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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무진아.”
“예. 폐하.”
“흑영대에게 미끼 하나는 황궁에 놔두라고 하여라.”
생각지 못한 명령에 무진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목숨을 거두러 온 자객을 하나 살려 놓으라는 명령은 지금까지 전혀 들어 보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반박하는 대신 무진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흑영대의 실력이 출중한들 태휼을 위협할 수 있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선천적인 재능만큼이나 노력으로 검의 극강까지 이룬 그를 이길 존재는 없었다.
고개를 숙인 무진이 사라지자 태휼의 눈이 이번에는 옆에 있는 내시감에게 향하였다. 무진의 눈만큼이나 커진 내시감의 눈이 오랫동안 태휼을 향하였다. 하지만 내시감의 행동 또한 무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홀로 남은 자리. 태휼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오랫동안 감돌았다.

*


“좀 더 궁에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한비의 궁에서 함께 나오던 어린 궁녀가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 궁녀가 들고 있던 짐을 나눠 들고 걸어가던 수련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비 마마께서 부르셔서 온 것뿐인걸요. 이제 처소로 돌아가야죠.”
영화궁 후원에서의 일이 있은 후, 한비는 종종 자신의 궁으로 수련을 불렀다. 황궁의 사정에 어두운 위랑을 위해 한비가 직접 여인으로서의 몸가짐과 예의를 가르친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일주일에 세 번, 그녀에게서 황제의 일과나 누구를 만나는지 고하는 자리였다.
숨겨야 하는 부분에서는 교묘히 본질을 숨겼고, 드러내도 상관없는 부분은 가감 없이 고하였다. 적당한 정보를 흘리면 언제나 그렇듯 한비는 자신의 장신구 중 쓸모없는 것들 그녀에게 던졌다.
한비에게는 쓸모없는 장신구였지만, 수련에게는 황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요긴하게 쓰이는 것이었다.
“위랑께서는 대단하신 거 같아요. 폐하의 곁에서 시중을 드시는 것도 대단하신데 일주일에 몇 번씩 한비 마마께서 직접 부르시잖아요.”
어린 궁녀의 부러움 섞인 말에 수련의 무안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어려 비의 시중을 들기보다는 주변에서 상궁을 보조하는 궁녀였다. 황제나 비들 사이를 오고 가는 수련을 저렇게 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수련은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끌려다니는 지금의 생활이 피곤하다 못해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을 겉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아직 부족해요. 그리고 저보다는 항아님께서 더 잘하실 거예요.”
“절대 아니에요! 전 아직 멀었는걸요.”
빈말이었지만, 어린 궁녀는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었다. 누가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은 궁녀를 보며 수련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저런 미소를 지으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황궁에 온 뒤로 수련의 삶은 보이지 않는 가시밭길이었다. 편안한 자리, 부족함이 없는 생활이었지만 그녀의 삶은 철저히 감시당하고 시험당하는 상황이었다.
“위랑께서도 이번 보름에 나가시면 좋을 텐데요. 그래도 폐하께서 즉위하신 후, 보름에 한 번은 마음껏 밖을 나갈 수도 있고 쉴 수도 있거든요.”
피에 굶주린 폭군, 약간의 실수도 목숨으로 거두는 사내.
하지만 그런 악명의 반대편에서, 태휼은 다른 황제가 하지 못했던 일을 이루어 냈다. 그 전에는 어느 서열 이상의 상궁이나 내관이 되지 않고서는 황궁 밖을 나가거나 쉬는 일은 꿈조차 꾸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을 위해 많은 일을 해 주는 그들에게 태휼은 약간의 휴식과 자유를 허락하였다.
기분에 따라 목숨을 거두는 듯 보여도, 거리를 두고 보면 사실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잘못된 관례를 고쳐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태휼의 그러한 점을 아는 이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진심으로 그를 존경하고 따르고 있었다.
“저는 어려울 것 같아요.”
수련의 거절 아닌 거절에 어린 궁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처음에는 말수가 없는 위랑이 무서웠다. 하지만 같은 또래의 궁녀를 제외하고는 관심조차 가져 주지 않는 어린 그녀에게 먼저 다가온 사람이 바로 수련이였다. 한비의 궁을 방문할 때면 으레 그녀의 일을 도와주거나 아직 어리니 밤길은 위험하다며 종종 처소까지 데려다주기도 하였다. 수련은 별생각 없이 하는 일일지 몰라도 어린 궁녀는 그녀의 방문을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위랑하고 같이 다니면 훨씬 좋을 텐데요.”
“허락받기가 어려울 거예요. 신경 쓰지 마시고 좋은 거 많이 보고 오세요.”
아쉽기는 했지만, 황궁에서 위랑이라는 존재가 다른 이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궁녀 또한 알고 있었다. 서운한 기색을 감추며 궁녀가 미소를 지었다.
“대신 밖에서 부탁할 일이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위랑이 부탁하시는 일은 얼마든지 해 드릴게요!”
궁녀의 말에 수련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 그녀의 모습에서 동생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먼저 다가가 말을 걸지도 않았을 것이다. 밖을 나갈 수 있는 그녀에게 부탁할 수 있다면 수련이 할 부탁은 하나뿐이었다. 그렇지만 앞의 궁녀를 생각해서라도 절대 하면 안 되는 부탁이었다.
한비의 궁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태휼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을 봤을 때, 아직 그가 정한 선을 수련이 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만약 앞의 궁녀를 통해 가족에게 서신을 보내게 된다면, 태휼은 선을 넘은 수련도, 수련의 부탁을 들어준 궁녀도 절대 살려 주지 않을 것이다.
“잠시만요.”
“위랑. 무슨 일이세요?”
궁녀를 보던 수련이 고개를 들었다. 날카롭게 변한 시선이 허공을 매섭게 노려봤다. 상념에 잡혀 있던 수련을 단번에 현실로 돌아오게 할 살기였다. 하물며 살기와 함께 맡아지는 것은 비릿한 혈향이었다.
‘황제?’
부정하듯 수련이 고개를 저었다. 피를 흩뿌리고 다녀도, 정작 태휼에게 혈향은 나지 않았다. 하물며 이렇게 흐트러진 기척을 내는 사내도 아니었다.
“까악!”
궁녀의 팔을 붙잡은 수련이 자신의 등 뒤로 그녀를 숨겼다.
수련과 궁녀의 앞에 피범벅인 자객이 곤두박질쳤다.
“위, 위랑!”
궁녀가 다급히 수련을 불렀지만, 그녀의 눈은 앞의 자객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급소를 피하기는 했지만, 온몸에서 흐르는 피가 심상치 않았다. 이 시간에 황궁에서 이러고 있을 사람이라면 자객뿐이었다. 저런 모습으로 허둥대고 있다면 암살에 실패하고 도주 중이라는 뜻이었다.
“망할. 거의 다 도망쳤는데!”
숨을 고르듯 주저앉아 있던 자객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자객의 눈이 수련과 뒤에 숨어 있는 궁녀를 노려보았다. 간신히 따라오는 이들을 피해 여기까지 온 터였다.
몸을 일으킨 자객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었다. 어차피 상대는 힘없는 궁녀 둘. 순식간에 목숨을 거두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자객이 움직이려 하자 수련이 궁녀에게 낮게 속삭였다.
“내가 움직이면 한비 마마의 궁으로 뛰세요.”
안 된다며 궁녀가 고개를 젓는 순간, 자객이 둘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가요!”
궁녀를 밀어 낸 수련이 달려오는 자객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목을 베려는 단검을 아슬아슬한 차이로 피해 낸 수련의 손이 자객의 손목을 후려쳤다. 생각지 못한 반격에 검을 놓칠 뻔했던 자객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의 주먹을 피하고자 수련이 몸을 날리고, 동시에 그녀에게서 자객 또한 몇 걸음 물러났다.
“넌 뭐지?”
자객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수련의 눈이 주변을 살폈다. 자객이 여기까지 도망 왔건만 따라오는 기척도, 병사의 소리도 없었다. 재수 없게 맞닥뜨렸다는 것일까?
피할 만큼 강한 상대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일대일이라면 수련이 밀릴 일도 없었다.
다만 그녀가 싸우는 모습을 누군가가 보게 된다면, 그게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일이 생겨 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걱정해야 할 일이었다.
“조용히 사라진다면 나도 더는 움직이지 않겠소.”
수련의 말에 자객이 코웃음을 쳤다. 세상에 어느 누가 그 말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여기서 앞의 계집을 죽이고 몸을 숨기는 것이 훨씬 빨랐다. 단검에 힘을 준 자객이 다시 수련과의 거리를 좁혔다.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이라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심장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을 미끄러지듯 피한 수련이 자객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옆을 파고드는 수련의 행동에 자객의 단검을 바꾸었다. 온몸의 상처에서 피가 흘렀지만, 자객의 움직임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망할!”
시간이 흐를수록 자객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지만, 수련은 숨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가 퍼붓는 공격을 피하는 움직임은 물처럼 유연했고, 그의 급소를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은 매서운 바람이었다.
여인이었기에 힘은 부족했지만, 수준은 좀 전에 싸운 흑영대와 동급, 어쩌면 그 이상의 실력이었다. 지친 자객이 쥐어짜듯 찌르는 검을 피한 수련이 손바닥으로 어깨를 힘껏 후려쳤다.
“크흡.”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고, 어깨를 부여잡은 자객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숨을 내쉰 수련이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우려 하였다.
“저기다! 저기에 있다!”
병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수련과 자객의 눈이 동시에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향하였다. 수련이 방심한 찰나의 순간, 품에서 암기를 꺼낸 자객이 혼신의 힘으로 그녀에게 던졌다. 암기를 피하기 위해 움직이려던 수련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자리에서 멈추었다.
“윽!”
암기가 스치고 간 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비명을 참으며 수련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수련이 자리에 주저앉자 자객이 도주하였다. 하지만 채 열 발자국을 가기도 전에 병사들이 쏘는 화살이 자객의 등을 꿰뚫었다.
“컥!”
“위랑! 괜찮으십니까?”
병사의 물음에 수련이 상처 입은 팔을 감싸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의 눈이 숨이 끊어진 자객을 향하였다.
“태화전에 자객이 들었습니다만 폐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현재 성안궁으로 모셨습니다.”
“아…….”
병사의 답에 수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황제를 누가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병사의 말에 적당히 답을 해 주었지만, 수련의 눈은 자객을 바라볼 뿐이었다.
“위랑! 위랑!”
병사들 틈으로 어린 궁녀가 다급히 다가왔다. 그녀의 모습에 수련이 굳어 있던 얼굴을 풀었다.
“위랑! 피가! 검에 베이신 거예요?”
“항아님. 괜찮아요. 반항하다가 조금 다친 거예요.”
“조금이라뇨! 피가 완전 많이 흐르는 걸요! 상처 치료해 드릴게요!”
“제가 하면 돼요.”
“위랑!”
“밤이 늦었으니 처소로 돌아가세요. 절대 혼자 가지 마시고요.”
“하지만!”
“이러다가 한비 마마께서 아시면 한 소리 하실 수 있어요.”
한비라는 말에 궁녀가 굳게 입을 다물었다. 한비 소속의 궁녀가 얌전히 처소에 있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자객을 만난 것을 안다면 한비의 직속 상궁인 김 상궁이 크게 그녀를 매질할 것이었다.
겁먹은 궁녀가 말이 없자 수련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치료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서 돌아가세요.”
수련의 거듭된 설득에 궁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럼 내일 아침에 꼭 올게요. 꼭 상처 치료하셔야 해요.”
두 번의 다짐을 받은 다음에나 궁녀가 돌아가고,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나 수련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혼신의 힘으로 던져서인지 암기에 다친 상처가 제법 깊었다.
이대로 두면 상처가 더 심해질 터, 품에서 손수건을 꺼낸 수련이 피를 막았다.
“위랑. 내의녀를 부르겠습니다.”
다가온 병사를 향해 수련이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의 상처는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상처를 치료하고 피곤한 몸을 쉬고 싶을 뿐이었다. 거듭 말리는 병사를 떼어 낸 수련이 자신의 처소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