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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넌 나와 거래를 하는 거다.’
수련이 열 살이 되던 해에 여상환은 민 부인에게서 그녀를 억지로 끌고 왔다. 관심은커녕 최소한의 지원밖에 해 주지 않았던 그가 딸인 수련에게 처음 한 소리는 미안하다는 말도 아니고, 사라지라는 말도 아닌 거래를 하자는 것이었다.
‘네 어미와 네가 살 수 있게 도와주겠다. 대신 오늘부터 넌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 하라는 대로만 따르면 죽이지는 않을 테니 그 걱정은 하지 마라.’
무슨 연유로 그녀에게 그런 제안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무슨 목적이냐고 묻기에는 수련은 어렸고, 빈곤한 삶은 너무나도 힘들었으며, 의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겠다는 수련의 대답에 상황은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왜 배워야 하는지, 어디에 도움이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머릿속을 채우다 못해 욱여넣듯이 가르쳤고 제대로 배워 내지 못하면 끔찍한 체벌이 이어졌다.
“위랑!”
피가 흥건한 수련의 모습에 시중을 드는 궁녀가 한걸음에 그녀에게 다가왔다. 궁녀의 창백한 표정에 수련이 괜찮다는 듯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혼자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기 위랑…… 그게…….”
“신경 쓰지 마시고 쉬세요.”
길고 긴 저녁이 오늘따라 지치고 힘들었다. 무언가 더 말하려는 궁녀를 말리며 수련이 계단을 올랐다. 방으로 걷는 그녀의 걸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무거웠다.
차라리 체벌을 받는 사람이 수련 본인이었다면 나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여상환에게 맞는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인 민 부인이었다. 목숨을 잃을 각오로 한 반항, 그 대가로 민 부인은 여상환이 휘두른 흉기에 눈을 잃었다.
“후우.”
피곤한 숨을 내쉬며 수련이 문을 열었다.
그 상태 그대로 그녀의 몸이 굳었다. 믿을 수 없는 눈이 방에 있는 사내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아!”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군.”
“성안궁에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평소였다면 몸부터 숙였을 수련이 놀란 눈으로 보고만 있자 태휼이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수련의 침상에 턱을 괴고 옆으로 누운 그의 눈이 다친 팔을 향하였다.
“다쳤군.”
태휼의 시선을 피하듯 수련이 고개를 숙였다.
“밤길이 어둡다 보니 넘어졌습니다. 폐하.”
“어떻게 넘어지면 칼에 베인 것처럼 상처가 날 수 있지?”
자객과의 싸움을 본 것일까? 손수건으로 가리고 있음에도 이미 모든 것을 본 사람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입 안이 바짝 말랐지만, 이대로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성안궁으로 모시었다 들었습니다.”
“준비되지도 않은 궁 따위 편할 리가 있나?”
“누추한 소녀의 침소에 어찌 폐하를 모시겠습니까? 내시감께 다녀오겠습니다.”
“이리 와라.”
몸을 빼려는 수련이 태휼의 한마디에 자리에서 멈추었다.
천근만근 몸이 무거웠다. 다치지만 않았다면 따뜻한 자리에 그냥 쓰러지고 싶은 하루였다.
그런 상황에서 태휼의 방문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내시감 영감께…….”
“이리 와.”
“…….”
“가까이 오라 했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여 버린 것처럼 몸이 굳어 버렸다. 분명 태휼과 그녀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음에도 도망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결국 방 안으로 들어온 수련이 태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불편한 팔을 감싼 수련을 보던 태휼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치료 안 하나?”
“네?”
그의 물음에 그제야 상처가 떠오른 수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태휼의 앞에 있으면 긴장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흥건히 젖은 손수건을 보던 수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치료하러 다녀오겠습니다.”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궁녀에게 수련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는 태휼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 저런 모습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수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모든 것을 본 사람처럼, 그녀가 숨기고자 했던 전부를 알아차린 사람처럼 짓는 미소가 소름 끼치게 싫었다.
“어찌 폐하 앞에서 험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처소도 없어 여기까지 왔는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나?”
“잠시면 됩니다. 상처를 치료하고 오겠습니다.”
“위랑.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어떻게든 자리를 피하려는 수련을 태휼이 붙잡았다. 상처의 통증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결국 도망가기를 포기한 수련이 문갑에서 나무함을 꺼내었다. 잠시 고민하듯 태휼을 바라보던 수련이 한숨을 쉬며 옷고름을 풀었다.
사락사락.
피에 젖은 저고리가 바닥에 흩어지고, 땀에 젖은 속적삼까지 벗은 수련이 몸을 떨었다. 가슴을 가리는 가장 얇은 속의만을 놔둔 채, 옷을 벗은 수련이 몸을 돌렸다.
옅은 불빛에 비치는 여인의 곡선이, 부끄러움에 붉게 달아오른 매끄러운 피부가 사내의 눈을 빼앗을 만큼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수련의 반나신을 보는 태휼의 눈은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베인 상처에 지혈초를 붙이고 상처를 치료하는 수련의 손놀림이 익숙하였다. 처음에 데려올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몸의 흉터가 이제야 왜 생겼는지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수련이 상처를 치료하는 내내 태휼은 도와주지도, 다가가지도 않았다. 그저 팔에 머리를 기댄 채, 그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에게 검과 무술을 가르친 스승은 여상환이 붙여 놓은 이답게 조금의 자비도, 배려도 없었다.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매질을 했고, 설령 검을 다루다가 다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의지할 사람도, 하소연할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철저히 혼자서 해내었다.
“아!”
손이 미끄러지면서 붕대가 바닥을 굴렀다. 암기에 베인 상처 따위 신경 쓸 일도 아니었지만, 문제는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당황한 수련이 반사적으로 태휼을 봤지만,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등이 베일 것처럼 따가운 시선이 괴로웠다. 말만 하면 곁으로 다가올 후궁도, 궁녀도 많은 그가 왜 이곳에서 자신을 이렇게 괴롭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돌아가 달라고 사정할 수도 없는 일, 붕대를 가져온 수련이 치료를 마무리하였다.
“후우.”
유난히 긴 하루가 버거웠다. 문갑에 함을 넣은 수련이 태휼을 향해 몸을 숙였다. 낮보다도 강렬한 그의 눈에 숨조차 내쉬기 힘들었다.
“성안궁에 준비가 끝났는지 보고 오겠습니다.”
“이미 짐이 성안궁에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니 굳이 알아볼 필요가 없다. 가까이 와라.”
공식적으로는 태휼이 성안궁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소리였다. 대수롭지 않게 나오는 말이었지만 수련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수련을 여인으로 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저 지나가다 마음 가는 대로 꺾는 꽃으로는 볼 수 있다.
“가까이 오라 하였다.”
“싫습니다.”
수련의 거부에 태휼이 미간을 좁혔다. 태휼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수련이 몸을 뒤로 뺐다. 그의 명을 거부하면 죽을 수도 있었지만, 황제라는 이유로 그에게 안길 생각은 없었다.
누군가의 여인 따위 되고 싶은 생각도, 바란 적도 없었다.
그녀의 삶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일 뿐이었고, 할 수 있는 최선은 가족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언젠가는 사내와 연이 닿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폐하의 여인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성안궁으로 돌아가십시오.”
완강한 수련을 보던 태휼이 피식 실소를 지었다. 저 작은 머리가 누구보다도 잘 돌아가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몇 배는 앞서 나갈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신경 쓰였을 뿐이었다. 다른 이들이야 그의 곁에서 끊임없이 속살거렸지만, 수련은 얌전히 있으니 불러들였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저런 반응이라니 한번 터진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크큭.”
황궁의 다른 계집이라면 황제가 오라고 하기 전에 먼저 다가와 몸부터 들이댔을 것이다.
황은 한 번이면 부귀영화가 보장되는 황궁에서 태휼은 어떻게든 잡아먹고 싶은 종마일 뿐이었다.
상상조차 못한 거부였지만, 싫기는커녕 웃음이 터져 나왔다. 충동적으로 데려온 수련이였지만, 나날이 그를 재미나게 하였다. 수련의 침상에서 태휼이 몸을 굽혔다.
“폐하?”
몸을 숙인 태휼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자 놀란 수련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만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웃음을 참고 있는 그의 모습에 수련이 눈을 좁혔다.
“하하하.”
자신의 행동이 그의 무엇을 건드렸는지는 몰라도 그녀를 비웃는 것 같은 웃음이 듣기 싫었다. 목숨을 걸고 다가왔건만, 지금 그는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진 수련이 몸을 뒤로 빼려는 순간 그의 손이 가는 손목을 붙잡았다.
“가까이 오라고 하지 않았나?”
무안함에 붉어진 얼굴이 원망스러운 듯 태휼을 노려보았다.
검지만 맑은 눈동자가 그를 향하는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묵직한 무언가가 차가운 심장을 쿵 후려쳤다. 찰나에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처음으로 느끼는 기분이 짧게나마 그를 완전히 흔들어 댔다.
‘음?’
처음 느껴 보는 감정에 태휼이 눈을 좁혔다.
분명 특별하게 느껴지는 여인은 아니다. 도리어 여인이기보다는 그저 잠시의 유희를 즐길 만한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폐하!”
“더 반항하면 진짜 안아 버릴 것이다.”
안을 생각 따위 전혀 없었지만 그의 생각을 수련이 알 리 없었다. 그에게서 자꾸 도망치려는 수련이 마음에 안 들 뿐이었다. 자신의 머리맡으로 수련을 데려온 그가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약 냄새 너머로 느껴지던 체향이 무릎베개를 하자 더 진하게 코끝을 간질였다. 수련의 체향을 맡고 있으면 제멋대로 휘몰아치던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저 어린 계집의 무릎이었지만, 긴장으로 팽팽해 있던 그의 신경을 천천히 누그러뜨렸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편안함에 몸을 맡기며 태휼이 그녀의 다리에 얼굴을 묻었다.
*
“네 이야기를 해 보아라.”
무릎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수련이 허공을 보던 눈을 내렸다. 자는 줄 알고 가만히 있었건만, 그게 아니었는지 가라앉은 눈이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녀에 대해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보는 것인지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왜 궁금하시냐는 물음 대신 수련이 생각하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지 않겠다며 반항해 봤자 통하지도 않는 상대, 생각을 정리한 수련이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열 살이 될 때까지는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몰랐습니다. 지원을 해 주시기는 했지만 얼굴을 보여 주지는 않았으니까요. 처음 만난 아버지는…… 모르겠습니다. 좋은 분은 확실히 아니셨지만, 그런데도 아버지가 붙여 준 스승에게서 많은 걸 배웠으니까요.”
“…….”
어차피 인정받지 못한 자식이었다. 하물며 사내아이도 아닌 계집아이였으니 목숨을 없앨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상환은 그녀를 죽이는 대신 가족을 인질로 삼았다. 무슨 목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그가 원하는 만큼 해내면 필요한 것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존경했다는 건가?”
“그럴 리가요. 그저 지나가는 몇몇 모습에서는 배울 점이 있다고만 생각했을 뿐입니다. 아버지로서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존경이기보다는 증오에 더 가까웠습니다. 물론 그가 절 생각한 것도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평소였다면 이런 이야기 따위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태휼은 침소에서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고, 낯설 정도로 편안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음에도 물어보는 그가 이상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싫다면서 왜 하라는 대로 한 건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어머니와 동생이 다쳤습니다. 아버지는…… 그 사람은 어떤 식으로 사람을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지요. 어머니의 눈도 그렇게 잃었습니다.”
“그래서 여상환을 짐에게 넘긴 건가?”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말을 잇던 수련이 태휼을 바라보았다.
태휼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대로 말을 계속하다가 그녀의 속마음을 들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아는 태휼이라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허락을 받고 밖을 나갈 때도, 쉬어도 좋다는 말에 어머니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어도, 동생과 그저 대화를 나누는 것뿐임에도 감시당하고, 허락을 받아야 하고, 오해를 풀어야 하는 상황을 더는 참고 싶지 않았습니다.”
“약자는 강자가 원하는 대로 당하고 참아야 하는 것이 순리 아닌가?”
태휼의 물음에 수련의 미간을 모았다. 그저 묻고 답하는 것임에도 울화가 치밀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약자인 수련은 강자인 여상환에게 평생 종속당하고 복종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었다.
그게 태휼이 생각하는 힘의 논리라면 수련은 따르고 싶지 않았다.
‘넌 나와 거래를 하는 거다.’
수련이 열 살이 되던 해에 여상환은 민 부인에게서 그녀를 억지로 끌고 왔다. 관심은커녕 최소한의 지원밖에 해 주지 않았던 그가 딸인 수련에게 처음 한 소리는 미안하다는 말도 아니고, 사라지라는 말도 아닌 거래를 하자는 것이었다.
‘네 어미와 네가 살 수 있게 도와주겠다. 대신 오늘부터 넌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 하라는 대로만 따르면 죽이지는 않을 테니 그 걱정은 하지 마라.’
무슨 연유로 그녀에게 그런 제안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무슨 목적이냐고 묻기에는 수련은 어렸고, 빈곤한 삶은 너무나도 힘들었으며, 의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겠다는 수련의 대답에 상황은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왜 배워야 하는지, 어디에 도움이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머릿속을 채우다 못해 욱여넣듯이 가르쳤고 제대로 배워 내지 못하면 끔찍한 체벌이 이어졌다.
“위랑!”
피가 흥건한 수련의 모습에 시중을 드는 궁녀가 한걸음에 그녀에게 다가왔다. 궁녀의 창백한 표정에 수련이 괜찮다는 듯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혼자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기 위랑…… 그게…….”
“신경 쓰지 마시고 쉬세요.”
길고 긴 저녁이 오늘따라 지치고 힘들었다. 무언가 더 말하려는 궁녀를 말리며 수련이 계단을 올랐다. 방으로 걷는 그녀의 걸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무거웠다.
차라리 체벌을 받는 사람이 수련 본인이었다면 나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여상환에게 맞는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인 민 부인이었다. 목숨을 잃을 각오로 한 반항, 그 대가로 민 부인은 여상환이 휘두른 흉기에 눈을 잃었다.
“후우.”
피곤한 숨을 내쉬며 수련이 문을 열었다.
그 상태 그대로 그녀의 몸이 굳었다. 믿을 수 없는 눈이 방에 있는 사내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아!”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군.”
“성안궁에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평소였다면 몸부터 숙였을 수련이 놀란 눈으로 보고만 있자 태휼이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수련의 침상에 턱을 괴고 옆으로 누운 그의 눈이 다친 팔을 향하였다.
“다쳤군.”
태휼의 시선을 피하듯 수련이 고개를 숙였다.
“밤길이 어둡다 보니 넘어졌습니다. 폐하.”
“어떻게 넘어지면 칼에 베인 것처럼 상처가 날 수 있지?”
자객과의 싸움을 본 것일까? 손수건으로 가리고 있음에도 이미 모든 것을 본 사람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입 안이 바짝 말랐지만, 이대로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성안궁으로 모시었다 들었습니다.”
“준비되지도 않은 궁 따위 편할 리가 있나?”
“누추한 소녀의 침소에 어찌 폐하를 모시겠습니까? 내시감께 다녀오겠습니다.”
“이리 와라.”
몸을 빼려는 수련이 태휼의 한마디에 자리에서 멈추었다.
천근만근 몸이 무거웠다. 다치지만 않았다면 따뜻한 자리에 그냥 쓰러지고 싶은 하루였다.
그런 상황에서 태휼의 방문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내시감 영감께…….”
“이리 와.”
“…….”
“가까이 오라 했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여 버린 것처럼 몸이 굳어 버렸다. 분명 태휼과 그녀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음에도 도망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결국 방 안으로 들어온 수련이 태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불편한 팔을 감싼 수련을 보던 태휼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치료 안 하나?”
“네?”
그의 물음에 그제야 상처가 떠오른 수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태휼의 앞에 있으면 긴장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흥건히 젖은 손수건을 보던 수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치료하러 다녀오겠습니다.”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궁녀에게 수련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는 태휼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 저런 모습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수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모든 것을 본 사람처럼, 그녀가 숨기고자 했던 전부를 알아차린 사람처럼 짓는 미소가 소름 끼치게 싫었다.
“어찌 폐하 앞에서 험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처소도 없어 여기까지 왔는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나?”
“잠시면 됩니다. 상처를 치료하고 오겠습니다.”
“위랑.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어떻게든 자리를 피하려는 수련을 태휼이 붙잡았다. 상처의 통증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결국 도망가기를 포기한 수련이 문갑에서 나무함을 꺼내었다. 잠시 고민하듯 태휼을 바라보던 수련이 한숨을 쉬며 옷고름을 풀었다.
사락사락.
피에 젖은 저고리가 바닥에 흩어지고, 땀에 젖은 속적삼까지 벗은 수련이 몸을 떨었다. 가슴을 가리는 가장 얇은 속의만을 놔둔 채, 옷을 벗은 수련이 몸을 돌렸다.
옅은 불빛에 비치는 여인의 곡선이, 부끄러움에 붉게 달아오른 매끄러운 피부가 사내의 눈을 빼앗을 만큼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수련의 반나신을 보는 태휼의 눈은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베인 상처에 지혈초를 붙이고 상처를 치료하는 수련의 손놀림이 익숙하였다. 처음에 데려올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몸의 흉터가 이제야 왜 생겼는지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수련이 상처를 치료하는 내내 태휼은 도와주지도, 다가가지도 않았다. 그저 팔에 머리를 기댄 채, 그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에게 검과 무술을 가르친 스승은 여상환이 붙여 놓은 이답게 조금의 자비도, 배려도 없었다.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매질을 했고, 설령 검을 다루다가 다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의지할 사람도, 하소연할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철저히 혼자서 해내었다.
“아!”
손이 미끄러지면서 붕대가 바닥을 굴렀다. 암기에 베인 상처 따위 신경 쓸 일도 아니었지만, 문제는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당황한 수련이 반사적으로 태휼을 봤지만,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등이 베일 것처럼 따가운 시선이 괴로웠다. 말만 하면 곁으로 다가올 후궁도, 궁녀도 많은 그가 왜 이곳에서 자신을 이렇게 괴롭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돌아가 달라고 사정할 수도 없는 일, 붕대를 가져온 수련이 치료를 마무리하였다.
“후우.”
유난히 긴 하루가 버거웠다. 문갑에 함을 넣은 수련이 태휼을 향해 몸을 숙였다. 낮보다도 강렬한 그의 눈에 숨조차 내쉬기 힘들었다.
“성안궁에 준비가 끝났는지 보고 오겠습니다.”
“이미 짐이 성안궁에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니 굳이 알아볼 필요가 없다. 가까이 와라.”
공식적으로는 태휼이 성안궁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소리였다. 대수롭지 않게 나오는 말이었지만 수련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수련을 여인으로 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저 지나가다 마음 가는 대로 꺾는 꽃으로는 볼 수 있다.
“가까이 오라 하였다.”
“싫습니다.”
수련의 거부에 태휼이 미간을 좁혔다. 태휼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수련이 몸을 뒤로 뺐다. 그의 명을 거부하면 죽을 수도 있었지만, 황제라는 이유로 그에게 안길 생각은 없었다.
누군가의 여인 따위 되고 싶은 생각도, 바란 적도 없었다.
그녀의 삶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일 뿐이었고, 할 수 있는 최선은 가족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언젠가는 사내와 연이 닿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폐하의 여인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성안궁으로 돌아가십시오.”
완강한 수련을 보던 태휼이 피식 실소를 지었다. 저 작은 머리가 누구보다도 잘 돌아가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몇 배는 앞서 나갈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신경 쓰였을 뿐이었다. 다른 이들이야 그의 곁에서 끊임없이 속살거렸지만, 수련은 얌전히 있으니 불러들였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저런 반응이라니 한번 터진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크큭.”
황궁의 다른 계집이라면 황제가 오라고 하기 전에 먼저 다가와 몸부터 들이댔을 것이다.
황은 한 번이면 부귀영화가 보장되는 황궁에서 태휼은 어떻게든 잡아먹고 싶은 종마일 뿐이었다.
상상조차 못한 거부였지만, 싫기는커녕 웃음이 터져 나왔다. 충동적으로 데려온 수련이였지만, 나날이 그를 재미나게 하였다. 수련의 침상에서 태휼이 몸을 굽혔다.
“폐하?”
몸을 숙인 태휼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자 놀란 수련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만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웃음을 참고 있는 그의 모습에 수련이 눈을 좁혔다.
“하하하.”
자신의 행동이 그의 무엇을 건드렸는지는 몰라도 그녀를 비웃는 것 같은 웃음이 듣기 싫었다. 목숨을 걸고 다가왔건만, 지금 그는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진 수련이 몸을 뒤로 빼려는 순간 그의 손이 가는 손목을 붙잡았다.
“가까이 오라고 하지 않았나?”
무안함에 붉어진 얼굴이 원망스러운 듯 태휼을 노려보았다.
검지만 맑은 눈동자가 그를 향하는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묵직한 무언가가 차가운 심장을 쿵 후려쳤다. 찰나에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처음으로 느끼는 기분이 짧게나마 그를 완전히 흔들어 댔다.
‘음?’
처음 느껴 보는 감정에 태휼이 눈을 좁혔다.
분명 특별하게 느껴지는 여인은 아니다. 도리어 여인이기보다는 그저 잠시의 유희를 즐길 만한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폐하!”
“더 반항하면 진짜 안아 버릴 것이다.”
안을 생각 따위 전혀 없었지만 그의 생각을 수련이 알 리 없었다. 그에게서 자꾸 도망치려는 수련이 마음에 안 들 뿐이었다. 자신의 머리맡으로 수련을 데려온 그가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약 냄새 너머로 느껴지던 체향이 무릎베개를 하자 더 진하게 코끝을 간질였다. 수련의 체향을 맡고 있으면 제멋대로 휘몰아치던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저 어린 계집의 무릎이었지만, 긴장으로 팽팽해 있던 그의 신경을 천천히 누그러뜨렸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편안함에 몸을 맡기며 태휼이 그녀의 다리에 얼굴을 묻었다.
“네 이야기를 해 보아라.”
무릎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수련이 허공을 보던 눈을 내렸다. 자는 줄 알고 가만히 있었건만, 그게 아니었는지 가라앉은 눈이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녀에 대해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보는 것인지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왜 궁금하시냐는 물음 대신 수련이 생각하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지 않겠다며 반항해 봤자 통하지도 않는 상대, 생각을 정리한 수련이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열 살이 될 때까지는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몰랐습니다. 지원을 해 주시기는 했지만 얼굴을 보여 주지는 않았으니까요. 처음 만난 아버지는…… 모르겠습니다. 좋은 분은 확실히 아니셨지만, 그런데도 아버지가 붙여 준 스승에게서 많은 걸 배웠으니까요.”
“…….”
어차피 인정받지 못한 자식이었다. 하물며 사내아이도 아닌 계집아이였으니 목숨을 없앨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상환은 그녀를 죽이는 대신 가족을 인질로 삼았다. 무슨 목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그가 원하는 만큼 해내면 필요한 것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존경했다는 건가?”
“그럴 리가요. 그저 지나가는 몇몇 모습에서는 배울 점이 있다고만 생각했을 뿐입니다. 아버지로서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존경이기보다는 증오에 더 가까웠습니다. 물론 그가 절 생각한 것도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평소였다면 이런 이야기 따위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태휼은 침소에서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고, 낯설 정도로 편안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음에도 물어보는 그가 이상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싫다면서 왜 하라는 대로 한 건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어머니와 동생이 다쳤습니다. 아버지는…… 그 사람은 어떤 식으로 사람을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지요. 어머니의 눈도 그렇게 잃었습니다.”
“그래서 여상환을 짐에게 넘긴 건가?”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말을 잇던 수련이 태휼을 바라보았다.
태휼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대로 말을 계속하다가 그녀의 속마음을 들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아는 태휼이라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허락을 받고 밖을 나갈 때도, 쉬어도 좋다는 말에 어머니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어도, 동생과 그저 대화를 나누는 것뿐임에도 감시당하고, 허락을 받아야 하고, 오해를 풀어야 하는 상황을 더는 참고 싶지 않았습니다.”
“약자는 강자가 원하는 대로 당하고 참아야 하는 것이 순리 아닌가?”
태휼의 물음에 수련의 미간을 모았다. 그저 묻고 답하는 것임에도 울화가 치밀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약자인 수련은 강자인 여상환에게 평생 종속당하고 복종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었다.
그게 태휼이 생각하는 힘의 논리라면 수련은 따르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