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왕립 프린스턴 아카데미 5학년 3화

전학생이 왔다 (3)


황녀님을 고결의 궁으로 모셔다드리고 나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폐하의 집무실로 향했다. 이 황국의 황제는 어지간히도 일중독인 통치자라 언제나 궁성 가장 깊은 밤까지 집무실에 불을 밝히고 일하기로 유명했다.
“윈스턴 라임베르흐.”
“폐하.”
“일어나라.”
무릎을 펴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내게 손짓하는 왕의 손짓을 따라 그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황녀님과 똑 닮은 구불구불한 검은색 머리카락은 손질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등 뒤로 늘어져 있었고 멋스러운 콧수염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안경을 내려놓으며 눈 위를 손으로 누르는 왕의 몸짓은 더없이 평온해 보여서, 황제의 위엄이라든가 대제국을 다스리는 통치자의 기세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 나는 존경하고 흠모하는 마음을 담아 조심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새뮤얼은 즐거워하던가?”
“네, 무척이나 좋아하셨습니다.”
“다행이로구나. 요즘 눈에 띄게 말라 가서 걱정이 심하다네.”
그는 다정한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염려치 않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황녀 전하께선 다만, 좀 더 마른 체형을 가지고 싶어 하실 뿐이니까요.”
“요즘 애들은 통 이해할 수 없다니까. 마리앵 정도가 딱 보기 좋지 않나?”
황비님의 이름을 그렇게 애정을 듬뿍 담아 부르는 황제의 모습에 정말로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내 웃음기로 가득한 눈을 보며, 황제는 귀엽다는 듯 말했다.
“새뮤얼과 혼인하지 않겠는가, 윈스턴?”
아아. 그때 천만다행히도, 노크도 없이 집무실 문이 열렸다.
“무립니다, 폐하. 이 애송이는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칠 테고 황녀님만 가엽게 될 게 뻔해요.”
“아버지!”
서류를 한 더미 두 손으로 가득 받치고 들어오는 아버지를 보며 황제는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 서류를 전부 옆의 책상에 올려놓은 황제는 나를 보더니 물었다.
“성에서 자고 갈 테냐?”
“네, 앞으로 휴일이 끝날 때까지 황녀님과 함께 있기로 했으니까요.”
아버지는 황제를 보더니 무례하게도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님의 평판에 누가 됩니다. 제대로 책임질 마음도 없는 녀석에게 마음을 기울여 봐야 폐하께만 손해입니다.”
“자네 아들이지 않나? 좀 더 다정하게 대해 주게.”
“충분히 다정하게 대하고 있는 겁니다. 다만 진실을 말하는 거죠.”
집무실 보조 책상에 앉은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시험은 잘 보았느냐?”
폐하마저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는 걸 보고 그 전학생의 여파가 여기까지 와 있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한없이 어려지게 만드는 두 분 앞에서 나는 잠시 침묵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겨우 최선을 다했다고 한마디 하자 곧바로 왕이 말했다.
“태자를 한번 만나 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이름이 뭐였더라?”
“존스입니다. 정 못 외우시겠으면 그냥 ‘그 편입생 녀석.’이라고 부르시든가요.”
“그래, 존스. 태자가 그렇게 천재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더군. 바말에서 직접 데려왔으니 더욱 그렇겠지.”
황제와 아버지의 대화를 들으면서 겨우 왕립 프린스턴의 학부생이 황제의 집무실에서 대화의 주제가 될 정도로 대단한 위치였던가를 다시 생각해야만 했다.
그나저나 바말에서 왔다고? 외국인의 억양처럼은 들리지 않았는데. 생각에 잠긴 나를 보며 황제는 자애로운 얼굴로 되었다.
“그래, 그만 물러가도 좋다. 자네 이상으로 황녀의 기분을 맞춰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앞으로도 새뮤얼을 부탁하도록 하겠네.”
나는 만인의 사랑을, 특히나 황실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새뮤얼 황녀의 ‘지금은 하나밖에 없는’ 친구였다. 명재상 앤드류 드 라임베르흐의 아들이라든가, 라임베르흐가의 오남이라든가 하는 위치보다, 이들에게는 그 친구의 의미가 더욱 중요할 것이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딸이었기에. 혹은, 더없이 사랑하는 주군의 딸이었기에.



첫 번째 승부, 달콤했지만 너무 짧은 (1)


지혜의 여신이 활을 쏘아 새날을 알리는 월요일이 시작되었다.
지난 휴일 동안 왕립 프린스턴은 파업 중인 기차 역사보다 고요했고 이제 겨우 다시 깨어나 힘겹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감당하지 못할 만큼 힘겹게.

학기 말 시험의 결과가 게시판에 공고되었다.
등교하는 학생들은 게시판에 붙어 있는 성적을 확인하면서 아침부터 침울한 얼굴로 늘어졌다. 아니 녹아내렸다. 그리하여 흐물흐물해진 젤리들의 등교 시간이 끝나갈 무렵의 교실.
나는 흐뭇함을 애써 숨기며 바른 자세로 앉아 1교시를 기다렸다. 만면에 웃음기가 가득한 베르히는 음산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여어― 윈스턴― 후후후!”
“베르히. 성적이 바닥을 기던데,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지?”
“네가 이번에도 수석이잖아! 이 몸은 부자가 됐다고! 크큭!”
아아, 그래, 네놈은 내게 걸었다고 했지. 내 쪽 승률이 더 낮았다는 것은 치욕스러웠지만, 아무튼 이번 시험 성적은 깜짝 놀랄 만큼 우수했기에 이쯤에서 어두운 과거는 잊어버리기로 했다.
믿을 수 없게도 나는 ‘전 과목 만점’이라는 학년 수석의 성적표를 받게 되었다. 말도 안 돼! 경박한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나올 지경이라, 성적을 확인하고 데스크에서 성적표를 받을 때는 손이 벌벌 떨릴 정도였다.
이겼어. 정말로. 그것도 믿기 힘든 놀라운 성적으로. 와아! 하면 되잖아?까닥 정신을 놓으면 콧노래가 흘러나와 버릴 것만 같아 곤란했다. 나는 베르히의 촐싹거림도 너그럽게 손짓으로만 쫓아 버리고는 책을 펼쳤다.
“성자의 미소가 따로 없네. 1등 놓치면 세계의 종말이라도 불러올 것 같아서 무서울 지경이야.”
“베르히. 좀 몇 초간이라도 입 다물고 있을 수 없겠어?”
“얼마 줄 건데?”
“관둬.”
자, 이로써 아버지께도 당당해질 수 있고, 형들에게 구박받을 일도 없고, 어머니는 뛸 듯이 기뻐해 주겠지. 황녀님도 신나서 안겨 들지도 모른다.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존스를 몹시 못마땅해하는 듯 보였으니까.
그리고 가장 기쁜 건 역시 나 자신이다.
세상의 그 누구도 2등에게 천재라는 이름을 붙여 주지는 않는다. 이걸로 천재라는 칭호는 오롯이 그 혼자만이 독차지할 수 있게 되었어. 이런 내 필사적인 노력도 그에게는 웃음조차 나지 않을 만큼 별 가치 없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휘페리온 태자 전하께선 각별히 아끼시는 평민이 영광을 독차지하지 못해 아쉽겠지만, 뭐 어떤가? 조금 더 승리를 자축하자. 그런 사정까지 생각하다가는 순수하게 즐거워할 수 없으니 적당히 모르는 척하는 게 좋다.
그러나 그렇게 기쁨에 취해 있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문이 열리고 금발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손을 흔드는 전학생의 모습에 우리 반 녀석들은 흥분하여 무슨 일이냐? 며 그를 반겼다. 전학생은 옆, 옆, 옆 반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난주까지는.
“조안 선생님께서 이 반으로 가라고 하셨어.”
“역시 임시로 석세스 클래스에 있었던 거였구나! 너라면 이쪽으로 오게 될 줄 알았어! 이제 계속 함께지?”
엄청난 친화력이네. 전학 온 지 몇 주째였더라? 전쟁터에 나갔다 살아 돌아온 전우라도 맞이하듯 반기는 우리 반 녀석들의 모습에 내 미간에는 골이 생겼다. 금발의 전학생이 나를 보더니 쑥스럽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다가오지 마.
전학생이 말했다.
“윈스턴, 축하해. 이번 학기말 시험 성적 엄청나더라. 난 정말로 전 과목 만점자라는 게 실재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천재적인’이라는 수식어가 우스울 정도로 수수하게 말하는 전학생의 태도에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머쓱해하는 그는 이윽고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빈자리에 가방을 풀고 선량하게 방긋방긋 웃으며 잘도 어울렸다.
아아―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더 이상 천재라는 호칭으로 불리지만 않는다면 달리 그를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스무 명이었던 반의 정원이 단지 스물한 명으로 는 것뿐이다.
교사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동안, 사내 녀석들은 지난 주말에 누가 더 얼마나 퇴폐적으로 놀았는지에 대한 자랑으로 수선스러웠다. 의외인 것은 천사 같은 얼굴을 한 전학생도 그런 질 떨어지는 대화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올해로 성인이 된 열여덟 살의 5학년생들은, 매년 5학년생들이 그러하듯, 펍을 순례하며 잔뜩 취해서 못된 장난을 벌이는 게 특기였다. 학기 중, 휴일에는 왕립 프린스턴 주위의 술집이란 술집은 모두 학교 5학년생들에게 점령당하다시피 했다. 물론 이쪽은 그런 풋풋한 통과 의례를 즐겨 본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애초에 취할 때까지 마신다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스스로의 품위를 지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취할 때까지 마시는 거지?
“어이, 윈스턴, 주말에 영원의 호수에서 연주를 했다지?”
베르히였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흥분해서 외쳤다.
“제발 관둬! 부끄럽지도 않냐? 계집애들이 몰려 있는 데서 그런 낯 뜨거운 짓 좀 하지 말란 말이야! 주말 내내, 마리가 ‘윈스턴 님께서, 윈스턴 님이! 윈스턴 님의 바이올린은― 어쩌고저쩌고―’ 좀 참아 줘!”
우우―! 하는 야유 가운데 전학생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였다.
“연주를 해? 바이올린 연주를?”
“정말이지, 잘난 척을 위해 태어난 녀석 같다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베르히는 정말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베르히로 태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란 생각은 하지.”
내 중얼거림에 녀석들은 와! 하며 소란을 피웠다. 그리고 앞문이 열리고 조안 선생이 들어왔다.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럽습니까?”
“주말 잘 보내셨습니까, 조안 선생님?”
베르히가 빙글거리는 낯짝으로 30대, 학교의 꽃으로 불리는 미모의 여선생에게 개인적인 인사를 건넨다.
“조용히. 계속 소란을 피우면 과제를 내주겠어요.”
우리 학교의 과제란 보통 위산을 역류하게 할 만큼의 부담인지라 일동은 침묵했다.
“좋습니다. 마스터 클래스의 학생들의 학기말 성적이 예년보다 훨씬 우수해서 전 조금 놀랐지 뭡니까? 걱정했던 베르히 군마저도, 전교 평균에 비하면 월등한 성적이더군요. 여러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와아!”
“상 주세요!”
“조용히. 성적 평가는 늘 그렇듯, 교사 방문과 함께 직접 가정에 통지될 겁니다. 그때 무서운 일을 당하기 싫으면 좀 더 고분고분하게 굴어 주세요.”
좌중은 다시 침묵했다.
“윈스턴 군, 존스 군. 잠시 교실 밖으로 나와 주세요.”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뒤를 전학생이 따른다.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급작스럽게 시끄러워지는 교실 안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교실 벽의 방음이 그렇게 뛰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째서 겨우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음껏 시끄러워져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런 걸 보면 열여덟 살이 아니라 여덟 살 같다니까.
“윈스턴 군.”
“네, 조안 선생님.”
“정말 훌륭한 결과였습니다. 많이 노력했군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존스 군?”
“네, 조안 선생님.”
“전학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우리 학교의 학과 과정을 제대로 이해해서 놀랐습니다. 존스 군이 뛰어난 학생인 건 알았지만, 교사들 중 누구도 이번 시험에서 존스 군이 이토록 뛰어난 성적을 받을 줄은 몰랐어요. 훌륭합니다.”
“과찬이세요.”
“존스 군도 알고 있지요? 윈스턴 군은 정말 우수한 학생입니다. 저는 당신들이 서로에게 신선한 자극제가 되었으면 하는군요. 그리고 존스 군도 이제 슬슬 학교에 적응하고 있을 테니, 누군가의 후원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적 상위권의 학생들은 보통 성적 순서대로 짝지어지기를 원하죠. 조셉이 좋은 학생이긴 하지만, 존스 군도 다른 후원자를 구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그게 일반적이니까요.”
“아니요, 전 조셉 선배가 좋습니다. 무척 잘 대해 주세요.”
“그렇다면 그대로 유지해도 좋습니다. 그래도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제게 말해 주면 됩니다, 알겠지요?”
“그럴게요.”
전학생과 함께 복도에서 교사와 면담을 하는 이유가 불안해졌다. 후원자의 이야기까지 나온 것 보니, 또 쓸데없이 귀찮은 일을 부탁하려는 건…….
“그럼 윈스턴 군?”
“말씀하십시오.”
“존스 군에게 가브리엘 군을 소개해 주지 않겠습니까?”
“멘티(Mentee) 말씀이시군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존스 군, 가브리엘은 4학년 학생입니다. 예전에는 여기 윈스턴 군이 후원자로 있었던 학생이죠. 군이 가브리엘과 친해질 수 있게 도와줄 겁니다. 윈스턴 군, 지금 상담실로 가면 가브리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수업은 방학 동안 계절 학기에 관한 공지가 전부일 테니 염려 말고 다녀오세요.”
벽 넘어 애송이들이 지나치게 시끄러워져서 다른 반에까지 피해를 주자 조안 선생은 가볍게 손짓을 하고는 교실 안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전학생과 함께 단둘이 복도에 남겨졌다. 나는 휙 한 번 그를 돌아보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전학생은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뭔가 들썩이는 기색이 무척이나 말을 걸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되도록이면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부질없이 전학생은 말을 걸어왔다.
“저, 윈스턴 군?”
“뭐지?”
“시험 기간이라 신경 쓰였다고 생각해. 아이들 이야기도 있고.”
순간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러나 눈치가 영 없는 편은 아니라, 나는 그저 코웃음을 쳤다. 그래, 너도 귀가 있으니 두 사람의 대결 구도에 대한 이야기는 실컷 들었겠군.
“그래도 이제는 시험도 끝났으니까― 그리고 네가 더 우수했고. 우리 둘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해.”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전학생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그러다가 결국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너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에 일부로 거리를 뒀다는 건가? 이봐. 처음에 말했잖아. 나는 사교에 관심 없다고. 신경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네 말처럼 시험도 끝났겠다. 이제 정말로 신경 쓰이지도, 관심 있지도 않아. 그러니까 평범하게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선 밖으로 물러나라. 이곳은 왕립 프린스턴이지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나는 평민 따위가 허락 없이 말 걸어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다.”
매정하게 그의 호의를 내쳤다. 충격으로 물드는 전학생의 얼굴을 보는 것이 즐겁거나 기쁘지는 않았기에 나는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래도 녀석은 버려지지 않고 따라왔다. 그런 그가, 무척이나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윈스턴, 있잖아.”
주제를 모르는 인간이로군. 멈춰 서지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말을 이었다.
“네가 싫지 않아. 그 긍지도, 나는 오히려 대단하다고 생각해.”
싫어하지 말아 달라고 한 적 없어.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참으며, 어느덧 도착한 상담실 앞에서 문을 살짝 두드렸다. 안에서 “네―” 하는 소년의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소년 둘이서 이쪽을 보더니 활짝 웃었다.
“선배님!”
“윈스턴 선배!”
아직 얼굴에서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소년들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날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선배님이 오실 줄은 몰랐어요.”
“오랜만이구나, 가브리엘. 그리고 앤디. 자료는 잘 받았니?”
“물론이죠, 선배. 보고 깜짝 놀랐어요. 뭐가 그렇게 많은지!”
앤디는 서글서글한 얼굴로 내 앞에 서서 아양을 떨었다. 마냥 귀엽다고 하기엔 덩치와 키가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의 애교가 싫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눈으로 그를 칭찬했다.
“이번 시험 결과도 훌륭하던데, 만족할 만큼 했니?”
“아아― 완전 연소 해 버렸어요. 확실히 윌리엄 선배보다는 윈스턴 선배가 성실하니까요. 확실히 도움이 많이 돼요.”
“잘됐구나.”
겨우 한 학년 차이지만 이 녀석들의 어리광은 다른 후배들보다 특출한 편이었다. 근 4년간 내 멘티였던 가브리엘이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보다 선배님! 전부 만점이라니, 대단해요! 우리 교수진들 쓸데없이 까다롭기로 유명해서 전 과목 만점은 영원히 나오지 않는 환상의 성적표일 줄 알았는데, 역시 선배님은 제가 제일 존경하는!”
“거기까지 해 주겠니? 그 이상은 부끄럽구나.”
“선배니임!”
참을 수 없이 귀여워서 웃고 말았더니 앤디가 말했다.
“선배, 가브리엘의 후원자요. 꼭 지금 바로 새 후원자를 정해야 하는 건가요? 어차피 방학인데, 다음 학기가 시작될 무렵에―”
“학생인 이상 혼자 후원자 없이 있을 수는 없어.”
시무룩하게 어깨가 처지는 녀석들을 보며 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 아이들의 마음은 나의 마음과 같다. 수석이든, 차석이든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아이들은 윌리엄과 나의 멘티였다. 지금까지 줄곧.
일 년 전부터 가브리엘은 다른 5학년 학생의 멘티가 되긴 했지만, 가브리엘도 그의 후원자도 별로 그 관계에 마음을 쓰지는 않았다. 이 아이들도 아직 윌리엄을 기억하고 있었고, 나 또한 그렇다.
그러니 ‘감히’ 천재라는 타이틀을 달고 혜성처럼 등장해, 교내 제일가는 유명인이 되어 버린 편입생이 우리의 관계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기 힘든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존스는 사감만 없으면 우수한 학생임이 틀림없고 가브리엘에게 딱히 나쁜 영향을 미칠 정도로 인성이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상담실 문을 활짝 열며 그를 불렀다.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 존스는 자신을 보는 적의 어린 소년들의 시선에 하하 소리 내 웃었다. 상담실 안으로 들어온 그는 후배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느 쪽이 가브리엘이지?”
놀랍게도 가브리엘은 전학생의 놀라운 외모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고서는 싫은 듯 존스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그에게 말했다.
“가브리엘, 제대로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존스 선배님. 4학년 학부생, 가브리엘입니다. 학년 차석이고 수사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있어요. 특기는 펜싱입니다. 몸을 움직이고 싶다면 언제든 대련해 주세요.”
앤디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웃었다.
“놀랍죠? 이 학교 안에서 선배님을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니.”
앤디는 윌리엄조차 태도 교정을 포기했을 정도로 자기 식대로 사는 녀석인지라 지적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뒀다. 전학생은 그런 꼬마들의 태도에도 불쾌하지 않은 듯, 오히려 정말로 재미있다는 기색을 역력하게 보이며 여유 만만하게 웃었다.
“그래, 잘 부탁한다. 특기는 총검술이고 취미는 생각하기인, 이 학교에 대해선 오히려 네게 더 배울 게 많은 ‘그냥 편입생’이지. 어려워 말고 편하게 대하렴.”
정말로 모나지 않은 녀석이구나. 철학 시간에 교사와 녀석의 문답법을 구경할 때처럼 나는 감탄했다.
“그나저나, 선배님. 정말로 잘생겼네요. 덕분에 세상 살기 엄청 편하죠?”
앤디는 존스를 화나게 하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굴었다. 손을 뻗어 제멋대로 전학생의 금발을 만지며 그렇게 말하자 나는 절로 조마조마해졌다. 허락도 받지 않고 남의 머리를 만지다니.
“편하게 대하라고 했잖아요.”
히죽 웃는 앤디를 향해 전학생도 그 미모가 배가 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친해진 것 같아 좋은데? 그나저나 넌 누구지?”
“앤디미온. 그냥 앤디라고 부르세요.”
“그래, 앤디.”
“윈스턴 선배께서 저의 후원자세요.”
이봐, 내 멘티와 친해져서 어쩌잔 거야? 공략 대상은 따로 있을 텐데. 가브리엘을 보니 마찬가지로 반항적인 태도로 앤디의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삐딱하게 서 있었다. 앤디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선배. 우리가 별로 선배를 반기는 상황이 아니란 건 아시겠죠? 그래서 말인데, 어쨌든 가브리엘의 후원자가 되긴 하겠지만 이대로도 좋으니 지금까지처럼 지냈으면 하는데요. 마음에 두는 후배가 있다면 미리 점찍어 놓아도 좋을 거예요.”
가브리엘도 뒤에서 거들었다.
“그렇게 해 주세요. 전 아무런 도움도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어차피 다음 학기부터는 선배들에게도 학년 석차가 의미 없어지잖아요.”
당돌한 녀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