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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 프린스턴 아카데미 5학년 2화
전학생이 왔다 (2)
그건, 내가 무슨 1등에 목숨 건 완벽주의자라서가 아니다. 실제로 내가 학년 수석을 차지하게 된 건 4학년 2학기가 되어서였다. 그전까지는 쭈욱 차석. 수석을 차지하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하거나 1등을 증오하고, 저주하고, 계단에서 밀어 버리고― 뭐 그런 일을 한 적은 절대 없었다. 성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공부란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내 성적이 그에게 내 존재 가치를 전부 설명해 줄 일은 없을 테니까.
다만 존스, 나는 그 전학생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질 생각은 없다. 존스를 이기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생각이다. 물론 생각뿐만 아니라 이미 그러고 있다.
아버지께 시험 준비를 위해 선생님들을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모처럼 만면에 기쁨을 가득 표현하시고는 지금 학교에서 수업을 가르치는 교사보다 명망 높은 분들을 개인 선생님으로 데려다주셨다. 할 마음이 생긴 내게 제공되는 것들은 무한에 가깝다.
전학생 존스의 후원자인 조셉 선배는 그가 학교에 적응하는 걸 잘 도와줄 정도로 사교성 있고 학교 행사에도 관심이 많은 활달한 사람이지만 내 후원자인 해리 선배만큼, 그 전의 시험 동향이나 교사별 출제 양식, 또 오답 노트나 핵심 정리 노트를 빌려주는 일에 열심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해리 선배뿐만 아니다. 해리 선배 이전의 내 후원자였던 렉싱턴 선배 역시 학년 차석. 그 선배는 문답법에 강한데, 지금도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후배보다 나와 보내는 시간이 길 정도였다.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씩 토론하며 화술을 점검하고 있었다.
애초에 학교에서 쌓아 온 내 5년의 역사와 이제 갓 왕립 프린스턴 헨리 아카데미의 학생이 된 ‘전학생’과의 격차는 그만큼 멀고도 멀었다. 전학생이 얼마만큼 머리가 좋은지는 둘째 문제이다. 그는 분명히 말해, 첫 시험에서 이 모든 걸 이룰 수는 없을 것이었다.
물론 그의 편입 시험의 결과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질 생각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러고도 진다면 정말 자괴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예감이 들기에 더욱 그랬다.
“기운 내.”
지친 내 기색을 읽은 듯 해리 선배는 조용히 어깨를 한 번 다독여 주고는 티 세트를 그대로 책상 위에 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후 한동안은 정말 집중하여 공부할 수 있었다.
얼마간이나 몰입해 있었을까?
찻주전자를 한쪽으로 밀어내는 움직임에 선배인가 싶어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노트를 훑었지만, 얼마 안 가 집중력이 깨져 버렸다. 달그락거리는 어설픈 움직임에다가 결정적으로 따가운 시선이 한계치를 넘길 정도로 거슬렸기 때문이다.
가만히 노트에서 시선을 떼고 앞을 보았다.
무례한 녀석. 눈부시도록 찬란한 금발의 소년이 왜인지 볼을 붉게 물들이고 나를 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랐다. 나는 의식적으로 인상을 쓰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앉아도 좋다고 허락한 기억은 없는데?”
최대한 무심하게 말한다고 노력했음에도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당황한 얼굴의 전학생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변명했다.
“미안해. 빈자리인 줄 알았어.”
“모르는 모양인데, 여기 도서관은 앉고 싶다고 아무 자리에나…… 아니, 됐다. 이런 건 조셉 선배가 알려 줘야 할 사항……. 됐으니까 저기 안내 데스크에 가서 묻도록.”
전학 온 지 꽤 됐으면서 도서관 한 번 와 본 적 없단 말인가? 지정석 제도를 모르다니 어이가 없었다. 눈으로 쫓아내 버리고 다시 시선을 내리까는데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부 잘 돼?”
내 귀가 어떻게 된 건 아니겠지? 아니면 과도한 스트레스로 환청이 들리는 걸지도. 애써 무시하고 다음 문장을 읽는데 환청이 다시 들려왔다.
“아! 그 부분, 어렵지? 확실히 이 학교는 수준이 높…….”
“공부 잘 되냐고? 방해하는 입장에서 물어볼 말이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그리고 탁!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었다. 체통 없이 그 이상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신경 쓰인다는 걸 이 이상으로 티 내고 싶지 않다는 게 정답이겠지만, 여하튼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텄군. 방으로 돌아가서 마저 하자. 책을 챙겨 일어나려는데, 급히 뻗은 손이 내 책 위를 눌렀다. 시선을 들어 쳐다보자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전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갈 테니까, 일어나지 마.”
진지한 표정이어서 나는 그냥 자리에 앉았다. 그야 기숙사 방보다 도서관 쪽이 공부하기 훨씬 편하니까.
그러자 전학생은 거의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짝짝짝! 어느샌가 다가온 해리 선배가 기특하다는 듯 내려다봤다.
“솜씨 좋게 내쫓았네.”
그는 재미있다는 듯, 전학생의 뒷모습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윈스턴. 너무 순진하게 반응하진 마라.”
의아한 내 시선에 그는 다구를 정리하며 씨익 웃었다.
“평민들은 으레 네 그 고고한 태도를 비웃고 속으로 욕하게 되거든. 이 도련님은 어지간히 예민한 척하는구나, 하고.”
“선배님께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죠. 그보다 선배님?”
“쿡쿡! 그래, 응?”
“이 부분, 설명해 주십시오.”
“아아― 나도 이해하는 데 애먹었지.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편해. 그러니까.”
해리 선배의 알기 쉬운 설명을 주의 깊게 들으면서도 좀 전에 전학생이 짚었던 부분이라, 자기는 다 이해하고 있다는 그 태도가 기억나서 답답해졌다.
그래도 역시 노닥거리며 돌아다니는 전학생에게는 질 수 없다.
***
그 어느 때보다 힘겨웠던 시험 기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나를 보며 어머니는 온갖 몸에 좋은 것을 해다 먹이며 지극 정성이셨고, 가문의 남자들은 라임베르흐가에 무능한 사람은 없다는 말로 넌지시 격려(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여하간)해 주었다.
어디까지나 겉으로는 지난 학기에 당신의 다섯째 아들이 학년 수석을 차지한 것에 대해 별 반응이 없으셨던 아버지지만, 내심 무척이나 뿌듯해하시는 것 같았기에 만약 이번 시험에서 평민에게 밀려나면 나는 다시는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앗차. 또 우울해지고 있잖아. 지금은 마음껏 우울해할 때가 아니라고. 마지막 라틴어 시험 준비에 전력을 기울이며 시험 마지막 날을 맞이했다.
시험 주간의 마지막 날이니만큼 학교는 완전히 연소해 버린 듯 고요했다. 적막하지만, 후련해하는 얼굴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패잔병 같은 몰골이던 학생들도 조금씩 표정이 밝아지고 있었고, 시험 후 황금 휴일 사흘간 뭐 하고 놀지를 생각하며 벌써부터 들떠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라틴어 시험 시작 전, 나는 긴장으로 굳은 어깨를 풀고 눈을 감았다.
시험이 끝나고 나면 황성으로 들어갈 예정이다. 황녀님과 함께 소풍을 가기로 해서 준비할 것도 많았다. 오랜만의 입성이니까 형님들도 만나 뵙도록 하자.
그렇게 시작한 마지막 시험은 순조로웠다. 마지막 문제까지 모두 답을 쓰고 나서 펜을 내려놓는 순간 가슴에서 날개가 돋아났다. 이로써 다음 학기까지는 여유가 생긴 건가? 발끝으로 모든 긴장이 빠져나가 버린 것 같았다. 절로 미소가 났다. 전력을 다했다. 후회는 없다.
학교에서의 일이 끝났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완전 연소하여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패잔병 무리를 뒤로하고 시험지를 제출한 후, 감독하던 교사의 듬직한 미소를 선물로 받으며 교실에서 나왔다.
고요한 복도를 걷는 동안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졌다. 내 최선의 노력과 능력을 쏟아부었다. 이렇게까지 한 이상, 더 이상 결과에 안달하는 것도 신사답지 못하다.
도서관에서 빌린 모든 책을 반납하고 방을 정리한 후 기숙사를 나섰다. 그사이 학교는 엄청나게 떠들썩해져 있었다. 일순간 전교생의 정신연령이 평균 열 살은 하향 조정된 듯, 학생들은 소란스럽게 뛰어다니며 내지를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쏟아 내고 있었다.
이미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소년들은 저마다 끼리끼리 모여 떠들어 댄다. 교사들도 한시름 놓은 얼굴로 산뜻한 걸음걸이를 옮기고 있었다. 사흘간의 휴식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평등하게 주어진 소중한 휴일인 것이다.
6학년 교실을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을 해리 선배를 찾아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다시 4학년 기숙사 관리인에게 내가 후원하는 소년인 앤디 앞으로, 해리 선배와 나의 노트를 넘겨주었다. 이걸로 학기 말 시험 마지막 마무리까지 모두 끝났다.
교문 앞에 와 있는 라임베르흐가의 마차를 향해 곧게 걸어가는 동안 후배들이 인사를 해 왔다.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마차에 도착한 순간, 저쪽에서 또래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교문을 나서고 있는 금발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청량한 웃음소리는 주위의 많은 소음을 뚫고 곧장 내 귀로 전달되었다. 저 소리가 신경 쓰이는 건지, 거슬리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여하튼 덕분에 나도 이렇게까지 몰두할 수 있었네. 그건 좋은 일이었어.
“도련님, 시험은 잘 보셨는지요?”
“오하르.”
마차의 문을 열며 발판을 내리는 자는 총집사 오하르였다.
“직접 왔군.”
“그동안 줄곧 열심이시지 않았습니까? 끝까지 장하게 해내신 도련님을 마중 가는 게 제 기쁨이지요.”
“학교 시험이다. 수선 떨 것 없어.”
회색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멋스럽게 집사복을 차려입고 있는 라임베르흐가의 총집사는 싱긋 웃으며 내 가방을 받아 들었다.
온몸으로 연륜을 과시하는 이 남자는 집사복을 꼭 피부처럼 느껴지도록 딱 맞게, 편하고 아름답게 치장할 줄 알았다. 나는 어디서도 오하르처럼 멋스러운 집사를 다시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줄 아는 화려한 신사였다. 덕분에 그가 시중들 때는, 별수 없이 으쓱해지고는 했다. 가문의 문장이 고고하게 빛을 발하는 마차에 막 오르려는 순간, 레이문드 백작이 종종걸음으로 걸어왔다.
“윈스턴!”
나는 뒤돌아서서 의관을 바로 하고 백작을 기다렸다.
“교장 선생님.”
“시험은 잘 보았는가? 오늘 입성한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황녀 전하를 찾아뵙는 건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그는 서신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나는 두 손으로 서신을 건네받아 오하르에게 다시 넘겼다.
“부탁하네.”
“오늘 중으로 서신을 전하께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게나. 늘 이 고마움을 어찌 표시해야 할지.”
레이문드 백작은, 황녀의 숙부로 나와 황녀가 가깝게 지낸다는 걸 알고 종종 이렇게 심부름을 시키고는 했다. 그는 백작 신분에 황족과는 피로 이어진 관계이긴 했지만 내킬 때마다 입궁할 수는 없었다. 또 연통으로 서신을 넣으면 아무리 사소한 내용이더라도 궁내부를 거치게 되니 이런 편리한 연락책을 애용하는 것이다.
“별말씀을.”
돌아보니 외출하던 학생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 중에는 금발의 전학생도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에 코웃음을 치며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달리기 시작하고, 맞은편에 앉은 오하르는 창밖을 보더니 낮게 웃었다. 의아한 내 시선에 그가 답했다.
“저 금발 머리 청년이 소문의 그 전학생인가 보군요.”
“그를 아는가?”
“주인님께 들었습니다. 황실의 총애가 대단한 모양입니다. 어떻습니까? 함께 지내보시니, 정말 소문처럼 머리가 비상하던가요?”
“글쎄, 아직은 알 수 없지 않겠나?”
심드렁한 내 반응에 오하르는 칭찬하는 듯 흐뭇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열심히 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그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적당히 하고, 오늘 일과를 알려 주지 않겠나?”
“네, 라임베르흐가에 도착한 직후 마님께서 입성 준비를 해 주실 겁니다. 3시까지는 입성하여 황녀님을 뵌 후, 보트를 타기로 하셨죠? 영원의 호수에 준비되어 있으니 느긋하게 친위대와 함께 서쪽 선착장으로 와 주십시오.
해 진 후에는 보트 위에서 식사, 황녀님께서 뱃놀이에 질리시면 신성 여명의 좌의 오페라 로열 석을 예약해 두었으니 8시까지 그쪽으로 오셔도 무방합니다. 도련님께서는 학교생활에 열심이어서 잘 모르시겠지만, 요즘 여명의 좌에선 ‘눈을 잃은 여신’이라는 오페라가 인기랍니다.”
“배우는?”
“베아트리체 리어풀 아르망 주연으로, 장 샌더가 연출을 맡았습니다.”
“황녀님께서 좋아하시겠군. 장 샌더의 극은 취향에 맞으실 거야.”
“어떻습니까?”
“으음?”
“수석, 놓치지 않을 자신 있으십니까?”
집사라기엔, 오히려 집안 어른 같은 오하르는 귀여운 조카를 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째서 학교를 떠나서도 이 연장선에 있어야 하는 건지.
대답을 재촉하는 그를 보며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면 상대가 윌리엄이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러고는 정말로 기쁜 듯 환하게 미소 짓는 오하르를 보며 덧붙였다.
“그래도 지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좀 구차하긴 하지만, 그게 정답. 그래도 지면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그 어느 때보다 열심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부끄러울 정도로 단순했다. 윌리엄이 떠난 자리를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차지하게 절대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일 뿐이다. 내 영원의 별.
‘윈터. 잘했어.’
칭찬하는 그의 목소리가 가슴속에 맴돌았다.
***
“의관을 바로 하십시오.”
옷매무시를 다듬고 곧게 허리를 펴자 청옥으로 조각된 문이 열리고 빛이 쏟아졌다.
“새뮤얼 아지스라 라비앙 고결, 태혼의 황녀 전하이십니다.”
파니에(속치마)로 잔뜩 부풀린 하얀색 드레스 차림에, 백공작의 깃털로 치장된 챙이 큰 모자를 쓴 소녀가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다가와 코앞에서 살짝 무릎을 굽혔다. 마주 허리를 숙여 인사한 나는 그녀의 비단으로 감싼 손등에 사랑을 담아 키스했다.
“윈터!”
“새뮤얼 황녀님.”
“계속 오늘만 기다렸어. 와아! 어서 나가자, 응?”
한 살 어린 황국의 유일한 황녀님은, 분으로 하얗게 화장한 얼굴에 싱그러운 장밋빛 뺨을 뽐내며 제자리에서 핑그르르 돌았다.
“황녀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뒤따르는 시녀가 그렇게 꾸짖어도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팔에 팔짱을 꼈다.
“내버려 둬. 오늘부터 사흘간은 누가 뭐래도 내 마음대로 실컷 놀 테니까. 그치, 윈터?”
나는 그저 옅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내 손 위에 얹었다.
“다 좋지만, 안겨 오진 마세요, 황녀님. 저 아버지께 혼납니다.”
“후훗!”
곱슬곱슬한 검은색 머리에서 장미꽃 향기가 났다. 향이 좋다고 말했더니 황녀님은 새로 온 조향사의 이야기를 하며 맑게 웃었다. 1년 중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 순간이 즐거운 이 장미의 황녀는 그 자체로 황국의 보물이다.
그러니까 소중하게 지켜야 한다. 내 빛이 그대를 흠모하기에, 내 빛이 그녀를 지키고 싶어 하였기에.
윌리엄이 기사 작위를 받던 날, 그는 새뮤얼 황녀를 자신의 레이디로 삼고 영원히 그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녀의 기사가 되기를 맹세했다. 그가 여기 없는 동안, 이제 내가 그의 뒤를 이어― 그 빈자리를 지켜야 했다.
상아색 뺨에 떨어진 꽃잎을 떼어 주며 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럼, 황녀님. 가실까요?”
“천국으로 데려다주세요, 기사님.”
“얼마든지요, 황녀님.”
“황녀님!”
한숨을 푹 내쉰 걱정 많은 시녀, 오리겔은 종종걸음으로 우리를 쫓아왔다. 치맛자락을 팔락이며 사뿐사뿐 걷는 그녀의 뒤로 스무 명의 시녀와 열 명의 근위대 기사가 뒤따랐다. 영원의 호수 서쪽 선착장으로 가는 내내 황녀님은 상기된 얼굴로 조잘조잘 햇볕 아래 지저귀는 참새처럼 종알거렸다.
또래 친구가 없는 황성에서의 그녀는, 갓 피어난 장미꽃처럼 싱그럽고 아름답지만 무척이나 고독한 존재였다. 마치 크리스탈 병 안에 장식되어 있는 꽃송이처럼.
가끔 나와, 내 소중한 친구 크리스티앙이 황녀님을 찾을 때 이외에는 그저 책을 읽고 예법을 익히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이 전부인 소녀였다. 그런 새뮤얼 황녀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내게 말했다.
“오늘로 시험이 끝난 거지?”
“알고 계시는군요.”
“오라버니께서 기대하고 있거든. 음…… 이름이 존시였던가?”
“전학생 말인가요? 존스입니다, 황녀님.”
“그래, 존스. 대단한 인재라면서? 이번 시험 결과를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다고 했어.”
“뛰어난 학생입니다.”
“에이― 다 알고 있어. 나도 딱 한 번 그를 봤는데, 그는 윌리엄에 비하자니 손색이 많던걸? 윈터가 못마땅해할 게 눈에 선했다고.”
황궁에서마저 이번 시험 결과를 주목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나는 얼떨떨해졌다. 하지만 새뮤얼 황녀님의 탁월한 안목에 기분이 좋아졌다.
영원의 서쪽 선착장에 도착한 우리는 화려하게 갖가지 천으로 치장된 보트에 올랐다. 열 사람 정도가 겨우 앉을 수 있는 작은 보트 여러 대가 호수의 가장자리에서 천천히 물결을 일으키며 중앙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소풍 나온 소녀들의 풋내 나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둘러보니 저마다, 황녀님의 배를 발견하고 저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뱃머리에 앉은 황녀는 구두를 벗더니 치마와 드로어즈를 걷고 작고 동그란 발을 물속에 넣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아 황녀님을 지켜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400년은 된 커다란 버드나무의 가지가 물가에 드리워져, 그 아래로 잉어가 펄떡이며 물 위로 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황녀님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간식이 준비되었다.
“윈터. 바이올린을 켜 줘.”
“곡은?”
“소녀의 노래가 어떨까?”
시녀가 받쳐 든 과자를 집어 먹으며 황녀는 연주를 졸랐다.
나는 늘 그랬듯 조심스럽게 악기 가방에서 유리로 만든 바이올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턱 밑에 받쳤다. 유리 바이올린은 순전히 황녀님의 취향으로, 그녀는 내가 바이올린으로 그녀만을 위해 연주하는 순간을 무척이나 즐겼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새뮤얼 황녀님은 다른 소녀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그녀들에게 자랑하길 좋아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밉기는커녕 가련하게만 느껴졌다. 황녀에게는 소녀들과 같은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여러 명분의 친구 노릇을 모두 해야 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바이올린은 호수의 물빛이 물들어 푸르게 빛났다. 가만히 활을 현 위에 얹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황녀를 위한 ‘소녀의 노래’를 속삭였다.
곧이어 휴일 오후의 호숫가에는 어린 소녀들이 조잘거리는 듯한 사랑스러운 바이올린의 멜로디가 가득 퍼져 갔다. 소풍 나온 소녀들은 수다를 잠시 멈추고 바이올린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어디서도 듣지 못한 곡일 것이었다. 유명한 곡은 아니다. 이 곡은 바로, 우리의 친구 윌리엄이 작곡했던 곡이기에 오직 내 바이올린을 통해서만 세상에 나오곤 했다.
황녀님께서는 꿈꾸는 듯한 얼굴로, 지그시 눈을 감고는 바이올린의 음을 따라 흥얼거리셨다. 오직 황녀님을 위해 윌리엄이 작곡한 노래. 오직 황녀님만을 위해 내가, 기꺼이 광대가 되어 연주하는 음악.
한여름 햇빛이 가득 쏟아져 내리는 오후의 들판과도 같은 곡이었다. 푸르른 초록이 바람결에 사르륵 소리 내어 흔들리고 그 위를 소녀가 숨이 벅차도록 왈츠를 추는, 뭐― 그런 이미지로 ‘소녀의 기분 전환을 위한 연주곡’이라 할 수 있겠다.
곡의 연주가 끝나자 저마다 보트 위의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보내왔다. 황녀님은 생긋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나는 과장되게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윈터. 정말 멋져.”
“마음에 드셨나요?”
“으응― 역시 윈터는 음악가가 되어야 했어.”
“그거 아쉽군요.”
그저 교양 수준으로 익힌 악기지만 황녀님과 윌리엄을 위해 더욱 갈고닦아 지금은 제법 그럴싸해졌다. 그러나 전업으로 삼을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황녀님의 칭찬에 그저 싹싹하게 웃으며 그녀의 발을 닦아 주었다.
황녀가 말했다.
“언제까지나 이럴 수 있었으면 좋겠어.”
동감이다. 그러나 휴일은 고작 앞으로 3일이고, 그 후에는 다시 우리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성적은 다음 주에 발표된다. 애써 그것에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는 황녀님과 시선을 맞추고 미소 지었다.
전학생이 왔다 (2)
그건, 내가 무슨 1등에 목숨 건 완벽주의자라서가 아니다. 실제로 내가 학년 수석을 차지하게 된 건 4학년 2학기가 되어서였다. 그전까지는 쭈욱 차석. 수석을 차지하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하거나 1등을 증오하고, 저주하고, 계단에서 밀어 버리고― 뭐 그런 일을 한 적은 절대 없었다. 성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공부란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내 성적이 그에게 내 존재 가치를 전부 설명해 줄 일은 없을 테니까.
다만 존스, 나는 그 전학생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질 생각은 없다. 존스를 이기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생각이다. 물론 생각뿐만 아니라 이미 그러고 있다.
아버지께 시험 준비를 위해 선생님들을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모처럼 만면에 기쁨을 가득 표현하시고는 지금 학교에서 수업을 가르치는 교사보다 명망 높은 분들을 개인 선생님으로 데려다주셨다. 할 마음이 생긴 내게 제공되는 것들은 무한에 가깝다.
전학생 존스의 후원자인 조셉 선배는 그가 학교에 적응하는 걸 잘 도와줄 정도로 사교성 있고 학교 행사에도 관심이 많은 활달한 사람이지만 내 후원자인 해리 선배만큼, 그 전의 시험 동향이나 교사별 출제 양식, 또 오답 노트나 핵심 정리 노트를 빌려주는 일에 열심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해리 선배뿐만 아니다. 해리 선배 이전의 내 후원자였던 렉싱턴 선배 역시 학년 차석. 그 선배는 문답법에 강한데, 지금도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후배보다 나와 보내는 시간이 길 정도였다.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씩 토론하며 화술을 점검하고 있었다.
애초에 학교에서 쌓아 온 내 5년의 역사와 이제 갓 왕립 프린스턴 헨리 아카데미의 학생이 된 ‘전학생’과의 격차는 그만큼 멀고도 멀었다. 전학생이 얼마만큼 머리가 좋은지는 둘째 문제이다. 그는 분명히 말해, 첫 시험에서 이 모든 걸 이룰 수는 없을 것이었다.
물론 그의 편입 시험의 결과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질 생각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러고도 진다면 정말 자괴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예감이 들기에 더욱 그랬다.
“기운 내.”
지친 내 기색을 읽은 듯 해리 선배는 조용히 어깨를 한 번 다독여 주고는 티 세트를 그대로 책상 위에 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후 한동안은 정말 집중하여 공부할 수 있었다.
얼마간이나 몰입해 있었을까?
찻주전자를 한쪽으로 밀어내는 움직임에 선배인가 싶어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노트를 훑었지만, 얼마 안 가 집중력이 깨져 버렸다. 달그락거리는 어설픈 움직임에다가 결정적으로 따가운 시선이 한계치를 넘길 정도로 거슬렸기 때문이다.
가만히 노트에서 시선을 떼고 앞을 보았다.
무례한 녀석. 눈부시도록 찬란한 금발의 소년이 왜인지 볼을 붉게 물들이고 나를 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랐다. 나는 의식적으로 인상을 쓰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앉아도 좋다고 허락한 기억은 없는데?”
최대한 무심하게 말한다고 노력했음에도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당황한 얼굴의 전학생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변명했다.
“미안해. 빈자리인 줄 알았어.”
“모르는 모양인데, 여기 도서관은 앉고 싶다고 아무 자리에나…… 아니, 됐다. 이런 건 조셉 선배가 알려 줘야 할 사항……. 됐으니까 저기 안내 데스크에 가서 묻도록.”
전학 온 지 꽤 됐으면서 도서관 한 번 와 본 적 없단 말인가? 지정석 제도를 모르다니 어이가 없었다. 눈으로 쫓아내 버리고 다시 시선을 내리까는데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부 잘 돼?”
내 귀가 어떻게 된 건 아니겠지? 아니면 과도한 스트레스로 환청이 들리는 걸지도. 애써 무시하고 다음 문장을 읽는데 환청이 다시 들려왔다.
“아! 그 부분, 어렵지? 확실히 이 학교는 수준이 높…….”
“공부 잘 되냐고? 방해하는 입장에서 물어볼 말이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그리고 탁!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었다. 체통 없이 그 이상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신경 쓰인다는 걸 이 이상으로 티 내고 싶지 않다는 게 정답이겠지만, 여하튼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텄군. 방으로 돌아가서 마저 하자. 책을 챙겨 일어나려는데, 급히 뻗은 손이 내 책 위를 눌렀다. 시선을 들어 쳐다보자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전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갈 테니까, 일어나지 마.”
진지한 표정이어서 나는 그냥 자리에 앉았다. 그야 기숙사 방보다 도서관 쪽이 공부하기 훨씬 편하니까.
그러자 전학생은 거의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짝짝짝! 어느샌가 다가온 해리 선배가 기특하다는 듯 내려다봤다.
“솜씨 좋게 내쫓았네.”
그는 재미있다는 듯, 전학생의 뒷모습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윈스턴. 너무 순진하게 반응하진 마라.”
의아한 내 시선에 그는 다구를 정리하며 씨익 웃었다.
“평민들은 으레 네 그 고고한 태도를 비웃고 속으로 욕하게 되거든. 이 도련님은 어지간히 예민한 척하는구나, 하고.”
“선배님께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죠. 그보다 선배님?”
“쿡쿡! 그래, 응?”
“이 부분, 설명해 주십시오.”
“아아― 나도 이해하는 데 애먹었지.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편해. 그러니까.”
해리 선배의 알기 쉬운 설명을 주의 깊게 들으면서도 좀 전에 전학생이 짚었던 부분이라, 자기는 다 이해하고 있다는 그 태도가 기억나서 답답해졌다.
그래도 역시 노닥거리며 돌아다니는 전학생에게는 질 수 없다.
그 어느 때보다 힘겨웠던 시험 기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나를 보며 어머니는 온갖 몸에 좋은 것을 해다 먹이며 지극 정성이셨고, 가문의 남자들은 라임베르흐가에 무능한 사람은 없다는 말로 넌지시 격려(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여하간)해 주었다.
어디까지나 겉으로는 지난 학기에 당신의 다섯째 아들이 학년 수석을 차지한 것에 대해 별 반응이 없으셨던 아버지지만, 내심 무척이나 뿌듯해하시는 것 같았기에 만약 이번 시험에서 평민에게 밀려나면 나는 다시는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앗차. 또 우울해지고 있잖아. 지금은 마음껏 우울해할 때가 아니라고. 마지막 라틴어 시험 준비에 전력을 기울이며 시험 마지막 날을 맞이했다.
시험 주간의 마지막 날이니만큼 학교는 완전히 연소해 버린 듯 고요했다. 적막하지만, 후련해하는 얼굴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패잔병 같은 몰골이던 학생들도 조금씩 표정이 밝아지고 있었고, 시험 후 황금 휴일 사흘간 뭐 하고 놀지를 생각하며 벌써부터 들떠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라틴어 시험 시작 전, 나는 긴장으로 굳은 어깨를 풀고 눈을 감았다.
시험이 끝나고 나면 황성으로 들어갈 예정이다. 황녀님과 함께 소풍을 가기로 해서 준비할 것도 많았다. 오랜만의 입성이니까 형님들도 만나 뵙도록 하자.
그렇게 시작한 마지막 시험은 순조로웠다. 마지막 문제까지 모두 답을 쓰고 나서 펜을 내려놓는 순간 가슴에서 날개가 돋아났다. 이로써 다음 학기까지는 여유가 생긴 건가? 발끝으로 모든 긴장이 빠져나가 버린 것 같았다. 절로 미소가 났다. 전력을 다했다. 후회는 없다.
학교에서의 일이 끝났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완전 연소하여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패잔병 무리를 뒤로하고 시험지를 제출한 후, 감독하던 교사의 듬직한 미소를 선물로 받으며 교실에서 나왔다.
고요한 복도를 걷는 동안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졌다. 내 최선의 노력과 능력을 쏟아부었다. 이렇게까지 한 이상, 더 이상 결과에 안달하는 것도 신사답지 못하다.
도서관에서 빌린 모든 책을 반납하고 방을 정리한 후 기숙사를 나섰다. 그사이 학교는 엄청나게 떠들썩해져 있었다. 일순간 전교생의 정신연령이 평균 열 살은 하향 조정된 듯, 학생들은 소란스럽게 뛰어다니며 내지를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쏟아 내고 있었다.
이미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소년들은 저마다 끼리끼리 모여 떠들어 댄다. 교사들도 한시름 놓은 얼굴로 산뜻한 걸음걸이를 옮기고 있었다. 사흘간의 휴식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평등하게 주어진 소중한 휴일인 것이다.
6학년 교실을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을 해리 선배를 찾아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다시 4학년 기숙사 관리인에게 내가 후원하는 소년인 앤디 앞으로, 해리 선배와 나의 노트를 넘겨주었다. 이걸로 학기 말 시험 마지막 마무리까지 모두 끝났다.
교문 앞에 와 있는 라임베르흐가의 마차를 향해 곧게 걸어가는 동안 후배들이 인사를 해 왔다.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마차에 도착한 순간, 저쪽에서 또래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교문을 나서고 있는 금발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청량한 웃음소리는 주위의 많은 소음을 뚫고 곧장 내 귀로 전달되었다. 저 소리가 신경 쓰이는 건지, 거슬리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여하튼 덕분에 나도 이렇게까지 몰두할 수 있었네. 그건 좋은 일이었어.
“도련님, 시험은 잘 보셨는지요?”
“오하르.”
마차의 문을 열며 발판을 내리는 자는 총집사 오하르였다.
“직접 왔군.”
“그동안 줄곧 열심이시지 않았습니까? 끝까지 장하게 해내신 도련님을 마중 가는 게 제 기쁨이지요.”
“학교 시험이다. 수선 떨 것 없어.”
회색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멋스럽게 집사복을 차려입고 있는 라임베르흐가의 총집사는 싱긋 웃으며 내 가방을 받아 들었다.
온몸으로 연륜을 과시하는 이 남자는 집사복을 꼭 피부처럼 느껴지도록 딱 맞게, 편하고 아름답게 치장할 줄 알았다. 나는 어디서도 오하르처럼 멋스러운 집사를 다시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줄 아는 화려한 신사였다. 덕분에 그가 시중들 때는, 별수 없이 으쓱해지고는 했다. 가문의 문장이 고고하게 빛을 발하는 마차에 막 오르려는 순간, 레이문드 백작이 종종걸음으로 걸어왔다.
“윈스턴!”
나는 뒤돌아서서 의관을 바로 하고 백작을 기다렸다.
“교장 선생님.”
“시험은 잘 보았는가? 오늘 입성한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황녀 전하를 찾아뵙는 건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그는 서신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나는 두 손으로 서신을 건네받아 오하르에게 다시 넘겼다.
“부탁하네.”
“오늘 중으로 서신을 전하께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게나. 늘 이 고마움을 어찌 표시해야 할지.”
레이문드 백작은, 황녀의 숙부로 나와 황녀가 가깝게 지낸다는 걸 알고 종종 이렇게 심부름을 시키고는 했다. 그는 백작 신분에 황족과는 피로 이어진 관계이긴 했지만 내킬 때마다 입궁할 수는 없었다. 또 연통으로 서신을 넣으면 아무리 사소한 내용이더라도 궁내부를 거치게 되니 이런 편리한 연락책을 애용하는 것이다.
“별말씀을.”
돌아보니 외출하던 학생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 중에는 금발의 전학생도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에 코웃음을 치며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달리기 시작하고, 맞은편에 앉은 오하르는 창밖을 보더니 낮게 웃었다. 의아한 내 시선에 그가 답했다.
“저 금발 머리 청년이 소문의 그 전학생인가 보군요.”
“그를 아는가?”
“주인님께 들었습니다. 황실의 총애가 대단한 모양입니다. 어떻습니까? 함께 지내보시니, 정말 소문처럼 머리가 비상하던가요?”
“글쎄, 아직은 알 수 없지 않겠나?”
심드렁한 내 반응에 오하르는 칭찬하는 듯 흐뭇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열심히 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그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적당히 하고, 오늘 일과를 알려 주지 않겠나?”
“네, 라임베르흐가에 도착한 직후 마님께서 입성 준비를 해 주실 겁니다. 3시까지는 입성하여 황녀님을 뵌 후, 보트를 타기로 하셨죠? 영원의 호수에 준비되어 있으니 느긋하게 친위대와 함께 서쪽 선착장으로 와 주십시오.
해 진 후에는 보트 위에서 식사, 황녀님께서 뱃놀이에 질리시면 신성 여명의 좌의 오페라 로열 석을 예약해 두었으니 8시까지 그쪽으로 오셔도 무방합니다. 도련님께서는 학교생활에 열심이어서 잘 모르시겠지만, 요즘 여명의 좌에선 ‘눈을 잃은 여신’이라는 오페라가 인기랍니다.”
“배우는?”
“베아트리체 리어풀 아르망 주연으로, 장 샌더가 연출을 맡았습니다.”
“황녀님께서 좋아하시겠군. 장 샌더의 극은 취향에 맞으실 거야.”
“어떻습니까?”
“으음?”
“수석, 놓치지 않을 자신 있으십니까?”
집사라기엔, 오히려 집안 어른 같은 오하르는 귀여운 조카를 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째서 학교를 떠나서도 이 연장선에 있어야 하는 건지.
대답을 재촉하는 그를 보며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면 상대가 윌리엄이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러고는 정말로 기쁜 듯 환하게 미소 짓는 오하르를 보며 덧붙였다.
“그래도 지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좀 구차하긴 하지만, 그게 정답. 그래도 지면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그 어느 때보다 열심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부끄러울 정도로 단순했다. 윌리엄이 떠난 자리를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차지하게 절대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일 뿐이다. 내 영원의 별.
‘윈터. 잘했어.’
칭찬하는 그의 목소리가 가슴속에 맴돌았다.
“의관을 바로 하십시오.”
옷매무시를 다듬고 곧게 허리를 펴자 청옥으로 조각된 문이 열리고 빛이 쏟아졌다.
“새뮤얼 아지스라 라비앙 고결, 태혼의 황녀 전하이십니다.”
파니에(속치마)로 잔뜩 부풀린 하얀색 드레스 차림에, 백공작의 깃털로 치장된 챙이 큰 모자를 쓴 소녀가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다가와 코앞에서 살짝 무릎을 굽혔다. 마주 허리를 숙여 인사한 나는 그녀의 비단으로 감싼 손등에 사랑을 담아 키스했다.
“윈터!”
“새뮤얼 황녀님.”
“계속 오늘만 기다렸어. 와아! 어서 나가자, 응?”
한 살 어린 황국의 유일한 황녀님은, 분으로 하얗게 화장한 얼굴에 싱그러운 장밋빛 뺨을 뽐내며 제자리에서 핑그르르 돌았다.
“황녀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뒤따르는 시녀가 그렇게 꾸짖어도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팔에 팔짱을 꼈다.
“내버려 둬. 오늘부터 사흘간은 누가 뭐래도 내 마음대로 실컷 놀 테니까. 그치, 윈터?”
나는 그저 옅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내 손 위에 얹었다.
“다 좋지만, 안겨 오진 마세요, 황녀님. 저 아버지께 혼납니다.”
“후훗!”
곱슬곱슬한 검은색 머리에서 장미꽃 향기가 났다. 향이 좋다고 말했더니 황녀님은 새로 온 조향사의 이야기를 하며 맑게 웃었다. 1년 중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 순간이 즐거운 이 장미의 황녀는 그 자체로 황국의 보물이다.
그러니까 소중하게 지켜야 한다. 내 빛이 그대를 흠모하기에, 내 빛이 그녀를 지키고 싶어 하였기에.
윌리엄이 기사 작위를 받던 날, 그는 새뮤얼 황녀를 자신의 레이디로 삼고 영원히 그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녀의 기사가 되기를 맹세했다. 그가 여기 없는 동안, 이제 내가 그의 뒤를 이어― 그 빈자리를 지켜야 했다.
상아색 뺨에 떨어진 꽃잎을 떼어 주며 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럼, 황녀님. 가실까요?”
“천국으로 데려다주세요, 기사님.”
“얼마든지요, 황녀님.”
“황녀님!”
한숨을 푹 내쉰 걱정 많은 시녀, 오리겔은 종종걸음으로 우리를 쫓아왔다. 치맛자락을 팔락이며 사뿐사뿐 걷는 그녀의 뒤로 스무 명의 시녀와 열 명의 근위대 기사가 뒤따랐다. 영원의 호수 서쪽 선착장으로 가는 내내 황녀님은 상기된 얼굴로 조잘조잘 햇볕 아래 지저귀는 참새처럼 종알거렸다.
또래 친구가 없는 황성에서의 그녀는, 갓 피어난 장미꽃처럼 싱그럽고 아름답지만 무척이나 고독한 존재였다. 마치 크리스탈 병 안에 장식되어 있는 꽃송이처럼.
가끔 나와, 내 소중한 친구 크리스티앙이 황녀님을 찾을 때 이외에는 그저 책을 읽고 예법을 익히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이 전부인 소녀였다. 그런 새뮤얼 황녀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내게 말했다.
“오늘로 시험이 끝난 거지?”
“알고 계시는군요.”
“오라버니께서 기대하고 있거든. 음…… 이름이 존시였던가?”
“전학생 말인가요? 존스입니다, 황녀님.”
“그래, 존스. 대단한 인재라면서? 이번 시험 결과를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다고 했어.”
“뛰어난 학생입니다.”
“에이― 다 알고 있어. 나도 딱 한 번 그를 봤는데, 그는 윌리엄에 비하자니 손색이 많던걸? 윈터가 못마땅해할 게 눈에 선했다고.”
황궁에서마저 이번 시험 결과를 주목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나는 얼떨떨해졌다. 하지만 새뮤얼 황녀님의 탁월한 안목에 기분이 좋아졌다.
영원의 서쪽 선착장에 도착한 우리는 화려하게 갖가지 천으로 치장된 보트에 올랐다. 열 사람 정도가 겨우 앉을 수 있는 작은 보트 여러 대가 호수의 가장자리에서 천천히 물결을 일으키며 중앙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소풍 나온 소녀들의 풋내 나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둘러보니 저마다, 황녀님의 배를 발견하고 저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뱃머리에 앉은 황녀는 구두를 벗더니 치마와 드로어즈를 걷고 작고 동그란 발을 물속에 넣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아 황녀님을 지켜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400년은 된 커다란 버드나무의 가지가 물가에 드리워져, 그 아래로 잉어가 펄떡이며 물 위로 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황녀님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간식이 준비되었다.
“윈터. 바이올린을 켜 줘.”
“곡은?”
“소녀의 노래가 어떨까?”
시녀가 받쳐 든 과자를 집어 먹으며 황녀는 연주를 졸랐다.
나는 늘 그랬듯 조심스럽게 악기 가방에서 유리로 만든 바이올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턱 밑에 받쳤다. 유리 바이올린은 순전히 황녀님의 취향으로, 그녀는 내가 바이올린으로 그녀만을 위해 연주하는 순간을 무척이나 즐겼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새뮤얼 황녀님은 다른 소녀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그녀들에게 자랑하길 좋아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밉기는커녕 가련하게만 느껴졌다. 황녀에게는 소녀들과 같은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여러 명분의 친구 노릇을 모두 해야 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바이올린은 호수의 물빛이 물들어 푸르게 빛났다. 가만히 활을 현 위에 얹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황녀를 위한 ‘소녀의 노래’를 속삭였다.
곧이어 휴일 오후의 호숫가에는 어린 소녀들이 조잘거리는 듯한 사랑스러운 바이올린의 멜로디가 가득 퍼져 갔다. 소풍 나온 소녀들은 수다를 잠시 멈추고 바이올린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어디서도 듣지 못한 곡일 것이었다. 유명한 곡은 아니다. 이 곡은 바로, 우리의 친구 윌리엄이 작곡했던 곡이기에 오직 내 바이올린을 통해서만 세상에 나오곤 했다.
황녀님께서는 꿈꾸는 듯한 얼굴로, 지그시 눈을 감고는 바이올린의 음을 따라 흥얼거리셨다. 오직 황녀님을 위해 윌리엄이 작곡한 노래. 오직 황녀님만을 위해 내가, 기꺼이 광대가 되어 연주하는 음악.
한여름 햇빛이 가득 쏟아져 내리는 오후의 들판과도 같은 곡이었다. 푸르른 초록이 바람결에 사르륵 소리 내어 흔들리고 그 위를 소녀가 숨이 벅차도록 왈츠를 추는, 뭐― 그런 이미지로 ‘소녀의 기분 전환을 위한 연주곡’이라 할 수 있겠다.
곡의 연주가 끝나자 저마다 보트 위의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보내왔다. 황녀님은 생긋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나는 과장되게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윈터. 정말 멋져.”
“마음에 드셨나요?”
“으응― 역시 윈터는 음악가가 되어야 했어.”
“그거 아쉽군요.”
그저 교양 수준으로 익힌 악기지만 황녀님과 윌리엄을 위해 더욱 갈고닦아 지금은 제법 그럴싸해졌다. 그러나 전업으로 삼을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황녀님의 칭찬에 그저 싹싹하게 웃으며 그녀의 발을 닦아 주었다.
황녀가 말했다.
“언제까지나 이럴 수 있었으면 좋겠어.”
동감이다. 그러나 휴일은 고작 앞으로 3일이고, 그 후에는 다시 우리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성적은 다음 주에 발표된다. 애써 그것에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는 황녀님과 시선을 맞추고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