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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폐황후를 권한 이들은 다름이 아니라 그대들이었다. 황태자비의 자질로 조금의 흠도 없으니 서둘러 맞이하라고 해 놓고는 이제 와 짐이 데려온 여인도 여가의 사람이니 목을 거두어라? 참으로 그때그때 말이 다르지 아니한가?”
“폐하! 소인들은…….”
“짐의 모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가의 여인을 선제의 후궁으로 들이라 청했던 것도 그대들이고, 짐이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자 비의 자리에 여가의 여인을 정한 것도 그대들이었다. 하물며 권좌에 오른 후 그대들의 여식을 후궁에 올린 것 또한 짐이 허락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만족하기는커녕 더 내놓으라는 것인가?”
숨 막히는 공기가 대전을 가득 채웠다. 검을 휘두르지 않았을 뿐, 태휼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대신들의 목을 천천히 옭아매기 시작하였다.
“폐하. 소인들은 호연의 미래와 안정을 위해서 그리한 것입니다. 어찌 소인들의 충심을 의심하시는 것이옵니까?”
“황후와 일곱 후궁 중 역모로 멸문된 가문이 여가를 포함하여 여섯. 이제 짐에게 남은 후궁도 둘이군. 비어 버린 자리가 탐이 나는 것인가? 아니면 행여나 출신 성분 모르는 계집에게 덜컥 황후의 자리를 줄까 두려운 것인가?”
“폐하!”
“쓸데없는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그대들의 일에 좀 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어떠한가? 쓸모없는 장계만 산더미같이 올려 짐의 시간을 쓸데없이 버리게 만들지 말고 말이지.”
태휼의 서슬 퍼런 말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지금은 역정을 낼 뿐이었지만, 이 이상 그의 말에 잘못 말을 꺼냈다가는 목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리만 지키던 황태자가 힘을 가진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건 앞을 가로막는 이들의 목을 베며 그들의 힘을 빼앗는 것으로 힘을 키웠기 때문이었다.
이만 나가 보라는 손짓에 도망치듯 대신들이 대전 밖으로 나갔다. 대신들이 빠져나간 대전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재상을 태휼이 차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짐에게 달리 고해야 할 말이 있는가?”
“소인. 폐하께 후궁으로 바칠 여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문을 걱정해야 할 아들도 없으니 감히 묻고자 하옵니다. 여상환과 막역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어떻게 가문을 이끌어 왔는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사옵니다.”
“…….”
“여상환이 그토록 숨기려 한 그 아이를 어찌하여 거두신 것입니까?”
“거두면 안 되는 것이었나?”
“거둘 이유도 없지 않았습니까? 무엇보다도 노예처럼 각인까지 찍으실 필요는 없었사옵니다.”
재상의 물음에 태휼의 눈이 날카롭게 변하였다. 하지만 다른 대신들과는 다르게 재상은 태휼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동요하지 않았다.
“단순한 화풀이라 생각하라.”
재상이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지만, 태휼은 못 본 척 넘어갔다.
힘을 추구하는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재상은 그의 정치적 스승이자 신뢰하는 이였다. 태휼의 앞에서 한숨을 내쉬는 기함할 일을 저질러도 그만큼은 너그러이 넘어가 줄 수 있었다.
“폐하께서 종종 장계 수발을 들거나 곁을 지키는 이를 뽑으시는 것은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여인을 거두신 것은 처음 있는 일이옵니다. 저들이 동요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어찌하여…….”
“내리 멸문당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 새로운 것도 보여 줘야 하지 않은가?”
“네?”
재상의 되물음에 태휼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를 거둔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그저 제 손에 쥐고 있는 힘만 믿고 안하무인으로 날뛰는 귀족들에게 경고의 의미로 보여 주기에 수련이 적당했을 뿐이었다.
“저들은 위랑이라는 여인을 보면서 자신이나 자식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역모로 목을 베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일 생각이다. 황궁에서 죄인으로 살아남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계기가 되겠지. 그리고…….”
여상환 및 귀족들에게 당하고 빼앗기면서 힘없던 태휼은 점점 잔인하고 영악하게 바뀌어 갔다. 처음 만났을 때의 어수룩한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있는 태휼을 재상이 조용히 바라보았다.
“구심점이자 그들을 힘으로 제압하던 여상환이 사라졌으니 지금쯤 어찌 움직여야 할지 한창 생각하느라 바쁘겠지. 그런 시기에 짐이 여인을 데려왔다면, 그리고 그 여인을 곁에 두고 있다면…… 제법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재상을 보는 태휼의 눈에는 위험한 빛이 감돌았다.
귀족들을 제압할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태휼은 더 많은 힘을 원하였다. 휘둘릴 여지 따위 조금도 주지 않겠다는 것일까? 한번 불기 시작한 피바람은 좀처럼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재상이 나가고, 홀로 남은 대전에서 황제가 눈을 감았다.
“제법 눈치가 있으니 한동안은 버텨 내겠지.”
겁에 질린 눈으로 피하지 않는 수련의 모습이 떠오르자 태휼이 피식 실소를 지었다.
황제의 앞에서는 공포에 질려 몸을 숙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문이나 사주를 받은 귀족을 위해 움직였던 이들과는 달랐다.
고립된 채로 끌고 온 여인이라 그런지 지금만큼은 그가 움직이는 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다른 수를 쓰려 한다면 추가로 손을 써야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녀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절대자에게 쓸데없는 감정은 필요 없다.
어차피 쓰고 버릴 소모품에 특별한 감정을 가질 리가 없었다. 머릿속의 수련을 지우며 태휼이 눈을 감았다.



二章. 숨기다


수련의 어머니는 여상환과 혼인을 약속한 사이였다.
가문의 반대가 있었지만, 반드시 그녀를 가모로 데려가겠다며 호언장담했던 그는 권력의 맛을 보면서 점점 변해 갔다. 한 해, 두 해 그녀와의 약조를 미루던 여상환은 가문에서 정한 여인과 혼인을 하면서 수련의 어머니를 버리려 하였다.
적어도 혼인할 것이라 믿었던 그녀가 수련을 가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여상환은 그녀의 목숨까지도 없앴을 것이었다.
가문 깊숙이 수련의 어머니와 수련을 가두었다. 수련이 커 가면서 한 달에 한 번, 밖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절대 여상환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릴 수 없었다.
“폐하께서 가져오라는 서책 목록입니다.”
내민 목록을 받아 든 정서각 내관이 곁눈질로 수련을 쳐다보았다. 최근 황제가 거둔 위랑에 대한 관심으로 황궁은 수선스러웠다. 그런 위랑이 장서각으로 왔으니 안에서 일하는 이들의 시선이 수련에게 향하는 것은 당연했다.
“여기 있네.”
내관에게서 서책을 받아 든 수련이 고개를 숙였다.
깍듯한 행동에 내관이 수련을 살피듯 눈을 좁혔다. 담담하려 했지만, 내관의 훑는 시선에 수련이 난감한 듯 눈을 내렸다.
“폐하께서 찾으시는 것이니 서두르게.”
“감사합니다.”
흐트러짐 없이 몸을 숙이는 수련의 행동에 굳어 있던 내관의 표정이 작게 풀렸다. 수련의 전에 있던 이들은 은근슬쩍 황제의 관심을 내보이며 내관들의 위에 있으려 하였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으스대는 그들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던 일도 장서각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밖으로 나가려던 수련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주저하는 수련의 모습에 내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 소녀도 이곳의 장서를 볼 수 있습니까? 가져가는 것이 어렵다면 잠깐이라도 좋으니…….”
조용한 만큼이나 조심스러운 수련의 물음에 내관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중요한 장서들이니 밖으로 가져갈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 읽는 건 가능하다네. 원한다면 내 여기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놓도록 하지.”
내관의 허락에 수련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생겨났다. 거듭 감사드린다는 말을 이으며 수련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서둘러야겠다.”
고개를 들어 흐려진 날씨를 보던 수련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수련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어머니는 여상환에서 벗어나 다른 사내를 만나 새 삶을 찾았을 수도 있었다. 그녀 때문에 어그러진 인생이라 해도 할 말이 없었건만, 어머니는 수련에게 화풀이를 하는 대신 그녀를 지켰다.
여상환에게 반항하는 수련을 지키려다 영영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어도 그녀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수련에게 싫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도시의 패거리를 피해 숲 안으로 숨어든 현을 거두고, 그렇게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 냈다.
“음?”
태화전으로 걸음을 옮기던 수련의 곁으로 여섯 명의 궁녀가 다가왔다.
둘러싸는 궁녀들의 모습에 수련의 눈매가 딱딱해졌다.
“따르거라.”
“어디의 누구이신지 알고 따를 수 있겠습니…….”
짝!
수련의 뺨에 불이 일었다. 그녀의 앞에 서 있던 궁녀가 휘두를 손에 수련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화끈거리는 뺨을 감쌀 겨를도 없었다.
“끌고 가라.”
수련이 들고 있던 서책을 빼앗은 궁녀들이 그녀를 붙잡았다.
“늦으시면 폐하께서 찾으실 것입니다. 어느 분이 무슨 연유로 부르시는지 정도는 여쭐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수련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궁녀들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도리어 반항하는 그녀의 입을 가져온 천으로 틀어막았다. 더는 반항하지도 못한 채, 잡힌 수련이 어디론가 끌려가기 시작했다.

*


몇 개의 문을 지나, 수련이 도착한 곳은 후궁이 다과를 즐기는 영화궁의 후원이었다. 중앙에 놓인 탁자에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인 둘이 마주 앉아 있었다. 둘의 모습을 확인한 것도 잠시, 궁녀들의 우악스러운 힘에 수련이 무릎을 꿇었다.
“이비 마마. 한비 마마. 위랑을 데려왔사옵니다.”
이비와 한비라는 말에 고개를 숙인 수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피바람이 불었던 황궁에서 살아남은 두 명의 후궁을 이런 식으로 보게 된다니 예상치 못한 만남에 수련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민수련이 이비 마마와 한비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끌려왔지만 불쾌한 티조차 낼 수 없었다. 정점에 서 있던 황후가 죽은 후, 비슷한 규모의 가문을 가진 두 비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이야기는 이미 황궁에 퍼질 대로 퍼져 있었다.
하필 그 두 비가 모여 있을 때 끌려오다니 불길한 기분이 그녀를 휘감았다.
“폐하께서 곁에 두고 계신다기에 천하절색까지는 아니더라도 얼굴색이 그럴듯할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궁녀보다도 형편없지 않으냐?”
고개를 숙인 수련의 턱을 붙잡고 들어 올린 여인이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수련보다도 몇 살 위로 보이는 여인은 정면으로 바라보기 부담될 정도로 화려한 장신구와 옷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있었다.
화려한 여인에 비해 뒤에 앉아 있는 여인은 귀 옆에 꽂은 호화로운 머리 장식을 빼고는 수수한 모습이었다.
화려한 모습으로 수련에게 막말을 던지고 있는 여인은 대홍려의 딸 한비.
한비의 뒤에 있는 여인은 대사농의 딸 이비였다.
“낯짝은 아닌 것 같고, 어떻게 폐하께 꼬리를 쳤을꼬?”
“소녀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계집이 사내의 옆에 있으면 할 만한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느냐?”
곱고 화려한 모습의 한비였지만, 나오는 말은 모습과는 다르게 추하고 더러웠다.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수련은 자신을 감추었다. 하나도 제대로 내주지 않는 여상환에게서도 인내를 가지고 원하는 것을 얻어 냈던 그녀였다. 제 감정을 마음대로 드러내는 한비를 상대로 못 할 짓도 없었다.
수련이 한 걸음 물러나 한비 앞에 넙죽 엎드렸다.
“소녀 따위가 무엇을 알고 또 무엇을 했겠습니까? 그저 폐하께서 주시는 심부름을 맡아서 했을 뿐, 마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소녀 도통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른다?”
“살려, 살려만 주십시오. 마마. 소녀 따위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한비 앞까지 기어서 온 수련이 한비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끌려왔을 때의 눈빛과는 달리 비굴한 행동에 한비가 눈을 좁혔다. 한비의 눈이 수련을 끌고 온 궁녀를 쳐다보았다.
뒤에 얌전히 앉아 있는 이비를 슬쩍 본 궁녀가 한비의 귀에 속삭였다.
“흐음. 심부름만 하였다?”
“가져오라는 서책을 가져다 드릴 뿐이고, 하라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소녀 따위가 무엇이 볼 게 있다며 폐하 앞에서 무슨 짓을 하겠습니까?”
궁녀의 말에 콧소리를 내던 한비가 떨고 있는 수련을 보았다. 황제가 처음으로 여인을 데리고 왔다기에 정인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심어 놓은 궁녀의 말은 수련의 것과 똑같았다.
“소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소녀가 그럴 주제가 되겠습니까? 믿어 주세요. 한비 마마.”
고개를 들 생각조차 못 하는 듯 수련이 한비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벌벌 떨었다. 수련의 낮은 자세에 노려보던 한비의 입가에 미소가 생겨났다. 수련을 노려보던 한비의 눈이 뒤에 앉아 있는 이비에게로 향하였다.
“한비께서는 이만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웃어른처럼 말리는 이비의 말에 한비가 눈을 떨었다. 그녀나 자신이나 똑같은 비, 차이라면 아비의 가문과 직위뿐이었다. 그 조금의 차이도 없었다면 이비의 말 따위 귓등으로 넘겼을 것이나 지금은 이를 드러내기보다는 손을 잡아야 할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