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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어찌 네가 이럴 수 있느냔 말이다! 네가 지금까지 누구 때문에 살아 있는데 이런 식으로 아비를 배신하는 것이냐!”
끌려가는 여상환이 수련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황제보다도 더한 권력으로 십여 년 동안 호연을 유린했던 여상환의 마지막은 처참했다. 여상환의 고함에도 수련의 담담한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수련의 그런 모습에 더 화가 난 그가 피를 토하듯 연신 고함을 터트렸다.
“네가 이러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여가의 성을 받은 네년이 어찌 이딴 짓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느냐!”
“죄인은 조용히 따라라.”
“황제! 내가 널 권좌에 올려 주었거늘 어찌 날 이리 대할 수 있단 말이냐! 네가 누구 덕분에 황제가 되었거늘! 감히 네가! 네가!”
여상환의 패악에 그를 붙잡고 있던 병사가 들고 있던 검집을 휘둘렀다. 짧은 비명과 함께 여상환의 이마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방에서 끌려 나가는 여상환을 보던 수련이 꿇었던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밖에서조차 여상환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수련은 외면하였다. 평생 아버지를 팔아 살아남은 딸이라는 오명을 듣겠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자식으로 부정당한 채, 감금 아닌 감금을 당했을 때부터 여상환에 대한 애정은 없었다.
황제의 군대를 피해 도망 온 여상환을 보는 순간, 수련은 이게 자신에게 온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되었어.’
당장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애초에 여가에서 무언가를 얻어 가며 살지 않았다. 몸만 건강하다면, 가족과 함께라면 수련에게 두려운 일은 없었다. 이제 그녀와 가족을 가두던 울타리는 사라졌다.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가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
“아!”
밖으로 보이는 모습에 수련의 눈이 커졌다.
분명 방 밖으로 무사히 내보냈던 현이와 중년 여인이 단단한 밧줄에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떨고 있는 그들의 목을 겨누고 있는 검을 보는 순간, 담담한 표정 안에 억지로 자신을 붙잡고 있던 수련이 무너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놀라서 달려오는 수련을 병사들이 붙잡았다. 억세게 붙잡혀 있음에도 수련의 반항은 멈추지 않았다.
“소녀와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를 넘기면 살려 주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담담했던 표정이 가족 앞에서는 부드러워지더니만, 또 가족이 위험해지자 금세 분노하여 황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숲에 갇혀 있기는 했지만, 풍부한 표정에 어울리는 진중한 말투와 주변을 휘감는 분위기가 제법 신기하게 다가오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호기심을 느꼈을 뿐, 황제에게는 그뿐이었다.
“왜 짐이 여가의 것과 약조를 해야 하는가?”
황제의 말에 온몸의 피가 싸늘해졌다. 간신히 넘었다고 생각한 고비가 알고 보니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이었다. 묶여 있는 가족을 보는 수련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워졌다.
아늑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으며 수련이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 하물며 그녀만을 믿고 기다렸던 현과 어머니만큼은 지켜야 했다.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수련이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생각하고 부정하고 또다시 고민하던 찰나 수련의 머리에 빛이 스쳤다.
“여가의 목숨을 거두셔야 한다면 소녀의 목만 거두시면 됩니다.”
수련의 말에 황제의 눈썹이 꿈틀댔다. 말 없는 물음에 수련의 눈이 어머니와 현을 향하였다. 그녀에게 전부는 가족뿐이었다. 혼자였다면 버틸 수 없었던 시간을 이겨 낸 건 둘 덕분이었다.
“여가의 핏줄인 절 낳으셨지만 어머니께서는 여상환과 혼인하지 않았으니 여가와 연을 맺으신 분이 아닙니다. 동생인 현이는 소녀와 함께 지냈을 뿐, 혈육도 아니고 여가의 성을 받지도 않았으니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누님! 무슨 말을 하시는 것입니까?”
놀란 현이 경악했지만, 수련은 그대로였다. 이제 그녀가 생각할 방법은 이게 전부였다.
“폐하이시라면 얼마든지 알아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목숨을 거둘 사람은 소녀뿐입니다.”
“역모를 진압하는 와중에 일어나는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들을 죽여도 상관없다는 황제의 대답에 수련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여가의 감옥에서 나갈 생각으로 저지른 일이었지만, 절대적인 힘에 결국 무너져 내렸다. 애초에 이곳에서 나간다는 일이, 자유를 생각한 일이 잘못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어머니와 현이만이라도 몰래 내보냈다면 이런 봉변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눈 앞에서 둘이 죽는 모습만큼은 절대 볼 수 없다.
“자비를…… 제발 소녀의 어머니와 동생에게 자비를 내려 주세요. 소녀가 모두 감당할 터이니 살려…… 살려 주세요.”
무너진 수련의 모습에 황제가 눈을 좁혔다. 황제의 눈이 수련에게서 묶여 있는 둘에게로 향하였다. 여가에서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감당한다는 수련의 말이 이상하게도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신이 죽을 테니 식구만큼은 살려 달라는 그녀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앞에 자비를 구하는 수련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눈에 남았다.
황제의 검이 수련의 목에 닿았다. 검 끝이 스친 살갗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누님!”
수련의 상처에 현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황제와 눈을 마주쳤다.
“가족의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소녀의 목숨은 폐하께서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황제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들인 수련은 두려워하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사내조차 황제의 앞에 서면 살려만 주시거든 무엇이든 하겠다며 목숨을 구걸했었다. 그 누구도 두려움에 가까이하지 못하는 그를, 수련은 여인이면서도 마주하고 있었다.
‘겨우 계집 주제에.’
모처럼의 상황이 신기하면서도 재미있었다. 여인은커녕 사내에게조차 느껴 보지 못한 호기심이 그를 미묘하게 건드렸다.
“네 목숨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고개를 끄덕이는 수련을 보던 황제의 눈에 묘한 광채가 스쳤다. 수련의 목에 닿아 있던 검을 황제가 거두었다.
“여가가 아닌 건 두고 간다.”
평소라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목을 베었을 황제가 다른 명을 내리자 병사들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미 황제는 수련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몸을 완전히 돌린 후였다.
어머니와 현의 몸에 묶였던 포박이 풀리는 모습은 본 수련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의 몸에 있던 것과 똑같은 줄이 수련의 몸을 단단히 묶었다.
“누님!”
수련의 모습에 현이 한달음에 달려왔지만, 미처 다가오지 못하고 병사에게 붙잡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와 현이 연신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우악스러운 병사들의 손에 수련은 맥없이 끌려갈 뿐이었다. 머릿속에 각인하듯 수련이 고개를 돌려 둘의 모습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품에서 검은 주머니를 꺼낸 병사가 수련의 머리에 주머니를 씌웠다. 어디로 끌려가는지, 누구와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수선스러운 소리에 귀를 기울여도 그녀가 알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감옥만 벗어날 수 있다면 잠깐이라도 행복할 것이라 믿었었다. 이제야 벗어났다고 생각한 순간, 황제라는 그림자가 그녀를 다시 붙잡았다.
‘끝났다.’
역모로 잡혀가는 것이니 그녀에게 있을 일은 하나뿐이었다.
죽고 싶지 않았지만. 더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적어도 어머니와 동생을 살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죽게 되었어도 무거운 마음을 조금은 놓을 수 있었다.
온몸을 지배하는 두려움을 외면하며 수련이 눈을 감았다.
*
빛조차 거의 들어오지 않는 옥에서 수련이 눈을 감았다.
얼마나 있었는지 누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살려 달라는 절규와 지독한 악취가 수련을 내내 괴롭혔다.
이곳이 어디냐고 묻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 고문을 당하는 사람의 숨이 멈추면 다음 차례가 그녀가 될 수도 있었다.
“후우.”
몸에 남아 있는 공포를 밀어 내듯 수련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여에 갇혀 있을 때는 집 주변을 다니거나 몸을 움직일 수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기에 이성과는 다르게 수련의 머릿속에는 불길한 생각만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어머니. 현아.”
지금까지는 가족에 의지해 살았지만, 이젠 누구도 곁에 없었다. 과한 바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럼에도 지금만큼은 가족이 보고 싶었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하루가 멀다 하고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죄인들이 밖으로 끌려 나갔지만, 정작 수련을 건드는 사람은 없었다. 겁 없이 황제에게 대들었으니 해코지를 당했어도 몇 번은 당했어야 했건만, 이상할 정도로 상황은 조용했다.
“이렇게 죽기 싫어! 싫단 말이다!”
두려움과 초조함에 지친 죄수가 날뛰기 시작한 듯, 고문 소리에 겹쳐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와 소음이 옥을 가득 채웠다. 하루에도 수십 번도 더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수련이 손으로 귀를 막았다.
‘차라리 죽여 줘.’
가족을 만나고 싶은 마음과 죽어서라도 감옥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이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한 명의 죄수로 시작된 고함이 점점 다른 죄수로 퍼져 가고, 결국 계단을 내려온 병사들이 소란을 피우는 죄수를 제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굳게 닫혀 있던 수련의 옥문이 열렸다.
오랜만의 빛에 눈을 찌푸리며 수련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중년 여인과 두 명의 궁녀들, 그리고 세 명의 내관이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수련의 얼굴을 확인한 여인이 뒤의 내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해라.”
중년 여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내관이 수련의 팔을 붙잡았다.
“무엇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온몸으로 반항했지만 내관의 힘을 수련이 당해 낼 수 없었다. 내관에게 붙잡힌 사이, 다가온 궁녀들이 수련의 입을 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약을 들이부었다.
눈앞이 아늑해지는 쓴맛에 수련이 진저리를 쳤지만, 약을 전부 부은 궁녀들이 약을 뱉지 못하도록 그녀의 입을 막았다.
“컥! 컥!”
약을 삼키자마자 목이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수련이 약을 모두 삼키자, 그제야 궁녀와 내관이 뒤로 물러났다. 온몸의 피가 제멋대로 날뛰는 것 같았다. 목을 타고 내려간 약이 온몸을 태우듯, 수련은 숨을 쉴 수 없었다.
“쿨럭.”
막힌 숨을 뚫듯 수련이 숨을 토해 내자, 굵직한 핏덩어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사지가 뒤틀리는 고통에 수련이 바닥에 쓰러졌다. 고통을 참기 위해 바닥을 손으로 긁었지만 진정되기보다는 점점 더 심해졌다.
울컥 참았던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내 생각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그것이 또 아니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아악!”
피투성이인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잠깐이라도 좋았다. 누구의 제약도 없이,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의지하는 가족과 함께 자신의 삶을 누리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이룰 수 없는 소망이었다는 것일까?
눈앞이 흐릿해지며 정신이 아늑해졌다. 잠시나마 지배했던 고통조차 막연하게 느껴질 무렵, 수련의 숨이 멈추었다.
*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가의 역모 사건이 정리된 지도 벌써 삼 개월이 지나 있었다. 호연의 대가문이자 국구였던 여상환을 중심으로 시작된 역모는 연루된 자들의 목이 도성에 일렬로 매달리면서 끝났다. 승정궁의 황후는 냉궁에 유폐된 후 일주일이 지나 사약을 받았고, 여가와 관련된 가문은 전부 멸문되거나 그 죄에 걸맞은 벌을 받았다.
“위랑.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방 밖에서 들려오는 궁녀의 목소리에 깊게 잠들어 있던 여인이 눈을 떴다. 소리 없는 숨을 길게 내쉰 여인이 눈을 비비며 피곤한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위랑이라는 여인의 기척이 들려오자 문이 열리고, 궁녀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모습을 본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내 스스로 할 수 있으니 들어오지 않으셔도 돼요.”
“위랑이 준비되는 대로 들게 하라는 폐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서둘러 준비해야 하니 앉아 계세요.”
폐하라는 단어에 위랑이라는 여인의 눈 끝이 작게 떨렸다. 그녀가 잠시 멈춘 사이, 소셋물이 들어오고 궁녀들의 손이 바빠졌다. 면경에 보이던 흐트러진 모습이 궁녀의 손놀림에 따라 단정히 변해 갔다.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 내린 궁녀가 청색의 비단 끈으로 묶었다. 머리끈과 똑같은 색의 비단옷은 고급스럽기는 했지만, 여인의 옷이라면 하나 정도는 있을 흔한 꽃자수조차 없었다.
치장을 끝낸 궁녀들이 물러나고,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인이 궁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병사 둘이 그녀 앞에 고개를 숙였다. 똑같이 병사에게 인사를 한 여인이 황제가 머무는 태화전으로 향하였다.
여인의 모습을 발견한 궁녀들이 연신 곁눈질로 그녀를 훔쳐보았다. 하지만 그녀들의 호기심 어린 눈에도 여인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마치…… 죽기 직전의 그때처럼…….
태화전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내시감을 향해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어서 드시지요.”
“어찌 네가 이럴 수 있느냔 말이다! 네가 지금까지 누구 때문에 살아 있는데 이런 식으로 아비를 배신하는 것이냐!”
끌려가는 여상환이 수련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황제보다도 더한 권력으로 십여 년 동안 호연을 유린했던 여상환의 마지막은 처참했다. 여상환의 고함에도 수련의 담담한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수련의 그런 모습에 더 화가 난 그가 피를 토하듯 연신 고함을 터트렸다.
“네가 이러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여가의 성을 받은 네년이 어찌 이딴 짓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느냐!”
“죄인은 조용히 따라라.”
“황제! 내가 널 권좌에 올려 주었거늘 어찌 날 이리 대할 수 있단 말이냐! 네가 누구 덕분에 황제가 되었거늘! 감히 네가! 네가!”
여상환의 패악에 그를 붙잡고 있던 병사가 들고 있던 검집을 휘둘렀다. 짧은 비명과 함께 여상환의 이마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방에서 끌려 나가는 여상환을 보던 수련이 꿇었던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밖에서조차 여상환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수련은 외면하였다. 평생 아버지를 팔아 살아남은 딸이라는 오명을 듣겠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자식으로 부정당한 채, 감금 아닌 감금을 당했을 때부터 여상환에 대한 애정은 없었다.
황제의 군대를 피해 도망 온 여상환을 보는 순간, 수련은 이게 자신에게 온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되었어.’
당장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애초에 여가에서 무언가를 얻어 가며 살지 않았다. 몸만 건강하다면, 가족과 함께라면 수련에게 두려운 일은 없었다. 이제 그녀와 가족을 가두던 울타리는 사라졌다.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가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
“아!”
밖으로 보이는 모습에 수련의 눈이 커졌다.
분명 방 밖으로 무사히 내보냈던 현이와 중년 여인이 단단한 밧줄에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떨고 있는 그들의 목을 겨누고 있는 검을 보는 순간, 담담한 표정 안에 억지로 자신을 붙잡고 있던 수련이 무너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놀라서 달려오는 수련을 병사들이 붙잡았다. 억세게 붙잡혀 있음에도 수련의 반항은 멈추지 않았다.
“소녀와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를 넘기면 살려 주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담담했던 표정이 가족 앞에서는 부드러워지더니만, 또 가족이 위험해지자 금세 분노하여 황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숲에 갇혀 있기는 했지만, 풍부한 표정에 어울리는 진중한 말투와 주변을 휘감는 분위기가 제법 신기하게 다가오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호기심을 느꼈을 뿐, 황제에게는 그뿐이었다.
“왜 짐이 여가의 것과 약조를 해야 하는가?”
황제의 말에 온몸의 피가 싸늘해졌다. 간신히 넘었다고 생각한 고비가 알고 보니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이었다. 묶여 있는 가족을 보는 수련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워졌다.
아늑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으며 수련이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 하물며 그녀만을 믿고 기다렸던 현과 어머니만큼은 지켜야 했다.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수련이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생각하고 부정하고 또다시 고민하던 찰나 수련의 머리에 빛이 스쳤다.
“여가의 목숨을 거두셔야 한다면 소녀의 목만 거두시면 됩니다.”
수련의 말에 황제의 눈썹이 꿈틀댔다. 말 없는 물음에 수련의 눈이 어머니와 현을 향하였다. 그녀에게 전부는 가족뿐이었다. 혼자였다면 버틸 수 없었던 시간을 이겨 낸 건 둘 덕분이었다.
“여가의 핏줄인 절 낳으셨지만 어머니께서는 여상환과 혼인하지 않았으니 여가와 연을 맺으신 분이 아닙니다. 동생인 현이는 소녀와 함께 지냈을 뿐, 혈육도 아니고 여가의 성을 받지도 않았으니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누님! 무슨 말을 하시는 것입니까?”
놀란 현이 경악했지만, 수련은 그대로였다. 이제 그녀가 생각할 방법은 이게 전부였다.
“폐하이시라면 얼마든지 알아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목숨을 거둘 사람은 소녀뿐입니다.”
“역모를 진압하는 와중에 일어나는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들을 죽여도 상관없다는 황제의 대답에 수련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여가의 감옥에서 나갈 생각으로 저지른 일이었지만, 절대적인 힘에 결국 무너져 내렸다. 애초에 이곳에서 나간다는 일이, 자유를 생각한 일이 잘못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어머니와 현이만이라도 몰래 내보냈다면 이런 봉변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눈 앞에서 둘이 죽는 모습만큼은 절대 볼 수 없다.
“자비를…… 제발 소녀의 어머니와 동생에게 자비를 내려 주세요. 소녀가 모두 감당할 터이니 살려…… 살려 주세요.”
무너진 수련의 모습에 황제가 눈을 좁혔다. 황제의 눈이 수련에게서 묶여 있는 둘에게로 향하였다. 여가에서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감당한다는 수련의 말이 이상하게도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신이 죽을 테니 식구만큼은 살려 달라는 그녀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앞에 자비를 구하는 수련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눈에 남았다.
황제의 검이 수련의 목에 닿았다. 검 끝이 스친 살갗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누님!”
수련의 상처에 현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황제와 눈을 마주쳤다.
“가족의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소녀의 목숨은 폐하께서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황제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들인 수련은 두려워하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사내조차 황제의 앞에 서면 살려만 주시거든 무엇이든 하겠다며 목숨을 구걸했었다. 그 누구도 두려움에 가까이하지 못하는 그를, 수련은 여인이면서도 마주하고 있었다.
‘겨우 계집 주제에.’
모처럼의 상황이 신기하면서도 재미있었다. 여인은커녕 사내에게조차 느껴 보지 못한 호기심이 그를 미묘하게 건드렸다.
“네 목숨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고개를 끄덕이는 수련을 보던 황제의 눈에 묘한 광채가 스쳤다. 수련의 목에 닿아 있던 검을 황제가 거두었다.
“여가가 아닌 건 두고 간다.”
평소라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목을 베었을 황제가 다른 명을 내리자 병사들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미 황제는 수련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몸을 완전히 돌린 후였다.
어머니와 현의 몸에 묶였던 포박이 풀리는 모습은 본 수련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의 몸에 있던 것과 똑같은 줄이 수련의 몸을 단단히 묶었다.
“누님!”
수련의 모습에 현이 한달음에 달려왔지만, 미처 다가오지 못하고 병사에게 붙잡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와 현이 연신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우악스러운 병사들의 손에 수련은 맥없이 끌려갈 뿐이었다. 머릿속에 각인하듯 수련이 고개를 돌려 둘의 모습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품에서 검은 주머니를 꺼낸 병사가 수련의 머리에 주머니를 씌웠다. 어디로 끌려가는지, 누구와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수선스러운 소리에 귀를 기울여도 그녀가 알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감옥만 벗어날 수 있다면 잠깐이라도 행복할 것이라 믿었었다. 이제야 벗어났다고 생각한 순간, 황제라는 그림자가 그녀를 다시 붙잡았다.
‘끝났다.’
역모로 잡혀가는 것이니 그녀에게 있을 일은 하나뿐이었다.
죽고 싶지 않았지만. 더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적어도 어머니와 동생을 살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죽게 되었어도 무거운 마음을 조금은 놓을 수 있었다.
온몸을 지배하는 두려움을 외면하며 수련이 눈을 감았다.
빛조차 거의 들어오지 않는 옥에서 수련이 눈을 감았다.
얼마나 있었는지 누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살려 달라는 절규와 지독한 악취가 수련을 내내 괴롭혔다.
이곳이 어디냐고 묻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 고문을 당하는 사람의 숨이 멈추면 다음 차례가 그녀가 될 수도 있었다.
“후우.”
몸에 남아 있는 공포를 밀어 내듯 수련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여에 갇혀 있을 때는 집 주변을 다니거나 몸을 움직일 수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기에 이성과는 다르게 수련의 머릿속에는 불길한 생각만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어머니. 현아.”
지금까지는 가족에 의지해 살았지만, 이젠 누구도 곁에 없었다. 과한 바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럼에도 지금만큼은 가족이 보고 싶었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하루가 멀다 하고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죄인들이 밖으로 끌려 나갔지만, 정작 수련을 건드는 사람은 없었다. 겁 없이 황제에게 대들었으니 해코지를 당했어도 몇 번은 당했어야 했건만, 이상할 정도로 상황은 조용했다.
“이렇게 죽기 싫어! 싫단 말이다!”
두려움과 초조함에 지친 죄수가 날뛰기 시작한 듯, 고문 소리에 겹쳐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와 소음이 옥을 가득 채웠다. 하루에도 수십 번도 더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수련이 손으로 귀를 막았다.
‘차라리 죽여 줘.’
가족을 만나고 싶은 마음과 죽어서라도 감옥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이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한 명의 죄수로 시작된 고함이 점점 다른 죄수로 퍼져 가고, 결국 계단을 내려온 병사들이 소란을 피우는 죄수를 제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굳게 닫혀 있던 수련의 옥문이 열렸다.
오랜만의 빛에 눈을 찌푸리며 수련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중년 여인과 두 명의 궁녀들, 그리고 세 명의 내관이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수련의 얼굴을 확인한 여인이 뒤의 내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해라.”
중년 여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내관이 수련의 팔을 붙잡았다.
“무엇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온몸으로 반항했지만 내관의 힘을 수련이 당해 낼 수 없었다. 내관에게 붙잡힌 사이, 다가온 궁녀들이 수련의 입을 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약을 들이부었다.
눈앞이 아늑해지는 쓴맛에 수련이 진저리를 쳤지만, 약을 전부 부은 궁녀들이 약을 뱉지 못하도록 그녀의 입을 막았다.
“컥! 컥!”
약을 삼키자마자 목이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수련이 약을 모두 삼키자, 그제야 궁녀와 내관이 뒤로 물러났다. 온몸의 피가 제멋대로 날뛰는 것 같았다. 목을 타고 내려간 약이 온몸을 태우듯, 수련은 숨을 쉴 수 없었다.
“쿨럭.”
막힌 숨을 뚫듯 수련이 숨을 토해 내자, 굵직한 핏덩어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사지가 뒤틀리는 고통에 수련이 바닥에 쓰러졌다. 고통을 참기 위해 바닥을 손으로 긁었지만 진정되기보다는 점점 더 심해졌다.
울컥 참았던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내 생각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그것이 또 아니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아악!”
피투성이인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잠깐이라도 좋았다. 누구의 제약도 없이,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의지하는 가족과 함께 자신의 삶을 누리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이룰 수 없는 소망이었다는 것일까?
눈앞이 흐릿해지며 정신이 아늑해졌다. 잠시나마 지배했던 고통조차 막연하게 느껴질 무렵, 수련의 숨이 멈추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가의 역모 사건이 정리된 지도 벌써 삼 개월이 지나 있었다. 호연의 대가문이자 국구였던 여상환을 중심으로 시작된 역모는 연루된 자들의 목이 도성에 일렬로 매달리면서 끝났다. 승정궁의 황후는 냉궁에 유폐된 후 일주일이 지나 사약을 받았고, 여가와 관련된 가문은 전부 멸문되거나 그 죄에 걸맞은 벌을 받았다.
“위랑.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방 밖에서 들려오는 궁녀의 목소리에 깊게 잠들어 있던 여인이 눈을 떴다. 소리 없는 숨을 길게 내쉰 여인이 눈을 비비며 피곤한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위랑이라는 여인의 기척이 들려오자 문이 열리고, 궁녀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모습을 본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내 스스로 할 수 있으니 들어오지 않으셔도 돼요.”
“위랑이 준비되는 대로 들게 하라는 폐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서둘러 준비해야 하니 앉아 계세요.”
폐하라는 단어에 위랑이라는 여인의 눈 끝이 작게 떨렸다. 그녀가 잠시 멈춘 사이, 소셋물이 들어오고 궁녀들의 손이 바빠졌다. 면경에 보이던 흐트러진 모습이 궁녀의 손놀림에 따라 단정히 변해 갔다.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 내린 궁녀가 청색의 비단 끈으로 묶었다. 머리끈과 똑같은 색의 비단옷은 고급스럽기는 했지만, 여인의 옷이라면 하나 정도는 있을 흔한 꽃자수조차 없었다.
치장을 끝낸 궁녀들이 물러나고,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인이 궁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병사 둘이 그녀 앞에 고개를 숙였다. 똑같이 병사에게 인사를 한 여인이 황제가 머무는 태화전으로 향하였다.
여인의 모습을 발견한 궁녀들이 연신 곁눈질로 그녀를 훔쳐보았다. 하지만 그녀들의 호기심 어린 눈에도 여인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마치…… 죽기 직전의 그때처럼…….
태화전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내시감을 향해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어서 드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