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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내시감의 말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닫혀 있는 문 앞에 선 여인이 무릎을 꿇자 내시감이 낮게 고하였다.
“폐하. 민 궁인이 들었습니다.”
내시감이 고하는 소리를 들으며 여인이 눈을 감았다.
살고 싶었다.
살 수만 있다면 어떠한 일을 당하더라도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수련으로 죽었고, 민수련으로 살아남았다.
아버지의 성으로 죽자마자 어머니의 성으로 살게 된 수련이 머물게 된 곳은 황궁, 그것도 그녀를 죽였던 황제의 옆이었다.
문이 열리자 보이는 참상에 수련이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상석에 누워 있는 황제를 향해 수련이 몸을 숙였다.
피에 묻은 검을 잡은 채 황제는 누워 있었다. 그 아래 황제의 검으로 죽은 내관과 궁녀의 시신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숙였던 몸을 틀자 죽은 내관과 눈이 마주친 수련이 몸을 떨었다.
“안 들어올 건가?”
수련이 주저하자 눈을 감은 황제에게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발을 디딜 곳도 없이 흥건한 바닥을 보던 수련이 그 상태로 걸음을 옮겼다.
피바닥에 앉지 못하고 망설이는 수련을 보며 황제가 피식 실소를 흘렸다.
“피바닥에는 앉고 싶지 않다는 것인가?”
석 달이 지났지만, 황제의 독살스러운 말투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물음이 사실이었기에 수련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말 없는 대답에 황제의 눈이 작아졌다.
“치워라.”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내관들이 들어와 시신을 치우고 방 안에 묻어 있는 피를 닦아 냈다. 노련한 이들답게 시신과 피가 가득했던 방은 어느새 깔끔히 치워져 있었다.
피가 묻은 수련의 버선까지도 바꾼 내관들이 황제에게 고개를 숙인 후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자리에 앉으려는 수련을 향해 황제가 쥐고 있던 검을 내밀었다. 피에 흥건히 젖어 있는 검을 잠시 주저하듯 보던 수련이 조심스러운 손으로 받아 들었다. 진득한 피의 감촉에 미간이 좁아진 수련은 준비되어 있는 천으로 묻은 피를 닦아 냈다.
처음 황궁에 들어오고, 하루가 멀다 하고 황제가 만들어 내는 참상에 토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었다. 살아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평생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시신과 피를 거의 매일 보게 되니 온전했던 정신조차 피폐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수련은 힘들다며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궁녀들이 널 위랑이라 부른다지?”
피가 묻은 검을 닦던 수련이 고개를 돌렸다.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태화전에서 나오는 일이 없는 황제임에도 그는 황궁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세세한 것까지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아는 그에게 거짓말은 무의미하였다.
“소녀가 말이 없어 그리 불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용한 여인이라…… 제법 그럴싸한 별칭이 아닌가?”
피를 전부 닦아 낸 검을 검집에 조심스럽게 꽂아 놓았다. 몸을 돌리는 순간, 수련이 소리 없이 숨을 삼켰다. 약간의 기척도 느끼지 못했었던 황제가 어느새인가 그녀의 뒤에 와 있었다.
황제의 손이 수련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폐하.”
그녀를 황제는 여인으로 보지 않는다.
여인을 보는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고, 여인을 만지듯 다가오지도 않았다. 세상과 격리되어 많은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앞의 사내는 수련이 보아 왔던 사람들 중 누구보다도 잔인하고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머리카락을 잡았던 손이 맑은 눈을 지나 뺨을 어루만졌다. 조용히 얼굴을 애무하던 손길이 점점 아래로 내려와 목을 움켜잡았다.
다만 생각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황제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내가 왜 저들을 죽였는가? 말해 보아라.”
“폐하.”
목에서 느껴지는 힘에 수련이 숨을 삼켰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물음, 석 달을 머무는 내내 황제와 그녀 사이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이루어지는 장난이었다. 수련에게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황제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그저 유희에 불과했다.
황제와의 목숨 건 놀이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살기 위한 발악뿐이었다.
“그들은 폐하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짐의 사람이 아니다? 짐의 내관이었고, 궁녀였다. 목을 내놓을 수 있느냐는 물음에 죽음으로 진실을 밝히겠다며 죽으려 하였고, 짐의 명령대로 움직이느라 밤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짐의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직접 죽인 사람들임에도 황제는 수련의 앞에서 그들의 편을 들었다. 또렷한 외모에 짓는 여유롭고 부드러운 미소는 가까이 모시는 사람들조차 자신도 모르게 방심하고 입을 놀리게 하였다.
채찍과 당근을 교묘히 활용해 사람을 휘두르는 황제가 수련은 무서웠다.
“그들은 폐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뜻을 따르려했지만 소녀가 본 그들은 폐하께서 허락하신 것보다도 많은 것을 들으려 하였고, 폐하께서 허락하신 것보다도 많은 이들을 만나려 하였습니다.”
“그들이 간자였다고 말하는 것인가?”
“소녀. 그저 무지한 계집일 뿐입니다. 그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황제를 두려워하면서도 피하기보다는 부딪쳤다. 그가 목숨을 거두려 하면 진짜 거둘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눈앞의 작은 여인은 순간의 거짓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보다는 진실을 말하여 황제에게서 빠져나오려 하였다.
“짐의 위랑은 제법 눈썰미가 날카롭군.”
움켜쥐고 있던 손이 빠져나가자, 수련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두려움에 가득 차 있던 숨이 입 밖에서 온전히 사라지기 직전, 황제의 손이 단단하게 여미고 있던 수련의 옷고름을 뜯었다.
“앗!”
단단히 묶였던 고름이 끊어지며 수련의 어깨가 완전히 드러났다. 놀란 수련이 드러난 어깨를 손으로 가리려는 순간, 황제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약간의 티끌도 없는 새하얀 어깨. 하지만 유려한 곡선의 어깨를 지난 수련의 등에는 휼이라는 한자가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이 낙인이 지워지면…… 다시 찍고, 또 찍을 것이다.”
여수련으로 죽고, 민수련으로 정신을 차린 순간, 그녀의 등에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수련의 시중을 드는 궁녀와 내시감, 그리고 황제만이 알고 있는 낙인.
가족을 살려 주는 대신 모든 것을 감내하겠다고 말한 대가라는 듯이 황제는 노예처럼 수련의 등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궁인이든 위랑이든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럴싸한 것은 이름뿐, 실제로 그녀는 황제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짐의 이름이 무엇이냐?”
부드러웠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듯 수련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태휼. 서문태휼입니다.”
“왜 짐의 성이 서문인지 아느냐?”
“호연에서 단 한 분, 폐하만이 두 개의 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을 떨면서도 수련은 황제, 태휼의 말에 곧잘 답하였다. 그를 무서워하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둔 것일지도 모른다.
말수가 없지만, 자신의 감정을 가리지 않았다. 수련의 저런 성격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물음에 곧잘 답하는 것을 보니 배우기는 제대로 배우고 있군.”
“송구하옵니다. 폐하.”
누구보다도 극진히 몸을 숙였지만 저 모습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황제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그녀에게는 선택할 힘도, 권리도 없었다.
“폐하. 문무대신이 모두 모였다고 하옵니다. 경안궁으로 드시옵소서.”
내시감의 말에 그제야 태휼이 수련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도 없으면서도 태휼에게 빠져나온 수련이 연신 벽에 몸을 붙였다.
도망칠 곳도 없으면서도 빠져나가려는 수련의 모습에 태휼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내관이 장계를 가져올 것이다. 평소처럼 해 놓거라.”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부드러운 눈매로 돌아온 태휼이 몸을 돌렸다.
태휼이 빠져나간 방에서 수련이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막으려는 듯 있는 힘껏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장계를 보며 수련이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에게 올라온 장계를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로 수련은 하루를 시작했다. 내시감의 말로는 수련의 전에는 어린 내관이나 지방 귀족의 자제가 했던 일이라 하였다. 그때부터 했던 이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묻지 않아도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후우.”
장계를 가져간 내관이 사라진 후에야 굳어 있던 수련의 얼굴이 풀어졌다. 한 걸음 내딛기조차도 어렵고 조심스러운 곳이었다.
“잘 지내겠지?”
독을 먹고 정신을 잃었던 수련이 정신이 차린 것은 사흘 후, 황궁에서였다. 아버지의 성인 여를 버리고 민으로 살라는 말에 수련이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은 가족들의 모습이었다.
목이 베일망정 식구들을 보기 전까지 말을 듣지 않겠다는 수련의 고집에 내관이 데리고 간 곳은 도성에서 한 시진 정도 떨어진 마을이었다.
수련이 끌려갔다는 것 때문인지 어머니과 현이의 안색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나은 환경이었다.
먼 곳에서 반 시진을 본 게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래도 예전 집보다는 나으니까.”
수련에게 둘의 모습을 보여 준 이유는 그녀를 불쌍히 여겨서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가족이 인질로 있다는 것을 알려 준 것뿐이었다.
허튼 수작으로 황제를 기만하는 순간, 그녀와 둘의 목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아버지만 사라지면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여상환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니 이제는 더 크고 강한 황제라는 울타리가 생겨났다.
장계를 앞에 둔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수련이 낙인이 찍혀 있는 등을 손으로 감쌌다.
“살아 있으니까 괜찮아.”
노예처럼 낙인이 찍혀 있어도 상관없다. 여수련이 민수련으로 바뀌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상환이었던 것이 황제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그 기회를 수련은 놓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다잡은 수련이 산처럼 쌓여 있는 장계를 향해 손을 뻗쳤다. 황제가 오기 전까지 하나의 실수도 없이 장계를 정리해야 했다.
“위랑.”
문이 열리며 들어온 내관의 모습에 수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곧 위랑이라는 단어에 수련의 눈이 좁아졌다. 위랑이라 불리고 있어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그녀를 수발하는 궁녀들뿐이었다.
“앞으로 민 궁인을 위랑으로 부르라는 폐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아…….”
무슨 수작을 벌이는 것일까? 머리를 굴리던 수련이 고개를 저었다.
민 궁인이면 어떻고, 위랑이면 또 어떻단 말인가. 약간의 실수도 목숨으로 거두는 황제에게서 기회를 찾으려면 어쨌든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장계를 정리하는 일이 끝나면 경안궁 앞으로 오시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머물다 목이 베였던 이들과 자신은 다르다.
무슨 수를 쓰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황궁을 나갈 것이다.
*
“폐하. 어찌 출신 성분도 알 수 없는 여인을 황궁, 그것도 폐하께서 머무시는 태화전에 머물게 한단 말입니까?”
정위의 말을 시작으로 대신들이 들고 일어섰다.
“폐하께서 그 여인을 데려온 곳이 역모로 멸문된 여가라 들었사옵니다. 어찌 역모와 연루되어 있는 가문의 여인을 데려오셨단 말입니까!”
“여가의 여인이라면 그 죄를 물어 목숨을 거두심이 맞사옵니다. 황은은 입지 않은 여인이니 지금이라도 용단을 내려 주시옵소서.”
수련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대신들의 아우성에 태휼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외척으로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던 여가가 사라졌으니 하나둘씩 다른 생각을 품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경쟁하듯 시작된 아우성은 대전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격하게 변하였다.
목소리를 높이듯 앞으로 나서는 대신의 얼굴을 하나씩 머릿속에 각인한 황제가 권좌에 몸을 기대었다.
“그대들이 짐에게 용단을 내려 달라 목소리를 높일 자격이 있는가?”
태휼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시끄러웠던 대전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권좌에 앉아 있던 태휼이 손으로 턱을 괴었다. 느긋한 시선이었지만, 마주 보기에는 힘든 위압감에 대신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시감의 말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닫혀 있는 문 앞에 선 여인이 무릎을 꿇자 내시감이 낮게 고하였다.
“폐하. 민 궁인이 들었습니다.”
내시감이 고하는 소리를 들으며 여인이 눈을 감았다.
살고 싶었다.
살 수만 있다면 어떠한 일을 당하더라도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수련으로 죽었고, 민수련으로 살아남았다.
아버지의 성으로 죽자마자 어머니의 성으로 살게 된 수련이 머물게 된 곳은 황궁, 그것도 그녀를 죽였던 황제의 옆이었다.
문이 열리자 보이는 참상에 수련이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상석에 누워 있는 황제를 향해 수련이 몸을 숙였다.
피에 묻은 검을 잡은 채 황제는 누워 있었다. 그 아래 황제의 검으로 죽은 내관과 궁녀의 시신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숙였던 몸을 틀자 죽은 내관과 눈이 마주친 수련이 몸을 떨었다.
“안 들어올 건가?”
수련이 주저하자 눈을 감은 황제에게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발을 디딜 곳도 없이 흥건한 바닥을 보던 수련이 그 상태로 걸음을 옮겼다.
피바닥에 앉지 못하고 망설이는 수련을 보며 황제가 피식 실소를 흘렸다.
“피바닥에는 앉고 싶지 않다는 것인가?”
석 달이 지났지만, 황제의 독살스러운 말투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물음이 사실이었기에 수련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말 없는 대답에 황제의 눈이 작아졌다.
“치워라.”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내관들이 들어와 시신을 치우고 방 안에 묻어 있는 피를 닦아 냈다. 노련한 이들답게 시신과 피가 가득했던 방은 어느새 깔끔히 치워져 있었다.
피가 묻은 수련의 버선까지도 바꾼 내관들이 황제에게 고개를 숙인 후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자리에 앉으려는 수련을 향해 황제가 쥐고 있던 검을 내밀었다. 피에 흥건히 젖어 있는 검을 잠시 주저하듯 보던 수련이 조심스러운 손으로 받아 들었다. 진득한 피의 감촉에 미간이 좁아진 수련은 준비되어 있는 천으로 묻은 피를 닦아 냈다.
처음 황궁에 들어오고, 하루가 멀다 하고 황제가 만들어 내는 참상에 토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었다. 살아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평생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시신과 피를 거의 매일 보게 되니 온전했던 정신조차 피폐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수련은 힘들다며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궁녀들이 널 위랑이라 부른다지?”
피가 묻은 검을 닦던 수련이 고개를 돌렸다.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태화전에서 나오는 일이 없는 황제임에도 그는 황궁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세세한 것까지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아는 그에게 거짓말은 무의미하였다.
“소녀가 말이 없어 그리 불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용한 여인이라…… 제법 그럴싸한 별칭이 아닌가?”
피를 전부 닦아 낸 검을 검집에 조심스럽게 꽂아 놓았다. 몸을 돌리는 순간, 수련이 소리 없이 숨을 삼켰다. 약간의 기척도 느끼지 못했었던 황제가 어느새인가 그녀의 뒤에 와 있었다.
황제의 손이 수련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폐하.”
그녀를 황제는 여인으로 보지 않는다.
여인을 보는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고, 여인을 만지듯 다가오지도 않았다. 세상과 격리되어 많은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앞의 사내는 수련이 보아 왔던 사람들 중 누구보다도 잔인하고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머리카락을 잡았던 손이 맑은 눈을 지나 뺨을 어루만졌다. 조용히 얼굴을 애무하던 손길이 점점 아래로 내려와 목을 움켜잡았다.
다만 생각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황제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내가 왜 저들을 죽였는가? 말해 보아라.”
“폐하.”
목에서 느껴지는 힘에 수련이 숨을 삼켰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물음, 석 달을 머무는 내내 황제와 그녀 사이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이루어지는 장난이었다. 수련에게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황제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그저 유희에 불과했다.
황제와의 목숨 건 놀이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살기 위한 발악뿐이었다.
“그들은 폐하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짐의 사람이 아니다? 짐의 내관이었고, 궁녀였다. 목을 내놓을 수 있느냐는 물음에 죽음으로 진실을 밝히겠다며 죽으려 하였고, 짐의 명령대로 움직이느라 밤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짐의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직접 죽인 사람들임에도 황제는 수련의 앞에서 그들의 편을 들었다. 또렷한 외모에 짓는 여유롭고 부드러운 미소는 가까이 모시는 사람들조차 자신도 모르게 방심하고 입을 놀리게 하였다.
채찍과 당근을 교묘히 활용해 사람을 휘두르는 황제가 수련은 무서웠다.
“그들은 폐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뜻을 따르려했지만 소녀가 본 그들은 폐하께서 허락하신 것보다도 많은 것을 들으려 하였고, 폐하께서 허락하신 것보다도 많은 이들을 만나려 하였습니다.”
“그들이 간자였다고 말하는 것인가?”
“소녀. 그저 무지한 계집일 뿐입니다. 그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황제를 두려워하면서도 피하기보다는 부딪쳤다. 그가 목숨을 거두려 하면 진짜 거둘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눈앞의 작은 여인은 순간의 거짓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보다는 진실을 말하여 황제에게서 빠져나오려 하였다.
“짐의 위랑은 제법 눈썰미가 날카롭군.”
움켜쥐고 있던 손이 빠져나가자, 수련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두려움에 가득 차 있던 숨이 입 밖에서 온전히 사라지기 직전, 황제의 손이 단단하게 여미고 있던 수련의 옷고름을 뜯었다.
“앗!”
단단히 묶였던 고름이 끊어지며 수련의 어깨가 완전히 드러났다. 놀란 수련이 드러난 어깨를 손으로 가리려는 순간, 황제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약간의 티끌도 없는 새하얀 어깨. 하지만 유려한 곡선의 어깨를 지난 수련의 등에는 휼이라는 한자가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이 낙인이 지워지면…… 다시 찍고, 또 찍을 것이다.”
여수련으로 죽고, 민수련으로 정신을 차린 순간, 그녀의 등에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수련의 시중을 드는 궁녀와 내시감, 그리고 황제만이 알고 있는 낙인.
가족을 살려 주는 대신 모든 것을 감내하겠다고 말한 대가라는 듯이 황제는 노예처럼 수련의 등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궁인이든 위랑이든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럴싸한 것은 이름뿐, 실제로 그녀는 황제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짐의 이름이 무엇이냐?”
부드러웠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듯 수련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태휼. 서문태휼입니다.”
“왜 짐의 성이 서문인지 아느냐?”
“호연에서 단 한 분, 폐하만이 두 개의 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을 떨면서도 수련은 황제, 태휼의 말에 곧잘 답하였다. 그를 무서워하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둔 것일지도 모른다.
말수가 없지만, 자신의 감정을 가리지 않았다. 수련의 저런 성격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물음에 곧잘 답하는 것을 보니 배우기는 제대로 배우고 있군.”
“송구하옵니다. 폐하.”
누구보다도 극진히 몸을 숙였지만 저 모습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황제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그녀에게는 선택할 힘도, 권리도 없었다.
“폐하. 문무대신이 모두 모였다고 하옵니다. 경안궁으로 드시옵소서.”
내시감의 말에 그제야 태휼이 수련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도 없으면서도 태휼에게 빠져나온 수련이 연신 벽에 몸을 붙였다.
도망칠 곳도 없으면서도 빠져나가려는 수련의 모습에 태휼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내관이 장계를 가져올 것이다. 평소처럼 해 놓거라.”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부드러운 눈매로 돌아온 태휼이 몸을 돌렸다.
태휼이 빠져나간 방에서 수련이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막으려는 듯 있는 힘껏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장계를 보며 수련이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에게 올라온 장계를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로 수련은 하루를 시작했다. 내시감의 말로는 수련의 전에는 어린 내관이나 지방 귀족의 자제가 했던 일이라 하였다. 그때부터 했던 이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묻지 않아도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후우.”
장계를 가져간 내관이 사라진 후에야 굳어 있던 수련의 얼굴이 풀어졌다. 한 걸음 내딛기조차도 어렵고 조심스러운 곳이었다.
“잘 지내겠지?”
독을 먹고 정신을 잃었던 수련이 정신이 차린 것은 사흘 후, 황궁에서였다. 아버지의 성인 여를 버리고 민으로 살라는 말에 수련이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은 가족들의 모습이었다.
목이 베일망정 식구들을 보기 전까지 말을 듣지 않겠다는 수련의 고집에 내관이 데리고 간 곳은 도성에서 한 시진 정도 떨어진 마을이었다.
수련이 끌려갔다는 것 때문인지 어머니과 현이의 안색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나은 환경이었다.
먼 곳에서 반 시진을 본 게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래도 예전 집보다는 나으니까.”
수련에게 둘의 모습을 보여 준 이유는 그녀를 불쌍히 여겨서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가족이 인질로 있다는 것을 알려 준 것뿐이었다.
허튼 수작으로 황제를 기만하는 순간, 그녀와 둘의 목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아버지만 사라지면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여상환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니 이제는 더 크고 강한 황제라는 울타리가 생겨났다.
장계를 앞에 둔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수련이 낙인이 찍혀 있는 등을 손으로 감쌌다.
“살아 있으니까 괜찮아.”
노예처럼 낙인이 찍혀 있어도 상관없다. 여수련이 민수련으로 바뀌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상환이었던 것이 황제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그 기회를 수련은 놓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다잡은 수련이 산처럼 쌓여 있는 장계를 향해 손을 뻗쳤다. 황제가 오기 전까지 하나의 실수도 없이 장계를 정리해야 했다.
“위랑.”
문이 열리며 들어온 내관의 모습에 수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곧 위랑이라는 단어에 수련의 눈이 좁아졌다. 위랑이라 불리고 있어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그녀를 수발하는 궁녀들뿐이었다.
“앞으로 민 궁인을 위랑으로 부르라는 폐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아…….”
무슨 수작을 벌이는 것일까? 머리를 굴리던 수련이 고개를 저었다.
민 궁인이면 어떻고, 위랑이면 또 어떻단 말인가. 약간의 실수도 목숨으로 거두는 황제에게서 기회를 찾으려면 어쨌든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장계를 정리하는 일이 끝나면 경안궁 앞으로 오시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머물다 목이 베였던 이들과 자신은 다르다.
무슨 수를 쓰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황궁을 나갈 것이다.
“폐하. 어찌 출신 성분도 알 수 없는 여인을 황궁, 그것도 폐하께서 머무시는 태화전에 머물게 한단 말입니까?”
정위의 말을 시작으로 대신들이 들고 일어섰다.
“폐하께서 그 여인을 데려온 곳이 역모로 멸문된 여가라 들었사옵니다. 어찌 역모와 연루되어 있는 가문의 여인을 데려오셨단 말입니까!”
“여가의 여인이라면 그 죄를 물어 목숨을 거두심이 맞사옵니다. 황은은 입지 않은 여인이니 지금이라도 용단을 내려 주시옵소서.”
수련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대신들의 아우성에 태휼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외척으로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던 여가가 사라졌으니 하나둘씩 다른 생각을 품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경쟁하듯 시작된 아우성은 대전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격하게 변하였다.
목소리를 높이듯 앞으로 나서는 대신의 얼굴을 하나씩 머릿속에 각인한 황제가 권좌에 몸을 기대었다.
“그대들이 짐에게 용단을 내려 달라 목소리를 높일 자격이 있는가?”
태휼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시끄러웠던 대전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권좌에 앉아 있던 태휼이 손으로 턱을 괴었다. 느긋한 시선이었지만, 마주 보기에는 힘든 위압감에 대신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