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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문 上
1화
序章. 시작하다
검을 타고 흐르는 피가 바닥에 한 방울씩 떨어졌다. 바닥에 피기 시작한 혈화의 기세는 수그러들기는커녕 그 양을 더해 갔다.
심장에 박힌 검을 보던 사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져 갔다. 치명적인 상처임에도 사내는 이상할 정도로 느긋했고 여유로웠다.
“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물음에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심장을 찔린 사내보다도 창백한 여인의 눈이 상처에 가 있었다.
본디 그녀가 맞았어야 할 검이었다. 지옥 같은 황궁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죽은 사람의 행세 따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왜…… 어째서…….”
이런 식의 결과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생각하기도 싫었다. 목 끝에 머무는 비명을 삼키며 여인이 몸을 떨었다. 심장에서 흐르는 피가 심상치 않았다.
냉정하고 두려운 사내의 심장에서 나오는 피가 유난히 붉고 뜨거웠다.
그가 다쳐서 다행일까? 아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이렇게 다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의 손에 죽더라도, 그만큼은 절대 다치면 안 되는 사내였다.
미워하고 거부했지만 한편으로는 존경하고 빠져들었던 사내였다.
“왜!”
“…….”
여인의 물음에 사내가 희미한 미소를 흘렸다.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
본래부터 그의 것이었던 여인.
하지만 마주 보기만 할 뿐, 그녀는 그의 곁에 있을 수는 없는 존재였다.
“내가 가질 수 없는 여인이라면…… 어찌해야 하는가?”
누구도 가질 수 없게 부숴 버릴 것인가? 그게 아니면…….
평소의 그라면 절대 생각하지 않았을 방법이었다. 하지만 막상 저질러 놓고 나니 나쁘지 않았다.
눈조차 마주하지 않던 여인이 사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내는 처음으로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이런 결과도 괜찮지 않은가?”
굳건했던 몸이 비틀거리자 굳어 있던 여인이 손을 뻗어 그를 부축하였다.
억지로 자신을 가리던 거짓은 여인의 눈에 남아 있지 않았다. 피에 젖은 사내의 손이 여인의 하얀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의 손을 밀어 내던 여인이 지금만큼은 사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넌 이제 자유다.”
잡을 수 없는 여인이었어도 그의 삶에 하나뿐인 온기였다.
부서트리면서까지 얻고 싶은 여인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망가진 여인을 곁에 두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다.
결국 그가 선택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컥!”
말을 끝낸 사내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현실을 부정하던 여인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무너지는 사내를 받아 든 여인의 눈에 깊은 절망이 스며들었다.
“아니야.”
“…….”
“이건…… 아니야.”
온몸을 휘감던 공포가 절정을 이루는 순간, 품에 안은 사내의 몸에서 체온이 빠져나가는 것을 깨닫는 순간, 간신히 붙잡고 있던 여인의 이성이 무너졌다.
사내를 품에 안은 여인이 날카로운 절규를 터트렸다.
一章. 찾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로 사람들의 비명이 가득 메웠다. 코를 아리게 하는 혈향보다도 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모두가 이성을 잃고 도망치느라 정신없었다.
“아아악!”
온몸에 뒤집어쓴 피는 신경 쓸 틈도 없이 도망가는 사내를 향해 장군이 달려와 검을 휘둘렀다. 포물선을 그리며 휘두른 검을 따라 사내의 등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컥!”
쓰러진 사내를 보던 장군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검을 내리찍었다.
꿈틀거리던 몸이 멈추고, 검을 다시 빼낸 장군이 달려오는 병사들을 향해 소리를 높였다.
“여상환을 찾아라! 여상환을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
그의 독려에 달려온 병사들이 고함을 질렀다. 쌓인 시신에서 흐르는 피가 강이 되어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열린 문으로 순식간에 들이닥친 군대는 조금의 자비도 없이 가문 내의 사람들을 도륙하기 시작하였다.
병사들의 움직임이 절정을 이룰 무렵, 엉망으로 뜯겨 떨어진 문 너머로 무심한 표정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병사들이 사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를 뵈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사내, 아니 황제의 눈이 참상을 천천히 훑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여 고개를 돌릴 참상이었지만 무언가 확인을 하는 것처럼 황제는 느긋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눈에 담았다.
황제의 움직임에 모든 병사가 숨을 죽인 것도 잠시, 굳게 다물었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물음이 나왔다.
“어째서 이러고 있는가?”
“네?”
“여상환의 목이 보이지 않는다. 중죄인을 잡아들이지도 못한 이들이 무슨 자격으로 짐 앞에 예를 취하고 있는 건가?”
서늘한 목소리에 무릎을 꿇고 있던 병사들이 숨을 들이켰다.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땀이 얼굴을 타고 갑옷으로 흘러내렸다. 태연한 모습으로 이들을 압박하는 사내는 황후의 가문인 여가를 멸문시키려는 장본인이자 호연의 주인인 황제였다.
조금의 실수도 목숨으로 거둬들이는 그의 앞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였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여상환을 찾아라!”
선두에 서 있는 장군의 고함에 무릎을 꿇었던 병사들이 도망치듯 움직였다.
그들을 바라보던 황제가 하늘을 향해 눈을 들었다. 평생을 함께하겠노라며 맹세한 황후도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황제가 원하는 것은 두 가지, 자신을 조롱하며 힘을 과시했던 여가의 가주, 여상환의 목과 오랫동안 호연을 움직여 왔던 여가의 힘이었다.
병사들의 움직임을 보던 황제가 인적이 거의 없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약간의 인적도 느껴지지 않는 울창한 숲, 사람은커녕 동물의 흔적조차 없었기에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는 곳을 황제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에 지척에서 말할 기회만을 노리던 장군 하나가 조용히 다가왔다.
“폐하. 그곳은 나무밖에 없는 곳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 굳이 병사를 보낼 필요가 없…….”
말을 잇던 장군이 갑자기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숨을 들이마셨다. 언제 찔린 것인지 황제의 검이 정확히 장군의 심장에 꽂혀 있었다.
순식간에 사람의 몸에 검을 꽂았음에도 황제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폐…….”
“어리석은 명령으로 일을 그르치는 신하는 거둘 가치가 없다.”
심장을 찌른 검이 미끄러지듯 빠져나오고, 피를 뿜으며 장군의 몸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장군의 시신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황제가 숲을 향해 몸을 날렸다.
*
본가 옆으로 이어진 숲은 울창하고 험하여 흡사 가파른 산을 오르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뒤따르는 이들 중 몇몇에게서 가쁜 숨이 흘러나왔지만, 선두로 움직이는 황제는 움직임은 물론 숨소리마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여가에서 울리던 비명과 소음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참을 움직이자 숲의 깊숙한 곳에 허름한 집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의 손을 탄 듯 깔끔히 정리되어 있는 집 앞에서 하나로 머리를 묶은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정한 옷매무새만큼이나 정갈한 모습의 여인은 피투성이인 병사와 황제의 앞임에도 침착하였다.
“폐하를 뵈옵니다.”
비슷한 연치의 여인들에 비해 조금은 앳돼 보이는 여인이었다.
“내가 황제라는 증좌라도 있는가?”
“황후의 가문인 여가에 검을 휘두를 수 있는 분이 호연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여인의 말에 황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 후, 무려 십이 년을 벼르고 별러 왔던 일을 오늘에서야 이루는 중이었다.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 후,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상환에 의해 그의 딸을 황태자비로 맞아들였다. 선제 때부터 휘둘렀던 권력은 그의 부인인 황태자비가 황후가 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황제보다도 더한 권력을 휘두르는 그를 치기 위해 굴욕을 삼키며 몸을 숙이고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황후의 집안인 여가와 국구인 여상환을 드디어 쳐 내게 되었다.
선제부터 황권보다도 압도적인 권력으로 호연을 휘두르던 여가를 자신의 손으로 멸문시키는 날, 예상치 못한 여인과의 만남은 황제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왠지 모를 호기심을 함께 느끼게 하였다.
“짐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면 이번에는 그대를 소개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한시라도 빨리 여상환을 붙잡아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앞에서도 태연한 여인이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그가 호연의 황제라는 것을 안다면, 적어도 그가 어떤 황제인지는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저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여인이 황제가 이곳에 올 줄 미리 알고 기다렸다는 뜻이다.
느긋한 황제에게서 숨조차 내쉬기 어려운 살기가 나온 것도 그 순간이었다. 황제의 살기에 여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였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이를 악물며 여인은 버텨 냈다.
“소녀의 이름은 여수련이라 하옵니다.”
“여가라……. 그대 또한 여라면 왜 짐의 앞에 서 있는 것인가? 죽을 생각인가? 아니면 목숨을 구걸하고자 함인가?”
“목숨을 구걸하고자 함입니다.”
수련의 대답에 어림없다는 듯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황제의 앞에 서 있는 수련은 진심이었다. 그녀가 아는 호연의 황제는 자신의 뜻에 반하는 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목숨을 거두는 폭군이었다. 몸에서 내뿜는 살기에는 숨조차 쉬지 못한다 하였고, 극강의 경지에 이른 검은 상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목을 벤다고 하였다.
지금 상황이 몸서리치게 무서웠지만, 수련은 참아 냈다.
“나무에 높게 달린 열매를 따기 위해서는 때로는 발을 디딜 받침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나무를 베어 버리면 그만일 터. 짐에게는 그러한 받침이 필요가 없다.”
“쓰러진 나무에 열매가 부서질 수도 있음이 아닙니까?”
여인의 몸으로 한 마디, 한 마디 꺼내는 말이 보통이 아니었다. 하물며 버티는 여인에게서 여상환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자칫 어설픈 술수에 넘어가 여상환을 놓치면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수포가 되어 버린다. 수련을 향해 다가간 황제가 그녀의 목에 검을 댔다.
“짐에게 주려는 열매가 너에게는 어떤 존재인 것이냐?”
황제의 물음에 수련이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여가에 황제의 군대가 들이닥쳤다는 남동생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생각한 도박이었다. 이대로라면 모두 죽는다. 될지 안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의 가능성에 그녀는 전부를 걸어야 했다.
“아버지입니다.”
“여상환에게는 황후인 딸과 아들이 있을 터인데? 하물며 그의 본처는 벌써 목을 맸다.”
“부정하고 싶지만, 아버지가 맞습니다. 이곳에 저와 어머니를 가둬 두시고 외면하신 분이지만 아버지이십니다. 이제 와 지켜 달라며 매달리고 계시지만 그래도 소녀에게는 아버지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팔겠다는 건가?”
“그렇게라도 살 수 있다면 살아야 하니까요.”
떨리는 눈에 공포가 깃들어 있었지만 물러나지 않는 수련을 보던 황제가 자신의 검을 거두었다. 목에 닿아 있던 검의 감촉이 사라지자 수련이 힘든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늘한 기운이 수련의 목을 스쳤다.
후두둑.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는 수련의 눈이 커졌다. 잘린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를 타고 바닥에 흐트러졌다.
“다음에는 머리카락이 아니라 네 머리가 될 수도 있다.”
여상환을 놓치는 순간, 목숨을 거두겠다는 엄포에 수련이 고개를 숙였다. 단발이 된 머리카락이 귀를 덮었지만, 묶었을 때보다도 춥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황제와의 거래는 받아들여졌고,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버지라는 사람의 목숨을 팔아서라도 살아야 했다.
힘이 빠지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수련이 방을 열었다.
“따라오십시오.”
*
방에 들어온 황제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침상에 앉아 있는 중년 여인과 어린 남자아이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듯 수련이 들어왔음에도 중년 여인의 눈은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누님!”
눈에 띄게 떨고 있는 남자아이가 수련을 보자마자 품을 파고들었다. 담담한 수련의 표정이 처음으로 바뀌었다. 좀 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수련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남자아이를 다독였다.
“현아. 괜찮아. 어머니와 나가 있어.”
“수련아. 무슨 일이 일어난 거니? 방에 들어오신 분들은…….”
“어머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시고 현이와 나가 계세요.”
“누님! 전…….”
두려운 눈으로 황제를 보던 현을 수련이 괜찮다며 거듭 다독였다.
둘을 다독이는 수련의 모습을 황제가 하나도 빠짐없이 쳐다보았다. 황제가 아는 한, 여상환의 딸은 승정궁에 유폐되어 있는 황후뿐이었다.
여인으로서 관심은 없었지만, 사내조차 두려워하는 지금의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수련의 모습은 제법 흥미로웠다. 두려워하는 둘을 진정시킨 수련이 황제에게 허락을 구하듯 조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담하게 행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황제의 눈치를 살피고 상황을 판단하였다. 그가 지금까지 보아 온 여인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내보내라.”
황제가 허락하자 수련이 최대한 조심스럽게 중년 여인과 현이를 밖으로 내보냈다. 둘을 완전히 내보낸 그녀가 침상을 덮고 있던 두꺼운 요를 거둬 냈다. 요를 거둬 내자 침상에 사람 하나가 오고 갈 크기의 문이 눈에 들어왔다.
“준비하십시오.”
수련의 말에 따라 들어온 호위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수련이 닫혀 있던 문을 열자, 검은 인영이 튕겨 나오듯 박차고 뛰어올랐다. 달려드는 호위를 맨몸으로 막아 낸 인영이 황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황제의 손이 인영의 목을 향해 움직였다.
“컥!”
원하는 사냥감을 발견한 황제의 눈에 위험한 광채가 번뜩였다. 목을 움켜쥔 황제가 인영을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목을 잡았을 때와는 달리 비명조차 나지 않았다.
“이렇게 다시 뵐 줄은 몰랐소. 대국구.”
살기 어린 시선에 도망치려던 여상환이 숨을 들이켰다.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에 여상환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1화
序章. 시작하다
검을 타고 흐르는 피가 바닥에 한 방울씩 떨어졌다. 바닥에 피기 시작한 혈화의 기세는 수그러들기는커녕 그 양을 더해 갔다.
심장에 박힌 검을 보던 사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져 갔다. 치명적인 상처임에도 사내는 이상할 정도로 느긋했고 여유로웠다.
“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물음에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심장을 찔린 사내보다도 창백한 여인의 눈이 상처에 가 있었다.
본디 그녀가 맞았어야 할 검이었다. 지옥 같은 황궁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죽은 사람의 행세 따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왜…… 어째서…….”
이런 식의 결과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생각하기도 싫었다. 목 끝에 머무는 비명을 삼키며 여인이 몸을 떨었다. 심장에서 흐르는 피가 심상치 않았다.
냉정하고 두려운 사내의 심장에서 나오는 피가 유난히 붉고 뜨거웠다.
그가 다쳐서 다행일까? 아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이렇게 다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의 손에 죽더라도, 그만큼은 절대 다치면 안 되는 사내였다.
미워하고 거부했지만 한편으로는 존경하고 빠져들었던 사내였다.
“왜!”
“…….”
여인의 물음에 사내가 희미한 미소를 흘렸다.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
본래부터 그의 것이었던 여인.
하지만 마주 보기만 할 뿐, 그녀는 그의 곁에 있을 수는 없는 존재였다.
“내가 가질 수 없는 여인이라면…… 어찌해야 하는가?”
누구도 가질 수 없게 부숴 버릴 것인가? 그게 아니면…….
평소의 그라면 절대 생각하지 않았을 방법이었다. 하지만 막상 저질러 놓고 나니 나쁘지 않았다.
눈조차 마주하지 않던 여인이 사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내는 처음으로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이런 결과도 괜찮지 않은가?”
굳건했던 몸이 비틀거리자 굳어 있던 여인이 손을 뻗어 그를 부축하였다.
억지로 자신을 가리던 거짓은 여인의 눈에 남아 있지 않았다. 피에 젖은 사내의 손이 여인의 하얀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의 손을 밀어 내던 여인이 지금만큼은 사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넌 이제 자유다.”
잡을 수 없는 여인이었어도 그의 삶에 하나뿐인 온기였다.
부서트리면서까지 얻고 싶은 여인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망가진 여인을 곁에 두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다.
결국 그가 선택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컥!”
말을 끝낸 사내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현실을 부정하던 여인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무너지는 사내를 받아 든 여인의 눈에 깊은 절망이 스며들었다.
“아니야.”
“…….”
“이건…… 아니야.”
온몸을 휘감던 공포가 절정을 이루는 순간, 품에 안은 사내의 몸에서 체온이 빠져나가는 것을 깨닫는 순간, 간신히 붙잡고 있던 여인의 이성이 무너졌다.
사내를 품에 안은 여인이 날카로운 절규를 터트렸다.
一章. 찾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로 사람들의 비명이 가득 메웠다. 코를 아리게 하는 혈향보다도 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모두가 이성을 잃고 도망치느라 정신없었다.
“아아악!”
온몸에 뒤집어쓴 피는 신경 쓸 틈도 없이 도망가는 사내를 향해 장군이 달려와 검을 휘둘렀다. 포물선을 그리며 휘두른 검을 따라 사내의 등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컥!”
쓰러진 사내를 보던 장군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검을 내리찍었다.
꿈틀거리던 몸이 멈추고, 검을 다시 빼낸 장군이 달려오는 병사들을 향해 소리를 높였다.
“여상환을 찾아라! 여상환을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
그의 독려에 달려온 병사들이 고함을 질렀다. 쌓인 시신에서 흐르는 피가 강이 되어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열린 문으로 순식간에 들이닥친 군대는 조금의 자비도 없이 가문 내의 사람들을 도륙하기 시작하였다.
병사들의 움직임이 절정을 이룰 무렵, 엉망으로 뜯겨 떨어진 문 너머로 무심한 표정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병사들이 사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를 뵈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사내, 아니 황제의 눈이 참상을 천천히 훑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여 고개를 돌릴 참상이었지만 무언가 확인을 하는 것처럼 황제는 느긋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눈에 담았다.
황제의 움직임에 모든 병사가 숨을 죽인 것도 잠시, 굳게 다물었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물음이 나왔다.
“어째서 이러고 있는가?”
“네?”
“여상환의 목이 보이지 않는다. 중죄인을 잡아들이지도 못한 이들이 무슨 자격으로 짐 앞에 예를 취하고 있는 건가?”
서늘한 목소리에 무릎을 꿇고 있던 병사들이 숨을 들이켰다.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땀이 얼굴을 타고 갑옷으로 흘러내렸다. 태연한 모습으로 이들을 압박하는 사내는 황후의 가문인 여가를 멸문시키려는 장본인이자 호연의 주인인 황제였다.
조금의 실수도 목숨으로 거둬들이는 그의 앞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였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여상환을 찾아라!”
선두에 서 있는 장군의 고함에 무릎을 꿇었던 병사들이 도망치듯 움직였다.
그들을 바라보던 황제가 하늘을 향해 눈을 들었다. 평생을 함께하겠노라며 맹세한 황후도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황제가 원하는 것은 두 가지, 자신을 조롱하며 힘을 과시했던 여가의 가주, 여상환의 목과 오랫동안 호연을 움직여 왔던 여가의 힘이었다.
병사들의 움직임을 보던 황제가 인적이 거의 없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약간의 인적도 느껴지지 않는 울창한 숲, 사람은커녕 동물의 흔적조차 없었기에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는 곳을 황제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에 지척에서 말할 기회만을 노리던 장군 하나가 조용히 다가왔다.
“폐하. 그곳은 나무밖에 없는 곳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 굳이 병사를 보낼 필요가 없…….”
말을 잇던 장군이 갑자기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숨을 들이마셨다. 언제 찔린 것인지 황제의 검이 정확히 장군의 심장에 꽂혀 있었다.
순식간에 사람의 몸에 검을 꽂았음에도 황제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폐…….”
“어리석은 명령으로 일을 그르치는 신하는 거둘 가치가 없다.”
심장을 찌른 검이 미끄러지듯 빠져나오고, 피를 뿜으며 장군의 몸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장군의 시신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황제가 숲을 향해 몸을 날렸다.
본가 옆으로 이어진 숲은 울창하고 험하여 흡사 가파른 산을 오르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뒤따르는 이들 중 몇몇에게서 가쁜 숨이 흘러나왔지만, 선두로 움직이는 황제는 움직임은 물론 숨소리마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여가에서 울리던 비명과 소음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참을 움직이자 숲의 깊숙한 곳에 허름한 집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의 손을 탄 듯 깔끔히 정리되어 있는 집 앞에서 하나로 머리를 묶은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정한 옷매무새만큼이나 정갈한 모습의 여인은 피투성이인 병사와 황제의 앞임에도 침착하였다.
“폐하를 뵈옵니다.”
비슷한 연치의 여인들에 비해 조금은 앳돼 보이는 여인이었다.
“내가 황제라는 증좌라도 있는가?”
“황후의 가문인 여가에 검을 휘두를 수 있는 분이 호연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여인의 말에 황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 후, 무려 십이 년을 벼르고 별러 왔던 일을 오늘에서야 이루는 중이었다.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 후,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상환에 의해 그의 딸을 황태자비로 맞아들였다. 선제 때부터 휘둘렀던 권력은 그의 부인인 황태자비가 황후가 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황제보다도 더한 권력을 휘두르는 그를 치기 위해 굴욕을 삼키며 몸을 숙이고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황후의 집안인 여가와 국구인 여상환을 드디어 쳐 내게 되었다.
선제부터 황권보다도 압도적인 권력으로 호연을 휘두르던 여가를 자신의 손으로 멸문시키는 날, 예상치 못한 여인과의 만남은 황제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왠지 모를 호기심을 함께 느끼게 하였다.
“짐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면 이번에는 그대를 소개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한시라도 빨리 여상환을 붙잡아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앞에서도 태연한 여인이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그가 호연의 황제라는 것을 안다면, 적어도 그가 어떤 황제인지는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저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여인이 황제가 이곳에 올 줄 미리 알고 기다렸다는 뜻이다.
느긋한 황제에게서 숨조차 내쉬기 어려운 살기가 나온 것도 그 순간이었다. 황제의 살기에 여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였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이를 악물며 여인은 버텨 냈다.
“소녀의 이름은 여수련이라 하옵니다.”
“여가라……. 그대 또한 여라면 왜 짐의 앞에 서 있는 것인가? 죽을 생각인가? 아니면 목숨을 구걸하고자 함인가?”
“목숨을 구걸하고자 함입니다.”
수련의 대답에 어림없다는 듯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황제의 앞에 서 있는 수련은 진심이었다. 그녀가 아는 호연의 황제는 자신의 뜻에 반하는 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목숨을 거두는 폭군이었다. 몸에서 내뿜는 살기에는 숨조차 쉬지 못한다 하였고, 극강의 경지에 이른 검은 상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목을 벤다고 하였다.
지금 상황이 몸서리치게 무서웠지만, 수련은 참아 냈다.
“나무에 높게 달린 열매를 따기 위해서는 때로는 발을 디딜 받침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나무를 베어 버리면 그만일 터. 짐에게는 그러한 받침이 필요가 없다.”
“쓰러진 나무에 열매가 부서질 수도 있음이 아닙니까?”
여인의 몸으로 한 마디, 한 마디 꺼내는 말이 보통이 아니었다. 하물며 버티는 여인에게서 여상환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자칫 어설픈 술수에 넘어가 여상환을 놓치면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수포가 되어 버린다. 수련을 향해 다가간 황제가 그녀의 목에 검을 댔다.
“짐에게 주려는 열매가 너에게는 어떤 존재인 것이냐?”
황제의 물음에 수련이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여가에 황제의 군대가 들이닥쳤다는 남동생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생각한 도박이었다. 이대로라면 모두 죽는다. 될지 안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의 가능성에 그녀는 전부를 걸어야 했다.
“아버지입니다.”
“여상환에게는 황후인 딸과 아들이 있을 터인데? 하물며 그의 본처는 벌써 목을 맸다.”
“부정하고 싶지만, 아버지가 맞습니다. 이곳에 저와 어머니를 가둬 두시고 외면하신 분이지만 아버지이십니다. 이제 와 지켜 달라며 매달리고 계시지만 그래도 소녀에게는 아버지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팔겠다는 건가?”
“그렇게라도 살 수 있다면 살아야 하니까요.”
떨리는 눈에 공포가 깃들어 있었지만 물러나지 않는 수련을 보던 황제가 자신의 검을 거두었다. 목에 닿아 있던 검의 감촉이 사라지자 수련이 힘든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늘한 기운이 수련의 목을 스쳤다.
후두둑.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는 수련의 눈이 커졌다. 잘린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를 타고 바닥에 흐트러졌다.
“다음에는 머리카락이 아니라 네 머리가 될 수도 있다.”
여상환을 놓치는 순간, 목숨을 거두겠다는 엄포에 수련이 고개를 숙였다. 단발이 된 머리카락이 귀를 덮었지만, 묶었을 때보다도 춥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황제와의 거래는 받아들여졌고,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버지라는 사람의 목숨을 팔아서라도 살아야 했다.
힘이 빠지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수련이 방을 열었다.
“따라오십시오.”
방에 들어온 황제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침상에 앉아 있는 중년 여인과 어린 남자아이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듯 수련이 들어왔음에도 중년 여인의 눈은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누님!”
눈에 띄게 떨고 있는 남자아이가 수련을 보자마자 품을 파고들었다. 담담한 수련의 표정이 처음으로 바뀌었다. 좀 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수련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남자아이를 다독였다.
“현아. 괜찮아. 어머니와 나가 있어.”
“수련아. 무슨 일이 일어난 거니? 방에 들어오신 분들은…….”
“어머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시고 현이와 나가 계세요.”
“누님! 전…….”
두려운 눈으로 황제를 보던 현을 수련이 괜찮다며 거듭 다독였다.
둘을 다독이는 수련의 모습을 황제가 하나도 빠짐없이 쳐다보았다. 황제가 아는 한, 여상환의 딸은 승정궁에 유폐되어 있는 황후뿐이었다.
여인으로서 관심은 없었지만, 사내조차 두려워하는 지금의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수련의 모습은 제법 흥미로웠다. 두려워하는 둘을 진정시킨 수련이 황제에게 허락을 구하듯 조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담하게 행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황제의 눈치를 살피고 상황을 판단하였다. 그가 지금까지 보아 온 여인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내보내라.”
황제가 허락하자 수련이 최대한 조심스럽게 중년 여인과 현이를 밖으로 내보냈다. 둘을 완전히 내보낸 그녀가 침상을 덮고 있던 두꺼운 요를 거둬 냈다. 요를 거둬 내자 침상에 사람 하나가 오고 갈 크기의 문이 눈에 들어왔다.
“준비하십시오.”
수련의 말에 따라 들어온 호위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수련이 닫혀 있던 문을 열자, 검은 인영이 튕겨 나오듯 박차고 뛰어올랐다. 달려드는 호위를 맨몸으로 막아 낸 인영이 황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황제의 손이 인영의 목을 향해 움직였다.
“컥!”
원하는 사냥감을 발견한 황제의 눈에 위험한 광채가 번뜩였다. 목을 움켜쥔 황제가 인영을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목을 잡았을 때와는 달리 비명조차 나지 않았다.
“이렇게 다시 뵐 줄은 몰랐소. 대국구.”
살기 어린 시선에 도망치려던 여상환이 숨을 들이켰다.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에 여상환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