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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三章. 흐르다
태화전으로 들어오는 제연궁의 담벼락에서 내관 몇이 부지런히 땅을 파고 있었다. 내관들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어느 정도 깊게 땅을 파내던 내관이 주저앉았다.
내관의 반응에 자신도 모르게 다가갔던 궁녀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변의 반응이 수선스러워지자 멀리서 지켜보던 태휼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폐하. 소인이 가져오겠습니다.”
땅을 파는 순간부터 느껴졌던 비릿한 피 냄새. 굳이 저 밑에 무엇이 있는지 묻지 않아도 너무나도 뻔했다. 저주를 내리기 위한 무구(巫具), 황제로서 힘을 쟁취하고 권력을 얻었어도 그의 죽음을 원하는 이들은 호연에 너무나도 많았다.
내시감 대신 따라 나온 유 내관이 앞서 나가려는 것을 태휼이 막았다.
“위랑이 가져오라.”
“허나 폐하. 저 무구는…….”
곁눈질로 무구를 본 유 내관이 태휼을 말리려 했지만, 이미 명을 받은 수련은 제연궁의 계단을 조용히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 수련의 모습을 태휼이 묘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끔찍한 무구의 형상에 다들 눈살을 찌푸려도, 수련의 눈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도리어 벌벌 떠는 궁인과 내관들 사이로 옮기는 걸음이 평소와 똑같이 거침없었다.
‘감정이 없는 건가?’
고민하던 태휼이 매서운 눈으로 수련을 지켜보았다. 거의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구를 향해 가는 수련 또한 옅게 떨고 있었다. 사내조차도 몸을 사리는 무구를 보며 참고 있는 건 단순히 성격이나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상환은 왜 널 가두었을까?’
단순히 호기심으로 데리고 온 여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이들과는 다른 모습을 하나씩 보이고 있었다.
태휼이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수련이 땅에 있는 무구를 꺼내 들었다.
“까악!”
단단히 싸맨 짚단 인형에 황제를 상징하는 곤룡포가 입혀져 있었다. 황금의 곤룡포 위로 사람인지 동물인지 알 수 없는 살점이 인형 곳곳에 묻혀져 있었다. 그 주변을 엉킨 머리카락과 피가 흥건히 감싸고 있었다.
무구의 끔찍한 모습에 궁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거슬리는지 내관들 또한 눈을 찌푸렸다.
“쟁반을 주시겠습니까?”
수련의 물음에 굳어 있던 내관이 움찔 몸을 떨었다. 내관이 쟁반을 내밀자 수련이 들고 있던 무구를 올렸다. 내관에게서 쟁반을 받아 든 수련이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태휼의 앞으로 걸어갔다.
무구를 꺼내고, 쟁반에 받아 올 때까지 태휼의 눈이 한시도 수련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의 살점일지도 모르는 것을 잘도 가져왔구나.”
태휼의 말에 수련의 미간이 딱딱하게 굳었다. 징그럽고 구역질이 나는 것을 가려오라는 명령 때문에 간신히 가져왔건만, 잘했다는 말을 해도 모자를 판에 그는 수련을 약 올리듯 조롱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가져오라 명하지 않으셨습니까?”
조용한 말 안에 교묘히 드러나는 투정에 태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생겨났다. 조금씩 적응이 되어 가는 것인지, 아니면 몇 달을 내내 긴장 속에 있어서인지 꼭꼭 숨겨져 있던 수련의 본심이 종종 입 밖으로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다른 이가 그랬다면 불쾌하여 화를 냈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투정은 생각보다도 싫지 않았다.
“네 이년! 어찌 폐하의 앞에서 그리 입을 놀리는 것이냐!”
처음 무구를 가져오겠다 했던 유 내관이 수련을 향해 눈을 치켜세웠다. 최근 최측근에서 황제를 모시는 그들보다도 더 가까이에 있는 위랑이라는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내시감은 일시적이니 넘기라고 했지만, 여인 주제에 내관처럼 황제를 모시는 그녀가 날이 갈수록 눈에 거슬리던 참이었다.
“폐하를 욕보이는 무구니라! 가져오라 명해서 가져왔다는 말하는 본새가…….”
“그만하라.”
“폐하!”
유 내관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수련을 보는 태휼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워 보였다. 천천히 계단으로 내려온 태휼이 수련의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위랑은 어찌 생각하느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수련이 태휼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했다.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둘의 간격은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멀었다. 당장에라도 그녀의 목을 거둘 것 같은 태휼을 보며 숨을 삼켰다.
살아남아서 이곳을 나가야 한다.
가족과 함께하는 자유로운 미래. 그것만이 수련의 전부였다. 잠깐의 울컥에 본심을 보이다니 실수였다. 표정을 가리듯 수련이 고개를 숙였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폐하.”
“이 무구가 짐의 목숨을 거둘 수 있을 거라 믿느냔 말이다.”
물음을 하는 황제의 의도가 무엇일까? 시선을 마주하고 머리를 굴렸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서 잘못 답을 하면 죽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가족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는 말에 태휼의 미간이 작게 꿈틀댔다. 하지만 수련의 대답은 끝이 아니었다.
“다만 무구 따위가 폐하의 심기를 거스를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수련의 대답에 태휼의 눈이 커졌다. 잠시 후, 태휼이 몸을 숙였다.
“크크큭.”
“폐, 폐하.”
놀란 유 내관이 곁으로 다가온 순간, 태휼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무엇이 그토록 재미난지 한참을 웃음을 터트린 황제가 놀란 유 내관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너보다는 위랑이 나은 것 같구나. 크하하하핫.”
“폐, 폐하!”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주변에서 보고 있었지만, 태휼은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몸을 숙이고 자신을 낮추고 있어도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숙이기에 또 몸을 빼려는가 싶더니만 생각지도 못한 한마디가 그를 완전히 흔들어 댔다.
생각보다도 재미났다. 그의 본심을 들으면 수련은 기겁할지도 몰랐지만, 태휼은 그녀가 진심으로 재미있었다.
“겨우 이딴 걸로 짐을 죽이려는 이들이 어리석을 뿐이지. 겨우 동물의 피와 살점인 뿐인 것으로 산 사람을 어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
“이건 묻은 자에게는 혹시라도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였을 텐데. 아쉽구나. 쓸데없는 기대가 될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앞으로 일어날 일의 포석일지도 모르지.
태휼이 재미난 듯 입꼬리를 올렸다. 꼬리만 잡고 끝나는 사냥은 재미없다. 자신을 미끼로 내걸더라도 한 번에 전부를 움켜쥐는 것이 사냥의 묘미였다.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자 그를 살피듯 수련이 바라보았다. 무구를 보던 태휼의 입가에 옅은 살기가 감돌았다. 어차피 뜯지 않으면 뜯기는 곳이 황궁이었다.
무구를 보던 황제의 눈이 수련을 노려보던 유 내관에게로 향하였다.
“네가 직접 치우거라.”
“네?”
“짐을 그토록 귀히 여겨 주니 무구를 치우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으냐?”
태휼의 말에 유 내관이 말을 삼켰다. 무구를 꺼내 온다는 말을 했지만, 실제로는 궁인이 꺼낸 것을 그가 가져오는 것이었다. 뭐라 반박할 수는 없었지만, 최하위 궁인도 아니고 곁에서 직접 황제를 모시는 그에게 무구를 처리하라고 하다니 선뜻하겠다며 답을 할 수 없었다.
하물며 무구는 사악한 기운을 상대에게 그대로 보내는 것이었다. 자칫 잘못 치우면 그 살기가 자신에게 향할 수 있었다.
“짐을 향한 저주가 너에게 향할 것 같으냐?”
“아, 아닙니다. 폐하. 소, 소인이…….”
“소녀가 거둔 것이니 소녀가 직접 없애겠습니다. 어찌 유 내관님의 손을 더럽히겠습니까? 천한 소녀가 하겠습니다.”
유 내관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챈 수련이 앞서 나왔다. 그녀의 반응에 유 내관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태휼이 그를 보며 실소를 흘렸다.
“유 내관. 계집에게 할 일을 떠넘기고는 마음이 편한 것이냐?”
“폐, 폐하! 어찌! 아니옵니다.”
쟁반을 빼앗다시피 받아 든 유 내관이 원망 어린 눈으로 수련을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에 수련이 굳은 안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눈치를 보며 날을 세우다가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천하다는 말로 몸을 숙였다. 다시 본모습을 숨겨 버리는 수련의 모습에 태휼의 눈이 굳었다. 꽁꽁 숨어 있는 수련의 본모습을 보고 싶다. 피가 흥건히 있는 무구가 누구의 짓인지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곁에 있는 위랑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는 전부 보고 싶었다.
“위랑은 날 따라라.”
태휼이 몸을 돌리자, 궁녀가 건넨 천으로 피를 닦은 수련이 뒤를 따랐다. 둘이 사라진 자리, 유 내관의 눈이 오랫동안 수련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
깊은 어둠을 타 제연궁의 담을 넘는 이들의 움직임이 날렵하였다.
궁의 곳곳에 황제를 지키기 위한 병사와 호위들이 지천에 깔려 있었지만, 상관없다는 듯 그들은 은밀하고 신속하였다. 때로 그들을 발견한 이들이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입 밖으로 터지기도 전에 날아드는 암기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아홉 개의 관문을 뚫고 드디어 도착한 태화전의 앞에서 서로를 보며 눈짓을 주고받았다.
어두운 밤보다도 더 짙은 흑의를 입은 이들이 태화전을 향해 움직였다.
“자객이다!”
목이 꿰뚫리기 직전, 내관의 고함에 태화전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우리 목적은 황제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들이 태화전 안으로 거침없이 진입하였다. 무기를 든 호위들이 태화전의 곳곳에서 나왔지만 그들의 무기는 주저도 없이 목숨을 거둬들였다. 쓰러진 자의 몸에서 흐르는 비릿한 피 냄새가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자객을 막아야 한다는 호위들의 고함이 곳곳에 울려 퍼질 즈음, 흑의를 입은 이들이 목적한 곳에 도착하였다.
앞을 막는 내관의 목을 벤 그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등을 돌리고 잠이 든 황제의 모습을 확인한 흑의의 인영들이 들고 있던 무기를 들었다.
“개인적인 원한은 없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만 죽으시오!”
말을 끝낸 이가 일어나지 않는 황제를 향해 검을 찔렀다. 흑의 인영의 검이 정확히 황제의 목을 꿰뚫었지만 황제는 미동조차 없었다.
냉정함을 유지하던 흑의 인영이 무너진 것도 그때였다.
“설마…….”
찌른 황제의 몸을 발로 뒤집었다.
딱딱하게 굳은 몸, 검으로 찔렀음에도 흐르지 않는 피.
“왜 그리 놀라는 건가? 찔러 보니 사람이 아니던가? 아니면…… 이미 시신인가?”
죽었어야 했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리자 흑의의 인영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언제 꿰뚫린 것인지 인영의 심장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무구를 심어 놓았기에 무슨 수를 쓰나 했더니 겨우 자객인가?”
진심으로 실망했다는 듯 태휼이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자객을 보았다. 그의 조롱 어린 시선에 자객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자객들의 살기를 받아들이며 태휼이 코웃음을 쳤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절대적인 힘을 얻었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귀족들은 자신들을 위협하고 압박하는 태휼의 죽음을 원한다. 겉으로는 몸을 굽히고 머리를 숙였어도, 끊임없이 태휼의 목숨을 거둘 자객을 보내왔다.
“누가 시켰는지 물어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이곳까지 왔으니 짐의 유희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른 자객의 가슴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자객들의 눈이 태휼의 손을 살폈지만, 그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무영검. 기를 검처럼 사용하는 태휼만이 할 수 있는 검술이었다. 검에 기를 넣어 휘두르는 이들은 드물게 있었지만, 그처럼 기를 검처럼 활용할 수 있는 무인은 없었다. 그저 서 있을 뿐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검이 자객의 얼굴과 목을 얇게 베어 냈다. 듣기만 했을 뿐, 실제로 보지 못했던 검이 목숨을 위협하자 자객의 대열이 무너져 내렸다.
“사냥을 시작해라.”
태휼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나타난 흑영대가 자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흑영대의 등장에 자객의 대열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태휼을 죽이려던 계획은 완전히 틀어진 자객이 자리를 빠져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흑영대와 자객들이 한데 엉켜서 싸우는 모습을 태연히 바라보는 태휼을 향해 무진이 고개를 숙였다.
“몰이를 시작하겠습니다.”
태휼의 말 없는 허락에 다시 고개를 숙인 그가 흑영대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일방적인 학살의 끝, 필사적으로 움직인 다섯의 자객이 방 밖으로 도망쳤다. 몰이를 위해 그들을 일부러 놓아준 흑영대가 태휼을 향해 몸을 숙였다.
“누구에게 가는지 확인하는 대로 죽여라.”
“네. 폐하.”
흑영대가 사라지고, 무진과 태휼만이 남자 내시감이 둘에게 다가왔다.
“폐하. 성안궁에 침소를 마련하겠습니다.”
내시감의 말에 태휼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려 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생겨났다.
궁금한 것을 알 수 있는 기회.
알아서 굴러들어 온 미끼를 그냥 버리기에는 뭔가 아쉬웠다.
三章. 흐르다
태화전으로 들어오는 제연궁의 담벼락에서 내관 몇이 부지런히 땅을 파고 있었다. 내관들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어느 정도 깊게 땅을 파내던 내관이 주저앉았다.
내관의 반응에 자신도 모르게 다가갔던 궁녀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변의 반응이 수선스러워지자 멀리서 지켜보던 태휼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폐하. 소인이 가져오겠습니다.”
땅을 파는 순간부터 느껴졌던 비릿한 피 냄새. 굳이 저 밑에 무엇이 있는지 묻지 않아도 너무나도 뻔했다. 저주를 내리기 위한 무구(巫具), 황제로서 힘을 쟁취하고 권력을 얻었어도 그의 죽음을 원하는 이들은 호연에 너무나도 많았다.
내시감 대신 따라 나온 유 내관이 앞서 나가려는 것을 태휼이 막았다.
“위랑이 가져오라.”
“허나 폐하. 저 무구는…….”
곁눈질로 무구를 본 유 내관이 태휼을 말리려 했지만, 이미 명을 받은 수련은 제연궁의 계단을 조용히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 수련의 모습을 태휼이 묘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끔찍한 무구의 형상에 다들 눈살을 찌푸려도, 수련의 눈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도리어 벌벌 떠는 궁인과 내관들 사이로 옮기는 걸음이 평소와 똑같이 거침없었다.
‘감정이 없는 건가?’
고민하던 태휼이 매서운 눈으로 수련을 지켜보았다. 거의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구를 향해 가는 수련 또한 옅게 떨고 있었다. 사내조차도 몸을 사리는 무구를 보며 참고 있는 건 단순히 성격이나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상환은 왜 널 가두었을까?’
단순히 호기심으로 데리고 온 여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이들과는 다른 모습을 하나씩 보이고 있었다.
태휼이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수련이 땅에 있는 무구를 꺼내 들었다.
“까악!”
단단히 싸맨 짚단 인형에 황제를 상징하는 곤룡포가 입혀져 있었다. 황금의 곤룡포 위로 사람인지 동물인지 알 수 없는 살점이 인형 곳곳에 묻혀져 있었다. 그 주변을 엉킨 머리카락과 피가 흥건히 감싸고 있었다.
무구의 끔찍한 모습에 궁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거슬리는지 내관들 또한 눈을 찌푸렸다.
“쟁반을 주시겠습니까?”
수련의 물음에 굳어 있던 내관이 움찔 몸을 떨었다. 내관이 쟁반을 내밀자 수련이 들고 있던 무구를 올렸다. 내관에게서 쟁반을 받아 든 수련이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태휼의 앞으로 걸어갔다.
무구를 꺼내고, 쟁반에 받아 올 때까지 태휼의 눈이 한시도 수련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의 살점일지도 모르는 것을 잘도 가져왔구나.”
태휼의 말에 수련의 미간이 딱딱하게 굳었다. 징그럽고 구역질이 나는 것을 가려오라는 명령 때문에 간신히 가져왔건만, 잘했다는 말을 해도 모자를 판에 그는 수련을 약 올리듯 조롱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가져오라 명하지 않으셨습니까?”
조용한 말 안에 교묘히 드러나는 투정에 태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생겨났다. 조금씩 적응이 되어 가는 것인지, 아니면 몇 달을 내내 긴장 속에 있어서인지 꼭꼭 숨겨져 있던 수련의 본심이 종종 입 밖으로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다른 이가 그랬다면 불쾌하여 화를 냈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투정은 생각보다도 싫지 않았다.
“네 이년! 어찌 폐하의 앞에서 그리 입을 놀리는 것이냐!”
처음 무구를 가져오겠다 했던 유 내관이 수련을 향해 눈을 치켜세웠다. 최근 최측근에서 황제를 모시는 그들보다도 더 가까이에 있는 위랑이라는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내시감은 일시적이니 넘기라고 했지만, 여인 주제에 내관처럼 황제를 모시는 그녀가 날이 갈수록 눈에 거슬리던 참이었다.
“폐하를 욕보이는 무구니라! 가져오라 명해서 가져왔다는 말하는 본새가…….”
“그만하라.”
“폐하!”
유 내관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수련을 보는 태휼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워 보였다. 천천히 계단으로 내려온 태휼이 수련의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위랑은 어찌 생각하느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수련이 태휼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했다.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둘의 간격은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멀었다. 당장에라도 그녀의 목을 거둘 것 같은 태휼을 보며 숨을 삼켰다.
살아남아서 이곳을 나가야 한다.
가족과 함께하는 자유로운 미래. 그것만이 수련의 전부였다. 잠깐의 울컥에 본심을 보이다니 실수였다. 표정을 가리듯 수련이 고개를 숙였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폐하.”
“이 무구가 짐의 목숨을 거둘 수 있을 거라 믿느냔 말이다.”
물음을 하는 황제의 의도가 무엇일까? 시선을 마주하고 머리를 굴렸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서 잘못 답을 하면 죽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가족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는 말에 태휼의 미간이 작게 꿈틀댔다. 하지만 수련의 대답은 끝이 아니었다.
“다만 무구 따위가 폐하의 심기를 거스를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수련의 대답에 태휼의 눈이 커졌다. 잠시 후, 태휼이 몸을 숙였다.
“크크큭.”
“폐, 폐하.”
놀란 유 내관이 곁으로 다가온 순간, 태휼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무엇이 그토록 재미난지 한참을 웃음을 터트린 황제가 놀란 유 내관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너보다는 위랑이 나은 것 같구나. 크하하하핫.”
“폐, 폐하!”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주변에서 보고 있었지만, 태휼은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몸을 숙이고 자신을 낮추고 있어도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숙이기에 또 몸을 빼려는가 싶더니만 생각지도 못한 한마디가 그를 완전히 흔들어 댔다.
생각보다도 재미났다. 그의 본심을 들으면 수련은 기겁할지도 몰랐지만, 태휼은 그녀가 진심으로 재미있었다.
“겨우 이딴 걸로 짐을 죽이려는 이들이 어리석을 뿐이지. 겨우 동물의 피와 살점인 뿐인 것으로 산 사람을 어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
“이건 묻은 자에게는 혹시라도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였을 텐데. 아쉽구나. 쓸데없는 기대가 될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앞으로 일어날 일의 포석일지도 모르지.
태휼이 재미난 듯 입꼬리를 올렸다. 꼬리만 잡고 끝나는 사냥은 재미없다. 자신을 미끼로 내걸더라도 한 번에 전부를 움켜쥐는 것이 사냥의 묘미였다.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자 그를 살피듯 수련이 바라보았다. 무구를 보던 태휼의 입가에 옅은 살기가 감돌았다. 어차피 뜯지 않으면 뜯기는 곳이 황궁이었다.
무구를 보던 황제의 눈이 수련을 노려보던 유 내관에게로 향하였다.
“네가 직접 치우거라.”
“네?”
“짐을 그토록 귀히 여겨 주니 무구를 치우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으냐?”
태휼의 말에 유 내관이 말을 삼켰다. 무구를 꺼내 온다는 말을 했지만, 실제로는 궁인이 꺼낸 것을 그가 가져오는 것이었다. 뭐라 반박할 수는 없었지만, 최하위 궁인도 아니고 곁에서 직접 황제를 모시는 그에게 무구를 처리하라고 하다니 선뜻하겠다며 답을 할 수 없었다.
하물며 무구는 사악한 기운을 상대에게 그대로 보내는 것이었다. 자칫 잘못 치우면 그 살기가 자신에게 향할 수 있었다.
“짐을 향한 저주가 너에게 향할 것 같으냐?”
“아, 아닙니다. 폐하. 소, 소인이…….”
“소녀가 거둔 것이니 소녀가 직접 없애겠습니다. 어찌 유 내관님의 손을 더럽히겠습니까? 천한 소녀가 하겠습니다.”
유 내관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챈 수련이 앞서 나왔다. 그녀의 반응에 유 내관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태휼이 그를 보며 실소를 흘렸다.
“유 내관. 계집에게 할 일을 떠넘기고는 마음이 편한 것이냐?”
“폐, 폐하! 어찌! 아니옵니다.”
쟁반을 빼앗다시피 받아 든 유 내관이 원망 어린 눈으로 수련을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에 수련이 굳은 안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눈치를 보며 날을 세우다가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천하다는 말로 몸을 숙였다. 다시 본모습을 숨겨 버리는 수련의 모습에 태휼의 눈이 굳었다. 꽁꽁 숨어 있는 수련의 본모습을 보고 싶다. 피가 흥건히 있는 무구가 누구의 짓인지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곁에 있는 위랑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는 전부 보고 싶었다.
“위랑은 날 따라라.”
태휼이 몸을 돌리자, 궁녀가 건넨 천으로 피를 닦은 수련이 뒤를 따랐다. 둘이 사라진 자리, 유 내관의 눈이 오랫동안 수련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깊은 어둠을 타 제연궁의 담을 넘는 이들의 움직임이 날렵하였다.
궁의 곳곳에 황제를 지키기 위한 병사와 호위들이 지천에 깔려 있었지만, 상관없다는 듯 그들은 은밀하고 신속하였다. 때로 그들을 발견한 이들이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입 밖으로 터지기도 전에 날아드는 암기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아홉 개의 관문을 뚫고 드디어 도착한 태화전의 앞에서 서로를 보며 눈짓을 주고받았다.
어두운 밤보다도 더 짙은 흑의를 입은 이들이 태화전을 향해 움직였다.
“자객이다!”
목이 꿰뚫리기 직전, 내관의 고함에 태화전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우리 목적은 황제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들이 태화전 안으로 거침없이 진입하였다. 무기를 든 호위들이 태화전의 곳곳에서 나왔지만 그들의 무기는 주저도 없이 목숨을 거둬들였다. 쓰러진 자의 몸에서 흐르는 비릿한 피 냄새가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자객을 막아야 한다는 호위들의 고함이 곳곳에 울려 퍼질 즈음, 흑의를 입은 이들이 목적한 곳에 도착하였다.
앞을 막는 내관의 목을 벤 그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등을 돌리고 잠이 든 황제의 모습을 확인한 흑의의 인영들이 들고 있던 무기를 들었다.
“개인적인 원한은 없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만 죽으시오!”
말을 끝낸 이가 일어나지 않는 황제를 향해 검을 찔렀다. 흑의 인영의 검이 정확히 황제의 목을 꿰뚫었지만 황제는 미동조차 없었다.
냉정함을 유지하던 흑의 인영이 무너진 것도 그때였다.
“설마…….”
찌른 황제의 몸을 발로 뒤집었다.
딱딱하게 굳은 몸, 검으로 찔렀음에도 흐르지 않는 피.
“왜 그리 놀라는 건가? 찔러 보니 사람이 아니던가? 아니면…… 이미 시신인가?”
죽었어야 했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리자 흑의의 인영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언제 꿰뚫린 것인지 인영의 심장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무구를 심어 놓았기에 무슨 수를 쓰나 했더니 겨우 자객인가?”
진심으로 실망했다는 듯 태휼이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자객을 보았다. 그의 조롱 어린 시선에 자객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자객들의 살기를 받아들이며 태휼이 코웃음을 쳤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절대적인 힘을 얻었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귀족들은 자신들을 위협하고 압박하는 태휼의 죽음을 원한다. 겉으로는 몸을 굽히고 머리를 숙였어도, 끊임없이 태휼의 목숨을 거둘 자객을 보내왔다.
“누가 시켰는지 물어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이곳까지 왔으니 짐의 유희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른 자객의 가슴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자객들의 눈이 태휼의 손을 살폈지만, 그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무영검. 기를 검처럼 사용하는 태휼만이 할 수 있는 검술이었다. 검에 기를 넣어 휘두르는 이들은 드물게 있었지만, 그처럼 기를 검처럼 활용할 수 있는 무인은 없었다. 그저 서 있을 뿐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검이 자객의 얼굴과 목을 얇게 베어 냈다. 듣기만 했을 뿐, 실제로 보지 못했던 검이 목숨을 위협하자 자객의 대열이 무너져 내렸다.
“사냥을 시작해라.”
태휼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나타난 흑영대가 자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흑영대의 등장에 자객의 대열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태휼을 죽이려던 계획은 완전히 틀어진 자객이 자리를 빠져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흑영대와 자객들이 한데 엉켜서 싸우는 모습을 태연히 바라보는 태휼을 향해 무진이 고개를 숙였다.
“몰이를 시작하겠습니다.”
태휼의 말 없는 허락에 다시 고개를 숙인 그가 흑영대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일방적인 학살의 끝, 필사적으로 움직인 다섯의 자객이 방 밖으로 도망쳤다. 몰이를 위해 그들을 일부러 놓아준 흑영대가 태휼을 향해 몸을 숙였다.
“누구에게 가는지 확인하는 대로 죽여라.”
“네. 폐하.”
흑영대가 사라지고, 무진과 태휼만이 남자 내시감이 둘에게 다가왔다.
“폐하. 성안궁에 침소를 마련하겠습니다.”
내시감의 말에 태휼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려 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생겨났다.
궁금한 것을 알 수 있는 기회.
알아서 굴러들어 온 미끼를 그냥 버리기에는 뭔가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