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1화
“결국 네가 한 짓도 더 큰 강자에게 약자를 팔아넘긴 것이다. 그 결과, 지금 짐의 곁에 네가 있게 된 것이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절대 태휼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경을 건드는 그의 말에 내내 참고 있었던 울분이 그녀를 휘감고 있었다.
“그럼 약자는 강자가 휘두르는 대로 내내 참고 견뎌 내야 한다는 것입니까? 제 어머니가 눈을 잃어도, 하나뿐인 동생이 절 지키겠다며 대신 맞고 있어도 당연한 듯 참아야 합니까?”
“그게 싫다면 너는 강자에게 몸을 기대는 대신 네 스스로 힘을 얻어야 한다. 결국 선택을 할 수 있는 건 힘을 가진 자뿐이다.”
“소녀보고 폐하나 아버지처럼 힘의 노예가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날이 선 수련의 물음에 태휼의 미간이 옅게 꿈틀댔다. 분명 먼저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 낸 건 태휼이였다.
좀처럼 자신을 내보이지 않는 수련의 본심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여상환에게 내내 억눌려 있었던 수련이였기에 태휼의 도발은 손쉽게 먹혀들었다. 하지만 힘의 노예라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수련의 눈을 바라보았다.
“힘의 노예라…….”
살기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평온한 눈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의 행동이 그의 선을 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꺼내진 말, 물릴 방법은 없었다.
“아버지나 폐하께서는 이미 충분한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가진 힘에 만족하지 못하시고, 더 큰 힘을 가지려 하시죠. 힘을 가진 자가 더 많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 그런 힘은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필요한 힘은…….”
“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겠지. 안 그런가?”
수련의 눈이 경악에 물들었다. 태휼을 보는 수련의 눈이 떨렸지만 그를 보며 아니라며 부정하지도, 거짓이라며 항변하지도 않았다.
짧은 순간, 수많은 표정이 수련의 눈동자에서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감정의 흐름의 가장 끝에서 수련이 태휼에게 지어 보인 표정은 환한 미소였다.
“그런 꿈조차 꾸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녀를 볼 때마다 느꼈던 묘한 기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여상환에게 짓밟히고 빼앗길 때마다 느꼈었던 울분이, 그 와중에도 길은 있을 것이라며 채근했던 자신의 모습이 그녀의 모습에서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환한 미소를 짓는 수련과는 달리 태휼은 진심으로 저런 미소를 짓지 못하였다.
“넌 꿈으로 끝날 여인이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 이루어 내려 하겠지.”
수련의 눈을 보던 태휼이 다시 자리에 누웠다. 이번에는 허리에 팔까지 감은 채, 눈을 감아 버리는 태휼을 보며 수련이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짐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소리 없는 대답을 하며 수련 또한 눈을 감았다. 누워서 자고 싶었지만, 오늘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건만, 막상 잠이 오지 않았다.
“위랑. 선을 넘지는 마라.”
태휼에게서 들려오는 부름에 수련이 고개를 숙였다. 잠결에 나온 말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인지 정작 말을 꺼낸 당사자는 편안히 눈을 감고 있었다.
“선을 넘으면 소녀를 죽이실 것입니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수련이 그에게 향해 있던 시선은 허공으로 돌렸다.
대화가 끊어지자 억누르고 있던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세상을 휘두를 힘도, 다른 사람을 지배할 권력도 필요 없다. 그저 그녀를 옥죄고 있는 족쇄에서만 풀려날 수 있다면 그뿐이었다.
*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자 태휼이 감았던 눈을 떴다.
잠시 옅은 숨소리를 내며 잠든 수련을 보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은 단단하게 묶여 있는 붕대에 배어 나온 피를 향해 있었다.
조금 전에 보여 주던 미소가 꿈이었던 것처럼, 잠들어 있는 수련에게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태휼의 손이 뺨으로 향하는 순간, 수련의 눈 끝이 옅게 떨렸다.
뺨으로 향하던 손이 혈로 향하고, 순간 혈을 제압당한 수련이 그의 품으로 쓰러지듯 안겨 들었다. 손에 각인시키듯 머리카락을 지나 얼굴을 만지고, 오뚝한 코와 부드러운 입술을 스쳐 갔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흔적을 남김에도 정작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차가웠다.
“들어와라.”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에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무진이 안으로 들어왔다.
태휼과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수련을 빠른 눈으로 보던 그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정리는?”
“끝났습니다. 내시감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폐하께서 성안궁에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객들은 예상하신 대로 대홍려의 자택으로 돌아갔습니다.”
“거짓이군.”
태휼의 답에 무진이 고개를 더욱 깊게 숙였다.
나라의 지존을 노린 자객들이 돌아간 곳이 한비의 아버지인 대홍려의 집이었다.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대홍려에게 뒤집어씌우려는 뻔한 수작이었다.
“대홍려는 제집에 무엇이 기어들어 갔는지도 모르겠지.”
“소인이 부족한 탓이옵니다.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너에게 벌을 준다 한들 원흉이 밝혀질까.”
차가운 대답이었지만, 무진을 탓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바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무진이 문득 생각난 듯 품에 있던 것을 꺼내었다.
“지난번에 알아보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무릎걸음으로 다가온 무진이 품에 있던 서신을 태휼에게 내밀었다. 한 손으로 수련은 안은 채, 태휼이 건넨 서신을 열어 보았다.
간결하게 쓰여 있는 서신에는 수련의 생년월일시와 그녀의 사주가 적혀 있었다.
“황후의 상이라…….”
“동시에 황제 폐하께 살을 날릴 상이라 하였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녀를 죽여야 하옵니다.”
무진의 말을 듣던 태휼이 피식 실소를 지었다. 죽여도 상관없는 사생아를 살려 놓은 여상환의 의도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애초에 그는 사람의 사주 따위 믿지 않았다. 사주대로였다면 그는 황제가 아니라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폐하. 명을 내리시면 당장에라도…….”
“짐의 국구께서는 어디까지 내다본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구나. 하하하핫.”
“폐하!”
무진이 불렀지만, 태휼은 답하는 대신 발작하듯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여상환이 왜 수련을 살려 놓았는지 알 수 있었다.
여상환에게 수련은 가둬 놓아야 할 사생아가 아니라 언제든지 이용할 수단이었다.
황제를 죽일 사주이니 태휼을 죽이는 데 이용할 수도 있었고, 황후가 될 상이었으니 태휼을 죽인 후, 차기 황제의 황후로 세울 생각을 가졌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용하려다가 되레 죽임을 당한 거군.”
“자객을 제압하는 실력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직접 검을 겨룬 것은 아니었지만, 작정하고 움직인다면 소인 또한 전력으로 맞서야만 가능할 듯하였습니다.”
“그런다 한들 짐보다는 약하지. 안 그런가?”
“폐하의 목숨을 거둘 사주를 가진 여인이라면 죽여야 합니다!”
“사주대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면 짐은 권좌에 오르지 못했겠지.”
자신을 죽일 사주를 가진 여인임에도 그의 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낙인이 찍혀 있는 등으로 옮겨 갔다.
얕은 옷 너머로 느껴지는 낙인에 태휼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언제나 그의 주변에 자리 잡고 있던 피 냄새가 수련과 같이 있으면 어느덧 사라져 있었다.
황후의 사주여도, 그를 죽일 사주여도 상관없었다.
아직 위랑이라는 이 계집에게 질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곁에 둘 가치는 충분했다.
‘선을 넘으면 소녀를 죽이실 것입니까?’
잠든 척하는 태휼에게 수련은 저렇게 물었다.
선을 넘는다면 목숨을 거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태휼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수련이였다.
각인을 어루만지던 손이 천천히 입술을 지나 얇은 목을 감쌌다. 힘을 주지 않은 채, 목을 감싸자 그녀의 맥이 생생히 느껴졌다.
“짐은 쉽지 않을 것이다. 위랑.”
수련의 가는 목을 붙잡은 태휼이 입꼬리를 올렸다.
四章. 만나다
앉아 있는 채로 잠든 것까지는 기억에 있었지만, 언제부터 누워서 자게 되었는지, 태휼이 언제 떠났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기억에 없었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지만,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옷을 벗어 몸을 확인했지만, 염려했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 수도 없는 법, 준비를 마친 수련이 밖으로 나왔다.
태화전으로 걸음을 옮기던 중, 일전에 이야기를 나눈 무리에 있었던 내관의 모습이 보이자 수련이 허리를 숙였다.
“어, 아! 그래. 잘 잤는가?”
“내관님께서도 안녕하셨습니까?”
“으응. 나야 뭐 걸릴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럼. 이만.”
도망치듯 피하는 내관을 보며 수련을 눈을 좁혔다.
태휼이 자신의 처소에서 있었다는 소문이 벌써 퍼진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보여도 보이지 않는 척, 들었어도 듣지 않은 척하여도 은밀히 이어지는 이야기만큼은 발 없는 말처럼 순식간에 퍼지는 곳이 바로 황궁이었다.
무엇보다도 당장에라도 뛰어올 한비가 너무나도 조용했다. 지난밤의 일은 그대로 묻혔다. 그런데 이 불편한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제까지도 웃으면서 말을 건넸던 궁인이나 내관들이 못 볼 것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
“위랑. 오셨습니까?”
내시감이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꺼내자 수련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내시감.”
“늦기는요.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저기 내시감. 혹 지난밤 소녀가 실수한 것이라도 있는지요?”
주저하듯 물음을 꺼내는 수련을 보며 내시감이 눈 끝을 내렸다. 태휼의 곁에 있을 때와는 달리 궁인들과 정답게 대화를 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연모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관계,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사이라고 하기에는 태휼이 수련에게 갖는 관심은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하지만 수련을 위해 내시감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위랑.”
내시감의 태연한 물음에 수련이 주저하였다. 확실한 증좌가 없는 상황에서 단순히 직감만으로 상황을 물어보는 것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하물며 내시감이 알고 있다 한들 그녀에게 사실을 말해 줄 리가 없었다.
“아닙니다. 내시감. 소녀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단정하게 고개를 숙이는 수련을 보며 내시감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태휼을 모시는 그가 수련을 위해 해 줄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태휼의 곁을 지킨 이들 중에서 위랑만큼 제 자리에서 조용히 머문 이는 없었다. 내시감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처신할 여인이었기에 내시감은 모르는 척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어가시지요.”
내관이 여는 문으로 수련이 걸음을 옮겼다.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긴 채, 태휼의 눈이 들어오는 수련이 아닌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장계로 향하였다.
왔느냐는 말도, 어제의 일에 대한 말도 없었다. 하물며 팔은 괜찮으냐는 물음조차 없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하루가 조용히 지나갔다. 이만 돌아가도 좋다는 태휼의 허락을 받은 수련이 저녁 늦게 태화전을 나왔다.
“하아.”
머리가 복잡해서인지 큰일이 없었음에도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팔의 상처를 치료하는 대로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수련이 무거운 발을 옮겼다. 그녀를 발견한 궁녀들이 도망치듯 사라지는 것을 본 수련은 고개를 저었다.
내시감과 태화전의 내관 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저히 그녀를 피하였다. 필요한 용건만 말하고 사라지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침소로 돌아가는 수련의 눈에 한비 소속의 어린 궁녀가 보였다.
“항아님.”
수련의 목소리에 어두운 표정으로 걸어가던 궁녀가 몸을 움찔댔다. 고개를 돌려 수련을 확인한 궁녀가 도망치듯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반응에 보다 못한 수련이 뒤를 따랐다.
“결국 네가 한 짓도 더 큰 강자에게 약자를 팔아넘긴 것이다. 그 결과, 지금 짐의 곁에 네가 있게 된 것이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절대 태휼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경을 건드는 그의 말에 내내 참고 있었던 울분이 그녀를 휘감고 있었다.
“그럼 약자는 강자가 휘두르는 대로 내내 참고 견뎌 내야 한다는 것입니까? 제 어머니가 눈을 잃어도, 하나뿐인 동생이 절 지키겠다며 대신 맞고 있어도 당연한 듯 참아야 합니까?”
“그게 싫다면 너는 강자에게 몸을 기대는 대신 네 스스로 힘을 얻어야 한다. 결국 선택을 할 수 있는 건 힘을 가진 자뿐이다.”
“소녀보고 폐하나 아버지처럼 힘의 노예가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날이 선 수련의 물음에 태휼의 미간이 옅게 꿈틀댔다. 분명 먼저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 낸 건 태휼이였다.
좀처럼 자신을 내보이지 않는 수련의 본심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여상환에게 내내 억눌려 있었던 수련이였기에 태휼의 도발은 손쉽게 먹혀들었다. 하지만 힘의 노예라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수련의 눈을 바라보았다.
“힘의 노예라…….”
살기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평온한 눈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의 행동이 그의 선을 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꺼내진 말, 물릴 방법은 없었다.
“아버지나 폐하께서는 이미 충분한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가진 힘에 만족하지 못하시고, 더 큰 힘을 가지려 하시죠. 힘을 가진 자가 더 많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 그런 힘은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필요한 힘은…….”
“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겠지. 안 그런가?”
수련의 눈이 경악에 물들었다. 태휼을 보는 수련의 눈이 떨렸지만 그를 보며 아니라며 부정하지도, 거짓이라며 항변하지도 않았다.
짧은 순간, 수많은 표정이 수련의 눈동자에서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감정의 흐름의 가장 끝에서 수련이 태휼에게 지어 보인 표정은 환한 미소였다.
“그런 꿈조차 꾸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녀를 볼 때마다 느꼈던 묘한 기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여상환에게 짓밟히고 빼앗길 때마다 느꼈었던 울분이, 그 와중에도 길은 있을 것이라며 채근했던 자신의 모습이 그녀의 모습에서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환한 미소를 짓는 수련과는 달리 태휼은 진심으로 저런 미소를 짓지 못하였다.
“넌 꿈으로 끝날 여인이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 이루어 내려 하겠지.”
수련의 눈을 보던 태휼이 다시 자리에 누웠다. 이번에는 허리에 팔까지 감은 채, 눈을 감아 버리는 태휼을 보며 수련이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짐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소리 없는 대답을 하며 수련 또한 눈을 감았다. 누워서 자고 싶었지만, 오늘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건만, 막상 잠이 오지 않았다.
“위랑. 선을 넘지는 마라.”
태휼에게서 들려오는 부름에 수련이 고개를 숙였다. 잠결에 나온 말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인지 정작 말을 꺼낸 당사자는 편안히 눈을 감고 있었다.
“선을 넘으면 소녀를 죽이실 것입니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수련이 그에게 향해 있던 시선은 허공으로 돌렸다.
대화가 끊어지자 억누르고 있던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세상을 휘두를 힘도, 다른 사람을 지배할 권력도 필요 없다. 그저 그녀를 옥죄고 있는 족쇄에서만 풀려날 수 있다면 그뿐이었다.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자 태휼이 감았던 눈을 떴다.
잠시 옅은 숨소리를 내며 잠든 수련을 보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은 단단하게 묶여 있는 붕대에 배어 나온 피를 향해 있었다.
조금 전에 보여 주던 미소가 꿈이었던 것처럼, 잠들어 있는 수련에게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태휼의 손이 뺨으로 향하는 순간, 수련의 눈 끝이 옅게 떨렸다.
뺨으로 향하던 손이 혈로 향하고, 순간 혈을 제압당한 수련이 그의 품으로 쓰러지듯 안겨 들었다. 손에 각인시키듯 머리카락을 지나 얼굴을 만지고, 오뚝한 코와 부드러운 입술을 스쳐 갔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흔적을 남김에도 정작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차가웠다.
“들어와라.”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에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무진이 안으로 들어왔다.
태휼과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수련을 빠른 눈으로 보던 그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정리는?”
“끝났습니다. 내시감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폐하께서 성안궁에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객들은 예상하신 대로 대홍려의 자택으로 돌아갔습니다.”
“거짓이군.”
태휼의 답에 무진이 고개를 더욱 깊게 숙였다.
나라의 지존을 노린 자객들이 돌아간 곳이 한비의 아버지인 대홍려의 집이었다.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대홍려에게 뒤집어씌우려는 뻔한 수작이었다.
“대홍려는 제집에 무엇이 기어들어 갔는지도 모르겠지.”
“소인이 부족한 탓이옵니다.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너에게 벌을 준다 한들 원흉이 밝혀질까.”
차가운 대답이었지만, 무진을 탓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바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무진이 문득 생각난 듯 품에 있던 것을 꺼내었다.
“지난번에 알아보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무릎걸음으로 다가온 무진이 품에 있던 서신을 태휼에게 내밀었다. 한 손으로 수련은 안은 채, 태휼이 건넨 서신을 열어 보았다.
간결하게 쓰여 있는 서신에는 수련의 생년월일시와 그녀의 사주가 적혀 있었다.
“황후의 상이라…….”
“동시에 황제 폐하께 살을 날릴 상이라 하였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녀를 죽여야 하옵니다.”
무진의 말을 듣던 태휼이 피식 실소를 지었다. 죽여도 상관없는 사생아를 살려 놓은 여상환의 의도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애초에 그는 사람의 사주 따위 믿지 않았다. 사주대로였다면 그는 황제가 아니라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폐하. 명을 내리시면 당장에라도…….”
“짐의 국구께서는 어디까지 내다본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구나. 하하하핫.”
“폐하!”
무진이 불렀지만, 태휼은 답하는 대신 발작하듯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여상환이 왜 수련을 살려 놓았는지 알 수 있었다.
여상환에게 수련은 가둬 놓아야 할 사생아가 아니라 언제든지 이용할 수단이었다.
황제를 죽일 사주이니 태휼을 죽이는 데 이용할 수도 있었고, 황후가 될 상이었으니 태휼을 죽인 후, 차기 황제의 황후로 세울 생각을 가졌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용하려다가 되레 죽임을 당한 거군.”
“자객을 제압하는 실력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직접 검을 겨룬 것은 아니었지만, 작정하고 움직인다면 소인 또한 전력으로 맞서야만 가능할 듯하였습니다.”
“그런다 한들 짐보다는 약하지. 안 그런가?”
“폐하의 목숨을 거둘 사주를 가진 여인이라면 죽여야 합니다!”
“사주대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면 짐은 권좌에 오르지 못했겠지.”
자신을 죽일 사주를 가진 여인임에도 그의 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낙인이 찍혀 있는 등으로 옮겨 갔다.
얕은 옷 너머로 느껴지는 낙인에 태휼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언제나 그의 주변에 자리 잡고 있던 피 냄새가 수련과 같이 있으면 어느덧 사라져 있었다.
황후의 사주여도, 그를 죽일 사주여도 상관없었다.
아직 위랑이라는 이 계집에게 질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곁에 둘 가치는 충분했다.
‘선을 넘으면 소녀를 죽이실 것입니까?’
잠든 척하는 태휼에게 수련은 저렇게 물었다.
선을 넘는다면 목숨을 거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태휼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수련이였다.
각인을 어루만지던 손이 천천히 입술을 지나 얇은 목을 감쌌다. 힘을 주지 않은 채, 목을 감싸자 그녀의 맥이 생생히 느껴졌다.
“짐은 쉽지 않을 것이다. 위랑.”
수련의 가는 목을 붙잡은 태휼이 입꼬리를 올렸다.
四章. 만나다
앉아 있는 채로 잠든 것까지는 기억에 있었지만, 언제부터 누워서 자게 되었는지, 태휼이 언제 떠났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기억에 없었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지만,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옷을 벗어 몸을 확인했지만, 염려했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 수도 없는 법, 준비를 마친 수련이 밖으로 나왔다.
태화전으로 걸음을 옮기던 중, 일전에 이야기를 나눈 무리에 있었던 내관의 모습이 보이자 수련이 허리를 숙였다.
“어, 아! 그래. 잘 잤는가?”
“내관님께서도 안녕하셨습니까?”
“으응. 나야 뭐 걸릴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럼. 이만.”
도망치듯 피하는 내관을 보며 수련을 눈을 좁혔다.
태휼이 자신의 처소에서 있었다는 소문이 벌써 퍼진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보여도 보이지 않는 척, 들었어도 듣지 않은 척하여도 은밀히 이어지는 이야기만큼은 발 없는 말처럼 순식간에 퍼지는 곳이 바로 황궁이었다.
무엇보다도 당장에라도 뛰어올 한비가 너무나도 조용했다. 지난밤의 일은 그대로 묻혔다. 그런데 이 불편한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제까지도 웃으면서 말을 건넸던 궁인이나 내관들이 못 볼 것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
“위랑. 오셨습니까?”
내시감이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꺼내자 수련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내시감.”
“늦기는요.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저기 내시감. 혹 지난밤 소녀가 실수한 것이라도 있는지요?”
주저하듯 물음을 꺼내는 수련을 보며 내시감이 눈 끝을 내렸다. 태휼의 곁에 있을 때와는 달리 궁인들과 정답게 대화를 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연모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관계,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사이라고 하기에는 태휼이 수련에게 갖는 관심은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하지만 수련을 위해 내시감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위랑.”
내시감의 태연한 물음에 수련이 주저하였다. 확실한 증좌가 없는 상황에서 단순히 직감만으로 상황을 물어보는 것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하물며 내시감이 알고 있다 한들 그녀에게 사실을 말해 줄 리가 없었다.
“아닙니다. 내시감. 소녀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단정하게 고개를 숙이는 수련을 보며 내시감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태휼을 모시는 그가 수련을 위해 해 줄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태휼의 곁을 지킨 이들 중에서 위랑만큼 제 자리에서 조용히 머문 이는 없었다. 내시감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처신할 여인이었기에 내시감은 모르는 척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어가시지요.”
내관이 여는 문으로 수련이 걸음을 옮겼다.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긴 채, 태휼의 눈이 들어오는 수련이 아닌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장계로 향하였다.
왔느냐는 말도, 어제의 일에 대한 말도 없었다. 하물며 팔은 괜찮으냐는 물음조차 없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하루가 조용히 지나갔다. 이만 돌아가도 좋다는 태휼의 허락을 받은 수련이 저녁 늦게 태화전을 나왔다.
“하아.”
머리가 복잡해서인지 큰일이 없었음에도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팔의 상처를 치료하는 대로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수련이 무거운 발을 옮겼다. 그녀를 발견한 궁녀들이 도망치듯 사라지는 것을 본 수련은 고개를 저었다.
내시감과 태화전의 내관 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저히 그녀를 피하였다. 필요한 용건만 말하고 사라지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침소로 돌아가는 수련의 눈에 한비 소속의 어린 궁녀가 보였다.
“항아님.”
수련의 목소리에 어두운 표정으로 걸어가던 궁녀가 몸을 움찔댔다. 고개를 돌려 수련을 확인한 궁녀가 도망치듯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반응에 보다 못한 수련이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