 이제 숫제 미하일의 얼굴은 거의 구겨진 상태였다. 마침내 닐이 처음으로 미하일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레이디를 한참 노려보던 미하일이 한참 만에 아니, 하고 대답하고는 다른 무대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아직 홍보 시작하기 전이니까 여기서 가볍게 테스트를 해 보자. 일단 앉아 봐.”
“그냥…… 이렇게요?”
“양아치처럼 털썩 앉지 말고.”
닐의 자세를 교정해 주면서 미하일이 무심하게 충고했다. 잡지 모델 같은 걸 보고 참고하면 될 거야. 아무튼 이렇게 저렇게 어떻게 자세를 잡은 닐이 눈을 깜박이며 올려다보자 미하일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어떤 분위기가 좋나? 안드로이드마다 성격 패턴 설정이 다르니까……. 태도는 편할 대로 취해도 돼. 기본적으로는 유혹하는 분위기고, 튕기는 부위기, 애교 부리는 분위기, 까칠한 분위기, 반항적인 분위기 등등이 있거든.”
완전히 처음 듣는 설명에 닐이 조금 입을 벌렸다. 미하일이 그런 닐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아니면 백치도 괜찮겠는데.”
“네?”
“엎드려 봐.”
우물쭈물 닐이 무대 위에 엎드렸다. 대리석 무대라고는 해도 바닥에는 푹신하고 고급스러운 양모 카펫이 깔려 있어서 딱히 무릎이 베기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미하일의 손이 등에 닿자 반사적으로 몸이 굳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안드로이드는 사용자의 명령에 거부하지 않고 충실히 따르도록 되어 있어.”
“알고 있어요.”
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이 매장에 들르는 고객들이 무슨 짓을 시켜도 해야 한다는 거야.”
그것 또한 알고 있다. 제프리가 이런 부탁을 할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으니까. 뭐 빌어먹을 놈의 적성이 어쩌고저쩌고……. 아무리 취향에 맞는다고 해도 수치심을 못 느낀다는 건 아닌데, 생각해 보면 제프리 이 자식도 꽤나 나쁜 놈이었다.
아무튼 다음으로 이어진 미하일의 말은 퍽 엉뚱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헛소리처럼 들렸다.
“러시아에서는 직원들의 복지를 항상 최우선으로 여겨.”
“네?”
“그리고 난 러시아인이지.”
“……네?”
어리둥절해하는 닐을 엎드리게 만들고 이리저리 살피던 미하일이 한쪽 발목을 잡아당겨 자연스럽게 둥글게 카펫 위에 눕도록 만들었다. 머리카락 모양을 이리저리 다듬거나 손톱 모양을 살피고 위아래로 꼼꼼히 상태를 체크하는 모습이 굉장히 전문적으로 보였는데, 그는 왠지 자신을 안드로이드 다루듯 체크한다는 느낌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러시아…… 복지요?”
미하일이 턱을 붙잡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닐이 물었다.
“아, 잘 이해가 안 가나?”
안드로이드, 고객, 러시아, 직원 복지. 이 네 단어의 연관성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일단 시범을 보여 주지.”
아까부터 레이디에게 다소 이상한 기색인 미하일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미심쩍은 시선을 힐끗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디는 턱을 괴고 닐을 바라보며 방긋방긋 꽃처럼 웃고 있던 참이었다.
“레이디.”
미하일이 정말 아가씨 대하듯 사뭇 다정하게 뺨을 쓰다듬자 레이디가 발그레한 얼굴로 얼굴을 문지르며 애교를 부렸다. 나도 저렇게 해야 하나? 저렇게 할 자신은 없는데……. 아무튼 닐이 열심히 바라보는 동안 연인에게 하듯 미하일이 명령을 내렸다.
“자위해 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레이디가 다리를 벌리더니 속옷 위로 손가락을 올려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닐이 입을 조금 벌렸다. 점점 발갛게 달아올라 상기되는 뺨이나 반쯤 감긴 눈꺼풀, 달게 들리는 신음 소리에 이내 젖기 시작해 질척거리는 야한 소리까지 한 치의 위화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시 이어지는 미하일의 명령에 레이디가 이번에는 입고 있던 속옷을 벗고는 엎드려 둥글고 흰 예쁜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한 치의 수치심도 없는 분위기였다. 그야, 안드로이드이니까 당연하겠지만……. 미하일이 무심한 얼굴로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가 놓자 놀랍게도 사람 피부처럼 손자국도 남았다.
신음 소리부터 체온, 피부까지 이렇게 별 차이가 없다면 과연 안드로이드 대신 사람을 가져다 놓아도 정말 아무도 모를 정도였다. 미하일이 진열대에 있는 샘플 상품 하나를 가져오자 닐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조금도 야한 짓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시큰둥한 얼굴로 엉덩이 사이를 손가락으로 들쑤시다가 딜도를 비부에 밀어 넣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크게 날수록 안드로이드의 신음 소리도 커졌다. 마침내 마구 쑤셔 넣던 손을 떼자 레이디가 그 상태 그대로 엎드려 촉촉한 눈빛으로 미하일을 올려다보았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극히 덤덤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행한 미하일이 닐에게 물었다.
“이런 일도?”
뒤에 생략된 말을 닐은 쉬이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이런 일도 할 수 있느냐 이거겠지……. 보통 사람들이라면 분명 질색할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종종 상상하곤 하던 섹스 판타지와 비슷한 상황이기도 했다……. 돈도 급하고, 취향에도 맞고……. 그러나 이 순간 하필 갑자기 자신의 전 남자친구가 생각날 건 뭐란 말인가. 다시 그 술집에서의 야유 소리가 떠오르는 것 같아 닐이 퍼뜩 고개를 저었다.
‘이 도시를 뜨기 위해서라도 돈은 꼭 있어야 해.’
다시는 그런 끔찍한 식으로 목숨을 잃기 싫었다. 닐이 다짐하느라 잠시 침묵하는 걸 망설인다고 생각했는지 미하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당연히 안전장치도 있어.”
“안전장치요?”
대답 대신 미하일은 갑자기 다짜고짜 레이디가 엎드려 있는 무대 위로 올라섰다. 레이디가 순진하게 눈을 깜박이며 미하일을 시선으로 좇았다. 대뜸 그가 버클을 푸르고 지퍼를 내리자 닐이 헉 소리를 냈다. 그가 아직 다 발기하지 않았는데도 제법 두둑해 보이는 성기를 속옷 위로 주무르자 레이디가 있던 무대가 돌연 붉은색으로 바뀌며 바닥이며 옆면 전체 가득히 흰 글씨로 경고 문구가 떴다.
[본점에서는 외설적인 행위가 금지되어 있으며, CCTV의 촬영이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