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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수련이 잡고 있는 치맛자락을 거칠게 당긴 한비가 몸을 돌렸다. 치마에 달려 있던 장신구에 손바닥이 쓸렸지만, 수련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진심으로 모르는 것처럼, 내 목숨은 당신의 것이니 알아서 생각하라는 것처럼.
“일어나라.”
이비의 목소리에 수련이 몸을 일으켰다. 한비에 비해 장식이 적을 뿐, 황궁에서 보았던 이들과는 사뭇 달랐다. 자신을 화려하게 꾸민 한비와는 다르게 이비는 꾸미지 않아도 시선을 빼앗게 하는 미모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수도 없이 보아 온 수련이였다. 한비에게서 그녀를 도와줬다고 한들 믿을 수는 없었다. 그저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하고 못난 계집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소녀. 어찌 고개를 들고 비 마마를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저 살려만 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이 못난 것이 평생을 감사드리겠나이다.”
“호호호. 이비. 폐하께서 바보를 데리고 오시었소.”
거듭 살려만 달라는 수련의 모습에 한비가 웃음을 터트렸다. 황제가 데리고 왔다는 말에 내내 하고 있던 생각이 이제 보니 할 필요도 없는 걱정이었다.
“한비.”
“이비. 괜찮아요. 겨우 살려 달라는 말만 계속해 대는 계집 앞에서 또 무엇을 그리 걱정하시는 것입니까?”
비웃음을 짓던 한비가 머리 장식을 하나 빼 수련을 향해 던졌다. 힘을 실어 던진 장신구에 수련의 뺨에 핏방울이 맺혔다. 화끈거리는 감각에 수련이 뺨에 손끝을 댔다.
“내 사과의 의미로 주마. 너 같은 것들은 만져 보지도 못했을 것이니 그 정도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말해 주지 않아도 알 것이다.”
수련의 눈에서 짧게 불이 일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딴 거 필요 없다며 그대로 던져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한비나 이비가 왜 그녀를 데리고 왔는지 알기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눌렀다.
공포에 떠는 척이 아닌 화를 참느라 떠는 손으로 수련이 한비의 장신구를 붙잡았다.
“감사합니다. 한비 마마. 감사, 감사합니다.”
화가 난 눈을 감추기 위해 수련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온몸을 가득 채운 분노를 간신히 삭인 수련이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한비에게 거듭 고개를 숙였다.
“내내 종종 널 부를 테니 앞으로는 곧바로 찾아오거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녀, 마마의 명을 따를 것이옵니다.”
뺨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어도 수련의 얼굴에는 연신 헤픈 웃음뿐이었다. 수련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놓은 한비가 이만 내보내라며 궁녀에게 손짓하였다.
궁녀의 손에 수련이 끌려 나가고, 제자리로 돌아온 한비가 차로 입술을 적셨다.
“무모하시지 않았습니까? 자칫 폐하께 고할 수도 있음입니다.”
이비의 물음에 한비가 손을 저었다.
“어리석은 계집입니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 넙죽 받아들이는 것을 이비도 보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 데려오신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듯합니다. 오호호.”
한비의 웃음을 대충 넘기며 이비가 찻잔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황제가 직접 데려왔다는 말에 비해서는 모자란 계집처럼 보이기는 하였다. 문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한비에게 맞춰 가는 수련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마치 한비가 원하는 모습을 만들어 낸 것처럼 보인단 말이지.’
한비의 말대로 눈치 없이 모자란 계집이라면 걱정할 것이 없다. 하지만 황제가 수련을 데리고 왔다는 사실이 이비의 신경을 건들고 있었다.
“자신 없으시면 이비께서는 가만히 계세요. 난 저 계집에게서 종종 이야기를 들어야겠습니다. 재물에 환장한 계집 따위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이비가 말이 없자 한비가 먼저 선수를 쳤다. 무언가가 있는 계집이라면 기회가 왔을 때 손을 쓰면 되었다. 지금은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비를 보며 이비가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였다.

*


“위랑. 폐하께서 찾으셨는데 어디를 갔다 오셨습니까? 세상에! 얼굴이 어찌 그리되었습니까?”
찢어지고 부어오른 뺨을 보며 궁녀가 비명을 질렀다. 놀란 궁녀를 달랜 수련이 뺨에 남아 있는 피를 대충 닦아 냈다.
“일이 좀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폐하께 가져갈 서책을…….”
“이비 마마의 궁녀가 위랑이 두고 갔다며 전해 주고 갔습니다. 이비 마마와 계셨던 것입니까? 위랑을 데리고 간 건 한비 마마의 김 상궁이라 들었습니다.”
닦아 낸 뺨에서 다시 흐르는 피를 궁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괜찮다며 미소를 지은 수련이 품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미간을 좁혔다.
“위랑. 그게 무엇입니까?”
필요 없는 것을 버리듯 한비가 던진 장신구를 본 궁녀가 곁으로 다가왔다. 심란한 눈으로 장신구를 보던 수련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굴욕적인 일이었지만, 힘이 없는 수련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거지에게 동냥하듯 한비가 던져 준 것을 받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었다.
“폐하를 뵙기 전에 옷을 갈아입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가지세요.”
“위랑. 이런 귀한 것을 어찌…….”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만 내키지 않네요. 대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한비가 준 장신구는 비싸고 귀한 것이었지만, 수련에게는 어떠한 쓸모도 없었다. 하지만 수련에게 쓸모만 없을 뿐, 다른 이들에게는 또 그게 아니었다.
사귀어야 할 자와 경계해야 할 자.
황궁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그 경계를 잘 구분해서 행동해야 했다. 바로 곁에서 시중을 드는 궁녀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이만한 물건이 없었다. 여가였던 것이 황궁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수련은 사람의 환심을 사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도와줄 테니 어서 들어가세요.”
수련의 말을 알아들은 궁녀가 서둘러 장신구를 자신의 품에 넣었다. 평소보다도 사근거리는 그녀의 시중을 받으며 수련이 방 안으로 들었다.

*


황후인 여가가 죽은 후, 단연 두각을 보이는 가문은 이비의 가문인 대사농이었다. 야심이 있는 만큼 깔끔한 일 처리로 황제의 인정을 받는 그는 조만간 공석이 된 사공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태휼의 손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어떻게든 힘이 될 만한 이에게 접촉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위랑은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가?”
벼루에 먹을 갈던 수련이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고 있던 생각을 멈추었다. 수련의 눈이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돌려졌다. 태휼을 물끄러미 바라봤던 수련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옵니다. 폐하.”
벼루를 내려놓은 수련이 붓에 먹을 묻혀 태휼의 앞에 내려놓았다. 붓을 건넸는데도 그는 수련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폐하. 소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입니까? 어찌…….”
“한비와 이비 중 누가 더 유용해 보이던가?”
태휼의 물음에 수련의 눈이 굳었다. 황궁 안의 모든 것을 아는 그이니 그녀가 두 비를 만난 건 묻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에게 유용하다는 물음을 하다니 그건 아니었다. 황궁이라는 곳에 있다 보면 사람을 저리 대하게 되는 것일까? 평소였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이었지만, 한비와 이비에게 시달렸던 일이 아직 마음속 깊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미 답이 나온 표정인데도 입을 열지 않는군.”
“폐하께서는 황궁에서 시중을 드는 모든 이들이 수단이고 물건일 뿐입니까?”
육 개월 내내 몸을 숙이고 고개조차 들지 못했던 수련이 고개를 든 채 묻자 태휼의 눈에 빛이 감돌았다. 그가 지금 보이는 관심이 호기심이 아니라 조롱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수련은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폐하의 관심만을 바라고, 일거수일투족 폐하의 모든 것에 맞추려는 사람들입니다. 폐하를 자신보다도 더 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어찌 유용하냐는 물음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들이 순수한 마음에서 짐을 모시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힘의 주인이 바뀌는 대로 흘러가는 것들이 바로 황궁에서 짐의 시중을 드는 자들이다. 얼마 전까지 저들의 주인은 권좌에 앉은 짐이 아니라 여상환이었다.”
두 비에 대한 물음이 어느새인가 유용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어 있었다. 권좌에 오르고 힘이 생긴 이후로 태휼의 말투에 딴죽을 건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말을 꺼내는 이가 없던 상황에서 수련의 도발은 나름 흥미를 끌었다.
태휼이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알 리 없는 수련이 화를 참은 채 말을 이었다.
“힘이 없는 자는 힘이 큰 자에게 어쩔 수 없이 휘둘려야 합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이지요. 그들 또한 결국은 살고자 그리하는 것입니다. 그 살고자 하는 방법이 폐하께 해가 되는 일이라면 벌을 받음이 마땅한 일이오나 그들 때문에 죄가 없는 이들까지 매도하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네가 말하는 그 범주에 나의 두 비도 들어가는 건가?”
태휼의 물음에 수련의 말문이 막혔다. 유용이라는 말에 욱한 나머지 그가 물었던 질문의 본질을 흐리고 말았다. 하물며 듣는 자에 따라 황제의 비를 황궁에서 일하는 궁녀와 내관과 같은 존재라는 식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점점 창백해지는 수련을 보던 태휼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조금만 건들면 제 모습으로 태휼에게 그게 아니라며 말을 높였다. 사근거리는 행동으로 다른 수를 써 대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확실히 곁에 두는 재미가 있었다.
“소녀 따위가 비 마마에 대해 어찌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좀 전과는 사뭇 말하는 투가 다르군. 짐보다 짐의 비가 더 무섭단 말인가? 아니면…….”
여유로웠던 태휼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숨을 옥죄이는 것으로 바뀌었다. 태휼의 살기에 수련이 눈을 피하려는 찰나 그에게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짐의 눈을 피하지 마라.”
“…….”
“한 계집은 제 입의 세 치 혀를 다룰 줄 모르고, 다른 계집은 혀를 다루지 못하는 계집의 뒤에 숨어 제 상황을 만들려고 하지. 아니 그런가?”
자신의 비를 평가하는 말임에도 태휼에게서는 조금의 자비도 없었다. 그의 명에도 불구하고 표정을 가리듯 수련이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앞의 황제를 어떻게 제압했던 것일까? 석 달을 곁에 있었지만, 좀처럼 그가 어떤 사람인지 수련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수련이 답이 없자 태휼이 눈을 돌렸다. 어차피 그녀에게서 무슨 답을 기대하고 한 물음이 아니었다.
“여상환이었다면 하나는 자기 생각을 잘 말하고, 다른 하나는 신중하니 모두 다 짐의 여인으로 손색이 없다며 말했을 것이다. 그래 놓고는 자신이 폐하께 말씀드린 게 있으니 앞으로 잘해 보자며 양 가문들과 손을 잡으려 했겠지. 그렇게 얻은 힘을 짐에게 휘둘렀을 것이다.”
태휼의 말에 무릎을 꿇은 수련이 주먹을 쥐었다. 그녀와 대화를 하는 내내 태휼은 자신과 여상환과 비교를 했다는 것인가! 조금도 닮지 않은 아버지와 비교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소녀는 아버지와는 다릅니다.”
“같았다면 죽였겠지.”
“…….”
말문이 막힌 수련이 떨리는 눈으로 태휼을 바라보았다. 감정 없는 눈으로 수련을 보던 황제가 내시감을 불렀다. 걸음 소리조차 없이 들어온 내시감이 태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수에 들 것이다. 준비해라.”
좀처럼 낮잠을 자지 않는 태휼이 오수에 든다 하자 내시감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뒷걸음질로 내시감이 방 밖을 나갔다. 태휼이 오수에 든다 하자 수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랑은 어찌하여 일어나는가?”
“오수에 드신다 하여…….”
“그래서 짐이 나가 있으라 했던가?”
자리를 지키라는 태휼의 명에 수련이 다시 돌아와 무릎을 꿇었다. 수련이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하는 건지, 있어도 상관없다는 것인지 자리에 누운 태휼에게서 고른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잠든 태휼을 지켜볼 수도, 그렇다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는 수련이 무릎을 모아 얼굴을 묻었다.
팽팽하던 긴장을 풀 듯 얼굴을 묻은 수련이 힘든 숨을 길게 내쉬었다.

*


피 웅덩이 속에 죽어 있는 여인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태휼이 보고 있었다.
분명 지켜 주겠다며, 평생을 함께 있겠노라며 맹세하고 또 맹세했던 여인이었다. 당장은 어렵지만 지금의 자리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곁에 두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유일한 이였다.
“여상환!”
여인의 앞에 검을 들고 서 있는 여상환을 향해 황태자였던 태휼이 소리를 질렀다. 분노로 핏발이 선 눈이 여상환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는 눈썹 하나 꿈틀대지 않았다.
“소인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태자 전하의 연모는 태자비만이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요.”
“이런 일을 하고도 살아남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소인의 목숨이라도 거두시려고요? 태자 전하. 전하의 그 자리, 폐하께서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이 여상환이 직접 태자 전하를 선택한 것이지요.”
온몸의 피가 제멋대로 들끓었다.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품어 왔던 분노가 한꺼번에 치밀어 올라 그를 휘감았다. 숨조차 내쉬어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마음에 담은 정인의 시신을 봤음에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