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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때로는 능력보다도 절박한 상황이 사람을 만들지.”
바람에 흘러가듯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태휼을 부겸이 조용히 응시하였다. 아무것도 없던 상황에서 권좌의 자리에 앉은 황제, 모두가 태휼이 선제처럼 귀족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랬던 확신을 조롱하듯 태휼은 하나씩 자신이 누려야 할 것을 찾아왔다. 피에 굶주린 폭군, 자비라고는 없는 잔인한 황제. 수많은 악명이 그에게 생겨났지만 태휼은 그것에 신경 쓰기보다는 더 냉철한 눈으로 앞만 보며 나아갔다.
부겸의 시선을 받던 태휼이 생각났다는 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지난번 알아 오라 한 것은 어찌 되었는가?”
태휼의 물음에 부겸이 품에 넣어 놓았던 것을 꺼내 황제에게 내밀었다. 부겸이 태휼에게 내민 것은 청녹색 빛이 도는 잘 벼려진 화살촉이었다.
“금족이 만든 화살촉입니다. 어찌 만드는지는 그들만의 비밀이라 알 수 없었습니다만 살을 꿰뚫으면 상처의 주변부터 썩기 시작해 끝에는 활을 맞은 이의 심장을 멈추게 하여 피를 쏟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걸 한비의 아버지인 대홍려가 모으고 있었습니다.”
태휼의 손이 잡은 화살촉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전체적인 모양이나 무게가 호연에서 쓰는 것과는 제법 달랐다.
“이것 말고도 다른 무기들도 꾸준히 사들이는 정황이 보였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장군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대홍려의 본가로 오고 가고 있었습니다.”
“대홍려가 세를 모은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최악의 상황에는 역시 역모가 아니겠습니까?”
“호연의 병사들이 쓰기 어려운 이 금족의 무기로 말인가.”
태휼의 반문에 부겸이 눈을 좁혔다. 부겸을 보던 태휼이 손에 들고 있던 화살촉을 주안상에 가볍게 던졌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구르는 화살촉을 보던 태휼이 멈췄던 말을 이었다.
“호연의 화살은 금족의 것과는 달리 살을 썩게 하지는 못한다. 대신 금족의 화살보다는 가볍고 잘 벼린 검만큼이나 날카롭지. 금족의 화살이 살을 썩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호연의 화살은 단번에 적의 급소를 꿰뚫어 목숨을 거둔다.”
“대홍려의 목적이 역모가 아니라는 것입니까? 장군들과 밀회를 나누고 무기를 사들이는 그가 결백하다는 것입니까?”
“대홍려는 역모까지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 정도의 그릇은 아니니까. 그저 세력을 키울 생각으로 무기를 사들이고 장군을 만나는 것이겠지. 다만 대홍려 뒤에 있는 이는 다를지도 모르겠군.”
“다른 이가 있다는 말씀이시옵니까?”
“대홍려에게 금족에게 철을 사들이고, 병사를 키울 정도의 재력이 있던가? 내가 아는 그는 그 정도의 수완과 재력이 있지는 않았지.”
술이 담긴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태휼의 눈에 위험한 빛이 감돌았다. 여상환을 죽였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차피 황제인 그가 평생을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차라리 역모를 준비하는 것이라면 빠를수록 좋았다.
“위랑에게 관심이 있다고 했던가?”
갑자기 대화의 내용이 대홍려에서 수련으로 돌아오자 부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내내 귀족 여인들만 보아왔던 부겸이였으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부겸이 채워놓은 술잔을 비우며 태휼이 가벼운 어조로 말하였다.
“지금 나에게 말한 것을 위랑에게 물어보라. 재미난 대답을 들을 것이다.”
“여인 따위가 어찌 이런 것을 알겠습니까?”
부겸의 말에 미소를 지을 뿐, 태휼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전과는 다른 태휼의 행동에 부겸이 눈을 좁혔다. 수많은 후궁과 황후를 받아들였음에도 조금의 곁도 내주지 않았던 그였다.
그랬던 그에게 위랑이라는 존재가 단순한 재미일 뿐일까?
문득 드는 의문에 부겸이 잡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단순한 호기심과 재미로 곁에 두시는 것이라면 훗날 소인에게 위랑을 주시겠습니까?”
미소 띤 부겸의 요구에 태휼의 눈을 좁혔다. 부겸을 상대하는 내내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위랑을 달라?”
“물론 폐하의 유희가 충분히 끝나신 후에…….”
“문부겸.”
달라진 어조에 부겸이 당황한 것도 잠시, 태휼에게 밀려오는 살기에 숨을 들이마셨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바닥에 몸을 붙인 채, 태휼에게 고개를 숙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부겸이 태휼의 살기를 받아 냈다.
“폐, 폐하.”
“언제부터 짐의 사촌이 짐의 소유를 나눠 가지는 사이가 되었던가?”
“……소인이.”
“짐이 너에게 과한 관심을 준 것인가?”
태휼의 입가에 맺혀 있는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부겸의 목은 그의 살기로 몇 번이나 베이고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입술을 깨물고 숨을 멈춰 가며 버텨 내던 부겸이 결국 태휼의 앞에 머리를 숙였다.
“소인. 사촌이기 전에 폐하의 종일 뿐입니다. 어찌 그 사실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부겸의 이마에 맺혀 있던 땀이 바닥에 한 방울씩 떨어졌다. 황위 계승 서열에 있으면서도 부겸이 살아남은 이유는 하나였다. 모두가 태휼을 얕보며 자신만의 세력을 꿈꿀 때, 부겸은 그의 능력을 보고 머리를 숙였다.
하물며 정치에 관심 없는 영천왕이 태휼에게 힘이 되어 주었기에 지킬 수 있었던 목숨이었다.
“소인. 다시는 이런 망언을 내뱉지 않을 것이옵니다. 자비를 내려 주시옵소서. 폐하.”
서늘한 눈으로 부겸을 내려 보던 태휼이 몸의 살기를 거두었다. 그제야 부겸의 입에서 힘겨운 숨이 토해졌다.
“짐에게도 너는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귀한 사촌이지. 짐의 기대를 저버리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위랑에 대한 관심은 접어라.”
자신도 모르게 부겸이 고개를 들어 태휼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태휼이 입을 열었다.
“위랑은 짐의 것이다.”
날카로운 검을 눈에 품고 있는 것처럼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오한이 생겼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소유를 주장하는 태휼을 보며 부겸은 더는 충동적으로 입을 놀릴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너와 이러고 싶지 않다. 일어나라.”
고개를 숙인 부겸이 답답했는지 태휼이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명령했다.
충동적으로 친 장난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몸으로 느낀 부겸이 몸을 일으켜 태휼이 내미는 술잔을 받았다.
태휼에게 몸을 숙이고, 지켜 낸 목숨.
부겸에게 태휼은 여전히 몸을 숙이고 따라야 할 황제였다.
*
밖으로 나온 수련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옷의 소매를 찢어 목을 가리는 일이었다. 수련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태화전의 내관이 그녀를 보았지만, 한번 시작된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위, 위랑.”
거듭 물린 잇자국을 완전히 가린 수련이 내관을 보았다. 들어갈 때만 해도 없던 상처, 하물며 이로 거듭 물리고 빨려서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위랑. 폐하께서 밖에서 기다리라 명하셨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내시감이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의 눈을 물끄러미 보던 수련이 감정을 추스르듯 소리 없이 숨을 내쉬었다.
가족을 생각한다면 이런 식의 행동은 좋지 않다. 그럼에도 지금만큼은 그가 하라는 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내시감께서는 무슨 마음으로 저분을 모시는 것입니까?”
“네년이 지금 무슨 물음을 하는 것이냐!”
수련의 물음에 놀란 유 내관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유 내관의 고함에도 수련의 눈은 내시감만을 보고 있었다. 감정을 터트리거나 울먹이지는 않았지만 수련의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담담하게 참고 있어도 기댈 곳조차 아무도 없는 궁에서 버티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까지 있었던 이들과 수련을 대하는 태휼의 행동은 달랐다. 오랫동안 태휼을 모신 내시감도 알지 못하는 그의 생각을 이제 반년인 수련이 알 리 없었다.
“정해진 답이 있어 모신다면 이 자리에 있을 수 없겠지요. 다만 모실 수 있는 분이기에 따를 뿐입니다. 어쩌면 위랑이 지금 찾고 있는 대답을 소인은 찾은 것일지도 모르지요.”
“소녀는 평생 모를 것 같습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숨기려 했던 것은 전부 밝혀졌다. 가장 마지막 수로 생각했던 도망조차 무의미해진 상황에서 수련이 할 수 있는 생각은 없었다.
내시감처럼 순응하고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여상환처럼 반항하고 싸울 것인가.
애초에 수련에게는 처음의 선택지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네년이 감히 내시감께!”
“유 내관은 가만히 있게.”
“내시감!”
억울한 유 내관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매질해 궁 밖으로 내보내도 시원치 않았건만, 황제는 물론이고 내시감조차 위랑을 곱게 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역적의 딸, 그것도 제 아비를 팔아서 살아남은 년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내시감. 더는 안 되겠습니다. 폐하나 내시감께서는 왜 저년을 귀히 여기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소인은 저 패악을 더는 볼 수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 못 들었는가!”
“내시감!”
“폐하께 지금의 대화를 들려 드릴 생각인가! 당장 제자리로 돌아가게!”
내시감의 호통에 유내관의 눈이 수련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유 내관보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황제가 있는 태화전을 노려보던 수련이였다.
“옷이 이리되었으니 처소로 돌아가겠습니다.”
“위랑.”
“죄송합니다.”
내시감이 그녀를 좋게 보고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수련이 잘 알고 있었다. 앞일을 생각하면 이리 행동해서는 안 되었지만 지금은 목에 남아 있는 잇자국만큼이나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유 내관이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수련은 외면하였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든 거침없이 걸어가던 걸음이 사람의 인적이 없는 곳에 도착해서야 멈추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수련이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 있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냈다. 버텨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게 먹었던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예전에는 이럴 때마다 의지할 가족이라도 있었지만, 이곳에서 수련은 철저히 혼자였다.
몸의 힘이 빠지는 듯 수련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족을 만나기는커녕 황제에게 몹쓸 짓만 당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황제가 그녀를 곁에 두는 이유는 발악할 대로 발악하다가 포기하는 모습을 보기 위함일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에게 여상환은 같은 하늘에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원수였으므로.
순간 그녀를 내려다보면 황제의 시선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흐읍.”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손으로 막으며 수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진정하려 했지만, 한번 떨리기 시작한 몸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처음부터 거래라는 것을 하면 안 되었다. 목숨을 잃더라도 도망쳤어야 했다.
가라앉은 눈에 짙은 어둠이 스며드는 순간, 민 부인의 모습이 눈을 스쳐 갔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몸은 여전히 떨고 있었지만, 입술을 굳게 문 수련의 눈은 공포에 질렸던 좀 전과는 달리 차분하였다.
“누구 마음대로.”
수련의 눈에 천천히 짙은 독기가 스며들었다.
황제의 앞에 몸을 숙이고, 말을 따르다 보면 기회가 올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황제에게 먼저 죽게 될 것이다.
“당신 마음대로 되지 않아.”
황제는 무섭다.
죽일 기세로 노려보는 눈부터, 무엇이든 꿰뚫어 볼 것 같은 날카로운 시선도 찍어 누르듯 압박하는 그의 살기도 소름 끼치게 두려웠다.
입술을 깨물며 주저앉아 있던 수련이 몸을 일으켰다. 힘이 빠진 몸이 잠시 비틀거렸지만 수련은 악착같이 몸을 일으켰다.
“죽일 생각이면 죽여 보라지.”
그에게 물린 목이 욱신욱신했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목의 상처가 느껴질수록 수련의 다짐 또한 단단해졌다.
“위랑! 위랑!”
주먹을 쥐고 서 있는 수련의 뒤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가에 남아 있는 눈물을 닦은 그녀가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몸을 돌렸다.
“한참을 찾았습니다. 위랑.”
“…….”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
“위랑. 어서 가셔야 합니다!”
예전 같았다면 서둘러 걸었을 수련이 그 자리에 있자 내관이 채근하였다. 하지만 수련의 눈은 내관 너머의 사내를 향하고 있었다. 수련의 시선에 몸을 돌린 내관이 황급히 몸을 숙였다.
“무, 문성공!”
“대화는 끝내셨습니까?”
태연히 몸을 숙이는 수련을 보며 부겸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비나 한비였다면 보란 듯이 내놓고 다녔을 황제의 잇자국을 저렇게 가리는 여인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지난밤에는 실례하였습니다. 소녀, 문성공을 뵌 적이 없는 터라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승정궁에서의 모습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부겸을 대하는 수련의 자세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반듯한 그녀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승정궁에서의 모습이 더 마음에 드는 그였다.
“문성공. 폐하께서 위랑을 데려오라 명하였습니다. 서둘러 가야 하니…….”
“뭐 조금 늦는다고 큰일이야 나겠는가?”
“무, 문성공.”
“위랑은 어떠한가? 그대가 괜찮다면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말이지.”
“문성공! 이러시면 아니 되십니다!”
“자객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았으니 잠깐 정도는 시간을 내 주는 것도 여인의 미덕이지 않겠나?”
“문성공!”
내관이 거듭 부겸을 말렸지만, 그는 수련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은 태화전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황궁의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것을 부겸에게 들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소녀에게 여인의 미덕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따르겠습니다. 앞장서시지요.”
“위랑!”
“폐하께는 내가 위랑을 잠시 데려갔다고 하거라.”
울상인 내관을 달랜 부겸이 수련을 지나 걸음을 옮겼다. 내관을 향해 고개를 숙인 수련이 조용히 내관의 뒤를 따랐다.
“때로는 능력보다도 절박한 상황이 사람을 만들지.”
바람에 흘러가듯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태휼을 부겸이 조용히 응시하였다. 아무것도 없던 상황에서 권좌의 자리에 앉은 황제, 모두가 태휼이 선제처럼 귀족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랬던 확신을 조롱하듯 태휼은 하나씩 자신이 누려야 할 것을 찾아왔다. 피에 굶주린 폭군, 자비라고는 없는 잔인한 황제. 수많은 악명이 그에게 생겨났지만 태휼은 그것에 신경 쓰기보다는 더 냉철한 눈으로 앞만 보며 나아갔다.
부겸의 시선을 받던 태휼이 생각났다는 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지난번 알아 오라 한 것은 어찌 되었는가?”
태휼의 물음에 부겸이 품에 넣어 놓았던 것을 꺼내 황제에게 내밀었다. 부겸이 태휼에게 내민 것은 청녹색 빛이 도는 잘 벼려진 화살촉이었다.
“금족이 만든 화살촉입니다. 어찌 만드는지는 그들만의 비밀이라 알 수 없었습니다만 살을 꿰뚫으면 상처의 주변부터 썩기 시작해 끝에는 활을 맞은 이의 심장을 멈추게 하여 피를 쏟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걸 한비의 아버지인 대홍려가 모으고 있었습니다.”
태휼의 손이 잡은 화살촉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전체적인 모양이나 무게가 호연에서 쓰는 것과는 제법 달랐다.
“이것 말고도 다른 무기들도 꾸준히 사들이는 정황이 보였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장군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대홍려의 본가로 오고 가고 있었습니다.”
“대홍려가 세를 모은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최악의 상황에는 역시 역모가 아니겠습니까?”
“호연의 병사들이 쓰기 어려운 이 금족의 무기로 말인가.”
태휼의 반문에 부겸이 눈을 좁혔다. 부겸을 보던 태휼이 손에 들고 있던 화살촉을 주안상에 가볍게 던졌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구르는 화살촉을 보던 태휼이 멈췄던 말을 이었다.
“호연의 화살은 금족의 것과는 달리 살을 썩게 하지는 못한다. 대신 금족의 화살보다는 가볍고 잘 벼린 검만큼이나 날카롭지. 금족의 화살이 살을 썩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호연의 화살은 단번에 적의 급소를 꿰뚫어 목숨을 거둔다.”
“대홍려의 목적이 역모가 아니라는 것입니까? 장군들과 밀회를 나누고 무기를 사들이는 그가 결백하다는 것입니까?”
“대홍려는 역모까지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 정도의 그릇은 아니니까. 그저 세력을 키울 생각으로 무기를 사들이고 장군을 만나는 것이겠지. 다만 대홍려 뒤에 있는 이는 다를지도 모르겠군.”
“다른 이가 있다는 말씀이시옵니까?”
“대홍려에게 금족에게 철을 사들이고, 병사를 키울 정도의 재력이 있던가? 내가 아는 그는 그 정도의 수완과 재력이 있지는 않았지.”
술이 담긴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태휼의 눈에 위험한 빛이 감돌았다. 여상환을 죽였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차피 황제인 그가 평생을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차라리 역모를 준비하는 것이라면 빠를수록 좋았다.
“위랑에게 관심이 있다고 했던가?”
갑자기 대화의 내용이 대홍려에서 수련으로 돌아오자 부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내내 귀족 여인들만 보아왔던 부겸이였으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부겸이 채워놓은 술잔을 비우며 태휼이 가벼운 어조로 말하였다.
“지금 나에게 말한 것을 위랑에게 물어보라. 재미난 대답을 들을 것이다.”
“여인 따위가 어찌 이런 것을 알겠습니까?”
부겸의 말에 미소를 지을 뿐, 태휼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전과는 다른 태휼의 행동에 부겸이 눈을 좁혔다. 수많은 후궁과 황후를 받아들였음에도 조금의 곁도 내주지 않았던 그였다.
그랬던 그에게 위랑이라는 존재가 단순한 재미일 뿐일까?
문득 드는 의문에 부겸이 잡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단순한 호기심과 재미로 곁에 두시는 것이라면 훗날 소인에게 위랑을 주시겠습니까?”
미소 띤 부겸의 요구에 태휼의 눈을 좁혔다. 부겸을 상대하는 내내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위랑을 달라?”
“물론 폐하의 유희가 충분히 끝나신 후에…….”
“문부겸.”
달라진 어조에 부겸이 당황한 것도 잠시, 태휼에게 밀려오는 살기에 숨을 들이마셨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바닥에 몸을 붙인 채, 태휼에게 고개를 숙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부겸이 태휼의 살기를 받아 냈다.
“폐, 폐하.”
“언제부터 짐의 사촌이 짐의 소유를 나눠 가지는 사이가 되었던가?”
“……소인이.”
“짐이 너에게 과한 관심을 준 것인가?”
태휼의 입가에 맺혀 있는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부겸의 목은 그의 살기로 몇 번이나 베이고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입술을 깨물고 숨을 멈춰 가며 버텨 내던 부겸이 결국 태휼의 앞에 머리를 숙였다.
“소인. 사촌이기 전에 폐하의 종일 뿐입니다. 어찌 그 사실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부겸의 이마에 맺혀 있던 땀이 바닥에 한 방울씩 떨어졌다. 황위 계승 서열에 있으면서도 부겸이 살아남은 이유는 하나였다. 모두가 태휼을 얕보며 자신만의 세력을 꿈꿀 때, 부겸은 그의 능력을 보고 머리를 숙였다.
하물며 정치에 관심 없는 영천왕이 태휼에게 힘이 되어 주었기에 지킬 수 있었던 목숨이었다.
“소인. 다시는 이런 망언을 내뱉지 않을 것이옵니다. 자비를 내려 주시옵소서. 폐하.”
서늘한 눈으로 부겸을 내려 보던 태휼이 몸의 살기를 거두었다. 그제야 부겸의 입에서 힘겨운 숨이 토해졌다.
“짐에게도 너는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귀한 사촌이지. 짐의 기대를 저버리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위랑에 대한 관심은 접어라.”
자신도 모르게 부겸이 고개를 들어 태휼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태휼이 입을 열었다.
“위랑은 짐의 것이다.”
날카로운 검을 눈에 품고 있는 것처럼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오한이 생겼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소유를 주장하는 태휼을 보며 부겸은 더는 충동적으로 입을 놀릴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너와 이러고 싶지 않다. 일어나라.”
고개를 숙인 부겸이 답답했는지 태휼이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명령했다.
충동적으로 친 장난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몸으로 느낀 부겸이 몸을 일으켜 태휼이 내미는 술잔을 받았다.
태휼에게 몸을 숙이고, 지켜 낸 목숨.
부겸에게 태휼은 여전히 몸을 숙이고 따라야 할 황제였다.
밖으로 나온 수련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옷의 소매를 찢어 목을 가리는 일이었다. 수련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태화전의 내관이 그녀를 보았지만, 한번 시작된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위, 위랑.”
거듭 물린 잇자국을 완전히 가린 수련이 내관을 보았다. 들어갈 때만 해도 없던 상처, 하물며 이로 거듭 물리고 빨려서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위랑. 폐하께서 밖에서 기다리라 명하셨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내시감이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의 눈을 물끄러미 보던 수련이 감정을 추스르듯 소리 없이 숨을 내쉬었다.
가족을 생각한다면 이런 식의 행동은 좋지 않다. 그럼에도 지금만큼은 그가 하라는 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내시감께서는 무슨 마음으로 저분을 모시는 것입니까?”
“네년이 지금 무슨 물음을 하는 것이냐!”
수련의 물음에 놀란 유 내관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유 내관의 고함에도 수련의 눈은 내시감만을 보고 있었다. 감정을 터트리거나 울먹이지는 않았지만 수련의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담담하게 참고 있어도 기댈 곳조차 아무도 없는 궁에서 버티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까지 있었던 이들과 수련을 대하는 태휼의 행동은 달랐다. 오랫동안 태휼을 모신 내시감도 알지 못하는 그의 생각을 이제 반년인 수련이 알 리 없었다.
“정해진 답이 있어 모신다면 이 자리에 있을 수 없겠지요. 다만 모실 수 있는 분이기에 따를 뿐입니다. 어쩌면 위랑이 지금 찾고 있는 대답을 소인은 찾은 것일지도 모르지요.”
“소녀는 평생 모를 것 같습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숨기려 했던 것은 전부 밝혀졌다. 가장 마지막 수로 생각했던 도망조차 무의미해진 상황에서 수련이 할 수 있는 생각은 없었다.
내시감처럼 순응하고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여상환처럼 반항하고 싸울 것인가.
애초에 수련에게는 처음의 선택지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네년이 감히 내시감께!”
“유 내관은 가만히 있게.”
“내시감!”
억울한 유 내관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매질해 궁 밖으로 내보내도 시원치 않았건만, 황제는 물론이고 내시감조차 위랑을 곱게 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역적의 딸, 그것도 제 아비를 팔아서 살아남은 년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내시감. 더는 안 되겠습니다. 폐하나 내시감께서는 왜 저년을 귀히 여기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소인은 저 패악을 더는 볼 수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 못 들었는가!”
“내시감!”
“폐하께 지금의 대화를 들려 드릴 생각인가! 당장 제자리로 돌아가게!”
내시감의 호통에 유내관의 눈이 수련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유 내관보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황제가 있는 태화전을 노려보던 수련이였다.
“옷이 이리되었으니 처소로 돌아가겠습니다.”
“위랑.”
“죄송합니다.”
내시감이 그녀를 좋게 보고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수련이 잘 알고 있었다. 앞일을 생각하면 이리 행동해서는 안 되었지만 지금은 목에 남아 있는 잇자국만큼이나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유 내관이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수련은 외면하였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든 거침없이 걸어가던 걸음이 사람의 인적이 없는 곳에 도착해서야 멈추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수련이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 있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냈다. 버텨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게 먹었던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예전에는 이럴 때마다 의지할 가족이라도 있었지만, 이곳에서 수련은 철저히 혼자였다.
몸의 힘이 빠지는 듯 수련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족을 만나기는커녕 황제에게 몹쓸 짓만 당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황제가 그녀를 곁에 두는 이유는 발악할 대로 발악하다가 포기하는 모습을 보기 위함일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에게 여상환은 같은 하늘에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원수였으므로.
순간 그녀를 내려다보면 황제의 시선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흐읍.”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손으로 막으며 수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진정하려 했지만, 한번 떨리기 시작한 몸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처음부터 거래라는 것을 하면 안 되었다. 목숨을 잃더라도 도망쳤어야 했다.
가라앉은 눈에 짙은 어둠이 스며드는 순간, 민 부인의 모습이 눈을 스쳐 갔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몸은 여전히 떨고 있었지만, 입술을 굳게 문 수련의 눈은 공포에 질렸던 좀 전과는 달리 차분하였다.
“누구 마음대로.”
수련의 눈에 천천히 짙은 독기가 스며들었다.
황제의 앞에 몸을 숙이고, 말을 따르다 보면 기회가 올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황제에게 먼저 죽게 될 것이다.
“당신 마음대로 되지 않아.”
황제는 무섭다.
죽일 기세로 노려보는 눈부터, 무엇이든 꿰뚫어 볼 것 같은 날카로운 시선도 찍어 누르듯 압박하는 그의 살기도 소름 끼치게 두려웠다.
입술을 깨물며 주저앉아 있던 수련이 몸을 일으켰다. 힘이 빠진 몸이 잠시 비틀거렸지만 수련은 악착같이 몸을 일으켰다.
“죽일 생각이면 죽여 보라지.”
그에게 물린 목이 욱신욱신했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목의 상처가 느껴질수록 수련의 다짐 또한 단단해졌다.
“위랑! 위랑!”
주먹을 쥐고 서 있는 수련의 뒤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가에 남아 있는 눈물을 닦은 그녀가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몸을 돌렸다.
“한참을 찾았습니다. 위랑.”
“…….”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
“위랑. 어서 가셔야 합니다!”
예전 같았다면 서둘러 걸었을 수련이 그 자리에 있자 내관이 채근하였다. 하지만 수련의 눈은 내관 너머의 사내를 향하고 있었다. 수련의 시선에 몸을 돌린 내관이 황급히 몸을 숙였다.
“무, 문성공!”
“대화는 끝내셨습니까?”
태연히 몸을 숙이는 수련을 보며 부겸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비나 한비였다면 보란 듯이 내놓고 다녔을 황제의 잇자국을 저렇게 가리는 여인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지난밤에는 실례하였습니다. 소녀, 문성공을 뵌 적이 없는 터라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승정궁에서의 모습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부겸을 대하는 수련의 자세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반듯한 그녀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승정궁에서의 모습이 더 마음에 드는 그였다.
“문성공. 폐하께서 위랑을 데려오라 명하였습니다. 서둘러 가야 하니…….”
“뭐 조금 늦는다고 큰일이야 나겠는가?”
“무, 문성공.”
“위랑은 어떠한가? 그대가 괜찮다면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말이지.”
“문성공! 이러시면 아니 되십니다!”
“자객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았으니 잠깐 정도는 시간을 내 주는 것도 여인의 미덕이지 않겠나?”
“문성공!”
내관이 거듭 부겸을 말렸지만, 그는 수련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은 태화전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황궁의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것을 부겸에게 들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소녀에게 여인의 미덕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따르겠습니다. 앞장서시지요.”
“위랑!”
“폐하께는 내가 위랑을 잠시 데려갔다고 하거라.”
울상인 내관을 달랜 부겸이 수련을 지나 걸음을 옮겼다. 내관을 향해 고개를 숙인 수련이 조용히 내관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