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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항아님!”
“위랑. 따라오지 마세요! 잘못하다가는 마마님께 크게 혼난단 말입니다!”
어린 궁녀가 발을 부지런히 움직인들 수련을 따돌릴 리가 없었다. 몇 걸음 가지도 못한 채, 수련에게 잡힌 궁녀가 울상을 지었다.
“위랑!”
“항아님이 먼저 말 건 게 아니고 내가 항아님을 잡은 거잖아요. 무슨 말씀인지 이야기해 주세요.”
다독이는 말에도 궁녀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하물며 수련에게 잡혀 있는 팔은 작게나마 떨고 있었다.
“안 돼요. 더 늦어지기 전에 승정궁에 갔다 와야 해요.”
“승정궁?”
“김 상궁 마마께서 승정궁 청소를 해 놓으라 하셔서요. 아무튼 위랑. 놓아주세요.”
냉궁에서 사약을 먹은 황후가 살아생전 머문 곳이었다. 황후가 죽은 후, 철저히 방치되어 엉망이 된 곳을 야밤에 어린 궁녀에게 청소를 하라며 보내다니 주인을 닮아 상궁의 성정 또한 좋지 않은 듯싶었다.
“더 늦으면 황후 마마의 귀신이 나올 거예요.”
“귀신?”
“다른 항아들도 승정궁에 청소를 하러 갔다가 황후 마마의 귀신을 보았대요. 마마님께서도 귀신을 보셨다는 말씀을 하셨는걸요!”
“제가 갈까요?”
“네?”
수련의 말에 궁녀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눈에 맺혀 있는 눈물을 닦아 주며 수련이 미소 지었다.
“왜 피하는지 알려 주면 제가 갔다 올게요.”
“아, 안 돼요! 김 상궁 마마께서 혼내실 거예요.”
“마마님이 같이 오시지 않았잖아요. 확인도 안 하실 거예요.”
그저 어린 궁녀에게 심술을 부리는 것일 뿐이다. 한이 맺힌 황후의 혼이 머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곳을 후궁의 직속 상궁이 직접 확인하러 올 리 없었다. 두려움에 떠는 궁녀를 보던 수련이 한쪽 무릎을 굽혀 눈을 마주쳤다.
“항아님.”
“태화전 내관님께서 상궁 마마님들께 단단히 말씀하셨대요. 위랑께 처신을 잘하라고요. 사소한 잡담이나 불필요한 대화는 절대 하지 말라는 말씀을 몇 번이고 하셨대요. 사사로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크게 벌을 내리신다고 하셨어요.”
궁녀의 이야기를 듣던 수련의 눈이 날카롭게 변하였다.
말이 태화전의 내관일 뿐, 결국 명을 내린 것은 태휼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을 잘못했기에 저런 명을 내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위랑이고, 태휼의 시중을 든다 해도 결국 그녀도 사람이다. 최소한 주변의 궁인들과는 대화할 권리가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부정하듯 수련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녀가 여가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 리가 없다.
“위랑. 괜찮으세요? 그게…….”
“항아님은 제가 싫으세요?”
수련의 물음에 어린 궁녀가 크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의 주저도 없이 나오는 대답에 수련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피할 때 그래도 사실을 알려 주는 어린 궁녀가 수련은 미안하기도 고맙기도 하였다.
“걱정하지 마시고 침소로 돌아가세요. 승정궁은 제가 정리할게요.”
“혼자서는 무서워요! 제가 같이 갈게요.”
“늦었잖아요. 전 무섭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가 계세요. 그리고 이렇게 단둘이 있을 때만 항아님을 부를 테니 그럴 때는 도망가지 마세요. 알았죠?”
수련의 말에 어린 궁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는 궁녀를 보낸 수련이 승정궁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잡한 표정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던 수련이 승정궁을 향해 걷기 시작하였다.
*
‘네가 수련이구나? 나는 주연이라고 해.’
버려지고, 부서진 승정궁을 바라보는 수련의 눈이 어두웠다. 한 살 아래였던 누군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자 그녀의 아미가 옅게 찌푸려졌다.
태자의 비로 가는 전날까지도 가기 싫다며 매달렸던 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다시 만나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렇게 죽어서 보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적막한 궁을 보던 수련이 한 걸음씩 계단을 올랐다.
끼이익.
긴 복도를 걸어갈 때마다 나무에서 나는 소리가 수련의 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없는 복도를 걸어가며 승정궁 안을 살폈다.
‘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하면 되잖아. 어머니는 만나도 괜찮다고 하셨어.’
식솔 하나 없이 단신으로 온 그녀는 굳어 있는 수련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가문 간의 혼인으로 얻은 딸, 태자비로 황궁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녀는 종종 수련을 보러 숲을 넘어왔었다.
관심조차 주지 않아도 옆에 와서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는 주연을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보다 못한 수련이 그녀의 말에 처음으로 대답했던 날, 그녀는 누구보다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넌 그래도 아버지에게 할 말은 다 하잖아. 난 그렇게 못 하는걸.’
여상환에게 맞은 상처를 치료하는 수련을 보며 주연은 꼭 자신이 맞은 것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울다가 까무러칠까 무서워 울음을 터트리는 주연을 수련은 한참을 달랬었다. 그런 그녀가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터트리는 그녀가 부러웠었다.
‘나 황궁에 가기 싫어. 수련아. 나 진짜 가고 싶지 않아.’
주연이 머물렀을 침전 앞에 선 수련이 감정을 억누르듯 입술을 깨물었다.
수련은 여상환에게 대들기라도 했지만, 주연은 달랐다. 몸의 속박을 당한 것은 수련이였지만, 마음의 족쇄를 차고 있던 사람은 주연이었다.
모두가 꿈꾸는 태자비로 간택되어 가는 것임에도 주연은 수련을 붙잡고 가기 싫다는 말만 계속 꺼냈었다.
“차라리 도망이라도 치지 그랬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항변해 보았자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았을 것이 뻔했다. 차라리 황제가 여가를 치는 사이 도망치기라도 했다면, 죄인이기는 했어도 살아 있었을 것이다.
목숨이라도 건졌더라면.
차라리 태자비로 간택당한 날 도망을 쳤더라면.
이도 저도 아니라면 차라리 자신에게 먼저 다가오지 않았더라면.
뚝.
수련의 눈에서 나온 맑은 눈물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잊고 싶은 기억은 없었다. 정실부인의 딸임에도 주연에게 수련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자매였을 뿐이었다.
“괜히 왔어.”
그녀의 기억에 있던 주연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약하고 위태로웠지만 수련과는 달리 주연은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였다. 상대를 의심하고 몸을 숨기는 수련과 처음부터 자신을 전부 내보이는 주연은 무척이나 달랐다.
황궁에 들어간다면, 태자비가 된다면 조금은 주연의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생각은 생각일 뿐, 수련을 맞이하는 건 주연이 아니라 그녀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어두운 방뿐이었다.
생각을 지우듯 수련이 고개를 저은 수련이 침전의 문을 열었다.
“어?”
침전의 문을 연 수련의 눈이 커졌다.
열려 있는 창에 팔을 기댄 채, 밖을 보던 사내가 수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닮았다.’
고개를 돌린 사내를 보는 순간, 처음 떠오른 사람은 태화전에 있을 태휼이였다. 태휼 못지않게 훤칠한 외모에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가오는 느낌은 미묘하게 달랐다.
“누구십니까?”
수련의 물음에 사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 같군. 자네는 누구인가?”
사내의 물음에 수련이 눈을 좁혔다. 지금 물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수련이였다.
이미 죽은 사람이기는 했지만, 황후가 머물던 침전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가 함부로 들어올 곳이 아니었다.
말없이 수련이 노려보자 앉아 있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계할 필요 없다는 듯 다가온 사내가 수련에게 손을 뻗었다.
“상궁의 심술로 여기까지 쫓겨난 궁녀인가? 괜찮으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어차피 같이 있으면 귀신도 알아서 도망가지 않겠…… 악!”
정체도 알 수 없는 사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수련이 반사적으로 정강이를 힘껏 후려쳤다.
생각지 못한 공격에 몸을 숙인 사이, 수련이 사내와의 거리를 벌렸다.
“황후 마마께서 계시던 곳입니다. 어디 내관도 아닌 사내가 여기에 계시는 것입니까?”
“콜록콜록. 아이고. 죽겠다.”
“다른 이를 부르기 전에 대답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사람을 부를 생각은 없었지만, 사내를 겁줄 요량으로 수련이 나지막이 엄포를 놓았다.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하지 않다.
이미 충분히 모욕을 당할 대로 당한 주연이었다. 쓸데없는 구설수까지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남아 있는 주연의 흔적이라도 찾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온 걸음이 외간 사내 때문에 어그러져 버렸다.
“그러는 그쪽도 궁녀는 아니지 않은가?”
콜록거리며 몸을 일으킨 사내가 수련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좀처럼 미소 짓지 않는 태휼과는 달리 참으로 잘 웃는 이였다. 다만 저렇게 환하게 보여 주는 미소가 안심이 되기보다는 수련을 더 긴장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다짜고짜 사람을 찼으면 사과를 해야지.”
“일언반구도 없이 여인에게 다가온 객부터 사과를 하시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음?”
수련의 행동에 사내가 눈을 좁혔다. 승정궁에 들어오는 궁녀의 대부분은 황후의 귀신을 보았다며 도망가거나 사내의 모습을 보고는 까무러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앞의 여인은 그가 보아 왔던 궁인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겁에 질리지도, 몸을 움츠리지도 않았다. 물음에 대한 답을 해 보라는 듯한 시선으로 부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 이름은 문부겸이네. 그럼 그쪽의 이름은 무엇인가?”
“성함을 여쭤 본 것이 아닙니다. 왜 사내인 객께서 이곳에 계시느냐 물었습니다.”
“사람도 없고, 바람을 피하기에는 적당하니 이곳에 있을 만하지 않은가. 그러는 그대는 아직도 내 물음에 답이 없군.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네.”
“민수련입니다.”
수련이라는 말에 부겸의 눈이 꿈틀댔다. 묘한 미소를 지으며 부겸이 수련을 찬찬히 살폈다.
“이곳이 무섭지 않은가? 여긴 밤마다 원한을 가진 황후가 혼으로 나타나는 곳이라네.”
겁을 주듯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부겸을 바라보던 수련이 고개를 저었다. 수련에게 주연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여리면서도 한없이 착했던 동생. 황궁에 가는 것보다 수련과 함께 있는 걸 더 좋아한 혈육일 뿐이었다.
자기 자신보다도 수련을 더 아껴 주었던 귀한 주연에게 그녀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건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주저 없이 나오는 대답에 부겸의 눈이 커졌다. 수련은 그를 보지 않았지만, 부겸의 눈은 수련에게 고정된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부겸이 어떻게 보든지 상관없다는 듯 수련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주연의 흔적을 보기 위해 온 걸음이었지만 오늘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누구인지 모르는 부겸에게 자신과 주연의 관계를 들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여기에 계시다가 상궁이나 내관에게 걸리면 곤혹스러우실 것입니다. 이만 나가시지요.”
“어차피 이 밤에 올 사람이라고는 겁에 질린 궁녀나 내관일 뿐이지. 그대 같은 이는 이 황궁에 거의 없지. 황후가 어떻게 죽었는지 제 눈으로 본 이들이니 말이야. 황궁에 이만큼 편한 곳이 없는데 일부러 밖을 나갈 필요가 없지 않은가.”
“…….”
나가래도 좀처럼 나가지 않는 부겸을 보며 수련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나갈 생각도 없는 그를 쫓아낼 여력은 없었다. 하물며 그를 쫓아내겠다며 소란을 부려 봤자 수련에게 좋은 일도 없었다.
“그럼 조금만 계시다가 나오시지요. 소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가 혹 황제의 목을 노리고 온 자객일지도 모르는데 어쩌려고 이리 태연한 건가?”
“자객이었다면 이런 대화를 나누기 전에 소녀의 목이 사라졌겠지요.”
“아까의 그 기세라면 자객도 한 방에 보내 버릴 것 같은데 무슨 엄살인가.”
손을 멈춘 수련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부겸을 쳐다보았다. 수련의 시선을 받은 부겸이 손가락으로 정강이를 가리켰다.
“엄청나게 아팠거든. 눈앞에 별이 보였단 말이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껌뻑이던 수련이 피식 실소를 지었다. 황궁에서 보아 왔던 이들과 앞의 사내는 사뭇 달랐다. 아무리 진지하게 대하려 해도 유들유들하게 넘겨 대니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얼마나 심하게 쳤다고 별이 보인다 하십니까?”
경계심 가득했던 수련의 말투가 바뀌자 부겸의 입가에도 미소가 생겼다. 팽팽하던 경계를 작게나마 푼 수련의 표정은 좀 전의 것과는 또 달랐다.
“작정하고 때리는데 사내나 여인이 무슨 상관인가. 아파 죽을 뻔했단 말이지. 지금도 보게. 전혀 못 움직이지 않는가.”
투정 아닌 투정에 수련이 고개를 저었다.
“꾀병 그만 부리시고 적당한 시기에 나오십시오. 이곳의 주인은 객과는 달리 엄격하신 분입니다.”
“목이라도 베일까 봐 겁이 나는가?”
부겸의 물음에 수련의 눈이 그를 향하였다.
태휼을 아는 듯한 물음, 장난기 어린 말투 곳곳에 보이는 행동이나 어조는 황궁에 소속된 이들이 쓰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항아님!”
“위랑. 따라오지 마세요! 잘못하다가는 마마님께 크게 혼난단 말입니다!”
어린 궁녀가 발을 부지런히 움직인들 수련을 따돌릴 리가 없었다. 몇 걸음 가지도 못한 채, 수련에게 잡힌 궁녀가 울상을 지었다.
“위랑!”
“항아님이 먼저 말 건 게 아니고 내가 항아님을 잡은 거잖아요. 무슨 말씀인지 이야기해 주세요.”
다독이는 말에도 궁녀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하물며 수련에게 잡혀 있는 팔은 작게나마 떨고 있었다.
“안 돼요. 더 늦어지기 전에 승정궁에 갔다 와야 해요.”
“승정궁?”
“김 상궁 마마께서 승정궁 청소를 해 놓으라 하셔서요. 아무튼 위랑. 놓아주세요.”
냉궁에서 사약을 먹은 황후가 살아생전 머문 곳이었다. 황후가 죽은 후, 철저히 방치되어 엉망이 된 곳을 야밤에 어린 궁녀에게 청소를 하라며 보내다니 주인을 닮아 상궁의 성정 또한 좋지 않은 듯싶었다.
“더 늦으면 황후 마마의 귀신이 나올 거예요.”
“귀신?”
“다른 항아들도 승정궁에 청소를 하러 갔다가 황후 마마의 귀신을 보았대요. 마마님께서도 귀신을 보셨다는 말씀을 하셨는걸요!”
“제가 갈까요?”
“네?”
수련의 말에 궁녀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눈에 맺혀 있는 눈물을 닦아 주며 수련이 미소 지었다.
“왜 피하는지 알려 주면 제가 갔다 올게요.”
“아, 안 돼요! 김 상궁 마마께서 혼내실 거예요.”
“마마님이 같이 오시지 않았잖아요. 확인도 안 하실 거예요.”
그저 어린 궁녀에게 심술을 부리는 것일 뿐이다. 한이 맺힌 황후의 혼이 머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곳을 후궁의 직속 상궁이 직접 확인하러 올 리 없었다. 두려움에 떠는 궁녀를 보던 수련이 한쪽 무릎을 굽혀 눈을 마주쳤다.
“항아님.”
“태화전 내관님께서 상궁 마마님들께 단단히 말씀하셨대요. 위랑께 처신을 잘하라고요. 사소한 잡담이나 불필요한 대화는 절대 하지 말라는 말씀을 몇 번이고 하셨대요. 사사로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크게 벌을 내리신다고 하셨어요.”
궁녀의 이야기를 듣던 수련의 눈이 날카롭게 변하였다.
말이 태화전의 내관일 뿐, 결국 명을 내린 것은 태휼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을 잘못했기에 저런 명을 내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위랑이고, 태휼의 시중을 든다 해도 결국 그녀도 사람이다. 최소한 주변의 궁인들과는 대화할 권리가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부정하듯 수련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녀가 여가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 리가 없다.
“위랑. 괜찮으세요? 그게…….”
“항아님은 제가 싫으세요?”
수련의 물음에 어린 궁녀가 크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의 주저도 없이 나오는 대답에 수련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피할 때 그래도 사실을 알려 주는 어린 궁녀가 수련은 미안하기도 고맙기도 하였다.
“걱정하지 마시고 침소로 돌아가세요. 승정궁은 제가 정리할게요.”
“혼자서는 무서워요! 제가 같이 갈게요.”
“늦었잖아요. 전 무섭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가 계세요. 그리고 이렇게 단둘이 있을 때만 항아님을 부를 테니 그럴 때는 도망가지 마세요. 알았죠?”
수련의 말에 어린 궁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는 궁녀를 보낸 수련이 승정궁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잡한 표정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던 수련이 승정궁을 향해 걷기 시작하였다.
‘네가 수련이구나? 나는 주연이라고 해.’
버려지고, 부서진 승정궁을 바라보는 수련의 눈이 어두웠다. 한 살 아래였던 누군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자 그녀의 아미가 옅게 찌푸려졌다.
태자의 비로 가는 전날까지도 가기 싫다며 매달렸던 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다시 만나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렇게 죽어서 보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적막한 궁을 보던 수련이 한 걸음씩 계단을 올랐다.
끼이익.
긴 복도를 걸어갈 때마다 나무에서 나는 소리가 수련의 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없는 복도를 걸어가며 승정궁 안을 살폈다.
‘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하면 되잖아. 어머니는 만나도 괜찮다고 하셨어.’
식솔 하나 없이 단신으로 온 그녀는 굳어 있는 수련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가문 간의 혼인으로 얻은 딸, 태자비로 황궁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녀는 종종 수련을 보러 숲을 넘어왔었다.
관심조차 주지 않아도 옆에 와서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는 주연을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보다 못한 수련이 그녀의 말에 처음으로 대답했던 날, 그녀는 누구보다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넌 그래도 아버지에게 할 말은 다 하잖아. 난 그렇게 못 하는걸.’
여상환에게 맞은 상처를 치료하는 수련을 보며 주연은 꼭 자신이 맞은 것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울다가 까무러칠까 무서워 울음을 터트리는 주연을 수련은 한참을 달랬었다. 그런 그녀가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터트리는 그녀가 부러웠었다.
‘나 황궁에 가기 싫어. 수련아. 나 진짜 가고 싶지 않아.’
주연이 머물렀을 침전 앞에 선 수련이 감정을 억누르듯 입술을 깨물었다.
수련은 여상환에게 대들기라도 했지만, 주연은 달랐다. 몸의 속박을 당한 것은 수련이였지만, 마음의 족쇄를 차고 있던 사람은 주연이었다.
모두가 꿈꾸는 태자비로 간택되어 가는 것임에도 주연은 수련을 붙잡고 가기 싫다는 말만 계속 꺼냈었다.
“차라리 도망이라도 치지 그랬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항변해 보았자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았을 것이 뻔했다. 차라리 황제가 여가를 치는 사이 도망치기라도 했다면, 죄인이기는 했어도 살아 있었을 것이다.
목숨이라도 건졌더라면.
차라리 태자비로 간택당한 날 도망을 쳤더라면.
이도 저도 아니라면 차라리 자신에게 먼저 다가오지 않았더라면.
뚝.
수련의 눈에서 나온 맑은 눈물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잊고 싶은 기억은 없었다. 정실부인의 딸임에도 주연에게 수련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자매였을 뿐이었다.
“괜히 왔어.”
그녀의 기억에 있던 주연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약하고 위태로웠지만 수련과는 달리 주연은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였다. 상대를 의심하고 몸을 숨기는 수련과 처음부터 자신을 전부 내보이는 주연은 무척이나 달랐다.
황궁에 들어간다면, 태자비가 된다면 조금은 주연의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생각은 생각일 뿐, 수련을 맞이하는 건 주연이 아니라 그녀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어두운 방뿐이었다.
생각을 지우듯 수련이 고개를 저은 수련이 침전의 문을 열었다.
“어?”
침전의 문을 연 수련의 눈이 커졌다.
열려 있는 창에 팔을 기댄 채, 밖을 보던 사내가 수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닮았다.’
고개를 돌린 사내를 보는 순간, 처음 떠오른 사람은 태화전에 있을 태휼이였다. 태휼 못지않게 훤칠한 외모에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가오는 느낌은 미묘하게 달랐다.
“누구십니까?”
수련의 물음에 사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 같군. 자네는 누구인가?”
사내의 물음에 수련이 눈을 좁혔다. 지금 물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수련이였다.
이미 죽은 사람이기는 했지만, 황후가 머물던 침전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가 함부로 들어올 곳이 아니었다.
말없이 수련이 노려보자 앉아 있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계할 필요 없다는 듯 다가온 사내가 수련에게 손을 뻗었다.
“상궁의 심술로 여기까지 쫓겨난 궁녀인가? 괜찮으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어차피 같이 있으면 귀신도 알아서 도망가지 않겠…… 악!”
정체도 알 수 없는 사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수련이 반사적으로 정강이를 힘껏 후려쳤다.
생각지 못한 공격에 몸을 숙인 사이, 수련이 사내와의 거리를 벌렸다.
“황후 마마께서 계시던 곳입니다. 어디 내관도 아닌 사내가 여기에 계시는 것입니까?”
“콜록콜록. 아이고. 죽겠다.”
“다른 이를 부르기 전에 대답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사람을 부를 생각은 없었지만, 사내를 겁줄 요량으로 수련이 나지막이 엄포를 놓았다.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하지 않다.
이미 충분히 모욕을 당할 대로 당한 주연이었다. 쓸데없는 구설수까지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남아 있는 주연의 흔적이라도 찾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온 걸음이 외간 사내 때문에 어그러져 버렸다.
“그러는 그쪽도 궁녀는 아니지 않은가?”
콜록거리며 몸을 일으킨 사내가 수련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좀처럼 미소 짓지 않는 태휼과는 달리 참으로 잘 웃는 이였다. 다만 저렇게 환하게 보여 주는 미소가 안심이 되기보다는 수련을 더 긴장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다짜고짜 사람을 찼으면 사과를 해야지.”
“일언반구도 없이 여인에게 다가온 객부터 사과를 하시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음?”
수련의 행동에 사내가 눈을 좁혔다. 승정궁에 들어오는 궁녀의 대부분은 황후의 귀신을 보았다며 도망가거나 사내의 모습을 보고는 까무러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앞의 여인은 그가 보아 왔던 궁인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겁에 질리지도, 몸을 움츠리지도 않았다. 물음에 대한 답을 해 보라는 듯한 시선으로 부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 이름은 문부겸이네. 그럼 그쪽의 이름은 무엇인가?”
“성함을 여쭤 본 것이 아닙니다. 왜 사내인 객께서 이곳에 계시느냐 물었습니다.”
“사람도 없고, 바람을 피하기에는 적당하니 이곳에 있을 만하지 않은가. 그러는 그대는 아직도 내 물음에 답이 없군.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네.”
“민수련입니다.”
수련이라는 말에 부겸의 눈이 꿈틀댔다. 묘한 미소를 지으며 부겸이 수련을 찬찬히 살폈다.
“이곳이 무섭지 않은가? 여긴 밤마다 원한을 가진 황후가 혼으로 나타나는 곳이라네.”
겁을 주듯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부겸을 바라보던 수련이 고개를 저었다. 수련에게 주연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여리면서도 한없이 착했던 동생. 황궁에 가는 것보다 수련과 함께 있는 걸 더 좋아한 혈육일 뿐이었다.
자기 자신보다도 수련을 더 아껴 주었던 귀한 주연에게 그녀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건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주저 없이 나오는 대답에 부겸의 눈이 커졌다. 수련은 그를 보지 않았지만, 부겸의 눈은 수련에게 고정된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부겸이 어떻게 보든지 상관없다는 듯 수련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주연의 흔적을 보기 위해 온 걸음이었지만 오늘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누구인지 모르는 부겸에게 자신과 주연의 관계를 들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여기에 계시다가 상궁이나 내관에게 걸리면 곤혹스러우실 것입니다. 이만 나가시지요.”
“어차피 이 밤에 올 사람이라고는 겁에 질린 궁녀나 내관일 뿐이지. 그대 같은 이는 이 황궁에 거의 없지. 황후가 어떻게 죽었는지 제 눈으로 본 이들이니 말이야. 황궁에 이만큼 편한 곳이 없는데 일부러 밖을 나갈 필요가 없지 않은가.”
“…….”
나가래도 좀처럼 나가지 않는 부겸을 보며 수련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나갈 생각도 없는 그를 쫓아낼 여력은 없었다. 하물며 그를 쫓아내겠다며 소란을 부려 봤자 수련에게 좋은 일도 없었다.
“그럼 조금만 계시다가 나오시지요. 소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가 혹 황제의 목을 노리고 온 자객일지도 모르는데 어쩌려고 이리 태연한 건가?”
“자객이었다면 이런 대화를 나누기 전에 소녀의 목이 사라졌겠지요.”
“아까의 그 기세라면 자객도 한 방에 보내 버릴 것 같은데 무슨 엄살인가.”
손을 멈춘 수련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부겸을 쳐다보았다. 수련의 시선을 받은 부겸이 손가락으로 정강이를 가리켰다.
“엄청나게 아팠거든. 눈앞에 별이 보였단 말이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껌뻑이던 수련이 피식 실소를 지었다. 황궁에서 보아 왔던 이들과 앞의 사내는 사뭇 달랐다. 아무리 진지하게 대하려 해도 유들유들하게 넘겨 대니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얼마나 심하게 쳤다고 별이 보인다 하십니까?”
경계심 가득했던 수련의 말투가 바뀌자 부겸의 입가에도 미소가 생겼다. 팽팽하던 경계를 작게나마 푼 수련의 표정은 좀 전의 것과는 또 달랐다.
“작정하고 때리는데 사내나 여인이 무슨 상관인가. 아파 죽을 뻔했단 말이지. 지금도 보게. 전혀 못 움직이지 않는가.”
투정 아닌 투정에 수련이 고개를 저었다.
“꾀병 그만 부리시고 적당한 시기에 나오십시오. 이곳의 주인은 객과는 달리 엄격하신 분입니다.”
“목이라도 베일까 봐 겁이 나는가?”
부겸의 물음에 수련의 눈이 그를 향하였다.
태휼을 아는 듯한 물음, 장난기 어린 말투 곳곳에 보이는 행동이나 어조는 황궁에 소속된 이들이 쓰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