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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팔은?”
이전에 있었던 이들에게는 손 하나 대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건만, 그는 그녀에게만큼은 거침없이 다가왔다. 하물며 비나 궁녀들에게도 먼저 다가가지 않는 그였다.
“한동안 치료는 해야겠지만 많이 나아졌습니다.”
“이젠 일부러 암기 따위에 다치지 마라.”
차분하던 수련의 기운이 그 순간 완전히 흐트러졌다. 흐트러진 수련과 달리 다리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태휼의 눈은 차분하다 못해 가라앉아 있었다.
진정하려 했지만 심장이 뛰었다. 분명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자객과 싸웠던 순간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보셨습니까?”
“아니. 그저 운을 띄워 봤을 뿐이다.”
“…….”
“거기에 네가 걸렸을 뿐이지.”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태휼의 눈이 그녀만을 보는 순간, 담담한 속에 감추었던 수련이 완전히 무너졌다. 그가 자신의 다리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수련이 뒷걸음질을 쳤다.
어느새 일어난 그가 수련의 팔을 붙잡았다.
반년을 숨기려 했던 일이 한순간에 드러났다. 아직 아무런 결과도 없는 상태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위랑.”
태휼이 그녀를 불렀지만 대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그는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꼬투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렸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죽이실 것입니까?”
태휼이 눈을 좁혔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나타났던 죄책감 서린 표정도, 숨기려 했던 것이 하나씩 밝혀질 때의 당혹스러운 표정도 아니었다.
수련의 눈에서 처음으로 공포가 엿보였다. 언제나 담담하게 자신을 가리고 있던 그녀의 본모습이 지금 드러나고 있었다.
“폐하를 속이려 하였으니 죽이실 것입니까? 처음 언약과는 다르게 폐하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으니 목숨을 거두실 것입니까?”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줄이 느슨해진 것처럼 수련의 목소리에는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불안이 태휼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당장에라도 그녀가 사라져 버릴 것처럼 위태롭게 다가왔다.
“짐이 널 죽이려 한다면 얌전히 죽어 줄 건가?”
무를 쓸 수 있다는 것도, 사내 못지않게 정치적 상황을 꿰뚫어 보고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들켜 버렸다. 어쩌면 그는 수련이 여가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려 했는지도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적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여가가 황제로 바뀌었을 뿐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만의 철저한 착각이었다.
“소녀가 스스로 죽기를 원하십니까?”
“짐을 속인 대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나?”
시선을 마주하는 모습이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지만, 나오는 대화는 서늘하다 못해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언제든지 그녀의 목줄을 뜯을 수 있는 맹수 앞에서 이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소녀의 가족을 풀어 주신다는 황명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럼 그 자리에서 죽겠습니다.”
“필요 없어진 이들에게 줄 자비는 없단다. 위랑.”
“폐하께서는 이유 없는 목숨을 거둬 가시지 않습니다. 제가 봐 왔던 폐하께서는 누구보다도 치밀하고 냉철하신 분입니다.”
체념한 표정과는 다르게 작은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침없었다. 그녀에게 최우선은 언제나 가족이었다. 그녀를 지켜 주지도 못하는 가족에게 왜 목숨까지 걸어 가며 저리 아등바등 매달리는지 알 수 없었다.
“위랑이 짐을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르지. 죄인의 가족을 어찌 살려 놓을 수 있단 말인가.”
가족들에게 쏟는 관심을 자신이 받을 수 있다면, 자신조차 내놓은 채 그들을 지키려 하는 수련의 저 머릿속에 그가 들어갈 수만 있다면 생각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위랑이 직접 말해 보라. 네가 짐이라면 널 어찌하겠는가?”
그의 물음에 참고 있던 인내가 그대로 끊겨 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버티고 있는 상황이 그에게는 결국 유희일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전부인 가족이 태휼에게는 그저 유희를 즐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선택 한들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태휼의 손아귀에서 의미 없는 발버둥을 칠 뿐이었다.
“재미있으십니까?”
“뭐?”
생각지 못한 물음에 태휼이 눈을 좁혔다. 하지만 이미 수련에게는 조금의 인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의 목숨을 이리 대하는 것이 재미있으시냐고 물었습니다.”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저 누구의 제약도 없이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힘을 가진 그는 재미있을지 몰라도 수련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수련이 태휼에게 잡힌 손목을 빼기 위해 손을 비틀었다.
갑작스러운 반항에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픕니다. 놓아주세요. 폐하.”
“싫다면 어찌하겠나?”
노려보던 수련이 태휼의 손을 붙잡았다. 어떻게든 그에게서 빠져나가려는 수련을 보던 그의 눈에 불이 일었다. 수련의 손목을 잡아끌자 그녀가 태휼의 품으로 가볍게 끌려왔다.
도망가려는 수련과 잡으려는 태휼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어차피 이제 숨길 것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더는 피하고 싶지 않았다. 자유로운 수련의 손이 어깨를 노리며 공격해 왔다. 빠른 속도로 치고 들어오는 손을 피한 그가 가는 손목을 낚아챘다. 양 손목을 잡히자 발버둥 치던 다리가 복부를 향해 차고 올라갔다.
“아무도 들어오지 마라!”
방의 소란에 내관이 들어오려하자 태휼이 고함을 질렀다. 손을 뺀 수련이 그의 목을 향해 팔을 뻗었다. 힘이 부족할 뿐, 수련의 움직임은 흑영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분노를 계속 받아 줄 생각 따위 없었다. 하물며 상처가 터지면서 나온 피가 비단옷의 소매 부분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수련이 자세를 잡는 찰나, 그의 손이 작은 어깨를 붙잡았다.
“앗!”
중심을 잃은 수련이 바닥에 쓰러지자, 그가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반항하는 손목을 한 손에 머리 위로 올린 그가 수련과 눈을 마주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에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황제인 그에게 적의를 드러냈음에도 화가 나지 않았다. 저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조차 불경임에도 분노보다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흥분이 그를 흔들고 있었다.
이대로 안아 버릴까? 오랫동안 느껴 보지 못했던 갈증이 그녀를 볼 때마다 그를 조금씩 잠식해 가고 있었다.
“짐을 봐라.”
코앞에서 느껴지는 그의 숨소리조차 싫다는 듯 수련이 고개를 돌렸다. 철저히 거부하는 그녀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린 것도 잠시 고개를 돌리면서 보이는 매끈한 목선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도 모르게 그가 수련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아!”
그의 촉감에 놀란 수련이 숨을 멈추었지만, 태휼은 멈추지 않았다. 희고 가는 목에 입술을 묻으니 맥이 뛰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힘껏 빨아들이며 혀로 자극하니 수련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코를 간질이는 살내음도, 입술에 느껴지는 피부의 감촉도 달금하니 그를 충동질하였다. 어차피 그의 소유인 여인, 이대로 품에 안아도 상관없었다.
“위랑.”
“…….”
“짐은 여상환처럼 가족을 상대로 힘을 휘두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목에서 느껴지는 잇자국에 수련의 눈이 떠졌다. 놀란 수련이 잠시 몸부림을 쳤지만 상관없다는 듯 하얀 목을 깨물었다.
“흐읍.”
“너에게는 짐이 어떻게 행동할지 약조할 수 없을 것 같구나.”
새어 나오는 비명을 삼키듯 수련이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눈 끝에 눈물이 맺혔지만,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하얀 목에 거듭 이를 세워 물었지만, 그 이상으로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수련의 목에 그가 남긴 잇자국이 붉게 달아올랐다. 거듭 흔적을 남길수록 온몸의 열기가 그를 미치게 하였지만, 본능에 따르는 대신 이성으로 억눌렀다.
충동으로 부서뜨리고 억지로 손에 넣기에는 수련의 능력이 아까웠다. 아직 그는 수련에게 더 많은 것을 원했다.
“폐, 폐하. 문성공께서 드시었사옵니다.”
내시감의 말에 그제야 태휼이 몸을 일으켰다. 틈이 생기자 수련이 있는 힘껏 몸을 뒤로 뺐다. 붙잡혀 있던 손목과 목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녀를 보는 태휼은 눈썹조차 꿈틀대지 않았다.
“위랑은 밖에서 기다려라.”
“…….”
“문성공은 들어오라.”
무슨 이야기를 한들 태휼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거듭 물리고 빨린 목이 따갑고 아팠지만 지금만큼은 몸의 상처보다도 그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끔찍하게 싫었다.
몸의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질끈 입술을 깨물며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잠시 비틀대기는 했지만, 수련이 억지로 참아 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수련이 태연히 앉아 있는 태휼을 향해 몸을 숙였다.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한 자세였지만 그를 바라보는 수련의 눈은 차가웠다.
힘겹게 상황을 끝낸 수련이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간신히 추슬렀던 정신이 문밖의 사내를 보는 순간, 다시 격하게 흔들렸다.
놀란 그녀를 달래듯 문밖의 사내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지난밤, 승정궁에서 만났던 부겸이 수련의 앞에 문성공으로 서 있었다.
*
태휼이 권좌에 오른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이복형제인 다른 황자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황후의 유일한 소생이었던 그를 제외한 후궁의 소생들은 황제인 그에게 몸을 숙이는 대신 세를 가진 귀족들과 후일을 도모하려 하였고, 그 상황에서 태휼이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죄를 밝혀 귀양을 보내기도 하였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도 일어났다.
태휼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았어도, 그의 뒤에 여상환이 있었기에 누구도 나서지 못하였다.
그렇게 여상환에게 이용당하며, 또 그를 이용하며 태휼은 후환이 될 이들을 하나씩 제거하였다.
그리고 문성공 문부겸은 현재 남아 있는 세 명의 후계 중 하나였다.
“영천왕께서는 잘 계시나?”
준비된 주안상이 차려지고, 태휼이 술병을 들자 부겸이 자연스레 잔을 내밀었다.
“아버지야 언제나 기운이 넘치는 분이시지요. 다만 소인이 그 기운을 못 따라갈 뿐입니다.”
“음.”
“그나저나 소인이 없는 사이, 폐하께서도 제법 재미난 일을 벌이셨더군요. 여상환을 이리 빠르게 쳐 내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선제의 동생인 영천왕은 귀족들의 폭정에 질려 동쪽의 군사 요지인 당형성에 틀어박힌 채, 이민족을 상대로 전쟁을 할 뿐 황궁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의 아들인 부겸은 방계로서 후계 서열에 가까이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태휼의 편에 가장 가까이에 서 있는 황족이기도 하였다.
“혹 가까이에 두시는 위랑이라는 이가 여상환을 쳐 내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요?”
위랑이라는 단어에 태휼이 눈을 좁혔다. 몸은 동쪽에 있었어도 눈과 귀는 황궁을 향하고 있다는 것인가. 하물며 그러한들 시작부터 수련의 이야기라니 눈에 거슬렸다.
“도움이라…… 이해관계가 맞았다는 게 더 어울리겠지. 그나저나 둘이 초면은 아닌 것 같더군.”
서늘한 말투에 부겸이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의심하고 투쟁하며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답게 태휼의 눈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어설픈 거짓말은 독이 되어 부겸의 목숨을 노릴 뿐이었다.
“늦은 밤, 폐하께 인사드리기가 송구하여 승정궁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위랑이 오더군요. 그때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소인, 모르는 일이 더 많사옵니다만 위랑과 황후와의 사이가 각별한 듯하였습니다. 본의 아니게 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울고 있었다?”
“대성통곡을 한 건 아닙니다만.”
술잔을 입술에 대며 태휼이 눈을 좁혔다. 하지만 그것뿐,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도리어 수련에 대해 말을 꺼낸 건 태휼이 아니라 지켜보던 부겸이였다.
“관심이 가기는 했지만, 호락호락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혹 정인으로 데려오신 것입니까?”
부겸의 말에 태휼이 술잔을 비우면서 실소를 흘렸다. 지존의 자리에서 가장 필요 없는 존재가 바로 정인이었다. 황제에게 여인은 필요에 의해 취했다가도, 상황에 따라 버려야 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황제에게 정인은 약점이 될 뿐이었다. 그의 삶에 그런 존재는 없다.
“위랑은 여상환의 사생아다. 여가를 가지고 논 수단이 좋아 데리고 있지.”
“그래 봤자 겨우 어린 여인일 뿐입니다. 수단이 좋아 보았자…….”
태휼의 표정을 본 부겸이 말을 삼켰다. 지난밤 그가 본 수련은 또래보다 겁이 없을 뿐, 특별한 모습이나 비범한 생각을 가진 여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태휼보다도 정확하다고 믿었던 부겸이였다. 그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일까?
“팔은?”
이전에 있었던 이들에게는 손 하나 대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건만, 그는 그녀에게만큼은 거침없이 다가왔다. 하물며 비나 궁녀들에게도 먼저 다가가지 않는 그였다.
“한동안 치료는 해야겠지만 많이 나아졌습니다.”
“이젠 일부러 암기 따위에 다치지 마라.”
차분하던 수련의 기운이 그 순간 완전히 흐트러졌다. 흐트러진 수련과 달리 다리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태휼의 눈은 차분하다 못해 가라앉아 있었다.
진정하려 했지만 심장이 뛰었다. 분명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자객과 싸웠던 순간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보셨습니까?”
“아니. 그저 운을 띄워 봤을 뿐이다.”
“…….”
“거기에 네가 걸렸을 뿐이지.”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태휼의 눈이 그녀만을 보는 순간, 담담한 속에 감추었던 수련이 완전히 무너졌다. 그가 자신의 다리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수련이 뒷걸음질을 쳤다.
어느새 일어난 그가 수련의 팔을 붙잡았다.
반년을 숨기려 했던 일이 한순간에 드러났다. 아직 아무런 결과도 없는 상태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위랑.”
태휼이 그녀를 불렀지만 대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그는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꼬투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렸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죽이실 것입니까?”
태휼이 눈을 좁혔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나타났던 죄책감 서린 표정도, 숨기려 했던 것이 하나씩 밝혀질 때의 당혹스러운 표정도 아니었다.
수련의 눈에서 처음으로 공포가 엿보였다. 언제나 담담하게 자신을 가리고 있던 그녀의 본모습이 지금 드러나고 있었다.
“폐하를 속이려 하였으니 죽이실 것입니까? 처음 언약과는 다르게 폐하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으니 목숨을 거두실 것입니까?”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줄이 느슨해진 것처럼 수련의 목소리에는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불안이 태휼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당장에라도 그녀가 사라져 버릴 것처럼 위태롭게 다가왔다.
“짐이 널 죽이려 한다면 얌전히 죽어 줄 건가?”
무를 쓸 수 있다는 것도, 사내 못지않게 정치적 상황을 꿰뚫어 보고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들켜 버렸다. 어쩌면 그는 수련이 여가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려 했는지도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적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여가가 황제로 바뀌었을 뿐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만의 철저한 착각이었다.
“소녀가 스스로 죽기를 원하십니까?”
“짐을 속인 대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나?”
시선을 마주하는 모습이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지만, 나오는 대화는 서늘하다 못해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언제든지 그녀의 목줄을 뜯을 수 있는 맹수 앞에서 이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소녀의 가족을 풀어 주신다는 황명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럼 그 자리에서 죽겠습니다.”
“필요 없어진 이들에게 줄 자비는 없단다. 위랑.”
“폐하께서는 이유 없는 목숨을 거둬 가시지 않습니다. 제가 봐 왔던 폐하께서는 누구보다도 치밀하고 냉철하신 분입니다.”
체념한 표정과는 다르게 작은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침없었다. 그녀에게 최우선은 언제나 가족이었다. 그녀를 지켜 주지도 못하는 가족에게 왜 목숨까지 걸어 가며 저리 아등바등 매달리는지 알 수 없었다.
“위랑이 짐을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르지. 죄인의 가족을 어찌 살려 놓을 수 있단 말인가.”
가족들에게 쏟는 관심을 자신이 받을 수 있다면, 자신조차 내놓은 채 그들을 지키려 하는 수련의 저 머릿속에 그가 들어갈 수만 있다면 생각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위랑이 직접 말해 보라. 네가 짐이라면 널 어찌하겠는가?”
그의 물음에 참고 있던 인내가 그대로 끊겨 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버티고 있는 상황이 그에게는 결국 유희일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전부인 가족이 태휼에게는 그저 유희를 즐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선택 한들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태휼의 손아귀에서 의미 없는 발버둥을 칠 뿐이었다.
“재미있으십니까?”
“뭐?”
생각지 못한 물음에 태휼이 눈을 좁혔다. 하지만 이미 수련에게는 조금의 인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의 목숨을 이리 대하는 것이 재미있으시냐고 물었습니다.”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저 누구의 제약도 없이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힘을 가진 그는 재미있을지 몰라도 수련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수련이 태휼에게 잡힌 손목을 빼기 위해 손을 비틀었다.
갑작스러운 반항에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픕니다. 놓아주세요. 폐하.”
“싫다면 어찌하겠나?”
노려보던 수련이 태휼의 손을 붙잡았다. 어떻게든 그에게서 빠져나가려는 수련을 보던 그의 눈에 불이 일었다. 수련의 손목을 잡아끌자 그녀가 태휼의 품으로 가볍게 끌려왔다.
도망가려는 수련과 잡으려는 태휼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어차피 이제 숨길 것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더는 피하고 싶지 않았다. 자유로운 수련의 손이 어깨를 노리며 공격해 왔다. 빠른 속도로 치고 들어오는 손을 피한 그가 가는 손목을 낚아챘다. 양 손목을 잡히자 발버둥 치던 다리가 복부를 향해 차고 올라갔다.
“아무도 들어오지 마라!”
방의 소란에 내관이 들어오려하자 태휼이 고함을 질렀다. 손을 뺀 수련이 그의 목을 향해 팔을 뻗었다. 힘이 부족할 뿐, 수련의 움직임은 흑영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분노를 계속 받아 줄 생각 따위 없었다. 하물며 상처가 터지면서 나온 피가 비단옷의 소매 부분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수련이 자세를 잡는 찰나, 그의 손이 작은 어깨를 붙잡았다.
“앗!”
중심을 잃은 수련이 바닥에 쓰러지자, 그가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반항하는 손목을 한 손에 머리 위로 올린 그가 수련과 눈을 마주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에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황제인 그에게 적의를 드러냈음에도 화가 나지 않았다. 저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조차 불경임에도 분노보다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흥분이 그를 흔들고 있었다.
이대로 안아 버릴까? 오랫동안 느껴 보지 못했던 갈증이 그녀를 볼 때마다 그를 조금씩 잠식해 가고 있었다.
“짐을 봐라.”
코앞에서 느껴지는 그의 숨소리조차 싫다는 듯 수련이 고개를 돌렸다. 철저히 거부하는 그녀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린 것도 잠시 고개를 돌리면서 보이는 매끈한 목선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도 모르게 그가 수련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아!”
그의 촉감에 놀란 수련이 숨을 멈추었지만, 태휼은 멈추지 않았다. 희고 가는 목에 입술을 묻으니 맥이 뛰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힘껏 빨아들이며 혀로 자극하니 수련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코를 간질이는 살내음도, 입술에 느껴지는 피부의 감촉도 달금하니 그를 충동질하였다. 어차피 그의 소유인 여인, 이대로 품에 안아도 상관없었다.
“위랑.”
“…….”
“짐은 여상환처럼 가족을 상대로 힘을 휘두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목에서 느껴지는 잇자국에 수련의 눈이 떠졌다. 놀란 수련이 잠시 몸부림을 쳤지만 상관없다는 듯 하얀 목을 깨물었다.
“흐읍.”
“너에게는 짐이 어떻게 행동할지 약조할 수 없을 것 같구나.”
새어 나오는 비명을 삼키듯 수련이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눈 끝에 눈물이 맺혔지만,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하얀 목에 거듭 이를 세워 물었지만, 그 이상으로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수련의 목에 그가 남긴 잇자국이 붉게 달아올랐다. 거듭 흔적을 남길수록 온몸의 열기가 그를 미치게 하였지만, 본능에 따르는 대신 이성으로 억눌렀다.
충동으로 부서뜨리고 억지로 손에 넣기에는 수련의 능력이 아까웠다. 아직 그는 수련에게 더 많은 것을 원했다.
“폐, 폐하. 문성공께서 드시었사옵니다.”
내시감의 말에 그제야 태휼이 몸을 일으켰다. 틈이 생기자 수련이 있는 힘껏 몸을 뒤로 뺐다. 붙잡혀 있던 손목과 목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녀를 보는 태휼은 눈썹조차 꿈틀대지 않았다.
“위랑은 밖에서 기다려라.”
“…….”
“문성공은 들어오라.”
무슨 이야기를 한들 태휼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거듭 물리고 빨린 목이 따갑고 아팠지만 지금만큼은 몸의 상처보다도 그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끔찍하게 싫었다.
몸의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질끈 입술을 깨물며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잠시 비틀대기는 했지만, 수련이 억지로 참아 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수련이 태연히 앉아 있는 태휼을 향해 몸을 숙였다.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한 자세였지만 그를 바라보는 수련의 눈은 차가웠다.
힘겹게 상황을 끝낸 수련이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간신히 추슬렀던 정신이 문밖의 사내를 보는 순간, 다시 격하게 흔들렸다.
놀란 그녀를 달래듯 문밖의 사내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지난밤, 승정궁에서 만났던 부겸이 수련의 앞에 문성공으로 서 있었다.
태휼이 권좌에 오른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이복형제인 다른 황자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황후의 유일한 소생이었던 그를 제외한 후궁의 소생들은 황제인 그에게 몸을 숙이는 대신 세를 가진 귀족들과 후일을 도모하려 하였고, 그 상황에서 태휼이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죄를 밝혀 귀양을 보내기도 하였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도 일어났다.
태휼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았어도, 그의 뒤에 여상환이 있었기에 누구도 나서지 못하였다.
그렇게 여상환에게 이용당하며, 또 그를 이용하며 태휼은 후환이 될 이들을 하나씩 제거하였다.
그리고 문성공 문부겸은 현재 남아 있는 세 명의 후계 중 하나였다.
“영천왕께서는 잘 계시나?”
준비된 주안상이 차려지고, 태휼이 술병을 들자 부겸이 자연스레 잔을 내밀었다.
“아버지야 언제나 기운이 넘치는 분이시지요. 다만 소인이 그 기운을 못 따라갈 뿐입니다.”
“음.”
“그나저나 소인이 없는 사이, 폐하께서도 제법 재미난 일을 벌이셨더군요. 여상환을 이리 빠르게 쳐 내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선제의 동생인 영천왕은 귀족들의 폭정에 질려 동쪽의 군사 요지인 당형성에 틀어박힌 채, 이민족을 상대로 전쟁을 할 뿐 황궁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의 아들인 부겸은 방계로서 후계 서열에 가까이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태휼의 편에 가장 가까이에 서 있는 황족이기도 하였다.
“혹 가까이에 두시는 위랑이라는 이가 여상환을 쳐 내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요?”
위랑이라는 단어에 태휼이 눈을 좁혔다. 몸은 동쪽에 있었어도 눈과 귀는 황궁을 향하고 있다는 것인가. 하물며 그러한들 시작부터 수련의 이야기라니 눈에 거슬렸다.
“도움이라…… 이해관계가 맞았다는 게 더 어울리겠지. 그나저나 둘이 초면은 아닌 것 같더군.”
서늘한 말투에 부겸이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의심하고 투쟁하며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답게 태휼의 눈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어설픈 거짓말은 독이 되어 부겸의 목숨을 노릴 뿐이었다.
“늦은 밤, 폐하께 인사드리기가 송구하여 승정궁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위랑이 오더군요. 그때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소인, 모르는 일이 더 많사옵니다만 위랑과 황후와의 사이가 각별한 듯하였습니다. 본의 아니게 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울고 있었다?”
“대성통곡을 한 건 아닙니다만.”
술잔을 입술에 대며 태휼이 눈을 좁혔다. 하지만 그것뿐,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도리어 수련에 대해 말을 꺼낸 건 태휼이 아니라 지켜보던 부겸이였다.
“관심이 가기는 했지만, 호락호락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혹 정인으로 데려오신 것입니까?”
부겸의 말에 태휼이 술잔을 비우면서 실소를 흘렸다. 지존의 자리에서 가장 필요 없는 존재가 바로 정인이었다. 황제에게 여인은 필요에 의해 취했다가도, 상황에 따라 버려야 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황제에게 정인은 약점이 될 뿐이었다. 그의 삶에 그런 존재는 없다.
“위랑은 여상환의 사생아다. 여가를 가지고 논 수단이 좋아 데리고 있지.”
“그래 봤자 겨우 어린 여인일 뿐입니다. 수단이 좋아 보았자…….”
태휼의 표정을 본 부겸이 말을 삼켰다. 지난밤 그가 본 수련은 또래보다 겁이 없을 뿐, 특별한 모습이나 비범한 생각을 가진 여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태휼보다도 정확하다고 믿었던 부겸이였다. 그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