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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책방
1화
1
알람이 울리지 않았지만 잠에서 깬다. 아마도 알람이 울릴 때까지는 이삼십 분의 시간이 남았을 것이다. 주변으로 팔을 뻗어 리모컨을 찾아 TV를 켰지만 아침 뉴스의 내용 따위는 중요치 않다. 고요한 아침의 정적을 깨는 가장 좋은 도구일 뿐, 세상일은 자신의 삶 따위와는 전혀 관련 없이 오늘도 잘 돌아가면 그뿐이라 생각하며 진희는 온몸이 솜에 젖은 것 같은 무거움을 이끌고 욕실로 들어가 양치를 하면서 생각했다.
‘사는 게 왜 이러냐.’
‘출근……하지 말까?’
세수하고 머리를 말리고 구겨 놓은 옷을 스팀다리미로 대충 펴 입는다. 든 것 없이 무겁기만 한 가방을 둘러메고 낡은 빌라 틈을 빠져나가 전장 같은 버스 정류장에 고개를 숙이고 선다. 어김없이 귀에 꽂은 이어폰이지만 실은 아무런 음악이 나오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고단한 삶, 그 틈에서 떨어져 어느 곳이 원래의 자리인지도 모른 채 숨죽이는 아침, 진희는 출근길에 낯선 지역 번호의 전화번호를 한참 쳐다봤다. 보나 마나 대출을 권유하거나 집 인터넷망을 교체하면 얼마를 준다거나 하는 광고 전화겠거니, 생각하고 무시하려 해도 계속 울리는 휴대폰에 뜨는 전화번호가 어쩐 일인지 자신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보세요?”
망설이다가 받은 전화였다.
― 혹시, 박진희 씨 되시나요?
“네, 그렇습니다만.”
― 저기, 최매자 할머님 손녀분 되시죠?
“네? 아, 네. 제 할머니예요.”
처음엔 최매자라는 이름이 어찌나 낯설던지, 진희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뻔했다. 전화 너머의 여자가 손녀라는 말을 하기 전에는.
― 여긴 서진동 주민 센터인데요. 최매자 할머님께서 돌아가셨어요. 연고가 없으신 줄 알았는데, 겨우 오늘에서야 연락드리네요.
“네? 돌아가셔요?”
서진동을 떠나온 열두 살의 그날부터 16년이나 지나서야 전해 받는 서진동 할머니의 소식이 부고라니. 진희는 할머니가 자신의 연락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 전화기 너머의 사람에게 물었다.
“그런데 제 연락처는 어떻게 아셨죠?”
― 아, 혹시 연고가 있을까 해서 할머님 댁에 들렀는데, 할머님 수첩에 손녀분 연락처가 메모되어 있더라구요.
“네, 알겠습니다. 알아들었어요. 전화해 주신 곳으로 연락을 다시 드리면 되죠?”
전화기 저편의 사람은 진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듯했지만, 서울로 들어서면서는 생각에서 지워 버린 할머니였고, 서진동이었다. 서로를 모른 체하기로 작정하고 살아간 날들이었고, 그랬기에 이제야 죽음으로 연락하는 할머니가 원망스럽다거나 안타깝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번잡스러운 상황에 대한 정리는 필요했다. 그리고 회사에 출근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회사에 도착한 진희는 심호흡을 하고 달력을 봤다. 오늘은 목요일, 오늘과 내일 휴가를 내고 내려가면 주말 동안엔 번잡한 일들이 모두 해결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할머니의 비보보다 더 끔찍한 것은 최 과장에게 휴가를 청하는 일이었다.
“과장님, 저 휴가를 좀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뭐? 휴가? 왜?”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하시네요.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
“할머니?”
삐죽 최 과장의 얼굴이 뒤틀렸다 펴지며 못마땅한 얼굴로 진희를 다시 쳐다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어머니도 아니고 할머닌데 꼭 오늘 가야 해? H호텔 부지 선정이 얼마 남지 않았어, 알잖아? 답사도 가야 하고, 선정에 관한 보고도 있는데, 자리를 비우면 다른 사람한테 민폐 아닌가? 보자, 내일 오전 근무 하고 내려가면 되겠네. 주말에 정리하고.”
최 과장의 말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회사는 H호텔 부지 선정이라는 대어를 놓고 안절부절 중이었다. 지방으로 지점을 건설하겠다는 H호텔이 원한 것은 바다와 산이 잘 섞여 있는 조용한 시골 마을, 그래야 이주와 관련한 보상비가 적게 들 것이란 계산이었다. 현재, 몇 개의 지역을 놓고 손익 계산을 하던 참이었다.
일이 많은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진희는 최 과장의 한 치의 예상도 빗나가지 않는 대응에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종이와 펜을 찾았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최 과장의 앞에 섰다.
“휴가원이야? 꼭 가야겠어?”
최 과장의 못마땅함이 가득한 물음에, 진희의 오른쪽 입꼬리가 삐죽 올라가며 비릿한 웃음을 담아 냉정하고 차갑게 말하기 시작했다.
“인간이면, 안타까움을 표하는 게 먼저죠. 최순찬 씨.”
“뭐?”
최 과장은 자신의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진희를 황당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맨날 나한테 하는 일 없이 월급이나 축낸다고 하면서 오늘은 내가 꼭 있어야 했던 모양이죠? 왜요? 하찮은 나에게 화풀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너 미친 거지?”
진희는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체념의 웃음을 잠시 얼굴에 떠올렸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작정한 듯 말을 내뱉었다.
“그래 미쳤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가겠다는데, 안됐다, 어쩌냐, 마음이 안 좋겠다, 그러는 게 인지상정이지요. 이건 휴가원이 아니라 사직서입니다. 자, 이제 사직서 드렸으니까 저와 상하 관계 아니죠? 그럼 한마디 하죠! 이 나쁜 새끼님. 잘 먹고 잘 사시지요. 아, 그리고 언젠가 당신 딸이 당신처럼 개떡 같은 상사를 만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진희는 과장의 책상 위에 사직서를 쾅 하고 올려놓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최 과장의 황당한 모습이 뒤쪽으로 느껴졌지만, 돌아서 보면 통쾌함이 금방 비굴함으로 변하게 될까 봐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서 물건을 정리하다 던지고는 가방만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마음속에 시원함과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심경이 얽히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뒤쪽으로 자신을 쫓아 나오는 동기와 이 대리의 모습이 보였지만 잡히지 않으려고 최대한 열심히 뛰어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러고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자신의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건 전혀 알지 못한 채.
통곡하는 진희의 뒤에 가만히 서 있던 남자 둘은 그저 그녀의 모습을 황당하게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
H호텔 개발관리팀 실장 한형우는 새로 개발되는 호텔 지점의 위치 선정을 위해 부지 선정 작업을 할 업체인 한진컨설턴트에 김 대리와 함께 들르는 길이었다. 몇 개로 추려진 지점 건설 지역을 오늘은 결정할 작정이었다.
머릿속으로 어디가 가장 좋을까 고민하던 그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8층에서 열렸다. 그러자 두 사람이 내리기도 전에 한 여자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급하게 들어오더니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사람은 울고 있는 여자를 지나치지도 그렇다고 왜 그러느냐 묻지도 못하고는 난처하게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김 대리가 여자에게 다가가려는 것을 저지한 것은 형우였다. 울고 있는 여자의 웅크린 뒷모습이 형우의 지나간 시간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착각, 언젠가 본 적 있는 저 작은 어깨.
‘언제 봤더라.’
한참을 우는 여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형우와 진희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문이 닫히고 1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여자는 서러운 울음을 떨치지 못하고는 일어나 회사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는 형우의 눈에는 설명할 수 없는 아련함이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되게 서글프게 우네요.”
“그러게. 8층이면 우리 호텔 부지 선정하는 데 아니야?”
“사실 그 회사 과장님이 좀 유명하거든요. 일은 잘하는데, 왜 있잖아요. 비겁한 사람.”
“비겁한 사람?”
“차장, 대리, 일반 사원에게 강하고 회장님, 사장님들에게는 약한 사람.”
“그래? 실장에게도 약했으면 좋겠네. 우리 다시 올라가자고. 도대체 저 여자를 울린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네.”
형우는 엘리베이터에서 등을 돌리고 뛰어나간 여자의 잔상을 떨쳐 내며 현실로 다시 들어서고 있었다.
*
서진동은 전형적인 바닷가 마을이다. 50세대도 안 되는 가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자리 잡은 모래사장 너머로 보였고, 바닷가 가까이에 몇 개의 상가가 계절과 상관없이 지나치는 관광객을 상대로 소일거리를 하고 있었다.
진희는 초등학생 때 서진동을 떠나온 날부터 한 번도 할머니의 마을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할머니에게는 자신의 아들도 그리고 며느리도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진희의 존재도 언제나 외면의 대상이었다.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려 다시 54번 시내버스를 타고 30분 이상 덜컹거리며 서진동으로 들어섰고, 거의 20년 만에 할머니의 [바닷가 책방] 앞에 섰다.
진희에게 남겨진 할머니의 유산인 오래된 2층 목조 건물, [바닷가 책방] 앞에 선 진희의 한쪽 손에는 허무하기만 한 액수의 퇴직금이 든 낡은 옷 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렇게 진희의 [바닷가 책방]에서의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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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이 울리지 않았지만 잠에서 깬다. 아마도 알람이 울릴 때까지는 이삼십 분의 시간이 남았을 것이다. 주변으로 팔을 뻗어 리모컨을 찾아 TV를 켰지만 아침 뉴스의 내용 따위는 중요치 않다. 고요한 아침의 정적을 깨는 가장 좋은 도구일 뿐, 세상일은 자신의 삶 따위와는 전혀 관련 없이 오늘도 잘 돌아가면 그뿐이라 생각하며 진희는 온몸이 솜에 젖은 것 같은 무거움을 이끌고 욕실로 들어가 양치를 하면서 생각했다.
‘사는 게 왜 이러냐.’
‘출근……하지 말까?’
세수하고 머리를 말리고 구겨 놓은 옷을 스팀다리미로 대충 펴 입는다. 든 것 없이 무겁기만 한 가방을 둘러메고 낡은 빌라 틈을 빠져나가 전장 같은 버스 정류장에 고개를 숙이고 선다. 어김없이 귀에 꽂은 이어폰이지만 실은 아무런 음악이 나오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고단한 삶, 그 틈에서 떨어져 어느 곳이 원래의 자리인지도 모른 채 숨죽이는 아침, 진희는 출근길에 낯선 지역 번호의 전화번호를 한참 쳐다봤다. 보나 마나 대출을 권유하거나 집 인터넷망을 교체하면 얼마를 준다거나 하는 광고 전화겠거니, 생각하고 무시하려 해도 계속 울리는 휴대폰에 뜨는 전화번호가 어쩐 일인지 자신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보세요?”
망설이다가 받은 전화였다.
― 혹시, 박진희 씨 되시나요?
“네, 그렇습니다만.”
― 저기, 최매자 할머님 손녀분 되시죠?
“네? 아, 네. 제 할머니예요.”
처음엔 최매자라는 이름이 어찌나 낯설던지, 진희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뻔했다. 전화 너머의 여자가 손녀라는 말을 하기 전에는.
― 여긴 서진동 주민 센터인데요. 최매자 할머님께서 돌아가셨어요. 연고가 없으신 줄 알았는데, 겨우 오늘에서야 연락드리네요.
“네? 돌아가셔요?”
서진동을 떠나온 열두 살의 그날부터 16년이나 지나서야 전해 받는 서진동 할머니의 소식이 부고라니. 진희는 할머니가 자신의 연락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 전화기 너머의 사람에게 물었다.
“그런데 제 연락처는 어떻게 아셨죠?”
― 아, 혹시 연고가 있을까 해서 할머님 댁에 들렀는데, 할머님 수첩에 손녀분 연락처가 메모되어 있더라구요.
“네, 알겠습니다. 알아들었어요. 전화해 주신 곳으로 연락을 다시 드리면 되죠?”
전화기 저편의 사람은 진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듯했지만, 서울로 들어서면서는 생각에서 지워 버린 할머니였고, 서진동이었다. 서로를 모른 체하기로 작정하고 살아간 날들이었고, 그랬기에 이제야 죽음으로 연락하는 할머니가 원망스럽다거나 안타깝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번잡스러운 상황에 대한 정리는 필요했다. 그리고 회사에 출근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회사에 도착한 진희는 심호흡을 하고 달력을 봤다. 오늘은 목요일, 오늘과 내일 휴가를 내고 내려가면 주말 동안엔 번잡한 일들이 모두 해결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할머니의 비보보다 더 끔찍한 것은 최 과장에게 휴가를 청하는 일이었다.
“과장님, 저 휴가를 좀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뭐? 휴가? 왜?”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하시네요.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
“할머니?”
삐죽 최 과장의 얼굴이 뒤틀렸다 펴지며 못마땅한 얼굴로 진희를 다시 쳐다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어머니도 아니고 할머닌데 꼭 오늘 가야 해? H호텔 부지 선정이 얼마 남지 않았어, 알잖아? 답사도 가야 하고, 선정에 관한 보고도 있는데, 자리를 비우면 다른 사람한테 민폐 아닌가? 보자, 내일 오전 근무 하고 내려가면 되겠네. 주말에 정리하고.”
최 과장의 말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회사는 H호텔 부지 선정이라는 대어를 놓고 안절부절 중이었다. 지방으로 지점을 건설하겠다는 H호텔이 원한 것은 바다와 산이 잘 섞여 있는 조용한 시골 마을, 그래야 이주와 관련한 보상비가 적게 들 것이란 계산이었다. 현재, 몇 개의 지역을 놓고 손익 계산을 하던 참이었다.
일이 많은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진희는 최 과장의 한 치의 예상도 빗나가지 않는 대응에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종이와 펜을 찾았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최 과장의 앞에 섰다.
“휴가원이야? 꼭 가야겠어?”
최 과장의 못마땅함이 가득한 물음에, 진희의 오른쪽 입꼬리가 삐죽 올라가며 비릿한 웃음을 담아 냉정하고 차갑게 말하기 시작했다.
“인간이면, 안타까움을 표하는 게 먼저죠. 최순찬 씨.”
“뭐?”
최 과장은 자신의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진희를 황당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맨날 나한테 하는 일 없이 월급이나 축낸다고 하면서 오늘은 내가 꼭 있어야 했던 모양이죠? 왜요? 하찮은 나에게 화풀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너 미친 거지?”
진희는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체념의 웃음을 잠시 얼굴에 떠올렸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작정한 듯 말을 내뱉었다.
“그래 미쳤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가겠다는데, 안됐다, 어쩌냐, 마음이 안 좋겠다, 그러는 게 인지상정이지요. 이건 휴가원이 아니라 사직서입니다. 자, 이제 사직서 드렸으니까 저와 상하 관계 아니죠? 그럼 한마디 하죠! 이 나쁜 새끼님. 잘 먹고 잘 사시지요. 아, 그리고 언젠가 당신 딸이 당신처럼 개떡 같은 상사를 만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진희는 과장의 책상 위에 사직서를 쾅 하고 올려놓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최 과장의 황당한 모습이 뒤쪽으로 느껴졌지만, 돌아서 보면 통쾌함이 금방 비굴함으로 변하게 될까 봐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서 물건을 정리하다 던지고는 가방만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마음속에 시원함과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심경이 얽히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뒤쪽으로 자신을 쫓아 나오는 동기와 이 대리의 모습이 보였지만 잡히지 않으려고 최대한 열심히 뛰어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러고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자신의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건 전혀 알지 못한 채.
통곡하는 진희의 뒤에 가만히 서 있던 남자 둘은 그저 그녀의 모습을 황당하게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H호텔 개발관리팀 실장 한형우는 새로 개발되는 호텔 지점의 위치 선정을 위해 부지 선정 작업을 할 업체인 한진컨설턴트에 김 대리와 함께 들르는 길이었다. 몇 개로 추려진 지점 건설 지역을 오늘은 결정할 작정이었다.
머릿속으로 어디가 가장 좋을까 고민하던 그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8층에서 열렸다. 그러자 두 사람이 내리기도 전에 한 여자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급하게 들어오더니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사람은 울고 있는 여자를 지나치지도 그렇다고 왜 그러느냐 묻지도 못하고는 난처하게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김 대리가 여자에게 다가가려는 것을 저지한 것은 형우였다. 울고 있는 여자의 웅크린 뒷모습이 형우의 지나간 시간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착각, 언젠가 본 적 있는 저 작은 어깨.
‘언제 봤더라.’
한참을 우는 여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형우와 진희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문이 닫히고 1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여자는 서러운 울음을 떨치지 못하고는 일어나 회사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는 형우의 눈에는 설명할 수 없는 아련함이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되게 서글프게 우네요.”
“그러게. 8층이면 우리 호텔 부지 선정하는 데 아니야?”
“사실 그 회사 과장님이 좀 유명하거든요. 일은 잘하는데, 왜 있잖아요. 비겁한 사람.”
“비겁한 사람?”
“차장, 대리, 일반 사원에게 강하고 회장님, 사장님들에게는 약한 사람.”
“그래? 실장에게도 약했으면 좋겠네. 우리 다시 올라가자고. 도대체 저 여자를 울린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네.”
형우는 엘리베이터에서 등을 돌리고 뛰어나간 여자의 잔상을 떨쳐 내며 현실로 다시 들어서고 있었다.
서진동은 전형적인 바닷가 마을이다. 50세대도 안 되는 가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자리 잡은 모래사장 너머로 보였고, 바닷가 가까이에 몇 개의 상가가 계절과 상관없이 지나치는 관광객을 상대로 소일거리를 하고 있었다.
진희는 초등학생 때 서진동을 떠나온 날부터 한 번도 할머니의 마을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할머니에게는 자신의 아들도 그리고 며느리도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진희의 존재도 언제나 외면의 대상이었다.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려 다시 54번 시내버스를 타고 30분 이상 덜컹거리며 서진동으로 들어섰고, 거의 20년 만에 할머니의 [바닷가 책방] 앞에 섰다.
진희에게 남겨진 할머니의 유산인 오래된 2층 목조 건물, [바닷가 책방] 앞에 선 진희의 한쪽 손에는 허무하기만 한 액수의 퇴직금이 든 낡은 옷 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렇게 진희의 [바닷가 책방]에서의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