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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빠르게 걷던 걸음이 멈추고, 수련의 모습이 사라진 순간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가린 이는 수련을 찾는 듯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혹스러운 듯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흑의의 인영이 사라진 후, 몸을 숨기고 있던 수련이 고개를 내밀었다.
“후.”
사라지는 인영을 본 수련이 피곤한 숨을 내쉬었다.
아직 황제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전부 보일 생각은 없었다. 지금 그녀가 황궁에서 만들어야 하는 모습은 조용하면서도 무지하며 시키는 대로 따르는 어리석은 여인이었다. 그렇기에 따라오는 기척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기척을 따돌리고서라도 황궁이 어떤 구조인지 보고 싶었다. 외운 지도를 머릿속으로 곱씹으며 수련이 황궁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어딜 갔다가 이제 오는 것입니까?”
수련이 자신의 침소로 돌아온 것은 장서각에서 나온 지 한 시진이 흐른 후였다. 어둡다 못해 한밤중에 돌아오자 기다리던 궁녀가 서둘러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밤의 한기에 창백하게 질린 수련을 본 궁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이리 하얗게 질려서는!”
“장서각에서 나오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수련이 고개를 숙이자 화를 내려던 궁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조용하고 까다롭지 않으니 시중을 들기에는 편했지만, 상대하면 할수록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최 알 수 없었다. 하물며 이렇게 말없이 사라질 때마다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길을 잃었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밤에 황궁을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합니다. 다음에 나가실 때는 소인과 함께 나가시지요.”
“아직 길이 어색하여 그런 것일 뿐입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습니다.”
몸을 숙인 수련이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느껴지는 기척의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쁜 숨을 내쉬며 흑영대의 인영이 수련의 방을 노려보았다.

*


“매번 그렇게 뒤에서 지켜보지 말고 이번에는 좀 앞으로 나서심이 어떻겠습니까? 이비.”
갑자기 찾아온 한비의 방문이 불쾌하던 찰나,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이비의 고운 아미가 찡그려졌다. 불쾌한 눈이 오랫동안 한비를 노려본 것도 잠시 이비의 눈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상궁에게로 향하였다.
“내 한비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밖에 나가 있어라.”
이비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인 문 상궁이 궁녀와 궁인을 데리고 밖으로 움직였다. 둘만이 남은 방 안에서 한비의 기색을 살피듯 이비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비의 시선에 한비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감돌았다.
“무슨 말을 하고자 함이오?”
“영원하리라 생각했던 여가가 무너지고, 황후가 죽었지요. 끊임없이 견제하고 대립하던 후궁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이비와 나뿐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들끼리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 다른 후궁을 들이면 그만인 일 아니겠소?”
“그전에 이비와 제가 움직여야겠지요. 대사농인 이비의 아버지와 대홍려인 내 아버지의 힘이라면 무엇을 못 이루겠습니까?”
“폐하를 너무 쉽게 보시는 것이 아닙니까? 자칫 폐하의 검이 한비와 나를 향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 조심, 또 조심해야지요.”
한비의 눈에서 나오는 광기에 이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한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 황제가 움직일 시간을 주는 것도 위험하였다. 여리고 못난 주제에 황후의 자리에 앉아 있던 여가의 여식이 죽었으니 이제 슬슬 그녀도 원하는 것을 위해 움직여야 할 때였다.
그렇다고 선뜻 한비의 손을 잡자니 걸리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자신처럼 황후에 뜻을 두고 있는 한비, 그리고 최근 곁에서 황제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위랑이라는 여인이었다.
“한비께서는 위랑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위랑을 묻는 이비의 모습에 한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관심이 없는 듯 무심해 보여도 황궁의 누구보다도 야심이 많은 이비였다.
이비를 겉으로 끌어낼 수만 있다면, 그녀의 아버지인 대사농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머리 아픈 문제를 생각 외로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직까지는 얌전히 폐하의 곁을 지키고 있더군요. 어차피 여인으로 둔 것이었다면 폐하의 성정에 이미 품에 안으셨을 것입니다. 우선은 폐하의 곁에 있는 것이니 한번 써먹어 볼 생각입니다.”
“…….”
“고운 꽃은 질리도록 보아 오셨던 폐하이십니다. 고작 못난 꽃에 마음 주실 곁이나 있으시겠습니까? 하물며 그 못난 것이 수를 쓴다 한들 적당히 폐하의 눈 밖에 나게 하면 그만이지요.”
한비의 이야기를 듣는 이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생겼다. 눈 밖에 난 이를 황제가 살려 줄 리가 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추구하는 황제, 그렇기에 사소한 잘못조차 목숨으로 거두는 이였다.
어차피 자신이 움직이지 않아도 위랑 정도는 한비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터였다.
“더 이상의 후궁은 없습니다.”
이비의 조건에 한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황후는 우리 둘 중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힘들겠지만 밀린 쪽은 깔끔히 포기하는 것으로 하지요.”
한비의 말을 들은 이비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차피 이해관계에 따른 동맹일 뿐이었다. 황후가 되면 그 후에 다시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이비의 답을 들은 한비가 웃으면서 나가고, 밖에서 대기하던 상궁과 궁녀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경상에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이비의 눈에 옅은 광채가 머물렀다.
“문 상궁.”
이비의 부름에 문 상궁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옅은 숨을 내쉰 이비가 문 상궁에게 작게 속삭였다.
“사가에 연통을 넣어라. 아버지께 은밀히 입궁하시라고 전해 드려라.”
이비의 명령에 문 상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뒷걸음질로 사라지는 문 상궁을 보던 이비가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속이 훤히 보이는 한비는 천천히 처리하면 된다. 다만 황궁에 점점 적응하는 중인 위랑이라는 여인이 자꾸 거슬렸다.
외모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한비와 자신은 다르다. 황제가 곁에 두고 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터, 그것을 알아야 했다.

*


「몸이 약해서인지 자잘한 병치레는 하는 듯했습니다만 민 부인의 건강은 그리 나쁘지는 않았소. 현이라는 아이가 눈치를 채고 위랑에 관해 물어보기는 했지만 적당히 넘겼으니 그렇게 알고 있으시오.」

아침에 일어나 준비를 끝낸 수련에게 궁녀가 곱게 접은 종이를 손에 쥐여 주었다. 한비에게 얻었던 장신구를 얻은 후부터 시작된 거래는 반년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지난밤, 약간의 돈과 함께 조심스럽게 부탁했던 가족의 소식을 오늘에서야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건 마음에 걸렸지만, 그럼에도 잘 지내고 있다는 말에 안심이 되었다.
“위랑. 기쁜 일이라도 있습니까? 오늘따라 안색이 좋아 보입니다.”
그녀가 황궁에 머문 지도 반년, 이제 종종 수련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내관이나 궁녀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아무 일도 아니라며 몸을 숙이고 지나갔을 터였지만, 오늘만큼은 감정을 숨기기 힘들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런 건 아닙니다만, 왠지 좋은 소식을 들을 것 같은 기분이어서요.”
보기 드문 수련의 미소에 내관의 눈이 흔들렸다. 말수도 없고, 조용하다 못해 가라앉은 분위기를 가진 그녀였다. 미소 하나에 사람이 저렇게 달라 보일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이 잘못 봤다고 생각한 내관이 눈을 좁혔다.
“소녀의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 아닙니다.”
표정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여인의 얼굴인 듯 미소를 거둔 수련은 전에 보았던 그 모습이었다. 잘못 본 것이라 생각한 내관이 방향을 바꿀 겸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그의 대답에 수련이 답하는 식으로 대화가 계속되었다.
평소보다 기분이 좋은 것이 사실인지 대화에 참여하는 수련의 얼굴은 평소보다도 생기가 가득하였다.
둘이었던 대화에 궁녀들이 끼어들고 어느새인가 궁인들까지 모여들면서 주변이 수선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저들이 감히…… 소인이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수련을 중심으로 궁녀들과 내관들이 모여 있자 태휼의 옆에 있던 내시감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신성한 황궁에서 잡담이라니, 더군다나 그런 모습을 황제에게 들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에라도 내려가려는 내시감을 태휼이 막았다.
“놔두어라. 잠시의 대화가 문제될 일은 없겠지.”
“허나 폐하. 어찌 저런 모습을…….”
“웃을 줄도 알았군.”
태휼의 물음에 내시감이 무리를 향해 눈을 좁혔다. 태휼이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확인한 순간 내시감이 숨을 들이켰다. 분명 태휼이 가리키고 있는 사람은 내관들 사이에서 미소 짓고 있는 수련이였다.
황제의 곁을 지키는 수련의 얼굴에는 표정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기껏 짓는 변화라고는 생각을 하기 위해 살짝 미간을 찡그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그녀가 환한 미소로 상대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모습은 내시감으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폐하.”
“손아귀에 있으면서도 내 위랑은 숨기는 것이 많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폐하.”
내시감이 물었지만 태휼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신기한 듯 궁녀의 말에 미소 짓는 수련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곁에 있을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표정이었다. 생기가 가득 오른 표정이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었다.

‘분명 소인의 기척을 읽을 줄 알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행동하였으나 분명 소인의 기척을 읽고 몸을 숨기는 데 능하였습니다.’
‘무를 배웠다는 건가?’
‘직접 검을 겨루지 않았기에 실력을 알지는 못하오나 검을 전혀 쓰지 못하는 여인은 아니었습니다. 소인. 최선을 다해 움직였사오나 다섯 번 중에 한, 두 번은 여인을 놓치는 일이 있었사옵니다.’

부족한 능력 때문이라며 죽여 달라는 흑영대를 황제는 감시를 계속하라며 돌려보냈다. 그저 어떻게 생활하는지 궁금했을 뿐이었건만, 수련에게는 그가 생각하는 이상의 무언가가 분명히 있었다.
제 손아귀에 가두고 있는 여인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무슨 일을 꾸미는지는 알아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닌 다름 사람에게서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화가 나다 못해 짜증이 나는 일이었다.
“숨을 쉴 정도만 풀어놓는 것도 재미나겠지.”
“폐하. 위랑을 부를까요?”
태휼의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내시감이 고개를 더 깊게 숙였다.
여인으로 안지 않으면서도 곁에 두고 자신의 시중을 맡겼다. 여인을 향한 연모가 아니었음에도 자신의 눈에서 수련이 사라지는 일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미묘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관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곁에 있던 이중에 가장 조용하게 버텨 내고 있는 이가 바로 수련이였다.
“놔두어라. 어차피 데리고 와 보았자 시킬 일도 없으니.”
“네. 폐하.”
“하지만 위랑의 곁에 있는 이들에게는 말을 해 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의 앞에서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미소를 겨우 내관 따위에게 보이다니 마음속 깊이 타오르기 시작한 감정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보기 좋은 미소. 까르르 터트리는 웃음소리가 태휼의 귀를 간질였다. 대화를 듣는 수련의 얼굴은 활짝 피어올랐지만, 그녀를 보는 태휼의 눈은 점점 차가워졌다. 목에 걸려 있는 가시처럼 수련의 존재가 그를 긁어 댔다. 그녀의 아버지였던 여상환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주변을 찍어 누르듯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를 숨기지 않으며 태휼이 차갑게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