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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그대는 황궁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군.”
“마음을 두고 머물기에 좋은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몸을 숙이고 본심을 속일 수도 있었지만 수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가장 걱정해야 할 태휼 또한 그녀의 본심을 알고 있었다.
“전 이곳이 싫습니다.”
권력에 미친 여상환을 만든 곳도, 제 삶을 살 수 있었던 주연이 가문의 죄를 안고 죽은 곳도 바로 황궁이었다.
“음.”
수련의 말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부겸이 어찌 보는지 알 리 없는 수련이 몸을 숙였다.
“소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객께서도 조심히 나가십시오.”
조용한 걸음으로 수련이 사라지자 부겸의 입가에 의뭉스러운 미소가 생겨났다.
“재미있네.”
모두가 부러워하는 황궁에 있으면서도 싫다는 말을 꺼냈다. 어둠 속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내와 대화를 하고 있으면서도 주눅이 들거나 무서워하는 기색 또한 없었다.
“하긴 그 성격에 평범한 여인을 데려와서 앉혀 놓을 리가 없지.”
어차피 자신 또한 태휼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장기말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죽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느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느냐의 차이일 뿐.
짧았지만 수련과의 시간은 부겸에게도 제법 흥미로웠다.
“뭐, 조만간 다시 볼 거니까.”
좀 더 승정궁에서 쉴 생각이었지만 조심히 나가라는 수련의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걱정을 담아 해 준 말인데 사내가 따라야지.”
승정궁에 머무는 대신 부겸이 수련을 따라 몸을 돌렸다.

*


“성안궁이 아니라 위랑의 침소에서 머무셨단 말이냐?”
이비의 목소리에 궁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의 곁에서 그녀가 주는 장신구를 받으며 도움을 주던 궁녀가 지금만큼은 이비에게 모든 처분을 맡긴다는 것처럼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황은을 입은 흔적은 없었습니다만 분명 자객이 들었던 밤, 폐하께서는 성안궁이 아닌 위랑과 있으셨습니다. 진실에 소인의 목을 걸 수 있사옵니다.”
궁녀의 말에도 이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표정만 그대로였을 뿐, 치맛자락을 붙잡은 손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후궁들은 물론 하물며 황후에게조차 곁은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던 황제였다.
그런 그가 데려온 계집에게는 곁을 내주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호기심으로 데려왔다기에는 과한 배려이시지 않은가?”
손길은커녕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도 황제는 불편해하였다. 이비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황궁의 모든 여인들에게 그렇기에 참을 수 있었지만 이건 그 인내의 한도를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한비는? 그녀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 아니지. 알고 있었으면 이리 조용할 리가 없겠지.”
“이비 마마.”
서안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이비가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지난밤, 황제가 대사농인 이부한에게 공석인 사공을 해 보지 않겠느냐는 운을 띄웠다는 말을 들었었다. 삼공 중 하나인 사공의 자리에 오르면 이비의 가문은 명실공히 호연의 제1가문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황제는 여상환과 힘을 함께한 귀족들에게 여전히 반감을 품고 있었고, 자신의 힘을 위협하는 외척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비를 견제하기도 바쁜 시기에 귀찮아졌어.’
이제 일 년도 되지 않은 계집이니 속단할 수 없었지만, 목에 박혀 있는 가시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거슬리고 있었다.
“한비의 간자 노릇은 제법 잘하고 있는 것 같군.”
“일주일에 두 번, 많을 때는 세 번 정도 한비 마마의 궁에 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아무 말도 없으시다? 분명 위랑의 움직임을 아시고 계실 텐데 말이다.”
지금까지 위랑의 자리에 있던 이들은 많았지만, 모두가 반년을 넘기기 전에 황제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 눈치가 빠른 계집이기에 제법 버티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호기심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이라면.
“위랑이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했었지?”
“지금도 가족과 연락을 취하려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만 폐하의 감시 때문인지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움직이게 해야겠다.”
“네?”
한비는 간자로 쓰겠다고 했지만 이비의 생각은 달랐다. 간자로 쓰느니 차라리 황제의 본심을 아는 데 이용하는 수로 쓰는 것이 나았다.
이비가 손짓하자 옆에 서 있던 문 상궁이 궁녀의 앞에 함을 내밀었다.
함의 뚜껑을 열자 보이는 금은보화에 궁녀의 입이 벌어졌다.
“이, 이비 마마! 소인. 마마께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네가 직접 움직여라. 되도록 이쪽은 모르게 해 줬으면 하는구나.”
이비의 말을 알아들은 궁녀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함을 품에 안은 궁녀를 보며 이비가 미소를 지었다. 재물 욕심이 심했지만,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잘 굴러가니 굳이 지시하지 않아도 제 몫을 충분히 할 계집이었다.
한비의 앞에서 연신 몸을 숙이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해 댔던 위랑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황제의 근황을 보고하는 간자로 쓰기에는 위랑 또한 여인이라는 것이 걸렸다.
바보가 아니라 바보인 척하는 것이라면.
귀족을 방심하게 하기 위한 함정이 아니라 마음이 끌리고 있는 것이라면.
하물며 그토록 치를 떨며 싫어하던 여상환의 딸임에도 살려 놓았다는 사실이 내내 이비를 건드렸다. 이런 기분은 오래 가지고 있어 보았자 좋은 일이 없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아보는 것이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서 나은 선택일 수 있었다.

*


“대신들 사이에서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의 토지개혁안을 공표하게 되면 반발은 더 심해질 것입니다.”
내관이나 궁녀에게는 개의치 않았지만, 태휼은 귀족에게만큼은 철저히 그녀를 가렸다.
이미 그녀의 얼굴을 아는 재상임에도 태휼은 수련의 앞에 짙은 청색의 발을 길게 늘여 놓았다. 발 너머로 재상을 보던 수련이 날카로운 눈의 태휼에게로 향하였다.
“어차피 한 번은 각오한 일이지 않은가. 그리고 여상환이 사라진 지금이 움직이기 가장 좋은 시기다.”
“허나 폐하. 이부한이 대사농에서 사공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지금에 이 개혁안이 나오게 되면 자칫 대사농에게 힘이 쏠릴 수 있사옵니다.”
“그래야 한 번에 쳐 내 버리지. 안 그런가?”
“폐하. 조금은 손을 잡으시는 것도 지금 상황에서는 나쁘지 않습니다. 한 번에 쳐 내기에는 저들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사옵니다.”
“썩은 것과 손을 잡아 나도 더러워지라는 것인가? 선제처럼 말이지.”
“폐하.”
빙긋 보기 좋은 미소가 태휼의 입가에 만들어졌다. 기분에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닌 상황에 맞춰 만들어지는 미소. 태휼의 미소가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알기에 수련은 더더욱 방심할 수 없었다.
“토지개혁은 계획한 대로 진행할 것이다. 반발은 예상했었던 일, 설령 대사농에게 힘이 몰리게 되더라도 놔두어라.”
태휼의 명령에 재상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여가에 휘둘렸던 선제는 마지막까지 자기 뜻은 하나도 펼쳐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권력을 잡은 귀족들은 황태자인 태휼을 자신의 수하처럼 이용하고, 무언가를 얻어 내는 데 핏발을 세웠다.
몸을 숙이고 자신을 굽혔다. 그들이 하라는 대로 행동하고, 원하는 대로 따랐다.
그렇게 십여 년, 황제로 그를 세워도 괜찮다며 안심한 순간 그가 움직였다. 태휼과 맞설 준비도, 대응할 시간조차 없이 당한 귀족들은 결국 그의 발 밑에 신하로서 몸을 숙였다.
재상이 나가자마자 들어온 내관들이 수련의 앞을 가리고 있던 발을 걷어 냈다. 걷자마자 마주친 태휼의 눈에 수련이 고개를 숙였다.
“위랑은 어찌 생각하느냐?”
“토지개혁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것도 그렇고, 귀족들이 어찌 나올 것 같은가?”
“소녀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몸을 빼려는 수련을 보며 태휼의 미간을 좁혔다. 황후가 될 사주와 황제를 죽일 사주를 전부 가진 수련을 여상환이 방치만 했을 리가 없다. 수련은 애써 자신을 숨기려 했지만, 이젠 그 장단에 놀아 줄 마음 따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이비가 아닌 한비의 간자를 한단 말인가?”
“…….”
“하긴 이비였다면 무언가를 내주기보다는 네 마지막까지 이용하려고 했겠지. 영악한 이비보다는 표정이 겉으로 전부 드러나는 한비가 쉽긴 하지.”
“…….”
“더 말해야 그 굳게 닫힌 입이 열릴 것인가?”
숨겨 봤자 소용없다는 식의 조롱에 수련이 태휼을 노려보았다. 재상에게 보여 줬을 때와는 또 다른 미소가 그의 입가에 생겨났다.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재미있어하는 모습에 수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게는 사소한 재미일지 몰라도, 수련에게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말해 보라 했으니 어설픈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터, 굳게 다물고 있던 수련의 입이 그제야 열렸다.
“자신의 관할 지역 외의 토지소유권을 박탈하는 개혁은 단기적으로는 긍정적인 효과를 볼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얻으신 재물로 권력을 얻으셨으니까요. 하지만 폐하의 토지개혁안은 장기적인 효과를 보기는 어렵습니다.”
차분한 대답에 태휼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감돌았다. 누가 저 입에서 나오는 답이 여인에게서 나왔다고 믿겠는가. 눈치 좋고 상황 판단이 빠른 이비에게조차 듣지 못했었던 답이었다. 하물며 재상조차 후폭풍을 겁낼 뿐, 저렇게까지 내다보지는 못했었다.
“친척이나 수하를 이용해서 토지를 늘리려 할 테니 장기간으로 쓸 방법은 아니지. 네 말대로라면 난 대사농에게 몰릴 힘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단기간의 효과일 뿐이니 대사농은 기다리라며 귀족들을 달랠 수도 있지 않은가.”
“폐하께서 어찌 생각하고 계시는지 모르오나 소녀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사농께서는 나서지 않더라도 뜻을 함께하는 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반발이 거셀 것입니다. 결국 문이 열리는 것이 어려울 뿐, 열리고 난 이후가 어려운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단기간의 개혁안을 받아들이면 장기간의 개혁안을 반대하기는 어려운 일이 될 터이니 처음부터 강하게 나설 것이라는 건가?”
“화근은 처음부터 만들어 놓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여상환이 그렇게 가르쳤나?”
수련의 눈이 그를 조용히 응시했다. 조금의 거짓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그의 시선에 수련이 씁쓸히 입을 다물었다. 이젠 수련에게도 황제인 태휼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이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놓은 폭군이었다면,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여 피를 부르고 원하는 걸 쟁취하려는 필부였다면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여상환이 본능과 힘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이였다면 태휼은 자신에게 그 모든 것이 오도록 끌어당기는 이였다.
화풀이로 죽인 것처럼 보이던 내관과 궁녀가 알고 보니 모두 누군가의 간자거나 일을 꾸미는 이들이었다. 간자가 죽은 태화전을 채운 것은 새로 뽑은 이들이었다.
그는 피에 굶주린 폭군이 아니었다. 치밀하게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맹수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소녀에게 사람을 보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 소녀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았던 것처럼 아버지 또한 그리하셨을 뿐이지요. 그가 하라는 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반항하면 그만큼의 대가가 돌아왔으니까요.”
“네 실수를 가족이 감당했다는 것인가?”
대수롭지 않게 물음을 던졌던 태휼의 눈이 딱딱하게 굳었다.
괜찮은 척,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물음과 동시에 수련의 얼굴 전체에 드러난 감정은 상처였다. 적의를 가진 사람을 움직이게 할 방법은 많아 보았자 두 개뿐이었다.
마음으로 따르게 하거나 힘으로 끌고 오는 것뿐. 결국 여상환이 택한 방법은 후자였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왠지 모를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누가 무슨 표정을 짓던 상관없다. 하지만 수련에게서 저런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리 와.”
어두운 표정의 수련을 보던 태휼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보던 수련이 그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황궁에 온 지도 반년, 그녀가 아는 그는 손을 내미는 사람이 아니었다.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기에 저 손을 붙잡을 수 없었다. 여상환은 수련이 따르지 않으면 자신의 의도를 말해 주고 따르게 하는 사람이었지만, 태휼은 여상환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태휼의 손을 잡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난 수련이 가까이 다가왔다.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는 수련을 보던 태휼이 피식 실소를 지었다. 수련의 허리를 팔로 감은 그가 다리에 머리를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