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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어마마마로는 만족할 수 없었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것입니까? 태자 전하.”
“여 귀비가 어마마마에게 매일 독이 든 차를 올렸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는가? 어마마마께서 돌아가신 후에 그 차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물음을 하는 것인가!”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으니 누가 그 사실을 믿어 주겠습니까? 결국 이 모든 일이 태자 전하께서 힘이 없으신 탓입니다.”
무척이나 느긋하고도 여유로운 여상환의 행동에 태휼이 피를 토하였다. 그의 입술 너머로 붉은 피가 똑똑 떨어졌지만 분노하는 태휼을 보며 여상환은 그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쉽게 죽이지 않을 거다. 절대…… 절대 쉽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
“소인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는 소인의 손에서 절대 벗어나실 수 없습니다.”
방향을 잃은 분노가 태휼 안에서 점점 커져 갔다. 그날 이후로 정인을 만들지도 사람을 믿지도 않았다. 그저 여상환을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버텨 내고 힘을 키워 갔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긴 시간을 여상환에게 밟히고 무너졌다. 손아귀에 얻었던 힘이 모래처럼 빠져나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태휼은 변해 갔다.
여유로운 미소 속에 본심을 감추고,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고, 배신한 이의 목숨을 거두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하나씩 힘을 얻을 때마다 태휼 그 자신도 변해 갔지만 상관없었다.
“소인은 폐하께 당한 것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이 여상환의 목을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은 소인의 딸 때문입니다. 그것을 살려 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여가를 치기 며칠 전, 황궁에 입궁한 여상환은 태휼과의 독대를 원하였다. 마주 앉은 자리, 하지만 새삼스럽게 대화가 흘러갈 리가 없었다.
“그것이라…… 그대의 목을 움켜쥐게 된 것이 짐의 힘이 아니라 다른 이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인가.”
태휼의 물음을 받은 여상환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하였다. 억울해 보이는 것 같기도, 분노에 치를 떨려 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보던 여상환이 실소를 터트렸다.
“누구의 탓을 하겠습니까? 소인이 방심한 것이지요. 미소 속에 힘을 감추었던 폐하께 속은 것이고, 가문에서 벗어나겠다며 수를 써 댄 그 아이에게도 당한 것이겠지요. 설마 그것이 중간에서 수를 쓰고 있을 줄이야.”
시선은 태휼을 향하고 있었지만, 여상환이 보고 있는 것은 그가 아니었다.
여상환이 누구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자업자득이군.”
“하지만 소인 그리 쉽게는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대로 무너지기에는 저의 삶이 아까워서라도 안 되겠습니다. 다행히 제 눈과 귀를 막았던 그것은 손을 써 놓았으니 이제는 폐하께 빼앗겼던 것을 다시 찾아와야겠지요.”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여상환은 태휼의 맹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마치 여상환을 죽이라는 것처럼 여가의 네 개의 문 중 가장 큰 북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열려 있는 문으로 들이닥친 황군을 여상환이 막을 방법은 없었다.
“제 아비를 팔아 버리다니 못된 것! 나쁜 것!”
태휼의 검에 목이 베이기 직전, 여상환의 입에서 토해져 나온 이름은 태휼도, 선제도 아닌 수련이였다.
도성에 여상환의 목이 걸리고, 그 모습을 아래서 수련이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의 잘린 목을 보는 수련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
잠에서 깬 태휼이 눈을 찌푸렸다.
마치 이야기를 보듯 이어지는 꿈에 오수를 완전히 망쳐 버렸다. 몸을 일으킨 태휼이 미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망할.’
오랫동안 벼르던 복수의 결실을 보았어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도리어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진정되지 않는 분노만이 그를 여전히 끊임없이 괴롭혔다. 여상환을 죽였어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아니 도리어 여가의 뒤에 숨어 있던 가문들이 하나, 둘씩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
꼭두각시처럼 휘둘리다가 죽은 선제처럼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귀족들의 먹잇감이 되느니 맹수가 되어 그들의 목을 뜯고 숨을 끊을 것이었다.
호연의 주인은 태휼, 바로 자신이었다.
몸에 남은 잠기운을 밀어 내듯 길게 숨을 내쉰 태휼이 수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다 지쳤는지 무릎을 모은 채, 수련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를 보는 태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여상환의 딸.’
숲 안의 집에서 수련을 보는 순간 여상환이 말하던 ‘그것’이 그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포에 몸을 떨면서도 상황을 피하지 않는 눈, 답이 정해져 있는 상황을 바꾸어 보려는 그녀의 행동, 비굴하게 몸을 숙이고 목숨을 구걸하고 있어도 적을 설득하려 하는 단호한 어조.
방식만 다를 뿐, 처음 본 수련의 모습에서 여상환의 잔영이 보였다.
‘널 왜 살렸을까?’
태휼의 앞에서 황후는 목숨만 살려 달라며, 죄송하다며 몸을 숙이고 자비를 구걸하였다. 그 여상환의 딸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황후는 심약하고 무능했다.
그렇기에 심약한 황후보다는 아버지를 팔면서까지 자신과 가족을 살리려는 수련이 더 눈길이 끌었다.
아버지를 팔아넘긴 딸이라는 오명도, 출신도 모르는 천한 계집이라는 수군거림은 그녀에게 통하지 않았다. 수련에게 약점은 황궁 밖에 있는 가족뿐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황제의 곁에서 태연히 행동해도 가끔 그녀의 눈이 가족이 머무는 방향에 오랫동안 머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불쾌해.’
호기심으로 곁에 두었지만, 동시에 진정되지 않는 분노가 그녀를 볼 때마다 제멋대로 치밀었다. 여상환의 딸을 어째서 곁에 두고 있느냐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목을 베어 여상환의 잔재에서 자유로워지라는 유혹이 그를 괴롭혔다.
침상 옆에 놓아두었던 검이 태휼의 손에 뽑혀 나와 수련의 목 끝을 겨누었다. 이대로 목을 베어 버리면 수련은 죽을 것이다.
하지만 목을 겨누는 태휼의 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주저하는 것일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태휼이 고개를 저었다. 죽일 마음이었다면 수련은 이미 여가의 그곳에서 목이 베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련이 그에게 특별한 존재인 것도 아니었다.
‘귀찮아.’
곁에 둔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만 잠시나마 증오와 분노뿐인 삶에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잠에서 깬 수련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멍한 정신을 쫓듯 고개를 저은 그녀가 목에 닿아 있는 검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폐, 폐하!”
하얗게 질린 수련의 눈이 태휼을 향하였다. 그저 공포에 질려 보고 있음에도 수련의 까만 눈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잠든 것 때문에 태휼이 검을 겨누었다고 생각했는지 수련이 몸을 바짝 숙였다.
“소녀, 소녀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이러지 않겠습니…… 아앗!”
검을 내려놓은 손이 수련의 팔을 잡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속절없이 끌려온 수련의 품에 태휼이 얼굴을 묻었다. 사내와는 다른 여인의 체취가 코끝을 간질였다.
돌발 행동에 수련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비나 궁녀에게서 맡았던 것과는 다른 체향에 그가 수련의 목에 얼굴을 더 깊게 묻었다.
“폐하. 놓아주십시오.”
“싫다면?”
이대로 안아 버릴까? 모처럼 마음에 드는 체향에 몸을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몸을 떨던 수련이 태휼의 말에 눈빛이 바뀌었다.
“소녀는 폐하의 여인이 아닙니다.”
자신의 것이면서도 자신의 소유가 아닌 불쾌한 느낌.
분명 붙잡고 있으면서도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모래 같은 기분이 그를 괴롭혔다.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수련은 태휼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다.
“이대로 널 안으면 그만이지 않은가?”
“폐하의 낙인이 등에 찍혀 있기는 하지만 여인으로 폐하에게 안기기는 싫습니다.”
도발을 넘어 무례라 할 수 있는 행동에도 화가 나기보다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누가 호연의 황제인 그의 앞에서 저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한없이 몸을 숙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태휼의 눈을 보며 싫다는 말을 꺼내었다.
“첩지를 받아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데도 말인가?”
“갇혀 있는 상황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는 소녀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당돌한 대답에 태휼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에게서 보이던 여상환의 모습이 사라져 간다. 아직 죽이기는 아깝다.
저 좋은 머리로 어떻게 행동할지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싶었다. 품에 가둬 놓았던 수련을 풀어 준 태휼이 차갑게 말했다.
“위랑은 나가 봐라.”
태휼에게서 빠져나온 수련이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태휼이 반쯤 침상에 몸을 기댔다.
“무진은 들어오라.”
태휼의 명령에도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 느른하게 앉아 있는 황제의 옆으로 전신을 흑의로 가린 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제의 검.
오직 황제만을 지키며, 황제의 명령만을 따른다는 흑영대의 장인 무진이 태휼 앞에 몸을 숙이고 있었다.
“위랑에게 그림자를 붙여라. 어떻게 지내는지, 누구와 대화를 하는지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고해라.”
“따르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무진이 사라지고, 태휼이 눈을 감았다.
무슨 생각으로, 어떠한 마음으로 수련을 데리고 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알고자 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여상환의 딸.
현재 상황도 모르고 빠져나갈 생각만 하는 수련에게 새로운 상황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분노뿐인 삶에 소소한 재미를 즐기다 지겨워지면 버리면 그만.
태휼에게 타인의 삶은 그 정도의 의미일 뿐이었다.
*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나날이 깊어졌지만 수련은 참아 냈다. 그리움을 겉으로 표출하기보다는 황궁에 적응하려 애썼다. 수련의 노력 덕분인지 위랑의 존재를 의심하던 황궁의 사람들도 천천히 그녀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찾았다!’
두 시진 내내 장서각에서 서책을 살피던 수련이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잠시, 주변의 기척을 살핀 그녀가 장서각의 구석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가져온 등불에 의존한 채 수련이 책을 펼쳤다.
내내 수련이 찾은 것은 황궁 내부가 그려져 있는 지도였다. 그녀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거대한 이곳에서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황궁의 전체적인 모습이었다.
최선의 방법은 황제가 그녀를 놓아주는 것이었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황궁에서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 전에 어머니와 동생을 빼내야겠지만.’
머릿속에 둘의 모습이 떠오르자 수련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투덜대기는 했어도 그녀를 따르는 현과 언제나 둘의 사이를 말리며 미소를 지었던 어머니가 생각나자 수련의 눈가에 물기가 아른댔다.
하지만 곧 자신을 감추듯 수련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여기서 운다 한들 그녀를 봐줄 사람은 없었다.
자신을 추스른 수련이 다시 서책에 집중하였다. 피곤한 눈을 억지로 참으며 수련이 지도를 보고 또 보았다.
장서각의 서책은 마음대로 빌릴 수 있었지만, 황궁의 지도를 절대 밖으로 가져갈 수 없었다. 그녀가 황궁의 지도를 외우고 있다는 사실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순간, 지금까지 진행해 온 모든 일이 전부 허사가 되었다.
“감사합니다.”
지도를 머릿속에 담은 수련이 미리 빼놓은 서적 몇 권을 들고는 장서각의 내관에게 향하였다. 졸던 내관이 수련의 걸음에 잠에서 깼다.
“다 보았는가?”
“매번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원하는 건 찾았나 모르겠네. 어차피 내가 하는 일이 그러하니 편할 때 오게나.”
좋게 봐 준 내관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인 수련이 장서각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밤바람이 수련의 얇은 옷을 스치고 지나가자, 서책을 든 그녀가 몸을 떨었다.
“후우.”
사람 목숨을 수단으로 여기는 황제는 그녀가 없는 듯 행동하면서도, 어느 순간 곁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하였다. 그나마 다행은 작은 실수에도 목이 날아가는 궁인들과는 다르게 황제는 그녀의 목숨은 거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니.”
안도하던 수련의 입가에 조소가 생겨났다. 지금에 비하면 여가에 잡혀 있었을 때가 도리어 나은 상황이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황제와 함께 보내야 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내내 긴장의 연속이니 잠을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아!’
황궁을 걷던 수련의 걸음이 멈추었다. 무엇보다도 최근 그녀를 건들고 있는 건 황제의 관심이 아니었다. 수련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뒤쫓는 기척 또한 빠르게 움직였다.
“어마마마로는 만족할 수 없었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것입니까? 태자 전하.”
“여 귀비가 어마마마에게 매일 독이 든 차를 올렸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는가? 어마마마께서 돌아가신 후에 그 차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물음을 하는 것인가!”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으니 누가 그 사실을 믿어 주겠습니까? 결국 이 모든 일이 태자 전하께서 힘이 없으신 탓입니다.”
무척이나 느긋하고도 여유로운 여상환의 행동에 태휼이 피를 토하였다. 그의 입술 너머로 붉은 피가 똑똑 떨어졌지만 분노하는 태휼을 보며 여상환은 그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쉽게 죽이지 않을 거다. 절대…… 절대 쉽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
“소인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는 소인의 손에서 절대 벗어나실 수 없습니다.”
방향을 잃은 분노가 태휼 안에서 점점 커져 갔다. 그날 이후로 정인을 만들지도 사람을 믿지도 않았다. 그저 여상환을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버텨 내고 힘을 키워 갔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긴 시간을 여상환에게 밟히고 무너졌다. 손아귀에 얻었던 힘이 모래처럼 빠져나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태휼은 변해 갔다.
여유로운 미소 속에 본심을 감추고,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고, 배신한 이의 목숨을 거두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하나씩 힘을 얻을 때마다 태휼 그 자신도 변해 갔지만 상관없었다.
“소인은 폐하께 당한 것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이 여상환의 목을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은 소인의 딸 때문입니다. 그것을 살려 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여가를 치기 며칠 전, 황궁에 입궁한 여상환은 태휼과의 독대를 원하였다. 마주 앉은 자리, 하지만 새삼스럽게 대화가 흘러갈 리가 없었다.
“그것이라…… 그대의 목을 움켜쥐게 된 것이 짐의 힘이 아니라 다른 이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인가.”
태휼의 물음을 받은 여상환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하였다. 억울해 보이는 것 같기도, 분노에 치를 떨려 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보던 여상환이 실소를 터트렸다.
“누구의 탓을 하겠습니까? 소인이 방심한 것이지요. 미소 속에 힘을 감추었던 폐하께 속은 것이고, 가문에서 벗어나겠다며 수를 써 댄 그 아이에게도 당한 것이겠지요. 설마 그것이 중간에서 수를 쓰고 있을 줄이야.”
시선은 태휼을 향하고 있었지만, 여상환이 보고 있는 것은 그가 아니었다.
여상환이 누구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자업자득이군.”
“하지만 소인 그리 쉽게는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대로 무너지기에는 저의 삶이 아까워서라도 안 되겠습니다. 다행히 제 눈과 귀를 막았던 그것은 손을 써 놓았으니 이제는 폐하께 빼앗겼던 것을 다시 찾아와야겠지요.”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여상환은 태휼의 맹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마치 여상환을 죽이라는 것처럼 여가의 네 개의 문 중 가장 큰 북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열려 있는 문으로 들이닥친 황군을 여상환이 막을 방법은 없었다.
“제 아비를 팔아 버리다니 못된 것! 나쁜 것!”
태휼의 검에 목이 베이기 직전, 여상환의 입에서 토해져 나온 이름은 태휼도, 선제도 아닌 수련이였다.
도성에 여상환의 목이 걸리고, 그 모습을 아래서 수련이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의 잘린 목을 보는 수련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잠에서 깬 태휼이 눈을 찌푸렸다.
마치 이야기를 보듯 이어지는 꿈에 오수를 완전히 망쳐 버렸다. 몸을 일으킨 태휼이 미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망할.’
오랫동안 벼르던 복수의 결실을 보았어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도리어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진정되지 않는 분노만이 그를 여전히 끊임없이 괴롭혔다. 여상환을 죽였어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아니 도리어 여가의 뒤에 숨어 있던 가문들이 하나, 둘씩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
꼭두각시처럼 휘둘리다가 죽은 선제처럼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귀족들의 먹잇감이 되느니 맹수가 되어 그들의 목을 뜯고 숨을 끊을 것이었다.
호연의 주인은 태휼, 바로 자신이었다.
몸에 남은 잠기운을 밀어 내듯 길게 숨을 내쉰 태휼이 수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다 지쳤는지 무릎을 모은 채, 수련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를 보는 태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여상환의 딸.’
숲 안의 집에서 수련을 보는 순간 여상환이 말하던 ‘그것’이 그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포에 몸을 떨면서도 상황을 피하지 않는 눈, 답이 정해져 있는 상황을 바꾸어 보려는 그녀의 행동, 비굴하게 몸을 숙이고 목숨을 구걸하고 있어도 적을 설득하려 하는 단호한 어조.
방식만 다를 뿐, 처음 본 수련의 모습에서 여상환의 잔영이 보였다.
‘널 왜 살렸을까?’
태휼의 앞에서 황후는 목숨만 살려 달라며, 죄송하다며 몸을 숙이고 자비를 구걸하였다. 그 여상환의 딸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황후는 심약하고 무능했다.
그렇기에 심약한 황후보다는 아버지를 팔면서까지 자신과 가족을 살리려는 수련이 더 눈길이 끌었다.
아버지를 팔아넘긴 딸이라는 오명도, 출신도 모르는 천한 계집이라는 수군거림은 그녀에게 통하지 않았다. 수련에게 약점은 황궁 밖에 있는 가족뿐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황제의 곁에서 태연히 행동해도 가끔 그녀의 눈이 가족이 머무는 방향에 오랫동안 머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불쾌해.’
호기심으로 곁에 두었지만, 동시에 진정되지 않는 분노가 그녀를 볼 때마다 제멋대로 치밀었다. 여상환의 딸을 어째서 곁에 두고 있느냐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목을 베어 여상환의 잔재에서 자유로워지라는 유혹이 그를 괴롭혔다.
침상 옆에 놓아두었던 검이 태휼의 손에 뽑혀 나와 수련의 목 끝을 겨누었다. 이대로 목을 베어 버리면 수련은 죽을 것이다.
하지만 목을 겨누는 태휼의 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주저하는 것일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태휼이 고개를 저었다. 죽일 마음이었다면 수련은 이미 여가의 그곳에서 목이 베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련이 그에게 특별한 존재인 것도 아니었다.
‘귀찮아.’
곁에 둔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만 잠시나마 증오와 분노뿐인 삶에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잠에서 깬 수련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멍한 정신을 쫓듯 고개를 저은 그녀가 목에 닿아 있는 검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폐, 폐하!”
하얗게 질린 수련의 눈이 태휼을 향하였다. 그저 공포에 질려 보고 있음에도 수련의 까만 눈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잠든 것 때문에 태휼이 검을 겨누었다고 생각했는지 수련이 몸을 바짝 숙였다.
“소녀, 소녀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이러지 않겠습니…… 아앗!”
검을 내려놓은 손이 수련의 팔을 잡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속절없이 끌려온 수련의 품에 태휼이 얼굴을 묻었다. 사내와는 다른 여인의 체취가 코끝을 간질였다.
돌발 행동에 수련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비나 궁녀에게서 맡았던 것과는 다른 체향에 그가 수련의 목에 얼굴을 더 깊게 묻었다.
“폐하. 놓아주십시오.”
“싫다면?”
이대로 안아 버릴까? 모처럼 마음에 드는 체향에 몸을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몸을 떨던 수련이 태휼의 말에 눈빛이 바뀌었다.
“소녀는 폐하의 여인이 아닙니다.”
자신의 것이면서도 자신의 소유가 아닌 불쾌한 느낌.
분명 붙잡고 있으면서도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모래 같은 기분이 그를 괴롭혔다.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수련은 태휼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다.
“이대로 널 안으면 그만이지 않은가?”
“폐하의 낙인이 등에 찍혀 있기는 하지만 여인으로 폐하에게 안기기는 싫습니다.”
도발을 넘어 무례라 할 수 있는 행동에도 화가 나기보다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누가 호연의 황제인 그의 앞에서 저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한없이 몸을 숙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태휼의 눈을 보며 싫다는 말을 꺼내었다.
“첩지를 받아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데도 말인가?”
“갇혀 있는 상황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는 소녀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당돌한 대답에 태휼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에게서 보이던 여상환의 모습이 사라져 간다. 아직 죽이기는 아깝다.
저 좋은 머리로 어떻게 행동할지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싶었다. 품에 가둬 놓았던 수련을 풀어 준 태휼이 차갑게 말했다.
“위랑은 나가 봐라.”
태휼에게서 빠져나온 수련이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태휼이 반쯤 침상에 몸을 기댔다.
“무진은 들어오라.”
태휼의 명령에도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 느른하게 앉아 있는 황제의 옆으로 전신을 흑의로 가린 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제의 검.
오직 황제만을 지키며, 황제의 명령만을 따른다는 흑영대의 장인 무진이 태휼 앞에 몸을 숙이고 있었다.
“위랑에게 그림자를 붙여라. 어떻게 지내는지, 누구와 대화를 하는지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고해라.”
“따르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무진이 사라지고, 태휼이 눈을 감았다.
무슨 생각으로, 어떠한 마음으로 수련을 데리고 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알고자 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여상환의 딸.
현재 상황도 모르고 빠져나갈 생각만 하는 수련에게 새로운 상황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분노뿐인 삶에 소소한 재미를 즐기다 지겨워지면 버리면 그만.
태휼에게 타인의 삶은 그 정도의 의미일 뿐이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나날이 깊어졌지만 수련은 참아 냈다. 그리움을 겉으로 표출하기보다는 황궁에 적응하려 애썼다. 수련의 노력 덕분인지 위랑의 존재를 의심하던 황궁의 사람들도 천천히 그녀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찾았다!’
두 시진 내내 장서각에서 서책을 살피던 수련이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잠시, 주변의 기척을 살핀 그녀가 장서각의 구석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가져온 등불에 의존한 채 수련이 책을 펼쳤다.
내내 수련이 찾은 것은 황궁 내부가 그려져 있는 지도였다. 그녀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거대한 이곳에서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황궁의 전체적인 모습이었다.
최선의 방법은 황제가 그녀를 놓아주는 것이었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황궁에서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 전에 어머니와 동생을 빼내야겠지만.’
머릿속에 둘의 모습이 떠오르자 수련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투덜대기는 했어도 그녀를 따르는 현과 언제나 둘의 사이를 말리며 미소를 지었던 어머니가 생각나자 수련의 눈가에 물기가 아른댔다.
하지만 곧 자신을 감추듯 수련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여기서 운다 한들 그녀를 봐줄 사람은 없었다.
자신을 추스른 수련이 다시 서책에 집중하였다. 피곤한 눈을 억지로 참으며 수련이 지도를 보고 또 보았다.
장서각의 서책은 마음대로 빌릴 수 있었지만, 황궁의 지도를 절대 밖으로 가져갈 수 없었다. 그녀가 황궁의 지도를 외우고 있다는 사실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순간, 지금까지 진행해 온 모든 일이 전부 허사가 되었다.
“감사합니다.”
지도를 머릿속에 담은 수련이 미리 빼놓은 서적 몇 권을 들고는 장서각의 내관에게 향하였다. 졸던 내관이 수련의 걸음에 잠에서 깼다.
“다 보았는가?”
“매번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원하는 건 찾았나 모르겠네. 어차피 내가 하는 일이 그러하니 편할 때 오게나.”
좋게 봐 준 내관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인 수련이 장서각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밤바람이 수련의 얇은 옷을 스치고 지나가자, 서책을 든 그녀가 몸을 떨었다.
“후우.”
사람 목숨을 수단으로 여기는 황제는 그녀가 없는 듯 행동하면서도, 어느 순간 곁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하였다. 그나마 다행은 작은 실수에도 목이 날아가는 궁인들과는 다르게 황제는 그녀의 목숨은 거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니.”
안도하던 수련의 입가에 조소가 생겨났다. 지금에 비하면 여가에 잡혀 있었을 때가 도리어 나은 상황이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황제와 함께 보내야 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내내 긴장의 연속이니 잠을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아!’
황궁을 걷던 수련의 걸음이 멈추었다. 무엇보다도 최근 그녀를 건들고 있는 건 황제의 관심이 아니었다. 수련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뒤쫓는 기척 또한 빠르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