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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 프린스턴 아카데미 5학년 1권

왕립 프린스턴 아카데미 5학년 1화

전학생이 왔다 (1)


전학생이 왔다.
듣자 하니 1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나 역시도 5년째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신입생 이외의 뉴페이스를 보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며칠 전 아버지께서 친히 불러 일러두신 말씀이 생각나서 귀를 쫑긋 세웠다.
“황가에서 직접 편입시켰다고 하던데?”
“황족?”
“설마. 평민이라더군.”
“크으―! 또 천재 등장인가? 이거야, 원. 학교 다니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니까.”
천재라. 피식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제야 수다를 떨던 동급생들도 나를 돌아보았다.
“윈스턴. 같이 전학생 구경 가지 않을래?”
“전학생 말인가?”
“굉장하잖아! 우리와 같은 학년이라는데! 편입이라니, 틀림없이 에드워드 선배만큼의 이름값은 할 놈일걸!”
“말조심해. 누군지도 모르는 외부에서 굴러들어 온 녀석을 에드워드 공과 함께 들먹일 셈인가?”
서늘하게 쏘아붙이자, 찔끔한 베르히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코끝을 긁적였다.
“그래도― 역시 너도 관심이 있는 거지?”
“아아.”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전학생의 이야기는 미리 들은 바가 있다. 아버지께서 그를 잘 보살펴 주라는 당부를 하셨기 때문이다. 가문의 일이나 황실의 일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흥미가 없는 아버님의 성격을 생각해 볼 때, 필시 그 전학생이란 녀석은 왕가와 관련된 인물일 터였다. 그러나 평민이라니? 별스럽군.
소리 나지 않게 의자를 끌어 자리에서 일어나자 호기심에 눈을 빛내는 동급생 몇 명이 붙었다.
“굉장할 거야! 검술의 천재일까? 에드워드 선배는 전학 온 직후 수석을 차지했었지? 어떤 녀석일까?”
“천재란 타이틀 한번 값 싸군.”
“너무 그러지 마. 재미있어질 거야!”
경박한 녀석. 아무에게나 천재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그 무게감이 떨어진다. 왕립 프린스턴 아카데미가 배출한 걸출한 천재, 에드워드 공 역시 직접 만나 보니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 만큼 굉장해 보이지는 않았었다. 그것은 그가 별 볼 일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 이름이 틀림없이 역사 속에 남을 명관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한없이 천재에 가까운― 영재일 따름이었다.
내가 알기로 천재라는 단어가 진정으로 어울리는 고귀한 인간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렇기에 그 이름은 완전무결하게 값진 것이었다. 지금은 이곳에 없는 나의 빛. 나는 어쩐지 울적한 기분이 들어 걸음을 빨리했다.

전학생은 교장인 레이문드 백작과 함께 있었다. 그는 벌써 교장 선생님께 40분째 주의 사항을 듣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세상에, 멈출 생각을 안 해.”
그가 아카데미의 학생으로서 교장실을 나서기까지, 아직도 무수히 많은 절차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교무실에서 교과 담당 선생님들께 인사드리는 것은 정황상 이미 마친 것 같고 지금은 교장과 함께 자신을 담당할 개인 교사 및 후원자를 만나 주의 사항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절차가 많은 것이 이 학교 특징 중 하나니, 어쩌면 저 전학생은 잔뜩 질려서 괜히 이런 학교에 왔다고 낙심해 있을지도 모른다.
지루한 절차가 대변하듯 이 학교의 엄격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이다. 다른 고등교육 기관과는 사뭇 성격이 다른 특수한 학술 기관이니만큼 학생 한 명 한 명의 정보는 학교 안의 모든 교사와 관리인이 공유하고 있었다.
그냥 평범한 기숙사제 학교라고 보면 곤란하다. 학생들끼리도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입학한 이후 졸업까지 7년을 변동 사항 없이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줄곧 함께하기에 그 유대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사상, 혈족, 종교, 정치적 이념, 그 모든 것이 공유되는 또 하나의 세상. 혹자는 ‘학문 수용소’라고 부르기까지 하는 폐쇄적인 곳. 의심할 여지 없이 ‘왕립 프린스턴 헨리 아카데미’는 여타의 학교들과는 달랐다.
이런 곳이니 외부에서 온 전학생은, 다른 세계에서 떨어진 외계인이나 다름없다.
평민이라고 했던가?
외계인은 외계인이되, 우리 은하에서는 가장 먼 은하에서 여행 온 외계인이겠군. 자신이 알기로 왕립 프린스턴의 구성원 중, 평민의 인구 비율은 채 1%도 넘지 않았다. 잘하면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희귀한 존재가 되겠는데? 그런 생각에 좀 더 유심히 지켜보았다.
흐음― 얼마 안 가 귀족의 말 잘 듣는 애완견이 되어 버리면 곤란한데 말이야. 그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전개였다. 굳이 아버지가 보살피라고 명령한 상대가 그런 시시껄렁한 존재여서야 내 자존심이 상하지 않겠어? 그래도 전학생이라는 특수한 입장이니만큼 틀림없이 한가락 하는 구석은 있겠지, 하고 기대를 걸어 본다.
마침 드디어 이야기를 마친 전학생이 뒤돌아섰다.
전학생의 정면을 보게 된 우리들은 체통 없는 신음 소리를 흘렸다.
사내자식 주제에 저토록 화려한 얼굴이라니. 지루함에 몸서리치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꽤나 볼 만한 표정을 하고 있을 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니, 화사하게 미소 띤 얼굴은 놀라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만큼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미청년이었다.
호기심과 흥미로 전학생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던 동급생들도 얼빠진 소리를 냈다.
“성화 속에서 튀어나온 천사인가?”
“실없는 소리 마.”
결 좋고 부드러운 금발은 구불구불 흘러내려 어깨까지 늘어져 있었고, 햇볕 한 번 못 보고 자란 것같이 창백한 그의 피부는 오히려 귀족의 피부보다 더 고귀한 피부색을 띠고 있었다. 아름다운 청년이다.
신이 최선을 다해 고심하고 또 고심하여 빚어낸 것처럼 그의 이목구비는 매끄럽고 유려했다. 게다가 그늘 한 점 없이 청량한 미소를 짓고 있어,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선량해 보였다.
입고 있는 행색은 화려하거나 고급스럽지 않았지만 금욕적으로 보이는 것이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차분해 보였다. 오히려 화려하게 맞춰 입었다면 눈부신 그 미모 덕분에 오히려 경박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는 뭐 하나 나무랄 곳 없이 완벽해 보였다.
교장실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 레이문드 백작은 환하게 웃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안에 앉아 있던 조나단 선생과 6학년인 조셉 선배가 나를 보고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윈스턴! 마침 잘 왔군!”
“교장 선생님.”
백작은 약식으로 인사하는 나를 이끌어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인사하게, 이쪽은 존스, 오늘부터 왕립 프린스턴 헨리 아카데미의 같은 5학년 학생이지. 편입 성적이 굉장했다네. 에드워드가 편입할 때도 이론 시험은 만점이었으나 존스처럼 면접까지 완벽하지는 못했지.”
흐응― 편입 시험을 만점으로 통과했나 보군. 과연, 얼굴 하나로 왕가의 눈에 든 건 아닌가? 그건 그렇고 그의 이름에 살짝 웃음이 나올 뻔했다.
존스라니. 외모와의 차이가 너무 심하잖아. 이름만큼은 지독하게도 평민다운 녀석이다. 조금 심술궂게 속으로 빈정거리며, 전학생과 시선을 맞추었다.
“왕립 프린스턴 헨리 아카데미에 온 걸 환영한다.”
내 손을 맞잡고 가볍게 흔드는 전학생, 존스는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예의 그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
“잘 부탁해.”
백작이 전학생을 향해 말했다.
“이 친구는 윈스턴. 풀네임은 차차 알아가도록 하게. 규정상 학교 내에서 교사는 학생을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게 되어 있거든. 그렇지만 장담하건대, 자네는 이 학생의 풀네임을 정말로 빨리 알게 될 거야. 우리 학교 5학년 수석의 재자이자, 학생 대표를 맡고 있는 학생이거든. 자네가 학교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 군도 윈스턴이 얼마나 특별한 학생인지 금방 깨달을 걸세.”
레이문드 백작이 말한 ‘풀 네임’이란 단어에 전학생은 내 신분이 귀족임을 금방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학교 내에서 내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타자들의 태도를 보자면 누구든지 내 가문의 내력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채게 된다.
그러나 전학생은 조금도 주눅 든 기색이 없이 웃었다. 역시 황실에서 직접 편입하게 힘쓴, 특수한 재자답다는 것이겠지. 전학생의 개인 교사가 된 조나단 선생이 나를 향해 말했다.
“좋은 경쟁이 될 거야. 긴장하는 게 좋을 걸세, 윈스턴 군.”
“아버지께 전학생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도 기대가 되는군요.”
“존스의 학교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나?”
“맡겨 주십시오.”
나와 전학생은 선생님들께 인사를 하고는 사이좋게 학장실에서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던 녀석들은 전학생이 가까이 오자 그 얼떨떨해질 정도의 외모에, 감히 까불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차분히 마주 소개를 하고 인사를 하는 전학생의 태도는 의연하고 침착하기만 했다.
그늘이 없는 얼굴, 미소, 태도. 귀하게 자란 세도가의 도련님보다 더 도련님 같군. 그런 생각을 하며 전학생에게서 시선을 뗐다.
“베르히.”
“아?”
“전학생에게 학교를 소개해 주도록 해.”
“오! 그래도 될까?”
신난 베르히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휙 돌아섰다. 등 뒤에서 전학생이 나를 불렀다. 돌아보자 그가 약간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윈스턴. 너는?”
묻는 그의 말에 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학교에 대해서는 베르히가 훨씬 잘 소개해 줄 거다. 친구 사귀는 데도 도움이 될 거야. 이쪽은 남은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도록 하지. 그리고.”
전학생에게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고 학칙에 쓰여 있는가? 그렇지 않다. 지엄한 국법에도 그런 조항은 없다. 아버지의 당부가 있긴 했지만, 친하게 지내라는 말은 아버지도 하지 않았다. 평민과 친하게 지내라니. 가당치도 않지.
“나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야.”
더불어 내 일 이외의 귀찮은 일은 모두 사양이다. 전학생에게 학교 안내라니. 그런 한가한 일을 할 여유는 없다. 어떻게 생겼는지 알았으니 이걸로 볼일은 끝이다.
다소 싸늘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말에 전학생이 실망하는 걸 끝으로, 나는 정말로 돌아섰다. 뒤에서 베르히가 전학생을 달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괜찮아. 원래 윈스턴은 콧대 높은 녀석이거든.”
그래, 그렇게 달래 주고 적당히 끌고 다니다가 기숙사로 들여보내도록 해.
나는 정말로 할 일이 남아 있는 도서관으로 향하며, 되도록 전학생의 존재가 내 일상에 큰 파문을 일게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라임베르흐 가문의 보물은 ‘충성심’이다. 알겠니? 아버지처럼 왕가를 위해 쓸모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 어머니.’
지각 능력이 생긴 이후, 나는 항상 충성을 강요받아 왔다. 아니, 그것은 강요가 아니다. 너무도 당연한 삶의 이유이고 또한 우리 가문의 존재 이유이며, 최대의 미덕이었다.
비옥한 영지와 생산성 있는 도시, 황금 광산, 상업의 메카. 우리 가문은 이런 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있으나 마나 한 작은 영지를 가졌으면서도 왕도의 어느 저택보다 우아하고 거대한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라임베르흐가家의 충성심이 빚어낸 결과였다.
건국 당시부터 왕의 오른편에는 항상 라임베르흐의 성을 가진 이가 목숨 바쳐 왕가를 위해 충성해 왔다고 한다. 그 핏줄은 왕가의 쓰임새에 맞는 인간을 적시에 공급하기 위해 대를 이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공을 세우고, 명예를 드높이고, 왕가의 은혜를 받아 황실 혈족의 여인과 혼인하여 고귀한 황실의 피를 이어받았으면서도, 라임베르흐가의 사람들은 단 한시도 그 삶의 이유에 대해 잊은 적이 없다. 주제를 모르고 어리석은 짓을 하거나 세도를 부려 더 탐욕을 내지 않았다.
충성심.
그것은 이 가문의 축복이자 저주이자 모든 것이었다.
아마도 아이가 태어나면 세뇌부터 시키는 걸지도 몰라. 절대로 황실을 배반하면 안 된다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 빛나는 별을 좇아 뛰어갈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면 속 편하게 받아들이는 쪽이 좋다. 겪어 본 결과 그것도 나쁘지 않은 삶이었기에.
그렇다. 나는 나의 별을 만났다.
이단이라면 이단이겠지만 그 주인공은, 장차 만인의 정점에 우뚝 설 현 태자 전하는 아니었다.
라임베르흐가의 다섯째 윈스턴은 황가의 고귀한 혈족 대신 오만하고도 눈부시게 빛나는 한 천재를 선택했다. 그때만큼 내가 라임베르흐가의 다섯째라는 게 기뻤던 적도 없었다. 가문에 남자의 수가 조금이라도 적었거나 내가 장남이었더라면 선택의 기회조차 오지 않았을 것이다.
‘윈터. 어지간히도 허약하구나?’
그 누구보다 상냥하고 다정한 나의 별.

아아. 눈을 뜨자 기숙사 방의 천장이 보였다. 나는 잠시 그대로 눈만 깜박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윈터. 어지간히도 허약하구나.’ 실로 오랜만에 꿈속에서 만난 소년의 목소리가 여운처럼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대로 다시 잠들어 꿈을 이어 가고만 싶었다.
“윈터.”
소리 내어 읊조렸더니 행복해졌다. 그러나 금세 살금살금 피부를 파고드는 한기에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쪽에 벗어 둔 가운을 걸쳤다. 한기의 정체를 찾아 따라가 보니 창문이 열려 있었다. 덕분에 깨 버렸구나. 일어나서 창문을 닫다가 창에 비친 모습을 보고 혼자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살살 미간의 주름을 폈다.
‘애어른 같으니까 인상 쓰는 버릇 좀 버려.’
창밖의 달은 몹시도 가늘고 부드럽게 휘어진 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달빛을 보다가 창가에 어깨를 기대고 잠깐 추억에 잠겼다.

여덟 살 때, 황실 사냥터에서 열린 사냥 대회에 처음으로 따라간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만 사고로 낙마하고 말았다. 그대로 낙오되고, 그도 모자라 잔뜩 화가 난 산돼지에게 습격당해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 지금 생각하면 한숨 나올 정도로 덜떨어진 일이었지만, 다행히도 나는 죽지도 않았고 불구가 되지도 않았다.
‘윈터. 어지간히도 허약하구나.’
소년은 능숙하게 거마(巨馬)를 몰며 한 손으로 창을 휘둘러 150kg은 나가는 멧돼지를 단번에 찔러 죽였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나는 가슴이 벅차올라 제대로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보통 말보다 훨씬 덩치가 큰 흑마 위에 올라타서 날 내려다보고 있는 또래의 소년은 그 날로 내 충성심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멋지다! 굉장해!
단순하지만 상황이 극적이어서 그랬는지, 고작 그 한순간― 생명의 은인에게 반해 버린 것이다.
태어나서 줄곧 태자 전하만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어 왔으면서도 정작 전하를 보고도 아무 감흥조차 없었던 심장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오만한 얼굴을 보는 순간 거세게 울어 버렸다. 눈물을 훌쩍이면서 겁에 질려 있었지만 라임베르흐가의 숙명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와아, 멋있다. 진짜 멋져. 앞으로는 저 사람을 위해서 살겠어!

어지간히도 얼빠진 녀석이었네.
그가 알았다면 기분 나빠했겠지만 내게는 그저 떠올리자면 혼자 웃음이 나는 추억이었다. 어쨌든 그 후로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그때 결정된 내 숙명을 잊어 본 적이 없다. 비록 내 방은 싸늘하고, 지금의 나는 고독하고 심지어 거의 우울하기까지 하지만. 아무튼― 나는, 지금의 나는―

공부를 해야지. 잠깐만 쉰다는 게 또 자 버렸네.
두 손으로 양 뺨을 찰싹! 때리고 책상 앞에 앉았다. 오랜만에 좋은 꿈도 꾸었으니, 힘내서 공부하자. 잡생각이 많다는 아버지의 꾸짖음처럼 나는 혼자 내버려 두면 끝도 없이 상념을 이어 나가는 산만한 성격이었다.
시험 범위를 체크하고 그동안 정리해 두었던 노트를 되짚어가며 놓친 부분이 없는지 머릿속으로 되뇌어 본다.
최근 일주일간 수면 시간이 평소의 반으로 줄었다. 시험 기간이니 별수 없다. 천재도 영재도 아닌 이상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는 그만큼 노력하는 수밖에.
게다가 이번 시험에는 도저히 무시하지 못할 경쟁자가 생겼으니까…….
존스, 왕립 프린스턴 헨리 아카데미의 5학년 전학생. 그리고 전교생의 인기인. 더불어 현재 ‘천재적인’이란 수식어를 달고 있음.
그 수려한 외모와 구김살 없는 성격, 경쾌한 말솜씨와 부담스럽지 않은 신분 덕분에 전학생은 (아마도)나를 제외한 모든 학생 및 교직원의 애정과 신뢰를 받고 있을 터였다. 수업 시간 그의 태도는 교사들을 감동하게 했고, 몇 가지 과제는 거의 상아탑 학자들의 논문 수준으로 결과물을 제출하여 감탄을 자아냈다.
철학 수업의 문답 때는 그 말의 논리나 날카로운 비판 의식에 종종 나까지 경탄하게 될 때가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결국 그가 비범한 학생인 건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뉴페이스 전학생의 선전에 따른 결과가 무엇인가 하면― 다가오는 1학기 마지막 시험의 결과를 5학년 학생들은 물론 다른 학년의 모든 학생과 교사가 기다리게 되었다는 거다.
윈스턴 대 전학생(존스)
크음.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다가 ‘주름 생긴다.’는 소년의 엄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울려 애써 표정을 고쳤다. 직후 ‘잡생각이 많다!’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또 뒤따랐다.
한숨과 함께 다시 ‘순수 이성 비판’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시험은 고작 3일 후였다.

수업이 끝난 후, 어쩐지 다가오지는 못하고 묘하게 웅성거리며 신경 쓰이게 하던 녀석들 중 하나가 대표로 다가왔다. 옆구리에 낀 책을 제멋대로 빼앗아 든 녀석을 사나운 눈초리로 쏘아보자 녀석은 콧노래를 부르며 윙크했다.
“베르히. 뭐 하는 짓이야?”
“도서관 가는 거잖아. 도와주는 거야. 고맙지?”
“성가시군.”
“가차 없네, 역시. 크크큭!”
수면 부족뿐만 아니라 긴장으로 근육이 뭉쳐 있어서, 무거운 책을 대신 들어주는 녀석이 내심 고맙기도 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고마움도 그다지 오래가지는 않았다. 녀석은 자기가 ‘베르히’라는 걸 잊지 않게 해 주려는 건지 쉴 새 없이 지껄여 댔다.
“공부는 잘 되어 가냐? 어깨가 무겁지? 장난 아닐 거야. 설마 전학생이 이렇게 단시간 내에 유명인이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 계집애들은 아주 그냥 난리야, 난리. 사내 녀석들도 기를 쓰고 존스와 친해지려고 드는데, 얼마 안 되는 계집애들은 제정신이겠니? 아니겠지. 그나마 존스가 평민이라 기숙사 난입까지는 안 하는 거지, 신분이 최소 준남작가의 자제만 됐어도 벌써 덮쳤을걸.”
“허튼소리는 그쯤 해 둬.”
“에이― 이래 봬도 나는 너한테 걸었으니, 잘하라고 응원차 온 거야. 좀 봐주라.”
“……나한테 걸어?”
“크큭, 다들 내기하고 있거든.”
이러니 내가 이 나이에 주름진 얼굴을 가지게 되는 거다. 나는 흥분하여 화내는 대신에 한심하다는 듯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걸음을 빨리했다. 종종걸음으로 뒤쫓아 오는 베르히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을 내게 다시 말을 걸지는 못하고, 자리 잡은 내 앞에 책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너는 할 수 있다며 응원하고는 금세 사라졌다.
“하아―”
“무슨 한숨이 그렇게 깊지?”
“해리 선배님.”
책상 맞은편에 조용히 착석하는 6학년의 해리 선배는 짙은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준비는 잘 되어 가나?”
“순조롭습니다.”
“그래, 잘 됐구나. 여기, 자료다.”
“매번 감사드려요.”
후원자인 해리 선배는 6년간 단 한 번도 학년 수석을 놓쳐 본 적 없는 수재였다. 선배 또한 시험 기간인데 나보다 열 배는 더 여유로운 태도다. 그는 밖에서 가지고 들어온 찻잔을 일부러 달그락거리며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찻주전자를 기울여 차를 채워 주었다.
“조금 숨 좀 돌려. 지쳐 보이거든.”
“겉으로 드러날 정도인가요?”
흔치 않게 얌전히 그를 바라보자 선배님은 낮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마시겠습니다.”
풀 죽어 찻잔을 들어 올리던 나는 이어지는 선배의 말에 다시 미간을 좁혔다.
“조금만 쉬고 열심히 해. 난 너한테 걸었거든. 이래 봬도 네 후원자니까.”
“선배님!”
“6학년들도 주목하고 있어. 혜성처럼 등장한 미남이, 우리의 오만한 도련님의 콧대를 꺾을 수 있을지를.”
“절대 지지 않을 생각이에요.”
진지한 내 말에 그는 활짝 웃었다.
“그래야지.”
그 말 그대로다. 나는 절대 지지 않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